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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3사회] 대한민국정부의 수립과정
    8.15 광복이 가능했던 까닭은?연합국의 승리 : 일본의 무조건 항복 끈질긴 독립 투쟁의 결과 - 국내 독립 운동 – 3.1 운동 등 - 항일 무장 투쟁 – 만주, 연해주, 중국 대륙 - 임시 정부 활동과 한국 광복군의 대일 항전 - 잇따른 의거 활동 – 의열단, 한인 애국단의 의거 연합국의 독립 약속 : 카이로 회담, 포츠담 선언남 북 분 단 (38 도선) 신탁 통치 문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5.10 총선거)2.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은?학습 개요학 습 목 표국토가 분단된 원인 과 과정에 대해 알고 이야기할 수 있다.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남 북 분 단 지 도38 도선 시찰1) 남북 분단국토의 분단 : 일본군의 무장해제 명목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에 각각 미국 군과 소련군이 진주 미 군정의 실시 : 3년 간 남한 정국의 혼란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의 대립 심화 정당, 사회 단체의 난립 정국 혼란 계속 북한의 공산화 민족주의 계열 : 조만식 등 공산주의 계열 :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치권력 장악 공산화에 대한 반발 : 신의주 등지의 반공 의거미군과 소련군의 진주와 양국 간의 합의로 38도선에 의한 국토 분단이 이루어졌다.신탁 통치 :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강대 국이 일정 기간 통치하는 것용 어 정 리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시기 : 1945년 12월 참가국 : 미국, 영국, 소련 결의 내용: 신탁통치-미.영.중.소의 한국 신탁 통치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한국 임시 정부 수립2) 신탁 통치 문제반탁운동의 전개 -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결성 전국적으로 확산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미.소 공동 위원회의 개최 목적 : 신탁 통치, 임시 정부 수립 논의 개최 : 1946년, 1947년 2회 개최 결과 : 미.소의 의견 대립으로 결렬한국 문제의 유엔 상정 유엔 총회 :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설치,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 결의 소련의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입북 거절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 (1948) 남북 협상의 추진 (김구, 김규식) : 통일 문제 협의 실패 남한 단독 총선거(1948.5.10) : 우리 나라 최초의 민주 선거 정부 수립 과정 : 대한 민국 제헌 국회의 구성 헌법 제정(7.17) 초대 대통령 선출(이승만)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8.15) 의의 : 우리 국토에 우리 민족이 세운 최초의 민주 공화국내용 총정리1.남북분단 ①국토 분단 : 미소 군대의 진주, 38도선 ②민족 분단: 미·소의 냉전 심화 →정치적 분할선이 된 38도선 ③미군정하의 남한: 정국의 혼란 ④북한의 공산화2.신탁 통치 문제 ①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시기, 참가국,결의 내용②반탁 운동의 전개내용 총정리3.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①미 ·소 공동 위원회 개최: 목적, 개최, 결과 ②UN의 한국 문제 개입: 소련 거부 ③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 5·10 총선거 →대한민국 제헌국회 구성 →헌법 제정(7.17)→ 대통령 선출 (이승만)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1948. 8.15.)북한의 ○○○국토 분단대한민국 정부의 수립미­소 냉전미­소 군대 주둔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 개최미국, 영국, ○○○○ 운동○○에 상정○○ ○○○ 실시국민 총동원 위원회 결성남북 협상심화실패실패신탁통치확산{nameOfApplication=Show}
    교육학| 2003.10.07| 13페이지| 1,000원| 조회(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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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교육] 역사교육학과소개 평가A좋아요
    월 7, 8 교시 역사 교육학과 2001260012 김 지 혜역사 교육학과는한국사, 동양사, 그리고 서양사의 세 전공분야로 나누어 교과목을 개설하고 다시 고대,중세,근세 및 최근세의 각 시대별로 구분하여 사회,경제,정치,문화,사상 등 한 시대의 다양한 특성을 연구 교수하며 또한 고적답사, 학술발표회 및 특강 등을 개최하여 활발한 연구활등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각 분야별 교과 교육 및 교생실습의 기회를 제공하여 졸업시에는 중등학교 사회과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수여하고 있다. 그리고 대학원 석사과정이 개설되어 있기 때문에 전문 연구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는 기초과정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소개 내용학과 교육 목표 교과목의 관계 체계 교과 과정신라대학 교육 목표사범대 교육 목표역사교육과 교육 목표신라대학 교육 목표진리탐구와 실천 전문 능력 함양 사랑과 봉사의 실천 문화의 창조 진취적인 여성상 확립사범대학 교육 목표합리적이고 헌신적인 교사상 확립 성숙된 인격자로서의 자세 제고 학문적 수월성 함양 다양한 수업기법과 기술의 습득 중등학교 교사 및 교육관계 전문가 배출학과 교육 목표역사의식의 배양을 통한 현실인식의 능력 함양 중등학교 사회과 교사로서의 전문지식 습득 국제적 문화교류를 위한 자질 향상역사 의식 배양을 통한 현실 인식의 능력 함양한국 고대사 중국 고대사 서양 고대사 한국 중세사 중국 중세사 한국 근세사 중국 근세사 서양 근세사 한국 최근세사 중국 최근세사 서양 현대사관계 교과목중등학교 사회과 교사로서의 전문지식 습득역사 이론 지도법 한국 사상사 지도법 한국사 교재론 한국사 지도법 서양사 교재론 서양사 지도법 동양사 교재론 정치학 지리학 경제학 고고학 개론관계 교과목국제적 문화교류를 위한 자질 향상한국사 입문 동양사 입문 서양사 입문 일본사 한국사 연구론 동양사 연구론 서양사 연구론관계 교과목학년별 교과목 소개1 학 년2 학 년3 학 년4 학 년1학년 과목한국 고대사 한국사 개론 동양사 개론 서양사 개론자세히2학년 과목서양 고대사 동양 중세사 동양 고대사 서양 중세사 한국 중세사 한국 근대사 일본사한국 미술사자세히3학년 과목한국사 교재론 동양사 교재론 서양사 교재론 한국 현대사 동양 근대사 역사 교육론 서양 근대사동양 현대사 내륙 아시아사자세히4학년 과목졸업 논문 서양 현대사 한국 사상사 지도법 경제학 동양사 강독 및 연구론 서양사 특강 및 지도론 한국사 특강 및 지도론 세계사 교육과 국제이해한국사 강독 및 연구론 서양사 강독 및 연구론 동양사 특강 및 지도론자세히{nameOfApplication=Show}
    교육학| 2002.04.20| 15페이지| 1,000원| 조회(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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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란 무엇인가] E.H.Carr역사란 무엇인가?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중 제 2 장 사회와 개인세계는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여 우리를 단순한 생물적 통일체에서 사회적 통일체로 바꾸어 간다. 역사시대이거나 선사시대이거나 어떤 단계의 인간이든 태어나면서 하나의 사회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며, 그 순간부터 벌써 이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회에서 분리된 개인은 언어도 정신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인류학자는 흔히 미개인은 문명인에 비하여 개인일 경우가 적으며, 완전히 사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거기에는 기본적인 진리가 있다.복잡하고 진보된 사회와 비교한다면 단순한 사회는 개인의 기능이나 직업상의 다양성을 요구하는 일이 거의 없고, 또 그래도 된다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에서는 획일적이다.분명히 어떤 의미에서의 개인화의 증대는 현대의 진보된 사회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또 그것은 사회활동의 구석구석까지 미치고 있다. 현대세계의 융성에 따르는 개인화의 증대는 문명 진보의 정상적인 과정이었다는 것이다.역사에 대한 상식적인 견해로 본다면 역사란 개인에 의해 씌어진 개인에 대한 기록이다. 실제로 이 견해는 19세기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에 의해서 수용되고 장려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불충분하다.역사가의 지식은 개인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사람들이 여러 나라에서 그 축적에 참가해 온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과거 어느 사회의 문맥 속에서, 또 그것에 충동을 받으면서 행위하고 있었던 것이다.1장에서 역사란 현재의 역사가와 과거의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라고 했다. 이번에는 이 방정식 양쪽의 개인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비중을 연구할까 생각한다. 역사가는 어디까지 단일한 개인인가? 그리고 어디까지 자기의 사회 및 시대의 산물인가? 역사상의 사실은 어디까지가 단일한 개인에 관한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사회적 사실인가?그런데 역사가도 한 개인이므로 그는 다른 많은 개인과 똑같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며, 그가 속한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대변인이다. 그런 자격으로 그는 역사적 과거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것이다.우리는 보통 역사의 과정을 움직이는 행렬 로 논한다. 행렬과 함께 역사가가 나아감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전망이 펼쳐지고 새로운 시각이 나타난다.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 역사가가 서 있는 행렬 속의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 공리는 역사가가 취급하는 시대가 그 자신의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도 똑같이 통용되는 것이다.위대한 역사는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각이 현재의 여러 문제에 대한 통찰에 비추어져야만 씌어질 수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진리, 즉 첫째로, 역사가가 연구하는 입장을 먼저 파악하지 않으면 그 역사가의 연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는 것, 둘째로, 이러한 입장은 그 자체가 사회적·역사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뿐이다.요컨대 역사가의 연구가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사회를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가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전부이다. 사건만이 역사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가 자신도 그 흐름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자기의 상황을 지극히 예리하게 의식하는 역사가가 그 상황을 극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 편이 자기의 사회나 견해와 다른 시대 및 다른 국가의 사회는 견해의 차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더 많은 능력이 있다고 생각된다.그렇다면 역사가의 연구 대상은 여러 개인의 행동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인 여러 힘의 작용인가?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은 집단 또는 계급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의 행동과는 구별되며, 그 한쪽을 택하여 논하는 것이 역사가의 정당한 권리다.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행동에 관한 연구는 그들의 행위의 의식적 동기에 관한 연구라는 것이다.역사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막대한 부도 갖지 못했으며 ,어떤 전투도 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하고, 소유하고, 싸우는 것은 오히려 인간,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이다 .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할 점은, 추상적인 역사관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순수한 경험적 관찰에 관한 것이다.첫째, 역사란 상당한 정도까지 수(數)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레닌은 정치는 대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수천 명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있는 곳에서, 즉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는 곳에서 시작이 된다. 레닌이 말하는 수백만 명이란 수백만의 개인을 지적하는 것이며, 거기에 비개인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런 문제를 논할 때는 흔히 익명성과 비개인성이 혼동되곤 한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람들 아닌 것이 될 수 없으며 개인이 개인 아닌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수백만의 익명의 사람들이야말로 많건 적건 무의식적인 협력으로 통합된 사회적 힘을 이루고 있는 여러 명의 개인이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수는 중요하다,
    인문/어학| 2002.04.20| 2페이지| 1,000원| 조회(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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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말여초] 나말여초 선종관련 논문요약 평가A좋아요
    목차1. 서론2. 본론-Ⅰ. 나말여초 선종형성의 민중적 기반(석사학위논문), 정수만,한국 교육대 대학원, 역사교육전공, 1996. 02- Ⅱ. 나말여초 선종 불교정책 연구(박사학위논문), 최인표,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전공, 1998. 08- Ⅲ. 나말여초 선종 사상사 연구(박사학위논문), 추만호,고려대학교 사학과, 1991. 083.결론1. 서론우리나라 선종불교사에 대한 연구는 초기에 이능화, 忍滑谷快天, 권상로 등에 의해 정리되었는데, 이능화는 자료의 정리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忍滑谷快天는 극히 개괄적으로 다루었으며, 권상로는 나말여초의 선종불교를 9산선문으로 소개하였다. 그 후에도 김영수, 김동화 등이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은 우리나라 섣ㅇ불교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자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지만, 사회적인 상황과 연관시킨 역사적인 성격을 규명하는데는 미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다.나말여초 선종불교사를 사회와 관련시킨 연구는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으로 최병헌, 김두진, 허흥식, 추만호 등이다. 나말여초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언급하면서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가고 있다. 이 중에서 추만호의 연구를 마지막에 다루었으며, 먼저 정수만과 최인표의 연구를 논하였다.2. 본론Ⅰ. 나말여초 선종 형성의 민중적 기반(석사학위논문), 정수만- 한국 교육대 대학원, 역사교육전공, 1996. 02나말여초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사회 여러 세력들과의 유대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선종의 사회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연구들은 주로 신라왕실이나 지방호족과의 관계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선종과 민중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충분히 밝히지 못하였다. 본 연구는 나말여초 선종 형성의 민중적 기반에 주목하여 그 내용과 민중적 성격을 파악하고자 한다.1장에서 나말여초 선종과 사회 여러 세력 사이의 관계에 관한 종래의 연구 성과를 살펴본다. 왕실, 중앙귀족 중심으로 발전하던사회적 역할은 민중이 국가·사회적 안정과 지배층의 존립 기반을 좌우한다는 인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으므로 그들에 대한 국가의 관심은 클 수밖에 없었다. 국가적 관심과 배려는 필연적으로 민중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주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그들은 점차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자각하게 되면서 민중 의식을 형성해 나갔다.나말여초에 이르러 민중의 성장은 선종과의 관계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데, 이는 봉암사의 창건 과정에서 심충의 토지 기증과 민중의 힘으로 이루어 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정부의 지원 없이 철과 절의 마련, 경제적 후원, 기술의 지원, 인력의 동원 등이 자력불사에 기울여졌음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불사를 일으킨 시점이나 지역에서 민중의 성장을 가리키는 것이다.한편, 신라하대에 이르러 계속되는 왕위 쟁탈전으로 인해 중앙의 정치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자, 민중은 스스로 삶의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의 실체를 현실사회에 나타내 보였다.진성여왕대에 국가의 공부 독촉에 저항하여 원종, 애노 등이 일으킨 농민 반란을 통해 그 정치적 성숙도를 드러낸 민중 의식은 마침내 민중이 스스로 사회 변화를 주도해 나가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한 것이다.선종과 유대 관계를 가지고 선종을 지지했던 세력이 민중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고 신라 왕실 및 고려 태조와도 일정한 유대를 맺으며 커다란 지지를 받기도 했으나 가장 순수하게 가슴을 열고 다가섰던 대상은 역시 민중이었다. 이는 선사들이 당에서 귀국했을 때 민중이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던 기록들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선종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던 9세기 전반부터 10세기 전반에 이르는 나말여초의 전 기간을 통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한편, 선종에 대한 민중의 이러한 지지는 선사들에 대한 심정적 존경뿐만 아니라, 산문의 개창과 확장 과정을 통해 경제적 후원이나 노력 봉사 등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흔히 호족으로 일컬어지는 지방 세력가들은 민도 불구하고 교학불교는 그들의 생활에 눈을 돌리지 못했으며 사회 모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했기에 불교 자체의 포용력을 상실했다.원래 신라하대에 선종이 대두되는 것은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므로 선승들이 거의 모두 화엄종에서 출발하고 있었으므로 선종의 사상적 뿌리를 화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선은 일체의 언교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호엄과 대립하면서도 근본 원리는 화엄과 통하지만 민중은 그러한 추상적·현실적인 세계관이 아닌 구체적인 사상의 이상세계가 필요했다. 따라서 선과 화엄은 상호보완적이면서도 불가분리의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간에는 갈등도 있었고 상호 영향을 주면서 공존하는 양상도 있었으나, 나말여초에 있어서 선사상은 분명 화엄의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논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기에 각 지방의 민심이 선승들에 의해 좌우되고 사원들은 이른바 대성황을 이루었던 것이다.3장에서 정치세력의 후원과 이에 대한 선사들의 태도를 논하였다. 민중을 통치하는 지배세력의 입장에서는 민심을 획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종을 후원함으로써 선종에 기울어져 있던 민심을 얻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왕실은 선사들에 대해 그들의 귀국을 기뻐하거나, 그들을 만나고 싶어한다든지, 혹은 그들에게 국사의 예를 표하는 등의 단순한 회의를 나타내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후원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선종이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라왕실의 후원과 마찬가지로, 고려태조도 선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극진한 태도로 대하며 선종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는 각처에서 호족들과 연결되어 있던 선문 세력의 호응이 절대 필요했다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민심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선종과의 유대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이와 같이 신라왕실이나 고려태조의 각별한 호의에 비하여, 선사들은 그들의 호의를 완곡히 거절하거나 수용하더라도 일정한 거리를한 생활 태도도 선종으로 하여금 민중적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게 했다. 신라하대의 교종사원이 재산의 축적에 여념이 없었던 반면에 선사들의 서민적이고 검소한 생활 태도는 민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선종의 이와 같은 경향은 곧 교종의 학문적·이론적인 경향에 대한 반성으로 제시된 새로운 신앙 운동이기도 했으므로 당시 사회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며, 선종 형성의 민중적 기반을 구축하는 한 요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선사들의 탑비문을 통해 그들의 애민사상과 평등사상 역시 엿볼 수 있다. 겸손한 자세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민중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불타의 가르침과 자신들의 신앙 생활의 성격을 나타내 보였던 선사들의 태도는 선종으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 뿌리를 내리면서 민중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바탕이 되게 했다. 이러한 사상은 나말여초라는 시대적 배경의 전과정을 통해 구현되었고, 그것은 선종이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선종사원의 사회적 영향력은 대단히 컸으며 이는 사찰의 지방적 확산을 통해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선종이 민중적 기반을 획득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Ⅱ. 나말여초 선종 불교정책 연구(박사학위논문), 최인표-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전공, 1998. 08여기서는 논문 내용 중 2장 나말여초 선종불교와 신앙계층의 성향만을 살펴보겠다. 신라 하대의 낙향 귀족들이 지방의 전장에 거처를 정하고 주변 토지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지방 세력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는데, 이들이 낙향하여 정착하고 나아가 지방세력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지방에 자신의 전장 등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선사들 대부분이 이러한 낙향 귀족 출신이었으며 일부는 민 출신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거의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도태하여 지방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선사하였다. 낭혜무염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존비를 가리지 않고 농부라도 세상의 얽매임을 털어 버릴 수 있다고 하여 도사나 교부되는 사람들이 특별히 존재하지 않았다. 수행방법은 식량, 의복, 노동 등 직위와 신분을 초월하여 스스로 솔선 수범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은 강고한 신분제의 제약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민들에게 하나의 도피처를 마련한 것이다. 특히 그의 노동을 통한 수행은 농민들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노동이 고통이 아닌 수행이라 하여 일상의 삶이 곧 수행이란 관념을 심어주어 특별히 수행이 없이도 해탈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신라 말에 선사들과 선종사원에 대해 6두품 이하의 하급세력이나 지방세력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꼭 긍정적인 수용만 보여졌던 것은 아니었으며 지방세력의 정치적인 입장, 선종사원 및 선사 개인의 성향에 따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선종사원과 선사들도 지방세력의 도움만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왕실과 고위 지배층의 도움도 받고 있었다. 오히려 왕실과 고위 지배층의 도움이 선종불교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더욱 클 것이다. 선사들은 신라왕실과의 관계에서 주로 거주지의 제공, 경제적인 지원, 행정적이 조치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있었다.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조는 민의 생계 보장과 함께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각종 토착신앙 및 불교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사회 분열과 전란으로 불안정해진 민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그들의 지지를 얻어 후삼국 통일과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신라 말 진성여왕대에 이르러 민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지는데 이러한 민의 몰락은 이미 중대 말부터 나타났었다. 귀족과 사원이 합법·비합법적 방법으로 토지를 집적하여 대토지 소유자로 변하여 전장을 형성함에 따라 토지에서 유리되는 농민이 늘어나면서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이렇게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전장주의 사적 지배를 받거나 유민으로 화하여 떠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교육학| 2002.04.11| 8페이지| 1,000원| 조회(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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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나일본부설 요약
    '임나일본부'에 대한 종래 일본 내의 통설적인 견해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왜가 369년경에 신라를 위시한 삼한지역의 국가들을 평정하고 '임나'에 설치하여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존속했다는 기관으로 그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도 매우 다양하다. 논자에 따라서 군사적 성격을 가진 지배기구, 상업적 목적을 띤 무역기관, 외교기관 등으로 파악하는 데, 임나일본부설이란 그 중에서 군사적 성격을 특히 강조하여, 5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고대 야마토조정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였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식민사관의 일종으로 19세기 후반에 서구 열강의 위협 앞에서 한국을 침략함으로써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정한론이 대두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고, 한국을 강점한 이후에는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역사적 근거로 결국 임나일본부설은 일본과 한국은 하나라는,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시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이른바 내선일체, 일선동조론과 함께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19세기 후반 메이지 천황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임나 일본부설은 1949년 스에마쓰가 쓴 '임나흥망사'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이것은 김석형의 분국설이 나오기 전인 약 20여년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현재는 일본의 학자들도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주장은 하지 않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일본서기」,광개토대왕비, 「송서」, 칠지도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에 적힌 내용이다.「일본서기」에 의하면 대략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약 200년 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송서」에서 남조·송·제·양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라는 관작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의 칠지도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번국’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1963년 북한학계 김석형의 분국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1972년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의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경영과 같은 주장은 거의 사라졌으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내의 야마토조정과는 무관한 규슈의 지방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일본의‘출장소’또는‘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을 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가야의 왜’설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군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사령부설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와 안라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아타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일본측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근거로 든 것에는 적지 않은 신빙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먼저 「일본서기」에서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경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으로, 4세기에 이미 임나일본부라는 명칭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기년에도 상당한 조작이 가해져 있으며 패망한지 7년이나 된 백제에서 조문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기사로 보아 많은 부분 허구의 기록에 근거한 임나일본부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신묘년 기사에 대한 문헌 사료의 자의적 해석만으로 문맥상 부적절한 점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으므로 타당하지 않다. 또 「송서」에서 임나와 가라가 모두 가야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왜 중복되어 나타나며, 이미 예전에 멸망한 진한과 마한이 왜 나타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무왕이 받은 관작은 단순히 허구적인 명예직이었음을 시사한다. 칠지도도 백제에 대한 왜의 종주권이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자료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어학| 2002.01.02| 2페이지| 1,000원| 조회(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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