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교과서 희망을 찾아서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를 다닐 때 배우는 국사에 대해 왜 이러한 과목을 배워야 하는지 그리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도 단순한 역사과목에 대한 흥미를 가졌고, 한번도 역사가 어떤 중요성을 띤 과목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더구나 역사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게 된 이후에는 역사에 대한 학교교육의 비중이 낮아지는 것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하며 역사교육의 축소는 있을 수 없다는 데 생각을 고정하고 있었다.이 책은 7차 교육 과정에 따라 제작된 중·고교 국사교과서와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한 논문을 모았다. 역사는 무엇이고, 역사교육은 왜 하는지, 또 우리는 어떻게 우리나라 역사를 교육하고 있는지 등등. 일본의 역사왜곡에서 비롯된 역사교육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역사교육에까지 확대되었고 역사와 역사교육에 대하여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역사교육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적절한 학습내용과 학습방법을 통하여 역사교과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필요한 사고능력을 기르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역사교육의 목적은 역사적 사실을 맹목적으로 전달하거나 단순한 해설이나 암기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 기반 위에 역사적 사고력과 올바른 역사의식을 길러 역사 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실천적 인간상을 기르는데 있다현행 7차 교육과정에서 나타난 역사교육체계의 특징은 역사과목을 사회과에 통합한 점, 『국사』와 『세계사』를 완전히 분리한 점, 11?12학년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세계사』를 선택과목으로 배치한 점,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2종 도서로 발행하게 하여 한국사 교과서에 1종과 2종이 병존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역사과가 사회과에 통합됨으로써 역사교육의 정체성은 상실되고, 사회과 교육의 부수적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10학년의 『국사』교과서를 분류사로 집필한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시도로서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하여 분야별로 체계적으로 한국사를 인식한다는 계획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분류사 체계로 교과를 구성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서술 체계를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8,9학년과 10학년에서 교육하는 내용이 중복되는 점을 피할 수는 없다. 3년간 거의 같은 내용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역사인식 성장에 따라 교과 내용을 배치하되 가능한 한 중복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교과내용을 어떻게 계열화하고 구성하느냐 하는 데 관한 문제로서, 다양하고도 깊이 있는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또 10학년에서 근대로의 이행시기까지 다루려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근현대사까지 포함하고, 아무래도 중학교보다는 심도 있게 서술하다보니, 1년 동안에 가르치기에는 벅찰 정도로 분량이 많아졌다. 결국 8,9학년인 중학교에서 2년간 배우는 한국사를 10학년인 고등학교에서는 1년에, 그것도 고급 수준으로 배우게 되는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0학년의 『국사』에서는 근현대사를 아주 소략하게 다루므로, 11,12학년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선택하지 않는 경우 결국 고등학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게 된 점도 큰 문제다.이러한 역사교육 체계는 바꿀 필요가 있다. 먼저 역사과를 사회과에서 독립시켜야 하며 한국사와 세계사를 통합하여 가르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중학교 과정의 경우, 『국사』과목은 교과서라도 별도로 있어 수업은 사회과와 구분하여 하고 있지만, 세계사는 완전히 사회과에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수업도 역사교사보다 사회교사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상태에서 세계사 교육이 제대로 되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먼저 중학교 과정에서 분리되어 있는 『국사』와 『세계사』를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8,9학년 혹은 7,8학년에서 한국사를 중심으로 하고 한국과 관련이 있는 세계사를 포함하여 ‘역사’ 과목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국사』의 지평을 넓혀 세계사를 우리의 관점에서 보고 해석하여 서술내용에 포함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10학년 이상에서는 지금처럼 한국사와 세계사를 분리하되, 역시 역사과의 틀 속에서 교육하여야 한다. 『세계사』는 10학년 정도에서 필수과목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중학교 과정에서는 한국사와 관련이 있는 세계사를 주로 배웠으므로 중복되지 않게 세계사를 교육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현행 한국사교육의 체계를 바꾸어 10학년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필수로 하고, 11,12학년에서 전근대사를 선택으로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7차 교육과정에 맞춰 집필된 『국사』 1종 교과서는 시대별 비중, 서술의 공평성과 양식 등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시대별로 얼마만큼의 분량을 할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과서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개화기부터를 근대사로 볼 경우,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근현대사가 전체 10개 단원 가운데 4개 단원, 분량상으로는 43.5%를 차지하여 비교적 근현대사의 비중을 높였다. 그에 비해 고교 교과서에서는 전체 7개 단원 가운데 하나의 단원으로 ‘근현대사의 흐름’을 배치하였을 뿐이며, 그 분량은 15%에도 미치지 못한다. 11, 12학년에서 근현대사를 선택하는 것을 전제로 고교 교과서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서술에서의 균형과 공평성도 여전히 문제다. 젠더의 관점에서 보면 교과서는 여전히 남성 중심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으며, 자본과 노동의 관점에서 보면 철저히 자본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특히 근현대사 서술에서 7차 교과서도 6차 교과서의 한계, 즉 정부?관(官) 중심의 서술과 그로 인한 서술의 불균형, ‘민족’ 등 용어의 과다 사용, 반공이데올로기의 작용 등 전체적으로 국가주의의 과잉 현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또한 역사교과서는 단순히 사실(史實)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연구성과를 요약해놓은 것일 수는 없다. 역사교육은 사실의 전달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학습자를 변화시키는 데 목적을 두므로, 교과서는 지식을 학습에 적합하도록 정리하고 안내하는 도서, 서술된 내용을 통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자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제한된 지면에 많은 사실을 담으려고 한 까닭에 전달하려는 내용을 사실 나열적으로 서술하였고, 그 때문에 어렵고 생경한 개념어가 수도 없이 제시되는 무미건조한 교과서가 되었다. 비록 문체가 유려해지고 문장이 세련되었지만, 7차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쉬우면서도 학습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서술양식의 창조는 교과서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남아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교과서의 구성, 서술의 균형과 양식은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과서제도에 관하여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1종 『국사』교과서제도는 조속히 폐지하여야 한다. 국정교과서제도를 채택할 때 내세웠던 최소한의 장점들, 예컨대 국력을 기울여 좋은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거나 다양한 학설 가운데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가장 객관적인 견해를 수용하여 서술할 수 있다는 주장 등은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1종 『국사』교과서제도는 유신 이래 정부가 한국사 교육 내용을 장악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는 교과서의 출현을 막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교과서는 장기적으로는 자유발행제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단위 학교의 교육적 자율성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다만 현재의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볼 때 점진적인 단계를 밟아 검정제→인정제→자유발행제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한 제국기 입헌논의와 근대 국가론1. 서론19세기 후반 한국 사회는 대외적인 제국주의 침탈 위기에 대응하고 근대 국가의 개혁을 이루기 위한 방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건양?광무년간으로 불리는 시기에 황제권의 강화, 의정부와 중추원의 권력기구 개편, 양전 지계사업 등 전반적인 국가체제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대한제국기 입헌과 근대국가체제에 대한 제 논의에 앞서 우선 입헌정체의 이해수준을 검토하는 한편에 황제권과 권력구조의 변화, 특히 의정부와 중추원 같은 권력기관의 위상변화를 펴보려고 한다.2. 대한제국 초기 개혁논의와 황제권의 위상1) 19세기말 입헌정체의 이해와 관력개편19세기 후반 조선사회에서 개화파 지식인들은 1880년대 중반 서구의 입헌정체를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까지는 이들은 서구정체를 직접 수용하기 보다는 기존의 법제도하에서도 군주의 결단으로 정치체제의 개혁이 가능하기보다는 기존의 법제도하에서도 군주의 결단으로 정체체제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를 개편하여 기존의 의정부와 대치하는 독립된 입법기구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해 고종은 군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선상에서 홍범 14조를 반포하기도 하였으나 1895년 의정부를 내각관제로 개정하여 군주의 정치적 권한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내각은 의회적 기구인 중추원을 무력화시킨 것이었고 여기에는 참석하는 국무대신들에게 입법과 행정의 전권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내각관제는 일본이 명치헌법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면서도 군주권의 위상정립을 고려하지 못했고 일반민의 정치참여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내각관제, 재판소와 중추원의 설치 등을 통하여 근대국가 삼권분립과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는 있었지만, 실제 권력구조상 가장 중심이 되는 기관을 내각관제로 설정하였고, 이 기관이 행정과 집행기관으로서 사법과 입법기관을 위로부터 장악하였던 것이다.아관파천 이후 고종과 정부대신들은 내각관제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 계열의 개혁론자들은 고종의 권력남용을 제한하면서 국가권력의 기능적 분리와 분권을 지향하고 있었다. 결국 양 세력은 교전소의 국정개혁 방향을 놓고 일단 크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2) 황제즉위상소와 황제권의 위상이런 상황에서 고종은 갑오개혁의 연루인사들에 대한 탄핵상소나 명성황후의 장례문제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국권회복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즉, 황제로서 즉위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운동이었다.첫 번째 시기에 제기된 상소들은 대개 전통적인 유교인식에 바탕을 두고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 황제의 제도와 같이 이제 그에 걸맞게 존칭을 불러야하며, 더욱이 자주 독립의 나라에서는 마음대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다음 전환점을 이루는 상소는 황제를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전통적인 사유에서도 가능하지만, 보다 중요한 논거로서 만국공법을 들었다. 공법에서는 황제로 부르는 것이 광협이나 번속을 두는 것과 관계가 없으며, 청과 일본에서는 모두 존호를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자주국으로서 호를 황제로 올릴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자주독립의 국가주권을 향유하기 위해서 공법상의 근거를 취할 수 있으며, 청과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와도 대등관계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며, 국체의 대외적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한편 고종은 황제즉위상소의 분위기에 힘입어 갑오개혁에 발표한 건원과 단발령에 관한 조칙을 없애도록 하고 새로이 연호을 세우도록 하였다.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여 의정부의 대신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고종은 황제로 즉위케 하자는 상소운동을 벌였다. 고종은 국가의 실질적인 위상을 높이거나 광범한 국민적 논의를 선행하지 않는 가운데, 단지 황제라는 칭호로 개정하고 대내외적인 군주권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황제의 이름아래 조선의 신민들을 위로부터 통합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3. 입헌정체론의 수용과 정체개혁론의 구조1) 재일유학생의 입헌정체 인식갑오개혁 이후 입헌정체를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논자들은 일본데 유학하고 있던 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입헌정체론에서는 공통적으로 일본의 명치헌법과 같은 형태의 입헌군주제에 대해 긍정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황제가 입헌군주로서 재정립한다는 것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입론에는 황제권과 의회와의 관계 설정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권력구조 개혁에 대한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아직 소수였으며, 대다수의 유학생 출신자들은 당시 신문여론에서도 관료로의 등용이 지적되었음에도 아직까지는 국내의 관료로 등용되거나 정치세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2)유교지식인의 입헌이해와 하의원설립론이 시기에는 전통적인 유교에 입각하면서도 서구의 정체를 수용하려는 논자들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흠모하면서 삼대의 정치가 오늘날 서구의 입헌정체나 공화제와 유사한 것이라고 간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이들의 논점에서 비록 임헌정체의 긍정적 수요이나 하의원의 설치가 나타나고는 있지만, 근대적인 민권의식이나 서구근대국가의 기본적인 틀인 삼권분립의 원리 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구체적인 선거과정을 언급하거나 입법부로서 국가의 주요 정책과 법률의 제정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하의원의 기능과 역할문제에서 주요한 국정의 사안에 대해 매년 지방의 대표자로서 회의하고 이를 상의원이나 의정부와 협의하고 나서 위로 군주에게 가주를 품재 받게 되어 있었는데, 하의원은 권력구조상 전제군주제하에서 의정부와 상원 아래 종속적으로 편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의원의 성격은 종국에 가서는 전제군주권의 합리적 정치운영을 위해 주요 정책의 자문과 심의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전락할 가증성이 높은 것이었다.3) 독립협회의 입헌전제론과 중추원 개편론독립협회는 정부의 조직을 내각과 의회원으로 나누고 양자의 역할 분리를 주장하였다. 이는 내각과 의회원을 엄격히 분립시켜 의정관은 행정권을 갖지 않고 오직 의논하여 작정하는 권리만을 갖고, 행정관에게는 의정원에서 결정한 사항을 집행하는 행정권만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력구조 개편론은 황제의 법률제정권과 집행권을 송상하지 않으면서도 의회원을 실현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정치개혁론이었다.이러한 논리는 결국 군주가 전제권을 가지고 국정운영을 해 나가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무제한적인 군권이 아니라 민의의 수렴과 동의를 통해 권력을 행사라는 방식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결국 독립협회는 전제군주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중추원의 설립을 통해 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군주권을 일정정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것이었다. 그러한 입헌군주제의 권력구조는 중추원과 황제, 황제와 의정부로 이어지는 권력구조를 상정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독립협회의 정치개혁운동의 의회원로 상정될 수 있는 중추원개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중추원과 황제와의 연결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4. 대한제국의 정치체제와 근대국가의 성격1) 권력구조 개편과 중추원의 위상변화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 정체체제는 황제의 정치적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는 의정부 중심체제였다. 개편된 의정부는 갑오개혁기 내각관제의 위상에서 크게 격하되었으며 그리 활발하게 운영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의정부에서 결정한 주요정책이더라도 군주의 전결권한과 재심청구권에 의해 바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1898년 의정부의 대신들과 의정부관제를 다시 개정하였는데, 의정부대신들의 챔임을 강화시키는 한편, 동시에 황제의 통솔권을 강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Ⅰ. 선사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1. 선사시대의 전개2. 구석기 시대의 문화3. 신석기 시대의 문화4. 국가의 형성과 문화Ⅱ. 통치구조와 정치 활동1. 고대의 정치2. 중세의 정치3. 근세의 정치4. 정치상황의 변동5. 근현대 정치 변동Ⅲ. 경제구조와 경제 활동1. 고대의 경제2. 중세의 경제3. 근세의 경제4. 경제상황의 변동5. 근현대의 경제 변화Ⅳ. 사회구조와 사회 활동1. 고대의 사회2. 중세의 사화3. 근세의 사회4. 사회의 변동5. 근현대의 사회변동Ⅴ. 민족문화의 발달1. 고대의 문화2. 중세의 문화3. 근세의 문화4. 문화의 새 기운Ⅰ. 머리말7차 교육 과정에 의해 편찬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종래의 교과서에 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고려시대로 시기를 한정하여 새 교과서가 우리 학계의 고려시대사의 연구 성과를 어떻게, 어느 정도 올바르게 반영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 새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단원의 체계와 구성1.대?중단원의 체계와 구성대단원 와 대단원 부분은 6차 교육과정과 체제상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이에 비해 대단원 , , , 등은 분류사적인 입장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체제를 편성하여 전근대의 시대를 통시대적으로 서술하였다. 7차 교육 과정으로 가장 크게 달라진 대단원 은 근현대를 개략적으로 살피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대단원의 구성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분류사의 체제로 편성한 것이다. 중단원의 편성은 하나의 포괄적인 주제아래 시대적 구분을 따르고 있다. 중단원의 편성에서 주목되는 점은 경제사 분야와 사회사 분야가 각각 독립된 점이다.2.소단원의 체계와 구성중단원은 대단원의 통괄 주제에서 시대별로 구분되어 있으나, 소단원은 다시 하나의 시대 내에서 세부 주제로 환원하고 있다. 첫째, 정치사를 다룬 부분에서 이전 6차 교과서에서 통치 조직, 통치 체제, 정치 구조, 정치 체제 등의 용어를 혼용해서 쓰던 것을 모두 통치 체제로 통일했다. 둘째, 경제사를 다룬 분분은 과 으로 나누어 체계를 잡아 일관성을 유지하였고, 내용의 분량도 증가되었다. 셋째, 사회사를 다룬 부분은 분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마지막으로 문화사를 다룬 부분은 분량의 면에서 종래 교과서에 비해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Ⅲ. 본문 내용의 검토1.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이 단원은 이라는 대단원 하에 라는 중단원이 설정되어 있고, 이의 하위단위로 , , , , , 등의 다섯 소단원으로 되어 있다.※ 표1 ※쪽줄현재수정709원 간섭기원 압제기7672성 6부제3성 6부제80소제목문별 귀족 '사회'의 성립문벌 귀족 '층'? '정권' 의 성립2.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이 단원은 이라는 대단원 하에 라는 중단원이 설정되어 있고, 이의 하위 단위로 과 의 두 소단원으로 되어 있다.쪽줄현재수정15616일본일본 상인은※ 표2 ※3.사회 구조와 사회 생활이 단원은 이라는 대단원 하에 라는 중단원이 설정되어 있고, 이의 하위 단위로 , , 등의 세 소단원으로 되어 있다.※ 표3 ※쪽줄현재수정2032불교의 신앙 조직이었던삭제요망2034염원에서 향나무를 땅에 묻는 활동을 매향이라고 한다삭제요망203소제목사회 시책구휼제도 또는 사회 복지 제도4.민족 문화의 발달이 단원은 이라는 대단원 하에 라는 중단원이 설정되어 있고, 이의 하위 단위로 , , , 등의 네 소단원으로 되어 있다.※ 표4 ※쪽줄현재수정27212예종 대 도교 사원이 처음 건립되었고예종 때 도교 사원인 도관이 처음 건립되었고Ⅳ. 학습 자료의 검토새 교과서에는 본문 외에 다양한 학습 자료가 제시되어 있는데, 사진, 지도, 도표, 연표,좌우 여백의 주, 도움글, 읽기 자료 등으로 도합 700개에 달한다.1. 사진사진의 경우 양이 풍부해졌고,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다. 또한 사진에 적절한 설명을 곁들여 놓음으로 쉽게 사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표5 ※쪽줄현재수정203사진 설명1387년1387년(우왕 13)70사진고려의 궁궐터, 고려 시대의 성균관교체(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198왼쪽사진고려 시대의 관료교체(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283오른쪽사진청동제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교체(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283하단사진나전 국당초문 염주 합내용 보완(소장처)2. 지도, 도표, 연표지도와 도표는 은은한 컬러로 처리되어 있어 학습 효과는 질적인 면에서 훨씬 커졌다.연표는 종래의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대단원별로 1개씩의 연표가 대단원의 시작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6차 교과서에서 시대사별 연표가 세로 방향으로 세계사와 함께 제시되었는데 비해, 7차 교과서는 분류사별 연표가 가로 방향으로 세계사 부분이 생략된 채 제시되어있다.부록의 연표는 전체시대의 연표가 세계사와 함께 제시되었으나, 6차는 세로 방향으로, 7차는 가로 방향으로 제시되어 있다.쪽줄현재수정84지도거란(요)과 금의 대립 관계의 표시삭제154지도영주, 영천영주(영천)77하단고려의 중앙 관제내용보완 또는 교체(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89지도공민왕의 영토수복내용보완 또는 교체(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156지도고려 전기의 대외 무역내용보완 또는 교체(중학교 교과서에도 수록)※ 표6 ※3. 좌우 여백주와 도움글좌우 여백 부분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 7차 교과서에서의 여백에 첨가되어 있는 주는 본문의 어려운 역사적 용어에 대한 간단한뜻풀이로서의 기능이 있다.도움글은 새 교과서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본문에 나오는 용어나 문구 중에서보충 설명이 필요한 것을 따로 글상자를 만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제 7차 교과서 분석1. 7차 사회과 교육과정1) 7차 교육과정의 전반적인 방향: 신자유주의21세기의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의 능력, 적성, 흥미, 필요 등에 대한 개인차를 고려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 개인의 다양성은 인정되고 보장되어야 하며, 자기 주도로 학습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위이고, 교육의 효율성도 극대화될 것이다.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교육을 통한 국가 경쟁력 제고도 여기에서 가능해질 것이다.7차 교육과정은 위와 같은 방향과 취지를 가지고 있다. 이른바 수요자 중심 교육, ‘신자유주의’ 노선이다. 그래서 교육 시장화이다. 경쟁력 강화 생산성 향상 등과 같은 시장 경제의 논리로 교육을 구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선은 김영삼 정권 때인 95년 이래 지속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온 공교육의 방향이다. 열린 교육, 새물결, 수행평가, 초등영어, 컴퓨터 교육 강화 등이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2)제7차 사회과 교육과정의 특징과 문제점(1) 고등 학교 선택 중심 교육 과정교육과정의 기본 지침으로 1학년부터 10학년까지의 10년간의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과 11, 12학년의 2년 동안의 선택 중심 교육 과정으로 운영한다.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과 편성은 일반 선택 과목과 심화 선택 과목으로 구분한다. 일반 선택 과목에는 ‘인간 사회와 환경’이라는 과목을 신설하고, 심화선택 과목에는 과 같이 9개의 과목을 두고 있다또한 사회과 시간 배당을 보면 국사 시간이 중2, 3학년과정에서 각각 주당 2시간씩 2년과정에 주당 4시간 과정으로 편성되었는데, 제7차 과정에서는 중2학년 과정에서 주당 1시간이 감소되었다. 결과적으로 중학교 과정에서 국사 시간이 주당 1시간의 수업 시수가 축소되었다. 그 결과 제6차 과정까지는 2학년 과정에서 조선 전기까지 다루었던 내용이 고려말까지로 한정되어 중3의 과정에서 다루는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아졌으므로 심도있는 학습을 어렵게 하고 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류사 중심의 체제로 서술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와 경제로 통합되었던 사회사와 경제사를 분리한 것은 학계의 연구성과를 대폭 수용하려는 현 교과서 기획자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학계에서조차 전시대를 통괄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류사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 교과서가 상당히 도적인 시도를 감행한 것으로 새로운 기획의도가로 평가할 수 있다.Ⅰ. 한국사의 바른 이해 : 책의 총설에 해당.Ⅱ.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 : 선사 시대의 문화와 정치?사회를 종합적으로 서술.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 정치사에 해당.Ⅳ. 경제 구조와 경제 생활 : 경제사에 해당.Ⅴ. 사회구조와 사회생활 : 사회사에 해당.Ⅵ. 민족 문화의 발달 : 문화사에 해당.Ⅶ. 근?현대사의 흐름 : 근?현대사의 개관.분류사의 체제가 지향하는 목표는 종래 시대별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각 분야의 고유한 서술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다.◇정치사①정치 세력, 정치구조, 정치운영, 정치운영론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통해 한 시대의 정치체제를 구조적으로 이해.②위 각 요소들로 구성된 정치체제의 시대별 양상을 살펴 정치사의 발전을 이해.1)내용구조정치사의 경우 ‘7차 교과서’는 제Ⅲ대단원 아래 4개의 중단원과 22개의 소단원, 그리고 69개의 분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6차 교과서’에 비해 ‘7차 교과서’의 분단원이 2/3 정도로 줄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6차 교과서’의 분단원이 삭제되거나 통합됨으로써 나타난 결과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별반 달라진 게 없이 재구성한 것이라는―즉 ‘6차 교과서’의 중단원이 ‘7차 교과서’의 대단원으로, ‘6차 교과서’의 대단원이 ‘7차 교과서’의 중단원으로 자리바꿈한 것일 뿐 실제 서술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체제의 재구성만으로 한국사의 발전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분류사 체제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는 체제가 동요하는 계기가 되었다”)현 교과서는 농민들이 국가나 귀족에게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면서도 “스스로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계곡 옆이나 산비탈 등을 경작지로 바꾸었다”)고 하여 자신들의 생활향상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였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6차 교과서는 국가가 농민을 일방적으로 수탈하는 것으로만 묘사하였을 뿐이었는데 비해 현 교과서는 국가의 경제정책도 농민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분명히 하였다.다음으로 학계에서 그 동안 논란이 되었던 부분을 어떻게 반영하고자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녹읍은 본래 관리들에게 지급한 것이고, 식읍은 왕족이나 공을 세운 귀족 관리들에게 지급한 것으로 6차 교과서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다.관료전에 대해서 현 교과서는 통일적으로 서술하지 않아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6차 교과서에서는 과료전의 지급이 귀족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방안이 되었다며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한 데 비해 현 교과서는 관료전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보이지 않고 “통일 후에 문무 과료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었다”라고 막연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6차 교과서에서는 토지의 경영방식을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현 교과서는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토지경영에는 차이가 있었음을 시사하였다.수취제도와 관련해서 6차 교과서는 인두세를 부과하였다는 내용을 서술하였다. 그런데 현 교과서는 수취제도와 관련하여 6차 교과서 보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두세에 과해 읽기 자료에 “세는 포목 5월에 곡식 섬이다”라는 『수서』의 자료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6차 교과서는 삼국과 통일신라 수취제도의 차이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으나 현 교과서는 삼국과 통일신라의 수취제도가 달랐음을 밝히고 있다.6차 교과서와 내용 면에서 비교할 때 역사의 발전이라는 시각이 들어간 점과 민중을 비중 있게 서술한 점은 좋으나 변화로 긍정적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지엽적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에 대한 오류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문제로 지적하지 대두장시의 발달포구에서의 상업활동중계무역의 발달화폐유통 현 교과서와 6차 교과서의 항목비교6차 교과서와 현 교과서는 조선후기를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맹아론’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특히 현 교과서는 심화과정에서 ‘상품경제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을 다룸으로써 그것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전체 분량 면에서 6차 교과서와 현 교과서는 모두 14쪽을 할애하여 외형상 차지하는 지면은 같다. 하지만 현 교과서에 추가된 ‘수취체제의 개편’이라는 항목이 6차 교과서에 ‘제도의 개편과 정치 변화’라는 단원이 있는 것을 고려하녀 현 교과서가 오히려 축소된 편이다. 내용 서술 순서를 살펴보면 6차 교과서가 ‘생산력의 증대’를 먼저 이야기한 반면 현 교과서는 ‘농촌사회의 동요’를 다루면서 ‘수취체제의 개편’을 다루고 있다. 특히 경제사에서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생산력 부분을 6차 교과서와 비교할 때 대폭 축소해 버려 경제상황의 변동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경시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현 교과서는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한 현상에 대해서 토지 이탈에 대한 현상적인 설명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농민들의 주체적 행동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시각을 보여준다.6차 교과서와 현 교과서 모두 조선 후기 생산력의 발달은 농민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현 교과서는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 양반 지주의 경영 변화를 먼저 설명한 뒤 농민 경제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전의 농민들이 농업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것과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가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광작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기 때문에 현 교과서가 의도한 ‘농민경제의 변화’ 라는 항목의 핵심은 광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6차 교과서의 ‘농업 경영의 변화’라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수취제도 가운데 대동법의 실시에 대해서는 6차 교과서 모두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대동법이 실시되었음에도 기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에 따른 신분구조의 변동이라는 학계의 통설을 반영한 것이다. 7차 교과서에서 ‘노비의 해방’이라는 소항목을 새롭게 설정하여, 노비의 동향을 주목한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중간 계층의 신분 상승 운동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층의 움직임을 소략하게 서술하여, 조선후기 사회변동의 주역을 중인층으로 설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2)더 나은 교과서를 위한 제안(1) 주제에 따라 서술이 일정하지 않다. 고대, 중세, 근세, 근대의 네 시기 모두 걸쳐 서술된 주제는 신분제뿐이다. 앞선 시기에 언급되지 않은 주제가 다음 시기에 등장하면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사회사에서 꼭 서술해야 할 주제를 몇 가지로 확정한 후 시기별로 일관되게 서술하여, 각 주 제를 기준으로 역사의 발전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2) 각 주제별로 역사의 발전을 가늠하는 기준을 분명히 제시하고 이에 입각하여 시기별 발전상을 서 술해야 한다. 신분제의 경우, 역사 발전의 기준을 ‘능력 존중과 신분 이동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교과서 서술이 이루어져야 한다.(3) 역사 발전상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이행기의 농민항쟁이 대폭 보강되어야 한다. 농민항쟁에 대한 서술은 준거안 조차 없다. 근대 사회의 태동 못지 않게 고대에서 중세, 중세에서 근세로의 이행을 추동한 농민항쟁이 비중 있게 서술되어야 한다.(4)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신분제도의 경우 연구성과 반영이 들쭉 날쭉하다.(5) 교과서 내용 중 명백히 잘못된 부분은 전문 연구자의 검토를 거쳐 하루빨리 교정해야 한다. 향촌사회 서술에서 잘못된 내용이 자주 발견된다.◇ 문화사분류사 서술은 역사를 구성하는 각 분야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과 깊이 있는 탐구를 촉진할 수 있다. 또한 역사가 다른 분야, 즉 정치?경제?사회?문화 등과 맺는 연결 고리를 확보할 수 있어서 통합적 지식의 배양이라는 7차 교육과정의 교육 목표에도 다가갈 수 있다. 특히 문것이다.
‘일상의 역사’란 무엇인가1. 일상사의 출현제도화된 역사연구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일상사의 출현은 구서독 역사학의 흐름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80년대 초 ‘역사공방(Geschichtswerkstatt)'운동으로 역사연구의 탈전문화를 추구하고,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대항적 성격의 역사로서 일상사의 붐이 조성되었다. 일상사가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누리게 된 이유는 일상사가 일상이 주는 친밀함을 주제로 기층민중의 일상세계와 그들의 경험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일상사가 대두하게 된 배경으로는 50~60년대의 낙관적 분위기가 퇴조하며, 과학과 기술 문명이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산업화 과정이 인간에 대한 상실과 소외의 과정이었다는 회의적 견해가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통에 대한 향수와 동경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보여진다.자아 상실의 위기 의식 속에서 일상을 재발견하고 재평가 하게 되며, 이러한 조류는 80년대 구서독의 출판, 방송, 영화시장에 반영되어 나타나게 된다.2. 일상사의 특징적 경향1) ‘일상’의 정의- 일상이란 의식주처럼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삶의 형태로서, 매일 반복되고 지루하 게 계속되며 별다른 성찰 없이도 일어나는 행위들로 이뤄진다.- 일상이란 구조화된 사회적 현실을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인식과 경험으로 매개하는 장(場)으로서, 문화적으로 형성된 삶의 실천 방식과 ‘전략’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세계이다.2) 일상사의 특징적 경향사회사일상사?중심 통합적?역사를 통일적, 단선적인 발전 과정으 로 상정?역사란 양면적, 모순적, 복합적, 중층적 인 것임을 강조→ 동시적인 것의 비동시성?결과론적 관점에서 서술되는 역사?개인이나 집단의 삶에 관심→ 아래에서부터?구조와 과정의 파악에 역사 연구의 중 점?구조적 변화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경 험, 해석에 관심?거시적인 관점?거시적 차원의 분석 대상(민족국가, 시 민사회, 자본주의 시장경제)한 측면을 포괄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일상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일상사가들이 구명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노동자들이 일상의 현실을 어떻게 경험하며,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전략을 통해 일상적 삶을 유지해 나갔는가 하는 점이다.노동자들의 일상을 대상으로 프롤레타리아적 생존전략과 생활방식을 규명하려는 일상사가들의 연구는, 노동과 여가라는 일상의 두 영역과 관련된다.- 여가; 르뤼게마이어와 니타머의 연구여가의 영역을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서 제국시대(1871-1914)독일 루르지역 탄광 노동자들의 주거와 음주행태에 관한 브뤼게마이어와 니타머의 연구를 들 수 있다. 브뤼게마이어와 니타머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루르일대에 흔히 찾아볼 수 있었던 ‘반공개적(半公開的) 가족구조’, ‘목로주점’, ‘화주(火酒)클럽‘등이다. 루르지역 탄광 노동자 가구에 널리 보편화되어 있던 반공개적 가족구조란 가족 외 외부인, 대부분의 경우 광부 자리를 찾아 이 지역으로 새로이 유입한 젊은 독신 노동자들을 하숙의 형식을 통하여 동거인으로 수용한 주거형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숙소의 제공자인 노동자 가정에게는 궁핍한 생계를 보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고, 새로이 이주해온 노동자들에게는 숙소와 취업을 포함하여,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요구되는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탄광 노동자 집단의 일원으로 동화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목로주점이나 화주클럽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당국의 규제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도시화와 함께 루트 일대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목로주점이나, 영업시간이 제한된 주점의 이용에 불편을 느낀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사비를 털어 임대공간에 마련한 화주클럽 등은 흔히 노동자들의 주정과 태만, 가정파괴와 경제적 파탄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브뤼게마이어와 니타머에 의하면 그것들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상호 유대와 연대의 관계를 다져가는 생활방식의 표현이었다. 루트지역의 탄광노동자들에게 주점은 가정 확인하고, 극히 제한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노동규율을 통해 박탈된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을 재획득하려는 시도들이다. 작업장 내 감독자나 작업동료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려는 이러한 행위야말로 노동자들이 일상을 통해 끊임없이 표출하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존중, 의지와 고집)(Eigensinn)의 표현이다.작업활동에서 일탈을 시도하는 노동자들의 행위는 주변 동료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을 동료로서 인정하며, 나아가 그들에 대한 동료애와 연대감을 경험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노동자들은 때로는 악의적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질적 폭력이 가미되는 몸장난이나 몸싸움들의 육체적 접촉을 통하여 상호 존재를 확인하고 집단적 소속감과 더불어 프롤레타리아적 연대에 동원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체험한다. 그 점에서 노동자들의 자존적(自尊的, eigensinnig)행위는 동료 노동자가 배제된 독존의 상황만이 아니라, 주변의 동료가 노동자의 의식 속에 함께 존재하는 혼재상황을 표현하고 있다.일상사가들이 분석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자존적 행위의 또 다른 의미는 그것에 내포된 갈등과 저항의 측면에 있다. 다시 말해, 작업과정을 통해 표출하는 노동자들의 자존적 행위는 작업시간의 운용과 통제를 둘러싼 감독자와 노동자 사이의 갈등의 산물이고, 수용의 한계를 넘었다고 판단된 노동규율에 대한 개별 노동자 나름대로의 저항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이것은 파업처럼 계산된 이해관계를 합목적적으로 추구하는 기능적?도구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과시하고픈 정서적 욕구 내지 충동을 순간적으로 발산하는 상징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일상사가들의 노동사 연구를 소개하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인식경향이다. 일상사가들이 보는 노동운동사는 노동자들의 정치적?사회적 해방이나 성취의 과정이 아니며, 노동운동 또한 그 목표와 전략에서 본질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역사서술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를 비판하는 일상사가들의 비판의 요지는적 압력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곳이고, 정치적 성향이 아닌 직무능력과 전문성이 우대받았다는 것을 밝혀내어 나치의 전체주의적 지배하에서 일상생활의 도처에 권력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공간과 통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빈 구석’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독재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와 대응 방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포이커트의 연구 - 나치정권에 대한 여론의 동향을 추적하며 나치체제의 ‘내면’을 파헤침, ‘종족 공동체’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나치정권에서 제도와 이념의 ‘획일화 정책’에 따라 외견상 나치즘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가 도출된 것처럼 보였으나 체제의 ‘내면’, 즉 국민들의 일상생활의 영역에서는 실상 권력에 대한 불평과 불만 그리고 체제가 요구하는 규범으로부터의 각종 일탈행위)가 흔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비밀결사와 지하단체에 국한되었던 종래의 연구시각을 확대하고, 나치체제 내 국가와 사회의 갈등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브로스차트의 연구 - 바이에른 지방을 대상으로 나치지배의 사회적 실상을 조명했다.나치에 대한 지지와 동의는 일상적인 이해관계가 침해되지 않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뤄지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이며 소극적인 성격의 것이고, 때때로 체제가 요구하는 규범에 대한 거부 내지 회피와 병행했다고 파악, 그는 이것을 반체제라는 적극적이고 능동적 의미의 ‘항쟁’과 구별하여 권력의 압력을 견뎌낸다는 소극적이며 수동적 의미에서의 ‘저항’의 행위라고 분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의 역사인식에 대한 재검토를 가능하게 하는데 첫째로, 나치즘에 대한 비순응적 저항(Resistenz)의 존재는 대다수 국민들이 권력의 일방적인 지배에 무기력하고 일률적으로 순응했다는 역사 인식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두 번째로, 반(反)나치 항쟁사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나치즘에 대한 비판적인 역사인식의 심화문제제기 - 노동운동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는 해방을 향한 노동자들의 열망이 왜 나치집권기를 통해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집단적 he Qualit tsarbeit)노동자들의 자긍심 고취붉은 깃발 아래 대오를 갖춘 행진과 시위의 연출노동자들의 가두 문화의 유산 표현이러한 정책과 선전활동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일상적 욕구와 관심을 충족시킴으로서 그들에게 용인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러한 정책과 선전에 열렬한 지지와 순응이 아닌, 그렇다고 적극적인 반대나 거부도 아닌 유보적 수용(abwartendes Hinnehmen))의 입장을 취하는데, 이것은 체제유지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 유보적 수용의 입장은 타인의 고통과 희생을 외면하거나 침묵함으로써 나치집단의 범행을 방조한다. 이를 통해 일상사가들은 일상의 이중성, 평범한 시민들의 정상적 일상과 나치의 대량학살의 비정상적인 현실은 다르지 않다고 파악한다. 나치시대 독일 국민들은 나치 정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던 동반자가 아닌 나치정권의 희생자들에게 해를 가한 공범자인 것이다.?포이커트와 뤼트케의 해석악의 평범성(Banalitat des Bosen) - 유대인의 대량학살과 같은 사악한 범죄행위는 일회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늘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인식을 통해 유대인 외에도 나치정권 아래 희생되었던 러시아인, 폴란드인, 집시들과 같은 이민족과 공산주의자, 동성연애자 등 열등분자로 낙인 찍혔던 독일인들의 존재를 상기시킬 수 있다.평범 속의 악(Bosen in der Banalitat) - 권력에 의한 야만적 범죄행위가 일상화되었던 나치집권기에는 평범한 일상 그 자체가 악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전통적 유대와 연대의 관계가 해체되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존재로 구성된 대중사회가 발전되었다. 이것이 나치즘의 출현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이다. 따라서 나치즘은 근대성의 부족이나 결핍, 정치적 근대화의 실패 결과가 아니라 근대화 자체의 모순점과 근대문명의 병리적 측면에서 파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치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기존의 인식일상사가의 인식나치즘은 독일사의 특수성의 산물이고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