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변천 과정과 이에 대한 분석목차1. 서론-------------------------------------------------------22. 근대경제학 이전의 경제학----------------------------------------21) 그리스 · 로마의 경제학---------------------------------------22) 중세 경제이론---------------------------------------------33) 중상주의의 대두--------------------------------------------34)중농주의--------------------------------------------------45) 고전학파-------------------------------------------------56) 역사학파-------------------------------------------------87) 사회주의 경제학파-----------------------------------------93. 근대경제학-------------------------------------------------101) 한계효용학파---------------------------------------------102) 신고전학파----------------------------------------------113) 제도학파------------------------------------------------124. 현대경제학-------------------------------------------------131) 케인즈와 케인즈학파---------------------------------------132) 케인즈 이후의 경제학---------------------------------------155.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166. 근·현대 경제학에 대한을 주장하였다. 반면 프랑스의 콜베르나 독일의 관방학파의 주장은 국가에서 직접 수입을 규제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함으로써 국제무역수지 개선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대표적인 중상주의 학가로는 먼이 있다. 먼은 동인도회사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출발에서 금은보화의 해외유출을 지지하며 국가의 이익에 중요한 것이 무역의 차익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화폐가치는 원자재와 용역들을 구입할 수 있는 구매력이며 이것은 무역의 차액으로 획득되므로 국가는 화폐의 보유량보다도 무역의 차액을 증대시키는데 노력해야한다고 하였다. 페티는 조세에 대한 확보수단으로 국민소득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로크는 구체적인 경제이론의 정립보다 자본주의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사유재산제 및 노동과 부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그는 경제활동에서의 가치 중 대부분을 노동에 두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자에 대한 철폐를 주장함으로써 이자는 도덕적으로 죄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시켰다.흄은 중상주의자로 보기 어려운 점이 많으나 경제활동을 기본적으로 찬양하지 않더라도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경제활동이나 국제간의 무역이 그 자체로써 이윤추구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증대시킨다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개인과 국가의 이익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과 국제무역이 정화를 얻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인간에게 사치품에 대한 욕구와 상업이윤을 교육시켜 국내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스튜어트는 자본수지 적자가 그 국가의 경제를 균형물가수준에 이르게 할 수 없는 요인이므로 정부가 이에 개입하여 공업과 농업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할 것을 주장하였다.중상주의는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임기응변적 정책수립에 몰두하여 일관성 있는 논리체계를 세우지 못한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이는 농업과 재래기술을 기반으로 한 현실적인 제약 하에서 당대 경제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케인즈는 중상주의자들이 과잉생산의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점과 화폐 부족에 의한 경제 파탄을의 수요를 유효수요라 하였다. 이 이론은 비용불변인 생산함수를 갖는 산업인 경우 그대로 적용가능하나 자연적인 요인과 정책적인 요인에 의해 장기적으로 시장가격은 자연가격보다 높은 수준에서 결정된다.분배론에서는 지주와 자본가, 노동자 3개의 계급을 가정하고 임금, 지대, 이윤이라는 생산비 구성요소에 대한 설명을 전개한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임금이 상승하다가 이에 따른 인구증가로 임금은 다시 하락하게 된다. 인구증가는 식량수요의 증가로 이어져 지대의 인상으로 연결되며 결국 경제발전은 지주에게 유리하게 된다. 이때 자본가는 임금철칙설에 근거하여 최대의 이윤을 얻기 위해 최저생계비를 넘지 않는 선에서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인구 증가에 따라 실질임금이 하락하는 과정에서 결국 경제발전의 이득은 지주와 자본가들 간에 배분된다고 할 수 있다.② 고전학파의 정립과 후계자들스미스 이후 고전학파는 맬서스(Thomas R. Malthus, 1776~1834)와 리카도(David R. Ricardo, 1772~1823)를 거쳐 밀(John Stuart Mill)에 의해 완성된다.리카도는 재화의 진정한 가치가 투하노동량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투하노동가치론을 주장하면서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보완하였다. ) 또한 이에 근거하여 분배론을 전개하였다. 지대는 토지의 순생산물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며 임금은 인구의 조절기능을 하면서 자연가격(노동자의 최저생계비)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있어 이에 따라 이윤이 결정된다고 하였다.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스미스의 이론을 한층 더 발전시킨 국제무역이론이다. 절대우위론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하여 모든 재화의 생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우위가 있을 때에는 두 나라 간에 무역이 발생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나 비교우위론에 따르면 설령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해서 모든 재화에 대해 절대우위 또는 절대열위에 처해 있다고 할지라도 상대적인 효율성이 높은 산업에 전문화함으로써 두 국가 모두에게 무역의 이익이 발생한다. 이것은 비교우위 때문이며 비교우위가 발생하는 근 중심과제는 생산력의 배양이며 富자체보다 부를 창조하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 고전학파의 추상화와 연역화에 반대하여 구체성과 개별성을 중요시하며 이론의 일반적인 연구 대신에 구체적인 역사자료의 분석에 중점을 둔다는 것과 경제현상을 일반 문화현상과 대등한 위치에서 그 유기적인 면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공통적으로 주장하였다.7) 사회주의 경제학파산업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부(富)의 집중현상이 나타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대중의 빈곤이 심화되어 갔다. 기계에 의한 노동자의 배제는 실업자를 배출하고, 식량부족과 저임금은 노동자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1810년대부터 시작된 주기적인 공황은 자본주의체제의 내재적 모순으로까지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1830년대부터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조직적인 운동을 통해여 자본가계급과 투쟁하기에 이르고 인도적 혹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노동자 계급의 입장을 대변하는 새로운 학파의 등장을 시대는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경제학파가 19세기 초 영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등장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해 집대성되었다.사회주의(Socialism) 의 원천은 고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그의 「국가론」에서 주장하는 사회주의는 노예제도를 기초로 하여 귀족만 재산을 공유하는 형태로서 근대적 사회주의와는 다르다. 근대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의 결과로 초래된 노동자와 사용자(자본가)사이의 대립을 전제로 하며 그 기원은 프랑스혁명(1789)과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이론체계는 경제학뿐만 아니라 철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것이다. 그의 이론에서 주요 위치에 있는 것은 잉여가치설, 유물변증법, 자본주의의 운동법칙 등이다. 노동자의 임금은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수단을 얻기 위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나 노동만이 유일하게 가치를 창조하므로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가치이상을 만들어 내고 이것을서 그는 신고전학파의 창설자로 불린다. 그는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에 의해 가격의 결정을 설명하는 부분균형이론을 완성하였으며 현대 미시이론의 주요 분석수단인 탄력성의 개념, 소비자잉여의 개념, 내부경제와 외부경제의 구분 등을 고안하고 분석에 이용하였다. 마샬의 경제학은 그의 제자 피구(A.C. Pigou, 1877~1959)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피구는 파레토의 연구를 이어받아 후생경제학을 개척하였다. 후생경제학에서는 3대명제를 걸고 있다. 사회적으로 복지가 근대화되려면 소득이 극대화되어야하고, 분배가 균등해야하고, 소득수준이 안정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 피구가 제시한 것은 소득수준을 극대화하기 위한 각 생산요소의 한계생산력의 균등한 분배, 분배를 균등화하기위해 각 요소의 한계생산력에 비례한 소득분배, 소득수준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부의 경기변동 완화정책이다. 마샬과 피구가 케임브리지대학에 봉직하였기 때문에 케임브리지학파라고도 부른다.신고전학파의 주요 내용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제 자체를 생성, 발전하는 생물유기체와 같은 것으로 보고 역사적으로 생성하여 발전하는 경제 형태를 규명하는 경제이론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둘째, 시장가격과 거래량을 수요와 공급으로 설명하였다. 고전학파의 객관적 가치설은 공급자가 받고자 하는 공급가격을 결정하고 한계효용학파의 주관적 가치설은 수요자가 지불할 용의가 있는 수요가격을 결정한다. 이러한 공급가격과 수요가격이 일치하는 수준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균형가격인데, 현실 시장가격을 바로 이러한 균형가격으로 보는 것이다. 균형가격으로 나누어 한계효용이 생산비보다 더 중요한 구슬을 하는 것은 일시적 균형이 성립되는 경우이며, 단기 및 장기에 있어서는 생산비가 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보았다. 셋째, 이윤을 분배론에 포함시켜 단기에서는 이윤이 순수한 잉여이지만 장기에서는 "representative firm"의 정상적인 공급가격의 불가결한 구성요소를 보았다. 넷째, 수요의 이론에서 수요의 탄력도, 소비자잉여 .
자료로 보는 한국고중세사연개소문, 독재자인가? 영웅인가?들어가며과제에 앞서 먼저 학교 도서관에 있는 KBS역사스페셜 ‘연개소문, 독재자인가? 영웅인가?’란 DVD를 먼저 보았다. 기본적인 역사 지식이 없던 터라 시각적인 자료를 통해 당시 고구려와 당의 정세에 대해 쉽고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프로그램의 성격과 관점 자체가 그동안 폄하되어왔던 ‘연개소문’ 이라는 장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재조명하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지난 발표 수업을 들으면서 가졌던 나의 관점과도 일치하는 측면이 있어 과제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이 프로그램에서 얻은 자료임을 먼저 밝혀둔다.북경에서 한때 가장 인기 있는 경극 중에 하나는 바로 이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이었다. 당태종이 고구려에 쳐들어 왔을 때 막리지(연개소문)에 의해 수세에 몰리자, 당의 용맹한 장수 설인귀가 나와 위기에 처한 당 태종을 구한다는 내용인데, 오늘날 이 경극은 금지되어 더 이상 상영하지 않고 있다. 이 경극 안에서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수세로 몰아넣은 반역자이지만, 북한에서는 ‘영웅’으로 ‘연개소문’을 칭송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 그러한 경극의 중단을 요청했기 때문이다.이렇듯, 중국에서 ‘연개소문’은 포악한 독재자에 반역자로 알려져 있고, 또한 당과 손잡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입장에서 기술된 자료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모두 그의 부정적인 면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의 일생을 통해 그가 정말 반역자이자 폭정을 저지른 독재자였는지, 아니면 고구려를 국가적 위험으로부터 구한 영웅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1. 연개소문의 출생연개소문이 태어난 해를 밝힐 수 있는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의 큰아들 남생이 634년에 출생했고, 남생의 나이가 18세이던 651년에 그의 손자 헌성이 태어난 사실을 미루어 적어도 610년대에는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연개소문은 천개소문으로도 불리었는데, 이것은 당고조의 이름인 이연의 ‘연’을 피하기 위해 같은 의미의 ‘의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하여 미워하였으므로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소문이 머리를 숙이고 뭇 사람에게 사죄하여 그 직을 임시로 맡기를 청하고 만약 옳지 못함이 생기면 비록 버려져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하니, 뭇 사람이 불쌍히 여겨 드디어 관직의 계승을 허락하였다.)고대사회에서 귀족가문이 세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선대의 신분과 지위를 세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일화에서 보듯이 다른 귀족세력이 연개소문의 세습에 대해 간섭하고 나선 데에는 그의 가문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다. 즉, 고구려사회에서 연개소문 가문의 독주는 다른 귀족세력의 견제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연개소문의 가문은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새로 득세한 신귀족세력으로서, 옛 수도인 국내성출신의 구귀족세력과는 정국 운영에서 여러모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영양왕대에 취한 수에 대한 강경노선은 신귀족세력이 주도했으며, 영류왕대의 당에 대한 온건노선은 구귀족세력의 정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노선의 차이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정변을 일으키게 한 일차적인 원인이다. ‘연개소문’이 다른 귀족세력으로부터 받은 압력 또한 이런 상황에서 연유했을 것이다.2. 정변을 통한 권력의 장악11년(628)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극한(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25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은 서부(西部) 대인(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에 태종은 왕이 죽은 것을 듣고,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명령을 내려 물건 300단(段)을 주고, 사신을 보내 절부를 가지고 조위하게 하였다.)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영류왕은 당에게 매우 온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왕의 온건책에 반대하여 강경책을 주장하는 연개소문은 영류 조치는 아마 연개소문에게 최전선에서 양국관계의 심각성을 깨닫는 계기를 심어주었던 듯 하다. 당시 당나라는 동북아시아 전체에 대한 지배권역을 차츰 늘려가고 있었으며, 돌궐과 고구려만이 변경에서 맞닿아 당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당나라가 어떻게 해서든 고구려를 칠 것으로 판단하였고, 계속 당나라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영류왕을 보면서 권력 장악을 결심했을 것이다. 그러한 연개소문의 움직임을 왕궁에서도 파악했을 것이고, 그의 제거를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된 것이 연개소문에게는 명분을 심어주었고 정변을 결심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궁궐로 달려 들어가 왕[영류왕]을 죽여 여러 토막으로 잘라 도랑에 버리고 왕의 동생의 아들 장(臧)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그 관직은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의 관직과 같았다.삼국사기에서는 연개소문의 정변 과정을 매우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신라 중심으로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 개인의 시각이기도 하지만, 당시 왕권에 대한 연개소문의 적대심과 반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북방의 강국, 신의 나라라는 고구려의 자긍심을 외면하고 단지 싸움을 피하기 위해 당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굽신거리는 나약한 영류왕을 연개소문은 아주 오랫동안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 저렇듯 잔인한 행동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기존의 귀족세력들에게 핍박받고, 견제받은 것에 대한 분풀이로 볼 수도 있다.3. 연개소문 vs 당태종)연개소문이 집권한 이후 20여 년간은 거의 고구려와 당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영류왕의 온건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우호적이던 두 나라의 관계는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연개소문의 집권으로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호시탐탐 그 명분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 그 때,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화친 제의를 거절하면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를 본 당 태종은 고구려에게 신라와 화친할 것을 명했으나구려 침공의 뜻을 확실히 굳히게 되었다.그리고 ‘장엄’을 사신으로 보내 연개소문을 만나보게 했지만, 연개소문은 장엄을 아예 토굴 속에 가두어버렸다. 그리하여 당 태종은 군사를 일으켰고, 그 이듬해 4월에 요하를 건너 신성과 건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의 철벽같은 수비에 막혀 성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고구려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중국과 주변 오랑캐의 침략을 당해오는 동안 터득한 청야전술에 능했다. 이는 들판을 텅텅 비워 사람 한 명,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우물까지 막은 뒤에 모두 산성에 들어가 철통같이 지키는 전술이었다.신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당군은 재빨리 개모성으로 이동하여 이를 10일만에 함락시켜 10만 석의 곡식을 빼앗았다. 그리고 연이어 요동성 함락에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건안성만은 고구려가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신성과 건안성을 철통같이 막으면서, 연개소문은 당군의 식량보급로를 끊었고, 이에 당군은 안시성을 공격해야만 했다. 안시성을 요동성에 버금가는 중요한 성이었다. 그러나 양만춘 장군은 안시성을 굳건히 지켰으며, 고구려 군대는 당군을 습격하여 요동성과 개모성 등지에서 빼앗긴 식량을 도로 찾아왔다.이에 당 태종은 버티지 못하고, 군사를 퇴각시켰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군이 왔던, 물이 적은 요하 중상류 쪽을 군사들을 배치하여 막고 있었기 때문에 당 태종은 요하 하류를 통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은 늪지대인 이 곳을 통해 퇴각하는 당군의 뒤를 쳐서 큰 성과를 올렸으며, 당 태종은 이 곳에서 병을 얻게 된다.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군이 퇴각하는 당태종의 뒤를 쫓아 중국 내륙까지 진격했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장이다. 그 증거로서 북경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사이의 황량대와 산동성, 하북성 등지의 고려영이라는 지명과 북경 인근의 고려진, 고려성 등을 들 수 있다. 실제로 DVD를 통해 북경 근처 시골 마을에 고려영이라는 성터가 실제로 있음을 보았고, 그 곳에 사는 할아버지의 증언으로 어렸을 적에 고려영이라는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실러한 정황을 보았을 때 고구려군이 퇴각하는 당태종의 뒤를 쫓아 중국 내륙까지 진격했다는 주장이 터무니없지 만은 않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런 연개소문을 두고 “조선 역사상 미증유의 군국적 침략주의를 행한 인물” 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당 태종은 이곳 요하 하류의 늪지대에서 얻은 병으로 649년에 죽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유언했다. “나의 자식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마라. 너희들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당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당 황제인 태종에게 이런 위기의식과 위압감을 심어준 것은 아마도 오늘날 고구려가 여러 역사서에서 호전적인 북방민족으로 인식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된다.4. 살수에서의 승리당나라는 고구려에게 크게 패배한 이후 함부로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지만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내친 김에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당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성 부근까지 쳐들어왔지만 연개소문은 이들을 꽁꽁 언 살수에서 맞아 모두 몰살시켰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승리를 거두었는지는 정해지는 바가 없다.당태종의 아들 당 고종은 아버지의 유언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당나라는 연개소문이 죽기 전까지 다시는 고구려에 쳐들어오지 못했다.5. 연개소문의 죽음과 고구려의 멸망연개소문은 정변 이후 거듭된 전쟁에서 권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장수였기 때문에 그가 믿을 것은 가족들밖에 없었고 당연히 그의 후계자로서 아들들을 키웠다. 국가의 권력이 연개소문에 의해서 소수의 몇 명에게 집중되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아닌 다른 평범한 사람이 권력을 잡게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그가 죽은 이후를 걱정하였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3년 6월조에는 연개소문의 이런 유언이 적혀있다. “너희 형제들은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사이좋게 지내라. 작위를 다투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665년 연개소문의 사망 이후 세 아들되었다.
경영학원론이건창 교수님디지털 컨버전스, 기업환경의 변화문헌정보학과2001311726한 지 원1. 개관지난 해, 에어컨을 사러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나는 깜짝 놀랐다. 에어컨 자체에 운영체제가 있고, 컴퓨터를 통해 끄고 켤 수 있는 에어컨이 등장했던 것이다. IP주소 체계와 반도체의 발전으로 일반 가전 사물도 컴퓨팅 기능이 미약한 ‘thin client’로서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이러한 사회를 유비쿼터스 사회라고 부른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로 모든 신호를 보냄으로서 영상과 음성 신호의 구별이 없어졌고, 이젠 사물의 동적인 움직임조차 디지털 신호로 컨트롤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휴대폰이다. mp3에 게임, 위성TV기능에, 카메라 기능까지 갖춘 이 만능 제품은 디지털과 대용량의 메모리에 의해 구현될 수 있는 팔방미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디지털 신호로 인해 여러가지 기능을 가졌던 각각의 기능 등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해가고 있는데, 이를 컨버전스라고 한다.이러한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는 기업 환경도 변할 수밖에 없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소비자의 욕구도 변할 수밖에 없고, 기업에서는 이런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서, 이윤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 등을 통해 현재진행중인 기업 환경의 변화를 알아보고,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기업에서는 어떤 전략을 통해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2. 디지털 컨버전스와 환경변화(!)법제도, 규제환경지난 몇 해 동안의 이러한 디지털 컨버전스 환경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산업은 음반시장이 아닐까 한다. 한 장의 CD에 열 몇 곡의 음악을 넣고, 그것을 팔아 이윤을 남기던 음반시장은, MP3플레이어가 등장하면서, 정말 한 순간에 무너졌다. 컴퓨터를 통해, 쉽게 파일을 다운 받아서 MP3플레이어에 넣고 들으면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듣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CD는 이제 단지 소장품, 수집품 정도의 기능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디지털을 통한 파일의 공유가 한 개인 혹은 다수가 땀 흘려 만든 음악에 대한 저작권을 지켜주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에 걸쳐서, 음악공유 프로그램을 배포한 소리바다와 음제협은 끊이지 않는 법정 공방을 펼쳤으며, 이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법제도와 규제의 원칙이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음악시장 뿐만 아니라, 영상산업에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새로운 법제도가 생겨나고 없어지고 변하게 될 것이다.(2)신규시장 창출디지털 컨버전스로 인해 새로운 신규시장이 창출되고 있다. MP3의 등장으로 음반업계는 더 이상 CD등을 통한 매체로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대안으로 MP3의 유료 서비스이다. 실제로 온라인을 통한 MP3 판매는 기존의 음반 수요를 끌어들이고 있으며,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비자들의 수요는 하나로 합쳐지고 있고, 매체들도 합쳐지고 있다. 기업들도 하나만 특화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새로운 분야가 자꾸 등장하고, 그럴수록 관련 기업과의 협력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디지털의 특성이 모방이 쉽고, 진입장벽이 낮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material cost가 적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합쳐지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시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시장이 떠오르고 있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해와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통해 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이 필요할 때이다.(3)소비자 욕구의 변화물질적 풍요로 인해 소비자들은 이제 물질적 욕구를 넘어 정신적 욕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상품뿐만이 아니라 상품을 탐색하고, 구매, 사후 서비스까지 총체적인 경험에서 만족을 얻기를 원한다. 특히, 컨버전스화는 소비자들의 욕구도 마찬가지여서 한번에 여러가지를 해결하길 원한다. 항공사에 가서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에 가서 방을 예약하고, 렌탈샾에 가서 차를 렌탈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누군가가 잘 짜여진 계획을 짜서, 하나의 팩키지로 만들어주길 원한다. 공급자 입장에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어 팔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 모아서 고객에게 최적의 경험을 제공하는 Total solution,의 관점에서 기업 경영을 할 필요가 있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은 급변하는 사회와 기술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총체적인 경험을 통한 만족이라는 것이다.(4)기술과 산업구조의 변화이제 기술을 가지는 것은 경쟁우위를 가진다기보다는 기업 경영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컨버전스는 기업의 value-chain도 변화시키고 있다. 개별적인 업무가 cross-functional하게 끊기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가치를 생성하고 있다. 수평적인 결합뿐만 아니라, 수직적인 결합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미디어 산업에서 영상부서는 음향부서와 함께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업무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신기술의 발전은 그 효과를 극대화해줄 수 있다. value-chain의 통합은 결국 부서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데에 그 초점이 있다. 디지털은 그러한 소통을 사람대신 해 줄 수 있다. 기계적인 결정을 디지털에 대신 해 줌으로서 업무의 신속성이 더욱 빨라지고, 단계별 진행을 한눈에 파악하고, 기업 내, 기업 간 그 정보를 공유함으로서 합리성을 높일 수 있고 이러한 기업간의 전략적 제휴는 오늘날 산업에서 중요한 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기술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산업구조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3. CJ미디어가 나아가야 할 경영방향CJ미디어는 각종 엔터테인먼트의 컨텐츠를 제공하는 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음악 산업과 영상 산업의 디지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엔터테인먼트의 컨텐츠 제공은 매우 중요하고 또한 높은 수익이 기대 되는 만큼, 우리나라에서는 온미디어와 CJ미디어가 현재 크게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상태이다. 케이블TV의 각종 채널(내셔널지오그래픽, CJ홈쇼핑, CGV영화등), CGV멀티플렉스 극장, CJ Entertainment영화 배급, 각종 연예 산업 등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즐기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CJ미디어에 대한 상세한 사업 분야 및 경영전략은 생략하고,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에 가져야 할 기업방향에 대해 생각해보자(1)독창적인 기업전략의 확보CJ미디어는 온미디어에 이어 후발주자로 케이블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온미디어를 많이 모방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한 듯 하다. 온미디어에서 새로운 시장에 뛰어들면 CJ미디어는 그 뒤를 따라가는 식이다. 케이블 시장에서 VOD서비스, 영화배급/투자/제작 부문에 있어서도 온미디어(오리온계열)의 쇼박스의 경영 전략을 뒤따르고 있다. 물론 탄탄한 자금구조로 경쟁력은 뒤쳐지지 않고 있지만 디지털 산업은 무엇보다 시장 선점이 중요하다. 앞으로 전개될 DMB 시장, 유무선 컨텐츠 시장은 지금까지 그 어떤 산업보다 큰 수익을 낳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에 CJ미디어는 한 발짝 앞서서 산업을 선도해나가야 할 것이다.
감상문1. 영화를 보기 전에체 게바라, 그는 90년대 이후 자유와 저항의 화신으로 부활했다. 또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의 자서전,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2004년 브라질 출신의 감독 월터 살레스가 그가 혁명가로 변신하기 이전 모습을 비추는 라는 작품을 촬영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또 다른 상품화라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갔다.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그의 젊은 시절을 담담하게 비춘 여행기라는 소개에 전기적 특성을 갖춘 영웅담이 아닌 실존인물들의 일기를 원본으로 하였다는 점에 관심이 생겨 결국은 영화를 보게 되었다.2. 영화 내용1952년 의대생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생화학을 전공하는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페루를 가로지르는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떠난다. 둘이 포데로사라고 이름 붙인 구식 모터사이클을 타고 언덕처럼 배낭을 쌓아올리고선 시동을 걸면서 여행은 시작된다. 수명을 다한 포데로사를 떠나보내고 히치하이크를 하거나 걸어서 여행을 계속하는 두 청년은 포데로사를 잃은 대신 이전보다 훨씬 생생한 만남을 갖게 된다. 땅을 잃고 일자리를 찾아 광산으로 향하는 가난한 부부, 쿠스코에서 마주친 인디오들, 정글 사이에 묻혀 있는 산파블로의 나환자촌. 여덟 달의 여행 후 에르네스토와 알베르토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다른 길을 찾아 떠난다.3. 감상초반부 둘의 모습은 평범한 엘리트계층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테무코에서는 신문의 허위 기사를 이용해 '포데로사'를 공짜로 수리 받고, 연상의 여인과 눈맞아 정분을 통할뻔하고, 로스 앙헬레스에 도착하자 마자 처음 만난 칠레 아가씨들에게 허풍을 쳐서 식사와 술을 대접 받는 이들의 모습은 여행에서 흔히 감행할 수 있는 일탈이었고, 그것을 비교적 흥미롭게 그려냈다고 할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영웅 아래에 있는 무용담일 뿐이었다. 어느 순간 혁명가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영화 후반 우리 앞에 우뚝 선다. 갑자기 세상의 부조리를 맞딱드리게 되었는지는 쉽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 물론 중반부에 오토바이가 고장 나면서 그들이 갖은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하는 도중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현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게바라 혼자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느낀다. 즉 관객은 모르는 것을 게바라 혼자 취재하는 기자 마냥 찾아다니면서 깨달아 가고 있다. 여기서 영웅과 일반인의 어쩔 수 없는 경계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나환자촌에서 게바라의 모습이다. 뜬금없이 강을 헤엄쳐 건너려는 위험천만한 각오는 영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 강을 건너는 것이 분열된 마을이 통합을 의미한다면 왜 혼자서만 그 강을 헤엄쳐 건너야 했을까. 함께 배나 뗏목이라도 만들어 건너자는 제안을 할 수도 있는데 유독 그 혼자 나서야 했던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는 영웅이므로. 천식이라는 방해요소까지 붙어있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강을 건너는데 성공하는 장면은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식상함을 준다. 그는 보통 영웅이 아니라 잘생긴 미국식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 영화에게 77회 아카데미상 시상의 영예를 안겨준다.게바라의 동반자로 등장하는 알베르도는 또한 어떤인물인가 게바라의 순수성을 강조되는 반면 아니 그 순수함에 더욱 빛을 내기위해 그라나도는 더럽고 통속적인것과 선을 같이 하고 있다. 마치 순수한 백인의 뒤에서 음모저주를 일삼는 비열한 흑인, 혹은 기타 유색인종들에 대한 묘사처럼.그의 일기가 실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또한 감독이 그를 남다르게 존경한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 미화를 전혀 배제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어려운 부분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브라질 태생의 감독이 만든 미국식 영웅담에서 우리는 주어진 감동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이내 좌절한다. 이는 많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것을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하고 함축한 잠깐의 화면으로 넘겨버린 탓일 수도 있다. 좋게 말하면 담담하게 비춘 것이라 하지만 감독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마저 담담하게 흘려보냄으로서 엉성한 구조 속에 영웅 체의 부활이라는 결론을 지어버린 것이다. 아이러닉하게도 영화는 ‘이것은 영웅담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애결혼의 로망스와 여성의 사적영역1. 서론사적영역과 여성에 대한 범위가 모호하여 사생활 혹은 섹슈얼리티와 결혼 그리고 여성으로 주제를 한정하였다. 연애에 관한 담론으로서 상류층을 중심으로 근대를 풍미했던 낭만의 미학은 쾌락을 절제한 은유적인 언어와 작은 몸짓으로 형상화 되었으며 남성이 순결하고 부드러움이 넘치는 여성에게 달콤한 청혼의 말을 건네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러나 이것은 계산결혼, 즉 조건들 간의 결합을 보기 좋게 포장한 위선에 불과하다. 당시 재산과 미모의 결합을 나타내는 구혼광고는 늘 신문 지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중매쟁이에 의한 혼인이나 무도회 등을 통해 소개로 만난 남녀의 결합이 흔한 일이었다. 결국 이들 사이의 애정 역시도 이해 타산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부부간의 의무로 강조되었던 절제에 의한 육체적 관계나 정조 등은 매춘이나 간통 등 왜곡된 사생활의 이면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여성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2. 본론1) 성교육을 통한 담론의 형성당시 성교육의 주 목적은 여성의 순결을 강요하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념적으로 여성이 혼인하기 직전까지 성에 대해 무지해야 할 것은 미덕을 넘어 의무로 규범화되기도 했다. 이 경우의 진정한 동기는 사람들이 무지하다는 것이야말로 유혹으로부터의 순결이요, 특히 여성에게는 처녀막의 육체적 완전- 그것은 우상이기 때문이다-을 위협하는 위험을 가장 훌륭하게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처녀막으로 형상화된 여성의 순결은 그들의 마음과 육신의 주인인 남편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고 여성 자신도 소중히 다루어야 할 보물이었다. 순결을 잃었을 때의 책임은 오로지 여성에게 있었고 사회에서는 그를 정숙하지 못한, 타락한 여성으로 규정하고 비난하였다.) 올바른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에 대한 타자화가 이루어지면서 여성들은 처녀막을 어떻게든 보존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2) 혼전의 성생활앞에서도 보았듯 깰 수 없는 금기로 강조되고 있는 여성의 혼전순결 아래 많은 여성들은 플러트를 통해 자신의 처녀막을 보존해나갈 수 있었다. 플러트는 처녀막의 보존을 최후 경계로 한 남녀간의 성적인 접촉을 의미하며 언어적 희롱에서 육체적 관계가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사회는 전적으로 이러한 행위를 승낙하고 남여 모두에게 플러트를 허용하였다. 주 2)에서 인용한 것처럼 정신은 더럽혀지더라도 처녀막을 보존하는 것은 순결을 지킨 경우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한편 남성의 경우에는 순결한 남성과 그렇지 않은 남성을 구분해낼 척도가 따로 없었고 사회에서도 남성의 성생활에 대한 제약을 크게 하지 않았으므로 혼전에도 다양한 형태의 성관계가 이루어진다. 부잣집의 젊은 아들이 하녀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서 성에 눈을 뜨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으며 매춘굴을 드나들면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다. 혼전동거도 상류층을 중심으로 많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대소 부르주아와 여성견습재봉사, 세탁부, 가게 점원 등 여성 노동자 사이의 결합도 빈번했으며 대학생과 ‘그리제트’의 동거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러한 의존적 동거는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입장이어서 합법화를 주장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들의 사생아는 낙태라는 방식을 통해 성공적으로 제거하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영아살해라는 잔인한 방식을 통해 처리된다.3) 부부의 성생활초야를 경험한 이후 부인의 성생활은 남편에게 완전히 종속된다. 낭만적 사랑의 기호체계로 인해 여성은 침대에서 오늘날 우리들을 미소 짓게 만들 정도로 천사 같은 태도를 취해야 했다. 여성이 욕구를 표현하는 것은 터부시되었기 때문에 여성은 열렬한 공격 아래 ‘패배’를 시인하면서 ‘자신을 줄’ 수밖에 없는 피해자인 척 해야 했다.) 또한 부부의 성생활이 재생산을 주목적으로 한다는 기독교적 관점이 당시 부르주아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쾌락, 특히 부인의 쾌락은 무시해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요소가 되었다. 처녀성의 숭배, 낭만적 천사주의, 수줍음의 찬양으로 인해 독실한 부르주아들은 침실과 부부침대를 일종의 신성한 장소, 즉 재생산이라는 신성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제단으로 간주했다.) 특히 수태와 오르가즘의 연관성이 전무하다는 과학적 근거가 뒷받침 되면서 여성의 쾌락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한 시대가 열려 성적으로 무능한 남편들을 옹호하는 동시에 여성의 쾌락추구가 가져다 줄 위험을 차단하는 효과적인 억압 기제를 창출 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어떠한 제약이라 하더라도 원만하지 못한 부부관계에 시작된 일탈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남성들은 매춘이라는 공공연한 합법적 행위를 통해 욕구의 충족을 시도할 수 있었으나 여성은 간통이라는 비합법적 행위를 감수하면서 부부관계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매춘의 경우은 국가 계획 하에 창녀촌이 조성되기까지 하는 등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합법적 성관계로 인식 되었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에는 제 1제국과 복고왕정 기에 공창 제도가 대거 조성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프렌치 시스템’으로 알려지는 체제를 마련하여 유럽전역에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다.) 공창은 미성년자의 성생활 입문에 큰 역할을 하면서 독신자들의 성생활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 한 점은 성적 불만에 시달리는 남편들을 진정시키는 데에도 큰 공헌을 했다는 점이다. 임신기나 수유기에 부인과의 성관계가 불가능한 경우뿐만 아니라 수줍음을 타는 아내 때문에 부부간의 성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도 남성들은 매춘굴을 찾았다. 특히 불임여성이나 갱년기가 지난 여성에게 성관계는 무의미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이들의 남성의 다수가 창녀를 찾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녀촌의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발생하는 성병은 남편을 통해 여성에게 전염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매독의 경우는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유전되기도 하였다.간통은 부부생활의 불만족이나 남편의 외도에 대한 복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르주아 계층의 남녀에게 자선바자회나 여러 연회를 통한 사교활동은 비슷한 계층, 연령의 상대를 찾아 은밀한 사랑을 나눌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발각될 경우 책임은 오로지 여성에게 있었다. 남편의 간통이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반면) 아내의 간통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는 법적 규정 외에도 사회적 인식에 따라 남편의 폭력이나 모욕은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경우 자신의 자만심을 보호하고 아내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정신병을 들먹이기도 했다. 반면 서민층에서는 ‘창녀’ ‘갈보’ 등의 모욕적 말들을 아내에게 되풀이 하거나 심지어는 살인에 이르는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도 흔하였다.3. 결론부르주아나 상류층을 중심으로 퍼진 자유연애와 결혼생활에 대한 낭만적 이데올로기는 조건부 결합을 미화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것은 오로지 남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여성의 성적 의무를 강조함으로서 남성의 우월성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여성은 태어나면서 가정을 꾸리고 일생을 보내는 순간순간에도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남성에게 의지하고 있다. 혼전 순결의 강조로 실질적으로 이들에게 성적 자유는 그들의 영역이 결혼과 함께 집 안으로 축소되면서 완전히 남성에게 종속되어있다. 반면 남성의 자유연애는 어느 시기에나 보장받을 수 있었다. 결혼 전에도 순결의 의무는 남성을 철저하게 피해갔고 혼인 후에도 가정에서 천사와 같이 순진하고 헌신적인 아내를 맞는 한편 교태와 관능으로 그들을 유혹하는 애인을 한구석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이 발각된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으며 이미 발각되기 전에 여성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의 처녀성을 숭배하고 낭만적 천사로서의 여성을 숭배하는 한편 남성들은 모순적으로 교태를 여성의 무기로 강조하면서 그러한 여성과의 교제, 즉 매춘이나 간통을 공공연히 행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