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1. 마산시 쓰레기 소각장 입지 선정 갈등 사례· 연도별 사업 추진 과정 및 갈등 사례2. 부산 생곡 쓰레기 매립장 입지선정 갈등 사례· 연도별 사업 추진 과정 및 갈등 사례3. 환경기초 시설을 둘러싼 갈등의 해소 방안4. 결론1. 마산시 쓰레기 소각장 입지 선정 갈등 사례마산시 쓰레기 소각장은 마산시 진동면 인곡리 173번지 일원으로 늘은 마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면적은 52,528㎡ 이고 규모는 200톤/ 일 1기, 재활용 선별시설 100톤 / 일 주민 편익시설 1식이다. 소요되는 총 사업비는 60,823백만 원(국비 15,247 지방비 45,576)이며, 사업기간은 1998년부터 2009년까지이다.◎ 연도별 사업 추진 과정 및 갈등 사례1) 2000년마산시에서 기존 운영 중이던 쓰레기 매립장이 조만간 포화 사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어 이를 해결하고자 쓰레기 소각장을 설치하여 매립지 확보난 해소 및 2차 환경오염 등 쓰레기 처리문제의 근원적으로 해결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쓰레기 소각장의 조기 설치를 위해 1997년 생활쓰레기 소각시설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에 따라 2000년 12월 입지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12월 입지선정위원회 9차 회의개최- 전문가 검토의견서 내용 심의- 소각장 입지 결정(진동면 인곡리 223번지 일원)- 폐기물 처리시설 입지 결정통보(입지선정위원회 → 마산시)○ 시설규모: 200톤/ 일 1기, 재활용선별시설 100톤/ 일2) 2001년이 사업은 혐오시설로 인식되어 지역 주민의 조건 없는 반대 등의 지역이기주의 확산으로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며 이로 인하여 설치 예정부지가 몇 번이나 변경(가포 지역 → 진동면 지역)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하여 사업 전체 일정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하였고 주민과의 갈등으로 쓰레기 소각장 입지 선정 단계에서부터 지역주민, 사회단체, 유관기관 등 시민이 직접 참여를 유도하여 주민의 이해와 호응 속에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쓰레기 소각장 후보지를 쓰레기소각장 입지 결정을 반대하는 주변마을 주민들은 결사반대를 위한 특위를 구성하여 대응하는 등 결의대회 등을 통해 소각장 입지선정 철회를 요청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2월 7일 : 마,창 환경운동연합 주도의 반대대책위원 재활용시설 견학- 대책위원 및 지역주민 40여명 재활용처리시설 견학○ 2월 21일 : 의회 마산시 도시관리계획중인 인곡공원 및 폐기물처리시설 변경 결정안 심의결과 3월에 최종 결정키로 안건처리○ 3월 14일 : 마,창연합운동 주관 다이옥신 문제 진동주민 환경 강좌 개최- 다이옥신의 개념 및 인체와 동식물 피해사례 등○ 3월 25일 : 진동면 이장 사표등의 연대서명 활동(반대대책위원회 주관)○ 5월 15일 : 소각장 건설관련 기자간담회 개최- 언론사기자 9, 경찰 1, 생활민원국장의 관계 공무원 4명)○ 7월 1일 : 진동주민 소각장 건립반대 집회- 마산시장 참석 지역 발전을 위해 최대한 지원 등 지역주민의 이해 호소마산시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마을 주민숙원사업 지원 등 주민 선진지 견학, 주민 설명회 등을 통해 주민들과 협의에 나섰으나 해결방안 모색이 어려웠고, 사업 추진에 어려움이 예상됨에 따라 그 대안으로 환경기초시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통해 특정지역의 편중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1지역 1기피시설 분산원칙을 도입, 환경기초시설 입지 선정은 일단락 매듭지었다. 그러나 사업에 대한 주민의식이 잠시 둔화되는 듯 하였으나 환경시민단체가 참여하면서 시위는 더욱 활기를 띄어 갔다.○ 7월 8일 : 진동 초등학교 앞 등교학생 저지 등 등교거부 주도(투쟁 위원회)○ 7월 18일 : 폐기물 처리시설 변경관련 마산시 도기 계획 위원회 심의(자문)○ 7월-9월 : 주1회 정도의 시장면담요청 및 집회 계속됨○ 11월 1일 : 소각장저지 면민 총궐기대회(참여주민 1300여명)○ 11월 23일 : 소각장 관련 MBC TV 시사포커스 대담 방송○ 11월 29일 : 진동소각장 저지 투쟁위원회 위원 부안군(핵 폐기장)견학○ 12월 18일 : 폐기숙도 쓰레기 매립장의 사용종료 이후에 요구되는 매립장 수요에 따라 차기매립장 계획안이 수립되면서부터 입지선정이 시작되었다. 법적 절차인 폐기물 처리시설 입지계획 결정공고가 곧바로 이어졌으며 이에 따라 입지선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4월 : 신규 매립장 수요에 따른 계획안 수립○ 5월 : 폐기물 처리시설 입지계획 결정 공고○ 5월 31일 : 차기매립장 입지선정계획 결정 공고- 부산광역시 고시 제 1996-170호- 처리폐기물의 종류 : 생활 및 사업장 폐기물- 처리폐기물의 발생량 : 6,505톤 / 일- 시설의 소요규모 : 처리예상량 11백만 톤(15백만㎥)이상- 입지선정기준 : 부산시역 내 매립면적 660천㎡이상, 매립용량 15백만㎥이상입지선정위원회는 시의원 2명, 공무원 2명, 주민대표 4명, 전문가 3명 등으로 구상되었으며 특히 주민대표와 전문가의 위원비중을 2/3이상 되도록 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접근이 가능토록 노력하였다. 입지 선정위원회에서의 첫 과업은 차기 매립장에 대한 대시민의 공개모집 공고였다. 모집결과 3개 후보지가 응모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매립장 조성에 반영할 입지가 없는 것으로 조사되어 새로운 접근을 모색하게 되었다.○ 9월 23일 : 입지선정위원회 구성·운영(11명)○ 11월 2일 : 시민을 대상으로 한 차기매립장 공개모집 공고- 공모기간 : 1996.11.22~1996.12.30- 후보지 선정기준 : 부산·경남 지역 내 미립 면적 60만㎡ 이상, 반경 1㎞ 내 60% 이 상 동의서 첨부- 모집방법 : 시보 및 부산일보 지상 공고2) 1997년차기매립장 수요계획이 수립된 1년 후인 1997년 4월 폐기물매립장 입지 타당성을 분석하기 위한 조사용역이 착공되었다. 약 6개월이 소요된 용역은 1~3차에 거친 후보지 검토를 통해 최종 후보지로 압축해 갔으며 여기에는 자연 환경적 요인, 사회·경제적 요인, 토지이용 등의 다양한 요인을 근거로 분석되었으며 특히 최종매립지에 대한 처리시설계획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서 매우 유의미한 성과라고 서 유치지역에 대한 주민설명회가 공개·비공개적으로 수차례 이루어져 주민설득에 매우 큰 성과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입지선정위원회의 선정지역과 유치공모결과 신청을 한 지역이 중복되는 생곡마을과 명동마을을 차기매립장 최종입지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월 2일 : 명동마을 차기 매립장 유치 신청○ 1월 6일 : 유치지역 주민설명회 개최(생곡마을회관)- 참석자 : 생곡폐기물처리시설 대책위원회 주민 50여명○ 1월 11일 : 생곡마을 차기매립장 유치신청 - 가달, 생곡주민○ 1월 15일 : 가달마을 차기매립장 생곡유치 신청○ 1월 20일 : 녹산쓰레기 대책위원회 임원변경- 내용 : 위원장 정경환, 총무 임주영 → 최확화, 송유정 등으로 변경○ 1월 28일 : 입지선정위원회 개최- 내용 : 차기매립장 입지후보지 2개소 (생곡마을, 명동마을) 결정○ 2월 8일 : 차기매립장관련 녹산동 주민설명회 개최(녹산동 사무소)- 참석 : 녹산동 주민 약 150여명(설명자 : 환경국장)그러나 유치공모에 자발적으로 지원하여 선정된 주민들은 1999년 한 해 동안 지속적인 반대집화와 시의를 실시하였다. 시위는 약 3개월간 10여 차례 가까이 발생하였으며 주민 설득을 위한 설명회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2월 12일 : 녹산주민 집회 (생곡매립장 입구 도로변 점거, 주민 약 1,000여명 참석)- 차기 매립장 생곡유치 반대 및 거리행진○ 2월 24일~26일 : 녹산주민 집회 (생곡매립장 입구 도로변 점거, 주민 약 1,000여명)- 매립장 생곡유치 반대 및 거리행진, 시간부 화형식, 주민 삭발○ 2월 28일 : 유치지역 주민 설명회 개최(녹산동 사무소 회의실)○ 3월 11일 : 차기매립장 관련 녹산주민 집회(시청광장, 주민 약 600명)- 차기매립장 생곡유치반대 및 연산 R 까지 거리 행진○ 3월 16일~18일 : 녹산주민 집회(생곡매립장 입구 도로변, 주민 약 1,500여명)- 차기 매립장 생곡유치반대, 시장님 면담 요구○ 3월 27일 : 녹산주민 시장 면담(부시장 회의실, 001년은 2000년에 이어 차기 매립장 조성을 위한 대상지의 세부적인 지표조사, 주민설명회가 지속되었으며 특히 타 시도의 매립장 운영을 견학하여 시설의 환경영향과 지역발전에의 기여 등을 확인하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특히 매립장 주변지역의 지원과 관련한 협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최종 합의에 이르는 순차적인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1월 10일 : 녹산환경대책위원장 및 임원진 변경(최학환 → 임윤성)○ 1월 30일 : 차기매립장 조성에 따른 문화재 지표조사- 차기매립장 조성에 따른 문화재 지표조사 실시(시립 박물관 조사보존실장)○ 2월 15일 : 환경영향평가서 주민 설명회 개최(녹산동 사무소 회의실, 주민 55명)- 차기매립장 환경영향평가서 주민 설명회 개최○ 2월 19일 : 생곡폐기물처리시설 대책위원장 구속○ 3월 14일~16일 : 녹산동 주민대표 국내 매립장 견학 실시- 장소 : 울산시매립장, 대전시매립장, 수도권매립장- 인원 : 15명 (임윤성 등 13인, 매립시설담당 등 2명)- 내용 : 차기매립장 입지 확정에 따른 매립장 인근주민들의 국내 쓰레기 매립장 견학 을 통하여 차기 매립장 조성에 원할을 기하기 위함○ 4월 20일 : 녹산환경대책위와 주민지원관련 회의개최(시청 16층 회의실)- 참석 : 위원장 임윤성 외 6명, 환경국장, 청소관리과장 등- 내용 : 매립장 주변 주민지원관련 주미요구사항 건의 및 답변○ 4월 23일 : 매립장 주변 환경영향권 결정 관련 협의- 장소 : 청소관리과장실- 참석 : 부산대학교 박태주 교수 외 1명, 청소관리과장 등- 내용 : 매립장 주변 환경영향권결정관련 협의이후 2001년 9월 18일 5년여를 끌었던 차기매립장 후보지 결정과 차기매립장 주민지원사항 등에 대한 모든 사항에 대한 최종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4월 27일 : 녹산환경대책위와 주민지원관련 환경국장과 합의서 작성- 장소 : 환경국장실- 참석 : 위원장 임윤성 외 3인, 환경국장, 청소관리과장 등- 내용 : 매립장 주변 주민지원사항에 대.
목 차I. 서론II. 반 고호의 생애1. 반 고호의 정신세계2. 반 고호의 예술 이념III. 고호 작품의 형성 배경1. 밀레2. 인상주의3. 우끼요예4. 고갱IV. 고호의 시기별 작품 특징1. 색채(1) 무겁고 암울한 색채(2) 필치와 색채의 전환기(3) 필치와 색채의 일체기(4) 격동의 필치, 온화한 색채(5) 불안한 필치, 침잠한 색채2. 형태V. 결론I. 서론흔히 ‘광기어린 화가’ 또는 ‘저주받은 천재’ 등으로 표현할 정도로 영화 같은 인생을 살았던 빈센트 빌렘 반 고호(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작품과 인생이 깊게 연결된 전형적인 화가이다. 그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화방의 점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후 책방 점원, 교사, 전도사 등의 직업을 전전하며 냉혹하고 비정한 현실을 깨닫고 나서야 화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그는 체계적인 미술교육과정을 받은 화가가 아니라 기존의 틀을 뿌리치고 인간적 내면세계로부터 나오는 감성을 토대로 하여 표현한 화가이다. 이러한 반 고호의 예술적 사고관은 기존 전통적인 예술관과 동떨어져 있었는데 태양빛에 근거하여 색채의 화려함을 통해 그리는 방법을 규명하고자 하였던 인상주의와 달리 반 고호 자신의 주관적인 표현 방법과 함께 그만의 예술성을 갖추었다.예술적 동기마저 순수한 화가의 입문이 아니라 삶의 현실 속에서 뜻하지 않는 좌절로 인한 결과였으므로 반 고호 자신의 내면적 고뇌를 그림으로써 승화하고자 하는 의도로부터 출발한 반 고호의 회화는 또 다른 삶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표현성에 있어서 형태와 색채는 정신 영역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반 고호의 영혼의 세계였으며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을 사실적이고 세밀한 관찰력을 통해 반 고호 자신만의 내면적 세계로부터 다시 재현하여 표출한 심리적 고백이라 할 수 있겠다.II. 반 고호의 생애1. 반 고호의 정신세계네덜란드의 한 빈촌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러 직업을 거치다가 나중에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그가라는 반 고호의 말에서 자연과 인간, 자기 자신과 내적 욕망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내부의 좌절과 불안, 기쁨 등의 여러 정념을 색체의 무한한 감정과 붓 자국을 통하여 자기의 독자적 표현을 시도하였다. 이것은 현실의 세계를 인간의 내적 세계로 바꾸고 그것을 다시 자연의 생명감으로 율동 짓게 하였다.이와 같이 반 고호의 예술세계는 자연에 부가된 인간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것임을 뜻한다.반 고호는 자신의 인생과 예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나에게서 가장 완벽한 것, 그것은 자연에 있어서는 폭풍우요, 인생에 있어서는 고뇌이다” 이것은 예술과 인생, 즉 예술적 가치의 추구와 인간적 드라마라 할 수 있는데, 장 레이마리(Jean Laymarie)는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의 예술을 개인적인 운명과 불가분의 것이다. 그의 작품의 하나하나는 그의 존재의 작렬이요 그의 불안의 외침이다.”이것은 고호에게 있어서 표현은 어떤 명확한 구성, 합리적 구성보다는 원초적인 생명감, 인간의 깊은 내면의 소리를 테두리를 지을 수 없는, 곧 삶 그 자체였고 자연과 소외된 자를 사랑한 강렬한 색과 붓 터치를 통해 힘과 정열의 화가로 미술사의 큰 획으로 자리 잡게 된다.III. 고호 작품의 형성 배경1. 밀레밀레처럼 고호도 항상 비참한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드렌테, 누에넨, 헤이그에서 밀레풍의 작품을 끊임없이 제작했다. 수평선 수직선, 대각선이 교차하는 초기 풍경화에는 물론 농민, 노동자들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긴장된 실추엣(silhouette), 인물화의 시선까지도 거의 밀레의 형식을 빌려 오고 있다.밀레는 반 고호 일생을 통해 지속적으로 반 고호 관심을 끈 화가였다. 반 고호는 그를 존경하며 아버지 밀레, 혹은 어느 젊은 화가들의 상담자이며 ‘스승’이라는 표현을 썼다.밀레의 그림은 그에게 근대예술의 긴장 그 자체였다. 반 고호의 초기작품들은 순수한 미학적 주체보다는 사회적 주체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그림들은 언제나 노동자 농민 등 던 것이다.고호는 인상주의의 본질적 바탕인 자연주의와 객관주의에서 출발하면서도 외광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색채가 아닌 자연에서 받은 감동 자체를 내면에서 나오는 색채로 표현하려 했다. 이러한 그의 애착은 모든 사물 그 자체에 집중되고 하나의 손, 한 개의 의자, 한 송이의 꽃을 그리면서 그것에 의해 그들 사물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려 하였는데 결국 고호는 인상주의의 본질적인 자연주의와 객관주의에서 출발하지만 그가 대상에서 받은 감동 자체를 색의 점들로 표현하려 했던 것은 인상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의 점묘 기법은 점점 굵은 터치와 선 획으로 변모되고 색채의 점진적 톤을 무시하고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나타나는 것은 그의 격렬한 감정의 표현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호는 틀림없이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밝은 색채를 배웠지만 그것은 현실 세계의 밝은 광휘를 캔버스 위에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대로 현실과는 한 겹 다른 정신적 시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인상파적인 외광과 함께 점묘주의 수법의 도입은 그의 화면을 한결 밝게 하고 일종의 서정성까지 지니게 했다. 요컨대 그의 파리에서의 생활은 이제까지의 그에게 결여되어 있던 감수성과 광선, 색체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며 이것은 파리시기의 뒤를 이을 아를르 시기에서 고호 본연의 독창적 양식을 발견하게 된다.3. 우끼요예고호를 색채에 눈뜨게 한 것은 신인상파 화가들과 교류뿐만 아니라 두 개의 요인을 적어도 더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일본의 우끼요에(일본의 판화)와의 접촉이며 또 다른 하나는 남부 프랑스의 태양이었다.19세기 중반 일본과의 교역이 시작됨에 따라 일본 골동품 중 일본 판화는 그 예술적 진가로 인해 많은 프랑스 화가들은 일본 판화를 열광적으로 수집하게 되었고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렇듯 우끼요에를 중심으로 한 일본 미술은 이미 1856년부터 파리에 널리 대중화되었는데, 1880년에는 사무엘 비의 가게를 중심으로 일본 목판화의 공급은 절정에 달하였다.아를르의 침실 고호와 고갱을 인상주의 시각에서 볼 때 이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재현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대상의 외면에서 찾을 수 없는 이념의 세계,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 혼의 영역까지 탐구의 눈을 돌려야 한다는 데에 그 의의를 두어야 한다. 고호는 인상주의가 시각적 인상에 너무 치우쳐 빛과 색만을 쫓음으로서 강렬한 정감의 표현을 경시했다고 느꼈으나 고갱은 보다 단순한 원초적 아름다움을 아쉬워했다. 이들은 그 시대의 미술에 부족한 새로운 것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것의 탐구에 일생을 건 것이다.IV. 고호의 시기별 작품 특징1. 색채고호의 작품세계 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주관적인 감성을 살린 강렬한 색채다. 그는 대상으로부터 받은 감동 그대로 화면에 표출하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그에게 색은 시각대상의 성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색으로 취급된다. 현실의 감각적인 대상과는 관계없는 자신만의 감정을 이입시켜 보여주는 색이다.고호는 빛에 따른 색 변화를 찾아다니기보다는 태양 자체를 표현하려 했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며 사는 것처럼 고호 또한 태양처럼 정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세계의 열정을 끊임없이 회화 작업으로 나타내려 하였으며 이것이 구원의 방법이라 생각했다.고호의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색은 노란색·녹색·붉은색·파란색·흰색이며 이러한 색은 터치와 함께 쓰여 일정하게 면을 채운다. 특히 노란색이 주로 쓰이고 있는데 고호에게 있어서 노란색은 종교적인 상징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고호는 중세 성화의 노란색이 지니는 색의 영원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다.고호에게 있어서 색이란 자신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자연에 충실한 색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부여한 색으로서 고호가 거주했던 지역과 시기에 따라 색채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1) 무겁고 암울한 색채 (네덜란드 시기, 1880-1886)네덜란드시기에 있어서 고호 색채의 특성은 네덜란드 북유럽 특유의 자연풍토와 이 gh MuseumNetherlands예술적인 자유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파리 시기에 그린 은 누에넨 농부 초상화를 상기시키는 어두운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나, 점차 인상주의의 밝은 색채와 점묘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어 색채가 밝아지고, 파리시기에 마지막으로 그린 은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보다 당당해지고 있다.특히 점묘적 수법으로 그린 몇 점의 자화상은 색채와 필촉의 강함이 눈을 중심으로 하는 이물의 장신 표현과 아주 멋지게 맞아 떨어진다. 빨강과 청색과 황색의 강렬함은 아를르에서 비약할 소지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고호는 한색과 난색의 배합에 강렬한 황색을 가함으로써 색채 자체가 정신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이미 파리 시절에 알게 되었다.이 시기에 그는 특별이 구도상의 연구가 없는 그의 화면에 구도에 대신할 체계를 주게 되고 정신 표현을 가능케 하고 있다. 자화상에서 수염, 밀짚모자, 배경 공간등은 눈을 중심으로 하는 소용돌이 모양의 선회 운동을 하며 얼굴이 지니는 고뇌를 묘사하고 있다. 같은 풍경화에서도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필촉의 조화와 리듬은 그의 데생에도 표현되고 있으며 초기의 목판화나 연필 데생과 달리 이 시기의 데생은 짧은 선의 고운 리듬이 전체의 형상을 생생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일반적으로 자화상에 집착하는 화가는 내면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모색하는 타입의 화가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고호의 자화상은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으며 그에게 있어서 자화상은 결코 외관의 풍모를 화폭에 옮기는 작업으로 그치지 않는 것이었다.고호는 항시 자기 자신과 마주 대결하면서 그러한 응시를 통해 몇 년 또는 몇 십 년을 두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절망하면서도 끝내 끈질긴 생애 의욕에 정열을 태우는 한 거대한 인간상을 그려내고 있다. 고호는 이 파리 시기를 통하여 색조를 보는 눈에서 색채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그러나 그에게 있어 파리의 화려한 생활, 자유스런 분위기도 그를 안정시킬 수 없었다. 고호는
전 미 부통령이자 200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인 엘 고어가 지은 불편한 진실은 이전 습관적으로 해 오던 일들, 그리고 잘 못 알고 있던 사실들이 모두 지구 온난화를 촉발하는 행위이고 이를 고치기 위해서 인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환경서적이다.그는 이 책에서 자녀에게 물려줄 소중한 자연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보이며 인류가 앞으로 겪을 자연 재앙을 경고하고 있는데 인간으로써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지구 온난화에 관련된 의심과 논란에 대해서는 한 연구 논문의 분석 결과를 제시하며 거대 석유 및 석탄 회사들의 숨은 계략과 이들을 배후로 한 대중 매체의 행위를 고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진실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때문에 고어는 환경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사실을 왜곡하는 현 정부를 비난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미국인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작은 것이 모여 큰 변화를 이룰 것이라 믿고 사람들의 의식 변화를 기대하는 점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지구 온난화 방지에 동참하기를 촉구하고 있다.엘 고어는 이산화탄소 증가가 지구에 어떤 위기를 가지고 오는지 논리적으로, 그리고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킬리만자로에 쌓인 눈을 비롯하여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의 산악 빙하들이 녹아내리는 현상을 보여주어 독자로 하여금 현재의 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극지방과 그린란드 빙하의 붕괴가 가져올 비극을 예측하여 현재 추세대로 진행 될 경우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대도시의 해안선 변화와 물 부족 현상이 가져올 위기에 대해 경고한다.또한 현 추세로 지구 온난화가 지속되면 지구는 커다란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먼 훗날 일어나게 될 미래의 사건이 아닌 바로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상기후로 인한 폭염, 태풍, 홍수와 가뭄 등과 같은 재해가 그 예이다. 역사상 가장 무더웠던 해 21개 가운데 20개가 지난 25년 안에 몰려 있다는 점과 1970년대 이래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발생하는 폭풍의 발생 빈도와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 인도와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홍수와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은 점을 사례로 들어 그 주장을 뒷받침 한다.고어는 탄광의 카나리아 두 마리, 즉 위기의 예언자 역할을 하는 곳으로 북극과 남극을 언급하기도 하였는데 이 두 마리의 카나리아인 남극, 북극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지구라는 이름의 탄광에 적신호가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북극에서는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얼음끼리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고, 나아가 위기에 처한 북극곰 이야기를 통해 생태계의 파괴 현상뿐만 아니라 기울어진 나무와 무너진 건물, 그리고 손상된 구조물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인간 사회에 들이닥칠 위험 또한 생각토록 한다.다음으로 남극에서의 빙하 해빙이 해수면을 상승시켜 세계 지도가 완전히 뒤바뀔 것이라는 점을 구체적 자료와 함께 제시한다. 이러한 자연재해로 인해 생긴 피난민의 모습은 머지 않아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으며, 더욱 무서운 사실은 극지방 빙하가 사라질수록 지구는 태양 광선을 더욱 흡수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구 온난화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지구 온난화는 생태적 역학 관계를 파괴하고 자연에 틈새를 만든다. 이 틈새는 해충의 개체수와 영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질병이 창궐할 비극을 불러온다. 이것은 지난 30년 동안 새로운 질병들이 30가지나 생겨났으며,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듯한 질병들까지 되살아나고 있는 사실에서 그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다.‘불편한 진실’은 책의 후반부에서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우리는 지구 온난화가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크게 문제 삼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 발생할 위기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편이다. 고어는 이러한 현상을 거대 석유·석탄, 에너지 회사와 부시 대통령 정부의 교묘한 책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들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지구 온난화에 대한 진실을 불편해 하고 철저히 감추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함에 대해 익히 들어왔을 것이다. 그 명백한 예로 컬럼비아 대학 교수 게리 레드야드의 한글은 견줄 데 없는 언어학적 호사다. 라는 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가 인정한 문화유산인 한글을 얼마나 바로 쓰고 있는지에 대해서 별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 실수를 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용어를 벗어나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매체나 신문, 심지어 정확성이 요구되는 각종 언론 매체에 이르기까지 오용되고 있다. 한 예를 들자면 언제부터인가 삐치다 라는 표현이 삐지다 로 잘못 표현되어 우리의 언어생활에 스며들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언어 사용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공중파 방송에서조차 잘못된 언어 표현을 비판의식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시청자 또한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학습하면 결과적으로 사전적 용어가 전혀 다른 두 표현이 왜곡되고 얽혀버리는 경우를 낳을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우리말 오용 사례 제시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현재 우리말 사용에서 보이는 문제점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다소 관심을 두었다.우리말은 언어의 특성 중 보편성과 역사성 그리고 편의성에 의해 점차 그 나름대로 변질되어가는 것이 실정이겠지만 요즘 방송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 우리말의 오용 빈도수가 점점 높아져 가고 그것을 웃음으로 넘기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칠칠맞다 라는 표현을 예로 들어보면 막힘이 없이 민첩하다,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다 라는 표현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본 뜻은 좋은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칠칠맞지 못하다 혹은 칠칠치 못하다 라는 말로 고쳐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송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다른 사람의 서툰 모습을 보면서 칠칠맞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남사스럽다 라는 표현 또한 흔히 잘못 쓰고 있는 표현인데 남세스럽다 는 표현으로 고쳐 써야 할 말이다. 남의 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는 뜻을 가진 남우세스럽다 가 줄어서 된 말인 남세스럽다 가 현재는 남의 조롱이나 비웃음을 받을 만 하다 는 다소 부정적인 뜻을 가진 말투로 바뀌어 남사스럽다 로 오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금연구역에서는 흡연을 삼가합시다 와 같은 표현도 지적 대상이다. 삼가합시다 는 삼갑시다 라는 표현으로 고쳐야 하며 마찬가지로 삼가해야 는 삼가야 로 고쳐야 옳은 표현이다. 이러한 잘못된 표현을 프로그램의 진행자 또는 출현자가 무심코 던진 말로 간과할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현 실태는 친절히 자막까지 덧붙여서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학습시킨다.이러한 현상은 대중가요에서도 빈번하게 드러난다. 몇 년 전 가수 임창정이 부른 날 닮은 너 의 가사 한 부분에서는 모두 같기에 두려워 겁이나 라는 구절이 있다. 당시 이 노래를 들으며 의아해 했던 점은 겁이나 라는 구절을 겁시나 라고 발음했던 점이다. 더욱이 당시 가요프로그램에서는 노래 자막까지 겁시나 라고 표기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었다. 또한 윤도현 밴드의 잊을께 란 곡이 있다. 대중가요에서는 이처럼 ~께 붙이들이 무척 많다. 나 행복할께요 편지할께요 내가 사랑할께요 내게 남은 사랑을 다 줄께 간직할께요 처음 사랑을 ...... 상기 단어들의 소리는 분명 된소리로 난다. 그러나 한글 맞춤법(53항)에서는 된소리로 나더라도 예사소리로 표기하도록 명시되어 있다.방송은 청소년들에게 영향력이 높다.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서 오용된 우리말은 수동적으로 매체를 수용하는 대중, 특히 청소년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 대중 매체에서의 연예인은 청소년들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표현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왜곡시킨다면 현재의 실수를 후세까지 대물림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방송에서의 맞춤법만큼은 정확성이 요구되어야 할 것이며 틀린 표현이 있을 경우 올바른 표현으로 수정하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대중매체에서의 언어 오용 사례는 방송을 떠나 광고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 , 내 마음속 설레임 등과 같은 문장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거칠다 와 같은 ㄹ 받침을 가진 용언에 관형형 어미가 연결되면 ㄹ 이 줄어드는 것이 원칙이나 TV 광고에서 거칠은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그 말이 다소 어색하지 않다는 이유로 한글 맞춤법을 거스른다면 놀이터에서 놀으는 , 칼을 갈으는 등과 같은 문장까지 허용해야 한다. 설레임 과 같이 언뜻 보았을 때 틀린 곳을 지적하기 어려운 단어도 있다. 설레임 은 설레이다 가 활용된 표현이지만 설레이다 라는 단어 자체가 설레다 의 잘못된 표현으로 설레임 은 설렘 으로 고쳐 써야 바른 말이 되는 것이다. 광고는 짧은 시간 내에 수용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을 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광고에서의 언어 오용사례는 일반 방송 프로그램에서의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일반 방송에서의 실수는 부수적인 조치로 다소 수정이 가능하나, 광고에서의 언어오용 사례는 광고 기획 단계부터 재조정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수정이 매우 어렵고 이에 따른 결과로 매체 수용자에게 그릇된 정보를 효과적으로 인식시켜버릴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광고주는 자사의 제품 및 서비스를 홍보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한글 맞춤법을 위배하면서까지 벌이는 광고활동은 지양되어야 한다.언어의 오용사례는 TV라는 어느 한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정보화시대에 빼놓을 수 없는 매체중의 하나인 인터넷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의 훼손 정도는 문명과 과학이 발달 할수록 깊어지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 사용인구가 3000만에 이르는 현 시점에서 볼 때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연령에 구별 없이 누구나 쉽게 접속할 수 있는 인터넷의 특징은 이제 막 우리말을 배울 시기에 놓인 어린아이들의 바른 우리말 학습을 방해할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 소위 신종 외계어 라 불리는 채팅어는 재차 거론할 필요 없거니와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인터넷상에서 상대 행동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허접 플레이 등과 같은 말은 좋은 것이 빠지고 난 뒤에 남은 허름한 물건 이라는 순 우리말인 허섭스레기 가 잘못 발음된 허접쓰레기 에서 나온 말이다. 허접 은 도망친 죄수나 노비 등을 숨겨 묵게 하던 일 을 뜻하는 명사로 우리가 알고 있는 뜻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말이다.
중국의 근대화 운동과 실패I. 머리말19세기 이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를 침입함에 따라 동아시아 각국들은 커다란 혼란과 치명적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본은 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통해 문호를 강제로 개방 당하였으나, 이후 독자적인 노력에 의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성공함으로써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반면에 조선과 중국은 독자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고,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21세기인 지금, 종래의 제국주의는 표면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서양 열강, 특히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는 유효하다. 근대화에 뒤쳐졌던 우리 아시아가 정보화에서는 앞서 가기 위해서는 당시 아시아에서 근대화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고 오늘의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며, 오늘날 우리 역사를 만든 것은 우리가 지나 온 모든 역사의 총합이다. 비록 아시아의 근대화와 그 실패는 옛날 옛적에 지나간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정보화 시대를 준비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안겨 주고 있음을 자각하여야 한다. 최근 중국 대륙의 놀라운 성장과 발전은 지난 19세기, 20세기 초의 불행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바 크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여 그 의미를 재해석할 때 다시금 살아나 오늘의 무한한 보물로 전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II. 중국의 개혁과 근대화 운동1. 양무운동(洋務運動)과 그 실패중국의 근대화 운동은 양무(洋務)·변법(變法)·혁명(革命)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청조는 아편 전쟁과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서양의 군사적 위력을 알게 되었고, 더욱이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으로 안팎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조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내세우며 서양을 모델로 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각종 근대 산업을 일으켜 난국을 타개하려는 근대화 운동을 추진하였으니, 이것이 제 1단계의 양무운동이 개인적 축재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기업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 예로서 이홍장은 사망 후 자손에게 4,000만냥의 재산을 남겼다고 한다.넷째, 원래 양무파라는 단일 당파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이라는 각각의 우두머리를 정점으로 하는 여러 집단이 병립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들은 상호 대립 항쟁하는 관계로서 결집된 힘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이는 만주 지배층의 한족 분열 정책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다섯째, 자금에 있어서도 그나마 충분하지 못한 자금을 무계획적으로 사용하고 혹은 몇몇 사안에 중복 투자하기도 하였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각 집단의 필요에 따라 자금 투자가 좌지우지되었다.이처럼 양무운동은 정책적인 면에서 비효율적이며, 중앙 정부에 의해 체계적으로 추진되지도 못하였다. 같은 시기의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은 그 주체가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고 추진하였던 중앙의 개혁세력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할 때 운동의 성격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중화적 세계 질서의 변방에 위치한 섬나라라고 멸시해 온 일본이 같은 시기에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사실은 대조적으로 중국 양무 운동의 실패와 비교해 볼 수 있겠다.청일 전쟁의 패배는 중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먼저 중국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하는 양무 운동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이홍장 등 양무파 관료가 실각되었고, 이에 대신하여 변법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화 질서의 중심 나라 중국이 변방의 섬나라 일본에게 동아시아 세계의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다. 이와 함께 열강은 청조의 무력함을 간파하고 중국의 침탈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철도부설, 광산개발, 자본진출로 중국을 반식민지화 하였고, 근대 시설 설립을 위한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높은 이자와 함께 불리한 차관 조건 등으로 중국은 이중으로 자본주의 열강의 수 있을 만큼 성숙치 못하였고 운동을 지지하는 정치적 역량도 매우 빈약하였다. 무엇보다도 민족 부르주아가 성장해 있었다면 옛 체제에 한쪽 발을 걸치고 있던 캉 유웨이 등의 변법파가 등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메이지유신 당시의 일본보다도 훨씬 냉엄하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그들이 중국을 지배하는데 수월하도록 극히 한정된 범위까지의 개화에는 동의하였지만, 개혁을 통한 중국의 자립은 열강에 의한 중국 지배와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근대화 운동은 실패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끝으로 당시 중국은 청·일 전쟁 이후 배상금 등으로 재정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변법을 집행하는 데에 있어 충분한 재원을 지급할 수 없었다는 점 역시 무술 변법이 실패한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3.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의 좌절무술개혁이 위로부터의 구국운동이라면 의화단은 반기독교의 선두에 서서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내건 종교집단의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배외운동(排外運動)이다. 1899년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의화권(義和拳)을 익히면 총에 맞아도 죽지않는다는 미신적 신통력을 믿고 군중을 모아 교회를 불태우는 반기독교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중요 구성원은 젊은 농민층으로 이밖에 운송 노동자, 도시 빈민, 해산된 병사, 승려나 도사들도 있었다. 이후 일부 중소지주나 보수적 향신들의 참여도 크게 늘어갔다. 초기에는 반기독교 운동으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세력이 확대되면서 반제국주의·배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열강의 침입으로 비참한 생활을 면치 못하고 있던 일반 민중은 고난의 현실시계로부터 신천지로 나아가게 된다는 환상과 열광에 사로잡혔으나, 연합군의 무력간섭과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한 서태후 일파의 진압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청조는 프랑스가 제시한 강화 내용을 토대로 의화대강12조(議和大綱12條)를 결정하여 이른바 신축조약(辛丑條約, 北京議定書)이 체결되었다.(1901. 9.)반기독봉으로서 혁명 운동의 기수가 되게끔 하였다.변법론자들이 청조를 그대로 두고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주장한 반면, 쑨원(孫文)을 비롯한 혁명파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1894) 청조 타도와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혁명운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혁명파들은 이를 전제군주제에 대한 입헌군주제의 승리임과 동시에 유럽에 대한 동양의 승리로 간주하고 혁명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905년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를 결성하고,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한다[民族主義], 백성의 나라를 세운다[民權主義], 토지 소유권을 균등히 한다[民生主義]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주장하였다.1911년 5월 극도의 재정난에 빠진 청조는 민족 자본으로 부설하려던 간선 철도를 국유화하고 이를 담보로 외국의 차관을 얻으려 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대하는 폭동이 쓰촨성에서 일어나, 각지로 파급되었다. 10월 10일에는 우창에서 군대가 혁명을 일으켜 성공하였고, 각지의 혁명파가 호응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듬해 1월, 혁명파는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건국을 선언함으로써 2천년 이상 유지되던 황제 지배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공화정 체제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혁명파의 중화민국은 민중적 기반이 약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할 수는 없었다.청조는 화북 군벌의 총수 위안 스카이(遠世凱)를 기용하여 이 위기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그는 도리어 혁명파로부터 임시 대총통직을 약속받고 1012년 선통제를 퇴위시켰다. 베이징에서 쑨원에게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받은 위안 스카이는 혁명 정부가 제정한 임시 약법을 무시하고 전제 지배를 강화였다. 그해 10월 정식 대총통이 된 그는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언론과 사상을 탄압하면서 독재권을 확립하였다. 위안 스카이는 일본의 강압적 21개조 요구에 굴복하였으며(1915. 5) 시대 착오적 황제가 되고자 하였으나 국내외의 거센 반발로 황제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울분 끝에 병사하였다.(191였기 때문에 서양과 같은 자연과학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뿐이라고 주장하였다.그러나 후스의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는 중국 지식인들은 청대의 고증학이 애당초 방법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추상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구체적 현실 세계로 내려온 점에서는 이전의 관념론자들보다 한 발 나아간 것이지만 이들이 최종적으로 진리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고대 경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고대 경전이 쳐 놓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나아가 그들은 경험과 구체적인 사물 뒤에 숨겨진 보편적인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고 비판한다.중국 과학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죠셉 니덤(Joseph Needham)은 펑여우란이나 후스와는 달리 사회적·경제적 구조를 고려하여 사상사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하였다. 중국에서 근대 과학이 발생하지 못한 이유는 중국인들이 지적으로 서양인들에게 뒤져있기 때문도 아니고 중국의 사상적 전통에 잘못이 있어서도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중국의 봉건 사회를 비세습적 엘리트들이 꾸려 간 관료적 봉건제 로 규정하고 관료체제는 정교하고 합리적인 작동 장치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는 중국의 과학, 기술이 서양을 앞서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역할은 했지만 근대 과학이 태동하기에는 좋지 않은 토양이었다는 것이다. 문인 중심의 관료체제에서는 유럽의 귀족적이고 군사적인 봉건 체제에 비해 상공업이 발달할 여지가 적었기 때문이다.20세기 사회경제사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중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체계가 결여되어 있었던 원인을 중국 사회를 지탱해 온 가치체계인 유가 윤리 때문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이 자기를 통제하고 세계를 통제하는 일종의 자발적이고 내재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들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유가윤리와 기독교 윤리는 모두 이성주의 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성주의는 완전히 상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