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개혁이란 기존의 것을 다시 고치는 것이다. 고친다는 것은 기존의 것이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던 가톨릭 교회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성직매매가 일반화되어 교회의 재산을 불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다던 죄의 사함이 단돈 몇 푼에 면죄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 당시 교회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분명 썩어있었다.그러나 개혁은 단순히 개혁의 대상이 썩어있다라는 전제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인 상황 등이 맞아 떨어져야만 성공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는 각 구성요소들 전체가 움직여야만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종교개혁은 성공도 분명 그 시대가 개혁의 성공을 위한 발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저 종교개혁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고, 이어서 독일을 본거지로 한 루터의 종교개혁의 진행과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본론1.여러 관점에서 본 종교개혁의 배경가. 정치적 배경독일 사람들의 열망은 '우리도 영국이나 불란서나 스페인처럼 강력한 민족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이 마음대로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고 우리도 우리 왕을 중심으로 해서 독립된 정치 영역을 가져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민족국가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던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의 대 공위 시대(☞ 1254년 -1273: 후임 황제를 뽑지 못해서 황제가 없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1356년 카알 4세는 황금 칙서(금인 칙서)를 발표하였다. 앞으로 공위 시대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황제가 죽고 난 후에 황제를 뽑기 위해 선제후를 규정하는 내용이었다.이 시점에서부터 황제의 권력은 약해지기 시작했다.또한 독일은 300여 개의 지방 주권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황제는 제후들에 의해서 뽑혀진 상징적인 존재였을 뿐 실권은 지방 제후들에게 있었고, 황제 가문에서는 자기 영토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이 당시에,도시에서는 자기와 같은 평민인데도 귀족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많이 이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상공업의 발달은 상인들의 권위를 막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물가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이어져 상대적으로 영주들의 수입은 줄어들게 되였다. 그래서 영주들은 농민들에게 부역을 더욱 강요하며 , 공유지-하천에서 고기 잡는 것, 산에서의 짐승사냥과 산림 체취 그리고 공동 목자에서 양을 먹이는 것 등-를 농민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그리고 인구변동으로 농민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1200년대 육 천 만 명이던 유럽 인구가 1300년대로 오면서 칠 천 만 명을 넘어서는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였다. 이런 현상으로 기존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간산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주로 베네딕트와 시토 수도회 그리고 영주들이 하였다. 이들은 어려운 개간산업을 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여러 가지 달콤한 제안-신분상의 자유, 계약에 의한 토지 임대-으로 유혹하였다. 그래서 농민들은 이 어려운 개간산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1347-51년까지 흑사병이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다. 그래서 평균 유럽인구의 30% 감소하였다. 이런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당장에는 노동자들에 있어서 유리하게 임금은 상승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원에 있던 농민들이 장원을 이탈하여 돈을 벌려고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전에 사용했던 회유책으로는 이제 이런 현상을 영주들은 더 이상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영주들은 빠져나가는 농민들을 막기 위해서 채찍을 들게 되었고 줄어든 농민을 몫까지 더욱 많은 일을 강요하게 되었고, 공유지의 독점적 사유를 강화하였다. 이렇게 해서 농민들의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다.② 독일의 농민 운동㉠ 이런 상황속에서 독일에서는 Hans B hm은 종교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다. 그는 농민들을 모아놓고 설교하고, 종교지도자인 교황과 사제들 뿐만 아니라 황제,영주,세리들 까지도 비판하였다.그는 앞으로는 새로운 시대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진압되었다.㉣ 1503년부터 1517년까지 이러한 운동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이러한 운동은 사라져 간다. 이는 종교개혁의 만인사제설과 농민운동의 주장인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형제이고 평등하다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만물 가운데 가장 자유스러운 주인(most free lord)이다 라는 것이 농민들에게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어째든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농민운동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이는 농민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기대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524년, 7년 동안 루터가 자기 입장을 정리해 나가면서 결국 급진적 종교개혁가들과 분리하였고, 농민들은 그가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1524년 루터가 아니라 Thomas M nzer를 중심으로 다시 농민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524에서 25년에 있었던 농민운동에서 루터는 제후들을 향해서 농민들을 죽이라고 하는 소책자를 만들었는데 이에 농민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루터의 개혁운동에 등을 돌리고 재세례파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ㄴ. 기사계급의 불만이러한 변화 속에서 화포가 발명되고 이에 기사들이 별로 쓸모 없게 된다. 게다가 중세의 기사들은 영주와 농민들의 중간에 있는 농민들을 관리하는 일종의 관료였는데 도시가 형성 발달하면서 도시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은 도시 자녀들 중에 있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점점 더 설 땅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자기 본연의 할 일을 잃고 강도기사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상인들의 물건을 빼앗고 수도원을 약탈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1522년 23년에 기사들이 영주들을 상대로 기사전쟁을 일으키는데 이 전쟁으로 인해서 기사들은 몰락한다. 당시 기사들의 지도자인 Hutten과 Sickingen은 몰락하기 전에 열렬히 루터를 지지했다.다. 종교 문화적 생활ㄱ.교 희랍어 성경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다마. 인쇄술의 발달1453경에 쿠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이때부터 새로운 사상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인쇄술이야말로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당시 인쇄술의 발달은 루터의 사상을 빠르게 지식인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판화를 통해서도 무식한 농민들에게도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루터가 100년 전에 태어났어도 종교개혁은 실패했을 것이다.)사. 민중들이들은 타락한 성직자들을 불신하게 되고 새로운 구원의 방편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것을 'devotio moderna'(mordern devotion, 현대적 경건)이라고 한다. 중세시대가 아닌 새로운 경건생활 즉 공동생활 형제단 운동이나 독일의 친구회 운동이 이에 속하며 에라스무스나 루터 모두 공동생활 형제단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민중들은 구원에 대한 갈망이 높았다. 왜냐하면 흑사병이 계속해서 그들을 괴롭혔고 그래서 이 흑사병에 대한 공포와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공포, 이것들 때문에 종교적 각성이 심화되었다..2. 종교개혁의 직접적 계기종교개혁은 원시 기독교를 다시 일으켜 신과 인간의 매개자 인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신과 인간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서만 참된 신앙을 얻으려는 직접신앙을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신비주의로 나타나는 종교사상운동은 종교개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의해 이론화된 기독교 교리는 타율주의, 객관주의, 형식주의의 특징을 띠게 되었다. 이에 신비주의 사상은 신앙의 본질을 주관의 내적 체험에서만 인정하고 신은 사람의 영혼 속에 내재함을 내세워, 이지적 사색 대신에 양심과 순수한 감정에 의해서만 신과 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자율주의, 주관주의, 체험주의의 신비사상은 당시 타락한 기독교의 반성을 촉구하고 종교개혁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종교개혁을 유발시킨 직접적인 계기는 1514-1517년에 걸쳐 진행된 면죄부 판매였다. 당시 교황청의적인 대화를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루터는 4월 26일 황제가 발급해준 통행증을 휴대하여 보름스를 떠났다.현자 프리드리히는 루터에게 닥친 위험을 이미 예상했다. 그는 도중에 루터를 빼돌려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이곳에서 루터는 10개월간의 은둔기간 중에 그는 [시편 연구]를 계속했고, [성모 마리아 송가 주석]을 완성했다. 또한 [교회 설교집]을 작성하는 한편, [신앙고백에 대하여]를 써서 의무적 고백을 반대하고 자발적인 고백을 권장했다. 그리고 비텐베르크의 자기 제자들의 관심사에 대답하는 [수도원 서약에 대하여]와 [개인 미사의 폐지에 대하여]를 쓰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번역에 전념하였다. 이로써 성서를 성직자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이 모두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한편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개혁운동의 흐름이 급진적인 칼슈타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1521년 10월, 빵과 포도주 두가지로 성찬을 거행했다. 그리고 성탄일에는 독일어로 미사를 드렸다. 1522년 1월, 교회의 성상들을 없애고 나서 "비텐베르크시의 규칙"을 포고했다. 결국 2월에 그는 기독교 백성이 스스로 통치할 권리가 있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다는 두 명의 방적공들의 영향을 받아 기록된 말씀의 권위보다 성령의 내적 운동들을 더 좋아하게 하였다.루터는 자신이 시작해 놓은 이 운동의 전개를 불안하게 보다가 은신처를 떠나 비텐베르크의 의회와 대학 호소에 응하러 갔다. 그 시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설교를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칼슈타트가 너무 빨리 해놓은 혁신들이 다시 거부되었다.문제들이 어느정도 해결되자, 루터는 로마의 신학자들에 맞서서, 그리고 예언자들에 맞서 새 복음을 변호하기 위애 여기 저기 다니며 설교를 하였다. 또한 작품활동을 계속하여 [교회 사역을 세움에 대하여]와 [기독교 회중이 교리 문제를 판단하고, 설교자들을 청빙, 위임, 면직할 권리와 권세를 가짐에 대하여]라는 논문들을 출판하였다.나. 복음주의의 의 형성
최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교육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각국의 정부는 "21세기를 대비한 교육", "정보화 시대에 맞는 교육", "경쟁력 있는 교육"등의 모토를 걸고 혁신적이고 다양한 개혁안을 실시하고 있다.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지난해 『교육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안보 이슈』라고 역설하며 세계 최고의 교육을 지향하겠다고 선언했는가 하면,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도 『영국이 21세기에 주역으로 부상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육에 달렸다』며 혁명적인 교육 개혁안을 내놓았다. 오부치 게이조 일본총리는 취임하자마자 21세기 미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목표로 경쟁력 있는 교육개혁안을 마련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실시에 들어간다. 이들 선진국 지도자들은 교육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어느 때보다 더욱 높이고 있다.최근에 선진국들이 교육을 국가의 가장 핵심적 과제로 간주하여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급격히 변화하는 지식기반의 사회에서의 빠른 교육전략의 변화가 시급하다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이들 국가가 내어놓은 교육개혁 동향은 지식기반사회에서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향으로 모아져 있다는 것이 공통적이다.이렇게 각 선진국들이 앞다투어 교육개혁을 단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과연 우리나라 교육은 21세기 새로운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준비가 되어있을까?입시위주의 교육으로 점철된 우리나라 교육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암기위주,기존의 지식을 답습하는 수준의 교육으로 일관해 왔다. 이는 단순히 검증, 증명, 판단한 결과를 주입시키는 교육으로써 진정한 수업의 의미를 충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되어 왔다.수업은 교과내용에 합당한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높은 학습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수긍하고 있는 사실이다.우리나라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써 경험한 중,고등학교 수업방식은 대부분 암기로 점철된 주입식이었는데, 이는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여기서 ,내가 경험한 교과별 수업방식을 살펴보면, 영어의 경우, 대부분 회화, 듣기를 거의 배제한 단어 외우기와 독해 위주의 ,한쪽으로 치우쳐진 영어학습방법 이었다.이런 실용성이 낮은 교육으로 Toeic, Tofle 시험 고득점 "영어 벙어리"를 양산하는 폐단을 낳는등, 국제사회에서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는 회화중심의 체계적인 영어 수업으로 바뀌어야 하겠다.과학의 경우, 대부분 증명된 과학적 사실 ,공식을 단순히 외우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가끔씩 했던 실험수업으로 알게된 과학적 이론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으롤 보아 ,검증에 의한 수업 방법이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국어의 경우,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과 이해보다는 그 문학작품의 성격 ,저자의 약력 ,의미등의 것에 중점을 두어 외었던 수업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어학습의 목적은 글에 대한 이해력과 또한 글쓰기 능력배양이라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국어 수업은 이 목적에 상당힌 못미침을 알 수있다.사회, 정치 ,역사 과목의 경우, 우리가 보통 "암기과목"이라고 지칭하는 것에서 암기만을 요구하는 수업방식임을 잘 알 수 있다. 결국 잊어버리기 쉬운 단편적인 지식만을 얻을 뿐이다.이 과목에서는 토론형식의 수업방법을 채택하여 사회의 현상 ,역사적인 사건들을 주제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학습효과를 거둘 수 있다.위에서 살펴본 불균형적이고 편형적인 수업방식으로 말미암아 학생들은 교육으로 배양되어야 하는 여러 가지 소양, 자질을 갖추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위의 존듀이의 이론에서그 예로써 우선 ,학습의 소극성을 들 수 있다. 이로써 학습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유발되지 않고 결국 자신의 진로 방향에 대한 무감각, 무관심을 초래할 수도 있다. 둘째로, 가치관 정립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 사회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정립이 가치관을 이루는데, 단순 지식의 암기로는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창의성의 결여를 들 수 있다. 창의성은 기존의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이나 현상을 발견하는 것인데, 지식활용능력을 증진시키지 못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