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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야문명] 마야문명
    ⅰ. 서론세계의 역사적 문화유산 중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문화유적이 몇몇 있다.이집트의 피라미드, 영국의 스톤헨지, 소돔과 고도라..그리고 마야,잉카문명이 그것이다. 이들은 한순간에 영명을 달리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갔지만, 그들의 문화유적은 그 당시 기술과 환경을 통상적인 이해를 어긋나게 할 만큼 대단하다. 특히,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문명보다도 신비롭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다.인간이 살기 부적합한 밀림 속에 거대 도시를 건설한 마야문명과 황금을 쫓는 사람들의 꿈인 황금으로 이루어진 도시 엘도라도(El Dorado)를 간직한 잉카문명은 우리를 환상에 젖어들게 한다.한순간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마야인들의 행방은 수많은 담론을 불러일으켰다. 아직도 학자들은 연구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문화유적에 의문조차 묘현하기만 하다.“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같은 뜬구름 잡는 얘기마냥 의문투성이의 하지만, 너무도 매력적인 문명임엔 틀림없다.신비한 문명이나 미스터리, 세계사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었을 고대문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ⅱ. 본론마야문명마야문명은 그 기원을 서기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른바 고전기라고 불리는 융성 시대는4세기부터 비롯된다. 그후 몇 차례에 걸친 변천 끝에 10세기 전후부터 다시 새로운 발전단계에 접어들게 되며, 특히 유카탄 반도에는 몇 개의 신전 도시가 건설되고 독특한 문화가 이룩되었다.마야 문화가 번성한 지방은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카탄반도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2개 지역이 포함된다.언어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해서 BC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이라 한다. 그 후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 출하여 멕시코만 연안의 아스테크어족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 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에서 유카탄지방에 이르러 유카테크어족이 되었다. 다시 BC 1000년대 전반에 마야어족의 모체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이 갈라져 나와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 북부의 유카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초기는 연대 미상의 시대로부터 기원후 374년까지이다. 제일 오래된 도시는 우아작툰(uaxactun)으로 보이는데, 오늘의 과테말라의 북쪽 국경지대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티칼(Tikal)과 나란조(Naranjo)가 탄생했었다. 한편 오늘날의 혼튜라스에 코판시가 세워졌고, 그 후 우스마쓰타 (Usmacinta)강변에 피에드라스 네그라스(Piedras Negras)가 생겼다.울창한 밀림 안에 서 있는 티칼유적중기는 서기 374년부터 472년까지 약100년간의 이 시기에 팔렌케 (Palenque) 그리고 멘체(Mencke′)가 치아파스 지역에 세워졌고 끝으로 과테말라 지역에 퀴리구아(quirigua)가 세워졌다.융성기는 서기 472년부터 610년까지, 세이발, 익스쿤, 프로렌스, 벤케 비에조 등 여러도시가 세워졌다. 이 융성기의 마지막에 엑소더스가 일어난다. 구제국의 도시들이 있었던 이상의 지역을 지도판 위에서 관찰하면 우아작툰, 판렌케, 코판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이 그려짐을 보게된다. 그리고 이 삼각형의 바로 바깥이나 그 안쪽에 티칼, 나란조, 피에 드라스 네그라스가 있음을 본다. 마지막으로 세워졌으며 가장 단명했 던 세 도시들, 즉 세이발, 익스쿤, 플로레스는(비에로, 베케를 제외한) 삼각형 한 가운데 놓여있다.팔렌케 비명의 신전마야문명의 문화유적하면 그 웅장함과 섬세함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건축물이 빠지지 않는다. 종이한장 들어갈 틈 없이 쌓아올린 피라미드와 석조물, 5t~50t에 이르는 거석들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오면서 의문점을 품게 된다. 어떻게 옮겼을까?? 수백킬로 이상 떨어진 채석장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을 장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거뜬히 운반해온 힘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고도로 발달한 현대의 기술로도 결코 용이한 노릇은 아니다. 하물며 이 고장에 살고 있었던 인디오들이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이 고장에 일찍이 고도의 문화를 지녔던 인간(?? 외계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팔렌케의 관 뚜껑의 조각이다. 그 조각은 현대 우주선의 내부 구조와 매우 비슷한 데가 많다는 것이다. 그외에도 마야족이 남겨놓은 석판 조각을 해독해 본다면, 오늘날의 제트 엔진을 갖춘 비행뭂체와 거의 비슷한 데가 있다.또한 그 건축 기술은 매우 특이한 모티브의 장식으로 장식되었고 아울러 기하학적인 비례에도 질서관이 확립되어 있었으며 아치를 만드는 기교도 발명되는 등 신대륙 문화 최고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그들의 문화 가운데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들의 천문역산 지식으로서 장려한 천문기상대를 구축하여 별의 운행을 정밀히 관찰 예측할 수 있었다. 1년의 정확한 길이는 365.2422일인데 마야인들은 356.2420일로 알고 있었다. 또 보름달의 간격을 29.53020일로 계산했는데 실제 29.53095일과 별 차이 없다. 그들의 건축물에 나타나는 돌조각의 모양이나 절단은 윤년이나 윤달의 삽입이라고 한다. 건물을 지을 때도 역법에 의해 일정한 주기로 지었다고 한다.마야에서는 이러한 천문학을 바탕으로 주기가 다른 3개의 달력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을 기준으로 하는 장기력인데 왜 이 날이 기준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 260일력과 365일력도 함께 사용하였다. 260일력은 1에서 13의 숫자가 20개의 날과 연결되어 한 주기를 이루는 달력이다. 그리고 365일력은 18개월이 각각 20일이며, 나머지 5일이 별도의 1개월을 이루어 19개월이 한 주기가 된다. 마야의 이런 역법은 고도로 발달되고 복잡하여 제대로 설명하자면 책 한 권은 된다고 한다.마야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표기법을 갖춘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야 글자는 소리글자와 뜻글자가 복잡하게 뒤섞인 형태의 문자였다. 마치 우리나라가 한글과 한자가 섞인 문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마야인은 1000여개의 문자를 사용했는데 오늘날 그 일부가 해독되었으며, 그들이 남긴 기록의 뜻을 대체로 파악하게 되었다. 마야에는 수천권이 책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권만이 전해진다. 대부분의 글자는 건축물이나 비석, 조각에서 발견된다.이렇게 고도의 문명을 뽐내던 마야문명의 최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마야인들은 평안한 도시에서 어느날 갑자기 이곳을 버리고 황량한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어느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도시는 인적이 끊어지고 건물이 정글 속에 묻혔으며 온간 잡초가 뒤덮었다. 조사에 의하면 마야문화권은 과테말라에서 유카탄 반도로 또 다시 멕시코 시티를 지나 이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왜 이렇게 이동을 해야만 했을까? 천재지변에 의한 이동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렇다면 천재지변이 끝난 후에는 그 화려했던 도시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았다는 주장을 한다. 역시 여기에도 뚜렷한 증거는 없다. 기후의 이상으로 생존이 어려웠다는 주장은 이동한 장소와의 거리가 400km밖에 안 된다는 점이 헛점이다. 농민들의 반란이나 다른 민족의 침입, 농토의 황폐화로 인한 식량부족 등에 대한 주장도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뚜렷한 설명을 할 수 없다.화려한 마야의 문명을 뒤로 한 채 그 선조들의 생활을 알지 못하는 마야의 후손들. 답답하지만 언젠가 밝혀질 그 날이 올 것이다.PAGE PAGE 1
    인문/어학| 2002.10.30| 6페이지| 1,000원| 조회(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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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야,잉카문명] 마야,잉카문명
    ∵목 차ⅰ.들어가는 말ⅱ.본론-마야문명-잉카문명ⅲ.맺음말ⅳ.참고문헌사라진 마야문명1519년 11월 8일, 스페인의 헤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es)장군은 400여명의 스페인 군인과 6000여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부대를 이끌고 아즈테크 왕국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 당도하였다. 코르테스 장군의 앞에서는 아즈테크 왕국의 황제인 목테스마 2세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코르테스 장군은 목테스마 2세의 장신구와 옷차림을 탐욕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코르테스 장군은 스페인 국왕에게 보물을 찾아 돌아가겠노라 약속을 맺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그 곳에 도착했다. 그는 목테스마 2세의 차림을 본 후 많은 보물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결론을 내렸다. 서구인들은 항상 문명을 이해하려기 보다는 발견과 탐색, 약탈을 위해서 였고, 이 곳도 예외는 아니었다.코르테스는 성당을 세울 수 있도록 목테스마 2세에게 요청을 했고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멕시코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멕시코 인들이 원시적 형태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인들에게는 건장한 남자의 심장을 도려내어 높은 제단 위에 놓고 독수리나 매들이 날아와 그 심장을 뜯어 먹는 종교의식이 있었다. 하늘에 있는 태양신은 젊고 힘있는 인간의 심장을 먹고 힘을 얻는다는게 그들의 신앙이었다. 이러한 의식을 스페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축제를 하던 날, 스페인 군대에게 멕시코 사람 600여명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멕시코인들은 격분하여 코르테스 장군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코르테스 장군은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멕시코인들이 다리와 제방을 모두 부셔 버려 빠져 나갈 수 없었다. 코르테스가 데오카리 신전을 불태우자 멕시코인들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때, 목테즈마 2세가 국민 앞에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미 마음이 그에게서 떠난 뒤였다. 그에게 돌이 날라 들었고, 1520년 그는 그렇게 죽어갔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마야 왕국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보물에 혈안이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1839년, 두 미국인에 의해 중앙 아메리카 유카탄 반도의 정글 속에서 찬란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거대한 계단식 피라미드의 신전, 넓은 도로와 궁전, 그리고 천문대, 원형 경기장 등이 발견되었다. 땅은 메마르고 강도 흐르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 곳은 정글 지대였다. 3년후 이들은 상세한 그림을 곁들여 책을 펴냈고 이러하여 마야 문명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881년에 이 지역을 여행하던 영국인에 의해 마야유물들이 수집되어 대영 박물관에 기증됨으로써 많은 자료가 공개되었다.마야의 사회구조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진다. 지배층은 상당히 폐쇄적이었으며, 엄격한 신분 사회였다. 사제들의 신전이나 귀족들의 궁전은 대부분 높은 구릉 위에 요새처럼 구축되었다. 이 건물들 주변에 평민들이 사는 오두막 집이 조밀하게 붙어 있었다. 중간계층은 없으며, 소수의 지배층이 다수의 평민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야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평민들은 그들의 수확물의 2/3를 귀족과 사제들에게 바쳤고 나머지 1/3만을 소유할 수 있었다.마야인들은 밀림에 도시를 건설하고 넓은 도로를 만들었다. 마야인들은 높이 70m에 이르는 피라미드와 전체 500만톤에 이르는 성채, 그리고 길이 16km의 직선 도로 등을 건설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작업을 하는데 별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속 도구를 가지지 못했고 수레도 없었다.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그 밀림 속에 공사를 벌였던 것이다.마야인들은 건축술뿐만 아니라 천문, 수학, 의학에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천문학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년의 정확한 길이는 365.2422일인데 마야인들은 356.2420일로 알고 있었다. 또 보름달의 간격을 29.53020일로 계산했는데 실제 29.53095일과 별 차이 없다. 그들의 건축물에 나타나는 돌조각의 모양이나 절단은 윤년이나 윤달의 삽입이라고 한다. 건물을 지을 때도 역법에 의해 일정한 주기로 지었다고 한다.마야에서는 이러한 천문학을 바탕으로 주기가 다른 3개의 달력을 사용하였다. 하나는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을 기준으로 하는 장기력인데 왜 이 날이 기준인지는 알 수가 없다. 또, 260일력과 365일력도 함께 사용하였다. 260일력은 1에서 13의 숫자가 20개의 날과 연결되어 한 주기를 이루는 달력이다. 그리고 365일력은 18개월이 각각 20일이며, 나머지 5일이 별도의 1개월을 이루어 19개월이 한 주기가 된다. 마야의 이런 역법은 고도로 발달되고 복잡하여 제대로 설명하자면 책 한 권은 된다고 한다.마야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표기법을 갖춘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야 글자는 소리글자와 뜻글자가 복잡하게 뒤섞인 형태의 문자였다. 마치 우리나라가 한글과 한자가 섞인 문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마야인은 1000여개의 문자를 사용했는데 오늘날 그 일부가 해독되었으며, 그들이 남긴 기록의 뜻을 대체로 파악하게 되었다. 마야에는 수천권이 책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권만이 전해진다. 대부분의 글자는 건축물이나 비석, 조각에서 발견된다.이렇게 고도의 문명을 뽐내던 마야문명의 최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마야인들은 평안한 도시에서 어느날 갑자기 이곳을 버리고 황량한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어느 한 사람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도시는 인적이 끊어지고 건물이 정글 속에 묻혔으며 온간 잡초가 뒤덮었다. 조사에 의하면 마야문화권은 과테말라에서 유카탄 반도로 또 다시 멕시코 시티를 지나 이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왜 이렇게 이동을 해야만 했을까? 천재지변에 의한 이동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렇다면 천재지변이 끝난 후에는 그 화려했던 도시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염병이 돌았다는 주장을 한다. 역시 여기에도 뚜렷한 증거는 없다. 기후의 이상으로 생존이 어려웠다는 주장은 이동한 장소와의 거리가 400km밖에 안 된다는 점이 헛점이다. 농민들의 반란이나 다른 민족의 침입, 농토의 황폐화로 인한 식량부족 등에 대한 주장도 있지만 그 어느 하나도 뚜렷한 설명을 할 수 없다.화려한 마야의 문명을 뒤로 한 채 그 선조들의 생활을 알지 못하는 마야의 후손들. 답답하지만 언젠가 밝혀질 그 날이 올 것이다.잃어 버린 잉카 도시, 마추피추(Machu Pichu)잉카제국은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서 가장 큰 나라였으며 이들은 12세기경 티티카카 호수에서 발원하여 인접한 쿠스코(Cuzco)에 수도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들의 전성기에는 오늘날의 콜롬비아 남부,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 아르헨티나 일부지역까지 세력을 펼쳤으며 2500만명의 국민이 있었다고 한다. 잉카는 스페인의 정복으로 16세기 초까지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존재했었다.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해발 34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산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계곡으로 세 개의 강줄기가 모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중심지역의 큰 궁전에 귀족들이 살았으며 상하수도 시설이 완벽했다. 전성기에는 인구가 2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그러나 전성기를 맞은 1532년, 파사로를 대장으로 하는 스페인의 군대가 잉카 제국 북부 해안에 상륙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황제를 초대하였다. 피사로는 잉카 황제에게 스페인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가 이를 거절하자 그들은 기습 공격으로 황제를 사로잡았다. 결국 황제는 처형당하고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까지 점령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이복 동생인 망코를 허수아비 황제로 세웠다. 1536년, 망코는 10만의 잉카인을 거느리고 안데스 산맥의 험준한 골짜기로 도망가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이곳이 잉카의 마지막 수도 빌카밤바이다. 그 후 망코의 아들 아마루가 새로운 황제가 되어 스페인 군대와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572년 빌카밤바마저 스페인에 함락되고 황제는 쿠스코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리고는 스페인 군대는 잉카의 막대한 금을 약탈하였다. 잉카에는 금이 많다고 전해지는데 그들의 약탈에도 불구하고 많은 금은보화가 숨겨졌다고 알려져 있다. 스페인 군대가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접한 잉카의 귀족들은 극비리에 보물들을 숨겼다고 한다. 스페인 군대는 그 보물을 찾으려고 각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엔 찾지 못했다. 빌카밤바에서 살아 남은 일부의 사람들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가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인문/어학| 2002.10.30| 6페이지| 1,000원| 조회(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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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크로드] 실크로드의 악마들 평가D별로예요
    중앙아시아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던 내게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실크로드의 악마들”이란 제목의 이 책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기”를 편역한 “중국중세사회로의 여행”을 먼저 접했지만, 수이 읽어내기가 힘든 다소 지루한 책이었다.(관심의 정도가 미약한 원인도 있지만..) “실크로드의 악마들”은 무엇보다 서양의 시각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탐험가들의 행보는 고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의의 있는 발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대한 탐험가로 칭송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해 마지않는 편향된 시각으로만 바라보지않고 후안무치한 약탈자로서의 시각에서 그들을 폄하하는 저자의 태도가 이채롭게 다가와 집어들었다. 제목하곤 달리 저자는 교묘하게 그판단을 독자에서 던지지만,나는 흥미진진한 탐험가들의 행보와 역경을 접하면서 중앙아시아의 환상적인 모험담에 빠져버렸다. 마치 내가 돈황의 천불동 석상에 서있는 착각마저 들정도로…책은 서문에서 탐험가들이 중앙아시아에서 행한 행위를 고고학적인 위대한 발견과 유물의 구출이냐 약탈이냐라는 문제제기를 독자에게 화두로 던진다."바실 데이빗슨은 … 그를 안내하며 석굴 사원을 죽 돌던 관리가 벽화가 뜯겨져나간 자리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도둑맞았어요!"라고 내뱉던 일을 회고한다" “우리가 커다랗게 절개된 그 고통스런 상처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몹시 통한해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했다.” 라는 문장등에서 저자 자신의 문제 의식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최종 결론은 독자들에게 맏김으로서 민감한 문제를 교묘하게 피해간다. 그리곤 실크로드의 성쇠와 그 속에 존재했던 도시들을 짚어간다.본문에서는 스벤 헤딘과 오렐 스타인으로 시작되는 중앙 아시아를 탐험한 열렬한 서양 탐험가들의 고단하고 지리한 여정과 그들의 업적을 따라가고 있다.이들은 어떨 때는 탐험가이자 측량사로서, 어떨 때는 사학자이자 발굴자로서 그 목적이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일에 대한 사명감과 국가적 의무를 등에 짊어지고 위험천만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뛰어들었고, 그들의 노력은 이따금씩 사막의 모래 속에서 드러나는 유적과 유물들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사막의 모래를 파헤쳐 발견한 유물들을 가혹한 자연 환경과 야만스런 원주민들의 훼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성을 들여 포장하였고, 이들이 본국으로 보낸 유물과 문서 자료, 그리고 벽화 등은 자세히 연구되고 잘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들을 통해 과거 수 천년간의 동서 문화권의 교류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화재 도둑질 이상이 못된다.영국의 저명한 동양학 연구자 아서 웨일리가 스타인의 탐사 작업을 가리켜 '돈황 서가의 약탈 사건'으로 부르면서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을 보면 ”내 생각엔 이 문제에 관한 그들 중국인의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만일 중국인 고고학자가 영국에 와서 한 수도원 유적지에 있는 중세 필사본의 비밀 서고를 발견한 뒤, 그곳의 관리인에게 뇌물을 주어 그 책들을 몰래 북경으로 빼돌렸다면 과연 우리 영국인의 감정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유적의 구출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그들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순 없음을 시사해준다.우리 나라 역시 병인양요(1866년)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도서 345권을 약탈해 갔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탐험가들의 행위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약탈당한 자의 입장에서 동변상련의 시각을 갖게 하는지도 모르지만,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을 빼돌린 그들의 행위는 엄연히 약탈이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는 있다. 만일 그들이 훔쳐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 땅에 있는 문화 유산도 제대로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둑 맞은 문화 유산을 꼭 돌려 받겠다고 하는 것은 몰염치한 아집일 것이다. 서양인들이 실크로드의 유적과 유물을 발견하지 전까지는 중국 정부 혹은 중앙 아시아의 민족들은 그 존재 자체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실크로드 그 자체를 역사의 무대로 끌고 온 공로는 어디까지나 이들 서양인들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또한 당시 중국 정부는 서북 이민족 변방에 대해 통제를 가할 여력이 없었으며, 그 지역의 소수 민족들은 민족적 연계성이나 문화 공유 의식이 거의 없었다. 또한 밀려오는 모래 속으로 유적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으며, 그 지역 사람들은 어떨 때는 조직적으로 유적을 파괴하였고 어떨 때는 유적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서 땔감이나 밭의 비료로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발굴에 임한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훔치는 것이라는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당장 사라질 위험에 처한 유물을 구제하면서 동시에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한 곳으로 옮기는 자신의 일에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서구 유수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나라 문화재들이 원래 자리에 있었을 때 맞이했을지도 모르는 운명이 지금의 운명에 비해서 보다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 서양인들의 발굴 작업 결과 체계적인 연구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틀림없지만, 유물을 구제한다라는 서양인들의 명분과는 정반대로, 전쟁과 무관심 속에 실크로드에서 발굴된 유물은 서구에서조차 상당수 소멸되거나 행방불명된 상황이다. 실크로드에서 가장 많은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조차 이 유물들이 한 귀퉁이를 겨우 차지 하고 있다며 그럴바에야 귀중한 문화유산을 원래의 국가에 돌려주어 좀더 각별한 보호와 관심속에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저자의 의견을 피력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독후감/창작| 2002.10.30| 3페이지| 1,000원| 조회(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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