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서구 문명 보고서 2 -전쟁과 서구 문명 보고서 (「살라미스 해전」을 읽고)역사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전쟁만큼 강력한 파급효과를 가져다주는 요소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고 크고 작은 전쟁이 곧 역사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수많은 전쟁에 의해 역사가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러한 전쟁 중에서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살라미스 해전’에 대해 다루고 있다.찬란한 민주주의 문화를 꽃피웠던 고대 그리스 제국은 수차례 외침을 받고 위기를 겪었는데 그 중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협에서 페르시아의 침입을 격퇴한 전쟁이 바로 살라미스 해전이다.이 책의 저자 배리 슈트라우스는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나게 된 배경부터 전후 전쟁이 미친 영향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초반부 프롤로그 앞에 삼단노선이라는 함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만큼 살라미스 해전에서 삼단노선의 활약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강력한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닌 삼단노선이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에 결정적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 삼단노선에 탄 병사들의 단결되고 용맹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이 책의 주인공을 꼽으라면 단연 테미스토클레스로 책 서두에서 그에 대한 설명으로 본문이 시작되는 것으로 테미스토클레스가 이 전쟁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케 한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뛰어난 전략과 결단력이 있었기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가 대국 페르시아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마라톤 전쟁 이후 해이해진 분위기를 바로잡고 선견지명으로 삼단노선을 개발하는 등 해군을 집중 육성하여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의 발판을 마련하였다.테미스토클레스가 승리의 주인공이라면 그의 상대역으로서 패배의 주인공은 페르시아 최고 통지자인 크세르크세스이다. 크세르크세스가 통치할 당시 4세기 후반 페르시아는 지금의 인도 서부지역에서부터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나 터키와 이집트 일부까지 통치하는 강력한 대국이었다. 페르시아는 고대 그리스 제국을 점령하기 기원전 492년부터 479년까지 4차에 걸쳐 그리스 제국을 침공하는데 살라미스 해전은 그 중에서 3차 침공이었다. 기원전 490년경 마라톤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패퇴한 이후 페르시아왕 다리우스가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던 과정에서 죽고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왕위에 오른다. 얼마 전 개봉한 「300」이라는 영화에서 신비로운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한 크세르크세스는 책에서도 위엄 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통치자로 묘사되어 있다. 크세르크세스가 왕좌에 올라있을 때 이미 페르시아는 강국이었지만 그는 더욱 군사력을 키워 막강한 국력을 내세워 그리스 원정에 나선다.책의 초반부를 지나면서 전쟁이 시작된다. 저자는 3인칭 시점에서 당시 전투 상황과 장면에 대해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긴장감 있게 스토리는 전개된다. 그러면서 종종 배경지식과 작가적 논평을 실어 이해를 돕고 있다. 기원전 480년 5월 페르시아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군대를 이동하면서 드디어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그 후 5개월에 걸쳐 페르시아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지속적으로 그리스를 침공을 시도하다가 9월 28일 단 하루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퇴각하면서 살라미스 전쟁은 끝이 난다. 기나긴 전쟁에서 순간적인 단 한번의 결정적인 전투로 승패가 좌우되는 일은 역사에서 드물지 않는 현상이다. 페르시아군이 살라미스 해협으로 진입하기 전만해도 전력상으로 그리스 군을 압도할만했으나 운명의 날 한 번의 전투로 수년간 준비해온 그리스 원정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그리스가 전력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국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던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그리스는 방어하는 입장이고 공세를 가하는 쪽이 페르시아라는 사실이다. 제3의 중립국에서 두 군대가 맞붙었다면 그 정도의 전력을 전략과 용맹으로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전쟁사에서 살펴보면 침입하는 국가가 수세하는 국가보다 3배 정도의 전략상 우위를 점할 때 동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다고 한다. 책에서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식량과 군수물자의 보급, 군사의 이동 거리, 낯선 곳에서의 지리와 문화의 이질성 등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그러나 당대의 두 세력간의 전력차이는 여러 가지 정황을 따져볼 때 3배가 훨씬 넘게 페르시아가 우위였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페르시아군은 병력 35만여 명에 1200개가 넘는 함척을 보유하였던 반면 그리스군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 함대가 300여대 남짓하였고 병력도 수만 명에 불과했다. 즉, 객관적인 전력 외에 다른 요인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패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이 책의 저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뛰어난 전략과 지혜를 그리스 승리의 결정적 요인으로 지적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미 아테네를 점령당한 뒤에 지략을 써서 페르시아군 내부에 거짓정보를 흘려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했고 그 기회를 놓지 않고 단 한 번의 승부로 막강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는 위업을 달성했던 것이다. 또한 그 날 폭풍우로 수백 척의 페르시아 함대가 미처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에 침몰한 것도 그리스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그리스 지도자의 냉철한 판단이 승리를 이끌었다면 페르시아 지도자는 결정적인 순간 실책으로 오랫동안 숙원이었던 그리스 원정을 실패하고 만다. 책에서 저자는 크세르크세스의 실책을 예리하게 파헤쳐 지적하고 있다. 우선 외교정책의 실패를 꼽았는데 크세르크세스는 전쟁 이전 그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아티카를 회유시켜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다 실패하자 침입을 하였다. 이는 아티카에 페르시아에 대한 반감만 증폭시키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에 항전할 동기를 부여하는 자충수를 두는 결과를 불러온다. 또한 그리스에 남아있던 병력을 마르도니우스에게 맡긴 그의 선택과 살라미스 해전의 대패 이후 다시 함대를 재건하지 못했던 것도 결국 그리스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게 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Ⅰ. 슈베르트의 가곡슈베르트 가곡 개관가곡의 왕프란츠 슈베르트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슈베르트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에 풍부한 깊은 정서를 지닌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창시자인 슈베르트는 11세 때에 빈 궁정 예배당의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서 음악 생활을 시작하여 13세에 작곡을 시작하였고, 15세에는 최초의 서곡을 썼다. 16세에 교향곡을 작곡한 이래 가곡 「실 잣는 그레첸」,「마왕(Erlkonig)」,「들장미」 등을 작곡하였는데, 성인이 되기 전인 18세 때까지만 해도 140곡이 넘는 가곡을 썼다. 슈베르트의 가곡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우며, 베토벤처럼 무겁거나 격하고 장중하지 않으면서도 정돈되어 있는 형식미를 느낄 수 있다.슈베르트 가곡의 음악적 특징슈베르트의 가곡이 이전의 가곡과 다른 첫 번째 특징은 선율과 울림이 아름다운 피아노의 중요한 역할에 있다. 아름답고 유려한 긴 선율은 이전까지의 리트에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오페라의 아리아에 가까운 형태이었다. 조바꿈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슈베르트는 시의 내용에 적당한 울림을 다양하게 변화시켜 필요하다면 정신없이 변하는 조바꿈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슈만과 같이 현저한 감7화음 등의 불협화음으로 리트를 시작하는 형태도 초기부터 사용하였다. 피아노에는 자주 자율적이고 개성적인 역할을 부여하여 큰 표현력을 주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특징은 이러한 것을 청중이 느끼게 하고 전곡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가 기악곡의 형식을 리트에 다양하게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위에 서술하였던 「실잣는 그레트헨」의 론도 형식 이외에 변주곡이나 오스티나토 저음 기법, 소나타 형식의 발전부적 동기처리의 기법을 아주 적절하게 채용하였다. 그러나 600곡 이상이 되는 그의 가곡이 최종적으로 도착한 것은 그때까지의 '피아노 반주가 붙은 가곡'의 범위를 초월한 곳이었다.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슈베르트의 영원한 안식처사망하기 3개월 전에 작곡한 「그림자」에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은 슈베르트 이전의 리트에 대한 개념과는 반대로 앞에서 서술했던 기악기법(오스티나토 저음기법)을 채용하고 거기에 통작 형식(변주 유절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가창성부는 노래라기보다는 극적인 낭독송을 중시하는 형태로 되었다. 그리고 피아노는 반주라는 역할을 초월하고 가창과 완전히 일체가 되어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표현력의 강함과 다른 장르에서 볼 수가 없는 개성을 가진 그의 작품은 독일가곡사 중에서도 최고의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슈베르트는 많은 가곡을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으로 작곡하지 않았다. 긴 호흡과 힘, 폭넓은 음역이 요구되는 가곡은 훌륭한 가수가 연주회장에서 노래하기에 알맞은 작품이었다. 슈베르트는 J. M 포글이라는 오페라 가수와 만났는데, 그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많은 공개적인 연주회에서 연주하여 낭만파 예술가곡의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연주는 언제나 악보에 충실한 연주는 아니었고 장식음을 많이 삽입시킨 연주였다. 그가 실제로 노래한 선율을 그대로 기입한 악보가 현재에도 남아 있어 그것에 의하면, 예를 들어 유절가곡 「어부」 이라도 각 절마다 즉흥적으로 장식음을 첨가하여 변화를 주고, 또한 페르마타를 삽입한다든지 하여 연주에 변화를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악보에 하나의 장식음도 삽입하지 않고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지만, 당시의 연주는 즉흥적인 요소가 강해 오늘날과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슈베르트의 대표 가곡슈베르트는 연작가곡집을 두 작품 남기고 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D. 795)와 「겨울 나그네」(D.911)이다. 이 작품들은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연주되는 기회도 많다. 그러나 높은 평가의 이유를 연작가곡집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에 두는 것은 당시의 연주습관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현재의 시각에 기초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연작가곡집은 말할 필요도 없이 슈베르트 이전에 베토벤도 「멀리 있는 애인에게」(Op.98)라는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그것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작품들이 연작가곡집으로 모두 전곡을 이어서 연주하게 된 것은 슈베르트가 사망한 뒤에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일이었다. 「겨울 나그네」가 공식적으로 불려졌던 것은 슈베르트가 살아 있을 때인 1828년 1월이었지만, 이때는 제1곡만이 연주되었다. 슈베르트가 사망하고 얼마 안 된 1829년 1월에도 연주되었는데, 이때도 제5곡과 제17곡만 연주되었다. 앞에서 서술한 포글 자체도 전곡을 노래한 것은 1838년이 지나고 난 뒤에 일이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의 전곡연주는 보다 늦게 이루어졌는데, 슈베르트가 죽은 지 30년이 채 안된 1856년에 연주되었다.Ⅱ. 슈트라우스의 가곡슈트라우스 가곡의 개관후기 낭만주의 가곡의 대가리하르트 슈트라우스슈트라우스(R. Strauss)는 150여곡의 가곡을 작곡했는데 그의 전 작품 88개 중 작품번호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 40여 편 가까이가 성악작품이다. 관현악곡과 오페라의 작곡활동 이후로 그는 가곡에만 전념했으며 볼프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 슈트라우스는 가곡에 쓰인 시를 그 당시 유명한 낭만파 시인이었던 뫼리케, 하이네, 괴테들의 시를 선택하지 않았고 세대교체기의 시인들의 작품을 많이 선택했으며 그것은 그가 남들이 한 번 작곡했던 시나 시인들의 작품을 선택하길 꺼렸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화의 경향으로 그 당시 모든 독일문학의 사조가 표현의 전환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샤크, 비르바움, 데멜, 리리엔크론, 길름과 같은 시인들의 시를 선택했는데 그들의 시가 지닌 근대성과 신선한 낭만성을 살리기 위해 더욱 기교 있는 화성과 도취시키기에 충분한 관능적인 선율을 사용했다. 또한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가곡을 몇 개씩 묶어서 작품번호가 있는 가곡집을 출판했다.시기별 슈트라우스 가곡의 특성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슈트라우스의 가곡은 시기별로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제1기는 1870년부터 1893년까지로 초창기의 습작곡인 Op.10~Op.26에 이르는 가곡집을 포함하여 작품번호가 없는 많은 가곡을 작곡했으나 중요성을 그다지 인정받진 못했다. Op.10은 「Zueignung」, 「Allerseelen」 같은 유명한 곡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가곡 작곡가로서의 그의 이름을 처음 알린 가곡집이라 할 수 있다. 7세트의 가곡집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으며 젊은 향취와 강렬함, 신선함이 나타나며 애써 조성감을 파괴하려는 경향은 없다. 1기에선 선율에 대한 서정성이 강하게 나타난 시기이다.
목 차목 차제1장:중국의 자연환경????1제2장:중국의 언어와 문자????2제3장:중국의 역사????4제4장:중국의 문화????6제5장:중국의 음악과 경극????9제6장:중국의 풍속과 생활문화????10제7장:중국의 음식, 차, 술????11제8장:중국의 건축, 화학, 공예????13제9장:중국의 과학기술????14제10장:중국의 기공과 무술????15제11장:중국 문화 속의 인물????17중국 문화와 예술 보고서 19 -제 1 장 : 중국의 자연환경1. 중국의 위치와 면적중국은 아시아 대륙 동부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안과 맞물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신강위구르 자치구와 파미르 고원이 인도와 러시아 등과 접하고 있다. 동서간 거리는 약 5,000km에 이르고 경도 차이는 약 62°로 4시간 정도의 시차가 난다. 중국 면적은 대략 960만km2로 지구 육지 면적의 15분의 1정도를 차지하며 이는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넓은 면적이다. 남한 면적과 비교하면 거의 100배에 달하고 북한을 비롯하여 15개의 국가와 접하고 있는 국경선의 길이는 총 22,800km에 이른다.2. 중국의 지형중국의 지형은 한 단어로 표현하면 서고동저삼급계(西高東低三級階)로 다시 말해, 서쪽은 높고 동쪽이 낮으며, 3단계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서쪽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티베트 고원으로부터 동쪽 해안가로 갈수록 점차적으로 낮아지는 지형적 특성을 보인다. 이를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는데 고도 4,000m 이상의 청장고원이 자리 잡고 있는 제1지대, 고도가 2,000~1,000m에 이르는 고원과 분지로 이루어진 제2지대 그리고 고도 500m 미만의 구릉이 있는 동북평원, 화북평원, 장강 중하류 평원의 제3지대, 마지막으로 제4지대는 수심이 대체로 200m 미만인 대륙붕이 여기에 해당한다.중국의 산맥을 살펴보면 동서방향의 천산산맥, 곤륜산맥, 진령산맥 등은 주로 서북 지역에 위치하며, 대흥안령산맥, 장백산맥, 태항산맥 등은 북동방향으로 동북 지역에 분포 주조된 금문(金文)은 갑골문이 좀 더 발전된 문자이며 진시황에 이르러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이 만들어지면서 중국 대륙의 문자가 통일되었으며 예서(隸書)라는 실용적인 문자도 진시황 때에 등장했다. 초서(草書)는 붓으로 글을 쓰던 당시에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휘갈겨 쓴 문자를 말하며 당대에 이르러 현재의 문자 형태가 갖춰진 해서(楷書)가 등장하게 된다. 현재 중국에서는 한자의 복잡한 모양과 엄청난 양을 대폭 줄이고 발음을 통일한 간체자(杆體子)자를 사용하고 있다.3. 한자를 만드는 방법한자를 만드는 기본 방식에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있다. 첫 번째가 사물의 형체를 본 따서 형상화하여 만드는 상형(象形), 두 번째가 추상적인 개념을 위해서 사용된 지사(指事) 그리고 상형과 지사를 결합하여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의미와 의미를 결합한 회의(會意), 그리고 소리와 의미를 결합한 형성(形聲) 마지막으로 글자를 운용하여 기존의 글자를 활용하는 가차(假借)와 전주(轉注)의 방법도 여기에 포함된다.4. 표의문자인 한자의 외래어 표기방법한자는 표의문자이기 때문에 외래어를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외래어를 표기할 때 발음이 비슷한 문자를 조합하여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 내는데 이처럼 중국에서 외래어를 표기 방식에는 다음 4가지가 있다. 우선 가장 널리 쓰이는 방법이 발음만 유사하게 표기할 수 있도록 글자를 조합하는 음역이다. 또한 영어의 coca cola를 可口可樂처럼 발음도 비슷하면서 그 의미도 통하게 하는 방법이 있으며, 외래어의 발음을 음역하고 한자를 거기에 더하여 표기하는 방법도 있다. 마지막으로 외래어의 발음은 무시하고 의미를 살려서 새로 만드는 방법도 많이 쓰인다.제 3 장 : 중국의 역사1. 선진(先秦)시기고고자료에 따르면 중국 대륙에는 약 100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아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신화로 전해지는 최초의 제왕들은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의 삼황(三皇)과 황제, 전육, 제곡, 제요, 제순의 오제(五帝)이다. 삼황고 장은 외침으로 국력이 쇠약해져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에 의해 자금성이 함락되고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가 중국대륙을 통치하게 된다.청나라는 초기 혼란을 매듭짓고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에 이어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전성기를 구가한다.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며 학문적으로도 고증학이 발달하며 번영해 나갔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서방 선진국과 일본의 세력에 밀려 힘을 잃어가다가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아편 전쟁 이후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 중국 대륙은 잇단 서방국가들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면서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다. 내부 반란도 거세져 19세기 중반의 태평국은 600여개의 도심을 점령하여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다. 서구열강의 침탈 속에 자강을 추구하는 양무 운동이 일어났으나 실패로 끝나고 무력하게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되는 처지에 놓인다.4. 중화민족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신해 혁명의 성공으로 2,000여 년간의 황제통치가 막을 내리고 공화제 체제로 들어선다, 1917년 레닌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면서 중국에도 공산당이 창당된다.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이 일으킨 정변으로 큰 타격을 입으면서도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한다. 일본의 침입으로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나 오래가지 못하고 결렬되고 2차 대전 종전 후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모택동이 주석으로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이념 체제를 강화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대약진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인해 실패로 끝나면서 모택동은 실각하고 유소기가 집권하지만 자본주의적 경제 정책을 실시에 반발한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중국 사회는 다시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로 돌아간다.모택동 사망 후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중국은 개혁 개방 노선에 급물살을 타고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로 또 한 번 위기를 맞이한 중국은 1990년에 강택민이 총서기로 선출되고 뒤이어 호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관한경과 왕실보 등을 꼽을 수 있다.명나라 때의 곤강(崑腔)과 청나라 때의 경극(京劇)이 중국 희곡의 대를 이어 갔는데 모란정 등을 지은 탕현조가 곤강의 대표적인 작가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감동적인 스토리로 큰 사랑을 받았다.6. 사대부의 글쓰기, 중국 고전산문중국에서는 글을 쓴다는 행위가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상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고전 산문은 지배계층의 전유물로 이어져 왔다. 대표적인 작품들이 서경, 좌전(左傳), 사기와 같은 역사서와 논어, 맹자와 같은 제자백가 철학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고전 산문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고 고전과 경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중국 문학을 보면 형식미와 공용성(共溶性)이 상호보완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변려문(?儷文)과 고문(古文)은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잃고 하나로 치중한 장르이다. 변려문은 산문이지만, 운문처럼 음악성과 형식미를 중시한 장르이며 고문은 변려문과 대비되는 선진, 양한의 문체를 계승한 산문으로 중국 산문을 주도해 나갔다.7. 전통의 부정, 현대문학아편 전쟁 이후 도입된 서구 문명은 중국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에 따라 근대 이후 현대 문학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큰 흐름은 1917년 발표된 문화개량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문화개량주의는 문화혁명으로 이어졌고 문화혁명은 혁명문학으로 이어지며 지금에 이어져 오고 있다.제 5 장 : 중국의 음악과 경극1. 중국의 음악중국 음악의 변천 역사를 시대에 따라 살펴보면 우선 하상주 시대의 상고시기에는 아악, 속악, 연악이 발달하였으며 선진에서 육조에 이르는 시기에 이르러 음악이론이 많이 발전하는데 중국 최초의 음악이론서인 순자의 악록편과 악기가 모두 선전 시기에 등장한다. 한대에 쓰인 회남자도 훌륭한 음악 이론서이며 위진남북조에 이르러서는 불교음악과 전통음악 그리고 남방과 북방의 음악이 융합되며 다양한 음악이 발달한세에 있다.상례 역시 전통 예식은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로 치러지고 매장을 하였으나 최근에는 화장이나 수장도 널리 보급되는 등 많이 변하였다.4. 중국의 금기광활한 영토에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를 지닌 중국에서는 금기시 되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우선 피휘라고 특정 글자를 대화에서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는 금기가 있다. 그리고 발음이 같은 단어들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으로 해음이라는 것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6과 8과 9는 상스럽게 여겨지는 반면 공자와 맹자가 죽은 나이인 73, 84와 죽을 사자와 발음이 같은 4는 금기시 되는 숫자이다.제 7 장 : 중국의 음식, 차, 술1. 중국의 음식중국은 음식 대국으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음식 네 가지를 지역에 따라 4대 음식이라 한다. 그 첫 번째로 사천 음식은 성도와 중경, 자공 지역의 요리로 맵고 얼얼한 맛으로 유명하다. 광동 음식은 중국 내에서도 음식으로 유명한 지역인데 원재료의 담백한 맛을 살려내는 요리로 유명한데 대표적인 요리로는 구운 돼지고기 요리인 차소육과 고유저가 있다. 북경 음식은 한랭한 북방 기후에 어울리는 음식으로 양고기와 오리 고기 등이 맛이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상해 요리는 서양식 요리법이 가미되어있고 해산물 요리가 특히 유명하다.중국의 주식은 남방 지역에서는 쌀인 반면, 북방 지역에서는 밀을 많이 먹는다. 밀을 주식으로 하는 대표적인 북방 요리로는 만두, 포자, 교자, 혼돈, 병, 면 등이 있고 남방 지역에서는 미선, 미분, 미자, 탕원 등이 유명하다.중국 사람들의 식생활을 살펴보면 대개 아침은 유조와 두장 등으로 간단하게 먹고 점심, 저녁은 상대적으로 푸짐하게 먹는다. 쌀, 국수 외에도 볶음 요리, 국, 죽 등도 많이 먹으며 최근에는 서양식 요리도 즐겨 먹는다.2. 중국의 차차는 오랫동안 중국인의 생활 속에 함께 해 왔다. 당나라 때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적인 다경이 발간되었을 정도로 차의 역사는 깊은데 서양에 차가 도입된 것도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다.
기말 보고서로 써야 되는 프랑스 문화 체험을 어떤 것으로 해야 할까 많이 생각은 해보았지만 회사에 얽매여 있는 직장인의 신분으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또 책을 쓰는 업무를 맡으면서 주말과 휴일에 출근하는 일도 잦아지면서 따로 시간을 내어 프랑스 관련 행사에 참가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았다.그래서 많은 시간을 내어 프랑스 문화 체험을 할 만한 여유가 없는 형편을 고려하여 한정된 시간과 장소에서 다양한 프랑스 문화 체험을 할 방법을 생각했다. 인터넷과 관련 자료 등을 검색해 본 결과 그러한 곳에 딱 적합한 장소가 있었으니 바로 ‘프랑스 문화원’이었다. 제한된 공간 안에 영화, 음악, 미술, 음식 등 프랑스 문화에 관한 다양한 체험거리가 마련되어 있어 프랑스 문화에 대해 압축적으로 체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지난 6월 6일 현충일에 휴일을 맞아 모처럼 만에 짬을 내어 서울 시청 인근에 위치한 프랑스 문화원을 찾았다. 며칠 전에 프랑스 문화원에 전화 문의를 통해 현충일에도 개방한다는 소리를 듣고 회사를 가지 않은 현충일을 프랑스 문화원 탐방일로 정했던 것이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시청역 인근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무작정 시청역에서 내렸다가 거의 20분 넘게 한참을 헤매다가 우리빌딩 18층에 위치한 프랑스 문화원을 찾아 들어가게 되었다. 건물에 빨강, 파랑, 하양의 삼색기가 걸려 있어서 이곳에 프랑스 문화원이 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프랑스 문화원을 들어가는 입구 >문화대국 프랑스의 문화원이니 그 규모가 웅장하고 거대하리라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실제 건물에 들어서자 생각보다는 아담하고 그렇게 크지 않은 규모였다. 대신 세련된 실내 장식과 멋스러운 분위기가 역시 프랑스 문화원답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처음 들어가는 입구부터 인상적이었는데 유리창이 둥글게 마디로 이어져 출입문에서 건물 내부를 이어져 찾아오는 손님을 반겨주었다. 마치 해저터널을 들어가는 듯한 신비한 느낌을 받으면서 프랑스 문화원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어린이 도서 코너에 마련된 방석 >입구로 통과하여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왼쪽은 식당이었고 반대쪽은 책들이 가득한 도서관이었다. 휴일이었는데 사람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입구 로비에서 서성이는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서양인도 몇 명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오자마자 식당을 가는 건 왠지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우선 책을 전시해 놓은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각종 프랑스 책들이 책꽂이마다 가득 꽂혀 있었는데 특이하게 바닥에 방석을 깔아놓아 책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프랑스 문화원에 우리나라 전통 문양을 한 색동 방석이 깔려져 있는 것이 왠지 어색한 듯 하면서도 잘 어울리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방석이 깔려 있는 서재로 가니 아동용 도서가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 때는 아무도 없어서 방석 위에서 책을 보는 어린이가 없었지만 귀여운 꼬마 애들이 옹기종기 방석 위에 둘러 앉아 책을 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프랑스 문화원의 배려와 센스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프랑스 만화 「Boule et Bill」의 한 장면 >프랑스어를 모르기 때문에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는데 프랑스어를 모르는 한국인을 배려해서인지 문화원이라는 이름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게 만화책을 많이 비치해 놓았다. 만화책 몇 권을 꺼내서 들여다보니 예전에 잡지나 신문에서 가끔씩 봤던 프랑스 만화 「Boule et Bill」 와 비슷한 그림체가 나오는 책도 종종 보여서 낯설지만은 않았다.만화책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는 글자만 있는 책은 프랑스어를 모르는 나에게는 이른바 검은 것은 글이요, 흰 것은 여백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문장 해석은커녕 아는 단어조차 거의 발견되지 않아 내가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운 게 맞는지 스스로 의심을 들 정도였다. 그래도 책을 꺼냈는데 표지만 보고 덮으면 보는 사람은 없어도 왠지 스스로 민망할 것 같아서 프랑스어 좀 아는 척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갸우뚱 하기도 하면서 몇 권을 뒤적거리다 옆에 있는 코너로 넘어갔다.도서관 한 쪽에는 DVD, CD, VIDEO 등 각종 영상매체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은 회원으로 가입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40,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가입비로 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좀 되었지만 알찬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프랑스 쪽으로 공무원 국비 유학을 생각하던 참으로 앞으로도 이곳에서 많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회원으로 가입을 하면 자료를 관외로 대출도 가능하고 영화 관람 시에도 할인을 해 주는 등 가입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많은 혜택이 있었다.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흐뭇한 심정으로 회원가입을 하려고 했으나 이런 날벼락이!! 지갑 속에 현금이 없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회원가입은 하지 못하고 각종 자료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어학 자료와 영화, 애니메이션 등 여러 영상 미디어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내가 아는 프랑스 영화중에 가장 유명한 레옹이 DVD로 있었고 유명한 나폴레옹이 표지 그림으로 되어 있는 미디어 자료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도서관을 다 둘러본 후 들른 곳은 ‘Cafe de France' 프랑스 식당이었다. 흔히 커피숍이나 찻집 정도로 알고 있던 'Cafe'가 ’Cafeteria'와 비슷한 말로 간이식당이나 경식당 등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났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식사를 하는 사람은 한쪽 모퉁이서 불어로 얘기를 나누던 3사람의 무리들 밖에 없었다.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혼자서 식사를 했는데도 그다지 어색하거나 무안하지 않았다.한국 안에 위치한 프랑스 문화원의 식당이니깐 당연히 우리말로 주문하고 받을 줄 알았는데 자리에 앉자 외국인이 다가와 주문을 받아서 적잖이 당황했다. 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눈치를 챘는지 영어로 내게 말을 걸어줘서 대충 생각나는 단어를 조합하여 힘겹게 주문을 끝냈다. 생각보다 가격은 저렴했는데 요리가 그다지 내 입 맛에 맞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점심을 먹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나서 스스로 당황스러웠다.< Cafe de France에서 바라본 서울시 전경 >요리는 닭고기와 감자를 으깬 요리였는데 고기도 부드러웠고 감자도 담백해서 괜찮긴 했는데 나오기 전에 참치 통조림에 물에 밥을 말아서 잔뜩 먹고 배가 부른 상태라 그다지 맛있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창가에 앉았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멋있었다. 건물 꼭대기에 위치해서 서울 시내 전경이 확 트여 보여 가슴 속까지 시원해지는 듯 했다.식사까지 마치고 나자 프랑스 문화원을 거의 다 둘러본 듯 했다. 예전에는 프랑스 문화원에서 직접 프랑스 영화를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는데 얼마 전부터는 다른 영화관과 제휴하여 외부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한다고 하여 문화원에서 영화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입구에 붙어있는 프랑스 영화 포스터를 보자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프랑스 문화원 탐방을 마치고 문화원 문을 나섰다.비록 반나절 정도의 짧은 시간의 탐방이었지만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던 유익한 체험이었다. 평소에 막연히 나폴레옹과 에펠탑이 유명한 나라, 문화 와 축구 강국 정도로만 알았던 프랑스라는 나라에 대해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시간의 제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서울에 이러한 곳이 있어서 외국 문화에 대해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시간적 여유가 되면 다시 이곳을 찾아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여러 문화 시설과 미디어를 접해서 프랑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여건이 되면 프랑스를 직접 찾아가 문화원에서 간접적으로 보고 체험한 것들을 직접 현지에서 접하고 느껴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목차목 차Ⅰ.서론·····1Ⅱ.본론·····21.최초의 샹송·····22.중세의 샹송·····23.르네상스 시대의 샹송·····34.근대의 샹송·····45.2차대전 이전의 샹송·····56.2차대전 이후의 샹송·····7Ⅲ.결론9Ⅰ. 서 론샹송의 역사 9 -여태껏 살아오면서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샹송이 내 귀를 거쳐 간 적이 한 번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사실 제대로 관심을 가지고 샹송을 들어본 것은 이번 과제를 준비하면서가 처음이었다. 샹송에 관해 기억나는 것이라곤 고등학교 프랑스어 수업시간에 들었던 샹송이 꽤 매력적인 음악이라고 느꼈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났던 것 정도였다. 그만큼 나에게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샹송은 마치 숨겨져 있던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 되었다.샹송(Chanson)의 어원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프랑스어로 부르는 노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가요와 같이 일반적인 프랑스 대중음악을 이르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칸초네라든지 스페인의 칸시온 등과 같이 각 나라마다 고유한 전통 노래가 있듯이 프랑스의 전통 노래를 이르는 말이 샹송이라 할 수 있다.다른 음악과 구별되는 샹송만의 매력은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어 특유의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발음과 어감이 노래 가사로써 샹송의 음감을 한층 살려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다른 음악과는 달리 샹송은 노랫말이 중요한데 멜로디에 맞추어 단순히 불리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랫말에 담긴 일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데 샹송의 목적이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어진다는 것도 샹송이 지는 특징이라 생각한다. 물론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떻게 멜로디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표현하여 음악성을 높일 수 있는 가에도 중요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이처럼 노랫말을 전달하는 기능이 중요했기 때문에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샹송은 다른 노래처럼 아무 가수나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가수만이 불렀다고 한다. 즉, 처음에 곡이 탄생하기 마련인 만큼 최소한 2천여 년 전에는 최초의 샹송이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당시에 현재의 프랑스어의 기원이 된 고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 샹송의 시초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그러나 악보는 물론 기본적인 문자 체계도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던 시대이기 때문에 당시에 불리던 노래가 기록으로 전해지지는 않고, 다만 당시의 생활 모습으로 미루어봐서 어떤 형태의 노래였는지를 추정할 따름이다.초기의 샹송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종교적인 성향을 띤 노래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로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져 신을 찬양하고 성자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으로 많이 불려졌을 것이다. 물론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는 세속적인 내용을 담은 샹송도 만들어져 널리 불리었을 것으로 예상된다.2. 중세의 샹송천년을 이어온 동로마가 멸망하고 서기 500년대에 이르러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가 시작된다.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는 1500년대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지속되는 중세 시대는 기독교가 사회 모든 분야에 강력한 영향을 미쳐 다른 분야의 발달을 저해하였다하여 암흑의 천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개인의 사상과 자유가 기독교 교리에 의해 철저히 억압당하고 종교가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이 시대의 샹송 역시 세속적인 노래보다는 종교적인 색채를 띤 노래들이 많이 등장한다.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샹송은 「성녀 우라리의 이야기」란 제목의 노래로 역시 제목에서부터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교회 음악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1200여 년 전인 881년 발랑센의 수도사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중세 프랑스에 건립된 샤르트르 대성당중세의 샹송은 여러 지방을 떠돌며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吟遊詩人)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발전해 왔다. 10세기 말에 등장한 트루바로드(troubadour)라 불리는 음유시인들은 남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여 13세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쳤는데 대표적인 곡이 샹송 드 제스트(Chanson de Geste)이다. 이 기간동안 하는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대중 연예인이었다. 종글뢰르 중 귀족들에게 고용된 이들을 특별히 메네스트렐(menestrel)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에 의해 중세 샹송은 훨씬 더 세련되고 격을 가춘 노래로 발전해 간다.샹송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중세 음유시인들이 활동하는 시기부터이며 쿠플레(couplet)라는 스토리 부분과 르프랭(refrain)이라는 반복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샹송의 기본 형태를 갖추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로 알려져 있다.3. 르네상스 시대의 샹송14세기 후반에 이르러 르네상스(Renaissance)라 불리는 문화 부흥 운동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15세기에 이르러 점차 전 유럽으로 퍼져 프랑스에서도 르네상스 시대가 찾아오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 샹송의 큰 특징은 샹송의 향유층이 중세 시대 귀족이나 성직자에서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특히 17세기 초에 프랑스 파리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거기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특히 센 강을 가로지르는 퐁 뇌프(Pont Neuf)라는 다리가 중심지가 되었다. 이들은 최초의 직업 가수로 볼 수 있는데 중세 시대의 음유 시인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음유 시인들은 시인이라 불리긴 하지만 실제로는 여행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부차적인 수단이었던 반면에 르네상스 시대에 가수들은 노래를 직업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했다는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퐁뇌프 다리르네상스 시대 샹송의 메카였다.점에서 구분될 수 있다.당시 이들에 의해 불리던 노래들은 주로 당대의 정치나 사회에 대해 풍자하고 신랄하게 비판을 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일반 민중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으면서 샹송은 한층 더 발전되어 가게 된다. 이렇게 샹송을 통해 정치,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샹소네(chansonner)라고 불렀으며 이들 가수들은 샹소니에(chansonniere)라 불리었다.4. 근대의 샹송18세기 이후 근대에는 카바레(cabaret)나 카페 콩세르(cafe concertan de Beranger)가 유명한데 그는 신랄한 정치 비판 곡을 지어 많은 인기를 얻었으며 대표적은 작품으로는「샹송 가집(歌集, Chansons)」, 「자서전 (Ma Biographie)」과 곡들이 있으나 지금은 거의 불려지지 않고 있다.카보에 이어 등장한 카바레와 카페 콩세르는 19세기 후반 경에 크게 성하여 샹송의 발달을 이끌었다. 카바레와는 달리 카페 콩세르는 음악과 함께 음식을 제공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가수들은 이러한 곳에서 전속 계약을 체결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현대적 의미의 샹송 가수의 시초라 볼 수 있다.이 시기에 이르러 지금의 샹송의 틀이 갖추어 지게 되는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공한한 가수가 전설적인 샹송 가수로 길이 이름을 빛내고 있는 이베트 길베르(Yvette Guilbert)이다. 그녀는 화풍과 화법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일으켜 현대 샹송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그녀가 1928년에 집필한 「샹송 부르는 법」이란 책은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샹송 가수의 기초적이고도 필수적인 교과서로 전해지고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샹송 가수들이 등장하여 아름답고 세련된 샹송을 불렀다.카페 콩세르와 함께 샹송 음악의 메카로 20세기 초반에 왕성한 활약을 펼친 무대로 뮤직홀(music hall)을 빼놓을 수 없다. 뮤직홀에서는 샹송뿐만 아니라 서커스나 연극 등 더욱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고 이전에 무대에 비해 규모도 훨씬 컸다. 뮤직홀을 통해 샹송을 더 많은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가수와 노래가 등장하면서 지금과 같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노래로써의 지위도 얻게 되었다.5. 2차대전 이전의 샹송20세기로 넘어오면 바 탕 크랑, 올랭피아, 물랭 루즈과 같은 뮤직홀을 중심으로 샹송이 흥행을 하는데 미스탱게트(Mistinguette)와 모리스 슈발리에(Maurice Chevalier)와 같은 매력적인 가수가 등장하여 인기몰이를 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는 미국을 위주로 해서 다른 나라의 노래들이 유입되어 그 곡에 프랑스어 가사를 붙인 샹송이 불려지기도 하고한 창법을 개발하여 새로운 샹송의 한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특히 장 노앙(Jean Noan)이라는 작사자와 만나 더욱 세련되고 뛰어난 작품을 불러 미국에서까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 둘의 대표작으로는 ACC 디스트 대상을 수상한 '건초 안에 누워서‘라는 곡을 꼽을 수 있다.한편 계속되는 전쟁과 경제 대공황 등으로 어수선한 유럽의 정세를 반영하듯 샹송 레알리스트(Chanson realist)라 불리는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노래를 불러 인기를 얻는 가수들이 등장하여 인기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인 가수가 3대 샹퇴즈 레알리스트라 꼽히는 다미아(Damia), 프렐(Frehel), 이봉 조르주(Ivon Georges)이다.특히, 다미아는 ‘이제르의 야간 보초’라는 곡을 불러 명성을 얻었으며 이본 조르주와 프렐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샹송 레알리스트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샹송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샹송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축음기다른 예술 분야도 그러하지만 특히 음악 분야에서 20세기에 등장한 방송의 보급과 레코드의 발명은 일대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와 이른바 새로운 조류(Novelle Vague)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축음기가 일반 대중에게 보급되어 누구나 샹송을 쉽게 들을 수 있고 국영 방송국의 설립으로 본격적인 방송전파발신이 가능해지면서 르네상스적인 메커니즘의 발전을 거쳐 현대 샹송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뤼시엔 부아예의 ‘들려줘요, 사랑의 말을’은 1931년 발표된 디스크 대상을 차지하여 14개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전 세계로 유행되었으며, 1934년 티노 로시의 음반은 45만매라는 경이적인 판매수를 기록하며 레코드의 등장으로 인한 샹송의 인기를 실감나게 하였다.1931년 최초로 전파를 탄 라디오 방송은 시간이 지나면서 채널이 늘어나고 품질도 향상되어 가면서 샹송의 새로운 무대로 각광받게 되었다. 연주회 실황을 방송하거나 기획전으로 연주를 들려주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쉽게 샹송을 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고 샹송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게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