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장희빈이 악녀라구?우리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무수히 많은 여인들을 만나고 그 중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 TV사극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희빈을 만나 볼까한다.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인현왕후를 저주한 그녀. 저주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데... 또한 잔인하여 여러 사람을 모함하고 세자를 성불구 자로 만들었다는 그녀에 대해 진실을 논하고자 한다.희빈 장씨(?∼1701)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면 숙종의 빈으로 역관 장현의 종질녀이다. 궁녀로 들어가서 왕의 총애를 독점. 1686년(숙종 12)에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있을 때 왕자 균(경종)을 낳아 이듬해 균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이 해 기사환국으로 원자 책봉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남인에 의해 패배 당하고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가자 이등의 지지를 받아 1690년 원자가 세자로 책봉됨과 함께 폐위된 민비의 뒤를 이어 정비로 책립되었다. 그러나 1694년 김춘택 등 서인의 민비 복위 운동으로 갑술옥사가 일어나 남인이 제거되고 민씨가 복위하자 희빈으로 격하되고, 1701년 죽은 민비를 궁인, 무녀 등과 함께 저주했다는 무고(무술로 남을 해치려고 함)의 옥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숙종은 그 뒤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되는 일을 없애는 법을 만들었다. (『인명대사전』)희빈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TV의 사극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희빈은 대부분 악녀로 나온다. 반대로 인현왕후는 선녀로 나오는데 그 이유가 두 사람 인품을 『인현왕후전』에 의해 단정짓기 때문이다. 『인현왕후전』은 어느 궁녀가 지은 내간체 소설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장희빈과 실록에 나오는 장희빈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장희빈은 조사석과 숙종의 종친인 동평군의 주선으로 궁녀가 되었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왕자 균을 낳아 소의로 승격되었다. 이때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다. 숙종이 왕자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 할 때 서인의 노, 소론 대신들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의 나이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 상소를 올려 후일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1686년 정월에 균을 세자에 책봉하고, 장소의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기사환국 이후 같은 해 5월에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에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자 서인 오두인, 박태보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참혹한 형벌을 받고 파직되었으며, 이후 조정은 남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 사건 후 숙종은 민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였는데 1694년 소론의 김춘택, 한중혁 등이 이를 눈치채고 폐비 복위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남인의 영수 민암 등이 이 문제를 기화로 조정에 남아 있던 서인 세력을 모두 제거하려고 김춘택을 비롯 수십 명의 서인을 감옥에 가두는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서인들은 당시 숙종이 총애하던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와 손을 잡은 동시에, 상인·역관 등 중인계층으로부터 복위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 받는다. 숙빈으로 하여금 왕비 장씨와 남인들의 잘못들을 고하도록 했다. 숙종은 숙빈 최씨의 말을 돋고 왕비 장씨와 남인에 대해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숙종은 민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던 중이라 오히려 서인들을 옥사로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한 후 사사시켰으며,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을 유배시키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윤지환 등을 등용했다. 그리고 중전으로 올랐던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시키고 폐위되었던 민씨를 복원시켜 왕비에 앉혔는데, 이 사건을 갑술옥사 라고 한다. 갑술옥사 이후 숙종은 사사시켰던 송시열, 김수항 등을 복작시켰고,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몰려날 때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 속에 폐비 민씨와 관련된 문구가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일부 신하들은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소론의 남구만, 윤지환 등은 세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그를 용서하자고 하여 이 사건은 무마되었다. 1701년 민비가 죽고 나서 취선당 서쪽에 신당이 발견되자 숙종은 이것에 관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희빈 장씨는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민비가 죽기를 기원하며 자신의 복위를 꾀했는데 그 방법들이 실로 다양하다. 실록에 따르면, 그녀가 인형이나 동자신인 명두(죽은 아이의 영혼을 이르는 말)의 옷, 검은 상자에 넣은 당의, 그리고 활과 화살 등을 이용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한다. 실제로 민비가 죽자 이 신당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숙종은 신당 사건의 전모를 보고 받고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죽이라고 했다. 같은 해 10월 숙종은 무고사로 장씨를 자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약을 받은 장씨는 그렇게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과연 장희빈의 죽음이 단순히 인현왕후를 저주해서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저주한 행동이 당시 어떤 죄에 해당하는지 알아보면 동국대 법대 김재문 교수는 저주를 한 행동은 살인음모죄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살인음모죄라 하여도 참형이 실제로 적용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성조의 계비인 윤씨, 인조의 후궁 조귀인,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 등 각 경우를 살펴보아도 저주한 행동 때문에 참형에 처한 경우는 없다. 장희빈의 경우 숙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고, 희빈 또한 숙종을 극히 사랑하였기에 사랑이 지나쳐 질투하여 저주를 하였기에 숙종이 그 일로 분노한 건 사실이지만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장희빈은 왜 악녀가 되었고, 숙종은 왜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게 했을까? 장희빈은 악하고 잔인하며 죽어 마땅한 인물은 아니었다. 장희빈은 시대를 앞선 사람이었다. 그녀는 후궁에서 왕비가 되었는데 그녀는 자기 마음대로 숙종을 움직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왕에 순종하면서 왕을 모시는 일에만 그치지 않고 왕이 사랑해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시대가 그러하듯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 눈에는 그러한 그녀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 장희빈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악녀가 되게 만든 것이 바로 당시의 정치상황이다. 숙종 이전 인조에서 현종까지는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면서 서로 비판을 통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붕당 정치였다. 하지만 그런 균형은 숙종 대에 들어와 깨어지고 서로 정권을 독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이다. 인현왕후 민씨의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세력의 핵심인물이어서 여흥 민씨 가문을 배경으로 한 인현왕후는 서인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역관 가문출신인 장옥정(장희빈)은 남인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환국이 일어날 때마다 둘의 위치는 바뀌었다. 남인이 집권을 할 때 인현왕후는 폐비되고,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재집권했을 때 인현왕후는 복위되고 장희빈은 다시 빈으로 강등된다. 이와 같이 누가 세력을 잡느냐에 따라 둘의 운명은 바뀌어야 했다. 『인현왕후전』의 경우 이것은 정조 재위 기간에 어느 궁녀가 지은 것으로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죽은 해와 정조의 즉위 년과는 80년차의 세월이 있다. 또한 그 시대에는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계열이 집권하던 시대였으므로 인현왕후가 선녀가 되고 장희빈이 악녀가 되는 건 뻔할 뻔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