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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대외관계사]발해사 연구
    머리말발해는 북부 한반도와 만주에서 698∼926년까지 존속했으며 발해사 연구는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및 중국과 러시아(옛 소련)에서 주로 연구되어 왔다. 이들 나라 중 의견 차가 가장 큰 것은 한국과 중국인데, 한국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였다고 보는데 반해,{) 박시형,「발해사연구를 위하여」『력사과학』,1962-1;김정배 엮음,『북한의 우리 고대사 인식(Ⅰ)』, 대륙연구소출판부. 1991.중국은 발해가 말갈국으로써 당(618∼907)의 지방정권에 불과했다고 본다. 한편, 러시아는 발해를 한국사나 중국사의 범주가 아닌 독립 말갈국의 역사로 다루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글의 목적은 발해의 건국 세력에 대한 문제와 발해와 신라의 교섭과 대립에 관한 문제를 밝히는 것이다. 또한 필자는 발해의 창건자였던 대조영이 송화강출신 고구려인이었다는 점과, 발해와 신라의 교섭과 대립이 공동체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남북국의 관계가 발해 유민과 고려와의 사이에서도 나타났음을 밝히려고 한다. 발해왕실의 개창을 한국 사학사의 입장에서 어떻게 인식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신라사의 시기구분과도 관계가 있다.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과 발해건국 문제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신라는 660년 668년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국사 최초의 통일왕조가 되었다. 그러나 삼국통일은 고구려통합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30년 후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건국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국사 최초로 성립된 단일왕조의 통일신라는 30년에 불과하였고, 발해건국 이후의 신라는 불완전한 남국 신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한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처음으로 고구려와 백제유민들이 힘을 합쳤던 통일기였다. 발해사 연구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말갈 의 실상을 복원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발해 건국세력인 대조영 등의 계통에 따라 발해주민의 민족사적 계승성이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신라와 발해의 관계는 한국사의 남북국시대가 갖는 의미를 결정한다. 양국이 교섭했던 후삼국통일의 연구만을 통해서 오늘날의 역사적 모순을 극복하는 데에 기여한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다. 다만, 삼국통일에 대한 연구에서 모색해야 할 점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후삼국의 통일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복원하고, 그 결과를 보편적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요컨대, 발해건국 이후의 신라는 통일신라일 수 없고 발해와 함께 하는 남북국의 신라였다는 것이다.한국사학사에서 南北國時代論의 당위성은 발해의 성격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인가 아닌가에 따라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가 갖는 의미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발해가 한국사라 하더라도, 아직까지 발해는 신라와 대등하게 대접받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발해 후손의 기록 부족과 한국사가 고려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오는 과정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인식하는 뿌리가 깊어졌으며, 기록 또한 그렇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북국 시대론에 대한 근본적 회의는 신라와 발해인들이 조금이라도 동족의식을 가졌는가의 여부에서 나왔다. 한국사에서 삼국민이 일정하게 역사적 공동체집단으로 존재해 왔다면, 남북국시대의 양국 왕조와 주민들의 관계도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생각 할 수 있으며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근거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에 있다.{) 박시형,「발해사연구를 위하여」『력사과학』 1962-1.만약, 『삼국사기』에 발해가 신라와 같은 비중으로 기록되었다면, 오늘날 발해의 민족계통에 대한 의문은 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러한 원인은 신라와 발해의 관계가 교섭보다는 대립의 시기가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삼국사기』의 발해사누락은 신라와 발해의 대립적 역사전개와 신라계승적 고려 문벌귀족들의 한계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기록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발해의 고구려계승을 부정할 수는 없다.제2절 발해인이 된 고구려말갈중국사에서 발해의 주민구성에 관한기록은『삼국지』를 비롯한 그 이전의 기록들은 만주일부 주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이들에 대한 정보를 비88-1, 29쪽당의 말갈병에 대한 가혹한 보복은 고구려인으로 불리는 도시〔평양〕중심의 지배층과 변방의 피지배주민들을 철저히 이간시켜 고구려의 응집력을 분쇄하려는 분열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말갈과 고구려인을 이질집단이 아닌 동질집단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가진다.그러면 적어도 백두산 지역〔백산말갈〕과 송화강유역 주민〔속말말갈〕들은 고구려의 피지배층으로서 고구려와 동질적·공동체적 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료에 별개의 종족으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말갈로 불리던 그 지역주민들이 고구려왕조와의 관계에서 흔히 말하는 반독립적 상태를 유지하였던 점을 고려하여, 以貳弟夷정책을 취하고 있던 당〔송〕조정이 그들의 입장에서 고구려왕실과의 관계에서 협조적이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고구려 변방주민들을 다르게 기록하였을 것이고, 둘째는 왕조중심적 고구려 지배층과 『삼국사기』찬자들이 변방 시골사람들의 문화적 낙후성을 깔보아, 그들 지배층의 신분의식하에서 중국인들의 오랑캐관과 같이 평양중심의 고구려국인과 다르게 말갈 이라 불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갈로 기록된 이들 변방 사람들의 국가의식 내지 왕조의식은 나는 고구려인 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어 세웠다는 발해의 왕이 스스로 고구려국왕 임을 자처하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속말말갈 과 백산말갈 은 고구려국민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제3절 발해 건국세력의 종족계통고구려가 멸망한 후 많은 유민들은 전쟁을 피하여 요서 및 돌궐의 다른 지역으로 스스로 이동하거나, 강제로 요동 및 당의 내지로 옮겨 가 살게 되었다.{) 盧泰敦, 「高句麗遺民史硏究」.당으로 옮겨간 사람들은 지배층뿐만 아니라 피지배주민들도 있었다. 피지배주민들은 대개 당나라에는 말갈로 알려지면서 토착 이름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로써 대조영등이 발해 건국할 때에는 뜻을 같이하여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당은 고구려유민들을 감시하는 등 계략을 꾀하였지만 고구려유민의 부흥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당의 회유책를 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라가 그들만의 남북교섭노력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지향적 신라외교는 남북국의 평화교섭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헌덕왕대에 들어 다시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불법적 왕위찬탈을 통해 등장한 헌덕왕은 원성왕이 그랬듯이, 반대세력에 대한 무마책과 왕권안정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대내적으로는 정치개혁 및 번대세력에 대한 정책배려, 대외적으로는 북국으로의 사신파견을 통한 적대국으로의 관심 이전이었다. 원성·헌덕왕대의 발해로의 사신파견은 특정당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선되었다. 헌덕왕이 즉위한 후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접하게 되었다. 신·일간의 관계가 다시 멀어지고 발해와 일본이 밀착하고 있었다. 이것은 신라가 당에 보다 적극적 외교 노력을 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가 취할 수 있었던 외교는 대립적이었던 발해와 직접 대화를 하거나, 당·일에 대한 적극외교를 통해 발해를 간접적으로 견제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헌덕왕 초기의 국제정세는 발·일의 접근과 신·일의 멀어짐, 그리고 발해의 당·일에 대한 적극외교와 신·당 관계의 불투명이라는 신라에게는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발해국인 항쟁기 및 신라귀족 항쟁기의 남북교섭은 분명 당 중심의 제국질서를 극복한 신라의 자주적 외교활동이었다.남북국의 교섭에 관한 기록은 헌덕왕 4년 이후에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발해견제를 위한 신라의 대당접근과 발해의 영토확장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신라의 대당밀착은 발·일의 접근에 대한 상대적 외교활동이며, 헌덕왕 11년 당의 신라에 대한 군사지원 요청은 신·당 관계가 밀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가 당과의 개선을 중요시 한 이유는 신라의 대발해사신 파견은 그들의 정치적 갈등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이미 발해와의 교섭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또한 신라와 발해가 교섭이 단절되었던 원인은 발해의과정에서 쌓았던 그 이전의 것이나 713년 이후 발해와의 대립과정에서 쌓았던 사업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신라와 발해, 양국간의 무력적 대립은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두 나라의 국경에서 행해졌던 축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신라와 발해의 적대관계가 본격화되는 성덕왕대에 신라가 세 차례에 걸쳐 발해와의 접경지역에 성을 쌓았던 것은 발해를 의식한 군사행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경덕왕대에 실시된 축성사업 역시 발해를 의식한 군사행동이었다. 이 사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유명한 일본의 신라정벌 계획에 발해가 개입되어 두 나라가 신라를 협공하려던 계획을 감지하고 벌였던 축성사업이었다고 하는 해석이 타당하다. 발해의 영토확장은 신라와 당이 가까워지는 계기였으나 신·당의 우호·밀착은 당의 以夷制夷정책에 맞물려 남북국관계에 있어서는 평화가 아닌 대립이라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발해는 신라와의 군사적 대립관계에서 어떠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었는가? 발해도 신라의 축성 등에 대비하여 나름대로 여러 토성 및 산성들을 쌓았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증거들이 최근 북한의 이 지역에 대한 여러 발굴에서 입증된다. 행정제도적 방어책으로 가장 주목해야할 것은 오경중의 하나인 남경남해부의 설치이다. 한편, 발해와 신라의 대립상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북한의 동해 안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성터이다. 물론 신라국경과 먼 발해국 내지에서도 성터들이 발견된다.{) 宋基豪 역, 「부록: 발해유적 분포도」『발해의 역사』, 307-311족.그러나 신라와 인접하였던 북한에서 발굴되는 것들은 주로 발해가 신라를 의식해서 쌓았을 것이다. 한편, 발해와 신라의 서쪽 변경에서의 대립상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고고학적 성과가 주로 동쪽에 치우쳐 있는 관계로 서쪽에 대한 발해의 구체적 대응책에 대해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발해와 신라가 대립적이었다는 사실은『入唐求法巡禮行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책은 단순하게 왕조적 차원의 대립관계가 아닌 양국구민들의).
    인문/어학| 2005.10.07| 12페이지| 1,500원| 조회(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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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문화]한국 속의 일본문화
    한국속의 일본문화서론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온 일본 문화 중에 어떤 것을 주제로 잡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난 지금까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 가깝고도 먼 나라 혹은 우리나라를 36여년간 지배한 나라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 탓인지 일본에 대해 레포트를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왕이면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분야의 것을 주제로 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교수님께서도 자기가 관심있는 분야라면 어떤 주제라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다. 교수님께서 예로 들어주신 것은 초밥, 이지매, 의상 등이었다. 고민 끝에 일본의 음식에 대해 쓰기로 결정 내렸다. 그 다음 소 주제를 정하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의 음식하면 떠오르는 것은 스시(초밥), 덴뿌라(오뎅), 우동 등이 대표적인 음식이었다. 에도의 3대 식문화는 스시, 장어구이, 덴뿌라라고 한다. 생각 끝에 레포트 주제로 결정한 것은 스시(초밥)였다. 그럼, 먼저 스시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의 음식문화와 특징에 대해 알아보겠다.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장수 민족의 하나이며, 이들의 장수 비결 가운데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생선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이들의 생선요리의 압권인 스시는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서양인들도 즐겨먹을 만큼 세계적인 음식으로 각광 받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바다에 둘러 쌓여 있어 해산물이 풍부하며, 또한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의 농작물을 얻을 수가 있다는 점에 요리의 소재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양국 모두가 주식은 쌀이며, 반찬, 국이 한 세트로 되어 있는 것도 비슷한 점이다. 그러나 아무리 같은 재료를 사용한다고 하여도, 맛과 음식을 먹는 방법 그리고 식기 등 여러 면에서 다른 점 또한 많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일본음식은 중국음식만큼 저렴하진 않지만 정갈하고 신선한 맛이 특징인 일본음식은 개운한 맛을 좋아하는 우리나라사람들의 입맛과도 맞아 기성세대 외식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 맛뿐만 아니라 색깔이나 모양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시각적인 일식 요리의 매력은 식재의 풍부한 계절 감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계절이 분명한 일본에서는 식생활 또한 계절에 민감해 싱그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또 다른 시각적인 즐거움은 식기와 공간미에 있다. 일본 식기는 재질도 다양하고 형태도 다양해 음식을 연출하는데 있어 장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담을 때도 공간의 미를 충분히 고려한다. 무조건 많이 담는 게 아니라 색과 모양을 보기 좋게 다소곳이 담아 기물과 공간 및 색상의 조화를 예술적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마지막으로 어패류를 이용한 요리가 발달하였기에 신선도와 위생을 제일 중요시하는 것이 일본요리의 특징이다.본론스시란 식초로 간을 한 밥에 생선을 얇게 저민 것이나 달걀·채소·김 따위를 섞거나 얹거나 말거나 하는 요리를 말한다. 한국말로는 초밥이라 한다. 원래의 스시는 한국의 식혜(食醯)와 같은 것이다. 즉, 물고기를 소금간을 하여 조밥이나 메밥에 버무려 놓았다가 삭은 후에 먹는 생선식혜와 동일한 조리법이다.스시의 어원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관동지방은 고기(漁)가 맛있다 라는 어원를 가지며 관서지방에서는 맛이 시다 라는 어원을 가진다. 그러나 `맛이 시다고 해서 酸し라고 한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러한 스시의 어원은 도꾸가와 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의 유명한 학자의 저서에 스시란 말이 보이는데 이것이 스시의 어원에 대해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정의이다.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스시의 어원에 관해 기록된 문헌이 없었다고 한다. 그 후 1719년에 『백과자서』란 책에 스시라는 말의 유래에 대한 자세한 풀이가 나온다. 이 책은 `지`란 자를 표제로 하여 `스`란 초, 즉 `시다`란 뜻이고 `시`란 어조사라고 풀이하면서 생선을 저장할 때 밥과 소금으로 신맛을 냈으며 초밥의 맛이 시기 때문에 `스시’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지`란 `藏魚(생선을 저장한다)`를 의미하는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스시는 크게 마레스시이 중 노리마끼와 니기리스시는 대부분의 초밥이 관서지방에서 유래된 것에 비해 동경에서 발생한 것이 특징이다. 노리마끼는 김밥을 말하는 것인데 김밥의 역사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노리마끼(김밥)는 우리나라의 김밥과는 달리 그 종류가 상당히 많고 복잡하다. 물론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보통의 단무지 김밥에서 벗어나 쇠고기김밥, 김치김밥, 오징어김밥, 누드김밥 등 재료와 모양에 따라 다양한 김밥이 소개되고 있지만 일시적인 유행김밥 일뿐이다. 이나리스시(유부초밥)의 기원은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1853년경 간행된「수정만고」란 책을 보면 天保시대(1830∼18450)말경에 에도 지방에서 `유부의 한쪽을 잘라 봉지 같은 것에 잘게 썬 버섯. 박 등을 밥과 섞어서 넣고 채워 만든 이나리스시를 팔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이나리스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또한 이나리스시의 발생지가 나고야란 설도 있는데 이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후 이나리스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급속히 발달하면서 시대의 유행식품이 되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기 시작한 스시는 후나스시(붕어초밥)로 고노에(近江)지역이 천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스시 속의 재료로는 여러 가지 식품들(어패류, 알, 달걀, 야채 등)이 이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생선이다. 날 것을 사용한다 해서 일어로는 `나마`라고 총칭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니기리스시(주먹초밥)도 식초, 설탕 등으로 조미한 밥을 뭉친 위에 와사비와 생선회를 얹은 형식이다. 그리고 초밥을 만들 때는 주재료로 사용되는 어패류나 달걀, 야채뿐만 아니라 와사비 등기타 곁들이는 식품도 중요하다. 부재료로는 식초, 와사비, 미림 등이 있다. 먼저 식초는 배합초의 주재료 중 가장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재료이다. 배합초란 밥을 양념할 때 섞어 만드는 것으로 초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이다. 배합초의 주재료는 식초와 소금 설탕 등으로 입맛이 다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일본식의 배합률을 따르지 않고 각자 기호에 린내를 없애준다. 넷째, 단백질 응고작용이 있어 생선살의 탄력성을 더 한다. 다섯째, 채소류의 갈변을 일으키는 효소의 작용을 억제하기도 한다. 그 다음 와시비는 `고추냉이'라고도 불리며 강한 매운 맛과 동시에 혀를 자극하는 특유의 향이 있는 향미료이다. 간장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시의 다채로운 종류와 맛있는 스시 밥의 그늘에 가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간장은 스시의 맛을 끌어당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장을 곁들임으로서 스시는 그 풍미를 더하고 소재 본연의 맛을 나오게 한다. 스시의 맛은 잘 비빈 초밥과 선도 좋은 생선과의 조화로부터 탄생한다. 이 두 가지 맛을 일제히 돋보이게 하는 것이 간장이다. 이렇듯 소재가 지닌 맛을 버리지 않고 소재 독특한 맛을 살려주는 것이 간장인 것이다. 스시는 밥과 재료가 매치하지 않으면 안된다. 먹어서 맛있는 스시는 스시 재료와 밥, 그 위에 맛있는 간장이 갖추어져야한다. 그만큼 간장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스시는 특히 간장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가게에 맞는 간장 선택에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솜씨 뛰어난 주방장이 만든 스시라 해도 먹는 이의 간장 찍는 법 하나로 맛을 망치는 경우가 있다.(먹는 방법에 대해서는 밑에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일식요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미림이라고 한다. 이 조미료는 소주에 진찹쌀과 쌀누룩을 넣어 양조한 술의 일종이다. 알코올 농도는 낮으며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나고, 물엿을 넣은 것처럼 조금 끈끈하게 흐르는 성질이 있다. 설탕처럼 단맛이 나면 서도 고유의 감칠맛과 향이 있어 요리에 독특한 풍미를 더한다. 이밖에 초밥을 만들 때는 소금이나 설탕, 정종 등이 기초재료로 사용된다. 정종은 어패류를 요리할 때 비린내를 제거해 생선을 애용하는 일식에서는 자주 사용한다.스시 만드는 법을 간단히 소개하면 식초·설탕·소금을 섞어 만드는데, 밥은 되직하게 잘 지어야 한다. 쌀을 밥 짓기 2∼3시간 전에 씻어 두어 물기를 뺀 으로 빨리 저어 식힌다. 이것을 각각 김·생선·유부 등에 싸서 초밥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세계 각 나라마다 식사 관습의 차이가 있다. 각각의 식사법이 있고, 반드시 지켜야 할 예법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것이 양식의 기본 예법이라면, 일식은 좌선의 정신이나 다례(茶禮)의 영향을 받은 마음의 식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스시를 먹는 방법은 손으로 집어먹는 방법과 젓가락으로 집어먹는 방법의 두 가지가 있다. 스시 전문점에서 카운터(스시바)에서 먹을 때에는 손으로 집어먹는 것이 흉이 되지 않지만 테이블에 앉았을 때에는 반드시 젓가락을 이용해야한다. 스시에는 간장병과 간장접시, 물수건이 함께 놓인다. 물수건은 식사 전에 손을 닦고 싶을 때 이용한다. 간장접시는 스시보다 자신의 앞쪽에 놓는 것이 옳은 위치다. 스시를 먹기 전에 간장을 미리 간장접시에 조금만 부어 놓는다. 간장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부어 놓으면 자칫 스시에 너무 많이 묻어 짜질 염려가 있고 밥알이 부서질수도 있으므로 부족하면 더 부어 먹는 것이 좋다. 간혹 스시에 간장을 묻힐 때 밥알 쪽에 간장을 찍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방법이다. 한꺼번에 여러 종류의 스시를 먹을 때에는 생선마다 독특한 맛을 느끼지 못하고 전부 같은 맛으로 느껴지므로 스시 한가지를 먹고 난 후에는 곁들여 나오는 가리(초 생강)를 한 조각 먹도록 한다. 그러면 입안이 개운해지고 생선마다 독특한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똑같은 스시라도 먹는 순서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지므로 담백한 재료로부터 익힌 것, 마끼(생선알)순으로 먹는 것이 이상적이다.손으로 먹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 고급 초밥집에 가면 '데후키'라고 하여 도마 옆에 예쁘게 접어놓은 물수건을 놓아준다. 손으로 초밥을 먹을 때 밥알이 손에 묻지 않도록 손을 닦아가며 먹으라는 뜻이다. 초밥 생선 위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초밥을 왼쪽으로 눕혀 엄지, 인지, 장지 세손가락을 이용하여 가볍게 잡고 초밥을 세로로 세워 생선 끝에 간장을 찍는다.
    생활/환경| 2005.10.07| 5페이지| 1,000원| 조회(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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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정치사상]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에 걸쳐 일어난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혁명은 사상혁명으로서 시민혁명의 전형(典型)이라고 불린다. 이 경우에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계급으로서의 시민혁명)을 그대로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국민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평등한 권리를 보유하기 위하여 일어선 혁명인 것이다.혁명의 이념은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등에 의해 약 반세기에 걸쳐 배양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루소의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인민주권론이 혁명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왕권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가 완성한 절대주의 체제에 의해서 여전히 국왕친정과 신권이론(神權理論)을 받들고 국가와 인민 위에 군림을 계속하였다. 신권왕정 밑에서는 모든 국민이 단순히 국왕의 신하에 불과하다. 그 위에 소수의 귀족 ·성직자들만이 별도의 특권신분을 구성하고, 국민의 90 %를 차지한 평민층의 근로와 납세에 기생하면서 우아하고 무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모순은 처음부터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였다.그러한 과정에서 루이 16세(재위 1774∼92)의 정부는 미국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졌다.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에 명사회(名士會)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臨時地租)’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귀족 ·성직자들은 국왕의 사법관료 아성(牙城)인 파리 고등법원과도 결탁하고 고등법원이 가진 법령심사권한을 이용해서 왕정고문부의 재정안(財政案)에 저항하였다. 이 왕권 내부(또는 체제 내부)에서 투쟁하는 사이에 재정총감 칼론과 그 후임자 브리엔이 실각하고, 88년 8월에 네케르가 재차 재정총감으로 기용되었다. 그는 고등법원의 요구를 받아들여,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전국 삼부회를 다음해에 소집할 것을 국민에게 확약하였다.1.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프랑스의 전국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회되었다. 의원 총수는 약 600명으로 특권 2신분의러나 그렇게 되면 성직자도 교회를 떠나서 국가와 의회에 새삼스럽게 선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많은 성직자가 선서를 거부하고 맡은 자리를 떠나갔다. 그들 비선서 성직자야말로 최초의 혁명진영에서의 이탈자이며 동시에 최초의 반혁명적 무사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로마가톨릭교를 깊이 신앙하고 있는 시민과 농민을 혁명에서 이반(離反)시키는 것이기도 하였다.6. 바렌 도피사건1791년 4월 초기 프랑스 혁명의 중심인물인 미라보가 급사하였다. 미라보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파리에 갇혀서 불안했던 왕가 일족에게 더욱더 초조감을 안겨주었다. 미라보는 혁명의 추진력이긴 하였어도 입헌왕정을 신조로 삼았고, 그 뛰어난 역량과 안목에 의해서 왕가에게는 더없는 지주(支柱)로 느껴져 왔기 때문이다(더욱이 그는 왕비에게 매수되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그의 사망 후 도피계획이 급속히 구체화되어 국왕 일가는 6월 20일 새벽에 튈르리 궁전을 탈출하여 비밀리에 마차로 동부 국경으로 향했으나, 불운하게도 국경 근방의 바렌에서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당하였다.의회는 왕을 처벌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였으나 민중은 간단히 납득하지 않았다. 이후 공화파와 왕정파 간의 대립이 격화하였고, 파리에서는 왕정폐지론이 급격히 대두하여 자코뱅당과 코르들리에 클럽의 시민은 7월 17일 마르스 광장에서 공화정체 수립의 서명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에게 짓밟혀 많은 희생자를 내고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7. 입법의회1791년 프랑스 헌법제정의회는 프랑스에서 최초의 헌법(이른바 91년 헌법)을 9월 말에 제정한 뒤 해산하고 10월 1일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1791년 헌법에서는 일원제(一院制)의 의회를 갖는 입헌왕정이 국시(國是)로 되었고, 참정권은 규정된 금액 이상의 직접세를 지불하는 성년 남자에 한해서 인정되었다. 입법의희에서는 우익(右翼)의 푀양파, 좌익의 지롱드파가 대립하였다.지롱드파는 베르니오, 장소네, 귀아데 등 남서프랑스 출생의 변설가들과 브리소, 콩도르세 등 파리 출생 이론가의袖)에게 지롱드파가 기선(機先)을 빼앗기는 형세가 되었다. 초조해진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 단속의 명목으로 파리 코뮌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5월 31일 지롱드파의 부당한 체포에 격분한 시민은 대거(大擧) 공회를 포위하고 12인위원회의 폐지, 중앙혁명군의 징집, 귀족출신 장교의 퇴관, 반혁명 용의자의 체포, 노인과 불구자의 구제 등을 요구하였다.6월 2일에는 더욱 많은 시민들이 공회로 몰려들었다. 회의장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지롱드 ·산악 양파 의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에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장내로 뛰어들어 시민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의 제명을 결의하지 않는 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하였다. 그 결과 지롱드파는 간부당원 29명이 의석을 잃고 공회에서 약체화되었다. 이에 반하여 산악파는 독주체제(獨走體制)를 형성하게 되었다.13. 마라의 암살프랑스 산악파는 국민공회를 제패하기는 하였으나, 그들 앞에 어려운 과제가 잇따라 출현하였다. 첫째로, 의석을 잃은 지롱드파 명사들은 그 대부분이 지방으로 잠입하여 각지에서 반(反)산악파의 음모를 계획하였으며, 왕당파와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 파리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는 전쟁에 의해 발생한 물자의 결핍과 식료품의 등귀가 두드러졌으며, 극좌 파괴분자가 활약하였다.산악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농민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취하여, 봉건적 공과(貢課)의 무상폐지,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을 소토지 소유자로 바꾸어 놓는 법령을 발표하였다. 1793년 7월 13일 산악파의 핵심적 지도자인 마라가 자택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산악파도 권력에 안주(安住)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어 ‘방종한 자유의 폐기’로 정책전환을 하였다. 국민공회의 최고기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에는 로베스피에르가 출마하여 입법 ·행정 ·통수의 지령본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인민의 이름에 의한 독재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14. 공포제가 없었다. 과거 1세기 이상 식민지는 각각 식민지의회를 가지고 있었고, 자치도 허용되어 있어 식민지의 영국인은 본국의 영국인과 거의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지 3세의 식민지 정책은 매우 가혹한 것이었고, 따라서 식민지인의 본국에 대한 항쟁은 종래의 권리·자유·특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1763년 7년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조약에 의하여 미국 대륙에서 프랑스 식민지가 소멸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캐나다를 포함한 미국 식민지 전체를 본국의 통제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 첫번째 시도가 1763년에 발표된 국왕선언(國王宣言)이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식민지인은 인디언과 통상을 할 수 없으며 동부의 앨러게니 대지(臺地) 서쪽으로 이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정책이었다. 치안유지와 법률 시행 감시를 위하여 영국군이 상주하고, 그것을 위한 경비분담이 강요되었다.영국 본토의 다음 정책은 중상주의 강화 겸 세입증가를 위한 정책으로서 이것도 식민지인의 이해와 대립되고, 종래의 관행(慣行)을 깨뜨리는 처사였다. 그렌빌 내각은 지금까지 묵과해온 밀무역(密貿易)의 단속을 강화하고 관세징수를 엄중히 시행하고자 1764년 설탕조례(條例)를 시행하였다. 다시 1765년에는 인지조례(印紙條例)를 제정하였는데, 미국의 상인·저널리스트·변호사·목사 등 모든 계층이 ‘대표(代表) 없는 곳에 과세(課稅)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1766년 인지조례는 철폐되었으나 타운센드 제법(諸法)이 이에 대신하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본국의 모든 과세에 반대하였다. 1765년에 제정된 군대숙영법(軍隊宿營法)에 대한 식민지인의 반감은 70년의 보스턴학살사건을 불러일으켰다. 1772년 청원에 의하여 어려움을 제거하려는 방법이 효과도 거둘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식민지인들은 각지에 통신위원회를 설치하고 연락을 취하면서 비합법의 반항운동에 들어갔다.1774년의 보스턴 차사건(茶事件)에 대하여 본국이 보스턴항(港) 봉쇄, 매사추세츠 식민지의 평등한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에 의한 사회개혁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되어 19세기 전반에는 남자보통선거도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잭소니언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아 독립혁명·사회혁명의 이상(理想)도 달성되었다.영국혁명의 발발과 연구사에 대한 고찰1. 머 리 말17세기 중엽의 영국 혁명은 서구 최초의 대혁명이란점 뿐 아니라, 영국의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풍부한 사상적 유산을 남겼다는 점에서도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혁명은 동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자들의 상이한 해석을 통해 아직까지도 학문적인 관점에서 계속 대립해서 투쟁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인지가 불충분한데 기인하기 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차이 그리고, 그것에 다가서는 접근 방식의 차이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영국 혁명의 발발과정을 살펴보고 3세기반 동안 서술되어온 영국혁명 연구사를 살펴서 영국혁명이 가지는 역사상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Ⅱ. 혁명 발발의 과정혁명 발생 이전의 영국에서는 화폐제도의 실시가 전국적 규모로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영주제가 해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yeomanry가 경영 규모를 확대하여 경영자가 되거나 혹은 몰락 노동자가 되기도 했으며 한편 국민적 산업인 모직물 공업이 일어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농촌 지역으로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이처럼 내부적으로는 농 공 분야에서 자본주의로의 발전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Elizabeth 1세의 직인규제법(Statute of Artificers, 1563)을 통해 볼 때 왕정은 국왕 중심의 신분제 사회를 고수하려 했다. 또 외부적으로는 16세기 후반부터 네덜란드가 모직 공업으로 영국과 경쟁하게 되면서 17세기 영국은 심각한 불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주의 하의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갔던 것이다.그리고, 지방 정치를 의존하는 Gentry의 이해에 반대되는 정책을 왕조가 계속 추진함으로서 기
    사회과학| 2005.10.07| 13페이지| 1,500원| 조회(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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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당신들의 대한민국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고...사회전반의 모순들과 부조리한 모습들에 대해 아주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하는 책이다.귀화하여 박노자 라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한 인간의 눈을 통해 주체적으로 우리들의 모습을 비판하였고, 귀화하기 전에는 티호노프 블라다미르 라는 러시아인의 눈으로 바라본 객관적인 우리의 현실이 담겨져 있다.그러나 어떤 부분은 우리의 모습들을 너무 비난하는 것 같아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곤 했다. 이러한 이유가 그런 모습들을 감추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들켜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창피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여기서 우리는 박노자가 이처럼 한국을 비판하면서도 한국을 선택하여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많은 모순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들을 바로 잡는다면 그래도 작은 희망을 가져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비판하였다고 해서 감정적인 자세로만 받아들이지 말고 박노자가 바라본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시각으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다시 한번 바라봐야 한다. 이럴 때에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을 것이다.한국사회의 초상우상숭배, 사대주의 그리고 한국인의 패거리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모순에 대해 지적을 하면서 우상숭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박노자는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밀어닥친 전반적인 국가 사회 위기의 원인이 박정희 집권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젊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를 숭배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물론 박정희 숭배 분위기를 조장하는 극우파 언론과, 경제 사회적 실책으로 이반한 지역 민심을 박정희 숭배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무마하려는 집권층의 책임도 만만치않게 있다고 하겠다. 박노자는 이런 식의 우상숭배를 전근대적이며 극단적인 우상숭배 라 하였다. 우리는 이런 우상숭배라 일컬어지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진정 우상숭배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우상숭배라 하기에는 약간의 과장이 있긴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런 역사의 인물에 대해 과대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는 듯 싶다. 그 다음으로 사대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대주의란 주체성 없이 세력이 큰 나라나 세력권에 붙어 그 존립을 유지하려는 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언젠 가부터 영어 공용화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현대의 자유 민주 사회에서는 언어도 이념, 종교, 대중문화 같은 정신적 사회 현상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시장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즉, 언어는 그 원산지(또는 사용지역)인 특정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사회 경제적 위치에 따라 상품적 가치가 저절로 매겨진다. 한반도에 대한 영어권의 제반 영향이 많아짐에 따라 국내에서 영어 공부 열풍이 일어난 것과 같이, 앞으로 가령 중국어 권의 비중이 부각된다면 어릴 때에 천자문 부터 글을 배우는 옛 풍습이 부활할지도 모른다. 즉, 이런 경향은 순수하게 시장논리에 속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말하고 있다. 나 또한 이렇게 단순히 시장논리에 의하여 영어를 공용화 하자고 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영어 구사력이 국력이라 하는 주장도 있는데 물론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영어실력을 갖추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공용화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부적인 논의 또는 계획성 없이 무조건적인 서구 지향은 절제되어야 한다.마지막으로 한국 종교와 패거리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박노자는 한국이라는 형식상의 민주국가 에서 위헌적 종교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그런 일들-대학 교수 초빙 조건에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만이 자격이 주어진다-을 겪으면서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간섭과 강요로 짓밟던 구 소련의 어두운 모습이 다른 형상으로 여기에서도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를 위한 교육과 개인의 영혼을 위한 종교 신앙을 엄격히 구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특정 종교로 인해 지식인들이 설자리를 잃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대학, 한국 사회의 축소판박노자는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가치 판단을 어떻게 하든 간에, 나도 한국 대학교 라는 범위에 소속된다는 것을 논의의 전제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한국 대학들의 대 사회적 기능들은 중세 유럽의 도시나 천주교 교회, 또는 이 교회의 비호화에 천천히 자라났던 초기 대학교들의 역할과 상당히 흥미로운 흡사함을 보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학교는 적어도 원칙상으로 선후배와 사제지간에 상호 존중과 협력, 일종의 상생 이나 유기적 공동사회 를 지향한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들이 실제로 피붙이보다도 대학교 선후배나 은사들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경향이 강한 사실을 감안하면, 대학교는 분명히 혼란 속의 안정의 섬 이라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리고 적어도 이론상으로 대학교는 일반 사회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전통적인 유교적 덕목들을 표방하였다. 박노자는 하나의 체계인 대학교 교직사회가 전통의 유산을 간직하면서 더 선진적인 미래를 지향한다는 초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몇 년 동안 매체 보도를 통한 일련의 사건-서울대 교수의 여 조교 성희롱 사건, 서울대 치과대학 신규 교원 채용 시 뇌물 증여 사건 같은 독직 사건들-들보다도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3년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목격한 대학교 교직사회 내부의 모습이 더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대학 내에서 일어나는 모순들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그 심각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현재 일부 사학에서 관습화한 기부금 임용 (부정 임용)은 조선 말기의 공공연한 매관매직과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이처럼 과거의 가장 퇴보 적이며 반역사적인 지배층들의 일그러진 면모들을 그대로 모방한 듯한 사학 계의 망령 들에 의해 교수와 학생의 발목이 묶여 있는 한, 과연 우리의 문제는 교육 이라는 한탄의 소리가 그칠 날이 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실로 우리 나라 대학 내에서는 여러 부패, 부정 그리고 비리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지성인을 키워낸다는 대학교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학 계의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는 한 사람이나 일가의 소유물이 아닌 학생 직원 교수의 동등한 공동 참여로 운영되는, 공영 공익형 사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민족주의인가 국가주의인가민족주의란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상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創建) 유지 확대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나 정책원리 또는 그 활동을 말한다. 민족주의는 우리 라는 언어를 비롯한 상징적인 수단으로 생산해 내는 일종의 상징 기제 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속의 우리 (우리 나라로 분류되는 전근대적 정치계의 역사), 현재 공간 속의 우리 (우리 국토로 분류되는 지구의 일부분), 생물학적 의미의 우리 (핏줄 담론), 언어체계로서의 우리 (우리말로 분류되는 언어체계)등 민족주의가 생산해 내는 우리의 모습은 실로 다양하며 국토 국어 국사 국악 등 국 자가 붙은 무수한 미시 담론의 종합인 우리 라는 초대형 담론은 민족주의의 주요 산물이자 민족주의적 사유와 생활의 전제 조건이라 하겠다. 또한 민족주의는 인간의 천부적인 소속감을 이데올로기화해 세상만사를 우리 와 남 의 것으로 철저하게 구분하였으며, 철학적으로 유교에 비해 빈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이데올로기 도구로 이용하기는 편리하였다. 이처럼 우리 와 남 을 구분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 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 와 남 을 구분하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독후감/창작| 2005.10.07| 3페이지| 1,000원| 조회(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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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행정론]유럽안보기구
    유럽 안보 기구1. 국제기구의 결성 동기특정한 국가이익의 추구(Pursuit of particular national interests)-평화와 안보의 증대- 동맹이나 연합체 형성을 통한 영향력 증대-경제 발전을 촉진- 환경보호 및 오염방지, 교통 통신망 확대등 세부적 문제의 해결*궁극적 목표-평화달성과 안보의 증대*** 유럽 안보 기구-유럽 및 대서양 지역의 안정과 평화 달성의 목표-과거 이념 대립을 바탕으로 한 냉전의 양극대결 구조하에서 창설(구 소련 붕괴이후 변화)북대서양 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서유럽 연합 (Western European Union: WEU)유럽 안보 및 협력기구(Organization for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 OSCE)2. 유럽 안보 기구의 창설 배경1)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제 2차 세계대전 직후 1949년 4월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지역 10개국과 미국 및 캐나다가 참여하여 결성-당시 유럽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초강대국인 소련의 침공에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다자간 수단이 채택된 집단 방위 동맹체제2차 세계대전 직후 당시 유럽지역에서 군사적으로 초강대국인 소련의 팽창주의 세력이 공고화영국은 1948년 1월 프랑스 및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 대해 유엔 헌장 제 51조근거로 동맹체 성격을 지닌 하나의 서방국가 연합을 형성할 것을 제의.1948년 3월 17일 브뤼셀 조약 체결(BTO) 1948년 3월 워싱턴 협상- 1949년 4월4일 14개국의 북대서양 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결성)**NATO의 성격: 상정된 적대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지하고 필요할 경우 가입국에 대한 무력공격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도록 고안된 집단 방위 동맹2) 서유럽 연합 (WEU)1948년 브뤼셀 조약의 체결에 의해 창설 . 창설 초기 서방 연합(Western Union)으로 불림.1954년 이탈리아 및 서독또는 로 지칭.3) 유럽안보 및 협력기구(OSCE)-CSCE(conference on security and in Europe)로 불리는 안보 문제 대화협의체인 유럽 안보 및 협력회의에 기반.-1966년 바르샤바 조약기구(WTO) 수뇌회의에서 소련에 의해 공식 제기 되어 을 통해 서방측에 제안.-이 선언을 통해 나토 및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해체, 전 유럽 경제 공동체의 창설과 함께 동유럽의 현상유지 인정을 위한 다자간의 대화 협의체로서 전 유럽 안보 회의의 개최를 제의(소련의 진정한 의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확보한 기득권, 즉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헤게모니유지 정당화의 궁극적으로 중립화를 염두에 둔 2개의 독일 현실을 서방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었다.)-1972년 5월 닉슨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을 계기로 미 의회의 압력에 따라 미국이 제의한 중부 유럽에서의 상호 균형 감군 협상 에 대한 소련의 수락과 NATO회원국인 미국, 캐나다의 동등한 참가. 인권 문제의 의제 포함 등을 조건으로 회의에 참여할 것을 결정.*유럽 안보 및 협력회의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동서 진영간의 우호적인 국제적 분위기를 조성한 중요한 배경- 브란트 서독 수상의 -브란트 수상은 1969년 11월 25일 폴란드에게 국경문제에 대한 회담 개최를 제의했고, 또 같은 해 11월 핵 확산 금지 조약(NPT)에 조인함으로써 소련과 동구에 대한 핵 공포증을 해소시켜 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독소 불가침 조약 , 독 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거쳐 1972년 12월 12일 서독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동서 양 진영간의 상호 접근 분위기 조성.****유럽 안보 및 협력회의알바니아를 제외한 전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NATO16개국, 바르샤바 조약기구 7개국, 비동맹 및 중립국 12개국) 이 참가. 헬싱키에서 본 회담 개최3.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안보 및 협력 기구의 운영 구조 및 주요 활동1)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운영 구조와 활동NATO는 1949년 12개국에 의해 창설된 공동 안보 문제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문제를 논의하고 협력하는 의사 결정 기관이다. NATO 사무총장이 의장을 맡으며 매주 1회 모든 회원국 대표가 회의를 가지며, 1년에 두 차례 이상 외무장관 혹은 정부 수반이 참석하는 회의를 개최한다.-방위 기획 위원회(Defense Planning Committee: DPC)와 핵 기획 그룹(Nuclear Planning Group: NPC): 방위 문제와 관련되는 사항을 다루면서 NATO의 안보 및 방위 정책 내에서 핵무기 및 핵전력과 관련된 사항을 관장한다.-군사 위원회(Military Committee): 회원국의 합참 의장이 그 구성원이 되며, NATO의 공동 방위에 필요한 군사적 조치를 건의하고 산하의 주요 지역 사령부에게 방위 지침을 제공한다. 군사 위원회에는 3개의 지역 사령부가 있는데, 이들은 북회귀선 이북의 북미 대륙 및 대서양과 유럽 내의 회원국의 영토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다.*NATO의 기본 전략1. 대량 핵 보복 전략 (massive nuclear retaliation): 1955년에 창설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WTO)군이 무력 공격을 감행해 올 경우 핵무기까지 동원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보복한다는 전략이다.2. 신축적 대응 전략 (flexible response): 가상적인 무력 공격에 대해 가급적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되 필요시 핵무기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전략이다.3. 이중적 대응 전략: 하멜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안정된 국제 관계의 조성을 위한 외교적 노력의 중요성도 강조하는 대 소련 데탕트 전략을 수용하여 군사적 억지 전략의 유지와 함께 외교적으로 긴장 완화 노력을 병행하는 전략이다.4. 신 전략 개념(New Strategic Concept): 구 소련 붕괴 및 WTO 해체 등에 따른 새로운 안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전략이다.*NATO의 내부적 논쟁-NATO 적용 지역 이외에서의 군사적 임무 수행: NATO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국제 안보 증대 및 평화유지 차원에서 NATO 활동의 확대1960년대 이후 유럽 회원국의 비용 부담 증대를 지속적으로 요구 해왔으며 무기의 표준화 및 국가별 군사적 임무의 합리적 배분 등을 강조하였고, 이는 NATO 내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2) 유럽 안보 및 협력 기구의 운영 구조와 활동-OSCE공식운영은 회의체인 참가국의 외무장관으로 구성된 각료 이사회(Ministerial)를 중심으로 이루어짐. 이 기관은 회원국을 순회하며 매년 1년 이상 회의를 개최, OSCE의 활동방향을 설정하는 중심적인 의사 결정 기관.상부기관-매2년마다 회원국 국가 원수 또는 정부 수반이 참석하는 정상회의하부기관-고위간부이사회, 상설이사회, 안보협력포럼-대사급 대표가 참가하는 평가회의라는 정기적 회의를 운영. 이 회의에서는 OSCE활동을 평가하고 정상회의의 준비 및 각급 이사회 결정사항의 이행 결과를 검토·평가함.-OSCE의 실무기관으로서는 각료 이사회 주최국 외무장관이 맡는 OSCE의장, 전·현·차기 OSCE 의장으로 구성되는 이른바 3두 마차제(Troika)로 불리는 의장단, 사무국 및 사무총장, 소수 민족 담당 고등 판무관, 민주제도·인권사무소(구 자유 선거 사무소)등을 포함.사무국 산하(비엔나 소재)에는 분쟁 방지 센터 설립파리 정상 회담 이후 창설-이외의 기관으로는 각 회원국의 의원으로 구성된 OSCE 의회, 중재 조정 재판소, 군비 감축 공동 협의 그룹, 영공 개방 조약 협의 위원회 등이 있음.-주요 활동으로는 지속적인 신뢰 구축 조치(Confidence-Building Measures: CBMs)의 시행과 군비 감축의 실현이다.***헬싱키 최종 합의서는 바스켓(basket)이라는 3개 부문의 문서로 구성.첫번째 바스켓은 국가간의 관계에 관한 기본 원칙과 신뢰 구축 및 군축을 포함한 안보 영역에서의 국가간의 협력(국가간 관계의 10대 원칙을 천명하고 국가간의 긴장 원인 제거와 유럽 평화 및 안정 강화에 공헌하기 위한 초보적인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두번째 바스켓은 경제·통상·과학 기술·환경 분야에서의 협력세번째 바및 1992년에는 비엔나 문서가 채택되어 다양한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들이 시행되었는데 특히 스톡홀름 협약 이후의 조치들은 이전의 것보다 한 단계 더 강화·발전되었다는 의미에서 신뢰 안보 구축 조치라고 불림.-OSCE 가입 국가들은 1994년부터 부다페스트에서의 정상회의를 통해 범세계적 군사 정보 교환(Global Exchange of Military Information: GEMI) 제도를 앞으로 시행하기로 합의-한편 이러한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의 시행에 힘입어 유럽 국가들은 1990년 11월 21일 CSCE 틀 내에서 (Conventional Forces in Europe: CFE)을 체결. 본래 유럽에서의 군사력 감축은 MBFR(Mutual and Balanced Force Reductions)으로 불리는 상호 균형 감군 협상이 진행된 바 있으나 병력 감축의 방법과 대상을 둘러싼 이견으로 실패.-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OSCE의 활동은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 시행과 군비 감축 실현을 통한 유럽의 안정 증대에 집중되고 있으나, 상기 두 활동이 OSCE 활동 영역의 전부는 아니다. OSCE는 정치, 군사 안보 경제, 인권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유럽 국가간의 대화 및 협의를 수행하고 있다.-OSCE는 또한 성문화된 문서 채택을 통해 신뢰 구축 조치 등 유럽 평화를 위해 지켜야 할 규범적 행동 규약과 안보 문제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역에서 국가간 협력을 위한 장기적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기구이다.-이러한 활동 영역과 기구의 성격으로 인해 OSCE는 그동안 유럽의 국제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됨.첫째, 동서 관계의 유럽화이다.둘째, 참여국 간의 동등한 민주화 성취이다.셋째, 안보 문제에 관한 국가간 협의 의제의 다양화이다.끝으로, 미국과 캐나다에 대한 유럽 세력으로의 편입 및 정당화이다.4. 유럽 안보 기구의 발전 안보 환경 변혁에 따른 적응과 변화유럽 안보 문제를 다루고 있는 NATO 및 OSCE는 각기 독특한다.
    사회과학| 2005.10.07| 6페이지| 1,000원| 조회(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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