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우선 나의 무지함을 고백해야겠다. 지금까지 ‘나침반의 발명 등은 원거리 항해를 가능하게 하였다.’라는 식의 역사교과서 속 간결한 문장에만 길들여져 있었기에 항해란 그저 나침반 하나와 별자리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어렵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동안 얼마나 항해라는 분야에 관해 무지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책의 제목을 ‘회상시계’라고 잘못 적어 놓기까지 했다.(제목만 달리해서 다른 연도에 출간된 경도라는 책을 읽어도 좋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도 해상이란 말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선박의 위치는 2차원에서 표시할 수 있다. 지구상의 X좌표와 Y좌표, 다름 아닌 경도와 위도이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이 시간동안 지구는 거의 360?회전하므로 정확한 시차를 계산할 수 있다면 그에 비례하는 각도를 구할 수 있고 따라서 본초 자오선으로부터의 거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도의 0도선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경도의 0도 자오선은 시간의 모래와 같이 변화하기에 경도의 측정은 인류에게 꽤 오랫동안 풀 수 없는 숙제였다. 두 개의 손목시계만 있다면 두 지점의 시간차를 통해 경도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지만 주위의 작은 힘에도 쉽게 영향을 받는 진자시계와 온도차에 의해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도 느리게 흘러가기도 했던 조악한 초보적 시계가 전부였던 당시로서는 기후의 급 변화와 파도에 의한 큰 폭의 흔들림과 같은 악조건을 지닌 해상에서도 정확히 시간이 맞는 시계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이 책은 인간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시간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노력해왔는지를 보여주며, 결국 ‘존 해리슨’이라는 외로운 천재에 의해 시간이 정복되기까지 그가 행한 노력과 감아내야 했던 역경을 힘 있게 서술해 나가고 있다. 시계라는 기계의 발전사를 단순히 건조하게 서술한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주인공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아 한 개인의 성취기 형식을 빌려서 써 내려갔기에 과학의 발전사를 통해 감동까지 얻을 수 있었다.史實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중해 장악으로 촉발된 유럽 국가들의 신항로개척은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경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른바 ‘대항해시대’를 맞이했던 것이다. 동방무역으로 얻어지는 막대한 이득은 인간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무릅쓰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영국의 소함대에 의해 전멸당한 ‘마드레 데 레우스’라는 포르투칼 상선이 싣고 있었던 많은 양념과 향료가 당시 영국 화폐로 50만 파운드에 달하여 당시 영국 전체 국고 순자산의 절반에 해당되었을 정도로 무역의 이득은 목숨을 걸어볼 가치가 있을 만큼 막대했다.하지만 당시까지 경도를 제대로 측정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었기에 수많은 선박들이 순식간에 침몰하는 일이 많았다. 15~17세기에 배를 몰았던 선장들은 자신들의 배가 본국 항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얼마만큼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가를 재기 위해 ‘죽음의 배 위치 측정’이라는 방법에 의존해야만 했다. 측정기를 배 밖으로 던져 이정표로 삼고 배가 이 임시 이정표에서 얼마나 빨리 멀어지는가를 관찰하여 측정한 배의 항해 시간을, 별을 관측하거나 컴퍼스를 사용해 알아낸 여행의 방향과 함께 항해 일지에 적고 거기에 해류의 영향이나 바람의 변화 등을 종합하여 배의 경도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선장은 일상적으로 경도를 잘못 측정하여, 목적지에 결국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경도의 誤測定은 항해시간을 예상보다 훨씬 길게 만들었고 바다에서의 오랜 체류로 인해 선원들은 괴혈병으로 죽어갔다. 심지어는 ‘상처받은 개의 이론’이라고 불렸던 허무맹랑한 미신적인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시간차를 구하려고 애쓰기도 했다.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자연스럽게 정확한 경도 측정 방식이나 도구의 개발을 강력히 요구했다.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 당시 선박운용이 잦았던 유럽 연안 국가들의 왕실은 경도 발견자에게 상금을 내걸기 시작했다. 달의 움직임을 통해서(베르너) 또는 목성의 위성의 엄폐 횟수를 통해서(갈릴레이) 경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었지만 어느 방법이든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 흔들리는 배에서 사용하기에는 오차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언젠가 천체가 경도를 밝혀줄 것이라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고 연구 또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특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선함대를 가지고 있었던 영국에게 이 경도문제의 해결은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마침내 1714년, 경도 위원회가 출범하고 경도법이 제정됨으로써 본격적인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해결에 나선다. 호이겐스의 실패로 인해 좌절되는 듯 했던 경도 측정에 있어 시계의 이용은 태커의 훌륭한 ‘크로노미터’ 발명으로 전환점을 맞이하나 싶었지만 이 역시 경도위원회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경도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희망은 별에 있다는 뉴턴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져갔고 경도의 정확한 측정은 세간에 불가능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조급해진 뉴턴은 플램스티드의 기록을 몰래 입수하여 출간하면서까지 우주 시계의 발명을 앞당기려 노력했지만 결국 살아생전 진정한 경도상금의 수혜자를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이렇게 시대를 뒤흔든 한 천재의 죽음을 뒤로한 채 다시 새로운 천재가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독학한 시계 제조업자인 ‘존 해리슨’이었다.感想‘존 해리슨’은 경도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상금을 내걸기 이전부터 시계를 이용하여 경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를 해상시계 제작 분야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만든 이유는 역시 경제적인 면에서 먼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최고 2만 파운드(현재가치로 100만 파운드=한화 약 19억 원)에 달했던 막대한 상금은 정교한 시계제작업자로서 지방에서 이미 명성과 어느 정도의 부를 쌓은 그이지만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경제적인 동기가 위인에 걸맞지 않은 부도덕한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과학과 예술의 혁명적 발전은 바로 왕실과 귀족들의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코시모 데 메디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많은 선물공세를 펼치고,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Medicean'이라 명명함으로써 메디치 가의 전속 철학자 및 수학자로 고용되게 되는 갈릴레오의 모습에서 인류문명사의 위대한 과학자이기 이전에 경제적 안정을 꿈꿨던 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된 이후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갈릴레오의 수많은 업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나 H-1의 개발 이후 경제적인 이유를 떠나 장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자족감을 위해 보다 완벽한 시계를 개발하려는 그의 완고한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원회에 그에게 호의적인 인물들이 포진되어 있었던 점과 첫 시험 항해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았던 H-1의 정확성은 그로 하여금 충분히 2만 파운드를 받을 조건을 갖추게 만들었지만 해리슨 그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집된 위원회와의 면담자리에서 그가 만든 해상시계를 비판한 사람은 해리슨 자신뿐이었고, 더 나은 시계를 만들 수 있도록 기금을 선불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개발될 두 번째 시계가 시험 항해에서 돌아오면 H-1과 함께 그것을 양도해야 한다는 계약조건에도 아무런 항의 없이 동의해 버렸다. 조화롭게 작동하는 Time Machine의 제작에 흠뻑 매료된 그는 이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최고의 혁신을 향해 전진하는 Master에 다름 아니었다. 생계에 대한 걱정도 잊은 채 무려 19년간이나 H-3제작에만 매달리는 그의 집요함과 열정은 진정한 장인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일깨워주었고 그에 대해 부러운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저렇게 자신이 좋아하는(또 잘 할 수 있는) 한 분야에 매진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또한 해리슨의 성취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가 사회의 발전을 주도했던 주류계층에 속해 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이 학문 전 분야의 의식을 지배하면서 수공업은 고대 그리스 시대와는 달리 천시 받는 직업군이었다. 3차 번역 시기에 이르러 장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뿌리 깊은 계급적 사회 분화는 아직 남아 있던 터였다. 이런 낮은 지위의 일개 장인이 기존의 천체 관측을 통한 경도 측정 방식 개발을 뒤엎고 시계를 이용한 직접적 시차계산의 혁신적인 방안을 현실화 시킨다는 것에 당연히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천문학 연구를 통한 경도문제 해결만을 시도했었다. 뉴턴 역시 위원회 설립 초기에 정확한 시계의 발명은 앞으로도 힘들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었다.
우리는 ‘천재’에 열광한다. 그들은 평범한 ‘우리’들과 달리 과정을 생략, 또는 축약하는 사람들이다. 뉴턴은 머리에 사과를 맞고는 불현듯 중력 개념을 떠올렸으며, 아인슈타인은 낮에 공무원으로 일하면서도 밤에는 혼자서 연구하여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 굴곡진 인생과 특이한 성격은 보너스다. 이러한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왜 계속해서 천재들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들이 만들어지고 또 인기를 끄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미국의 「프리즌 브레이크」나 한국의 「눈의 여왕」이라는 드라마들은 모두 천재 주인공을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천재의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반복 및 확대 재생산되어 일반 대중들에게 ‘천재들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하지만 지금까지의 이러한 통념은 천재들의 업적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자인하고 신적인 그들에 대한 숭배를 마다하지 않는, 지극히 자기 비하적이고 도피적인 생각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과학혁명 이전 중세를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적 사고(천상계와 지상계 구분)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는 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설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자세히 분석하고 본받을 필요가 있다.이 책은 바로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다. 저자들은 지난 과학의 역사에 있어 수많은 천재들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일컬어지는 두 사람 -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삶과 업적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서 가공된 ‘천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파한다. 또 그들의 과학적 방법론과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독자 역시 그들을 본받아 과학적 창조성을 키워 나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객관적인 사료와 과학 전공자들인 지은이들의 전문적인 지식에 기초하고 있기에 믿을 만하며, 또 아주 가치 있다. 최근 남용되고 있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고전적인 함의에서부터 출발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재정의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내가 초등학교 때 읽었던 위인전 속의 소년 뉴턴은 아주 병약한 아이였다. 요양 차 할머니의 농장에서 살게 된 뉴턴은 텃세를 부리던 그 동네 또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였다. 하지만 병약했던 뉴턴은 그 작고 여린 몸집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덩치 큰 아이에게 끝까지 덤벼들었으며 마침내 영리한 꾀를 내어 녀석들을 혼쭐내 주었던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뉴턴이 할머니의 농장에 가게 된 것은 가정사(어머니의 재혼)에 따른 것이었으며,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했던 뉴턴은 자기보다 큰 아이들이 싸움을 걸어오면 항상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고 도망치는 영리함을 보였다고 한다. 뉴턴의 행동이 ‘위인’에 걸맞지 않은 현실적인 것이었으므로 약간의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출판사의 사정은 이해가 가지만, 어쨌든 이 경우에서처럼 그에 대한 이미지는 후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계속해서 수정되어 왔다.(그의 괴팍한 성격에 대한 이야기들은 과장된 것이 많다.)특히 뉴턴하면 떠올리게 되는 사과나무 에피소드는 진정한 그의 천재성을 신화적 이야기 속에 묻어버린다는 면에서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뉴턴의 근면성과 노력은 18세기 계몽사조기에 등장한 예술적 천재에 대한 통념에 끼워 맞춰져 사장되어버리고 영감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위와 같은 이야기들이 그를 대표하게 되었다. 여기에 「프린키피아」의 난해함과 그의 성격에 관한 오해가 덧붙여져 오늘날 그는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우주의 비밀을 꿰뚫은 천재이지만 무척 괴팍했고, 극소수의 천재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쓴, 신의 세계에 가장 가까이 간 인물이라는 복합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아인슈타인에 관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상대성이론」하면 사람들은 막연한 경외심을 갖고 이야기한다. 그의 이론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었지만 대중들에게 그것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그저 고맙고 경이로운 존재이다. 이로부터 그는 낙제생이었으며 대학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해 특허청의 공무원으로 일해야 했지만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하여 독학으로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정말 사실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의 이론이 발표되었을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 그것을 이해한 사람이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어려웠다거나 우리는 평생 뇌의 10% 밖에 사용 못하지만 아인슈타인은 70% 이상을 사용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까지 널리 퍼졌다.아인슈타인에 대한 신화들은 당시 미디어의 영향이 매우 크다. 20세기 초반 새로운 혁명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언론들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과학 분야에서의 혁명에 흥분했다. 그들은 ‘뉴턴 대 아인슈타인’의 대결 구도를 부각시키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이미 모든 과학계에 진리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의 이론은 너무나 새롭고 어려운 나머지 기존 과학자들도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식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의 이론의 변혁적 이미지는 20세기라는 새로운 세기를 여는 여러 문화적 변화와도 연결됨으로써 원근법과 의식의 세상, 뉴턴주의 우주론이 무너지면서 큐비즘(피카소)과 무의식의 세상(프로이트) 그리고 상대성이론이 동시에 펼쳐지게 되었다.책은 이러한 신격화가 후계자들과 대중서, 언론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업적이 같은 시대 과학자들에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어려웠던 것도 아니며 이들이 기존의 과학적 업적과는 무관하게 고립된 채로 혼자서 우주의 신비를 사색하던 과학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번뜩이는 순간적 영감으로 난제를 해결했던 것이 아니라 엄청난 노력과 집중력, 끈기, 남다른 문제포착력을 보였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들의 창조성이 진정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인지 제시하고 있다.두 사람의 가장 큰 공통점은 끈기와 노력이다. 이러한 덕목은 한순간의 직관에 의한 문제해결이라는 지금까지의 이미지와 대극을 이루는 것이다. 1662년 케플러의 「광학」을 읽으면서 광학에 대한 관심의 싹을 키우기 시작한 뉴턴은 10년이 지나서야 빛의 구성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논문을 발표했으며 그의 광학에 관한 모든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광학」은 그로부터 30년이 더 지난 1704년에야 출판되었다. 결국 그는 빛이라는 문제에 대해 거의 평생을 끈질기게 연구해갔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내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전자기유도현상에서 자석이 멈춰 있고 전기회로가 움직이는 경우와 멈춰 있는 전기회로 속에서 자석이 움직이는 경우를 구분할 경우 갈릴레이의 상대성과 근본적으로 모순된다는 것에서 상대성 원리를 착안해 내었지만 그 모순의 명백한 증거인 빛의 속도가 진공 속에서 일정하다는 사실의 이유를 쉽게 밝혀낼 수 없었다. 마침내 특수상대성 이론을 정립하기까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몇 년 동안 해결책을 더듬더듬 찾아나간’ 과정, 즉 끈질긴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이렇게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각자 끈질긴 노력을 통해 혁명적 과학을 낳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두 사람 모두 당시 기존의 과학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뉴턴은 당시 최신학문이던 데카르트와 기하학과 광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특히 대학 시절 수학의 입문서인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을 읽지도 않고 곧장 데카르트의 「기하학」에 뛰어들었다. 이런 탓에 데카르트의 책을 읽다보면 당연히 모르는 부분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는 막히는 부분을 염두에 둔 채 앞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고 또 막히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식으로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을 반복해서 이해했다. 이러한 반복해서 읽기는 상당히 많은 시간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 나타났던 끈질긴 노력은 이미 그가 수렴적 사고를 위한 기존지식의 습득 과정에서부터 나타난 것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정규 교과과정 이외의 분야도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헤르츠와 헬름홀츠의 책, 로렌츠와 볼츠만의 논문 및 마흐의 역학서를 스스로 읽었으며 푀플의 해설서를 통해 맥스웰의 이론을 공부했다. 이렇게 익힌 이론들은 자신이 직접 실험을 통해 체험해 봄으로써 이해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그 스스로도 “나는 직접 관찰과 직접 접촉에 매혹되어서 대부분의 시간을 물리실험실에서 보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또 학사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에서 그가 가장 높은 평균점수를 보였다는 사실은 당시 교과과정이 담고 있던 이론들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다는 것을 증명한다.기존 체계에 대한 이런 깊은 이해 속에서 그들은 그 체계 속의 근본적 모순을 포착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가 그들의 창조성이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 곳이다. 당시 기존 지식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과학자들이 그들 이외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근본적 모순점을 찾아낼 수 있었던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그 도구는 실험이었다.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서 둥근 백색광의 모양이 변한다는 사실에서부터 빛에 대해 새로운 질문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극단적인 상황 하에서의 사고실험을 통해 기존 이론의 모순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로부터 광학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 해결을 위해 보일의 실험과학을 사용하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묻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 아인슈타인은 이론물리학자이지만 ‘(사고)실험’을 적극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창조성을 엿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러한 사고실험이 어린 시절과 공무원 시절에 기계를 많이 접했던 경험과 대학시절의 수많은 실험 경험으로부터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주의 망명자들. 지금까지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일 게다. 고등학교 국사책 뒤 쪽에 나오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 압록강을 건넜던 이회영 일가, 만삭인 손부가 만주로 가던 길 도중 출산하자 왜놈들이 강점하고 있지 않은 땅에서 손자를 보게 된 것에 기뻐하는 김대락을 읽으면서 슬프지만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단체가 만들어지고, 또 다양하게 변화되는 과정과 그 구성원들의 상세한 면모를 구체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고증하는 객관적인 자료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후반부에서는 망명자들의 사상과 정서를 알리는데 초점을 두어 당시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가깝게 볼 수 있었다. 방대한 자료와 답사를 통한 철저한 고증과 추측은 작가의 분석적이고 치밀한 면을 보여주지만 작가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에 주력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그런 것은 연구자가 아닌 이상에야 모른다 치더라도 당시 망명자들의 생활과 생각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게 해주고 또 이로써 독립운동이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느끼게 해주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나 싶다. 이런 면모는 글 전반에 드러나고 있는 신흥무관학교와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글쓴이의 애정 어린 자취를 통해 엿볼 수 있다.이러한 면을 생각해 볼 때 우선 작가는 성공을 거두지 않았나 싶다. 무관학교를 나오고도 싸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방황하던 젊은 독립투사들의 분노와 좌절, 중국인들의 적대적인 모습에 중국 관리들에 아부까지 했던 망명자들의 슬픔이 책 속에 그대로 들어 있는 듯 했다. 이는 글 곳곳에 보이는 지은이의 개인적인 느낌을 적은 문장이나 읽는 이를 의도적으로 감상에 빠뜨리려는 구절 등에 의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하지만 후반부의 감상적인 부분에서도 항상 망명자들의 수기나 당시의 일제 기록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작위적인 느낌은 전혀 주지 않여 조국 광복을 기하자는 주장은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의 기본 전략이었다. 이는 이상설이 이회영에게 했던 말을 토대로 하고 있는데 당시 운동가들이 상당한 외교적 판단력을 갖고 있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후에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나 비록 실패했지만 계획을 실행하려 하는데 이미 그러한 전운을 감지하고 준비에 들어갔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이 미국, 멕시코 등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행해져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이회영, 이상룡과 같은 분들이 진보적 지식인 계층이었던 것이 더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이들은 당시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서양의 진보적인 학문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세계적인 시각을 갖게 되어 보다 현실적인 상황 판단력을 갖게 된 것이다. 실제로 유인석과 같은 복벽파들은 열악한 무기와 인력 등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무력항쟁을 주장했다. 서간도의 독립 운동가들도 무력투쟁을 중요시했지만 게릴라전을 병행하면서 인력양성, 화기 완비와 같은 체계적인 준비 후, 전쟁이 발발하면 본격적인 독립항쟁에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두 방식 모두 한계에 부딪치게 되지만 서간도의 방식이 보다 현실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항일독립운동자들이 독립군 기지를 만주로 정한 이유는, 이 지역이 한반도에 인접해 있고 개간할 땅이 많으며 배일적인 이주자들이 많고 중국과 한국이 가까운 사이라는 점, 권력의 공백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와 함께 역사적으로 부여ㆍ고구려ㆍ발해가 건국한 지역이라는 점 때문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기가 쉽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만주에 터를 잡으면서 중국인들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중국의복을 입고 단발을 하면서 황제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다는 독립운동자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독립운동가라고 하면 절대로 굽히지 않는 강인함과 민족적 자존심을 떠올렸었기에 더욱 그랬다. 몰론 그렇다고 해서 지조가 없는 것으로 그분들을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의 의구심과 배척굳은 인식이 새로운 문물의 전파와 나라를 뺏긴 상황이 맞물려 많이 변화된 것을 실제로 알 수 있었던 에피소드였다.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이석영 일가와 원세개가 친분이 있었다는 점이다. 합니하에 처음으로 무관학교를 세우면서 덕분에 땅 구입문제를 쉽게 해결하는데 이후에는 그의 도움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16년에 죽기는 하지만 1910년 대 황제까지 칭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던 그에게서 좀더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나 생각이 든다. 이석영의 재산이 워낙 많아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원세개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 더 이상의 도움은 받기가 싫었던 것인지. 어찌되었든 이석영이 신흥무관학교를 건설하는데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돈으로 40만원이면 내 계산으로는 900여억 원이 되는데 정말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가산을 쏟아 부은 이후, 이석영은 노년에 기아선상에서 두부비지로 연명하다가 아우 회영이 일제의 고문으로 서거한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가 주는 감동은 한층 크다.2. 독립운동의 고통이렇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뿌리를 내린 만주 독립운동 기지는 서전서숙-신흥무관학교(전기ㆍ후기), 백서농장의 젊은 투사들의 양성기지와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대한통의부로 이어지는 통합ㆍ자치단체로 그 맥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이는 항상 단체를 만들어 힘을 모아야지만이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3ㆍ1운동이나 세계대전과 같은 사건들의 발발이 그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10년과 1920년을 거치면서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서간도의 모진 자연환경, 경제적 어려움, 내부갈등 등에서 빚어지는 고통은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차원의 것들이었다.젊은 독립투사들이 교육을 마친 후에도 즉각 싸울 수 없는 방도가 없다는 것에 느꼈던 절망감은 양기탁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 중 총이나 혹은 폭탄 생각이 간절하여 견딜 수 없어 흔히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으로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의 소식에 신흥무관학교의 관계자와 졸업생들이 느꼈을 벅찬 감정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미 만주로 건너오면서부터 일본과 열강들 간의 전쟁을 기회로 일어서리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전쟁 발발의 소식에 독립이라는 두 글자가 그들의 가슴을 마구 방망이질 해댔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중국이 21개조를 수락하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중국 침략의 길을 닦아놓았다. 대전이 발발하면서 오히려 일제의 위세가 한층 강해졌던 것이다. 백서농장을 만들면서 가졌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런 실망감이 싸우려는 힘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키고 의지를 약하게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극한적인 상황과 정신적인 충격이 맞물려 백서농장에서의 삶은 더욱더 힘들게만 느껴졌을 것이다.서간도 지방의 망명자들에게는 추위와 빈곤이 무서운 적이었다. 왜놈보다도 독하다는 서간도의 추위는 초가을부터 내린 눈을 겨울을 지나 초봄까지 녹지 않게 만들어 온 천지가 얼음이었다. 털모자가 없어 명주수건을 뒤집어쓰는 것이 전부였으며 나무껍질로 만든 신으로는 동상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또 먹을 것이 없어 강냉이를 사다가 멀겋게 죽을 쑤어 먹었다 하니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1920년 이후 일제의 만주에 대한 탄압이 더욱 거세짐에 따라 독립운동자들의 가족들의 죽음이 잦아졌고 만주사변으로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한국인들의 처지는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마적들과 비적들이 한국인을 작은 왜놈으로 보고 살육을 자행하고는 했다. 이에 많은 독립운동자 가족들이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난민처지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게 되었다. 여기서 지은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후방기지가 없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인의 독립운동자 가족들에 대한 무관심과 지원하는 후방기지가 없어 그들만이 대를 이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지은이가 예를 들고 있는 레지스탕스의 경우 신한 마을에서 두 단체가 세비를 각각 가져가 불만이 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통일된 후방기지가 만들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또한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서유럽에서 공동연대를 구축했던 많은 나라들은 서로 간에 동질감을 갖고 있다. 나라는 다르지만 같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고 게르만 족인 독일에게 공통의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대가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중국과 거리는 가깝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더군다나 청은 오랑캐이다.) 중국은 나름의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록 같은 피해자라 할지라도 중국 쪽의 지원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중국은 내분을 겪고 있기도 했다.시민의식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와 같은 서유럽국가들은 자체적인 시민혁명을 겪으면서 자유와 민권에 관한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노비가 남아있었던 우리 국민들이 자유를 억누르는 일제에 저항하는 정도는 서유럽국가들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수준도 뒤떨어 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허은과 이은숙 등이 고국에 돌아왔을 때 좋은 집 자식들이 독립 운동한다고 그 많던 재산 다 팔아먹었다. 며 눈에 보이게 힐책했다는 이야기에서 이런 부분들을 느낄 수 있다.지은이도 언급한 일제의 극악무도한 폭정도 상당히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자를 숨겨주거나 지원하면 그 마을을 통째로 태워버리고 마을사람들을 생매장하거나 한데 모아 놓고 목을 자르고 태워 죽이던 모습을 보고나서도 독립운동자들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대부분의 일반 백성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독립운동자가 어려움에 처해도 외면했을 것이다. 순진한 보통 사람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따라서 이해동 가족이 하얼빈 일본 영사관에서 설치한 수용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국내외의 한국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3. 절반의 독립운동자.
영화 < THE WALL >> 의 줄거리와 제기되고 있는 문제점이 영화는 낙태의 상황에 놓여진 세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며선생님께서 논의하고 싶은 대목만 줄거리를 정리하라고 하셨지만 이 영화 자체가 낙태를 소재로 하고 있고 세 편의 짧은 영화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줄거리를 언급하였습니다.1952년의 작은 마을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도널리 부인은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간호사였지만 남편의 전사로 졸지에 미망인 신세가 되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괴로워하던 그녀는 자신을 달래주던 남편의 동생과 순간적인 감정으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고 임신 사실을 철저히 은폐하며 병원의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외면 받고 결국 직장 동료의 소개로 자신의 집에서 불법 중절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다. 소독도 되지 않은 수술기구들, 수술 후의 부작용으로 인해 그녀는 계속되는 하혈로 고통스러워하고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며 비명을 지르던 중 집으로부터 카메라가 멀어졌다 클로즈업되면서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된다. 때는 1974년, 단란한 가정이지만 바타거 부인은 자신이 또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대학까지 다니고 있던 그녀는 이미 네 아이의 엄마였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임신 소식은 반가울 리 없다. 낙태를 심각하게 고려하던 그녀였지만 결국 아이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 때문에 출산을 하기로 결정한다. 세 번째 이야기 역시 같은 구조로 시작된다. 다만 시점이 1998년이 된 것 뿐이다. 자신의 대학교수와 불륜관계였던 크리스는 낙태를 하기로 결심하지만 죄책감 때문에 매우 망설인다. 결국 그녀는 중절을 받으러 병원으로 향하고 수술을 마치자마자 여의사가 낙태 반대주의자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이 영화에서는 과연 낙태라는 것이 근친상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에피소드 1), 임신부가 미혼일 경우(에피소드 3), 부모가 아이를 키울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경우(에피소드 2), 가족 전체의 문제가 될 경우(에피소드 1, 2)와 같은 상황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경제적 여건에 의한 낙태의 필요성은 일반사람들로 하여금 낙태 시술을 찬성하게 만드는 찬성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이 영화에서도 위와 같은 경우에 낙태를 해도 된다는 입장 쪽에 서 있다는 느낌이 진하게 풍겨 나온다. 낙태 수술을 해주길 원하던 도널리 부인에게 "일을 저지르기 전에 미리 이런 경우를 생각했어야지." 라며 핀잔을 주는 의사, 또 임신했다는 바타거 부인의 말에 "지금 농담하는 거야?" 라며 반문하던 남편, 크리스에게 돈을 쥐어주며 "나에게 뭘 기대하는 거야. 늦어서 가 봐야 돼." 라고 말하던 교수의 모습으로부터, 또 이 영화의 감독이 헐리우드의 두 튀는 여성감독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영화의 메시지는 남성 우월주의에 둘러싸인 사회의 벽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의 목적이 생명의료윤리적인 입장에서 낙태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것임을 환기하며 낙태 문제에 대해 더욱 폭넓게 접근하고자 한다.위 상황 중 근친상간으로 임신된 경우의 낙태 허용은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강간과 근친상간이 원인이 된 임신은 그 태아가 나중에 태어나더라도 고아원으로 보내지거나 결국 입양되게 됨으로써 불행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고 산모의 건강을 해할 우려 또한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많은 반대론자들조차도 이런 경우의 낙태는 인정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은 그러한 생명조차 소중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낙태 허용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난 한 사람이 의료진에게 태어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불행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칠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그들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낙태, 사회적 경제적 이유로도 허용해야 하는가?그렇다면 위 문제를 제외하고 실제 논점이 되는 것은 여성과 당사자 가족의 사회적, 경제적 이유를 포함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낙태를 전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거나 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 이념 논쟁은 상당히 소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낙태는 어느 사회에서나 늘 있어왔으며 사회적, 의학적인 측면에서 낙태가 전면 금지 될 수 없음은 논리적으로도, 또 윤리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사회적, 경제적 이유로 낙태를 허용해야 하느냐의 문제는 결국 산모의 자율권(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 사이의 충돌로 귀결되어 진다. 이런 문제는 또 많은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야기한다. 그 중 가장 혼란스러운 문제는 낙태를 허용한다하더라도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해주어야 하는가하는 문제이다. 임신기간 중 어느 한 시기를 정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이 너무 임의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임은 자명하다. 태어나기 일분 전의 태아와 태어난 직후의 태아가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낙태반대론자들의 주장대로 14일 이전의 전배아조차 유아나 어린아이 못지않게 잠재력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물학적인 논의에서 벗어나서 도덕적 의미에서의 인간, 진정한 인격체로서의 인간이냐에 대한 논의를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낙태찬성론자들이 이런 입장에서 낙태를 옹호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조만간 의식이 회복될 것임이 기대되는 환자나 잠을 자고 있는 사람도 현재 인간으로서의 판단 능력, 논리적 사고 능력이 없으므로 위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조차 죽여도 상관없게 된다는 이상한 결과가 도출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그들의 생명권이 존중받아야 하는 산모의 자율권과 유사한(비슷한 지위에 있는) 권리와 충돌하는 경우가 아니라는 점만 생각해 보아도 명백히 논점에서 빗나간 것임을 알 수 있다.또한 여기서 설사 태아가 도덕적, 진정한 인격체로서의 인간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많은 경우 태아의 생명권이 산모의 자율권을 능가한다거나 명백히 우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물론 많은 반대주의자들은 인간의 생명권은 세상의 그 무엇도 도전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에 선택권과의 충돌 문제에서 태아의 생명권이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산모의 선택권이 그야말로 단지 산모의 인간으로서의 자율권이라고 단정 지어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생각이다. 선택과 생명이 충돌하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생명이 더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낙태 문제의 경우 매우 많은 상황에서 선택은 생명을 위한 선택이 되거나 가족 전체의 문제가 되기 마련이므로 선택권이 생명권에 뒤진다고 보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태아가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는 그대로 생명과 생명의 충돌이 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영화 속의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경우 태아가 태어나면 넉넉지 않은 가족의 경제 사정에 더욱 큰 부담이 된다. 바타거 부인은 다니던 대학을 포기해야 하며 그의 딸 역시 좋은 사립대를 포기하고 좀 수준이 떨어지지만 등록금이 싼 주립대를 가야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가족 전체의 문제다. 한 생명의 탄생으로 다른 가족들이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데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면 과연 그런 상황 속에서도 태아의 생명권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바타거 부인은 뒤늦은 나이에 비로소 찾게 된 자신만의 삶을 또다시 포기해야 하며 딸 역시 좋지 않은 대학을 가게 돼야 됨으로써 그녀의 인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영화 속 대사처럼 태아를 위해 가족들 모두가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아직 우리 사회는 가부장적인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성에 비해 여성의 성적 행동과 관련된 실수나 잘못에 대해 바라보는 눈이 결코 곱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거의 강제적으로 산모들을 미혼모로 만들 수는 없다. 결혼 없이 낳은 아기는 그네들의 삶을 많은 부분 제약할 것이고 직장을 구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역시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은 많은 미혼모들에게 큰 경제적 문제로 변화되어 다가오게 된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 많은 아이들이 버려질 수도 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그런 경우 아이를 우선 낳고 입양을 시키는 등의 대응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현재도 많은 입양아들이 갈 곳이 없어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며 그롤 인해 우리나라는 영아 수출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소리까지 얻게 되었다. 또한 동양인이나 흑인 아기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 것인가.
서론경제 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요즈음의 학생들은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필요한 것을 마음껏 소비하며 생활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과 함께 사업자간의 무한 가격 내리기 경쟁으로 한 때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이동전화는 2001년 11월 현재 가입자수가 2700만 명을 돌파했다. 최근 보조금 폐지로 가입자수의 증가 추세가 멈칫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3명 중 2 명은 이동전화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우리 일상생활에 있어 점점 필수품이 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2029세대라고도 불리는 대학생과 젊은이들에게 있어 이동전화는 더 이상 의사소통의 도구로써만이 아닌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동전화로 채팅을 하고, 게임을 즐기며 주식까지 사고판다. 무선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거나 작은 액정화면 속에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내 손 안의 작은 세상'이라는 광고 문구가 전혀 손색이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이런 이동전화의 홍수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그야말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지는' 이동전화 소리나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것 등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되었고 경제력 없는 중 고등학생들에 대한 무분별한 가입 허용으로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했으며 세대간, 개인간의 장벽을 더욱 두텁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또 하나의 지켜야 할 공중도덕으로서 이동전화 사용 예절이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고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 마련이 시급하게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다른 문제점들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세대 간, 개인 간 사이가 멀어지는데 이동전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한해서 실제적인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보겠다.본론1. 세대 간 거리를 넓히는 이동전화문화의 영향현재의 젊은이 층은 소위 영상세대라고 불리 울만큼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 전자오락 등의 영상매체에 익숙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글을 읽는 것 보다는생소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몇 년 전 흔히 삐삐라고 불렸던 호출기 시대부터 나타났던 현상이다. 삐삐와 PC통신의 보급과 함께 등장했던 '특수 문자 메세지'들이 최근 이동전화 문자 메세지 서비스 확대와 함께 아예 독특한 '화법'으로까지 발전하여 국어의 새로운 한 부분으로까지 자리 잡을 기세로 무섭게 젊은이들 사이에 번져나가고 있다. 문자메시지 제1세대인 삐삐세대는 '1010235'(열렬히 사모해)나 '1 177155 4'(I miss U) 등과 같이 주로 숫자를 이용해 비교적 단순한 의사를 전달했으며 제2세대인 PC통신세대는 컴퓨터자판상의 특수문자를 활용, '^ ^'(웃는 표정), ': 〈'(화난 표정), ㅠ.ㅠ(우는 모습) 등 다양한 표현력을 보여주었다.제3세대인 이동전화세대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각종 특수기호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일종의 '사이버상형문자'를 만들어내 이를 웬만한 대화까지 가능한 '사이버은어'로 발전시키고 있다. 사이버상형문자의 경우는 'Vm '(여우)나 '(^(00)^)'(돼지), '〉(*/*/*)〈'(사탕)에서 '〉(:)([])'(텔레토비)와 ':^B'(서세원), @^.^@(아이 부끄러워), (- -)(_ _)(꾸벅 인사)까지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하다.또 영상세대답게 움직이는 모습까지 포착해 표현한다.(- -)(_ _)(-_-) 이런 머리가(- -)(_"_)(^ ^) 이렇게 바뀌었어요()()()()()()()()(") (") (") (")발모제 CF와 도리도리 춤을 추는 토끼를 형상화한 이러한 메시지들은 뛰어난 표현력으로 웃음을 머금게 만들고 연인들 사이에서는 '함께 별을 보는 연인들'을 나타내는 '_&&___★'과 같은 아름답기까지 한 메세지들이 오고가며 이는 詩情까지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뛰어난 감각을 보여준다.최근 문자메시지들을 주고받는 주위의 2029세대(친구들 및 선후배)를 살펴보면 문자메시지가 그들의 의사소통 수단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는 모습이 뚜렷하다. 거꾸로 놓고 읽으면 '사랑해'라는 글자와 비슷하게 보이는 'H워얼%%%%%%%'가, '우리 변치 않는 사랑을 하자'는 뜻으로는 키싱구라미를 나타내는 '〉))))〉〈(((〈'이 등장한다.http://hill.shingu-c.ac.kr/~keep7142/messegi.html에서 구체적인 문자 메세지들의 예 참조이제 그러한 '문자 메시지들을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하는 것이 구세대와 신세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기성세대들은 이러한 문자메세지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이동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만 대부분 정말로 '전화기'의 용도로만 사용할 뿐 문자를 주고받거나 무선인터넷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위에 제시한 여러 시각화된 문자를 보더라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물론 모든 기성세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왜 말을 이상하게 하느냐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은 국어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시각화된 문자 메세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단지 간편함과 재미를 위해 '안냐세염'(안녕하세요), '이궁 짱나'(아 짜증나) 등과 같이 국어를 오염시키는 문제 역시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기존세대와 신세대간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는 데에 있다. 구세대는 신세대들의 '간편 시각 문화'를 맹렬하게 질타하고 신세대들은 그런 구세대를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지식한 어른'들로 치부하며 더욱 그들만의 세계에 열중하고 있다.사실 '세대간 갈등'은 고대 이집트의 비석에도 '요즘의 젊은이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쓰여 있었을 정도로 오래된, 그리고 어느 사회에서든지 늘 있어왔던 사회문제이다. 이 유서 깊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들이 신세대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들이 그러한 문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된 사회적 배경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동전화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신세대들에게 안겨준 것은 바로 기성세대 그들이 아닌가. 그들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삶의 방식이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각할 때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이동전화 문자 메세지 문화와 같은 현상을 이해하고 많은 부분을 그대로 수용해 주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국어 오염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제동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지금의 어른들도 몇 십 년 전에는 그들의 부모로부터 그렇게 욕을 먹어가며 장발에 미니스커트를 즐기지 않았는가.2. 개인 간 거리를 넓히는 이동전화문화의 영향요즘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보면 많은 젊은이들이 손에 작은 이동전화를 들고 무언가에 골몰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혼자 피식피식 웃고 중얼거리며 그들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거나 무선인터넷을 통해 정보검색, 게임, 채팅 등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동전화를 통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보니 이동전화를 또 하나의 자아로까지 인식하여 그에 완전히 중독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신세대들은 이동전화 단말기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속이 환히 비치는 '누드폰'이 있는가 하면 색깔을 입히고 무늬를 곁들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다닌다. 한두 개의 액세서리는 보통이고 이동전화 전체를 인형에 끼워 사용하는 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목걸이를 걸어 항상 몸에 꼭 붙여 다니기도 한다.몇 달 전 TV 프로그램에서 이동전화에 중독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동전화를 강제로 빼앗고 주지 않자 그들은 TV 리모콘으로 문자를 보내는 행동을 하거나 몇 시간 후에는 상당히 불안한 모습, 일종의 노이로제 현상을 보였으며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과격한 행동까지 보였다. 이는 이동전화가 더 이상 의사소통의 도구로써만이 아닌 밖의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켜주는 신체의 일부분으로까지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꼭 중독된 사람들이 아닌 보통의 우리들이더라도 이동전화를 집에 두고 오거나 배터리가 다 되어 전화를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상당한 불편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동전화는 이제 자아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게 되어 버린 것고립시키는 측면이 훨씬 강하다. 이렇듯 이동전화로 인한 개인 간 단절은 신세대들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데 익숙하지 못한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실제로 요즈음 신학기 첫 과모임이나 수업시간 중 조별과제를 위한 모임같이 서로 모르는 사람과 대면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많은 이들이 이동전화로 문자를 보내거나 어디론가 통화를 시도함으로써 어색한 분위기를 탈피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 모임에서는 정말로 공적인 대화만 오갈 뿐 사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기 어려워졌고 형성된다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어디서든 자신이 아는 사람과 통화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어진 이동전화가 사용자로 하여금 현실에서의 어려운 인간관계 맺기를 주저하게 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끔 하는 부정적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 것이다.이동전화가 초래한 개인 간 단절 현상은 자연스럽게 신세대들이 '끼리끼리' 문화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어디서든 자신과 친한 사람과 연락이 되다보니 그들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끼리끼리' 문화는 이동전화문화의 단지 기존 인간관계의 돈독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또 다른 측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동전화사업자들이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번호별 커뮤니티의 등장이다." TTL존, TTL캠프 SK텔레콤이 서울의 신촌 강남 압구정동 명동 등과 부산 서면 부산 대, 대구 동성로 등 전국 14곳에 문을 열었다. TTL존에서는 PC와 프린트 팩스 등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DVD영화 감상, 동아리 방 서비스 등도 쏠쏠하다. 전국 13개 대학 캠퍼스 내에 설치된 TTL캠프에서도 TTL존과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Na+AZIT(나지트) KTF가 운영하는 나지트존은 현재 서울 대학로 압구정동 등 총 10 군데에 있다. 인터넷 서핑, 게임, 화상 채팅은 기본이고 테마 영화 관, 포토 갤러리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매월 16일에는 '공짜' 이 벤트도 열린다.드라마하우스 여성전용 문화생활공간으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