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편견으로 가득찬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해주는 영화이다.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러나 세상이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은 않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가 소외시키고 거부하려는 종두와 공주의 모습을 통해 그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었던 듯이 보인다.주인공 종두는 뺑소니운전 사고로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출감한다. 그는 이제 다시 사회의 품으로 들어왔고 그런 그가 없는 사이 이사를 가고 연락을 끊었던 가족들은 그가 가족의 일원으로 파고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냉대 속에서도 결코 가족들을 미워하지 않는 착한 남자 종두는 자신이 죄값을 치러야했던 사고의 피해자 집을 찾아가고 마침내 피해자의 딸인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첫만남에 종두는 피해자의 아들에게 심한 거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공주를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몇차례, 공주를 공주마마라 부르며 공주에게 사랑을 느끼는 종두와 자신을 남겨두고 오빠내외가 이사간 뒤 혼자였던 공주도 종두를 홍장군이라 부르며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이제 서울 변두리, 오아시스 양탄자가 걸린 낡은 아파트에서 공주와 장군의 동화같은 사랑이 시작된다.서로를 사랑하게 되면서 둘은 생애 최고의 시간들을 만끽한다. 늦은 밤, 서로에게 전화를 하며 웃음과 대화 속에 외로움을 잊고 낮이면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를 나간다. 그러나 둘의 사랑을 세상이 그냥 둘리 없다. 장애인, 전과자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따돌림 받기 일쑤인 그들에게 자유를 만끽할 장소는 흔하지가 않다. 다른 연인들이 자유롭게 노래하고 스스럼없이 장난을 쳐도 공주에겐 오직 상상만으로 가능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깊어만 가고 마침내 둘의 사랑은 결실을 맺어간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세상은 냉정했다. 우연치 않게 방문한 공주의 오빠가 그들의 사랑을 오게 되면서 그 둘의 사랑 역시 사회의 냉대로 내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두를 강간범으로 몰아넣는 사회와 그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하려 안감힘을 쓰는 공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두는 체포된다. 하지만 종두는 기회를 틈타 경찰서를 탈출하고 종두는 공주를 향해 달린다. 그리곤 공주를 위해 그녀를 떨게 하던 나뭇가지들을 쳐내기 시작한다. 공주는 그에 화답하듯이 라디오볼륨을 높이고 종두를 바라보고 나무에서 떨어진 종두는 공주를 향해 춤을 추다 다시 체포되어 끌려간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종두가 보낸 편지를 읽는 공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페이드 아웃된다.영화는 정말이지 노골적으로 그 둘의 상황을 극화시킨다. 사실 처음 영화를 볼때만 해도 답답한 마음만 한가득이 아닐 수 없었다. 소외된 계층.. 태어날 때부터 혹은 후천적으로.. 그 구분을 짓는 것은 누구이며 누구의 권리란 말인가... 우선, 오아시스라는 제목에 대해.. 오아시스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오아시스, 열사의 사막에서 만나는 한줄기 생명의 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실내에만 갇혀 사는 공주와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여주는 단 한 사람의 남자, 그녀에게 그는 더 이상 전과자도 아닌, 생명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는 한줄기 오아시스였던 셈이다. 또한 아무도 그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전과자의 낙인이 찍혀 버린 남자에게, 육체는 정상인이 아니지만 자신을 진실로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의 공주는 그에게 있어 또 하나의 오아시스였던 것이라 생각한다.영화는 두 사람의 행위를 통해 소외층의 고독을 그대로 보여준다.종두가 배달나간 부동산에서 놀음하는 이의 흥얼거림을 따라하는 장면이며 공주가 방에 있음에도 서로 관계를 맺는 옆집부부, 공주가 거울로 만들어낸 나비와 비둘기.. 이 모두가 사회와 융화되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싶다.그리고 영화는 중간중간 공주가 정상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주가 정상인으로 보이는 이 장면이 단순히 공주의 환상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감독의 의도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생각된다. 앞에서 종두에게 공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한 맥락에서, 공주가 정상인으로 보이는 장면은 주인공 남자가 공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즉, 종두는 공주를 정상인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나타내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가 공주를 가족의 잔치에 데려가는 장면 등 여러 장면에서 그는 공주를 정상인과 동일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봐도 그런점은 배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역설하고자 했던 것은, 공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신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 준 너무도 착한 남자와 자신을 제대로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도움을 구하는 공주를, 사회에 쓸모 없는 전과자와 혐오스럽고 이상한 환자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그것이야말로 중증의 뇌성마비 증세라는 것을 역설하고자 했던 것이다.또한 공주는 종두가 간강범으로 몰리자 마구 흥분하게 된다. 그녀는 흥분하고 당황하면 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평소에도 말을 제대로 못하는데 그 갑갑한 상황에서 표현할수 없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래서 결국은 의자로 캐비넷을 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절대로 순수하게 사랑인 것을 결코 순수하게 만은 볼수 없는 인식을 가진 우리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종두가 탈출에 성공해서 나뭇가지를 쳐내는 장면은 정말이지 마음이 쓰렸다.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과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 너무도 안타까운 맘에서일 것이다. 그들을 갈라놓으려는 현실도 그렇지만 진실한 사랑이 뭔지 아직도 모르는 나에 대한 안쓰러움도 그 안타까움에 한 몫한 것 같다.영화에서 공주가 그 움직이기 힘든 몸을 이끌고 하는 행위는 다름아닌 방 바닥 청소이다. 그것은 언젠가 돌아올 사람을 위해, 그가 돌아와 맨 처음에 볼 자리를 닦는 것이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수줍은 듯 앉았던 자리를,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 "공주마마, 나 왔사옵니다" 하며 앉게 될 자리를 깨끗하게 닦아 놓겠다는 공주의 마음이다. 또한 방안으로 파고든 한줄기 볕...영화 속에서 그 자리에 그토록 눈부신 빛이 들어 온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영화 처음에 공주가 작은 거울로 벽에 빛을 만들었을 뿐이다. 손바닥만한 거울로 빛을 만든다는 것은 그 부분이 어두워야 가능한 것이다. 즉 처음에 공주의 아파트는 빛이 안드는 어두운 곳이었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감옥에 있는 영화의 마지막은 오히려 밝은 햇살이 들어온다. 이는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사랑을 알게 된 공주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는 뜻을 보이는 듯 하다.
선학균 [작가약력]▼ 1944년 1월 15일 서울 출생▼ 인천사범학교, 서라벌예대 미술학과, 국제대 영문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 전공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회화학과 졸업(한국화 전공)▣ 개인전▼ 1975년 제1회 개인전(미술회관, 서울)▼ 1976년 제2회 개인전 (강릉문화원, 강릉)▼ 1979년 제3회 개인전 (미도파화랑, 서울)▼ 1985년 제4회 개인전 (롯데미술관, 서울)▼ 1987년 제5회 개인전 (강릉 예맥미술관, 춘천 시립문화관)▼ 1988년 제6회 개인전 (백송화랑 기획, 서울)▼ 1990년 제7회 개인전 (강릉 예맥미술관 기획, 강릉)▼ 1994년 제8회 개인전 (조형 Gallery기획, 서울)▼ 1998년 제9회 개인전 (종로 Gallery기획, 강릉 이화미술관)▣ 공모전▼ 1974~85년 국전 및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8회, 특선 1회 (국립현대미술관)▼ 1980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 입선(국립현대미술관)▣ 수상▼ 1978년 한국미협전 특별상(한국미술협회)▼ 1985년 제5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1986년 제3회강원미술상(예총 강원도 지부)▼ 1989년 제8회 스승의 날 기념 문교부 장관상(교육부)▣ 현재▼ 관동대학교예술대학 조형예술학부(1989~91년 예대학장 역임)▼ 관동대학교 사회교육원 미술과정 주임 교수▼ 한국미술협회 회원(1978~85 동양화 분과위원 역임)▼ 현대차원회 회원(감사)▼ 한중문화예술협회 회원▼ 후소회 회원▼ 강원 현대 한국서회 회원▼ 한국 카톨릭 미술가 협회 회원▼ 강릉문화원향토학교 한국화반 강사이 작품은 그야말로 가슴이 쓰리다는 것이 정답이다. 작년 이 학교에 들어와 카메라 앵글에 대해 배우고 스토리보드라는 걸 처음으로 만들게 됐던 그 때.. 난 5년전 그대로의 산동네를 찍어야만 했다. 화려한 2층집들을 지나서 올라가는 등산로입구에 여지없이 펼쳐지는 저 달동네.. 어쩜 저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난 내 눈을 의심했다..그런데.. 알고보니 이 작가분이 우리동네분이셨더군.. 작년 봄 내가 느껴야 했던 안타까움과 그 이면에 숨겨진 희망이 잘 담겨있는 것 같다. 이 그림의 첫느낌은 안타까움이었지만 그림 한 가운데 밝게 빛나는 십자가는 주의 은총을 기리는 마음일테니.. 지금은 모두 철거된 이 곳이 그저 향수로 아련하게만 느껴질 뿐이다.이 작품은 왠지 모르게 고등학교 국어책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을 떠오르게 한다. 내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면 여긴 정말 천국의 이미지가 맞을꺼다. 천국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지만 유심히 살펴보지않으면 무심코 지나치게 되느 것이니까. 이 그림은 두 손의 엄지와 검지들을 맞대고 한쪽눈을 찡그리며..뭐랄까 카메라안의 뷰파인더를 보는 마음이라고 하면 어울릴래나? 특히 저 가운데 상단에 자리한 선녀 내지는 신선들.. 아마도 저 새는 백로일꺼다. 저 아래 노루도 뛰놀고 있고 강물도 흐르고..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도 있고......무엇보다 곧게뻗어 그 위상을 뽐내는 소나무를 보면.. 내가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일컬어도 돌맞을 일은 없지 않을까?이 그림은 그냥.. 마음에 들었다. 가운데 앵글의 노란 것이 개구리였다는 걸 몰랐었을 때까지만 해도..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다. 유치원때부터 초등학교를 다닐때까지.. 내가 좋아하던 꽃 세가지가 있었다.. 집뒷편으로 가지런히 자라있던 노오란 개나리와 그 사이사이 질세라 분홍빛을 뽐내던 진달래..그리고 우리집 앞마당의 하얀 목련...이 작품을 보고 있자니 그냥 그 꽃들이 생각이 났다. 그런데 저 가운데 것들이 개구리였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부터는.. 어째 화투장이 생각이 났다. 무슨변덕인진 모르겠지만 개구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울컥한 것이 뭔가 배신당한 느낌이라고 해냐하나..하여튼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개구리였다는 것에 사고가 닿자 저 개구리는 나 자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하다면 한없이 약할 수 밖에 없는 저 개구리가 어쩌면 작가의 약한 이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혹은 사회 이면의 소외된 무리들 일지도... 그런 개구리들의 집단이라니.. 아.. 머리가 아파온다.. 그만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