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의 이해일본은 한민족 말살을 기도했다!일본의 한일합방이라는 주장은 조선을 병탄하기 위한 계략일 뿐이였다.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여 일본의 조선통치에 항거하는 조선인민을 탄압하기 위해 일본군을 대거 투입시켜 조선을 일본에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인의 등용을 철저히 배제시켰다. 단지 순종과 노예적인 자격을 가진 일본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는 자에 한정되었다.조선은 일본의 민족 말살에 항거하여 3·1운동을 일으켰는데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탄압했다. 일본은 자신의 계략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고종을 독살하기까지 했다.1919년 8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종래의 무단정치를 문화정치고 바꾸었다. 하지만 문화정치를 앞세워서 더욱 강력하게 무력으로 통치했다. 황민화 교육으로 조선의 말과 글을 금지시키고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신문도 폐간시켰다.황민화 교육이 본격화되면서 교육계는 물론, 일반인·기독교 교인들에게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또 일본은 농업을 개량·장려한다는 이름으로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사유지와 국유지를 구분하여 토지를 약탈해갔다.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략해버렸다.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병참기지로서 태평양전쟁의 확대에 다른 부족한 노동력과 병력을 강제로 동원시켰고, 노동집약공업은 분업화하여 조선의 공업에서 충당했다.일본이 조선의 말살정책은 이 뿐만이 아니였다. 일제는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파괴하기 위해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웠다. 일제의 수탈이 극도에 달하면서 우리 민족은 매우 고달픈 처지에서 목숨을 연명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일제의 만행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이 때문에 감옥은 죄없는 죄수들로 넘쳐 흘렀다. 일제는 '근로동원'이라 하여 어린 학생들을 군사 시설을 위한 공사장에 보내고, 여성들도 '근로보국대'라 하여 토목 공사에 내보냈다. 나아가 한국의 청년과 장년층을 끌고가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이용했다.나아가 일제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1944년 9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만들어 12세에서 40세까지의 배우자가 없는 여성들 20만여 명을 강제로 끌고 갔다. 이들은 일본과 한국 내의 군수 공장에서 일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상당수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전쟁터로 끌려가 종군위안부로 일본군을 위한 성적 노리개감으로 희생당했다.그리고 일본은 조선의 발달된 전통문화를 말살하려고 까지 하였다. 일제 침략자들은 귀중한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파괴 약탈하였다. 각종 문화재를 수없이 훔쳐 일본에 가져 갔다. 일제 강점자들은 헌병, 경찰,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지하분묘 고분들을 모조리 도굴하여 수많은 문화재들을 파괴, 약탈하였으며 고분들을 거의다 파괴하고 진귀한 문화재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고분뿐만이 아니라 사찰에 있는 문화재들, 도자기, 서적, 건물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파괴시켰다.
{교육학 개론우리나라 교육목적의 변천사◎ 고조선삼국유사에 나타난 단군신화를 살펴보면 홍익인간의 이념을 찾아볼 수 있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는 뜻으로 실로 인간의 행복을 위하고, 인간 생활을 유익하게 하는 인류역사의 숭고한 이상이다. 홍익인간은 인간존엄사상의 표현이며 거기엔 어떠한 제한도 없다. 사람인 한 존중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익인간상은 이기적이 아닌 애타심이고, 자기희생적이며 봉사정신에 투절한 인간상을 말하며, 이런 인간상을 길러내는 것을 이념으로 하는 것이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 고조선에는 8조법금과 부여의 법률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사회구성원에 현실적으로 당위규범을 제시하여 도덕교육의 내용이 되는 것이고, 아울러 사회교화를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하였음을 엿볼수 있다.◎ 삼국시대삼국시대는 점차 국가적 체제를 완성하면서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여 새로운 민족문화를 준비하는 태동기로서 다음과 같은 교육목적이 있다.첫째, 삼국시대는 전체적·군사적 성격이 뚜렷하였으므로 대내외 전쟁에 활용될 힘세고 용감한 군인의 양성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장사와 병사 양성은 교육목적의 하나가 되었다.둘째, 삼국시대는 강력한 주권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관료적 정치체제와 엄격한 계급제도를 갖고 있었으므로, 교육 역시 그러한 체제유지의 활용성에 따라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교육의 실제적 목적은 피교육자의 인격 함양이나 개인적 가치 실현보다도 정치 내지 계급적 지위를 고수할 수 있는 지배계급적 능력의 육성에 있었다.셋째, 삼국시대는 불교와 유교의 막대한 영향으로 그에 걸맞는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다.지금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교육목적에 대해 살펴보자.1. 고구려삼국중 제일 북방에 위치한 고구려는 중국과의 지리적 인접에 의하여 일찍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한자를 매개로 한 유학을 장려하고 이것을 숭배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교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게 되고, 소수림왕 2년 (372)에는 중국식 학교인 태학을 설힙하니, 이는 우리 나라 교육사에서 기록으로 나타난 최초의 제도적 교육기관이다. 태학의 설립은 고대국가의 체제를 확립시키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한 인재의 양성이 그 주된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에는 교육사에서 사학의 시초라고 생각되는 경당이 있었는데 경당에서는 문무일치의 교육을 시켰다. 왜냐하면 당시 국제적 상황 속에서 대륙의 세력과 한반도 남쪽에 있어서 만만치 않은 백제, 신라의 세력의 중간에서 항상 국가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는 고구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으리라 생각된다.2. 백제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중국과의 교섭이 잦았으므로 직접 유교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그에 따른 학교제도가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가 일본에 한문과 유교경전을 전파할 수 있었던 문화적 수준과 각종 정연한 박사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백제의 교육목표나 그 내용은 고구려와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된다.3. 신라신라에는 화랑도 교육이 있었는데 진흥왕이 삼국대립의 혼란된 상황에서 국권을 신장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일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화랑도 교육정신에 입각한 체제를 장려 보급한 것은 민족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화랑은 백성중에서 모범이 되는 인격체로서 당시의 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한 교육적 인간상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청소년 낭도들이 이 모범청년의 예의와 행동과 무예를 본받아 아름답고 선량하며 애국적인 국가 인재로 양성되도록 범국민적 뒷받침이 이루어졌다. 화랑도의 교육목적은 첫째, 현명한 지도자와 선량한 백성을 양성하는데 있었다. 둘째, 용감한 군인정신과 투철한 애국사상을 모든 청소년에게 진작시키는 데 있었다 셋째, 자연을 사랑하고 국사를 애호하는 미풍을 모든 신라백성에게 장려하는 데 있었다. 이상화 같이 문무를 겸비한 전인적 인간성 양성이 화랑교육의 목표였던 것이다.다음으로 학교교육을 살펴보면, 신라의 국립대학격이었던 국학의 교육목적은 고구려의 태학과 마찬가지로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의 관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국학이 완비되어 학문이 성하여지고 국내외 정세가 무사 평안하여짐에 따라 교육의 목적이 입신출세의 방편으로 관료화 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 고려시대고려사회에 있어서는 치자적 윤리를 전제로 한 봉건적 질서 확립에 필요한 유교철학을 내세웠으며, 치자적 자질을 평가하는 봉건적인 과거제도와 유교적 교양 도야를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고려사회의 교육은 관리등용에 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인교육에도 큰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교육의 목적은 조선조에서도 같았던 것으로 이는 근대교육의 목적과도 부합되는 것이었다.(1)관학학원은 행정상의 필수요원인 육부(관제상)의 관리들로 충당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고 국자감은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관리 양성과 유교적인 학문의 연구에 목적이 있었다. 향교는 유교의 사당인 동시에 교육기관으로서 유학의 전파는 물론, 지방민에게 존성심을 교화하자는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학당은 {) 공자를 모시는 사당문묘 없이 학생을 강학하는 교육기능만 가지고 있었다.(2) 사학12도는 유교교육과 관리양성을 서당은 지방민의 서민자제의 교육에 목적이 있었다.(3) 과거제도고려왕조에 있어서 학교교육의 목적은 유학교육을 통한 관리양성이었으며 그것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근대1. 조선시대(1) 학교교육성균관은 문묘와 교육의 기능, 사부학당은 문묘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향교는 문묘기능, 교육기능, 사회교화, 향풍순화등의 기능을 위해 교육했다. 종학과 잡과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조선사회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학교교육의 궁극의 목적은 과거의 급제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상황이었다. 국가가 관비로 교육기관을 설립한 이유는 관료체제에 필요한 인재를 얻기 위함이었고, 국가가 인재를 얻는 관문이 곧 과거였다.(2) 성리학성리학은 송학과 마찬가지로 수기존양을 목표로 이를 위하여 치지궁리에 힘쓰려고 하였다. 수기존양이라는 것은 선량한 마음을 잘 간직하고 천부의 선량한 마음을 잘 기르는 것을 수양의 목표로 하는 것이며, 또 이 방법과 도리를 궁구하는 것이다.(3) 사학서원은 조선조 중기 이후부터 보급된 민간사학 교육기관으로서 선현봉사와 후진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서당은 사학이나 향교에 입학할 준비교육에 목적이 있었으나, 서당 그 자체에도 이에 준하는 교육을 하는 경우도 있어 여기서 학을 닦아 생전과 초시에 응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서당교육의 목적은 글자를 해득하고 독해력을 길러 학문의 기초적 지식을 얻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4) 실학18세기를 중심으로 하고 17세기 후반기에서 19세기 전반기에 걸치는 실학은 왜·호란 후 민족적 자각과 서구문물의 자극 그리고 청조학 특히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를 정신으로 하고 실증적 방법을 통하여 사회모순의 재조정을 목적으로 하는 경세치용·이용후생의 실용적인 학문을 말한다. 자아에 철저한 자각과 당시 설정에 입각한 실체적 사고를 이룩한 실학은 새로운 질서의 추구와 이의 구현이라는 학문적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독자적이고도 실용·실증적인 사고와 방법을 지니고 그 탐구의 대상을 점차로 넓혀갔다. 이중 대표적인 실학교육사상가인 정약용의 교육목표를 살펴보면 첫째, 효제자의 실천 둘째, 국학의 보급 셋째, 실업기술의 발달 넷째, 교육방법의 합리화 추구이다.2. 19세기(1) 동학동학사상은 민족적 주체성에 호소하여 서학(천주교와 서양문물)과 외세로 인한 민족적 뿌리의 동요를 막아 보자는 목적 아래 최제우가 창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