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다큐멘터리 분석을 통해 본한국의 기억의 정치제출자 : 사회학과 4학년20010629 학번박 영 실< 목 차 >제 1 장. 서론·······················································································1제 2 장. 이론적 배경············································································3제 1 절. 기억에 관한 선행 연구 검토·················································31. ‘기억’에 관한 연구·································································32.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관한 연구··········································4제 2 절. 기억의 정치에 관한 논의들··················································51. 담론으로서의 역사와 사회적 산물로서의 기억····························52. 기억의 주체··········································································73. 기억의 존재형식과 재현··························································7제 3 절. 연구의 분석틀····································································제 3 장. 5·18 광주항쟁 다큐멘터리의 기억의 정치에 관한 분석··············11제 1 절. 연구문제 및 연구방법·······················································11제 2 절. 5·18 광주항쟁 다큐멘터리 분석을 통한 기억의 태로 다룬 영상물들에 한정하여 이들이 언제,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지고 어떻게 소비되었는가를 검토하고 기억의 정치를 연구하려는 것이므로 차이가 있다.이러한 연구들은 과거의 일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사과, 보상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5·18에 관한 역사적 문제를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하고 이를 실질적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도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또 구술사적인 연구들의 경우 알려져 있지 않거나 왜곡되었던 사건을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릴 수 있었다는 사실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본 연구 역시 역사적으로 특정 사실이 발생했다는 차원에서의 역사적 진실성에 관한 시각에서 벗어나 특정 역사적 사실이 부각되고 축소되는 ‘담론으로서의 역사’, ‘사회적 산물로서의 기억’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한다. 그러나 본 연구는 기존의 담론 연구와의 차이점을 갖고 있다. 국면을 전후로 한 비교 분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차별 지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체성, 기억, 담론적 실천으로서의 재현이라는 층위를 나누어 전략적 차원에서 재현들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살펴보는 점도 그러하다. 이러한 시각은 5·18문제 자체가 언제, 어떻게 대중 기억으로서 등장하였는지 고찰하여 문제 해결의 또 다른 방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억의 정치에 관한 연구는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맥락과 밀접하게 관련지어 담론으로서의 역사, 사회적 산물로서의 기억의 동적인 측면을 효과적으로 밝혀낼 수 있게 한다.제 2 절. 기억의 정치에 관한 논의들1.담론으로서의 역사와 사회적 산물로서의 기억‘5·18다큐멘터리 전개과정’이라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기억의 정치에 대해 살펴볼 본 논문은 기본적인 인식론적 전제를 위해서는 문화사라는 새로운 역사쓰기의 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학은 19세기 랑케의 실증주의로 그 학문적 자리매김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랑케는 객관적인 사료를 통해 과거를 연구기억을 만들어 낸다. 그러한 기억은 재현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거나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은 내러티브를 수반한 이미지로 형상화되곤 한다.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집단의 정체성이 구축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그 집단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억을 대중이 갖느냐는 대중의 정체성, 더 넓게는 그 사회의 정체성을 갖느냐를 의미하고, 기억을 만드는 주체들은 더욱 치열하게 기억의 정치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이렇게 기억을 생산해내는 주체들은 기억을 생산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대중들이 자신들이 만든 방식으로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가지고 기억의 정치를 행한다. 이러한 기억의 투쟁에서 헤게모니를 쥐게 된 기억은 역사화 되고, 다시 그 역사는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사화는 넓은 의미에서 재현에 속하기도 하고, 위와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지는 담론이기도 하다. 역사는 기억과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앞에서 얘기했다.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으로 존재한다. 특히, 공식적 역사에서 배제된 역사적 사실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또, 그러한 기억은 기억의 정치로 인해 다시 역사가 될 수도 있다. 즉, 기억은 역사의 원천이 되는 동시에 역사를 존재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본 논문의 인식론적인 전제는 위에서 설명된 ‘탈 객관주의 역사’의 흐름의 한 조류로서의 문화사의 관점을 비롯하여 그 중에서 푸코의 파퓰러 메모리 연구와 알박스의 집단 기억 연구들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는 시각을 따르고자 한다. 즉, 역사라는 것은 역사 서술의 주체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며,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는 입장과 기억이라는 것도 사회, 문화적인 산물이라는 시각을 견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발생하는 기억의 정치의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는 본 논문을 통해 1980년 ‘5·18광주 민주 실상을 왜곡했던 언론, KBS자신의 과거 비판)미국의 책임문제이제는 말할 수 있다:73인의 외침,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2002.4.14MBC광주항쟁과 민주화운동의 연속성을 미국의 문제와 함께 다룬 본격적인 텍스트미국의 선택, 그 후2003.5.18광주 MBC광주항쟁에서 미국의 역할과 미국의 책임 지적광주이외지역 최초의 다큐멘터리끝나지 않은 5·182001.5.17대구 MBC권순형)씨 중심으로 전개/5·18이 ‘광주’만이 아니라 ‘민주화’로 기억해야함을 주장영상전(사진과 다큐멘터리의 결합)항쟁의 기억, 세 개의 시간2000.제3회 광주비엔날레, 김혜선화면자료나 나레이션 배제, 당사자들의 영상증언만을 통해 같은 경험을 했으나 다른 시간에 살고 있음을 ‘상처’라는 주제로 보여줌일반인의 접근망월동행 25-22000.‘메이필름’출신 박성배나레이션 배제, 사진과 영상,김남주의 시를 교차해 보여주면서 5월당시의 모습 회고진보적 영상운동과 결합김종태의 꿈2002.‘푸른영상’출신 김성환‘김종태’의 생애를 지인들의 증언과 재연기법을 통해 담고 있음5·18 기념재단 제작5·18 광주민주화운동2002.5·18 기념재단항쟁 소개/학교수업에 필요한 기본적인 내용설명에 활용오월은 살아있다2003.광주 KBS에 의뢰/5·18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를 대상으로 삼고 있음/학교수업용 교재청각장애인 대상끝나지 않은 농아인의 5·182001.7농아사회정보원항쟁 당시 계엄군에게 최초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씨와 가족들이 겪은 5·18의 참상과 기억 다룸/자막과 수화< 표 6 - 새로운 방향의 모색 (2000년 이후) >5·18 다큐멘터리의 전개과정은 나간채의 저서(2004)에서 대부분 인용하였으며, 연구자는 위의 47개의 다큐멘터리 중 비슷한 주제의 영상물과 외국방송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20개의 영상물을 시청하였다). 1990년대 이전의 신문은 마이크로필름 자료를 통해서, 그 이후 자료는 한국언론재단의 카인즈 신문 검색(www.kinds.or.kr)에서 수집하였다.제 2 절. 5·18 광주항장과 이해를 고스란히 전달했음을 알 수 있으며, ‘무엇을’ 기억하는가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2) 국가/정부의 대항기억가. 묻혀 있던 기억5·18에 관한 사적인 기억은 그것이 대중들의 기억의 장에 진입하기 전에는 그야말로 개인적인 기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5·18에 관한 경험을 직접 한 사람이나 그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존재하거나 그들의 친지, 가족들 같이 가까운 사람들이 아는 경우도 있었을 수 있다. 1980년 사건 당시 그리고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 이루어진 강력한 언론통제 또는 보수적 언론사의 자발적 검열에 의해 사건의 진실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5·18에 대한 사적 기억은 단지 기억으로서만 명맥을 유지한다. 이로써, 국면 이전에는 공적 기억의 영향을 받아 침묵되는 사적 기억으로 묻혀지고 있었던 것이다.나. 잊혀진 기억 만들기 ; 1980년 ~ 1995년 상대적 공백기신군부가 집권한 시기의 5월 다큐멘터리는 국내방송사들에 비해 국가/정부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외국방송사들에 의해 먼저 제작되었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와 진실을 알리려는 움직임은 이러한 당시의 현장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재구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재구성의 결과로 생산되어 비밀리에 공개된 거친 ‘현장 증거물’은 5월 운동과 1987년 6월 항쟁의 추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시기의 국가에 대한 대항기억은 ‘잊혀진 기억 만들기’에 주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5·18 7주기를 앞두고 천주교 광주대교구가 독일과 일본방송국의 보도필름 등을 가지고 제작한 역시 이러한 형태의 영상물이다. 이 영상물은 5·18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여는 기폭제였다. 특히, 이 시기에 광주시민들은 이를 은밀하게 보면서 그날의 기억을 되살렸고, 되살아난 기억은 분노로 변해 5월 운동을 추동하는 힘으로 이어졌다.) 신군부는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내란음모’, ‘폭도’, ‘무장난동’ 등으로 낙인찍음으로써 광주를 타 지역에서 분리시키고 고립시켰다. 이는 광주항쟁 당시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