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평‘황하에서 천산까지’중앙아시아 사회와 문화월 78교시유원수 교수님‘황하에서 천산까지’에 대한 비평적 서평현재 중국 영토의 1/4 가량이 빼앗긴 티베트의 땅이라고 한다.) 티베트의 독립 문제나 수많은 티베트인들의 인권 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공중파 방송을 통해 다큐멘터리를 접한 적이 있어서 생소한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티베트가 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해야만 하는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모르고 있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소수 민족의 인권 보호가 중요하다 외치면서도, 정작 내 나라, 내 민족의 문제가 아니면 등한시하게 되는 것이 부끄러운 내 성격인지라, 역사 에세이의 형식을 빌어 쓴 이 책이 내게 조금이나마 그 까닭을 설명해주었다. 물론 이 책이 티베트가 왜 독립을 외치고 있는지, 여타 다른 소수민족들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설명해주기는 하지만 책 전반에 흐르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속해있는 소수민족들의 이야기에 작가의 색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를 다루는 책은, 더군다나 여러 민족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복잡한 역사를 말하려는 책은 철저히 사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라는 것은 일어난 그 순간에는 사실이지만, 시대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역사학자와 역사를 문자로 남기는 저자들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왜곡이 생기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history)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기록이어야만 한다. 필자의 의견이 개입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사실이 아닌 허구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책 머리에서 “그들의 역사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싶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자신이 그들을 보며 느낀 것을 말하기 보다, 그들의 역사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말할 수 있게 하고 싶었다고 밝히지만, 이 책에는 다분히 그가 그 역사로 하여금 받고 있는 개인적인 느낌을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물론 그 동안 지배자의 입장에 있던 강대국들에 의해 쓰여지고, 그들에 의해 보여졌던 소수민족들의 문제를 이렇게 나마 책으로 대중들에게 알린다는 시도는 기릴 만 하나, 자신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철저히 주관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한다.전공이 인도어인지라 나는 그동안 수많은 인도에 관련된 서적들을 보아왔다. 전문 전공 서적이 아닌 다음에는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이 하나같이 인도 기행문 내지는 에세이 형식이어서 책 안에는 다분히 작가 개인적인 관점들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모두 독자들에게 ‘인도는 신비한 나라’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내 주변의 많은 지인들도 인도는 막연히 신비한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맨 처음 그런 공식을 만들어 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에서 책으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그런 인식은 이미 많은 한국인들에게 흡수되어 있다. 인도어를 전공한 내게 있어서 인도는 더 이상 신비한 나라가 아니다. 세계 제일의 IT강국인 동시에, 각 주(洲)간의 빈부격차가 엄청난 나라, 정부 고위 관료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나라도 구제못한다는 가난이 거리에 넘쳐나는 나라. 내게 인도는 신비한 나라라기 보다 그저 복잡 다양한 현실적인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인들의 정신세계는 자칫 신비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세계 각 나라의 민족들 중 같은 정신세계를 가진 민족이 있을까? 수많은 민족들의 다양한 정신세계 중 인도 사람들도 그것들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누군가가 우연히 내뱉은 ‘인도는 신비한 나라’라는 한 마디가 후세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공식처럼 전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1장인 라싸로 가는 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내 느낌이 꼭 그랬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빼앗겼어도 없어지지 않고 빛나는 성스러움. 나는 그것이 티베트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티베트라고 하면 성스러운 곳. 사람들은 때에 쪄들고 맨발에 굳은 살을 박고 살면서도 눈빛 만은 기품있는 민족. 나는 그 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우연히 티베트인을 만난다면 나도 꼭 그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신비감을 가지게 만드는 글귀다. 위의 그 글귀의 대상이 되었던 한 여인의 사진을 책에서 봤을 때, 나는 티베트의 성스러움이나 고결한 영혼 따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저 일상에 찌들어 있는, 하루하루가 힘겨워 보이는 한 약해 보이는 여인의 모습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이 책을 읽었던 그리고 앞으로 읽게 될 수많은 독자들은 작가와 같은 시각으로 티베트인들을 바라볼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점에 우려한다. 한 민족과 그 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철저히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에 토대하여 독자 자신이 정립해야 할 몫인 것이다.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봤던 중국의 입장에서 티베트를 바라 보는 역사적 시각이 아닌, 티베트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글을 서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 하지만, 너무 그들의 시각에 치우친 나머지 중국이 티베트를 무슨 연유로 중국의 일부라 선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나와있지 않은 것이 흠이다. 티베트인들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자신들이 항상 독립된 국가였다고 생각을 해왔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런 티베트를 중국은 왜 자신의 영토의 일부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중국에 의해 알려졌던 역사를 배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기존의 책들이 철저히 중국의 입장에서 씌여져서, 소수민족의 입장은 전연 배제되었던 경우와 크게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한족(漢族)들은 마구잡이로 소수민족을 탄압하기만 하는 독재자와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한족에 대한 생각이 자리잡히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을 접하게 된다면 한족(漢族)은 타민족을 박해하려는 야망으로 가득찬 민족이라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현재 중국에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책에는 티베트족, 회족, 몽골족, 위구르족 등 4대 소수민족에 대한 내용만 언급하고 있다. 근래에는 중국정부에서 이런 소수민족들을 위해 다양한 우대정책을 펼치고 있다. 소수민족 평등정책, 지역자치 정책, 간부배양 정책, 민주개혁 정책, 소수민족의 언어 및 문자사용 장려, 종교 신앙의 자유 보장 등 다양한 정책등을 펼치고 있다. 작가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는 소수민족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인들의 피와 땀 위에 세워지고 유지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나라의 역사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전쟁으로 얼룩지지 않은 역사가 어디있으며, 현재의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희생되지 않은 역사가 어디 있겠는가?
중앙아시아 사회와 문화티베트 독립운동에 관한 보고서티베트는 별개의 한 국가이고, 고유의 정부와 종교, 언어, 법과 관습 등을 유지하고 있다. 수세기 동안 중국과 영국, 몽골을 포함한 몇몇 국가들이 티베트를 지배하려 해왔다.국제적 법학자들은 1911년부터 1949년 중국의 침공까지, 티베트는 현대적인 기준으로 완전히 독립된 상태였다는 데에 동의를 한다. 그 후로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문화를 보존하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워오고 있다.티베트 독립운동의 개요티베트는 13세기 이후 중국의 통치와 영국의 영향을 번갈아 가며 받아 왔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1950년까지 티베트는 북경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중국은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을 동원,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이후 티베트는 1951년 5월 중국의 서장자치구로 통합되었고, 1954년 중국·인도간 협정에서 인도는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통치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1959년 티베트에서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을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달라이 라마는 자치정부 관리 및 추종자 약 1,000여 명과 함께 인도로 망명하여 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1989년 1월 중국정부에 우호적이며 달라이 라마에 이어 서열 2위인 판천 라마가 사망하게 되자, 티베트에 대한 주요 통제수단을 잃게 된다. 또한 그 해 3월부터 1990년 4월까지 티베트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2000년 1월에는 달라이 라마, 판천 라마에 이어 서열 3위인 카마파 라마(14세)가 인도로 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중국과 인도간의 외교적 마찰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중국 정부는 이 망명사건으로 중국과 인도간의 외교적 마찰로까지 비화되기도 하였다. 중국정부는 이 망명사건으로 티베트-네팔 국경 통제를 강화해왔다. 중국정부에 대한 티베트의 저항운동은 중국 내에서 폭탄테러 등의 유형으로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그 강도는 낮은 편이다. 다만 인도에 위치한 티베트 망명정부의 국제 원칙에 위배, 미국 등 일부 외국의 티베트 담당관 임명도 중국의 내정 간섭행위, 티베트 민족은 중국의 법률적 보호 하에 종교의 자유를 항유하고, 중앙의 지원하에 경제 발전 중임. 달라이 라마는 ‘종교를 가장하여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정치범’으로서 명의나 형식에 관계없이 달라이 라마의 초청은 용인될 수 없으며, 정부요인의 달라이 라마 면담은 동인을 티베트 국가원수로 예우하는 것으로 초청국과 중국간의 쌍무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달라이 라마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대한 국제적 관심 제고를 위해 대외활동을 적극 전개하고 있다. 주로 선진 서방권을 대상으로 티베트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알리는데 주력하면서 망명정부에 대한 지지와 서방권의 대중국 압력행사를 호소. 달라이 라마 자신은 ‘독립이 아닌 완전한 자치’를 원하며 이를 위해 언제라도 중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티베트의 자치 실현을 위한 각국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2002년 7월 크로아티아 공화국 방문 기자회견에서 중국 군이 지난 1950년 티베트를 장악한 이래 중국은 여전히 티베트를 강력히 통제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중국이 티베트를 지배하고는 있으나 중국의 점차적인 대외개방과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증대 측면에서 일부 긍정적 조짐이 있다고 언급하였다.티베트 근대 독립항쟁 일지 및 연표1913년 1월달라이 라마 13세. 티베트 내 청왕조 군대 내쫓고 티베트 독립 선언1949년 10월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년 11월섭정인 도도라 린포체. UPI 통신을 통해 [티베트는 주권국가 및 독립국가임]을 선언하며, 외교사절을 미국, 영국과 인도에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1950년 1월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티베트 정부에 대해 티베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이며 외교사절 파견의 권한이 없음을 발표하고, 평화적 해방을 위해 티베트의 대표가 북경으로 오도록 요망함.1950년 1월중국군, 티베트를 제외한 모든 본토를 점령하였음을 선언하며 주덕장군은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티베1954년 4월 29일두 나라의 정부는 티베트-인도 간의 통신 및 교통에 관한 협정 조인1954년 6월 28일중국, 인도 두 나라의 수상이 [평화 5원칙]에 대한 공동 성명을 냄1954년 9월 15일중국의 제1회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제1차 회의 개최.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를 포함하는 9명의 대표가 참석. 달라이 라마는 전국 인민대표자 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판첸 라마는 상무위원에 선임.1955년 7월 5일서장성에서 반중국의 참파족 분쟁 발생.1955년 7월인민대표회의 제2차 회의, 서장성을 폐지하고 참도 지방 이외는 사천성에 귀속 시킬 것을 결정.1959년 2월몬람 축제를 위해 티베트 전국의 순례자가 라사로 모이자 중공군과의 관계가 심각해짐1959년 3월 10일티베트 민중, 포탈라 궁전 앞에 집결, 중국군과의 관계가 악화1959년 3월 17일달라이 라마의 여름 별궁인 노불링카 궁전에 중국군의 박격포탄이 작렬.1959년 3월 18일달라이 라마 14세, 인도로 망명의 길에 오르다.1959년 3월 20일티베트 민중과 중국군과의 전투가 격렬해지다. 티베트 민중 대학살.1959년 3월 21일중국군, 라사를 제압하다.1959년 3월 28일중국 정부에 의해 티베트 정부의 권한을 백지화. 행정권을 티베트 자치구 준비 위원회에 접수시킴. 대리주임에 판첸 라마를 임명.1959년 3월 29일망명 중의 달라이 라마 일행, 인도 정부에 망명허가 신청.1959년 4월 3일네루 인도 수상, 달라이 라마 일행을 환영.1959년 4월 8일티베트 자치구 준비 위원회, 민주 개혁의 개시를 선언.1959년 4월 13일네루 수상, 달라이 라마와의 회견1959년 5월 6일인민일보, [티베트 혁명과 네루의 철학] 발표1959년 6월 20일달라이 라마, 무수리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제14차 UN 총회에 보내는 성명을 발표.1959년 10월 21일[티베트 인민의 인권과 자유의 존중]을 요구하는 결의안 채택.1959년 10월UN은 전 가맹국에 1959년 티베트 인권선언의 이행을 요청.196됨.1987년 10월 5일라사에 군경 중원대가 대폭 투입되어 3개 사원의 통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승려를 검거하고 신도를 체포하였으며, 외국인까지도 통제하였다.1987년 10월 6일라사에서 또다시 독립 시위가 발생하여 드레풍 사원의 승려 100여명이 시위 행진, 60여명이 체포됨.1987년 10월 7일중공군 티베트 점령 37주년 기념일인 이날부터 외부의 통신을 차단, 티베트 자치구 외사국장인 유우젠이 라사에 주재, 외국기자 15명에서 48시간 내에 철수하도록 명령.1989년3월 7일에 라사에 계엄령 선포. 14대 달라이 라마 노벨 평화상 수상.1990년4월 30일까지 13개월째 계엄령 상태가 지속됨.1991년미국이 추첨에 의해 1000여명의 티베트 난민을 받아들임.1993년라사 시민들이 원칙적인 무상 의료제도에 대한 진료비 부가와 물가 폭등으로 시위1994년달라이 라마의 거처였던 포탈라궁을 9백만 달러로 사들여 복원공사를 함.1995년달라이 라마가 6살인 Gedhun Choeky Nyima를 11대 판첸 라마로 인정. 중국, 달라이 라마의 11대 판첸 라마 인정을 비난하고 판첸 라마를 납치.1998년 4월 27일인도 뉴델리, 티베트 청년당(Tibetian Youth Congress)에 의해 조직된 6명의 단식투쟁단 가운데 Thupten Ngodup이 분신을 하여 다음날 새벽에 사망.1998년 4월 28일달라이 라마 14세, 분신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과 유감의 성명 발표.1999년 4월 5일TYC, 스위스 제네바의 UN 본부 앞에서 무기한 단식투쟁 돌입. 5월 1일 중단.1999년 5월 17일11대 판첸 라마가 중국에 납치된지 4년째 되는 날.2002년 1월 23일중국, 티베트 등 서역 이주정책 재개. 한족 등을 대거 티베트와 몽골 접경지역에 이주시켜 정착시키려는 정책을 재개.2002년 7월 11일네팔, ‘티베트 문제’ 중국에 협력 천명.2002년 11월 8일중국, 달라이 라마 축원기도 티베트인 5명을 체포.오늘날의 티베트오늘날 티베트는 세계적으로 가장 자유가 억서를 받았다. UN 소위원회도 고문 방지 위원회, 모든 형태의 인종 차별 타파를 위한 위원회를 통하여 우려를 표명하였다.그러나 계속적인 체포의 위협을 지니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교육, 의료, 정치적 기화, 경제 면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중국 당국이 본토인들을 티베트로 이주시키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인들은 더욱 차별 받고 있다. 티베트의 고립화와 중국 이민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의료 혜택, 교육, 공개적인 호의는 공평한 정책이라고 할 수 없으며, 티베트인들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광범위한 술책이다. 이것은 다소 성공한 면이 있는데 1959년 티베트의 인구는 약 600만이었으며, 750만이 넘는 중국인이 거주하였다. 이제는 중국인이 티베트 내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85년 중국 정부가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인민공화국은 중국의 이민을 계속 장려하고 2020년까지 티베트에 약 6000만의 중국인을 거주하게 할 것이라고 한다. 인구의 유입은 문화적, 정치적인 목적 이외에도 풍부한 티베트의 천연 자원을 수탈하려는 목적도 있다.중국이 티베트의 광물, 산림, 야생 생물을 약탈하기 시작하여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생태학적, 기상학적 균형을 위협하는 환경위기를 초래하였다. 산림의 68%가 파괴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발생한 사막화 현상은 인도와 주변 지역으로 홍수피해와 기상 이변을 만들어냈다.플루토늄, 석유, 석탄, 금, 철, 납 등을 무차별 채굴하였고, 티베트는 화학 약품으로 인한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지방으로 갈수록 상황은 심해져 기형아와 사생아의 출산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티베트 고원은 핵무기 실험실과 핵폐기물 매립 장소가 되었다.이러한 조치들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맞서는 것으로, 천연자원의 남용을 막고 자연과 야생동식물에 관한 법령을 정한 자연 선두 국가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맺음말티베트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는 비단 티베트인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초기에 그들이 내었던 작은 목소리는 이제 전세계적인 관심으로 이어져,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른 듯 하다. 티베트2월).
행주산성 개요행주산성은 덕양산(124m) 산정에 위치한 곳으로 동남쪽은 한강의 절벽을 이용하고 서북쪽으로는 파주 벽제관등을 내다볼 수 있는 수륙경부로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권율장군은 수도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등 정병 2300여명을 거느리고 이곳 덕양산의 지형이 주는 이점을 활용 서울의 관문인 행주나루를 거점으로 하여 왜군을 대파하였으니 이를 후세에 충무공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부르고 있다.권율과 행주대첩권율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1537년(중종 32)에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며, 이항복의 장인이었다. 그는 1582년(선조 15)에 46의 나이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며, 이어 전적, 감찰, 예조좌랑, 호조정랑, 전라도 도사, 경성판관을 지냈다. 1592년 행주산성에서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그 해 6월, 도원수에 제수되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장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 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은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나게 된다. 왜병에 의해 도성이 함락된 뒤, 전라도 순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등과 군사를 모집하는 등 활동을 같이 하였으나, 이들의 무모한 공격에 독자적으로 천 여명의 의군을 모집, 이치산성(梨峙山城)에서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과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키와(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와 맞서 싸워 이긴다. 이 전투로 황진은 전사하였으나, 호남을 방어하게 된다. 그해 가을, 이치전투의 공으로 권율은 전라감사에 제수되기에 이른다. 12월,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권율은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주둔하게 된다. 이에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하여 도성의 왜군을 풀어 독성산성의 아군을 유인하려 하였으나, 권율이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이를 막아내었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하여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장장 조경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하여 행주산성을 택하였다.행주대첩 승리의 요인행주대첩의 승리의 요인은 기본적으로 관군과 의병들의 필사의 전투에 있다고 하겠지만, 이에 못지 않은 것이 지리적 이점일 것이다. 삼국시대이래 한강 지역은 남북세력이 교차되는 지정학적 위치로 남북세력의 충돌과 완충 역할의 기능을 하였으며, 수로를 통하여 경제, 문화교류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군사집단의 접근이 용이한 지역으로 통제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특히 삼국시대에 한강은 국경지대였기 때문에 이곳에 위치한 행주산성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행주산성은 물건너 마주보고 잇는 궁산성과 함께 한강수로의 군사적 방어의 제 2관문 격인 것이다. 그러나 고려, 조선시대에 들어서 국경선이 바뀌자 행주산성의 군사적 기능 역시 감소되었다. 이 당시 국방의 주요관심대상은 국경지대였으며, 유사시의 보호지로는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주목되었다. 한강을 통한 접근로에 대한 대비책을 중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며, 임란 중에도 행주산성은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권율 역시 처음에는 도성근처인 안현에 주목하였으나, 장수들의 설득으로 행주산성으로 군사를 옮기게 된다. 이처럼 크게 주목 받지 못한 행주산성은 도성에 주둔한 왜군에 대응작전으로 유용히 이용되었다. 한강유역을 이용한 후방 조선군과 연합을 형성하게 되면, 행주산성은 최대의 요충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행주산성은 평야 위의 낮은 구릉에 축조되어 있어 산성으로의 제 기능인 피난처의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행주산성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일시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대첩의 승리의 또 다른 요인으로는 새로운 무기의 사용이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 시피, 임진왜란은 조총이 조선에 최초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전쟁은 새로운 무기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행주대첩에는 수차석포, 진천뢰, 총통 등의 무기가 사용되었다. 이는 화약을 사용한 무기로 대량살상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치열한 싸움에서, 행주치마의 유래라 일컬어 질 정도로 관민의 일치된 의지를 보여준 것 역시 승리의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행주산성을 다녀와서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늘 가봐야지 하는 마음만 있었는데, 레포트를 이유 삼아 이제야 다녀왔다. 토성이라는 팻말을 보고 한참을 올라갔지만, 토성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파른 나무 계단을 한참을 올라서야 도착한 곳은 산 정상이었다. 다 올라온 후에 생각해보니, ‘좀 전에 내가 올라온 곳이 바로 토성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성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손쉽게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나무 계단 옆은 상당히 가파른 지형을 하고 있었다. 적들이 쉽게 올라오기 힘든 지형과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하게 한 것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삼 선조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산 정상에 올라보니 아래로는 한강이 흐르고 파주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절경이 과연 군사적 요충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청아한 가을 하늘과 어우러진 행주산성의 모습이 한없이 평화롭게 보였다.
Ⅰ. 서론Ⅱ. 본론1. Nathaniel Hawthorne2. 소설 주홍 글씨3. 영화 주홍 글씨4. 문학과 영화의 비교Ⅲ. 결론Ⅰ 서론문학 작품이 대중에게 다가서는 방법의 하나로 영상 매체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일주일씩 걸리며 읽게 되는 책 한 권 보다 한 두 시간만 보면 끝나게 되는 영상물을 선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TV나 Video tape 혹은 DVD 같은 현대적인 매체들은 사람들에게 좀 더 생생한 감정의 전달과 사실적 묘사를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고, 사람들은 점점 그런 방법에 익숙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영상 매체들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학 작품이 영상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기존 작품과는 다르게 왜곡되기도 하고, 실제 문학 작품이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내용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상물이 가지고 있는 최대 강점인 편리성과 신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영상 매체는 활자를 통한 문학 작품과는 다르게, 상영 시간 내내 사람들의 눈을 붙잡고 끊임 없는 시각적 변화를 주며 내용을 전달한다. 특유의 신속성과 편리성 때문에 영상물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 영상이 재미없다고 느껴지게 되면 곧바로 외면을 해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흥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작품 본질과는 다르게 영화적 요소들을 가미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 요소들이라 함은 기존 스토리보다 조금 더 극적인 상황을 만든다거나, 흥미를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과장되게 부각시킨다거나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영상물의 문학 작품 왜곡은 결국 크게는 작품 한 편을 단순한 대중들의 유흥 거리로 전락시켜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하지만 영상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동성, 생동감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그에 빠져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문학은 거의 다른 매체에 밀려나 있다. 바로 문학 작품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상상의 나래를 영상 매체라는 것이 실제적인 영상으로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작품이 전달할 수 없는 부분을 바로 영화가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 강점을 무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붙잡고 있는 영상 매체들의 거대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미 영상물 그 자체가 새로운 문화 코드로 자리 잡고 있는 현 시점에서 문학 작품과 영화가 서로 공존하며 나아갈 수 있는 바른 길을 모색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Ⅱ. 본론여기에서는 ‘주홍 글씨’라는 동명의 소설과 영화를 소재로 문학과 영화가 주는 장단점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Nathaniel Hawthorne (1804-1864)나다니엘 호손은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이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누이와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의 고향에서 지냈다. 17세기의 청교도를 선조로 모신 가정에서 태어나, 청교도들의 사상과 생활 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처녀작 『판쇼』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뒤늦게 쓰기 시작한 『주홍 글씨』로 명성을 얻게 된다. 『주홍 글씨』는 그 때까지 미국 소설에서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구성이었다. 그가 이 작품을 쓸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바로 그의 고조부인 존 호손이 소위 ‘세일럼의 마녀 박해 사건’때 잔인한 재판관 노릇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그의 개인적인 역사와 경험들이 뒷받침되어 『주홍 글씨』가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고 있는 문학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소설 주홍 글씨소설은 보스턴 주민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한 여인이 생후 3개월쯤 된 아이를 안고 처형대로 가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해스터 프린(Hester Prynne)이라는 젊은 여성으로 남편보다 먼저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곧 따라오겠다던 남편은 2년이 넘도록 소식 한 장 없다. 그 사이 그녀는 펄(Pearl)이라는 사생아를 낳게 된다. 엄격한 청교도 윤리가 지배하는 보스턴에서 군중들은 모두 그녀가 불경하다며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판사들은 그녀에게 세 시간 동안 처형대 위에 서 있어야 하며, 앞으로 평생을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알파벳 A 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라고 한다. 그녀는 군중들 속에서 갖가지 재난으로 고생을 많이 한 남편을 발견한다. 해스터는 그를 발견하고는 딸아이를 꽉 껴안으며 두려움에 떤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간통 사실을 알게 되고, 상대 남자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그 남자가 누군지 대답하지 않는다. 그 현장에서 당시 보스턴의 가장 나이 많은 목사인 존 윌슨과 주지사 배링햄은 해스터가 속해 있는 교회의 담임 목사인 딤즈데일에게 그녀를 훈계하여 회개시키고, 회개의 증거로 자백을 받아내라고 하였다. 하지만 해스터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은 결코 고백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은 자신의 고뇌뿐 아니라 그 남자의 고뇌도 견디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사실 아이의 아버지는 바로 그 젊은 목사였던 것이다.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해스터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의 어느 외딴 오두막집에서 바느질을 하며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 바느질 솜씨가 탁월한 그녀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일감을 받는다. 그 일로 번 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몰래 나누어주며, 정작 자신은 매우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의 은밀한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들조차 주홍 글씨를 단 그녀를 조롱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그녀는 묵묵히 그 모든 멸시와 학대를 참아낸다. 한편 딤즈데일 목사는 자신의 죄로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간다. 자신의 위선적인 행동과 양심이 가책으로 그의 몸은 현저히 쇠약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야위면 야윌수록 금식과 철야 기도를 철저히 하며 교구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하면 존경할수록 그는 더더욱 비참함을 느꼈다.한편 고생 끝에 아내에게 돌아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길 원했던 그녀의 남편 프린은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런 모습으로 서있는 그녀를 보고 그녀와 함께 처형대에 서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소문대로 자신이 바다에서 익사한 것으로 하고, 로저 칠링워드로 이름을 바꾼 후 그 청교도 마을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대 의학에 대한 지식과 인디언들과의 생활에서 익힌 약초들에 대한 정보로 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림즈데일의 주치의로 그와 같은 집에 살면서 목사를 치료하다가, 결국 그가 바로 아내와 간통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림즈데일의 건강이 악화된 것을 보고 해스터는 그를 위해 칠링워드와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약초를 캐고 있는 칠링워드를 찾아가 림즈데일을 그만 괴롭히라고 부탁하지만, 그는 자신에겐 용서해 줄 힘이 없다고 말한다. 해스터는 목사에게 그의 주치의가 바로 자신의 전남편임을 밝히고,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 함께 유럽으로 떠나자고 한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주지사 취임식 날 딤즈데일 목사는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예감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설교를 한다. 설교를 마친 후 그는 처형대 쪽에 서 있던 해스터와 펄을 바라보며 그들과 함께 처형대로 올라간다. 자신은 이미 7년 전 이 모녀와 함께 거기에 서 있었어야 함을 고백하며, 그 동안 해스터와 가슴에 찍인 A 처럼 자신의 가슴에도 죄악을 상징하는 그 낙인이 찍혀 있었음을 토로한다. 그는 그렇게 그 동안 자신이 겪은 고뇌가 하나님의 자비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숨을 거둔다.영화 주홍 글씨영화는 영국에서 온 해스터가 청교도가 지베하고 있는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정착하면서 시작한다. 가난 때문에 해스터는 늙은 의사 로저 프린과 결혼했지만, 서로 사랑하지는 않았다. 청교도의 엄격한 도덕성이 마을을 지배한 가운데서도 강인하고 아름다운 해스터는 일단 환영을 받으며 정착해가고 있었다. 남편이 인디언들에게 납치되어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열정적인 목사 딤즈데일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된다. 매력적이고 야망에 찬 그를 만나면서 해스터는 처음으로 한 남자의 이해와 사랑을 받은 여성으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유부녀인 그녀에게 욕망은 절대 절제되어야 할 성질을 것이었다. 하지만 로저 프린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사랑을 폭발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청교도 법률상으로는 남편이 사망했다고 해도 7년 후에야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관계를 가지고 해스터는 딤즈데일의 아이를 갖게 된다. 그 둘은 어떠한 수치와 모욕도 이겨낼 것을 맹세한다. 하지만 청교도들은 죄를 저지른 그녀에게 평생 가슴에 주홍 글씨로 A를 달고 살 것을 요구한다. 딤즈데일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밝히라고 하지만, 그녀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한다. 한편 그녀의 남편 로저는 인디언들에게 잡혔다가, 다시 칠링워스라는 이름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그는 이미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있었다. 해스터와 딤즈데일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그녀 주위의 사람들을 살해하는 살인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칠링우드와 위정자들은 그녀의 주위 사람들까지 괴롭히면서 간통한 남자가 누구인지를 밝혀 내려고 하지만 끝까지 말을 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마녀로 몰린 여자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이 그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던 딤즈데일은 마지막에 와서야 자신이 그녀의 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가 처형당하려는 순간 인디언들이 전쟁을 일으켰고 그들은 도망 칠 수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던 칠링우드는 자살을 한다. 결국 그들은 보스턴을 떠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곳에 정착해서 행복하게 산다.
Our team went Itaewon to inquire The Greeting Culture. The reason that we didnt visit the Inchon international airport was because of the SARS. We were afraid of it. Thats why we chose Itaewon instead the airport. We visited Islam Mosque, Hotel and we observed how they greet someone and we had a lot of interviews as well. Actually when we visited the Islam Mosque, we met a Pakistan. He was a friend of Eun-Ju. They just shook their hands and he gave a hint as an Islam greeting manner. He said they never have a physical contact with women, instead they give a welcome by saying something to her. For example, hi! Nice to meet you. , Hows your day been? .. like that kind of stuff. On the other hand, between guys, intimate relation, they hugged each other tight. Like this(showing the gesture to students). Shaking hands was the most common greeting ges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