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21세기는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문명사적 대전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의미한다. Bell, Drucker 등은 지식기반사회, 고도정보화사회, 인적자원개발시대, 평생학습사회의 도래를 주장하고 있다. 지식기반사회는 토지와 노동에 의한 산업보다 지식과 정보에 의한 산업으로, 고도정보화사회는 하이테크를 중시하는 것보다는 사이버경제를 중시하고, 인적자원개발시대는 화이트칼라가 아닌 자발성과 창의성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골드칼라(Gold Collar)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상을 강조하는 사회의 도래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식기반사회에서 인적자원개발은 국가발전을 위한 핵심이 되고 있다. 이에 정부는 2001년 기존의 교육부에서 교육인적자원부로 기능을 확대 개편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을 발표하였다. 또한 여성부는 ‘여성인적자원개발 및 활용 제고를 위한 추진전략’을 발표함으로써 여성의 인적자원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여성인적자원은 우리나라에서 양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학력이 높은 우리나라 여성인력은 질적으로도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여성인적자원에 비해 자원의 활용이 큰 폭으로 뒤쳐지고 있으며, 우수한 여성인적자원이 사장되고 있는 실정이다.구체적으로 여성인적자원 활용이 활성화를 갖지 못하는 이유를 보면 첫째, 여성은 이미 학교교육을 통해 우수하게 양성되어 있지만, 우리의 실정은 여성인력의 전문성 부족으로 노동시장에서 크게 활용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 여성이 사회진출에 제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결혼에 따른 육아문제로 인하여 계속 일하고자 하여도 일손을 놓아야 한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음에 따른 경력단절과 자신감 상실로 사회진출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셋째 기혼 여성의 사회진출을 위한 인프라가 미약하여 기존의 평생교육 기관들이 취미나 교양위주의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어 있어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위한 직업능력개발을 위한 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구성이나 평생교육적 방법의 개발, 그리고 대상별 프로그램의 특성화 등 평생교육의 내용적 측면은 물론 학습자에 대한 서비스체제의 미비 등 아직 질적으로 빈약한 교육이 제공되고 있다. 이에 교육내용, 방법, 지원체제 등의 적절한 구비로 기존 평생교육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여 평생교육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요구되고 있으며, 특히 평생교육의 주 참여자인 여성의 평생학습을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고 있다. 여성은 평생교육의 주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평생교육 정책 형성 및 시행과정에서 주류로 인정받지 못해 왔다. 전반적으로 평생교육 정책에서 여성은 소수 대상 집단으로서의 의미만을 부여받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인력개발교육에서여성은 부차적 교육대상으로 인식될 뿐이어서, 평생교육 영역은 정책상 아직까지 대표적인 몰성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평생교육의 초기기반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기본 정책 형성이 우선시되는 가운데, 여성과 같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세밀한 정책적 배려가 미처 고려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법적, 제도적 인프라가 구축됨에따라, 대상별 평생교육 기회 확보 및 지원 방안이 고려될 시점이다.2.여성평생교육의 현황여성은 학교교육은 물론 대학사회교육, 인력개발교육, 노인교육 등 사회교육의주 대상이며, 여성의 학습요구 및 능력개발요구는 앞으로도 계속 상승될 전망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경쟁체제에서 국가적 인적 자원으로서 여성의 능력 개발과 경쟁력 강화 역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의 평생교육 참여율은 여가 및 취미교육에 집중되어 있고,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과 실질적으로 연결되는 인력개발교육은 일부 직종에 국한되어 있으며, 여성의 사회참여 및 봉사를 진작하는 시민교육, 의식교육 역시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우리나라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의 특성을 보면, 1960년대 이후 1997년 외환위기이전까지 여성인력율이 남성보다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직업교육과 관련된 평생학습참여자 비율에 있어 직장연수의 경우 남 13.2%, 여 5.3%, 직업훈련의 경우 남3.7%, 여 0.9%의 참여자비율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직업훈련의 경우 전체 참여자의15.4%만이 여성이며, 사내교육의 기회는 더욱 적어 11.6%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교육비용에 있어 본인이 부담하는 비율이 남성은40.5%, 여성은 90.0%로 직장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여성의 자가 부담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평생교육 성별 기회격차 분석’의 설문조사 결과 여성의 직업기술교육 비참여요인은 역시 시간부족 38.8%, 교육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18.5%가 비중이 크고, 경비부담 9.9%, 교육기간이나 시간이 맞지 않아서 8.5% 순이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경비부담, 공부에 대한 자신감 부족, 자녀 육아, 가족의 반대를 더 큰 장애요인으로 느끼고 있다. 일차적으로는 전통적 가족문화(가사, 육아 전담, 시부모나 남편의 이해 부족)로 인한 참여여건에 장애, 학습자로서의 적극적 의욕 부족(자신의 필요는 2차적으로 인식), 제한적 시간 편성, 비용 부담으로 접근에 장애, 교육 참여 후에는 프로그램의 전문성 부족, 성차별, 활용성 미흡으로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3. 여성평생교육의 문제점 및 과제1)여성교육의 목적 및 가치 확립.여성평생교육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방향 정립 없이 평생교육의 양적 확산에만 치중해 온 결과, 취미 활동 위주의 프로그램이 주류를 차지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취미 프로그램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필요한 다른 다양한 프로그램 영역이 상대적으로 발전되지 못함으로써 결국 여성들의 프로그램 선택권이 매우 협소해지고, 교육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①지원정책과제-여성평생교육이 추구해야 할 목적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여성평생교육 프로그램의 개할 수 있는 원격교육을 활성화한다.- 교육시간을 다양하게 편성한다.② 세부과제- 여성친화적, 여성주의 관점이 반영된 프로그램 개발을 지원한다.- 우수 프로그램 사례를 발굴하여 홍보하고 보급한다.- 참여식, 자기주도학습식, 원격학습식, 소집단식 등 다양한 학습방법 모델을 개발하여 보급한다.- 여성전문 인터넷 사이트의 교육기능을 강화하도록 지원한다.- 여성들이 학습을 위해 인터넷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대한다.- 새벽, 야간시간대 프로그램 운영으로 직장 여성의 교육 참여 여건을 조성한다.- 모듈식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중도에 학습을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계속해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3)학습풍토(문화) 및 학습여건 조성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지속적 학습의 필요성과 중요성에대한 인식이 미약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학습을 통해 자신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도록 여성의 인식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의 학습참여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다.① 지원정책과제- 여성들이 학습을 통한 자기계발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여성학습문화를 확산시킨다.- 학습상담을 통해 지속적인 학습을 유도한다.- 노인보호와 탁아 서비스를 제공한다.- 여성의 학습에 가족의 참여와 이해를 격려한다.②세부과제- 평생학습축제에 여성학습주간을 편성하여, 여성학습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지역평생교육정보센터 및 평생 학습관에서 여성을 위한 학습상담을 강화하여 여성들이 생애 학습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교육기관에서 직접 또는 지역 탁아기관과 연계하여 탁아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한다.- 노인보호 및 노인교육 프로그램의 실시 확대, 교육기관과 복지기관의 연계로 여성들의 노인부양 부담을 완화하도록 지원한다.-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확대한다.4) 행, 재정적 지원 강화평생교육기관들에 대한 정부나 지자체의 체계적인 지원체제가 운영되고 있지 못하다. 정부 부처간, 중앙정부와 지자체간 원활한 업무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위해 무료프로그램 수혜대상 요건을 완화하고, 교육 중 생계비 지급을 고려한다.- 대상별 교육비 수준을 다양하게 책정한다.- 중앙 여성사회 교육정보DB를 학습자가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상태로 개선하고, 기관 및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갱신한다.5) 여성학습자 지원서비스 확대현재 평생교육기관들은 프로그램 개설과 운영 이외에 학습자를 위해 필요한 탁아, 상담, 정보 제공 등 각종 서비스를 적절히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 여성회관, 여성인력개발센터, 문화센터 등은 유료 또는 무료로 교육 중 탁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기타 기관들도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여성들의 교육 참여를 위해서 가장 먼저 구비되어야 할 것이 탁아시설로, 기관별 시설 설치비용이나 보육교사 인건비를 지원하는 방안 또는 인근 보육기관과 연계하는 방안 등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①지원정책과제-여성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기관에 탁아시설을 마련하도록 하며, 시설 설치비용이나 교사 인건비를 지원함으로써 기관 부담을 감소시켜 준다.-지역별로 교육기관이나 프로그램 정보에 대한 공동의 홍보 전략을 마련하여, 여성들이 쉽게 정보에 접근하도록 한다.- 현 여성 사회 교육정보 DB를 수요자들이 검색하기 쉽고, 최신의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개선 운영하고, 지자체별로 지역 교육정보DB를 구축하여 지자체 홈페이지에 게재하도록 한다.-여성친화적 학습환경을 조성한다.-평생교육기관의 여성대상 학습상담 기능을 강화한다.②세부과제- 탁아시설 설치 시 비용 및 교사인건비(일부)를 지원한다.- 기관 내 탁아시설 운영이 어려울 경우 지역탁아 시설과 연계하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역평생교육정보센터나 평생 학습관에 평생교육사를 배치하여 학습상담 기능을 강화한다- 자원봉사 상담자를 양성하여 학습상담에 활용한다.- 평생교육정보망과 여성 사회 교육정보DB를 연계한다.- 여성전용 인터넷 사이트에 여성 사회 교육 정보DB를 게재한다.- 지역단위 공동의 정보 및 상담 제공 서비스체제를 갖춘다.- 지역별 평생교육기관통합
Ⅰ. 서론미군정 시기를 마치고 남한의 단독 정부가 세워지면서 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과 기대는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고 국가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교육을 함으로써 교육은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정부수립기와 군부집권기의 교육을 살펴보면서 잘못됐던 점은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생각해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지금부터 정부수립기와 군부집권기의 교육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Ⅱ. 본론1. 정부 수립기의 교육1948년 7월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주권 재민의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였다. 그 내용으로는 모든 국민은 국가로부터 인권을 보장받고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대신 국가에 대한 일정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국민의 4대 의무중 하나로 교육의무를 규정했는데 이것은 교육의 문제를 비로소 잘 삶과 인권의 차원에서 다룸으로써 과거 식민주의 교육에 비교하여 그 본질적 차이를 실감하고 역으로 식민주의 교육의 왜곡 상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 3년여의 군정 종식과 함께 남한의 단독 정부로서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이는 동서양의 진영의 첨예한 대결장으로 전락한 한반도는 좌우익 간, 남북간 증오와 모멸의 정서가 지배하는 장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1949년 12월31일 헌법 정신에 기초하여 교육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우리 민족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본법인 교육법은 일제하의 악법 조선교육령을 대체하는 민주적 교육법이었다. 교육법에 명시된 학제는 국민학교 6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4년, 대학 4-6년, 초급 대학 4년 또는 2년, 사범학교 3년, 사범대학 2년 또는 4년으로 규정했다. 이는 국민학교라는 일제 군국주의하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은 헌법정신과 교육이념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그 기저에 신흥 국가의 국민정신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의 망령을 끌어안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판자집 등을 강행, 멸공필승의 이념교육을 강화, 전국(戰局)과 국제집단안전보장의 인식을 명확히 하며, 전시생활지도에 중점을 두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학교 입학 지원자 국가 고시제 시행했는데 그 이유는 학생의 거주가 유동적이고 수업진도가 상이하며, 부정입학의 소지가 컸기 때문이었다. 지방 문화 육성, 지역 사회 특수성 제고, 지역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도1교의 국공립 대학 설치 방침을 확정함으로써 1952년 대구, 광주, 전주를 필두로 각 지방 도청소재지에 국·공립 대학교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전시 후 1954년 4월 초·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문교부령 제35호, 54.4. 20. 제정 공포)을 공포하였다. 이것은 각급 학교의 1년 단위 교과목과 이의 주당 평균 수업시수를 명시한 것이다. 초·중학교에 사회생활과를 두고, 교육과정 전체 구조를 교과영역과 특별활동의 두 영역으로 나눴는데 이는 미군정 당시에 제정된 「교수요목」을 정비한 것에 불과하였다. 1955년 이를 다시 정비하여 각급학교의 교과 과정을 공포 (문교부령 제44,45,46호, 1955.8.1. 제정공포)하였는데 이는 단편적 지식중심에서 아동의 욕구를 고루 충당하는 교육과정으로 전환을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교과과정이 피난 정부로터 환도 직후 제정된 관계로 불합리한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로써 ‘1차 교육과정’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또한, 1952년 8월-1962년 6월까지 모두 4차에 걸친 미국교육사절단 내한 진보주의 교육이론을 소개하고, 교육과정 개발과 수업 지도방법의 개선에 직접 기여, 교재와 시청각 기자재의 개발·원조·운용에도 간여하여 미국을 ‘교육의 구세주’로 인식, 친미적 관념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자유당의 권력자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관행과 국민정신의 왜곡 하 에서도 미국 교육이론을 토대로 하는 외견상만으로 교육현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2. 군부집권기의 교육1) 유신정권기의 교육1960년 4.19 혁명으로 후 과도 정부한 혁명적 조류 속에 최초의 교원노동조합운동이 대구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부세력이 집권하게 되고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교육면의 인간개조운동, 사회면의 재건국민운동을 전개하면서 강력한 개발 독재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현대교육사에서 1968년을 교육의 해로 불린다. 그 이유는 1968 10월14일 대학입학예비고사제 발표,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 통신교육제, 11월 장기종합교육계획 수립을 위한 장기종합교육계획심의회 규정,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등 중량급 교육정책들이 연거푸 공포되기 때문이다.1960년대의 교육내용면에서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63년 국가교육과정이 개정 공포(문교부령, 제119,120,121호, 1963.2.15.개정 공포),이를 ‘2차 교육과정’이라고 지칭하였다. 1차 교육과정이 전시와 휴전 직후 졸속 개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과로 사회 문화적 변동 요인을 감안할 필요에 따라 시도된 것으로, 군사 정부의 통치 방향에 부합하는 반공민주주의 이념과 자주성, 생산성, 유용성을 강조하고 운영에 있어서 지역성을 고려하였다. 1970년대 공교육은 국가 주도형 교육으로 개발독재의 통치 이념 확산과 인력양성이라는 양대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하였고, 국민교육헌장 이념 하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민족주체성교육’ 또는 ‘국적 있는 교육’의 강조로 드러났다. 1971년 12월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가운데 안보교육체제를 정비하여 반공이데올로기로써 국민적 결집을 이끌어내고 ,1972년 10월 유신헌법 이후에는 이를 유신교육으로 일관되게 승화시켜나감으로써 교육은 한낱 정치의 시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1972년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실험 대학 안이 채택되고 고등교육 개혁의 해로 설정한 정부는 국가 및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졸업학점 하향 조정, 종합 인력수급 계획 수립, 지방 대학 특성화 등 개혁 시도하였다.1973-1974년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이 개편(초등학교 및높이면서 민족중흥과 국가 근대화의 신화부흥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이 시대를 지배했던 새마을주의로 상징되는 개발 독재의 통치이념은 논리 구조의 완결성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편파적 집중, 극심한 부패를 수반한 정경유착, 소외 계층의 양산, 국제 자본에의 종속 심화에 비하여, 이에 상응하는 인간 가치 구현, 민주주의 체제 발전에의 해답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격렬한 반정부 투쟁을 야기했다.2) 5·6공화국의 교육정책① 5공화국의 교육정책유신정권이 역사의 무대에서 종막을 고하자, 재야와 정치계 인사, 학생 등 민주세력에 의한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었으나 1979년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에 의해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고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자행하면서 광주 민주 항쟁의 지압을 빌미로 폭압적 지배구조를 구축하는 성공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자의적 집단에 의한 간성을 통해 5공화국을 자작함으로써 새로운 통치 세력으로 군림하였다.이규호 문교부 장관 (1980.5.22-1983.10.14) 5공의 교육구도 확립 하기위해 민주적이고 애국적인 국민을 기르는 교육에 역점을 두지만 신군부세력에서 그의 교육구도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명의로「교육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발표한다. 일명「7·30교육개혁안」불리는 이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① 대학입학시험제도 개혁; 대학 본고사 폐지 및 고교 내신 성적 반영 ② 대학의 졸업 정원제 실시 ③ 대학입학인원의 확대 ④ 전일수업제 대학운영 ⑤ 방송통신대학 확충 ⑥ 교육대학의 4년제 개편 ⑦ 초·중등 교육과정 축소 개정 ⑧ 교육방송 실시 ⑨과열 과외 추방 캠페인 등이다. 이 개혁조치의 성격은 사회 문제화 되고 있던 교육문제들을 정치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범국민적 과외추방운동을 전개하여 이에 동참시켜 과외비불안 해소, 내신 성적 반영에 따라 고교교육을 정상화함으로써 사회통제 기선을 잡고 국민적 신뢰를 얻기 위한 조치였고 또한, 초·중등 교육과정 개정의 단서를 제공함으로하다고 할 수 있다.1981년 유치원을 포함한 초·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 일제히 개정(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과정, 문교부 고시 제422호, 1981.12.31.) 이를 ‘4차 교육과정’ 이라고 지칭한다. 그 내용으로는 민주, 복지, 정의 사회 건설의 역군으로 자주와 창의의 역량을 가진 국민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학문중심교육과정의 지적편중성을 지양하여 정서영역과 조화하려는 인간주의 관점 반영한 것이다. 또한, 교과 활동과 특별활동으로 구분하였다. 교과활동은 국민학교 경우 1,2학년 경우 통합 교과로 운영하고 3학년부터 분과를 원칙으로 학생발달단계에 따른 통합적 경험과 분과 운영의 타당성을 제고하는 중점을 두었고 고등학교는 교과 영역을 보통교과와 전문교과롤 구분하고 공통필수과목을 두어 일반계, 실업계 공히 필수 과목으로 과할 수 있게 하였다. 특별활동은 어린이회(중학교는 학생회 활동, 고등학교는 학도호국단 활동), 클럽활동, 학교 행사로 넓게 규정하였다.1987,1988년도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다시 개정, 이를 ‘5차 교육과정’이라 지칭한다. 지식의 급속한 팽창, 과학의 발달, 고도 산업화, 정보화에 대처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 자주적인 사람, 창조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을 기르는데 역점을 두었다. 1987년도(유치원 국민학교 교육과정, 문교부 고시 제 87-9호, 1987.6.30) 교과영역에서 국민학교 1,2 학년 경우, 우리들은 1학년,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 등의 통합교과로 편성운영 하였고 중학교 교육과정은 1987년 개정(문교부고시 제 87-7호, 1987.3.31)교과영역에 자유선택 시간을 두어 학교 실정에 따라 운영하도록 하였고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1988년 개정(문교부 고시 제88-1호, 1988.3.3.1) 국민정신 강화 과목이 비중을 차지하고 교양 선택 2단위를 부여하였다.1980년대 5공 정권이 중점을 둔 교육정책이 정권 안정을 위한 이데올로기 비판교육 이외에도 과학기술교육을 강조한 교였다.
나의 친척, 몰리네 소령과 미국식민지 시대나의 친척, 몰리네 소령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조사를 하기는 했지만 문학 작품이라는 것이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지라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다. 이러한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는 물론 배경지식도 필요하겠지만 나의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 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미국 식민지 시대의 초기 발단은 영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미국사회는 영국적인 요소가 그대로 이입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몰리네 소령은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시대였을 당시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미국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몰리네 소령은 대영제국의 왕이 미국 식민지 주지사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한 이후 식민지 국민들의 저항심과 비판정신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치적인 격동기를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 소설의 구조는 아주 흥미롭게 되어있는데 로빈이라는 이름의 영국 젊은이가 미국에 사는 몰리네 소령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면서 식민지 시대의 민중들의 모습과 사회적 상황을 아주 구체적이고 재미있게 보여주는 것 같다. 로빈은 뉴 잉글랜드의 성직자 집안의 똑똑하고 청렴한 청년이지만 당당하지만 아직은 미숙하고 순수한 청년이다. 하지만 몰리네 소령을 만나러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무엇인가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로빈이라는 청년이 미국에 도착하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백발의 가발에 검은 천의 옷자락이 넓은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나이든 노인이다. 몰리네 소령의 집을 묻자 그 노인은 짜증과 화를 내며 가르쳐 주지 않는다. 여기서 이 노인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에 대해 적대감과 반항감을 표출하고 있고 미국사회에 들어있는 개인주의적이고 무관심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로 주막에 가서 주막주인에게 물어보게 되는 게 여기서도 역시 홀대를 당하고 쫓겨나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감 속에서도 미국은 유럽사회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화려한 색깔로 수놓은 옷들, 커다란 가발들, 유럽 신사들을 모방한 젊은이들로 묘사하면서 유럽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그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어느 한 국가 또는 사회가 강제적인 지배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들만의 정체성과 사상·관념을 형성해야 한다. 하지만 유럽에 의해 새로 태어나고 지배되어 온 나라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관념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려운 것이다. 세 번째로는 주홍색 페티코트를 입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있는 곳에 소령님이 산다고 로빈에게 거짓말을 하고 옆집 남자가 나오자 화들짝 놀라 도망가게 된다. 옆집에서 나온 남자는 로빈에게 꼬챙이가 달린 지팡이를 들고서 집으로 돌아가, 부랑아 녀석, 집으로 돌아가라구! 라고 고함을 지른다. 여기서도 역시 집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집이라는 것은 미국을 지배하는 영국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곧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는 우리나라에 간섭을 하지 말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아주 직접적인 말로써 독립의지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미군들한테 양키 고 홈 이라는 강한 메시지를 남기면서 우리의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로 만나는 사람은 주막에서 봤던 망토로 몸을 가리고 얼굴 한쪽은 붉은색으로 칠하고 다른 한쪽은 검은 색으로 칠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게 몰리네 소령의 집을 물어보니 한 시간만 기다리면 몰리네 소령이 지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몰리네 소령을 기다리는 동안 로빈은 고향집을 생각하며 보내게 된다. 성직자인 아버지가 했던 예배를 상상하며 지금 자기가 처해있는 상황과는 너무 대조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따뜻함, 고귀함, 경건함 등을 느끼며 미국사회의 적막함을 이방인에 대한 소외감등을 잘 나타내 준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 한 신사가 유일하게 로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하지만 로빈은 이미 기진맥진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 신사는 로빈 즉, 어리숙한 애송이에 불과한 청년이기 때문에 그를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신사와 이야기하는 동안 어느 시끄러운 행렬이 이어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한다. 그 행렬에 주동자는 네 번째 만난 남자였고 그러한 행렬 속에 수레 한 대가 있었다. 그 수레 속에 타르와 깃털을 바른 몰리네 소령이 앉아 있었다. 몰리네 소령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인간 내면의 추악하고 더러운 부분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식민지 시대이고 독립하기 위한 의지가 확고하다고 하지만 민중들은 어떠한 비판 정신과 보편적 윤리와 정신을 망각한 채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잘못된 행동도 군중들 속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면 무서운 힘들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서운 광경을 본 로빈은 나루터로 가는 길에 어디냐고 신사에게 물어본다. 여기 나루터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루터는 이러한 몰지각한 민중과는 떨어진 자기만의 세계, 즉 자연으로의 도피, 순수한 세계를 말하는 것일 수 도 있다. 그런 인간의 추악함 속에서 자연의 경건함과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신사는 여기에 계속 머물고 몰리네 소령 도움없이 성공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로빈이 몰리네 소령에게 도움을 받고 특혜를 누리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노력을 해서 성공을 하라는 메시지를 남기게 된다.
REPORT(칸트와 도덕성)이제 까지 내가 칸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웠던, 선의지 라는 개념과 정언명령의 행위준칙에 관한 것들이 전부이다. 또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성을 언제나 목적으로서 대우하고,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라'라는 교과서의 지문도 기억에 남는다. 칸트라는 인물과 칸트철학의 시대적 배경, 철학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이지만, 텍스트와 인터넷에서 검색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칸트가 말하는 도덕성에 대해서 정리 해보고자 한다.독일 관념론은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철학을 지칭하는 말이다. 칸트가 태어난 해가 1724년이고 독일 관념론의 철학자 셀링이 죽은 해가 1854년이 되는데 이 시기가 대략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해당된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1755년에서 1831년에 이르는 시기가 독일 철학이 독일 관념론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헤겔을 우리는 독일 관념론의 최후의 완성자로 보고 있다. 이것은 이 기간에 유럽에서 발생한 커다란 사건인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사상적으로도 커다란 파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독일 관념론을 이해하는 데도 이 사건이 미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혁명과 결부되어 18세기의 유럽정신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사조가 계몽주의인데, 이 계몽주의가 프랑스나 영국에서와는 달리 독일 시민계급에 의하여 철저하게 발전되지 못하였다. 프랑스혁명은 독일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고 봉건주의가 무너지면서 시민사회의 형성을 도왔으며 독일의 국가적인 기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계몽주의는 이론적으로 표현된 이상들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프랑스혁명에서 확신하였으며 이때 나온 칸트는 인권의 실현을 자기의 철학에 심오한 의미로써 간주하였고 그의 철학은 독일의 관념론 철학자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이 프랑스혁명과 주변 세계에 의해서 자극된 독일 시민계급의 지식인이 시도한 하나의 철학적 혁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독일 관념론은 프랑스혁명에서 절정에 도달한 시민사회의 발전을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독일 내에서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성을 반영하고 있다.독일의 철학자 칸트(Kant, Immanuel)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수학, 신학, 물리학 등을 배우고, 나중에 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데카르트의 대륙 합리주의 철학과 영국의 경험 철학을 종합하여 새로운 비판 철학을 완성하였다. 1781년에 을 발표하여 명성이 세계에 알려졌고, 1788년에 , 1790년에는 을 써 진리, 도덕, 미에 대한 문제점을 다루어 근대 철학을 세웠다. 그 뒤 대학교 총장이 되었으며, 그가 쓴 은 국제 평화 사상의 바탕이 되었고, 저서에 등이 있다. 칸트 철학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다. 이러한 질문의 배경에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이다. 라는 형식적 규정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물음의 주요한 관심은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보다 실질적인 규정에 있다. 칸트는 이 물음을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로 표현하며 그의 철학적 뼈대를 이룬다.-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괜찮은가?이 세 가지 중에서 도덕성에 관련된 질문이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이다. 칸트는 그의 저서 에서 의무론적 윤리관을 제시하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은 것이다. 와 같은 속담에서 뜻하는 결과에 의한 윤리적 판단을 반대하였다. 칸트의 도덕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통적인 윤리학자의 목표라고 볼 수 있는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칸트는 이 세계안에서, 아니 그밖에서조차 우리가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Good will)뿐이다. 라고 하였다. 선의지는 어떤 상황에서는 선하고 다른 상황에서는 악하며, 우연히 어떤 사람이 그것을 원한다면 선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악한 그런 것이 아니다. 선의지의 선함은 어떤 맥락이나 목적이나 욕구 등과의 관련에 의해서 조건 지워지지 않고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하다.인간 이성이 인간의 행위, 특히 도덕적 행위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져 왔다. 칸트에 있어서 이성은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으로 나누어진다. 이론이성은 인식에 관한 것이고, 실천이성은 행위에 관한 것이다. 칸트는 도덕적 실천이성이 이론적 인식의 우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인식의 요소를 결여하지 않고 오히려 도덕적 인식, 도덕적 이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칸트가 실천이성을 우위로 주장하는 것은 이론이성의 관심이 실천이성의 관심에 종속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실천이성의 관심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즉 삶의 가치 서열에 있어서 실천적인 것이 앎의 행위보다 높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가 따르는 행위의 준칙이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행동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된다. 사람은 경험적 욕망에 따르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려고 한다. 이러한 초월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성이다. 따라서 실천이성은 경험적 욕망을 통제하고 규정하는 보편적 원칙을 제공한다. 개별적 욕망을 보편적 원리에 종속시키는 실천이성이야말로 이론이성보다 우위를 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실천이성은 준칙을 법칙으로 이끌어간다.칸트에 의하면, 어떤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그 행위의 결과로부터가 아니라 행위자의 준칙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리고 이 준칙은 그것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법칙을 준수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준칙이 도덕법칙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문제는 어떻게 준칙은 그것이 낳은 행위들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준칙들 혹은 의지의 주관적인 원칙들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도록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의 준칙들이 원칙으로서 보편적인 도덕적 입법의 가능한 형태가 될 수 있다면, 이성은 우리가 법 그 자체에 대한 존경에 의해서 그 준칙들을 인정해야 하고 존경해야할 것을 요구한다. 칸트가 말하고 있는 원칙 또는 법칙이란 바로 도덕법칙을 의미하는 것이다.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이 일종의 법칙인 이상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고 그것은 특히 행위의 법칙이기 때문에 인과율이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것처럼 도덕법칙은 인격을 갖춘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행위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자연법칙과는 달리 인간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의무감, 즉 도덕적 당위를 규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지침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준칙은 보편성을 띠는 도덕법칙으로 승화되고 누구에게나 무조건 적용되는 정언적 명법 으로 나타난다. 그는 이것을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준칙인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라고 표현하였다. 즉 나 자신의 생활신조가 모든 사람의 것으로 되어도 좋다고 인정될 때 그것은 곧 도덕성을 갖는 것이다.
映畵를 통해본中國의 女性 意識- 張藝謀 監督 映畵를 中心으로 硏究 --目 次-Ⅰ. 序 論1Ⅱ. 전통시대 여성의 地位와 役割31. 시대별 여성3(1)용산문화(기원전2300∼1800년)4(2)춘추말기∼한대초기4(3)후한말4(4)위나라52. 美貌를 중시했던 중국 여성들에 대한 古事53. 무칙천(武則天) -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 6Ⅲ. 소설『홍루몽(紅樓夢)』81. 18세기 중국사회의 거울,『홍루몽』82. 『홍루몽』속의 중국 여성9Ⅳ. 장예모(張藝謀) 감독 영화 속의 중국 여성101. 장예모 감독102. 장예모 감독의 작품설명10(1) 붉은 수수밭(紅高粱)11(2) 홍등(大紅燈籠高高掛)12(3) 귀주 이야기(秋菊打官司)13(4) 책상서랍 속의 동화(一個都不稜少)14Ⅴ. 其他 감독들의 영화161. 푸른연(藍風箏)162. 송가황조(宋家皇朝)17Ⅵ. 結 論19. 主要參考文獻 및 資料目錄20Ⅰ. 序 論중국의 여성들은 변화하고 있다. 중국 직장인 중 여성이 46.6%를 점할 정도로 사회진출도 활발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시되어 중국 여성의 취업률과 국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세계 평균 수치를 능가하고, 이렇게 중국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 지면서 여성들은 경제적 독립과 여성 지위의 독립을 직접적으로 얻게 되었다. 상해 등 큰 몇몇 대도시에서는 결혼 전에 재산을 공증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것에서 중국 여성의 결혼관, 연애관의 변화를 읽을 수 있고, 결혼 관계에 있어서도 혼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함과 동시에 여성이 결혼에서 수동적이지 않고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게 됨을 알게 해준다. 과거의 여성들이 반듯이 결혼을 하고 남성들에게 의지하면서 연애, 혼인의 안정성을 중시했다면, 이제 중국 여성들은 자기의 독립적 인격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여성의 사회참여는 여성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경제적인 사회참여에 따른 이유를 물었더니 아래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 중 개발되었다. 농경은 보다 확실한 생활수단이 되었으며, 가축 사육도 보다 높은 수준에 달했다.이제 농경에 남성들의 근력이 중요하게 되었고 그 수확물이 확대될수록 남성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남성의 묘에서는 생산도구가, 여성의 묘에서는 물레틀이나, 머리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방직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생산활동에서 남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남성에게 종속되게 되었다. 정장할 곡식이 더욱 많아졌고 사유재산의 개념이 출현했다. 남성들은 사유재산을 자신의 아이에게 상속하기를 바랬다. 분명한 자기 아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여성을 독점해야 했고 이에 따라 일부일체제의 혼인제도가 성립하게 되었다. 가끔 남녀 합장묘가 발굴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알려준다{ 안정애 · 양정현저 ,《중국사 100장면》,(도서출판 가람기획 1993), P.25..(2)춘추말기∼한대초기노나라의 계경강이 그녀의 종손인 계강자를 남외여내(男外內女)의 규범에 벗어남이 없는 언행으로 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공자는 그녀를 남외여내의 예법에 밝았던 사려 깊은 여성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사회에 이미 남외여내의 예법이 이념적으로 통용되었음을 시사한다. 남외여내의 윤리관은 실제로는 그렇게 엄격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춘추시대에는 인륜을 어지럽히는 문란한 남녀관계가 사회에 만연하였다. 엄격하지 않았던 남외여내관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점차 엄격해지기 시작하였다.(3)후한말지식인들은 남외여내 의 윤리관을 가법으로 삼고, 사회에서는 법으로 제도화하여 강화하였다. 예를 들어 전한시대 하남태수인 진준이 과부 집에서 음주와 가무를 즐겼던 일로 인하여 남녀유별을 어지럽힌 죄로 탄핵을 받고 면직된 사례나 왕망 때에는 남녀가 같은 길을 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으로 제정하고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옷에 붉은 표시를 하여 죄인임을 알게 하였다{ 박상규저, 《中國의 歷史와 文化》, (도서출판 보성,1999), PP.184-185..한위(漢魏)시대에 버림받은 여인들의 원를 살짝 칠한다거나 ,얼굴에 분을 바르지 않고 검은 기름을 칠한 다음 분을 약간 발라서 금방 운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거나, 만족의 머리처럼 둥글게 쪽찌는 머리가 장안에서 유행되다가 사방으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3. 무칙천(武則天) -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중국사에서 여성의 정치적 역할은 매주 제한됐다. 기껏해야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뒤에서 조정했던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唐(당)제국의 맥을 끊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무칙천 이다. 그녀는 중국사의 유일한 여성황제로서 과거제 실시 등 매우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무칙천은 624년 山西(산서)의 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원래 목재상으로, 수말기에 李淵(이연), 즉 唐高祖(당고조)을 좇아 봉기하여 당의 건국에 참여했다. 그 공로로 당 건국 후에는 고위직을 차례로 역임할 수 있었다. 14세 때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 했던, 그녀의 본명은 明空으로 이 글자는 그녀 스스로가 만들었다. 태양을 가리키는「일」과 달을 지칭하는「월」그리고 하늘을 의미하는「공」세 글자가 합쳐 이루어진 것으로 하늘에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어 비춘다는 뜻이다. 太宗(태종)(626-640)은 그녀에게 「武媚(무미)」라는 칭호를 내렸다. 태종이 죽은 후 그의 후궁들과 함께 절로 들어간 그녀는 태종을 이은 高宗(고종)(649-683)에 의해 다시 환속되어 그의 후궁이 됐다. 다음해 고종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황후로 봉했다. 이로써 그녀는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셈이다.무칙천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천하대권을 휘두른 기간은 15년 정도 밖에 안됐다. 그러나 이미 660년부터 약 30년 간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녀는 모두 45년 간, 즉 80여 년의 생애 중 절반이상을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장수한 권력자는 남녀를 통틀어 중국사에서 그리 흔하지 않았던 듯 하다. 철저하게 남성위주 사회의 중국에서 여성이 그렇게 오랜 기간 권력의 정상에71년에서 1978년까지 멧돌 돌리는 일을 했다고 한다. 예술과 촬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책이나 자료들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취미로 스틸 촬영을 시작했다. 1978년 북경전영학원(베이징영화학교) 촬영과(촬영학과)에 입학하려 했으나 27살의 나이제한에 걸리자 문화혁명으로 인해 10년을 허비했다는 편지를 장관에게 보내 겨우 입학허가를 받았다. 1982년 졸업을 한 그는 광서영화제작소 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후 지앙필름스튜디오로 옮겨서 장 준카오감독의 (1982), 첸 카이거 감독의 (1983)를 촬영했다.1989년에는 공리 데뷔작이자 자신의 데뷔작인 (1988)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공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중국의 제 5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으며 현재에는 스스로 변모하여 6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역시 공리와 함께 한 (1990)로 칸느영화제 루이스 부뉴엘상과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1991)으로는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에 또 한번 후보로 올랐다. 역시 1992년 (1992)로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을, 1994년 (1994)으로 칸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http://www.skyvideo.pe.kr/tt23.htm. , , , 등의 일련의 영화들은 감독이 중국 내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를 나름대로 구축해 나가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장예모감독의 이런 접근이 페미니즘적 사고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에서 수적으로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억압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말로는 현대사회라고 지칭하고 있는 이 사회 가 얼마나 전근대적 사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코드라고 볼 수 있다. 감독은 이런 측면에서 여성의 문제를 하나의 코드로써 살펴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에 관한 문제와 항상 유기적으로 연관지어 파악된다.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고, 사회 속에서 인간 소외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한다. 송련도 결국에는 가장이 만들어 놓은 교묘한 권력의 그물에서 허우적거리다 망가지고 만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파멸구조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넷째 첩을 통해 반복된다. 여름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다음 여름까지 1년의 주기로 다루어져 있지만 계절의 변화와는 상관없는 무미건조하고 되풀이되는 일상 생활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송련은 시녀 연아와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대처를 못한다. 넷째 부인 송련의 하인인 연하의 죽음, 셋째 부인의 죽음이 극화된 겨울 장면이 이 영화의 절정. 여름의 무성한 생명력에서 시작된 장면들이 가을의 스산한 분위기로, 겨울의 혹독한 절망으로 이행되어 가는 모습은 한 가정내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전개양상이기도 하지만, 겨울 적인 순환의 이치이기도하다. 감독은 이 가정과 다른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일부다처제가 행해지는 곳에서도 그 제도는 사회적 및 성적이 입장에서 일부일처제이다. 즉 처들 중의 한 사람이 나머지 한사람에 비하여 일단 높은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거나 또는 본처라고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며, 많은 경우 그러한 높은 지위를 부여받게 되는 것은 맨 먼저의 처이다. 이 영화에서 시녀 연아가 홍등을 훔쳐 자신의 방에 가져다 놓은 것을 송련이 마당에 던지면서 첫째 부인에게 법도에 따라 처벌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은 좋은 예이다. 이처럼 홍등은 중국 대부호의 저택, 일부다처제의 비인간적 모습을 통해 봉건적 잔재를 비판하고 있다. 사실 중국의 처첩제는 저와 같은 형태로 오랫동안 유지되어 왔다. 영화이기 때문에 약간의 과장과 극단적인 대비가 있기는 하지만, 대가족제도 속에서 가장에 의해 유지되어온 처첩제는 성과 돈이라는 매개물을 이용하여 여성을 도구화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개혁적인 인사들이 폐기되어야 할 악습으로 오랫동안 지목하여 왔고, 그 덕에 중화민국 시대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중국의 가족제도 중에서 저와 같은 처첩제는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한다. 부부 중심의 가족제도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