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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생각하는 미와 예술 평가A좋아요
    ☆ 미란? ~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의식주만큼 미에 대한 추구도 삶의 일부이다. 의식주에 있어서도 실용적 가치보다는 오히려 미적가치가 문화발전이 될 수록 더 비중이 클 뿐 아니라 아름다움이 야기되는 쾌락 대부분 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미는 인류문화가 발전해 나가는 촉진제이며 동반자로서 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또한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다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낭비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삶의 필요 욕구가 시작되면서 미가 존재하게 되었다. 미의 개념. 즉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객관적 개념으로 표현되기는 어려우며 다만 그 아름다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개별적인 것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절대적 기준이나 객관성이 없고, 단지 통념적인 기준만이 모호하게 설정되어 있다. 미라는 말이 포함된 단어 중 ‘미남, 미녀’가 있다. 미란 ‘아름답다. 멋있다. 예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체능| 2003.05.22| 4페이지| 1,000원| 조회(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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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유냐존재냐 평가A좋아요
    * 소유와 존재의 차이 소유와 존재는 두 가지 기본적인 존재양식이며, 그 각각의 힘이 개인의 성격과 여러 가지 유형의 사회적 성격 간의 차이를 결정한다. ‘존재’라는 말로 어떤 것을 ‘소유’하지도 않고 또 ‘소유하려고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즐거워하고 자가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며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고 있다. 소유양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단, 한 가지 목표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즉 ‘배운 것’을 고수하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것을 기억하거나 노트를 소중히 보존한다. 소유형의 사람들은 어떤 주제에 관한 새로운 사상이나 관념에 접하면 오히려 당황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양의 정보에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유를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요한 형태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핀으로 고정시킬 수 없는 관념은 두려운 것이다.
    인문/어학| 2003.05.22| 7페이지| 1,000원| 조회(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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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자피해사례
    1. 문제제기소비자 피해 사례는 여러 곳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중에서 세탁과 관련된 피해는 제조처의 원단 불량, 세탁업자의 과실, 소비자 과실 등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최근에는 의류의 원단, 세제 등은 새로운 제품들이 등장하고 그 성분이 복잡해지고 있고, 전문지식이 없더라도 등록신고만으로도 세탁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뿐만 아니라 전문지식이 부족한 세탁업체로 인해 소비자 분쟁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작년에 원피스를 세탁소에서 드라이 크리닝을 하고 한참이 지나 입으려고 보니 색이 바랜 부분이 있었다. 세탁소에 맡길 때 원피스 뿐 만아니라 자켓, 바지, 스커트 등 여러 가지를 한번에 맡겨서 세탁물을 받은 뒤 상태를 확인 못하고 그대로 옷걸이에 걸어 두었었다. 원피스를 받은 후 바로 확인했었어도 영수증이 없어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그 사건 이후 세탁소에서 발생한 피해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인터넷에서 보게 된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다.2. 내용, 처리결과출처 : 글/김학희 http://econo.metro.seoul.kr/ci/소비자 민모 씨(서울시 은평구)는 98년 2월 밍크코트를 7백만 원에 구입했다. 몇 차례 착용한 후 2000년 8월 26일 동네 세탁소에 세탁을 의뢰했다.민씨는 며칠이 지나 세탁물 인수 일에 밍크코트를 찾으러 갔으나 세탁소에서 그만 밍크코트를 분실하고 말았다. 이후 세탁소에서는 밍크코트가 분실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보상을 계속 미루고 있어 민씨는 코트의 구입가를 조속히 보상받기를 원한다며 한국소비자보호원에 피해 구제를 요청했다.사실 확인 결과, 밍크코트는 세탁소에서 세탁물을 운송하는 과정 중 분실된 것으로 추정되어 보상 책임은 세탁소에 있었다. ‘소비자피해보상규정’에 의하면, 세탁물이 분실 또는 소실되었을 경우 소비자는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다.배상액 = 물품 구입 가격× 배상 비율이다. 다만 소비자와 세탁업자간의 배상에 대한 특약이 있는 경우에는 그에 따른다. 배상 비율은 ‘환산경과일수’에 따라 20∼95%까지 10단계로 나뉘어 진다. 즉 환산경과일수가 ★0∼15일 미만일 때 배상 비율은 95% ★15∼45일 미만일 때 85% ★180∼225일 미만일 때 45% ★360일 이상일 때 20%로 규정돼 있다.환산경과일수라는 것은 실제경과일수를 내용년수 1년 기준으로 환산한 수치다. 실제경과일수는 일반 소비자가 물품을 구입했을 때부터 실제 사용 여하를 불문하고 세탁업자에게 세탁물을 맡긴 시점까지의 경과일수를 말한다.즉 환산경과일수=실제경과일수/내용년수다. 민씨의 경우 구입 시기가 98년 2월 말이므로 밍크코트의 실제경과일은 2년 7개월이며, 일수로 계산하면 930일이 된다(1개월 30일 기준). 밍크코트의 내용년수는 소비자피해보상규정에 5년으로 규정돼 있다.그러므로 환산경과일수=930/5=186일이므로 배상 비율은 구입가의 45%가 된다.* 물품구입 영수증 반드시 보관하여 가격, 구입 시기 등 입증 돼야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민씨의 경우 보상 금액 결정에 필요한 사고 의류의 구입 영수증이나 의류의 품번을 갖고 있지 않아 코트의 잔존가를 정확하게 산출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세탁소에서 소비자가 주장하는 구입 가격 7백만 원과 구입 시기인 98년 2월에 대해 인정하기로 해 그에 따른 배상액(코트의 잔존가)을 산정한 결과, 구입가의 45%인 3백15만원이 나왔다.결국 세탁소의 과실로 분실된 소비자의 밍크코트에 대해 세탁소가 민씨에게 3백15만원을 배상해 주었다.이 사례와 관련해 소비자가 유의해야 할 점은 세탁물 분실로 인한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입증 자료가 될 만한 구입 영수증을 잘 보관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씨의 경우 입증 자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탁소에서 민씨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코트의 가격, 구입 시기 등을 그대로 인정해 배상해 주었다. 만일 영수증이 없어 실제 거래 가격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당해 지역에서 거래되는 통상적인 가격을 기준으로 한다.이와 같은 피해에 대비해 고가 상품을 구입할 때는 신용카드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실·훼손 사고가 발생해 배상 받을 경우 가격·거래일자 등 입증에 필요한 영수증이 없어도 신용 카드사에 조회하면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탁소에 못 맡길 때 알아둬야 할 점 ※▷ 세탁물을 맡길 때는 세탁업자와 세탁물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다.▷ 세탁물을 찾을 때는 그 자리에서 세탁물의 이상 유무를 확인한다.▷ 세트 의류는 가능한 한 세트나 한 벌로 세탁을 맡긴다.▷ 세탁물을 맡길 때는 세탁물 인수일. 완성 예정일. 품명 및 수량, 요금, 처리방법, 특이사 항 등을 기재한 세탁물 인수증(보관증)을 받아 둔다.▷ 양복 등 의류 구입 영수증은 반드시 보관해둔다.▷ 세탁물은 약속된 날짜에 찾아오도록 한다. 세탁물 완성 약속일을 경과한 세탁물에 대해 소비자가 찾아가지 않을 경우, 세탁업자가 세탁물 인수를 통보한 후 30일이 경과하도록 인수하지 않은 경우 소비자는 배상받지 못한다.
    경영/경제| 2003.04.16| 3페이지| 1,000원| 조회(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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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이론] 한국근대미술 평가A좋아요
    * 한국 근대 미술의 흐름근대시대는 인류가 중세 봉건체계에서 탈피하여 시민적 자각 즉 민중들에 의한 자신들의 삶의 방법 에 대한 모색과 현실 극복의 논리와 그들 의식의 눈뜸으로 인한 문화형태를 이룩한 시대이다. 태동배경은 인간중심주의(성리학이 심성론 중심으로 하는 사상), 과학적 기술문화의 성취, 자본주의의 채택, 시민사회의 대두(중인 계층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중핵을 이루고 북학파 도시 소시민에 대한 관심이 나타남)이다.한국의 근대를 어느 시점으로 하는가에 대해 아직도 논의가 끝나지 않고 있다. 이유는 그 동안 이시기에 대한 자료와 연구가 부족하기도 하였지만, 역사 자체 내에서 볼 때, 구체제의 모순을 깨고 자생적 발전으로 인한 근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는 취약점이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사에서도 마찬가지로 근대편년의 문제는 앞으로도 무거운 숙제로 남으리라 짐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연구와 더불어 동시에 근대시기의 미술 행적에 대한 연구도 끊임없이 필요한 것은 한국현대미술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로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왜란과 호란이후에 왕조의 지배체제가 흔들리고 모든 허점이 드러났다. 그 허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지배 권력은 더욱 보수화 되고 귀족화 되어 급기야 당쟁이라는 말폐(末廢)를 보인다. 이에 정치권력에서 탈락된 지식인은 실학이라는 국가경영의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하였으나 역시 성리학이라는 기존 사상체계의 테두리 안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계로 커다란 영향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란이후의 북벌론(北伐論적) 입장에서 북학론(北學論)적 인식으로 바뀌며 청나라를 통하여 서양의 근대문명을 접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으나 세도정권의 계속적인 탄압과 정전(政戰)으로 인하여 아무런 대책 없이 문호개방이 되면서 식민지로 전락되었다.이시기의 화풍은 전대의 풍속화와 산수화와 비교하여 도식적이고 형식화된 모습으로 변하였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반대로 다소 소극적이근대 회화사에서 가장 무력한 침체기였다. 그러한 속에서도 조선시대의 화맥을 지켜 근대적 변화에 공헌한 화가로는 조석진과 안중식이 있었다. 그들은 끈질긴 접근과 개항 및 수교로 마침내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수구파와 개화파의 충돌 속에서 정치적, 사회적 진통이 고조되던 19세기 말엽에 서울에서 직업화가로 자리잡았다.시대의 근대적인 변천은 그들에게 다각적인 역할을 요구하였다. 19세기 말엽이후 시대 상황의 변동을 가장 다각도로 체험한 화가는 안중식이었다. 그는 청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체험을 넓혔다.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던 1911년 봄화단에 서화전통의 진작과 후진 양성을 목표한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원으로 경성서화미술원이 설립되었다. 같은 성격으로 서화연구회, 평양과 대구의 기성서화회와 교남서화연구회가 생겼으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근대적 한국화의 발전과 새로운 가치창조에 사실상 기여한 것은 없다. 다만 전통문화를 소중히 계승시킨데 공헌했을 따름이다. 또한, 1918년에는 근대미술사상 최초의 작가협회인 서화협회가 결성되었다. 근대화단 시대가 시작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서화협회가 협회전을 여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나 조선미전을 압도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전통화로 불리는 수묵채색화는 모두 봉건적이고 낡은 것으로 간주되어 비하하는 상황이 되었다. 반면 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전은 신인을 상대로 하는 공모전으로 점점 조선미술계에서의 위상이 커졌다. 또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술계에도 그 영향을 끼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이 결성되었다.1920년대에는 왕조연장시대의 종말과 신진시대의 개막, 전통회화의 비판론이 등장하는 등 여러 의미에서 우리 근대 전통회화사에 하나의 전환선을 그어주고 있다. 또한, 일제는 서화협회 전람회 개최를 약체화 시키기 위한 술책으로 해마다 조선미술전을 개최하기 시작했고,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 출품작들에서 신진세대들의 표현사고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현실적인 문제에 맞는 구체적인 명제를 붙이는 해 주었다. 20년대부터 시작된 미술소집단 활동은 화가의 증가로 인하여 30년대에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화가들 사이에서 현실주의와 유미(有美)주의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면서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함께 조선향토색론이 미술계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이는 지식인들이 조선학 운동의 영향도 있었으나 일제의 부추김으로 인한 영향이 더 컸다. 3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해지면서 허무와 냉소의 분위기 짙은 서양의 모던이즘 계열의 화풍이 도입되었고, 몇몇 화가들의 친일적 행위가 두드러졌다.일제는 '내선일체와 일본정신'을 강요하였고, 미술계 내에서는 고전을 되찾자는 복고주의가 주장되었고, 따라서 전통 서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반면에 창씨개명 등의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하는 작가들이 속출하였다. 드디어 1945년에 한국은 해방되었고 해방된 자리에 또다시 미군과 소련이 주둔하여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명목과는 멀어지게 되었다.1945년 8월15일 일제가 항복하고 그간 미술계의 굴곡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역사의 판도개막에 따른 진통을 겪게 되었다. 그 시기에는 조선미술 건설본부를 중심으로 많은 단체들이 난립하였고 그 중 조직기반을 다진 고희동 중심의 조선미술협회는 대한민국 수립후 대한미술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미술계를 총괄하는 단체로서의 체제를 확립했다. 해방과 더불어 미술계의 진통과 혼란 속에 오로지 전통회화를 위한 전통 화가들만의 최초그룹으로 단구미술원이 있었으며, 그 시기의 당면 과제는 일본색 문제였다. 식민지 시대가 끝난 그때에는 일본화법으로 보여지는 그림은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하지만, 1949년 창설된 제1회 국전에서는 김은호의 화맥이 연결되어 있었다.6.25를 치루고 55년 무렵부터 미술계는 완전히 정상적인 분위기를 회복하고 다채로운 의욕과 활기를 찾았다. 그러나 57년에는 국전을 중심으로 한 전통화단의 분열과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국전 제일주의의 관념을 배격하고 독립적 한국화 운동을 전개하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근대화가 곧 서구화로 등식 되고 그 서구화란 것이 이식과 모방에 다름아니라는 불구적 논리 전개는 바로 여기서 근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세기에 등장한 실학사상과 연결되는 회화사조로 들 수 있는 것이 실경산수와 풍속화이다.19세기에 이르면서 실경산수와 풍속화의 급격한 퇴조는 이시대의 전반적인 정치, 사회, 문화의 자율적 근대화의 좌절과 직결된다고 보아야한다. 19세기 후반의 고루한 관념 산수와 고답적인 문인화풍의 진작은 일종의 보수적 정치이념의 문화적 반영구조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근대미술의 궤적을 시간적으로 추적할 때 정신사적 차원에서 다루는 방법과, 외적 사회구조의 변모에 따라 구분하는 시대적 방법과, 양식을 중심으로 추적하는 양식사적 방법으로 나누자면 우리의 근대는 실경산수와 풍속화가 활발히 제작되던 18세기로 소급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실경산수란 우리의 자연경관을 모티브로한 그림을 말하며 풍속화 역시 당대 한국사회의 풍속적 단면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그림이다.자신이 속해있는 당대의 전경과 사상을 대상으로 한 다는 것은 분명히 보편적 가치로서의 이상미인 관념 산수의 틀을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근대적 자각이 정신사적으론 이미 18세기에 분명히 싹트고 있으나 19세기로 이르면서 급속한 사회구조의 변모에 따라 심한 위축을 보임으로써 사실상 19세기 이후의 근대적 진척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기록해 주고 있다.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면서 서구의 근대적 방법과 의식을 주로 일본이라는 통로를 거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동양 3국 가운데서도 근대화의 과정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면 우리에게 있어 근대(modern), 양식으로서의 근대주의 (modernism)는 존재했는가를 규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이 미술사 기술이 1910년에서부터 1945년까지를 근대로 명명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그리고 1945년 이후를 현대로 설정하고 있다. 이같은 시대 구하는 작가들의 활발한 교육 및 사회 활동을 통해 우리 조각계의 주도적인 경향으로 자리잡았다.이들은 권진규, 백문기, 홍성문 등 충실한 모델링을 통한 사실적인 재현을 진지하게 추구한 경향과 윤영자, 박철준, 민복진 등 추상과 구상을 절충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독특한 표현방법을 추구한 경향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새롭게 대두되는 구상조각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김종영(1915-1982), 김정숙(1917- ) 등의 실험으로 시작된 한국의 추상조각은 50, 60년대로 접어들어 철조를 비롯한 새로운 재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광범위한 내면적 탐구로 이어졌다. 이후 추상조각의 저변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국전에서도 관심이 집중될 정도로 추상적인 경향은 점차 한국 조각계의 또 하나의 주류로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 추상조각의 전반적인 특징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여 내면적인 정서를 표출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추상적인 형태를 통해 우리 나름의 표현형식을 찾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였다.70년대를 지나면서 추상조각이 형식주의로 빠져들게 됨에 따라 일부 작가들은 새로운 표현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실적인 경향이 조각계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으며 또한 구상성을 민중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체로 인식함으로써 순수미술이 지향하고 있던 가치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서화와 미술근대 양식이 서구에서 밀려들어오면서 전통 양식을 동양화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또 서예와 회화를 통칭한 서화 란 말이 통용되었다. 이로써 서예와 회화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동양에서는 서예와 화화가 분리되지 않는 이명동체(異名同體)란 말을 빈번히 사용하였다. 형식은 다르지만 서예와 회화가 둘 다 지, 필, 묵을 사용하므로 그 뿌리가 같다는 의미에서 붙은 말이다. 둘 다 문방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굳이 따로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질적인 서양 양식이 들어오면서 사대적으로 전통적인 회화.
    예체능| 2002.12.10| 10페이지| 1,000원| 조회(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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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이론] 미술과 사진의 관계 평가A+최고예요
    {*Report*■미술과 사진의 관계■{* 과 목 :* 학 과 :* 학 번 :* 이 름 :* 제출일 :1. 서론사진은 여러 가지 이단적인 양식의 미술이 동시에 공존하는 오늘날의 미술상황에 이르기까지 지대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사진이 발명되고 나서부터는 예술적 종교적 정치적인 의도에서는 물론이고 전쟁의 참화도 그림에 담긴 이미지를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었다.평범한 사진 그 자체의 출현도 화가들에게 더욱 많은 선택을 하게끔 했고 보도사진 영화 텔레비전 등은 누구나가 공히 이해 할 수 있는 혼성 언어를 만들어 내었다.거의 모든 사진적인 대중 전달수단에 의해서 그러한 변형들이 계속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변덕스러운 미학체계에 구속되는 측면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사진은 모든 스타일을 능가하는 회화적인 기준의 유형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이전에 나타났던 어떠한 시각예술이 했던 것 이상으로 보편적인 시각 언어에 접근할 수 있었다.사진술의 발견은 1839년에 공표되었다. 낙관적인 많은 화가들은 사진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회화에 대하여 부하의 노릇을 하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그 기계적 업적에 자부심을 느끼는 수많은 대중들의 마음에 들어 사진이 열등한 위치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계의 효능이 필수적인 강점에서 부각된 시대에 있어서 자연이 스스로 모습을 찍어낼 수 있는 기계에 투자한 당국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미술을 침해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사진사들은 매체의 기계적 한계를 깨닫고는 자신들 작품의 예술적 내용을 증가시킬 새롭고도 정교한 도구를 개발해냈다. 당시에 그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변하였는데 사진이 미술로서 취급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 회화와 조각이 차지하던 이득을 취하였다. 그 결과로 자애로운 태도로 사진을 간과해 버렸던 많은 화가들과 비평가들은 사진의 대담성에 놀라서 위협에 대처할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사진이 나타난지 20년 만에 미술에 대한 영향력은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말았(1787 1851)에 의해 발명된 은판사진이 프랑스의 과학 아카데미에서 1839년 8월 19일 정식으로 발명품으로서 인정받고 공포된 후, 맨 처음에 찍은 것이 풍경사진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얼마 후에 초상사진이 획기적으로 유행하였다. 이는 51년 영국의 F.S.아처(1813 57)에 의해 개발된 습판사진술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게르가 발명한 사진술이나 W.탈보드의 종이인화법보다 노출시간이 훨씬 단축되었으며 또한 음화에서 양화로 인화하는 과정도 간략하게 되어 사진표현상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발명이었다. 이미 은판사진이나 종이인화법에 의한 초상사진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나 습판사진술의 출현으로 더한층 유행을 자극하여 1850년대에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사진의 역사상 최초의 주목할 만한 초상사진가는 영국의 D.O.힐(1802 70)로 종이인화법에 의한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미술사상 처음으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사실적인 시민회화양식을 도입하여 그 당시 유행한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회화 사조를 벗어나 사실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역시 영국의 여류사진가 J.M.캐머런(1815 79)은 칼라일, 다윈, 테니슨 등 당대의 저명한 문화인들을 모델로 내면적인 개성파악을 생생하게 드러내어 성공을 거두었다.또한 프랑스의 나다르(1820 1910)도 캐머런처럼 습판사진술을 구사한 사진가인데, 그 당시 한창 유행된 명함판 초상사진의 고정된 양식에 도전하여 포즈를 자연스럽게 취하게 하고, 또한 인물의 일상적 분위기를 살려 보들레르와 들라크루아와 같은 저명인사들을 찍었다. 그러나 이 때는 유럽 전반에 걸쳐서 아카데믹한 회화양식을 모방한 시대이며, 특히 영국에서는 이러한 회화적 사진 경향이 짙어 O.G.레일란데르(1813 75)나 H.P.로빈슨(1830 1901)이 앞장을 섰다. 그들은 미술의 조형적 원칙에 합치하는 사진을 주장했으며 마음대로 수정이나 합성인화를 시도하여 우화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작품을 만들었다.(2)사진과 미술19세기 사람들이 세계를 좀더 다른 시은 화가인 친구를 도와주려는 의도가 아닌 이상 이러한 수고를 하려고 하질 않았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점차적으로 사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사실상 근대 미술은 이런 발명의 충격 없이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회화와 라이벌 관계에 서게 되는 사진의 보급은 우리 사회 내에서 미술가와 미술의 지위를 변화시켜 왔고 미술을 과거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시류를 타게 만든 요소 중에 하나이다.전시대의 회화가 전적으로 현실의 묘사만을 그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자연과의 연계성은 수세기에 걸쳐서 미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중요한 문제였으며 비평가들에게는 최소한 피상적인 판단 기준을 마련해준 것이었다.사진술은 19세기 초로 그 발명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든 나라들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백만을 헤아리고 매 휴가철이면 찍혀지는 컬러사진은 수십억 장에 이를 것이다. 이 중에는 보통 수준의 풍경화만큼 아름답고 효과적인 사진도 있고 평범한 초상화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기억될만한 운 좋은 사진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 같다 라는 말이 화가들이나 미술 감상을 도와주는 교사들 사이에서는 경멸의 뜻을 지닌 단어가 되어 버린 것에 놀랄 필요는 없다.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종종 갖는 반감의 이유는 변덕스럽고 부당할지도 모르나 미술이 이제는 자연의 재현 외에 다른 가능성을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최근 들어 미술가들은 이전에는 화가들의 영역에 속했었던 기발한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데이비드 호크니는 어느 정도 피카소의 1912년 작품 와 같은 입체파 그림을 연상시키는 다중 영상을 잡기 위해서 카메라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어머니의 초상은 약간씩 다른 앵글에서 찍은 여러 사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모자이크로 그녀의 머리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결합이 일관성 없는 뒤범벅을 만들어 명, 즉 알프레드 스티글리츠(1864)와 라즐로 모홀리 나기(1895)가 작고한 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들의 사진들은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예술 사진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관습과 비평적 풍토를 형성하는데 그들이 맡았던 역할에 있어서는 동일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하기 어렵다.1946년 이후의 상호작용은 2차 대전 후 사진이 현대 예술의 중요한 세력으로 대두한 궤적을 쫓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진 매체가 점진적으로 시각 예술의 논점과 관심에 연결되면서, 사진 매체는 현실에 대한 문자적이며 객관적인 묘사라고 분류되어온 기능적인 도구로서의 전통적인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진 속에 풍성하게 있는 미개발된 가능성을 본, 다른 매체에서 훈련을 받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탈출하고자 하는 사진가들이 사진 그 자체의 정의를 확장하였다.다큐멘터리적 용법으로부터 더 공공연하게 개인적이며, 실험적이며, 관념적인 형태로 사진이 변이한 것은 우리 시대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술로 인식되기를 의도했던 사진의 영상적 진화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미술 운동들 특히 추상 표현주의와 같은 회화와의, 일반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상호작용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더군다나, 우리는 전후 예술의 지배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있거나 혹은 그 논의로부터 쓰여진 작품을 포함시켰다.사진적인 것 이라는 모더니스트 개념은 사진과 미술 모두에 적용되는데, 전자의 경우 매체의 용법과 기능이 가진 넓은 영역에 대한 시각에 블라인더를 쳐버린 상황이 돼버렸으며, 후자의 경우 오늘날까지도 마치 사진은 단지 지나치게 악착같은 성가신 이웃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비평계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진과 미술 두 세계 모두의 작품에 촛점을 둠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의 관심이 모더니스트의 경전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오늘날 시각 문화는 사진 영상들로 아주 가득 채워져 있기에 어떤 미술가도 그들의 작업으로부터 사진의 자취를 20세기의 사진을 다른 시각 예술과의 관계를 배제한 상태에서 설명할 수는 없으며, 또한 금세기의 회화, 소묘, 판화, 그리고 조각도 사진영상과 그것의 문화적 맥락과의 관계를 배제한 상태에서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모든 매체는 그 자체의 엄격히 분리된, 자생적인 미학을 가지고 있다는 폭넓게 인정받고 있는 근대적인 가정에 위배된다. 모더니즘은 모든 매체는 독특하고 독립된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 위에 선포된 것이었으며, 그런 개념은 하나의 미학적 특징으로서 이용되었다. 그러나 회고해보면 소위 조형예술이나 사진은 결코 서로 고립된 상태에서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다.사진의 시각 예술과의 상호 작용은 시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폴 들라로뒤가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 고 외쳤던 그렇지 않던 간에 세계에 그것의 발명을 알림으로써 사진은 예술의 실제 작업과 이론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을 논박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사진 자체도 당시 유행하고 있던 묘사의 방법과 양식에 영향을 깊게 받았다. 진지한 것으로 인식을 받으려는 노력에서, 즉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 인정을 받으려는 열망에서, 사진은 당시 회화의 관습들은 수용해서 개작시켰다. 회화의 지배적 양식이 시대에 따라 자연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입체주의에서 추상 표현주의로 변해감에 따라서 예술이 되기를 열망했던 사진 분양의 양식도 그와 같이 변해갔다.이것은 정확히 말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아론 샤프 그리고 반 드렌 콕의 화가와 사진. 들라크로와에서 워홀까지는 19세기의 화가들이 얼마나 많이 사진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제시하였다. 피터 갈라시의 사진이전 그리고 Amdre Jammes와 Eugenia Parry Janis의 프랑스 칼로타입 예술은 회화의 선배들이 초기 사진의 선구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기의 반 동안 사진과 회화를 완전히 구별된 영역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의 교의 하에서 두 가지 매체는 외부 다른 영상 있다.
    예체능| 2002.10.19| 9페이지| 1,000원| 조회(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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