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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율곡 이이의 생애와 사상
    율곡 이이의 생애와 사상1. 유년기 - 신동의 등장율곡 선생은 1536년(중종 31년) 음력 12월 26일 강릉부 북평촌(현재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烏竹軒)에서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인 이원수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고, 성격이 착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너그럽고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모친인 사임당 신씨는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딸로서, 너무나도 유명한 조선의 여류 예술가이자 율곡의 어린 시절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율곡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데, 세 살이 되던 해(1538년)에 석류(石瘤)를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라는 외할머니의 질문에 한시(漢詩)를 인용하여 석류 껍질이 부서진 붉은 구슬을 싸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와 강릉의 외가를 떠나 한양의 본가로 들어와 살던 시절에 사임당 신씨에게 틈틈이 글을 배워 8세 때(1543년)에는 경기도 파주(坡州)의 율곡-지명 이름. 그의 호(號)는 이 곳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서 한문으로 된 시를 지은 것(아래의 시)이 그 예이다.-- 화석정에서 지은 시 --林亭秋已晩(숲 속 정자에 가을 이미 늦으니)騷客意無窮(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遠水連天碧(먼 물줄기는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霜楓向日紅(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도다)山吐孤輪月(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江含萬里風(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塞鴻何處去(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聲斷暮雲中(소리가 저녁 구름 속에 끊어지도다)어린 율곡이 이렇게 나이에 걸맞지 않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모친인 사임당 신씨의 높은 교육열과 율곡이 여성 살 되던 해(1541년)에 율곡은 어머니를 따라 한양의 본가-수진방(壽進坊, 오늘의 종로구 청진동-에서 살게되는 데, 이 시기에 병조판서인 김안국(金安國)이 유교 교과서인 4서3경(四書三經)을 많이 간행하여 지방의 선비들에게까지 보급하도록 하는데, 집안세가 되던 해(1553년)에 오늘날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冠禮)를 치르고, 어진 젊은이가 되라는 뜻이 담긴 숙헌( 獻) 이라는 자(字)를 부여받았고, 이제 율곡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2. 청년기 - 방황과 극복, 관직으로 나아감, 점진적 개혁의지의 표명어엿한 청년이 된 율곡은 모친의 3년상이 끝난 후, 돌연 금강산으로 출가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것은 모친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율곡의 부친이 불교 경전을 좋아하였고, 이로인해 생긴 율곡의 불교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서모(庶母)로 인한 가정의 불화로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명종실록에는 이 일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이이는 어려서부터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고, 일찍 모친상을 만나 장례를 치르는 데 정성이 지 극하였다. 그 부친의 첩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또 부친은 일찍부터 불교 경전을 좋아하였다. 그의 나이 16~17세 때에, 어떤 중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복(福)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 였으므로, 그는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복을 정돈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명종실록, 명종 21년 3월 24일조)이러한 율곡의 출가는 후에 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이러한 경력을 들어 유생들로부터의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던 빌미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20세가 된 율곡은 하산하여 강릉의 외가로 돌아가, 어머니의 죽음과 가정의 불화로 인한 복잡한 문제를 매듭짓고 새로운 출발과 불교가 아닌 유학으로의 회귀를 선언한 스스로 경계하는 글 인 자경문(自警文)을 쓰면서 조선 유학의 일인자가 되는 길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用功不緩不急 死而後已 若求速其效 則此亦利心 若不如此 戮辱遺體 便非人子(공부를 하는 일은 늦추어서도 안 되고 급하게 해서도 안 된다.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다. 만약 그 효과를 빨리 얻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늦추지도 않고 서둘지도 않으면서 죽을 때까지 해나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게 되었다.율곡이 장원급제한 아홉 번의 과거 중 명종 13년(1558년), 율곡의 나이 23세에 치른 특별시험(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 이라고 부르는 유명한 답안지를 작성하여 장원급제하는데, 이 천도책은 제한된 시험 시간에 작성되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뛰어나며, 후에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천도책을 쓴 이율곡을 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율곡이 천도책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하지만, 그것을 특별시험에서의 장원급제였고, 아직 대과(명경과)에 합격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율곡은 이 마지막 시험을 위해 준비하지만, 이 때 그의 부친인 이원수가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여태까지 율곡이 모친인 사임당 신씨를 통해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다음의 실록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이는 성품이 순수하고 근실하였으며, 총명함이 세상에 뛰어났다. 나이 겨우 7세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문장과 박학으로 사람들이 신동이라 했다. 커서는 산수에 노닐면서 시를 읊으며 스스로 얻는 바가 있었고, 원대한 뜻이 있었다. 부친이 죽은 뒤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고,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제사에 바칠 음식을 손수 준비하였다.(명종실록, 명종 20년 11월 18일조)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3년의 세월을 세상 밖에서 근신하며 보낸 뒤, 그의 나이 29세(1564년)에 마지막 시험인 대과(명경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정6품관의 직책인 호조(戶曹) 좌랑(佐郞)으로 첫 발령을 받는다.관직의 길을 처음 시작한 율곡은 이제 조선 건국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각종의 폐해가 진득하게 쌓여 있음을 직접 보고 느끼며, 국왕에게 다양한 계책을 내어 놓기 시작하며 개혁 의지를 키워간다.이러한 율곡의 개혁 의지가 직접 국왕의 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그가 홍문관(弘文館,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교리(敎理)에 임명되면서 경연(經筵)에 참가할 수 있게 되면서였다(1569년 선조 2년).그는 국통해 제술한 시문(詩文)인 동호문답(東湖問答)이다.동호문답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임금의 정치하는 도리를 논함.2. 신하가 지켜야 할 도리를 논함.3.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기 어려움을 논함.4. 우리나라의 도학(道學)이 제대로 되지 못함을 논함.5. 우리 나라의 정치가 미흡함을 논함.6. 오늘의 시대 상황을 논함.7. 힘써 실제를 행하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을 논함.8. 간사한 신하를 멀리하고 현명한 신하를 쓸 것을 논함.9. 민생의 안정을 논함.10. 사람을 가르치는 일(교육)을 논함.11. 대의 명분이 정치의 근본임을 논함.이상의 내용에서 두드러진 점은 율곡의 민생(民生)에 대한 인식인데, 그는 백성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악법(惡法)에서 찾으며, 그 악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일족절린(一族切隣)의 폐단(부역과 세금을 피해 도망간 사람의 부담을 그 친족이나 이웃에 대신 부과하는 것),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단(토산품을 진상하는 일이 너무 잦고 많은 것),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단(서민이 부담하는 공물을 아전이 대신 납부하고 서민들에게 비싼 값으로 뜯어내는 것),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단(군역과 요역이 불공평한 것),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단(아전들이 금품이나 물품을 강제로 걷어들이는 토색(討索))이 그것이다.율곡은 이러한 폐단을 지적하며, 기층 민중의 바탕이 튼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악법을 고치는 개혁이 시급함을 국왕과 조정에 동호문답을 통해 주장하였고, 수미법(收米法)을 통해 위의 폐단을 황해도에서 시정하였다.이 후에도 율곡은 지속적으로 상소문을 올리는 데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만언봉사(萬言奉事)인데, 이 상소문에서 당대의 7가지 문제점과 수기(修己)에 있어서 네 가지, 안민(安民)에 있어서 다섯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였다.그가 제시한 7가지의 문제점은 첫째, 상하간에 서로 믿는 실상이 없는 것, 둘째, 관료가 일을 책임지는 실상이 없는 것, 셋째, 임금이 경연에 참석은 하지만 덕을 충정(衷情)을 얻을 것, 백성들이 바치는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 등을 개혁하여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폐해를 없앨 것,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여 사치 풍조를 개혁할 것, 각 지방의 노비(奴婢)를 골라 뽑아서 서울로 보내는 제도를 바꾸어 관청에 속하는 노비의 고통을 덜어줄 것, 군사 행정을 고쳐서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제시하였다.이러한 율곡의 상소문들이 지향하는 바는 권력의 정점(頂點)인 국왕을 통한 개혁의 실천임을 보여주지만, 그 때마다 선조는 율곡의 상소를 우유부단한 태도로 받아들이다가 결국에는 율곡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율곡은 관료직의 수행에 점점 회의적인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국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간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이러한 일을 빚어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그럼 여기서 그의 철학 논변에 대해서 알아보자.율곡은 관료직을 수행하면서 틈틈이 당시 선비들의 공통 관심사인 성리 철학의 문제에 골몰하였고, 이(理)ㆍ기(氣) 문제에 그 만의 독특한 사상을 제시하게 된다.율곡이 주장한 이 는 형이상자로서의 이치이자 원리이며, 어떤 존재가 바로 그 존재일 수 있는 본래성이며, 기가 발휘될 수 있게 하는 근본이다. 또한, 이를 형이상적 특성으로 보는 것을 통해 율곡이 이를 무위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의 변화성을 부정한 것이므로 퇴계와 근본적으로 다른 율곡 성리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율곡이 주장한 기 는 형이하자로서 이가 의착할 바요 이가 탈 바이다 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기는 어떤 존재의 본래성이 마침내 실현되어지고 구상화될 수 있는 유형성을 가진 요소라는 것이다.이러한 이와 기의 관계에 대해서 율곡은 각자가 독립적이고 이가 귀하고 기는 천하다(理貴氣賤)는 퇴계의 사상과는 다른 주장을 펼치는데, 퇴계가 주장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중간적인 입장을 취한다.바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이 그것이다.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라는 뜻인데, 이는 이의 무형성과 기의 유형성을 근거로 이의 보편성과 기의 다.
    인문/어학| 2006.01.24| 7페이지| 1,500원| 조회(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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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유산]오죽헌 평가A+최고예요
    오죽헌{-오죽헌 전경-1. 지정번호 : 보물 165호2.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3.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2014. 시대 : 조선 중기5. 크기 : 정면 3칸, 측면 2칸6. 종류 : 목조건물1). 오죽헌(烏竹軒)오죽헌(烏竹軒)은 조선 중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청렴결백하고 유능한 관료였던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은 세종(世宗) 당시에 문신인 최치운(崔致雲, 1390~1440)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이후 최치운의 후손이자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최응현(崔應賢, 1428~1507, 단종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냄)이 이 집에서 살다가 율곡의 외할아버지이자 신사임당의 아버지인 신명화(申命和)에게로 이어졌다. 이후, 신명화의 사위이자 율곡의 이모부되는 권화(權和), 권화의 아들이자 율곡의 이종사촌인 권처균(權處均)이 거처하였는데, 집주위에 검은 대나무(烏竹)가 많아서 권처균은 자신의 아호를 오죽헌(烏竹軒) 이라고 불렀으며, 결국 이것이 당호(堂號)가 되었다.오죽헌은 본래 별당(別堂, 몸채에서 떨어져 따로 지은 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4칸 크기의 대청과 1칸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칸 폭의 툇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채는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 주거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오죽헌이라는 이름에서 헌(軒)의 의미는 옛 수레와 같아 높은 곳에 올라 의기양양함을 북돋우는 곳 을 의미하며, 산수가 아름답고 탁 트인 곳에 지어져,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화되어 지도록 만든 건물이다. 헌 은 궁궐, 관아, 서원, 주택에 지어졌으며 정원에도 건립되었고, 주택에 지어질 경우에는 별당형식을 취하였고, 오죽헌은 부근의 오죽림(烏竹林)을 완성하는 별당건축으로 지어진 것이다.{ -공포부분-오죽헌은 겹처마 팔작지붕의 주심포(柱心包)계와 유사한 초기 수법의 이익공(二翼工)계 건물이며 굵은 댓돌로 짜여진 높지 않은 기단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을 배열하고 각기둥을 세웠다(막돌초석). 대청 전면은 띠살문의 4분합문을, 측면과 후면에는 각기 두 짝의 여닫이 창호로 하고 판문 하부 벽면에는 머름을 둘렀다. 대청에는 우물마루(짧은 널을 가로로, 긴 널을 세로로 놓아 井 자 모양으로 짠 마루, 귀틀마루라고도 함)를 깔고, 가운데 2개의 동귀틀 사이에 작은 청판들을 깔아 칸의 구별을 명확히 하였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으로 걸쳤으나, 온돌방과의 경계에 위치한 대들보는 그 아래 중앙에 세운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 대들보 위로 종량(마룻대의 밑까지 높이 쌓아 올린 보)과의 사이에는 대공(臺工)을 받쳤는데, 그 형식은 오래된 수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주심포집에서 볼 수 있는 대공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오죽헌이 주심포집에서 익공집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다.{-오죽헌 대청마루-{-오죽헌 대공(臺工)-(왼편 뒤쪽으로 오죽이 보인다)2). 오죽헌 주변 건물들(1). 몽룡실(夢龍室){-몽룡실-몽룡실은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모친인 신사임당이 태몽(胎夢)으로 검은 용이 침실쪽으로 날아와서 마루에 서려있는 꿈을 꾼 까닭에 율곡이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부른다. 왼쪽의 사진에서 볼 때, 오른편에 검은 바탕에 흰색 글자로된 현판이 붙은 방이 몽룡실이다. 오죽헌과 몽룡실 양옆으로는 600년 된 배롱나무와 화려한 매화, 줄기 검은 오죽이 무리지어 서 있다.(2). 문성사(文成祠){-율곡 이이 영정-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문성(文成) 은 1624년(인조2년) 인조임금이 율곡에게 내린 시호(諡號)로 널리 도덕을 묻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있는 율곡 영정은 이당 김은호(金殷鎬, 1892~1979)선생이 문성사를 지은 1975년에 그렸는데,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는 모습이며, 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前)대통령이 썼다.{-문성사-(3). 어제각(御製閣)어제각은 1788년 정조대왕(正祖, 1752~1800)이 율곡 이이가 유년시절 사용했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몽요결(擊蒙要訣) 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명을 내려 한양으로 가져오게 하여 직접 본 다음, 벼루 뒷면에 율곡선생을 찬양하는 시를 새기고, 책에는 머릿글을 지어 다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시의 내용은 무지( 池, 주자를 의미)를 적시고 공석(孔石, 공자를 의미)을 닮았네. 학문은 두루 베풀었고 몸은 동천(洞天, 신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갔네. 구름은 흩뿌려졌고 그 문화는 이 곳에 있네 였다.
    인문/어학| 2006.01.24| 3페이지| 1,000원| 조회(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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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조선시대 화성성역의궤 연구 평가A좋아요
    1장. 머리말의궤(儀軌)란?의궤란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이란 단어를 합친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을 의미하고, 조선시대 기록문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의궤다. 의궤는 국왕의 혼인(婚姻)을 비롯 세자의 책봉(冊封), 왕실의 혼례(婚禮), 왕실의 장례(葬禮), 궁궐의 건축과 같이 국가나 왕실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이를 기록하여 선왕 때의 사례를 참고하여 후대에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의궤는 왕실의 각종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 설치되는 도감(都監)이라는 임시기구에서 제작되었는데, 도감은 행사의 명칭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이 달랐다. 왕실혼례의 경우에는 가례도감(嘉禮都監), 국왕이나 왕세자의 책봉의식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 왕실의 장례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 궁궐의 건축과 같은 일을 행할 때는 영건도감(營建都監)과 같은 이름을 붙였으며, 각자가 맡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도감은 정승급에서 임명된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 1인 휘하에 판서급에서 임명된 3~4명의 제조(提調), 실무관리자인 도청(都廳) 2~3명, 낭청(郎廳) 4~8명 및 감독관에 해당하는 당하관(堂下官)의 벼슬에서 임명된 감조관(監造官)등으로 구성되었고,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자료를 먼저 만들고 나서, 이를 바탕으로 의궤를 제작하였다).의궤는 조선 초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태조와 정종의『상장의궤(喪葬儀軌)』, 태종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국상의궤(國喪儀軌)』, 성종 때 장악원(掌樂院))에 있던 의궤의 악보들을 뽑아서 만든『악학궤범(樂學軌範)』)이 만들어졌음을 언급하는 실록의 기록을 통해 조선이 건국된 직후부터 국가의 주요 행사를 거행할 때마다 의궤가 만들어 졌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그러나 현존하는 의궤는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이전에 만들어진 의궤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의궤 중에 제작 연대가 1600년(선조城改築謄錄숙종9년~영조3년1책 63장장慶德宮修理所儀軌숙종19년(1693)6월1책 79장파철장莊陵修改都監儀軌숙종25년(1699)6월규:1책파:1책 33장규ㆍ파규:장서기 禮曹 상파:철장宗廟改修都監儀軌영조1년(1725)10월규:1책 상ㆍ하장:1책 상ㆍ하파:1책 255장규ㆍ장ㆍ파규:班次圖(하),장서기(강화 부 상)장:반차도(하)장서기(宗廟署)智陵丁字閣改建儀軌영조8년(1732)1책 21장장明陵兩陵上改修都監儀軌영조20년(1744)1책 76장파철장直殿重修都監都廳儀軌영조24년(1748)2월1책 291장규直殿重修都監儀軌영조24년(1748)2월장:1책 276장파:1책 93장1책 101장장ㆍ파장:장서기(의정부 상)파:2종 모두 철장서 명연 대책 수소장처비 고眞殿重修營建廳儀軌영조48년(1772)1책 70장장昭廳營建廳儀軌영조28년(1752)7월규:1책 101장파:1책 103장규ㆍ파규:3종, 반차도, 예조 상파:圖型, 철장, 표제 없음垂恩幕營建廳儀軌영조40년(1764)1월규:1책 190장파:1책 195장규ㆍ파규:圖型파:철장建元陵丁字閣重修都監儀軌영조40년(1764)2월규:1책 74장장:1첩 5절파:1책 78장규ㆍ장ㆍ파규:장서기(예조 상)장:?裝파:철장景慕宮改建都監儀軌영조52년(1776)10월1책 150장규ㆍ장규:장서기(예조 상)文禮廳營建廳謄錄정조11~12(1787~8)1책 173장파반차도, 철장華城城役儀軌순조1년(1801)9월10권 9책규ㆍ장整理字印本, 圖仁政殿營建都監儀軌순조5년(1805)4월1책 156장규圖,장서기(태백산 상, 오대산 상, 정족산성 상, 춘추관 상, 예조 상)願思宮別廳營建都監儀軌순조24년(1824)6월규:1책 152장장:1책파:1책 154장규ㆍ장ㆍ파규:3종,채색도,장서기(춘추관 상,강화사고 상),철장장:철장 파:철장西闕營建都監儀軌순조29~30(1829~30)1책 139장파철장, 圖型西闕營建都監儀軌순조32년(1832)4월1책 139장규ㆍ장圖, 규:장서기(오대산 상)昌慶宮營建都監儀軌순조30~34(1830~4)1책 104장규ㆍ장圖,규:장서기(춘추관ㆍ예조상昌德宮營建都監儀軌순조28일『화성성역의궤』인간의 편집책임자로 명받은지 2개월 후인 9월 18일에 정리자본으로 간행하였고, 화성성역의 시말ㆍ제도ㆍ의식 등을 상세히 분류ㆍ기록하였다. 간행 후에 의궤 편찬에 참여했던 각신 이만수 이하 관련자들이 시상(施賞)을 받았는데, 찬집랑 홍원섭에게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탄생한『화성성역의궤』는『원행을묘정리의궤』와 함께 동활자인 정리자로 인쇄된 만큼, 그 이전과 이후에 편찬된 다른 의궤류와는 그림의 채색, 발간 부수면에서 큰 차이를 갖는다. 여기서 다른 필사본 의궤와 정리자 의궤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우선 필사본 의궤의 경우에는 사자관(寫字官)에 의한 필사의 한계로 인하여 많아도 9부 내외가 작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수고본(手槁本)인 관계로 반차도(班次圖)를 비롯하여 채색도(彩色圖)를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이와는 다르게 금속활자본 의궤는 흑색 판화 (板畵)로만 인쇄할 수 있었지만, 인쇄가 용이하므로 더 많이 찍어낼 수 있었는데, 이는『화성성역의궤』의 경우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판본만 해도 20질정도 된다는 것에서 많아도 9부 정도만 만들 수 있는 필사본과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화성성역의궤』는 1796년 1월 초고본인 등본의궤가 완성되던 시점에서 왕명으로 미리 배포처를 밝혀 놓은 사실을 통해서 그 발간 부수를 대략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정조는 이 의궤를 활자본으로 간행하게 하여 내입(內入) 3건, 3곳의 사고ㆍ내각ㆍ승정원ㆍ비변사ㆍ병조ㆍ장용내영ㆍ장용외영에 각 1권, 총리대신 채제공을 비롯한 의궤의 편찬 참여자들에게 각 1건 씩 배포하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의궤는 개인에게 배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화성성역의궤』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성역이나 의궤의 편찬작업에 참여한 유공자들에게 각 1건씩 분사(分賜)하도록 한 것이 의궤의 일반적인 배포 관행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다.4장.『화성성역의궤』의 구성과 내용『화성성역의궤』의 편찬체제는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1795년 윤상의 내용은『화성성역의궤』본편에 기록된 화성성역에 대한 부분이었고, 뒷부분에 기록된 화성보다 앞서 시작된 행궁(行宮)의 건설에 대한 과정을 살펴보면, 행궁은 정조13년(1789) 7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5월에 약 340여 칸에 달하는 규모로 완공되었다. 공사 시작시 행궁의 명칭은 ‘수원행궁(水原行宮)’이었는데, 공사중 행정구역명이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되면서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행궁 공사에 총 5만 5,734냥 1전 1푼의 비용이 사용되었다.3). 성역에 사용된 비용화성성역이 새로이 도입된 각종 기계와 신기술,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예상보다 빠른 시일안에 모든 공사가 완료되었지만, 엄청난 비용과 물자가 들었다. 이러한 비용과 물자가 얼마나 사용되었고, 그것들을 어떻게 조달하였는지 알아보자.먼저 화성성역에 사용된 비용을 알아보면, 화성성역에 구획(區劃)된 총 금액은 전(錢)이 87만 3,517냥 7전 9푼이고 경기회부미(京畿會簿米) 쌀 1,495석 11두 4홉이었다. 그 중에서 화성성역에 직접 배정된 전은 24만 3,517냥 7전 9푼이고 각 관청에서 빌려온 돈은 63만 냥이었다. 구획된 돈의 대부기관과 대부총액은 장용영(壯勇營)에서 25만 냥, 균역청(均役廳)에서 30만 냥, 어영청(御營廳)에서 4만 냥, 금위영(禁衛營)에서 4만 냥이었지만, 실제 성역에서는 어영청에서 20만 3천 냥, 금위영에서 13만 3천 냥, 기영(畿營)과 완영(完營)이 각각 10만 냥, 중앙재정기관인 호조(戶曹)에서 5천 냥, 선혜청(宣惠廳)에서 1만 냥, 그리고 경상도 감영에서 5만 냥, 통영에서 5천 냥, 4곳의 영문에서 1만 8천 냥이 사용되었다.) 가장 많은 자금을 빌려온 균역청과 장용영의 돈은 한푼도 사용되지 않았으며, 화성성역에는 중앙재정뿐만 아니라 기영ㆍ통영ㆍ완영ㆍ경상도감영 등의 지방재정까지도 사용되었다.성역에 사용된 비용 중에서 화성 성곽의 각 시설물별 자재비와 공장(工匠) 등의 공임, 잡부(募軍), 짐꾼, 수 이름 모두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의 각 직종별 개인의 공역일수는 10일 동안 참여한 서울 출신, 선공감(繕工監) 소속의 기와장이(盖匠) 최만세(崔萬世)와 김태백(金太伯)이 가장 짧고, 수원부 소속 대장장이(冶匠)인 최장천(崔長天)이 875일간 참여하여 가장 길다.) 또한, 이들에게는 각각 직종에 따라서 임금이 지급되었는데 와 같다.직 종급 여(일당)석수1패(助役 1인을 갖추어서 1패를 지음)당쌀 6升(승), 돈 4전 5푼.대장장이1패(조역 3인을 갖추어 1패를 지음)당돈 8전 9푼.목수ㆍ미장이1인당 돈 4전 2푼(10인당 화정 1명꼴씩 매일 돈 2전 5푼씩)조각장이ㆍ나막신장이ㆍ수레장이ㆍ안장장이ㆍ 화공ㆍ가칠장이ㆍ박배장이ㆍ병풍장이1인당 돈 4전 2푼.큰끌톱장이ㆍ작은끌톱장이ㆍ기거장이ㆍ걸톱장 이ㆍ선장ㆍ부계장이1인당 돈 3전.와벽장이ㆍ잡상장이1인당 쌀 3승, 돈 2전기와장이오량각(五樑閣) 매간에 돈 6전행각(行閣) 매간에 돈 4전- 각 공장들에게 지급된 일당) -아울러 공장 이외에도 성역에는 석재ㆍ목재 등의 성재(城材)를 운반하고, 땅을 파고, 다지고, 흙을 져다 나르며, 소를 부리는 잡역부인 모군(募軍)ㆍ담군(擔軍)ㆍ차부(車夫)ㆍ소지기(牛直)등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은 국가에서 강제로 노역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모집하여, 고용역부인 급가모군(給價募軍)의 형태로 성역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단순 노무에 종사하므로 기술자인 공장보다는 적은 임금이 지급되었는데, 모군 1인당 매일 돈 2전 5푼, 담군 1인당 매일 돈 3전, 차부 1인당 매일 돈 3전 2푼, 소지기 1인당 매일 돈 2전 5푼이 지급되었다.)그 다음으로 성역에 동원된 각종 자재와 기계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동원된 각종 자재들은 아래의 과 같다.구 분내역가 격(냥.전.푼)곡물(穀物)쌀(米), 4,632석 9두 2승 8홉 6작콩(太), 4,553석 5두 6승 5홉 8작조(租), 410석, 기장(稷), 72석 9두갈보리, 566석 7두 5승35,603냥 2전 7푼돌(石子)대선단석(大扇單石), 8면주춧)
    학위논문| 2006.01.24| 23페이지| 4,000원| 조회(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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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정치]유러피언드림을 읽고 평가A+최고예요
    1. 머리말떠오르는 유러피언 드림(The European Dream)이 책을 쓴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이란 사람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직접 이 사람의 저술을 읽고자 해서 접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람의 책을 읽고 참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것을 얻었다. 솔직히 미래사회에 대해서 쓴 책들은 많이 있지만, 제대로 읽어본 책은 없었다. 조금이나마 읽은 책은 앨빈 토플러가 쓴『제3의 물결』이 전부이며, 그것도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읽어본 것이다. 하지만, 이『유러피언 드림』이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본 다음에 느낀 것은 이러한 미래 사회에 대해 언급한 책들을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였다. 그럼 이제부터 이 책이 나에게 깨우쳐 준 것 들에 대해서 언급해 보겠다.먼저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이고 유러피언 드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한 후, 본론으로 들어가겠다.아메리칸 드림이란, 미국인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 초기 사회에 등장한 꿈이다. 모국을 떠나 개척되지 않고, 위험한 미국이라는 신대륙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상상도 못할 고난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고난을 견디며, 자신들의 후세에게는 이러한 고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죽기살기로 노력했고,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이룰수 있다는 정신이 중심이 되어 후세에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정신사상을 물려주었다. 이것은 미국을 대표하는 정신이 되었고, 모든 이민자들을 희망에 부풀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오늘날의 아메리칸 드림은 심각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고,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개인의 물질적 출세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리스크ㆍ다양성ㆍ상호 의존성이 증가하는 세계에 걸맞은 더 넓은 사회복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구시대의 사고방식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하지만, 유럽은 달랐다. 유럽에서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을,. 한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세계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그 자리를 유러피언 드림에게 완전히 비워 주어야할 시대가 온 것이다.2. 아메리칸 드림과 유러피언 드림미국인들의 아메리칸 드림과 유럽의 유러피언 드림은 둘 다 동시기에 존재하면서 완전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어둠과 밝음처럼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먼저 이 둘은 '자유(freedom)'와 '안전(security)'에 대한 개념에서 판이한 시각을 보이는데, 미국인들은 자유를 자율(autonomy)과 연관지어 생각하여 부를 많이 축적할수록 더욱 독립적이고 더욱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고, 그 부에서 배타성이 생겨 안전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반면, 유러피언 드림에서는 자유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음으로 보장받고, 타인과의 수많은 상호 의존관계를 가지면서 형성되는 포괄성을 통해 안전이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차이가 오늘날 미국과 유럽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대처하는 시각차이를 분명하게 한 원인일 것이다.또한, 미국인들은 경제성장, 개인의 부, 독립을 중시하고, 아울러 자신들의 신앙을 중시하며, 자주적 행위자(free agent)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세계 어디든지 자신들의 병력을 파견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애국주의에 집착하고, 철저히 개인적이기에 다른 나라 사람들의 복지문제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그러나 유러피언 드림은 지속 가능한 개발, 삶의 질, 상호 의존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근로 윤리를 높이 사는 것이 아닌 여가활동과 심오한 놀이 를 선호하고, 종교와는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존하고 다문화 세계를 수용하는 데 유러피언 드림의 기반을 두고 있으며, 세계 각지의 분쟁에 대해서 군사력을 이용한 해결 보다는 주로 외교와 경제 원조를 통한 해결책을 선호하고, 유러피언 드림이 가진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성격으로 인해 지구 전체의 복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이렇해 미국은 EU를 맹 비난하였지만, 이것은 GM식품이 장래에 인간에게 미칠 미확인된 영향까지 고려한 것이었고, GM식품이 유러피언 드림의 핵심 원칙인 지속 가능한 개발과 문화적 다양성 보호라는 원칙을 위협하는 잠재적 요소이기에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만 우선시하여 장래에 인간에게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협을 무시하였고, 이러한 미국의 행태에 대해 유럽을 필두로 한 세계 주요 나라는 GM식품 표기 의무화 정책등을 실시하여 미국을 깨우쳤다. 현재 미국내에서도 이러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하고, 이 사례는 리스크 관리에 대한 두 드림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과학과 기술에 대한 두 드림의 처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옛 유럽에서 탄생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계몽주의적 사고를 현재에도 가지고 있는 반면, 유럽은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을 탈피하여 환경과 인간을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제2의 계몽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두 번째로 두 드림이 지향하는 평화에 대한 생각이 매우 다르다. 이것은 두 드림이 지향하는 사형제도, 군사력 사용에 대한 생각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같다. 일단 사형제도에 대해서 두 드림은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미국은 독실한 기독교 국가라서 그런지, 처벌상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구약성서의 논리를 선호하여, 용서에 인색하고, 범죄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보복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사형제도에 찬성하고, 희생자 유가족의 고통을 보상해 주는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반면에 유럽에서는 사형에 대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위로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EU 또한 사형에 반대하여 가입조건으로 사형제도 폐지를 내세우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20세기 초에 유럽인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잔혹한 사건들에 대한 반성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성서적인 정신관이 유럽인들에게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과거를 통해 국가가 개인의 존엄성을 짓밟는 현장을 목격주의를 신봉하기에 미국의 대외정책은 적이라고 판단된 자에게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보복한다. 또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 국가가 패권을 잡고, 평화에 대한 의지를 나머지 국가에 강요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생각하에 미국의 보수파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독자 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개척시대에 등장한 아메리칸 드림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유럽의 지식인들은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카우보이 외교를 펼치고 있다고 맹비난하고 있으며, 이런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태도와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반면에 유럽은 사형을 반대하는 것처럼 대외정책과 군사력 사용에 대해서 매우 평화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보복보다는 용서와 관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러피언 드림의 핵심과 일치하는 태도이다. EU는 국제법을 최고의 권위로 간주하여, 이 국제법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군사력의 사용에 대해서도 파괴가 아닌 평화유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군사력의 사용은 가장 마지막에 고려되어야할 최종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EU는 국제사회에 영구평화 정착이라는 목표를 위해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무력동원이 아니라 국제법의 준수와 실천, 그리고 상대방과의 대화와 타협, 평화적인 지원을 통한 영구평화 정착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으로 두 드림이 생각하는 복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아메리칸 드림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노력과 이에 따른 성공과 부의 축적을 추구하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복지에 대해서 무감각하며, 미국의 정책에서 복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유럽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러나 유러피언 드림을 통해 나타나는 유럽의 모습은 이와는 대조적이다. 유럽에서는 사회안전망에 대한 인식이 미국과는 달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으며, 국가에서 복지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하면 떠로르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잘 정비언 드림에도 해결해야되는 문제는 존재하며,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유러피언 드림의 흥망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그 첫 번째 문제는 군사력에 대한 문제이다. EU는 원칙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는 평화적인 해결을 우선시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군사력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는 미국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현재 EU의 처지이다. 과거에 EU는 코소보전쟁과 보스니아 내전에서 자신들의 무력함을 보여주었고, 국제 정세에 있어서 미군의 필요성만 부각시켰다. 그러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군비를 증강하여 EU도 강한 군대를 보유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다. 현실적으로 EU 회원국들은 국방비를 감축하고 복지예산을 늘리고 있으며, 군비의 증강은 EU의 기본적인 평화정책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먼저가서 분쟁을 종식시키면, 그 뒷 정리를 하는 EU라는 현상황이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EU는 자체적으로 자신을 지키고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세계의 영구평화 정착이라는 유러피언 드림의 이상을 실현시켜야 한다. 그래서 EU는 현재 신속대응군을 창설하였고, 신속대응군이 앞으로 벌어질 세계 각지의 분쟁에서 영구평화 정착을 위해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두 번쩨 문제는 이민자 문제이다. 이것은 유러피언 드림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유러피언 드림의 목표는 세계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보편적인 인권을 실현하고, 차별없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이 꿈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 EU 각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현재 EU 각국에는 매우 많은 수의 이민자들이 유입되고 있고, 이들은 EU 각국에서 나타나는 저출산 문제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주로 노동력이 부족한 3D 산업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또한, 많은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각국에는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집단 거주 구역들이 생겨났다..
    독후감/창작| 2006.01.24| 6페이지| 1,000원| 조회(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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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사] 한국현대사 발표감상문
    1). 해방정국(남한)해방정국 시절, 특히 남한은 발표 준비를 하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매우 혼란하고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 시절이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은 우리 민족만의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2차대전 이후, 이념의 양극화가 막 시작된 시기라는 이유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었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민족 자립의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지만, 미국,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자들에 의해서 남한의 해방정국은 규정되었고, 많은 오류와 모순을 가지고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많은 오류와 모순을 가지고 시작한 남한이 현재 북한보다 월등히 잘 살고 있는게 신기하다. 그러나 이 때의 오류와 모순이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에 대한 정치적ㆍ경제적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지나친 반공의식으로 인한 이분법적 사고의 팽배, 색깔시비, 그리고 진짜로 조국을 위해 일한 사람들이 무시받고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이 현실의 시작이 모두 해방이후 남한정국이 선택한 모든 것들의 결과인 것이다.이렇게 안좋은 결과들을 많이 양산한 해방이후의 남한 정국이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부끄러운 시기일지도 모르나, 무작정 부끄럽다고 덮어 놓을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남한정국의 모습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무시함으로써 벌어진 것이고, 이러한 남한 해방 정국의 상황이 지금의 우리에게 재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런 이유로 발표를 준비하면서, 발표를 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겪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를 많이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찾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현실은 냉혹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 모든 정책들을 시행하고, 특히 강대국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 우리나라와 같은 약소국의 국익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 소련이 개입한거는 남한에서 미국이 개입한거와 마찬가지로 강대국의 영향력하에 있었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남한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남한은 해방이후, 친일관료들이 그대로 관료로 등용되고, 토지문제에 있어서도 불합리한 점이 많았고, 이 모든 것이 현 정권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고, 민중의 이익으로 돌아간 것은 없었다.반면에 북한은 철저한 친일파의 숙청과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을 적용하였기에 대중의 지지하에 정권을 창출하였고, 남한보다 단합이라는 면에서는 앞선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친일의 잔재들이 잔존하는 것을 당연히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나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해야될 일들을 실행하면서 순조롭게 새로운 사회주의국가인 북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어 나갔다.또한, 남한의 경우 권력의 정당성과 국민의 민주화 열기로 정권이 교체되어 갔지만, 북한은 창건 초기부터 사회주의 국가로써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주체사상이라는 독특한 일인 독제체제를 만들어 갔다. 즉, 안정적으로 정권을 창출하고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김씨부자 독재 체제를 유지시켜 나갔다.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 독재체제는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지만, 북한의 체제는 현재 세습되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부분이 지금도 의문이다. 아마 정권 창출 초기인 해방정국 시기에 실시했던 반일ㆍ친인민적인 정책들을 펴고, 그것을 바탕으로 주체사상이라는 독특한 일인독재체제를 공고화 시킨 것이 그 이유일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궁금하다.마지막으로 해방정국 남북한을 살펴보면, 그 당시에 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남북한 통일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간간히 김구 선생이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남북한이 통일 되었을 거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분열상과 그 두 이념을 대표하는 소련과 미국, 그리고 그 당시 남북한의 권력층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 당시에 김구 선생이 살아있었다고 하더라도 남북한의교 시절에는 공산당이 침략해서 우리나라 군인과 유엔군이 열심히 싸워 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이번 발표에서 다룬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쟁중 벌어진 학살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는 남침설, 북침설, 유도설 등의 학설을 떠나서 어차피 한 번은 일어날 것이 분명한 전쟁이었고, 누가 일으켰나는 부차적인 문제인 것 같다. 어차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물과 기름은 언젠가는 한 번 붙어서 자신들의 세력에 대한 우위를 점유해야 했고, 그러한 세력 경쟁의 무대는 동북아에서의 한반도가 될 것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격전이 일어날 것을 이미 양쪽은 알고 있었고, 누가 먼저 도발했느냐는 전쟁에 대한 책임소재를 두기 위한 허울좋은 명분인 것 같다.그 다음으로 한국전쟁시 일어난 양민 학살문제인데, 이 문제가 지금의 우리를 분노로 가득차게 만들고 있다. 양민학살이라는 문제는 전쟁의 양상이 군인들끼리 싸우는 차원을 떠나서 국가총력전이라는 양상을 보이면서 등장한 가장 큰 전쟁의 어두운 면이다.한국전쟁시에도 보도연맹사건, 노근리, 거창등지에서 미군과 한국군대에 의한 학살 사건이 있었다. 선량한 민간인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공산주의자가 숨어있다는 등의 근거없는 이유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들은 선량하게 자신의 일생을 살았지만, 전쟁이라는 괴물과 이념이라는 굴레 속에서 희생되어 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살 사건들이 역사속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들어와서야 공개되고 진상이 조사되고 있다는 데에 이러한 학살사건이라는 문제가 국가 차원에서 얼마나 무관심했고, 감추기에 급급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상당한 분노를 느낀다.최근에도 이러한 학살문제가 여러 분쟁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학살에 대해서 국제사회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학살을 막기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국제사회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전쟁의 어두운 면인 민간인 학살 문제가 영원히 사라졌으면 한다. 물론소망을 짓밟고, 수많은 민주화 열사들의 피를 뿌리게 한 점을 통해서는 당연히 반대하게 만드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갈등이다.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소신있는 주장을 정립하는 방법은 아마 박정권이 실행한 경제개발과 이 시기에 대한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민주화에 대한 탄압은 있었지만, 오늘날의 우리나라가 이정도 살 수 있게 만든 박정권의 경제개발에 찬성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예나 지금이나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의 일부 복지국가에서는 성장과 분배라는 토끼를 동시에 잡아나가고 있지만, 우리와는 다른 여건이므로 별개의 사례로 친다면,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잡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비현실적인 과제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던 1960년대는 무기술ㆍ무자본에 빈약한 내수시장, 그리고 노동력만 풍부한 것이 한국의 실정이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능한 것은 대량의 노동력을 활용한 수출 주도의 성장 정책밖에 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을 거라고 판단된다. 또한, 이러한 것을 주도함에 있어서도 소수의 기업에 의해서 효율적이고 발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재벌 주도의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누누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경제개발이 마무리된 지금의 시점에 와서는 우리 산업 발전을 주도한 재벌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그 누가 정권을 잡았든, 필연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오늘날 나타난 박정권의 경제 개발로 인한 폐해들은 박정권 이후의 정권들이 그러한 것들을 바로 잡아주었다면, 선성장 후분배라는 것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박정권 이후의 정권들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 경제의 많은 폐단들을 불러온 원인일 것이다.결론적으로 박정권을 경제개발 정책에는 찬성하며, 그 이후의 정권들이 박정권이 말아야할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박정희 사후, 12ㆍ12 쿠데타를 통해서 또 다른 군사정권을 성립하여 국가의 대권을 잡으면서, 우리 국가의 민주화는 더욱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민중은 분연히 일어났고, 신군부는 이러한 민중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총ㆍ칼로 민중을 억압하였고, 그러한 본보기가 바로 광주였다. 신군부는 우리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억압하기 위해, 자칫하면 국방의 공백이 발생해서 큰 화를 부를 지도 모르는 행위를 하면서까지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신군부 세력들은 우리나라의 정권을 잡았고, 노태우가 물러날 때까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민주화 움직임을 짓밟았다. 결국 이들은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세워졌지만, 대통령에 대한 전관예우를 빌미로 모두 석방되었고, 민주화를 열망한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경호를 받으며, 편안하게 살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많은 것 같아 참 아쉽다.마지막으로 우리와 혈맹임을 항상 강조해온 미국이 이 시기에 보여준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누구나 다 알 듯이 모든 국가는 자국의 국익을 최우선시 하는데, 미국만큼 자국의 국익을 최우선시 하는 국가도 없을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자국의 국익을 생각해 본 뒤, 신군부의 편을 들어주어 한ㆍ미 연합사 소속의 기갑사단이 광주진압에 투입될 수 있도록 묵인하였고, 이후 들어선 신군부 세력에게서 자국의 국익을 보장받으며, 우리나라를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 이러한 현실을 볼 때, 국제사회가 얼마나 현실적이며, 자신들의 국익을 우선시하기 위해서는 불법 정권도 묵인하는 태도에서 다시금 현실의 냉혹함을 절감했다.6). 북한의 개혁ㆍ개방우리의 또 다른 반쪽인 북한은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이면서도 다른 체제에서 서로 원수가 되어 50여년의 세월을 지내다 보니 사로에 대해서 무지하고, 이질화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우리의 체제는 알다시피 정치다.
    독후감/창작| 2004.12.18| 6페이지| 1,000원| 조회(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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