세도정치와 그에 따른 민중에 반란이번 한국사 수업에 있어 조선 역사에 관한 많은 책을 가지고 읽고 공부해 보았다.좀처럼 읽기 싫었던 부분까지 수업에서 들었던 것을 생각해가면서 공부를 해보았는데그중 조선시대 정치와 세도 정치란 대목에서 나에 눈을 끌었다.조선시대의 정치에 대해서 들으면서 붕당에 대해서는 비판과 함께 긍정적인 시각도 있었던 반면, 세도정치는 조선시대 정치의 역사흐름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많은 잘못과 부정부패가 있었으리라.(현대 정치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과제를 하면서 난 세도정치가 민중들을 하나로 단결되게 만들고 그들의 의식을 성장시켜 주었다고 조금이나마 긍정적으로 얘기해본다. 물론, 그 당시 민중들의 의식을 성장시켜 준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다. 하지만 위에서의 잘못을 아래에서 타도하고자한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아니겠는가?이 글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반적인 흐름 및 세도정치가 일어나게 된 배경과 세도정치의 주도세력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그리고 대원군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민중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자하며, 더불어 근세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에서의 조선사회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보려고 한다.조선시대 후기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분에 걸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는 농업생산력이 급증하여 사회변동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상공업에 있어서도 이미 상업자본의 성장이 나타나고 있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부의 축적에 다른 신분의 상승이 일반화되어 양반사회의 신분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천민·노비의 해방이 진전되어 갔다. 또한 사상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사회변동에 직면하여 유교적인 양반관료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실학이 발생하여 사회개혁과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하였고, 그리고 새로이 천주교가 전래되어 전통사회의 질서와 가치규범에 도전하였으며 민족종교로서 동학이 일어나 농민층을 중심으로 현실개혁과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이러한 움직임에 비해 정치면에 있어서는 각 올바르게 다스리는 길을 뜻한다. 때문에 위대한 학자들은 세도를 스스로 감당하여 한 시대의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고자 했다. 그러나 세도정치(勢道政治)라고 쓸 때는 신하가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정사를 좌우하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정치형태는 정조(1766~1800)연간에 홍국영(洪國榮,1748~1781)이 전권을 잡으면서 등장했다. 일단 왕명으로 세도를 맡게 되면 그 사람이 비록 벼슬이나 지위가 낮더라도 모든 신하들이 세도가의 명령을 따랐으며, 국가의 모든 업무도 세도가와 상의한 후 임금께 아뢰거나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권력이 세도가에 집중되었고 삼정승(영의정과 좌·우의정)과 육판서(이조·예조·병조·형조·호조·공조의 수장)는 명맥만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세도의 시작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홍국영의 보호를 받아 여러 번의 위기를 모면하여 집권하게 되자 홍국영을 총애하여 권력을 주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그러나 개인이 아닌 집안이 세도를 행사한 것은 순조 대부터였다.영조의 계비이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순왕후는 11세인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들어서게 되며 그 후 김조순 등과 함께 정순왕후는 세도 정치를 펴나간다.1804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본격적인 척족세도를 시작하게 된다. 정순왕후가 죽자 정순왕후 편에서 세도를 휘둘렀던 벽파 일당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힘을 쓰게 된다.안동 김씨 일가 세도정치의 핵심인물들은 김조순,·김좌근,·김문근,·김병기이며,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60여 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소개한 대로 그 조상들의 덕도 있었지만 조선조에서 가장 정승을 많이 배출한 동래 정씨와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인 세력을 결집한 덕이었다고 한다그리고 세도정치가 행해진 이 시기에는 뇌물거래가 공공연히 이루어졌는데, 지방수령들이 뇌물로 벼슬을 얻고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부임지의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과다 징수했다. 그리고 나주 게 권력이 넘어가 세도가도 안동 김씨에게서 흥선대원군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안동 김씨들은 여전히 정권의 핵심에 있었다고 한다.다시 정리해서 간단히 말하자면 세도 정치는 누구에 딸이 어느 시대에 왕에게 시집을 가서그 왕에 아들을 낳아 주무로써 훗날 세자가 정치에 참여에 관여하지 못할 시기이며 여건 일 때는 그 뒤에 있는 왕후가 대신해 수렵청정을 한다.그리고 그 왕후에 친척 그러니까 외척들은 그 왕후의 권력에 그림자 뒤에서 갖은 권력에 맛을 느끼며 권력 남용과 부패 나라에 아닐한 관리와 자기 배속만을 채우려는 해태를 취하는 것이 세도정치이며 이에 힘을 가진 자들이 지금은 안동 김씨인 것이다.안동 김씨 이후 왕권과 정치에 흐름이 다시 바뀌게 되어 이번엔 풍양 조씨가 세도정치를 하게 되는 시기가 온다.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는 1819년(순조 19)에 조만영의 딸이 효명세자의 빈(훗날 조대비)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조만영은 1827년 이조판서 김교근이 병으로 눕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권을 행사하였다. 이에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할 목적으로 자신의 건강을 핑계삼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조만영은 어영대장을 겸직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하여 풍양 조씨 세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허나 1830년(순조 30)에 효명 세자가 갑자기 죽자 풍양 조씨 정치세력은 정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 뒤이은 순조로부터 헌종의 보필을 부탁 받은 조인영은 1839년에 이조판서에 올라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조카 조병현이 형조판서가 되어 형사·재판권을 장악함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다. 이후 조인영은 세 차례나 영의정이 되면서 풍양 조씨 세도를 구축하였고, 1849년 헌종이 죽은 후에도 정치적으로 안동 김씨에 뒤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순조에 들어 세도 정치의 권력에 싸움은 이두 집안에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순조·헌종·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 하에서 왕정과 왕권은 명목에 지나지 않았다. 하물며 종실의 처지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어서 이들은 안동 김씨의의 사유물이 되었고 유교적 양반관료정치는 파탄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일당전제가 들어서면서 이미 그 폐단이 문제되었다. 과거제는 이에 이르러 더욱 문란해졌다. 당시 신분제의 변동 속에서 과거응시자의 대한 신분적 제약이 무너져 있었는데 이제 세도 정치 하에서는 급제자의 남발, 뇌물의 성행, 연줄의 의한 급제 등 온갖 비리가 성행하였다. 정부에서는 몰락 양반층이나 지식층들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규정을 무시하고 수시로 과거를 시행하였지만 유능하고 뜻있는 학자들은 이를 외면하였다. 과거제의 문란가 함께 관직의 매매도 횡행하였는데, 이러한 매관매직을 통해서 관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자연히 온갖 수단으로 축재에 열을 올렸으므로 일반 농민들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부농이나 상인·수공업자들도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정치·사회의 난맥상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다만,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수령이나 서리들을 부정·탐학을 적발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인 체제적 모순에서 비롯된 부조리가 이러한 일시적인 조치로 척결될 수는 없었다. 당시의 지배층은 일시적인 미봉책에만 급급할 뿐 어떠한 근본적인 대책도 수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의 대대적인 폭력항쟁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세도 정권에 의한 과거 제도와 국가 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 등에 대항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 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들의 물력과 조직력 등을 결합하여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 홍경래의 난이다.난의 주동자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 화장골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화에 사는 외삼촌에게서 글을 배운 후 스스로 공부하여 평안도 지방에서 실시한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 온 서북인 등용 배제 정책 때문에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세도정치로 인한 가혹한 세금징수 때문에 평안도 지역은 민심이 흉흉했다.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을 뜬 그는 평안도 가산에서 서자 출신 지식인 우군칙과 자주 접촉하였다. 상인들은 평소에 중앙 정부에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들은 또 가산 다복동의 부호 이희저를 포섭하여 봉기를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풍수적으로도 천혜의 요새인 그곳을 근거지로 삼는다. 또 봉기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어 유민층을 흡수하여 군대로 삼는다. 이 밖에도 당시 세도 정권에 대하여 불만 이 깊었던 재상 출신의 김재찬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 및 지방 관속들 그리고 유랑 지식인과 유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여 봉기 세력으로 조직했다. 홍경래는 당초 1812년(순조 12)에 거사할 계획이었으나 정보가 새나가 거사를 앞당겨 1811년 12월에 봉기하여 관서 일대를 무난히 점령했다. 이때 봉기하면서 이들은 정부에 전면전을 선포하였다.그들이 출병에 앞서 내건 격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첫째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둘째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타도,셋째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참 임금으로 세우겠다.였다...결과를 말하면 이러한 격문을 가지고 출병을 했지만....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표방함으로써 조 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난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면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했던 소농, 빈민층들이 철종조에 일어나는 임술민란에서는 적극 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철종 말년이 되자 권력은 안동 김씨 세도가 김좌근에게 집중되었으나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60여 년이 되어 가면서 말기 현상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뇌물이나 권력자의 도움으로 각 도와 고을의 관리가 된 자들은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것들을 짜내어 다시 세도가에게 바치거나 자신들의 재산으로 착복하였다. 오랫동안 민중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여겨왔으나 이 시대에는 수탈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전국의 민중들은 서서히 각
역사 속의 대구. 대구 사람들...15. 대구읍성, 왜 철거되었나?읍성이란 지방 주요 지역에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으로써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이다.이러한 읍서은 대구에도 있었으며 이러한 대구 읍성 풍경은 낯선 외국인 선교사 눈으로 보아도 정말이지 아름다운 곳이였다고 한다.허나 이러한 읍성에 생명은 1906년 일본인들의 성곽철거요구로 파괴되고 그후로 흔적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1905년 대구 전역에 상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이 그들의 욕망을 가로막고 있는 대구 읍성을 허물기 시작한다.성을 허무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를 파괴하고 거기다 사회적 경제권을 빼앗고자 하는 그런 이유에서 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일제 경제적 침략에 있어 좀더 이익과 자리(위치)를 추구하려는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여기서 대구에 군수였던 박중양에 큰 역할에 우리민족에 문화적 정체성은 무너지고 그후 일본상인들이 들어와서 경제활동을 시작하여시장 자본을 장악하는 발판을 다지게 된다.(조선인이면서 조선에 피와 살을 도려내는 조선인 박중양)박중양 그는 오늘날 친일파였던 사람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경부선 개통 이후 급속히 늘어난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 대립과 충돌이 빈번하자 박중양이 조정에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허나 그는 같은 조선인으로써 조선에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편에서 서서 활동을 했으며 그후 일본인에 신뢰를 크게 얻게 된다.그후 히토부미의 추천으로 1906년 7월에 대구군수에 자리로 오르게 된다.일본인은 박중양에 부임으로 경제적 힘인 상권에 장악을 위한 계획과 함께 읍성 철거에 한층 더 힘을 가할 수 있었다.다시 말해서 일본은 한민족의 정체성 박탈과 경제권을 얻기 위해 그리고 또 한가지 식민화를 굳히기 위해 대구로 모여 발판을 다져나가려 했으며 그 시작이 경제적 침탈과 함께 방해물이자 전장에 방어 막이자 민(民)에 보호막이며 군사 행정 기능에 역할인 읍성을 허무는 것으로 일제는 대구로 들어 중부경찰서 조흥은행 서문로 지점을 잇는 도로와 종로 가구골목, 만경관 옛 입구 대안성당 뒷길로 연결되는 도로가 바로 그것이다.일본인들은 성벽을 파괴한 뒤에는 객사를 파괴하려하여 대구에서는 반대 운동이 일어난다.1908년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거류민단에게 객사를 무상으로 넘겨주었다.헌데 일본은 이 객사를 파괴하고 새로운 시가지를 만들려고 하였다이에 대구사람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허나 일본은 무력으로 강제 해산과 퇴거시키면서 파괴를 강행하였다. 객사 철거 전에는 객사 앞에 약령시가 개설되었는데 해마다 음력 2월이면 전국 상인들과 중국상인들까지 왔다고 한다. 많은 인파가 몰리니 장사며 먹거리 그리고 약재뿐만 아니라 여각, 주막은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상점들이 이 시기 때에 많은 호황을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객사를 철거하려고 하니 반대운동은 일어났고, 끝내 일본은 강압적으로 철거를 시작하였고 도로를 내어 일본인을 위한 새로운 시가지로 바뀌게 되었다.그후 대구는 철도와 이를 연계하는 국도를 건설하여 대구는 전국주요 도시로의 이동이 쉬워졌고 넓은 배후 지역에 중심지도시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와 함께 일본인 수는 급격히 증가했으며 대구에 환경도 일본인에 맞추어 바뀌어갔으며 성안에 살던 조선인은 예전 성밖으로 일본인은 성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인에 계략에 밀려 집을 빼앗긴 샘이다. 그 이후 대구는 완전히 옛 모습은 잃고 상권과 전통 도시로서의 모습 그리고 문화적, 역사적 자취도 함께 일본인들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어쩜 조선에 문화와 역사..그리고 자존심이 일본인이 아닌 한 명에 조선인에 의해 일본의 발에 밟혀지게 되었고 잃어버림과 동시 무너지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21. 닫힌 마음 에서 다시 열린 마음 으로열린 도시 열린 마음 1960년대 초까지의 대구에 이미지였다.항상 새로운 것에 만감하고 진취적인 기상으로 한국 현대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대구가 불과 40년만에 보수적인 도시로 변모하게된다.그 이유를 보기 위는 5.16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에게 높은 지지를 보인 급격한 의식변화는 지역 감정 을 지적하지 않고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그리고 제5대 선거에서 전남 두 후보의 표 차이는 3만여 표에 불과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경상도에서는 지역감정이 크게 작용했으며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후 지역감정이 더 노골적으로 선거에 이용당하는데 그것이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선거였다. 박정희의 장기 집권과 부정 부패 그리고 비리로 인한 경제적 모순 또 한가지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했기에 박정희는 대구에 지지를 얻음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러한 상황으로 지지를 잃게 된다. 허나 이러한 위기에 돌파할 히든카드로 꺼낸 것이 지역감정이었다. 영남지역이 선거인수가 전국선거인수로 봤을 때 과반수인 것을 감안해보면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가 있었다.결국 박정희의 지역감정에 시나리오는 성공했으며 이렇게 박정희가 뿌린 지역감정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1987년 제 13대 대통령선거였다. 이번 선거는 지역감정에 climax 였다.이렇게 역대 대통령선거를 통해 대구시민들이 60년대 초반 까진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고에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고로 바뀌어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지역감정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결과는 잔인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 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반공과 경제개발이었다.반공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해방 후 활동으로 형을 선고받은 이력을 알고 있던 미국을 의식해서이고 경제 발전은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서이다. 이유는 해방이 되어도 굶어 죽는 사림이 속출하고 산업시설은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된 뒤라 매우 어려운 시국이었다.취약한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제난에 해결이었고 수도권과 영남 지역 중심으로 진행되었다.산업화의 과정에서 공업단지의 선정은 지역 격차의 발생 원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지역별 분산이나 균형발전문제를 고려 의식은 보수화되고, 폐쇄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구시민이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시민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것 때문에 보수적인 도시로 바뀐 것이다.현실을 변화하기 위해서는 대구는 내부의 변화라는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정리를 하면서........대구성에 둘레는 2124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수치로 따지면 2.7km이다.그리고 높이는 3m80cm이고 폭은 8m90cm이다.성을 쌓아 올리는 재료와 인력은 거이 현지에서 조달을 했고 단시일 내에 짖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려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을 단 반년사이에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것은 프린트 물에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저 수업 시간에 영상 물에서 들은 것이라 명확히 적지는 못하지만 제가하고픈 말은 이러한 지역에 역사와 문화 더 크게 보아 조선에 역사이자 문화를 단 한사람에 힘으로 무참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에 허무 할뿐이란 것이다.부끄러운 일이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대구에 성벽이 존재했었고 그 안에 경제가 있었으며 일본이 탐내하는 정도로 대구가 큰 자리일거란 것은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리 길지는 않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15장에서의 내용에서 성벽에 파괴는 단지 성벽에 파괴뿐만 아니라 한민족에 문화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거와 같으며 그리고 그 지역에 시민을 우렁하는거와 같다라고 생각한다.일본은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제일먼저 한 것이 조선에 정체성을 파괴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배웠다. 헌데 이런 일본인 보다 먼저 앞장서서 같은 한민족에 뼈와 살을 갈아먹는 이가 있으니 이가 친일파 박중양이다.위에서도 말을 한바있지만 조선에 문화와 역사..그리고 자존심이 일본인이 아닌 한 명에 조선인에 의해 점차 일본의 발에 밟혀지게 되었고 잃어버림과 동시 무너지지 않았는가 생각해본다. 일본이 자기에 경제적 이익과 식민지화를 위해서 자본주의와 철도를 이용해서 밀고 들어와 식민지화한다고 한들 나라에 힘이 약하니 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에 정권과 같다.결과를 위해선 어떠한 과정이나 계획은 중요치 아니하고 오로지 결과를 위해서 무엇이든 하는 것은 지금이나 과거나 다름이 없다.대구는 옛날에는 열린 생각과 진보적인, 진취적인 생각에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많이 보수적이고 닫힌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지역감정은 대구에서 먼저 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대구 시민들이 스스로 가 의식을 개혁을 하고 좀더 나은 생각과 진취적인 생각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앞으로의 지역감정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안을까 생각한다.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면정부 차원이나 민간 차원의 교류 프로그램이 좀더 실질적이었으면 한다.예전에 대구의 예술단이 광주에 가서 공연을 하기로 했었는데 형식적으로 4년간 하다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회적인 이벤트 성 교류프로그램으로 골 깊은 지역감정을 없애기란 힘들다. 좀더 실질적이고, 활용도 높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원활한 교류를 유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정부차원의 교류나 지방정부차원의 교류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의 아픔을 이해함으로써 마음으로의 이해, 마음으로의 화해를 통한 민간 교류 역시 중요하다 할 것이다.◎ (참고자료) 대구에 역사 고대에서~현대까지고대(古代) 우리 고장 대구는 금호강과 그 지류인 신천으로 둘러싸인 기름진 들판을 중심으로 일찍부터 삶이 살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많이 모여 살면서 이 고장의 도특한 문화를 꽃피웠다대구를 비롯한 인근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비롯 간돌검(磨製石劍), 붉은간토기(紅陶) 등이 출토되어, 대구지역에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이때부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대구의 청동기 유물은 국보 137호인 비산동의 청동검을 비롯하여, 신천동과 만촌동, 서변동 등 대구지역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타지역의 청동기 유물보다 우수하여 청동기 시대 대구사회의 순준이 다른 지방보다 앞서.
우리 나라의 성문화한국의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지탱해 온 사상은 유교이다.유교에서의 성은 오직 생명출산을 위한 행위이자 혈통의 순수성과 가계계승의 목적에 의미를 두고 있다. 이러한 출산위주의 성 의식은 조선시대를 통해 성을 은밀한 영역으로 인식하게 하였으며, 현대 산업사회인 오늘날까지도 성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보다 명확히 말하면 지금에 우리 사회의 성문화는 조선시대에 확립된 가부장적 성문화와 성의 개방과 자유화라는 서구의 성문화, 그리고 남성 중심의 상품화된 성문화가 혼합되어 혼란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유교적 성문화는 성에 대한 금기와 이중적 성 윤리라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이중적 성 윤리가 강화된 것은 조선시대에 의해 만들어진 정절이데올로기에 의해서이다.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특히 양반계급은 혈통의 순수성과 가문의 도덕적 우월성을 절대적 요건으로 여겼다. 따라서 사대부집 여성은 남편을 사별하면 절대적으로 재가를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특히 열녀가 몰락한 양반에게서 나오면 가문 재기의 기회를 주었고, 양민에게서 나오면 호역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천민에게서 나오면 면천하여 신분상승의 기회를 주었다. 이를 통해 정절이데올로기는 사대부집 여성뿐만 아니라 일반 모든 여성의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정절이데올로기는 조선조 여성들의 교육서인 등을 통해 철저하게 내면화되었으며, 우리 사회의 순결이데올로기는 바로 이 정절이데올로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유교적 성문화가 지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성을 억제와 통제의 대항으로 인식하고 겉으로 드러내어 말해서는 안 되는 은밀하고 부끄러운 것, 심지어는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성을 금기 시하는 분위기였음에도 남성에게는 성적 쾌락의 추구는 물론 성적 방종까지도 허용하는 이중적 성 윤리관을 적용하였다.한편 서구 문화가 우리 사회에 들어와 사회 각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침으로써, 서구의 성문화도 역시 우리의 고유한 성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성 개방과 자유화'라는 서양의 성 풍속이 성을 금기시하는 우리의 전통적 성문화와 섞여 있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올바른 성문화와 성 윤리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아직도 부모와 어른들은 자녀들이 성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체 하는 것이 당연하거나 바람직하다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화 현장에서는 연애나 성 관계를 주제로 한 만화, 영화,비디오 물, 잡지, 소설, 컴퓨터 통신, TV 프로그램, 각종 광고 매체 등을 청소년들이 손쉽게 접하고 있다.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성적 호기심이나 관심이 부모 또는 어른들로부터 외면 당하게 되면, 청소년들은어른들 앞에서는 성에 관하여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여 칭찬을 받지만, 어른들의 시선을 피해 나름대로의 성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이것이 성적 방종으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크다.한편, 우리 사회에는 남성 중심의 상업적 성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상업적 성문화는 여성을 성적 욕구를 채우는 대상으로 여기게 하며, 이러한 환경에서 남성들은 돈으로 성을 사거나 파는 일, 성폭행 등을 심각한 반(反)사회적 행동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성의 상품화는 끊임없이 성 충동을 자극하고 성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낳게 하며, 성적 쾌락 추구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가 만연하게 된 기반은 향락 및 퇴폐산업의 번창을 들 수 있다.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요가 있으면 돈이 벌리고 돈이 생기면 공급이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향락산업에 대한 수요를 확대시킨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관광객에 대한 접대문화, 투기, 사회윤리의 문란 지나친 과소비와 사치풍조를 지적할 수 있다.향락 및 퇴폐산업은 도덕적 기풍이 무너진 문란한 성도덕을 만들어 내고, 일시적이고 육체적인 향락만을 추구하는 성문화를 형성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는 성도덕의 타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또한 퇴폐 산업을 통해 유통되는 음란물에 의한 영향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음란물은 성적으로 난폭한 표현물, 퇴폐적 성행위, 변태적인 성 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게 된다. 이것은 시각, 청각, 지각을 통해 성적 자극을 강하게 줌으로써 성적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 이와 같은 퇴폐산업을 통하여 유통되는 음란물은 공간을 초월하여 사이버 공간과 그밖에 장소와 시간에 제약을 전혀 받지 않은 채 은밀하게 무차별적으로 전달되는 데에 그 문제의 심각성을 들 수 있다.이러한 문제로 청소년 성범죄가 늘어나고 있으며 그밖에 범죄가 날로 늘고있는데 매춘과 강간 성폭력이 발생하는 것은 성에대한 인식이 화려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가려 올바르게 성숙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사회에 만냥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자본주의의 한 단면으로 어두운 그늘이기도하며 이러한 그늘은 자본주의에서는 감추려하고 이를 이용해 더 많은 자본을 벌려하고 있다.이러한 성이 돈으로서의 역할에 한 몫을 하기에 요즘 많이 나타나는 것이 채팅으로 만나 성 관계까지 가는 일명 원조교제가 유행처럼 번지며 이러한 원조교제 대상은 돈으로 성을 사려는 어른들과 돈이 필요로 해서 성을 상품화해 성을 아무런 생각 없이 파는 나이 어린 청소년이란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이런 것 이 현 사회에 성에 문화이며 서구에 것도 우리에 유교적 사상에 근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문화도 아닌 어느 누구도 정의를 내리기 모호한 그런 성에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이것은 자본주의가 낳은 지금 현재의 성에 문제점이며 이러한 문제점은 개개인의 의식변화가 있어야겠지만 자본주의 사회 역시 많은 변화가 더욱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그리고 이러한 문제점과 함께 늘어나고 있는 것이 낙태이다.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나라에서는 순결이란 글자를 찾아보기 힘들어 졌다.이러한 것은 성에 대한 의식이 많이 바뀌었으며 이제 남성은 물론 여성 역시 과거에 보수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 성적인 관계에서 쾌락과 정당한 관계를 가지 진다고 본다. 허나 이러한 생각과 문화에 차이란 변화를 가져왔지만 문제점은 잘못된 성 관계와 성에대한 중요성과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퇴폐산업과 향락에 물들어 자기만에 가치관을 잊어버림과 함께 책임감을 상실하고 물란 한 성생활을 가지는 것이 현 사회이다. 그리고 성에 쾌락만을 즐기기 위한 관계에서 비롯된 태아를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수술로 제거하는 형태가 지금 사회에 한 문제로 자리잡고 있다.또 하나에 태아와 관련된 성에 잘못된 것이 있는데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성차별 적 낙태이다.우리 나라에서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태어날 때 약 2.5명의 역시 너무나도 소중한 생명들은 낙태로 죽어간다. 한 해에 약 60만 명의 아기가 태어나고, 반면에 약 150만 명의 뱃속 태아는 낙태로 죽는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좀 더 현실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환산해 보면, 하루에 4000명, 20초당 1명의 태아가 무참히, 이유도 모른 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더 놀랄 만한 것은 이 수치는 세계 2위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 수치는 비록 '남아 선호 사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소 이해가 가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도 이제 더 이상 '성' 타락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 18세 이상의 전체성인 여성 중 38.8%는 낙태를 경험했다고 한다. 또 전체 낙태 건수 중 30%는 미혼여성이 차지하고 있고, 이들 중 85%가 10대라고 한다.) 통계 수치 - 인터넷의「낙태를 반대하는 모임」사이트에서.'성' 파괴의 후유증은 이처럼 엄청난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는 것이다. 10대 청소년들을 포함한 미혼자들의 무분별한 성관계, 강간·성폭행 등의 성범죄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성' 파괴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러한 '성' 파괴 현상은 최근 급증하고 있고, 따라서 낙태도 자연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성에 대한 욕심이 모여, 사회 전체가 성도덕 파괴라는 혼란에 빠지고, 또 그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죽는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다면, 이보다 더 심한 성 파괴가 있을까?
-조선왕조 정치 시스템과 이데올로기-조선왕조 정치시스템은 중앙집권화 시스템으로서 수직적 수평적 구조로 되어있다.조선 정치의 정치 시스템은 3가지 중심 pole (축)으로 이루어진다첫째가 왕이며 둘째가 사대부-literati 마지막으로 성리학의 의미 체계이다여기서 성리학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며 사회적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그리고 행위에 지침이기도 하였다.성리학은 송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성립된 유학사상체계이다. 5대 10국을 거치며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 사대부들은 이전의 유학에 결여되었던 우주론·존재론·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공자·맹자 이래 유학을 재해석하였다. 북송 이래의 새로운 유학사상의 조류는 남송대 주자에 의해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은 대표적인 학자와 경향에 따라 또는 시대사상의 명칭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 성리학이란 용어는 인간의 본성(本性)을 이(理)로 보는 학문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리학은 이가 핵심개념이 되므로 이학(理學)이라고도 한다. 또 이전의 유학과는 다른 새로운 유학이란 의미에서 신 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하며, 송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여 송학(宋學)이라고도 한다. 또 주자(朱熹, 1130 - 1200)가 집대성하였다고 하여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하고, 정이(程 , 1033 - 1107)와 주자를 같이 불러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의 수용주체는 새 로운 정치세력인 고려후기 '사대부'이며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이들이 추진한 개혁과 새 왕조건립에 따른 이념적 기반 및 고려 불교에 대한 사상적 극복이다. 이들 사대부들은 권문세가에 의한 고려사회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의 복속국 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3 세기말부터 14세기 전반에 고려에 수용된 성리학은 14세기 후반 에 이르러 사회개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극대화된 사회 모순과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반영하는 방향에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이러한 이념을 제공한 사상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조선왕조가 시작 되면서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유교정치를 추구하였다.사후 논리 부적으로 사라진 유교와 달리 성리학은 유교와 도교를 배척하면서도 불교와 도교에서의 사후논리를 빌려 완성한 종교이기도 하다.조선에 중앙 집권화에서의 의미 체계에서 성리학에 의미는 크다고 볼 수 있다.성리학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 정치에서는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다. 왕도 정치는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서 사회질서을 중시였다. 사회에서는 양반 중심의 지배 질서와 가족 제도에 종법 사상이 응용되었다. 즉, 신분적으로 양천의 구분을 엄격히 하고 이에 따른 직역을 법제화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 원리가 점차 보편화되었다. 외교에서는 평화추구의 친선 정책을 기본 외교정책으로 삼았다. 그리하며 국제적 긴장 관계를 완화하고자 하였다.사상에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을 포함하는 종교적 생활까지도 유교사상으로 흡수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면에서 고려이래 사회 관습상의 잔재로 이상적인 이론을 수용하는 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서민 사회에서는 불교, 도교, 토속 신앙 등이 그대로 잔존하였다.조선에 정치 시스템......조선조 정치체계에서 중앙의 통치구조는 언뜻 보아 국왕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체계인 듯하나 실제로 보면 구조상의 권력이 상당히 분화되어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적용되도록 고안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그 구조와 기능 면에서 절대왕권과 양반관료사이의 권력구조상의 조화가 배려되어 짜여진 구조이었다고 할 수 있다.중앙통치 구조를 살펴보면 의정부와 육조, 삼사, 승정원 그 외에도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경연이 있다. 첫째 최고 기관인 의정부는 삼상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며이러한 의정부의 기증과 권한은 많은 변동을 겪었으나 갑오개혁으로 내각제와 군국기무처가 창설 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둘째 중앙의 정책집행 기관인 육조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중앙 집권적 관료주의 체계로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셋째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으로 이루어지는데 3사는 국광에게 간언하고 정사의 시시비비를 논하여 국정을 바로 잡고 왕도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는 사대부 중심으로 하는 양반사회일면을 잘 나타내어준다.넷째 승정원은 왕명의 하달과 복명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국왕의 비서관으로서 구가 최대의 기밀기관이었다. 마지막으로 예문관은 국가 사령의 제찬, 춘추관은 당시 정치상황을 기록하는 기능, 성균관은 유생을 교육하는 최고의 학부였고 경연은 국왕에게 경서를 강독하고 연구하며 국왕의 학문을 지도하는 임무를 관장하였다.{이러한 구조아래 조선의 정치시스템은 끝임 없이 견제와 혼란으로 뒤엉켜있었으나 이는 곳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으며 이러한 것 때문에 500년을 견디어 올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견제하는 정치 시스템은 위에서 아래로의 통제와 끝임 없는 아래서 위로 대한 견제 이러한 상호간에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왕은 끝임 없이 신하와 견제를 하며 왕권을 지키려 하고 신하는 그러한 왕권에 대립해 가며 서로 견제를 한다.(사림과 중앙집권 견제)..또한 지방에 사림은 끝임 없이 견제를 하면서 중앙진출을 노린다. 중앙 진출에 기회는 과거 시험으로 이루어지며 과거에 합격을 하면 중앙으로 진출한다. 중앙에서 자기(사림)에 세력과 견제에 영역을 좀더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기에 사림은 견제와 함께 중앙으로 진출하려 한다.(성종 이후 사림은 중앙으로 진출)위에 것이 중앙 시스템이면 지방 시스템은 유향소(지방우지가 수령들한테 개지: 견제 시스템) 아전 지역사정에 따른 중인계층의 사람으로 사림들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것처럼 아전이 수령을 견제(수령의 권력 남용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