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Swan Lake 와Matthew Bourne의 Swan LakeMatthew Bourne의 작품 백조의 호수(Swan Lake)는 고전발레의 백조의 호수를 연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각색한 것으로 원작과는 달리 동성애 성향과 발레의 전통적 사고를 무시한 성별에 관한 표현(여성백조를 개신 남성을 사용한 점) 등으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원작과는 다름 내용과 구성으로 자칫 전통적인 발레를 감상해왔던 관객에게 혼란과 외면을 초래할 수도 있었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에게 오랫동안 호응이 좋았던 이 작품은 1995년 11월 그의 무용단체인 Adventures in motion pictures에 의하여 처음 공연되었다.원작의 백조의 호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발레의 움직임과 이야기적 요소의 두 가지 측면에서 낭만적인 분위기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으며, 전통적인 발레의 화법은 관습적인 성 표현의 전형과도 같이 보일 수 있다. 이 인무에서 남자 무용수는 발레리나 뒤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돕고 리드하므로 관객의 시선을 발레리나에게 향하게 한다. 그러나 남성무용수의 개인 무에서 그는 남성다움을 재확인 사내다운 스타일의 움직임을 하므로 그의 몸이 보여주게 되는 여성스러움의 개념들과 반대가 되게 한다. 이러한 남성 무용수와는 반대로 발레리나는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움직임들과 우아함을 통해 그녀의 몸을 드러냄으로써 관객의 관심의 초점이 된다.이러한 원작 백조의 호수와는 다르게 Matthew Bourne은 그의 재구성 작업에서 관객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던 여성백조의 역할을 남성백조들로 대체하므로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무대를 지배하게 된다. 그의 재구성 작업에서 나타나는 파격적 배역에 대한 선택은 백조의 호수로 잘 알려진 발레의 전통적 관점에 명확한 대조를 이루게 한다. 따라서 여성 대신 남성 백조로 대처한 이 각색 작품은 관객들에게 성표현의 규범들을 불러일으키는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다.Matthew Bourne의 백조의 호수 작품에서 고정 관념의 파괴가 어떠한 양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고찰로 일반적인 발레의 양상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이 아닌 남성다움의 표현에 관련된 개념에 그 초점을 둔다.작품에서 남성백조들의 의상으로 무릎길이의 털로 된 흰색 바지를 입음으로써 강조되는데, 이러한 의상으로 인하여 남성들의 벌거벗은 몸의 드러냄은 전통적인 발레 공연에서 발레튜튜를 입은 발레리나에게 향했던 관객의 성애적 시선을 끌어드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게다가, 깃털 같은 의상을 남성이 입은 것은 성(gender)에 관련된 전통의상 관습의 혼란을 의미한다.원작 백조의 호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성 군무의 움직임들의 특성들을 사용함으로서 남성백조들이 여성무용 그 자체와 연관된 또는 규정된 움직임들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남성 백조들은 고정적인 새 형상의 여러 가지 움직임의 특성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한쪽 발을 앞으로 쭉 편 상태로 바닥에 앉아 그의 팔과 상체를 우아하게 앞으로 서서히 굽혀 뻗은 한쪽 발위에 포개어 놓는 백조의 특성의 자세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수동성과 종속을 나타내므로 남성성 즉 행동과 힘과 같은 관습적인 규범들에 명백한 대립을 나타낸다. 그리고 남성백조들은 양팔을 뒤로 쭉 펴고 그들의 상체를 뒤로 둥글게 젖히므로 그들의 신체를 관객들의 시선에 드러내게 된다. 또한 백조들은 그들의 팔을 몸에 거의 밀착한 상태로 다양한 방법으로 떨며 아주 경쾌한 스텝으로 움직인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전통적으로 남성무용수들이 사용하였던 폭 넓은 공간 사용의 경향이라고 볼 수 없다.그래서 여성 무용수 대신 남성무용수를 대치시킨 그 자체만으로도 흰색의상의 여성백조 군무인 낭만주의 발레의 전통을 어긴 것이다. 똑같은 의상에 완벽할 정도로 동시에 움직이는 대규모의 여성군무는 원작 백조의 호수와 같은 고전 발레에서 사용되는 실질적 장치의 구성요소라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 무용수들은 가가의 개인적 특성들을 나타내기 보다는 전체적인 미를 나타내는 다수의 몸들로 보이기 때문이다.남성무용수들로 하여금 백조를 표현하게 함으로써, Matthew Bourne은 남성 무용수들이 장치적인 요소가 되는 비슷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여성들을 대신한 남성 백조들 상체의 하얀 살결은 푸르스름한 보명의 처리로 강조되는데, 이러한 조명의 효과로 남성 무용수의 신체는 관객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또한 백조의 부리 모양의 검은 분장은 원작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무력한 여성백조의 외관에선 찾아볼 수 없는 위험한 동물과 같은 험악한 인상을 창조한다. 게다가, 여성적 무용과 동일시되는 부드럽고 곡선적인 움직임들은 단지 남성 백조들을 위한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이 작품의 주목할 만한 특징의 또 다른 한 가지는 원작의 오데트와 오딜(Odette & Odile) 각각의 대응인 흑조와 백조의 표현방법이다.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인 『변신』에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렇게 변신이라는 특이한 설정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처음 나에게 아주 난해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이 벌레로 변신을 한다는 자체가 우리의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왜 벌레로 변하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수업시간에 이미 토론을 하였다. 또한 변신에 대한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도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내가 이번 레포트를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변신한 그레고르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다.그레고르가 변신을 한 후에 그의 가족들의 태도는 많이 변하였다. 나는 이런 변화를 보고 요즘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있는 개인주의와 존재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번 레포트도 개인주의와 존재론에 연결을 시켜서 등장인물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카프카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거기에 소속한다’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이 소속하고 있는 그 세계의 약속과 도덕 등을 지키고, 그 대가로서 그 세계로 소속이 허락된다. 그로서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 이 약속을 위배를 하면 그 사람은 죄인으로 그 세계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그레고르는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며 부모의 부채를 청산해야 하는 짐을 지며 살아간다. 그는 가정을 위해 살았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충실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존재는 가족을 위한, 사회를 위한 존재이지만 자신을 위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삶이 아닌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그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채가 아니라면 퇴직을 하고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그가 바로 자신의 삶을 갖고 싶다는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는 ‘벌레’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고 한다. 그의 이런 자신에 대한 자각은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직업을 가진,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그레고르는 변신을 한 뒤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의아해했으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이미 그레고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은 바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는 원래대로 돌아가기를 원할 뿐이었다. 왜 그는 자신이 했던 외판원 일을 혐오하면서도 변신한 뒤에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까?그는 자신을 희생하여 가족에게 행복한 삶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지 가족과의 관계를 외적인 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부모님은 그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부채를 갚을 능력도 있었고, 모아놓은 재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서 돈도 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 그의 그러한 희생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그의 아버지는 부채를 갖고 있으며, 몸이 노쇠하여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우 건조한 사람이었고, 모든 가장의 의무를 그레고르에게 넘겼다. 그러나 그레고르가 변신을 한 후에 다시 가장의 의무를 떠맡게 된 그는 더욱 건강해지고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일을 하지 못하고 가장의 노릇을 하지 못하는 그레고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벌레’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에는 그레고르를 위협하고 사과를 던져 상처를 입히면서 그는 그의 아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그의 아들에 대한 걱정을 하고 대책을 세우는 것 보다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한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을 하지 못하는 그레고르는 그에게는 ‘벌레’이며, 지나친 비유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의 그의 아들은 집안을 부양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그레고르와의 이러한 관계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주변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며,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면 외면해 버리는 인간관계에 대해 반성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그의 어머니는 그레고르에게 따뜻한 애정을 갖고 있으며 매우 위하며 사랑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가 변신을 한 후에 실제로 그녀가 그에게 접근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그를 거부하며, 동정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어머니의 특성은 감성적이며 그를 동정하지만, 마음으로 몸으로 그를 위하지는 않는다.그 다음으로는 이미 수업시간에 토론을 한 바가 있듯이 그녀의 동생은 그레고르를 약자로 인식한다. 그녀는 변신 전에나 초기에는 그에게 애정을 갖고 그에 대해 많은 배려를 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이 일을 하기 때문에 어떤 ‘지위’에 있다는 우월감 마저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그레고르의 방을 청소한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자신의 영역에 대한 침해를 하였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결국에 그녀는 하숙인들이 그 때문에 계약을 해약한다고 하자 그녀는 그를 제일 먼저 없애자고 한다. 그것은 그녀가 벌레로 변신한 그를 약자로 인식하고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이야기하자면 지배인의 태도가 있는데, 지배인은 아버지가 그레고르에게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다. 지배인은 그레고르를 자신의 회사에서 외판원을 하는 ‘일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외면하고 만다.그리하여 그는 결국 가족에게 배척을 받고 굶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런 그의 죽음을 뒤로한 채 오히려 희망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 작품의 아이러니 함은 더해간다.나는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변신』의 작품론이나 그의 작품에 대한 사이트에 있는 글들을 읽게 되었다. 내가 읽은 것들 중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이다. 그레고르는 가족들을 위해 일을 하며 자신의 삶이 없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에 대한 자각을 한다. 그런 그는 벌레로 변신을 하게 되고, 그는 더 이상 쓸모 없는 인간으로 취급받게 된다. 나는 이런 흐름을 보면서 ‘어쩌면 앞으로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는 나 자신도 불행한 존재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람을 일을 하며 살도록 만들어져왔다. 아니 사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자로 여겨져 왔고, 우리는 일에 몰두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일을 하며 살았고, 가족을 위해 살았다. 그렇게 우리는 일을 하는 ‘도구’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점점 더 혼란스럽기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