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라크 파병이 결정 났다.노무현 정부는 분명한 것은 아직 없다며 말 바꾸기 놀음으로 사람들 복장을 뒤집어 놓더니, 슬그머니 국익의 명분을 내세워 국민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은 채 일방적으로 파병을 결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부도덕한 전쟁, 부정의의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파병반대 열기는 식을 줄 모르고 타오르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전쟁의 상처로 피흘리는 이라크 아이들의 겁에 질린 눈망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인가?이렇게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플 때,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촌철살인의 미학으로 풀어낸 영화가 있다. 이준익 감독의 퓨전 역사 코미디 이 그것이다.영화 은 1500여년 전의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분쟁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나당 연합군을 결성한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향해 진군하던 김유신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5천 결사대에 가로막힌다. 김유신은 첩자를 통해 계백의 작전을 염탐하는데, 그 작전이란 “뭐시기할 때까정 갑옷을 거시기한다”는 것. 거시기의 정체를 알지 못해 총공격을 미루는 중에 당나라의 소정방은 7월 10일까지 군량미를 가져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과연 거시기의 정체는 무엇이며,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전쟁영화 은 코미디 영화다.영화전반에 흐르는 질펀한 사투리의 잔치와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몸싸움은 코미디 자체다.백제군은 전라도와 충정도 사투리를, 신라군은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시종일관 관객들을 배꼽 잡게 한다. 더구나 왕이나 장군들이 평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사투리를 사용할 때면 그 웃음의 정도는 도를 넘는다. 근엄한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사투리란 생각만 해도 웃기는 일이지 않는가. 신라가 백제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암호해독관을 동원한다던가, 욕싸움에서 보성 벌교 출신 군인들이 신라군을 제압하는 장면은 사투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재미다. 특히 백제군의 ‘거시기’라는 사투리는 영화를 풀어 가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또한 총소리와 폭탄소리로 소름끼치는 전쟁터가 아니라 탐색전, 맞짱, 신경전, 심리전 등의 형태로 마당을 나누어 싸움을 표현하는 방식에 풍자와 해학이 가득하다. 북과 징, 꽹과리 등 민족적 악기소리와 경쾌한 민요가락을 동원해 응원전을 펼치는가 하면, 일단 입으로 먼저 상대방의 기를 꺽어 놓겠다는 욕싸움, 한판 붙어보자 일대일 맞짱뜨기, 전쟁을 장기놀음에 비유한 인간 장기판에 이르기까지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마치 놀이처럼 표현하고 있다.전쟁영화 은 뭐니뭐니해도 반전영화다.선물은 겉포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알맹이에 있는 것처럼, 코미디라는 포장에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는 과거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지만, 현실의 정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강대국은 선이고 약소국은 악이라는 논리로 백제와 고구려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당나라는 지금의 미국을 그대로 빼 닮았다. 또한 통일의 명분으로 힘센 대국을 불러들이는 신라의 외세 의존적인 자세는 국익의 명분으로 파병을 결정한 노무현 정부를 빗대고 있다. 소정방이라는 인물을 통해 강대국의 고압적인 자세와 약한 나라를 얕보는 건방진 모습이, 한 대 쥐어박고 싶도록 얄밉게 그려지고 있다. 그에 빌붙어 신라의 왕자라는 신분보다는 당나라 관직이 더 좋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김춘추의 둘째 아들은 큰 나라에 붙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보고자 하는 권력자, 사대주의자들의 추악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아무리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백제군과 신라군의 ‘황산벌 전투’는 백제 결사대의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이며,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인간 장기판이 보여주는 것처럼 윗대가리들의 한 수 한 수에 비참하게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바로 일반백성이다. 권력자들의 세력다툼에 희생당하는 것은 전쟁에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나라나 민족은 가진 자들, 권력자들의 것이었을 뿐. 그들에게는 고향이, 홀로 가을걷이를 하고 계실 늙으신 어머니가 더 그리웠다. 칼과 창, 화살, 급기야 온 몸을 던져 뒹구는 투박한 전쟁은 살갗에 와 닿는 전쟁의 섬찝한 공포와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연상시키는 혼란의 아우성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초반의 웃고 떠들던 전쟁이 어느새 잔인한 살인게임으로 돌변하고 우리는 전쟁의 광기를 목격하게 된다. 그 순간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해 회의하게 될 것이다. 올바른 이성과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슴을 파고드는 ‘반전’의 메아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신라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화랑을 희생시키려는 김유신이 신하들에게 하는 말이 가슴을 친다. “ 그래 내 미칫따, 저거 처자식 죽이고 나온 계백이는 안 미칫나, 모두 미친기라, 그래 그래, 전쟁은 미친 놈들의 짓인기라.” 그렇다. 전쟁은 미친 놈들의 짓이다!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영화 은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을 툭툭 건드리며 가벼운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몇 가지 우려할 만한 점들도 눈에 띈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든 반드시 있게 마련인 애국심에 대한 지나친 비아냥은 오늘날의 개인주의사상에 기반한 듯해서 불쾌하며, 어느 편이든 상관없이 모두 뭉퉁그려 싸잡아 비난하는 양비론적 입장은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명백히 외세의 힘을 빌려 같은 민족에게 총칼을 들이민 불행한 전쟁이었다. 신라가 당한 약소국의 수모를 김유신의 한마디 말로 얼렁뚱땅 넘기려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왕이면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을 이루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가볍게 웃고 넘기기에는 독소가 강하다.
영화을 보고...나 태어난 이 강산에.....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나는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 곁으로. 내 마음의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뎌라. 너희들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세상을 포근히 안아주는 봄볕에 사람들 가슴이 활짝 열리는 요즈음, 산수유 노오란 꽃망울이 희망의 노래인 양 가슴을 부풀게 한다.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고 했던가,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꽃물결이 엄혹한 시련의 나날을 상처로 품고 있어 더 눈이 부신 것 같다. 이렇게 따사로운 봄 하늘 아래, 살아있다는 존재의 충만감이 가득한 푸른 날에 기쁨보다 서글픔이 가슴 가득 밀물져오는 것은 왜일까?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은 희미해지거나 잊혀지고 사라져간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인간의 양심과 정의, 진실이 아닐까? 스물 두 살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사람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아름다운 청년노동자가 있다. 그이가 바로 전태일이다.이 시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이름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억눌리고 소외되었던 이 땅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였고,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졌던 시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불꽃이 되었던 사람이다.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사회에서, 재미와 가벼운 것들이 환영받는 영화풍토에서, 그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이가 지닌 따스하고 고결한 인간애와 순결한 영혼의 흐느낌, 맑고 깨끗한 양심, 정의의 외침, 분연한 결단에 부끄러움의 눈물을 떨구었던, 혹은, 높뛰는 고동으로 그이의 남은 삶을 기꺼이 선택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전태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이 모여, 그를 영화 속에 불러들였다. 영원히 우리가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의 단결로 만들어냈던 아름다운 기적이었으며, 영화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었던 그 영화, 박광수 감독의 이다.영화는 전태일의 삶을 뒤쫓는 작가 김영수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작가는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따라가며 현재를 살고 있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뒤돌아보고, 또한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고뇌와 고통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열 두세살의 어린 소녀들이 잠도 못 자고 주사로 잠을 견디고 배곯아가며 번 돈이 겨우 70원(당시 커피 한잔이 50원). 피 토하고 쓰러지면 치료비는커녕 쫓겨 날까봐 더 두려워하고, 허리도 펼 수 없는 작업장에 온통 먼지로 뿌옇지만 환풍기 하나 없는, 가난이 일상이라 도시락조차 먹을 수 없는, 화장실 한 번 가기 위해서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야 하는… 아무것도 아닌, 어쩌면 미물보다 못한 존재, 그것이 전태일이 살았던 60년대 노동자의 삶이었다. 태일은 어린 소녀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을 대신 해주기도 하고,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먼길을 달려 새벽녘에야 집에 도착하기도 하는 등 혼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보지만, 궁극적인 해결점을 찾지 못한다. 그러던 차에 그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눈뜨게 된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을 줄 모르는 우리는 바보다"라고 선언하며, 실질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향한 행동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러나 가진 자들과 권력자들의 담합 속에서 태일의 순수했던 소망은 갈갈이 찢겨나가고, 마침내 태일은 굳은 결심을 한다. 자신을 바치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참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영화을 보고..모든 예술은 그 안에 재미와 감동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회화든, 영화든. 그러나 재미와 감동의 두 마리 토기를 잡기란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재미있으나 감동이 없으면 시간 때우기로는 좋으나 금새 잊혀지고, 재미는 없고 감동만 있으면 뻔한 설교를 들은 듯 지루한 법이다. 공장의 상품처럼 1주일단위로 쏟아져 나오는 새 영화들, 하루에 한 편씩 보아도 아득할 정도로 쌓여있는 영화의 재부들. 하나의 예술작품에 앞서 잘 포장된 상품이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재미와 감동의 필요충분조건을 따진다면 까다롭다고 할까?오락과 흥미위주의 헐리우드 영화가 세계시장을 석권한 것은 오래 전 이야기다. 세계는 넓고 영화도 많겠으나, 언제나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는 영화는 한정적이다. 자본의 시장에서 살아남은 영화만이 상품으로 제 가치를 인정받아 널리 유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잃지는 말자. 따뜻하고 착한 시선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영화로 현실을 고발하며 그 힘으로 세상을 바꾸어 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발걸음 멈추지 않고 있다. 까다롭게 영화를 고른다는 것은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는 영화에 대한 기대이며, 진정한 애정의 한 표현인 것이다.품 들여 수고하지 않고 우연히 맞딱뜨리는 행운이 있다. 극장에서 본 이란영화,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이 내게 그러했다. 이란영화하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보기 힘들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가 제법 알려져 있고, 마크발바크 감독의 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났던 행운이었다. 국내개봉이 잘 안 된다는 말은 그만큼 상품가치가 없다는 것 일 테지만, 나는 이란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맑아지고 따뜻해졌음을 잊지 않고 있다.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해 준 멋진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테헤란 남쪽의 가난한 가정에 살고 있는 9살짜리 초등학생 알리는 아픈 엄마의 심부름을 갔다가 금방 수선한 여동생 자라의 구두를 잃어버린다. 5개월 째 집세도 내지 못하고 있으며, 외상도 가득해서 도저히 신발을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다. 하나뿐인 여동생의 한 켤레뿐인 구두. 알리는 울먹이는 자라에게 새 연필을 건네며 오빠 신발을 같이 신자고 달랜다. 다행히 동생은 오전반, 오빠는 오후반이었다. 결국 알리의 낡은 운동화를 같이 신게 되고, 두 사람은 학교를 오가며 신발을 갈아 신어야 했기에 수업시간에 맞추어 달리고 달려야 했다. 크고 낡은 신발이 부끄러운 자라, 그래도 오빠가 지각할까 두려워 시험도 푸는 둥 마는 둥 달려오기 바쁘다. 그러다 운동화가 물에 빠지고 마침내 자라는 울음을 터뜨린다. 알리의 고생담도 마찬가지. 아무리 달려도 지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교장선생님은 잦은 지각에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하신다. 그러던 어느 날, 교정에서 자신의 구두를 신은 아이를 목격한 자라. 콩닥콩닥 뛰는 가슴으로 오빠와 함께 그 애의 뒤를 밟는다. 그러나 그 소녀의 아버지가 장님이며 자신들보다 더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차마 구두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며칠 후 알리는 전국 어린이 마라톤 대회의 3등상 상품이 운동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생 자라를 위해, 한 켤레의 운동화를 위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되는 알리, 과연 3등 하기가 쉬운 일일까?영화의 줄거리는 한 켤레의 운동화를 번갈아 신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건 내가 겪으면서 살아왔던 어릴 적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야단 맞을까봐 서로 비밀로 하고 공책을 건네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며, 좋은 것이 있으면 동생을 챙겨주는 미안한 마음이며, 더러워진 신발을 씻다가 어느새 비누거품을 만들며 장난치는 모습이며, 금방 울먹이다가도 어쩌지 못하는 그 가난의 무게며… 어른들은 또 어떠한가? 설탕이 눈앞에 가득 있어도 자기 물건이 아니면 손대지 않는 정직함이며, 가난해도 이웃을 먼저 돌보는 인정이며, 가족을 위해 자존심 따위 애써 외면하기도 하고, 허풍일지언정 희망을 이야기한다.구두를 잃어버려 혼나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그로인해 또 빚을 내야 하는 집안형편을 먼저 생각하는 알리. 너무 빨리 철이 든, 그 아이의 어른스러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정원사 일을 마치고 부푼 꿈을 꾸다 한순간에 곤두박질 당하고 트럭에 실려오면서, 애처로운 눈빛으로 알리를 살짝 감싸안던 아버지의 모습. 그 말없는 부성이 후두둑 가슴을 훑는다.
영화를 보고...무릇 모든 예술은 그 사회상을 반영한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든, 아니면 에둘러 표현하든 그 속에는 시대적인 환경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녹아있다. 특히 (극)영화는 좀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이다. 사람이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생과 삶, 즉 인생을 다루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대중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는 두시간 남짓한 동안 울고 웃으면서, 나아닌 또 다른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한국영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37%가 넘는다고 한다. 관객동원이 100만이 넘는 흥행영화들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런 흥행영화들의 공통점이 지나친 폭력성이나 선정성, 아니면 가벼운 농담일색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볍고 재미난 것을 찾는 요즘 사람들의 기호를 반영해 상업적 이익을 올리는 것을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영화예술이 사람들에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고려해볼 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 같다.이러한 때에 적은 제작비에 숙련된 배우도 없이, 화려한 액션이나 긴박감 넘치는 스릴도 없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고 시냇물처럼 맑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의 물길을 만들어 낸 영화가 있다. 바로 이정향 감독의 이다.영화 는 7살 꼬마 상우가 엄마의 손에 끌려 한번도 본 적 없는 외할머니 집으로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일자리를 찾을 동안, 잠시 상우를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급히 서울로 돌아간다. 도시생활에 길들여진 꼬마 상우는 늙고 초라한데다 듣기는 하되 말조차 못하는, 난생 처음 보는 할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할머니를 ‘병신’이라 놀린다. 돈이 없어 게임용 밧데리를 살 수 없자 할머니의 고무신을 숨기고 그래도 성이 안차 요강을 발로 차버리고, 결국에는 잠자는 할머니의 은비녀를 훔치기도 한다. 그런 상우에게 할머니는 한없는 정성을 쏟는다. 켄터키 치킨을 먹고 싶다는 상우에게 닭백숙을 끓여주고, 나물 팔아 운동화를 사 신겨주고, 긴머리 짤라주고… 무엇이든 베풀어주고 그러면서도 미안해하는 할머니의 사랑 앞에서 상우는 조금씩 할머니의 정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상우는 다시 집으로 가게 되고, 할머니와 가슴 아픈 이별을 한다.영화 는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다. 할머니와 상우의 엇갈림들이 천진하게 펼쳐지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밤늦게 무서워서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없을 때처럼, 자신이 필요할 때만 할머니를 찾으며 온갖 투정을 부리던 상우가 할머니의 사랑을 조금씩 느껴가는 과정은 눈시울을 촉촉이 적시며 애잔한 감동을 준다.또한 이 영화에 호감이 가는 것은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혹은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외)할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을 끄집어내어 가슴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이정향 감독이 자신의 외할머니에게 바친다는 이 영화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대다수가 (외)할머니와 함께 했었음을 기억하게 하였고, 그의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하게 하였다. 외할머니의 이름으로 보여준 그 위대한 사랑의 실체는 바로 “모성애”이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아직까지 상우의 모습으로 성장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그 사랑의 추억에 눈물겨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