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나타난 ‘욕망’분석이 작품을 읽는 도중에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은 일단, 왜 처제와 형부인가이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둘의 관계가 달랐다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작가의 의도는 찾기 힘들었으리란 것이었다. 그 푸른 몽고반점이 다른 여성의 엉덩이에 찍혀 있었다면 말이다. 단순한 불륜이 아닌 그 이상의 금기행위로 ‘그’의 욕망이 더욱 강하게 전달되는 것이다.그럼, 그의 욕망은 무엇이었나?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환멸을 느끼는 그(이미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는 듯하다)는 처제를 병원에 두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까지 만든 작품이 위선처럼 느껴지고 구역질이 난다. 무기력함과 자기 환멸에 빠져 있다가 그는 처제에게 아직도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 그 모든 기억 위로 푸른빛 몽고반점이 찍혀 있었다. 퇴화된, 모든 사람에게서 사라진, 오로지 어린아이들의 엉덩이와 등만을 덮고 있는 반점... ’여기서 말한 것처럼 몽고반점의 의미는 순수하고 원초적인 이미지이다. 다 큰 여자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의 이미지는 현실에 찌들어있던 그에게 예술적 욕망과 더불어 원초적 욕망인 성욕을 불러일으킨다.아직 몽고반점이 남아있는, 온 몸이 꽃과 같이 꾸며진 처제와 결합하는 것은 모든 위선과 현실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의 강렬한 욕망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작품화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또 하나의 욕망이다.그렇다면, 한강은 어떻게 그의 욕망을 정당화시키고 있나? 첫째, 형부와 처제라는 관계이다. 이 관계는 앞서 말했듯이 불륜 이상의 금기행위이지만 불륜과 같이 더럽다는 생각은 들게 하지 않는다. 대상이 언니와 같은 뿌리에서 생겨난 동생이라는 사실은 거부감보다는 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두 번째, 그의 직업과 처제의 남다른 특성이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 그와 같은 예술가들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평범하지 않다. 어느 하나에 영감을 얻으면 그것에 집착하고 어떤 때에는 걷잡을 수 없이 광적으로 대상을 향하여 치닫기도 한다. 처제는 어떠한가. 동물성을 강하게 거부하여 자살까지 기도하는 그녀 역시 매우 특수한 사람이다. 이 둘의 결합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으며 연민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다.
영화 에 대한 감상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전에 개봉된 영화여서 놀랐다. 1986년에 개봉되었으니 벌써 20년 전 영화 아닌가. 그럼 숀 코네리가 지금 도대체 몇 살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꽤 오래전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세련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영화의 배경이 중세이고 수도원이라는 특정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내용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런 쪽에 무지한 사람이라면 흥미가 떨어졌을 것 같다. 하지만 세계사를 좋아했고 기독교를 종교로 가진 나에게는, 보는 내내 흥미진진했으며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다.줄거리를 잠시 살펴보면, 바스커빌의 윌리엄과 그의 제자 아드조는 한 베네딕트 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이 수도원에서 채식사인 아델모가 시체로 발견된다. 윌리엄은 날카로운 관찰력과 직관을 가진 명석한 수도사였다. 윌리엄은 당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황제측과 교황측의 회담을 중재하기 위해 이 수도원에 파견되었지만, 수도원장의 부탁에 따라 수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일곱 천사가 한 명씩 나팔을 불때마다 지상에서 재앙이 벌어지며 천사들이 나팔을 다 불게 되면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세계 종말의 날이 도래한다는 요한 계시록의 예언과 맞아떨어지는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희생자들은 각자 예언의 재앙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묵시록적인 분위기로 수도원이 술렁거리고 윌리엄과 아드조는 범인의 실마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는데, 그 와중에 아드조는 몸을 파는 여자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단 심문관인 베르나도 귀가 수도원에 와서 모든 사건이 마귀의 소행이라며, 죄 없는 여자와 일당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희생자가 생기고 윌리엄과 아드조의 추적 끝에 결국 범인은 책을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해 책에 독을 바른 호르세 수도사임을 알게 된다.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고 호르세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자신도 죽는다. 불이 난 틈에 무고한 여자와 사람들은 처형장에서 구출당하고 베르나도는 화재와 폭동에 당황하여 허겁지겁 도망을 치게 되지만 도중에 붙들려 마차가 전복되면서 죽게 된다. 결국 한 늙은 수도사의 광신이 비극적인 사건들을 초래했다는 것이 영화의 결론이었다.여기서 나는, 만약 호르세가 애초에 책을 불태우거나 없애버렸다면 비극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봤다. 그랬다면 이런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가 책을 없애지 않고 독을 발랐다는 사실은 책을 몰래 보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응징하겠다는 뜻이다. 그 책을 보는 행위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만약 나쁘다고 해도) 그의 조치는 책을 보는 것보다 더 악하고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 것이다. 자신이 취한 조치를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면 그건 신의 권력을 남용한 것이 된다. 사람의 목숨을 주관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중세에서 매스미디어라고 하면 오직 책이 있을 뿐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저 주위 사람들이나 아니면 책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물론 현대에도 책은 사람의 인성과 미래를 결정하기도 하는 중요한 존재이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매스미디어들이 많다. 책이 아니라도 책이 주는 만큼의 효과를 다른 매스미디어에서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책의 가치가 그 시대만큼 절대적이진 않다. 그러므로 그 시대 사람들도 책이 얼마나 큰 파급 효과를 가져 오는지 알았을 것이다.사실, 여기서 금기시하는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 ‘희극론’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책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애초에 있었는지의 여부도 다만 추측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있었으리라고 믿고 있다. 만약 있었다면 왜 사라졌을까? 정말 이런 비슷한 사건으로 사라진 건 아닐까? 웃음을 금기시했던 당시의 관습으로 봐서는 계획적으로 책을 없애버릴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왜 ‘웃음’에 대한 책을 금기시했을까? 영화에서 보면 호르세는 웃는 것을 죄악으로 치부해버린다. 크리스챤은 웃지 말아야 한다고. 웃고 즐기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내내 웃지 않는다. 웃지 않을뿐더러 인상을 쓰고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그와 너무 다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어찌 마음이 기쁘지 않겠고, 웃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하나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지 않나. 또 하나님이 웃을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셨는데 억지로 웃지 않는 다는 건 분명 모순이다.여기서 호르세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이단 심문관인 베르나도이다. 베르나도를 통해 얼마나 인간의 이성이 이 시대에는 발휘되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인간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모든 것을 미신에 의존하고 해석하려는 것 역시 신권의 남용일 것이다. 영화에서도 무고한 여자가 마녀로 몰리고 화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바늘,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강한 것은 아름답다’와 ‘아름다운 것은 강하다’라는 말은 사회에서 결국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강한 것을 개인이나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힘을 가진 존재로 해석해 볼 때,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갖고 싶어 하는 물질이나 추구하는 이상형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강한 것을 곧 아름답다고 느낀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기 쉬운 존재이다. 아름다움의 기준과 가치를 이미 한 사회에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지닌 것은 곧 그 사회와의 소통이 수월하고 그곳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강한 힘을 지닌 것과 같다.천운영의 ‘바늘’은 강함과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은 모두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이 세상에 진정으로 강한 것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1. 문신‘나’에게 문신을 하러 찾아오는 남자들은 대부분이 그녀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한다. 그들이 강한 존재이면서 이러한 문신을 하려 하는가? 아니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두려움을 침묵으로 이겨내지 못하는 그들은 약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런 문신으로 자신의 강함을 표출하고자하는 남자들의 생각을 그녀도 인정한다.‘내 앞에서 약이나 대마초는 절대 사용할 수 없다. 고통을 이겨내는 사람만이 협각류의 외피를 얻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김사장의 팔뚝에 그려진 칼은 아름다웠다.’그럼, ‘나’는 왜 문신을 하는가?‘... 거기에 나는 말까지 더듬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내 바늘 끝에서 나오는 문신을 보고 추함과 연결시키는 사람은 없다.’‘마치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들이 입 밖으로 시원하게 나와 주는 기분. 바늘땀을 뜰 때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다.’‘문신을 끝낼 때마다 격렬한 섹스를 하고 난 듯한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나’는 이 사회의 기준에서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다. 추한 용모에 말까지 더듬는다. 하지만 그녀가 새기는 문신은 아름답다. 추한 그녀는 아름다운 문신을 새기므로 사회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외모 때문에 남자들에게 여자로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문신을 새길 때는 마치 섹스를 한 듯한 성적 만족을 얻는다. 즉, 아름다운 문신을 새기는 행위는 여자로서 그녀의 존재를 인정받게 하고, 사회와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2. 육식‘나’는 육식을 매우 좋아한다. 그 까닭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스님에 대한 증오의 심리이다. 그녀에게 스님은 아름다운 사람이면서 엄마를 빼앗아간 대상이다. 여기서 전자의 의미만을 고려했을 때, 그녀는 스님의 아름다움을 동경하지만 그와 같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부정하고자 한다. 그래서 채식을 하는 스님에 대응하여 그녀는 육식을 하는 것이다.둘째는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이다. 고기에 양념을 하지도 않고, 야채와 곁들여먹지도 않는 그녀의 모습은 육식 동물을 연상하게 한다. 입 안 가득 육질을 씹으며 포만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은, 약하고 소외된 그녀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려 하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보여 진다.3. 살의스님을 죽인 사람은 ‘나’의 엄마이지만 그녀 역시 스님을 죽이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마치 내가 노사의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못이 막히고 투박한 내 손을 들여다보았다.’‘유리관 속에 전시된 무기들을 하나씩 꺼내 스님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한다.’이러한 살의는 그녀가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의 마음과 똑같이 충동을 느낀 것인 동시에 아름다운 존재인 스님을 부정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가 미륵암에 있던 시절에 새끼고양이를 죽인 사실로도 알 수 있다.‘마당이나 법당까지 함부로 나다니는 고양이들이 나는 무척이나 두려웠다. 하지만 그 고양이들은 아름다웠다.’‘내 손에 들려 있는 고양이는 작고 여리고 아름다웠다. 새끼고양이를 변기 속으로 집어던지기까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다.’고양이들이 아름다웠지만 두려웠다는 것은 그녀가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것에 의해 자신이 배척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녀는 새끼 고양이를 죽인다.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고 그렇게 되길 원하지만 불가능함을 알기에, 아예 그것들을 부정하고 없애고 싶은 살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4. 801호 남자801호 남자는 ‘나’의 입장에서 볼 때, 스님과 고양이처럼 아름다운 존재이다. 하지만 그 역시 나름대로의 열등감과 강해지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나는 전쟁이 좋아. 전쟁은 강하거든. 강함은 힘에서 나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힘이야.”’‘“내 몸을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줘. 칼이나 활 미사일 비행기 뭐든.”’이 작품에서 남자의 중요한 역할은 바로 ‘나’의 환상을 깬 것이다. 그녀가 부러워하는 그 남자는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싫어하고 부정하려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 즉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던, 추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던 간에 저마다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