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의 생애를 따라 걷는 여행"Urschweigen starrt... Es waltet Finsternis...Da bricht ein Strahl aus zackigem Wolkenriss,Greift Weltentiefen aus dem blinder NichtseinBaut Raume auf, durchwuhlt mit Licht die Nacht...""태고의 침묵이 응시하고... 온통 주위가 캄캄한데...구름사이로 뚫고 나오는 한줄기 빛눈먼 미물은 심연에서 구해주고공간을 만들어주며 빛으로 밤을 몰아낸다. "앞서 언급한 시는 헤르만 헤세가 바흐의 BWV. 565를 듣고 쓴 시입니다. 저의 생각과 느낌을 너무나 잘 대변한 듯 하여 인용하였습니다. 이 곡을 몇 년 전에 직접 피아노로 연습한 적이 있었는데(원곡은 파이프 오르간) 초반부터 느껴지는 웅장함과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듯한 완벽한 대위법은 헤세가 표현했듯이 천지 창조, 우주의 질서를 표현 한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이번 유럽고도의 역사와 문화라는 과목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은 그 동안 막연하게 좋아했던 바흐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그가 살던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상황은 어떠하였으며 어떤 상황에서 그 주옥 같은 작품들을 작곡하였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한 지식과 정보를 얻는데 있어서 직접 여행을 하는 것을 전제로 여행 계획서를 짜고 그 장소에서 어떠한 것을 느낄 수 있는가를 상상해 보는 것은 다른 어떤 방법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됩니다.바흐에 대해서 조사를 해보면 그의 생애와 작품은 그가 의도 했건 안 했건 간에 교회 즉 종교가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가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한 때 교회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근본적으로 그의 음악은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따라서 바흐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당시 대략적인 독일의 역사와 함께 그 당시 종교가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것을 조사해 보아야 하후 결국 사랑을 택하게 됩니다. 북스테후데와 그렇게 이별하고 아른슈타트로 돌아온 바흐는 휴가를 무단 연장했다는 이유로 해고됩니다.그리고 아른슈타트의 근교의 도른하임교회에서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4. 뮐하우젠 – 아른슈타트에서 해고된 바흐는 뮐하우젠의 성 블라우지우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게 됩니다.뮐하우젠에 대한 정보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터넷이고 서점이고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 찾아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도시에서는 신혼초기의 바흐가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입니다.5. 바이마르 – 1708년 바흐는 이 곳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약을 하게 됩니다.당시 바흐가 살았던 집은 지금은 자취가 없고 단지 길가 벽에 바흐가 살았다는 명비만이 있다고 합니다.바이마르는 독일 문화의 중심도시이기 때문에 바흐의 생애를 따라가는 여행을 하면서 조금씩 옆을 돌아봐도 좋을 듯 합니다. (쉴러, 괴테, 리스트 등)6. 쾨텐 – 이 곳은 바흐가 근 10년을 살면서 수많은 명곡을 남긴 곳입니다.바흐는 마리아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모두 7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3명을 일찍 보냈습니다. 1720년에는 아내 마저 잃고, 그 후 남은 네 아이를 데리고 살게 된 바흐는 일터에서 돌아온 후 밤늦도록 아이들의 식사 준비와 집안일까지 해야 하였습니다. 그런 바흐를 동정한 여인이 안나 막달레나로 이 곳 쾨텐에서 만나서 재혼하게 됩니다.그 두 여인과의 사이에서 20명의 자녀를 얻지만 12명이나 먼저 죽었습니다. 바흐는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사랑하는 처를 잃고, 다시 자식의 죽음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육친의 죽음을 몇 번이나 맞은 바흐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흐는 육친의 죽음을 맞을 때마다 “하느님의 영광”을 부르짖고 곡을 썼다고 하는데 그의 음악이 종교적인 것은 힘겨운 그의 삶에서 하나의 도피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인구 3만 5천의 작은 고도 쾨텐에서는 쾨텐 궁전을 볼 수 있습니다업한 바흐는 음악가로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 해 8월에 튀링겐 지방의 장게르하우젠 이라는 소도시의 오르가니스트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사정에서인지 실현되지 못했으며, 1703년 4월에 바흐는 바이마르의 궁정악단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취직했습니다. 겨우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이곳에서 바이올린 연주의 경험을 쌓았으며, 독일 바이올린의 대가 베스트호프를 알게 되다. 이것은 훗날에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곡의 기초가 되었습니다.(개인적으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2번 샤콘느를 가장 좋아합니다.^^ 추천합니다.)하지만 바흐가 원했던 것은 궁정악사가 아니라, 집안 가족이 거의 모두가 차지했던 교회오르가니스트의 지위였던 것 같다고 합니다. 그의 이 희망은 성취되어, 1703년 8월 아른슈타트의 새교회(현재의 바흐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하게 됩니다.오르가니스트로서 일하는 한편,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것도 그의 의무였으나, 혈기왕성한 그는 젊은 대원들과 충돌하여, 어떤 때는 대원중의 한 사람과 거리의 난투극을 벌인 일도 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1705년 10월에 바흐는 1개월의 휴가를 얻어 북 독일의 소도시 뤼베크를 방문하여, 당시 최대의 음악가의 한 사람이었던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그의 장려한 오르간곡이나 칸타타에 완전히 매료되어, 아른슈타트로 돌아온 것은 4개월 가까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시의 성직회의에서는 그의 무책임을 엄격하게 견책했으며, 오르간 코랄의 연주에 별로 들어보지 못하던 악구를 많이 혼입시켰다는 점과, 성가대의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점도 곁들여 바흐를 비난하였습니다.아른슈타트의 성직회의와 충돌한 바흐는 결국 1707년6월 중부독일의 소도시 뮐하우젠의 성블라지우스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됩니다.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 알레의 후임이었습니다.바흐는 그해 10월에 이미 아른슈타트에서 사귀었던 육촌 누이동생인 바르바라와 아른 슈타트 근교의 도른하임에 있는 마을 교회에서 결혼하게 됩니다. 은 이 두 거장은 평생 서로 만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말았다고 합니다.이듬해인 1720년에는 영주를 수행하여 뵈멘의 피서지인 카를르스버트에 가있는 동안에 13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바르바라가 갑작스런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바흐는 함부르크의 교회 오르가니트를 지원합니다. 바흐의 어린시절 바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던 연로한 대가 라인켄 앞에서 바흐는 오르간의 즉흥 연주솜씨를 보였고, 그 연주의 훌륭함에 감탄한 함부르크의 성직회의는 즉석에서 바흐의 채용합니다. 하지만 이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돈을 기부해야하는 관습이 있었던 관계로, 결국은 바흐보다 유복했던 평범한 음악가가 그 지위에 올랐으며, 바흐는 쾨텐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습니다.나이 35세였던 1721년12월에 바흐는 새아내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녀는 재능있는 소프라노 막달레나로서, 바흐 나이보다 16세 아래였습니다. 이 막달레나가 바흐의 작품을 사보, 정서한 것도 많은데, 그 필적이 바흐의 것으로 착각될 만큼 흡사하다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수가 무려 13명이나 되었는데, 특히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습니다.1722년과 1725년에 바흐는 젊은 아내의 애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2권으로 엮은 을 쓰게 됩니다. 이 곡집에는 의 대부분과 사랑스러운 아리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쾨텐에서의 바흐의 생활중에는 교육활동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제자 가운데에서도 특히 풍부한 재능을 나타내었던 이가 바로 장남 프리데만으로서, 1720년1월부터 그를 위해 이 작곡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2성 및 3성의 의 대부분과 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걸작이 원래 교육적인 목적을 띄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훗날의 편지에서 '쾨텐에서 일생을 마칠 작정이었다'고 술회할 정도로 바흐의 생활은 충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년 후에 바흐는 이 고장을 떠나 라이프찌히의 교회 음악가가 됩니다. 그 이유는 '교회음악그리고 그 해 6월에 이론가 미쯜러가 창립한 에 가입했는데, 그때 오르간용의 카논풍 변주곡 BWV769 를 작곡,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48년부터 1749년 초에 걸쳐 마지막 대작 BWV1080 을 작곡하고 있었다고 추측됩니다. 이 상의 3곡은 고도의 대위법 기교를 구사한 난곡으로, 얼핏 생각하면 반시대적이라고도 판단되는 이 경향은 바흐의 만년을 특징짓고 있습니다.바흐의 자필로 보아 보면 1746년경부터는 만년 특유의 노쇠함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시력 또한 쇠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1749년5월의 뇌일혈 발작과 함께 그의 시력은 급속하게 감퇴되어 그 뒤로 직접 곡을 쓰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이 중단되고 미완성인 채로 남겨진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1750년3월 말부터 4월에 걸쳐 두 차례의 눈 수술을 받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끝내 바흐는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사용하던 약들도 오히려 몸을 쇠약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제자 알트니콜과 그의 아내인 바흐의 딸이 바흐의 위급함을 듣고 임지인 나움부르크에서 왔습니다.7월18일 무렵에 한때 시력을 회복하였으나 다시 뇌일혈 발작을 일으켜 10일 후인 1750년7월28일에 바흐는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은 오후 8시45분이었다고 합니다.바흐의 유해는 7월31일 성 토마스교회의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당시 독일의 역사 정리유럽바로알기 –지식의 날개 264p~277p종교개혁17세기 들어 대부분의 중 서부 유럽국가들이 개신교나 가톨릭 가운데 하나의 교파를 국교로 선택했던 데 반해 독일은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지방분권적인 독일 문화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로서, 독일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중세 이래 신성 로마 제국으로 불렸던 독일은 중앙권력의 부재와 종교 제후들의 막강한 권력으로 인해 교황청의 사치와 전쟁 비용을 대신 담
이번 과제에서 내가 중점적으로 고려한 것은 도시 속의 산림이다.도시 속의 산림 기능은 무었인지 어떻게 가꾸고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문헌 조사(특히 도시 휴양림에 대해 많이 알아보았다.)를 해보았고, 실제로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하는 광교산을 가서 직접 살펴보았다.● 산림의 기능 중 도시인에게 간접적인 효과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1. 보건환경기능숲은 기후를 완화하고 공기를 정화하여 신선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제공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에 크게 이바지한다. 그러므로 세계 각국은 도시 부근에 녹지대를 만들어 개발을 제한하고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등 환경개선을 적극적으로 꾀하고 있다.2.보건휴양적 기능도시화·산업화에 따라 바쁜 일상을 보내야 하므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만성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 조용하고 깨끗한 숲에서 맑은 공기를 숨쉬고 계곡에서 요양하면 건강과 생활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을 통한 건강 증진은 비교적 적은 투자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숲은 테르펜·음이온 등 인체에 유익한 성분들을 뿜어내 건강과 정서에 실질적으로 기여함과 동시에 심리적·미적 기능을 제공한다. 숲을 포함한 녹지가 우리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는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1) 녹으로부터 평온함과 정서를 느끼는 수동적인 효과녹의 효과가 사람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여러 연구에서는 기상완화나 방음 등의 물리적 효과보다는 휴식공간으로서의 녹지의 효과가 훨씬 크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 더욱이 녹지면적이 30∼40%를 넘을 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족을 느낀다는 연구보고도 있다.2) 능동적으로 녹지를 창조·보전해 감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효과 (원예·농업 등)화초를 심고 가꾸고 도시에 숲을 조성해 쾌적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심리적 만족감을 준다. 녹지가 형편없이 적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메우기 위해 주말에 가까운 숲을 찾기도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적극적으로 식물을 재배해 이것을 보상하려고 한다. 이것은 음이 심한 도심에 공원녹지를 많이 조성하면 보다 쾌적한 시가환경을 만들 수 있다.● 휴양림이란 무엇인가?숲은 반 자연적이고 스트레스로 가득한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쉬고 새로운 활력을 충전시키는 쉼터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인류는 인구가 과밀한 도시에 살게 되면서 자극의 과중, 행동의 구속에 의해 공격성 등 여러 과밀증후군들을 보이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휴양림은 전원생활을 할 수 없는 도시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소중한 공간을 제공한다.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자연을 휴양의 공간으로 인식해 왔기 자연휴양의 역사는 깊다고 할 수 있다. 선인들은 자연에서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새출발의 장소로 생각해 왔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유유자적'한 생활 속에서 '안빈낙도'하면서 자연과 내가 한 몸이 되는 '물아일체'를 추구했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마음은 편안한 숲에서 자연을 벗삼아 생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은 현대 환경윤리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깊은 생태학(Deep Ecology)의 창시자인 아르네 네스는 자연 친화적인 생활방식을, '수단은 검소하고 목표는 풍요롭게'라는 말로 표현해 왔다.숲과 휴양이 결합될 때 [산림휴양(Forest Recreation)]'이라는 용어를 쓰며, 이 것은 '숲에서 이루어지는 자연 중심적인 야외휴양의 한 형태'로 풀이할 수 있다. 산림휴양의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는, 산책·산행·휴식·자연체험과 관찰·놀이와 피크닉 등을 꼽을 수 있다. 최근에는 스포츠도 첨가되고 있으나 이것은 자연을 보는 관점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분리해서 다루기로 한다. 극동 3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산기요법', 즉 삼림욕이 산림휴양의 중요한 항목으로 간주해 왔다.이상의 관찰에서 주제를 산림휴양이라는 것에 한정하여 살핀다면, 현대적 의미의 산림휴양이 풍기는 이미지는 '여가' '휴식' '건강'으로 요계를 유지·보전하면서 임산물과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질서 있게 개발하여, 국민의 보건휴양, 정서함양, 산림소유자와 지역주민의 소득향상 및 대국민 산림교육장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이용되는 산림'으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자연휴양림은 경관이 안정된 삼림생태계에서 자연친화적인 생산도 겸하면서 대중에게 휴양의 기회를 제공하는 숲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면 자연휴양림의 기능은 무엇인가?그것은 숲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기능을 활용하는 것이다. 단지 일반적인 숲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숲의 일부에 일반인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숙박·취사·놀이·관찰 등의 각종 편의시설들을 갖춘 곳이다. 또한 스키리조트나나 골프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 시설은 장소만 숲이지 숲의 기능을 상실한 반면, 자연휴양림은 숲의 기능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휴양을 하는 장소인 것이다. 과거에는 임업적 이용만 가능한 절대보전임지에 휴양관련 대중이용시설을 개발한 것이다. 이것은 산림소유자로 하여금 합자연적 산림개발을 도모하고 유도하는 데 의의가 있으며, 임업적으로 볼 때 산림이용을 다각화·선진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자연휴양림은 특히 사유림의 경우, 여러 가지 문제점도 노출하고 있으나, 국민들에게 숲의 진정한 가치를 몸소 체험하고 숲에 대한 애정을 돈독히 한다는 점에서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확대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자연휴양림의 역할자연휴양림은 크게 옥외 레크레이션, 지역개발, 임업경영, 교화라는 4가지 역할을 수행한다.1)옥외 레크레이션의 역할- 참가자의 긴장완화, 기분전환, 자기개발을 통한 사회성을 증진 시키며, 또한 사회구성원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나아가 개인에 서 집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향을 주어 사회 통합(Social Integration)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2)지역개발 역할- 주민의 취업확대와 특산물 판매에 의한 주민소득 증대기능과 복지시설 의 확충에 의한 국민복리에 기여한다.3)임업경영 역할- 목재생산, 산림부산물에 의한 직접적인 효용과 수원함양조절,않은 산이지만 이 산은 수원을 감싸 안으면서 북풍을 막아주고 넉넉한 품으로 수원 사람들을 다독여주고 있다. 수원사람들은 이 산을 진산(鎭山), 또는 영산(靈山)이라고 한 다. 이 산의 옛 이름은 광악(光嶽 또는 光岳)산이다. 광교(光敎)란 이름이 붙은 것은 고 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워 이기고 돌아가는 길에 광악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 들을 치하할 때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게 됐다. 이에 부처님의 가르 침을 주는 산이라고 해서 친히 광교산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산에 는 유난히 절터가 많다. 기록에는 고려시대에 광교산에 89개의 절집이 있었다고 하며 이 중에는 고려시대의 국사인 진각국사가 주석 했던 창성사도 있었다. 수원의 경치 87곳을 모아 놓은 수원팔경 중 `광교적설(光敎積雪)'은 한 겨울 눈 덮인 광교산의 아름다운 풍경 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산은 또한 깊지 않으면서도 나무와 나물, 약초 등 임산물이 풍부해 주변 주민들의 생활 터전 이 되기도 했다. 또 이 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동서남북으 로 흘러서 수원, 용인, 안 양, 화성의 거의 모든 하천을 이룬다. 광교산에는 앞에서 말한 창성사를 비롯한 수많은 절터와 기우제를 지냈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으며 산신에게 치성 을 드리는 민간 기도처가 곳곳에 있어 영험한 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백제 온조왕 의 공주와 사위 우성위가 살던 우성위평과 온조왕이 들를 때 묵어가던 온조왕 행전, 왕이 먹던 우물인 정자산 고정(古井)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으나 지금은 어디인지 확실치 않다. 신라말기의 대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한다. 최치원은 광교산 꼭 대기 종을 매달 아 놓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조망하곤 했는데 이 산봉우리를 종대봉(鐘臺峰)이라고 불렀고, 행전 동문밖에 있던 바위 세곳을 즐겨 찾으며 그 바위 이름을 문암(文巖)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광교산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김준용장군 전승지이다. 김 준용 장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호남병몬드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일단 산림 자체는 상당히 수목도 많고 야생동물도(특히 새소리의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했다. 정확치는 않으나 7~8종류의 새가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청설모도 빈번히 볼 수 있었고 중형 포유류의 배설물로 보이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시 가운데 있는 산치고는 예상외로 상당히 많은 것 같았지만, 그 산에 들어가기까지의 도로나 시설, 관리는 너무나 수준 이하였다. 등산로 입구 부분은 쓰레기 더미가 있고, 바로 또 아래 부분은 여러 식당들과 악취나는 하천, 떨어진 안내도, 부서진 벤치, 계곡의 쓰레기등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내가 갔었던 날이 일요일과 목요일이었는데 두 날 모두 사람이 꽤 많이 있었다. 앞으로 계속 증가할 추세라고 하는데 그에 따른 부대시설과 철저한 관리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또 증가하는 사람들로 야생동물들이 서식지를 잃기 전에 지금까지 번성한 야생동물에 대한 환경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광교산은 앞으로 하기에 따라서 도시에서 가까운 좋은 휴양림으로써, 자연 생태 학습장으로써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번에는 광교산을 어떻게 바람직한 방법으로 관리하고 개발할 수 있는지 나의 생각이 아닌 문헌을 통해 알아보았다.● 휴양림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임업협동조합이 조사한 자연휴양림의 이용자의 실태를 보면, 이용자는 남성, 고학력자, 사무직 근로자 및 학생, 중간 정도의 소득자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용횟수는 처음, 체류기간은 1박2일, 동반 이용자는 단체모임, 계절은 가을의 순서였으며, 휴양림에서 가장 좋다고 느낀 것은 역시 숲이었고 휴양림에서 주로 하는 일은 산책과 자연감상이었다.숲이 휴양지로서 매력을 갖는 이유는, 야생 생태계를 직접 대할 수 있고, 풍치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한적함과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림휴양지의 특성을 살려야 할 자연휴양림이 기존의 관광지나 유원지를 새로이 숲 속에 옮겨다 놓은 형태가 되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혹자들은 일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