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한국의 외교정책Ⅰ. 외교정책Ⅱ. 한국 외교 정책의 배경과 특성1. 지정학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1) 개항 전의 한국외교정책2) 개항 후의 한국외교정책2. 이념적 요인Ⅲ. 한국의 각국 외교정책1. 對미 외교정책2. 對일 외교정책3. 對중 외교정책4. 對러 외교정책Ⅳ. 한국외교의 과제와 방향Ⅴ. 참고문헌Ⅰ. 외교정책외교정책은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고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기 위한 국가이익의 극대화를 위하여 타국의 행위를 자국에 유리하도록 유도하여 자국의 위신과 영향력을 제고시키는 것이라 정의된다.) 이와 같이 모든 국가는 그의 안전, 번영,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외교정책 및 외교관계를 갖게 된다. 한 국가의 외교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또 많은 국가와 우호적이고 협조적인 외교관계를 갖기 위해서 국가는 국제적 환경, 국가의 대내외적 상황에 잘 어울리는 입장이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국에 적절한 외교노선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Ⅱ. 한국 외교 정책의 배경과 특성한국의 외교환경은 특수하기 때문에 외교정책의 성격도 보편적인 국가들과 차이가 많다. 여타의 보편적 국가들과 달리 한국은 외교?안보적으로 분단, 전쟁, 적대적 대치, 의존적 동맹을 체결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처하여 있다. 한국외교정책의 특수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환경적 요인들을 세 개의 큰 변수로 분류하면, 주변국들에게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정학적 요인, 침략과 개입으로 점철된 역사적 요인, 극한 대립의 이념적 요인으로 나누어진다.)1. 지정학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극동에 있어서 중요한 교차점 또는 동북아 전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아시아 열강들의 주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주변 관련국들간에 역학관계에 따라 설명될 수 있다.1894년 7월 영국 외상인 킴벌리경이 “극동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을 중립화하든지 청과 일본이 조선을 분할?점령하자”고 제의하였다. 중국은 서울이 자기 점령 지역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이 제의를 수용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였다. 일본인들은 한반도의 반쪽만 점령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고, 일본군이 중국군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청일전쟁이 이 분쟁을 종식시켰는데, 한반도 분할협상에 대한 영국의 제의를 조선은 전혀 통보받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에 대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맞설 때 한반도는 분할의 대상이었고, 우리나라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 하였다.1) 개항 전의 한국외교정책조선의 대외관계는 주로 중국의 청나라와 관계로 제한되어 있었고, 그 관계는 주로 조공제도에 의해 규정되었다.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주로 조선과 대마도와의 관계로서 조선이 일본에게 은혜를 베풀어 부산 왜관에서 물자교역을 허락한 정도의 관계였다. 조선의 대외관계를 대국은 섬기고 일본과는 잘 지내는 사대교린주의로 단순화하려는 관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조선과 청과의 관계를 조선이 무조건 청을 사대한 것으로 보는 것은 조공제도의 참다운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또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는 동등한 관계로 볼 수 없다. 조선의 소중화적 우월의식이 저변에 깊게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대외관계는 지극히 단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지리적으로 중국 변방에 위치해 있었고, 중국의 우월한 군사적 배경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것은 조공제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2) 개항 후의 한국외교정책청은 조선과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여 무역상의 광범위한 특권을 얻었고, 또 이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조선과 청과의 무역장정체결은 청의 물질적 이득의 면 이외에도 한반도에서의 청과 일본의 직접적 대결로 발전되게 하였다.) 또한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선과 미국과의 수호조약체결이 되었고 이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2. 이념적 요인지정학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은 한국외교정책에 있어서 이념적 요인이 자리잡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었다. 분단에 의하여 적대적인 두 정부가 수립되면서 양체제 간에 극한적인 이념적 대결이 시작됨으로써 외교이념이 한국외교정책의 수립과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외교이념은 “외교적 행위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고 및 가치체계” 또는 “일국의 외교정책이나 대외관계와 깊이 관련된 주의?사상?관념?세계관 등 신념체계의 집합”으로 풀이된다. 남북한의 대립적 외교이념은 한반도 내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측면도 있지만 분단의 주역인 미국과 소련의 이념대결구도를 그대로 옮겨 왔기 때문에 한반도에 설립된 두 개 정부의 대외관계도 같은 틀 속에서 변화되어 왔다.)Ⅲ. 한국의 각국 외교정책1. 對미 외교정책한국은 외교정책상 거의 자율성을 갖지 못했다. 한국의 대외정책은 주로 대미정책을 의미하였고, 대미정책은 미국을 주로 믿고 의지하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대미정책의 이러한 속성은 미?소의 이데올로기적 대결구도 속에서 한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의 통제를 받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에는 주한 미국이 한국 안보의 대들보 역할을 해 왔다.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미국의 원조는 순수한 인류애의 차원에서보다는 냉전시대에서 미국의 국가 이익을 수호하고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공 되었다.미?소간의 대결이 종식되고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하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변화의 물결을 타지 못하고 냉전의 잔재를 그대로 간직한 채 분단이 존속 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다져진 구조의 틀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였다.현재 한?미관계는 과거보다 원만하며 확고한 동맹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미안보동맹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기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한반도의 통일에도 공헌을 할 것으로 기대되어진다. 이렇듯 한국에게 미국은 특별한 위치에 있으며 한국외교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2. 對일 외교정책식민통치에 대한 반일감정으로 이어지고 이승만 대통령의 철저한 반일노선이 한?일 관계를 악화하였다. 한?미 방위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으로 한국과 일본과 각각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던 미국이 한?일 관계를 화해하고자 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제 2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한?일 관계의 정상화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또한 자본과 기술의 도입이라는 경제적 이유 외에도 당시의 주변정세의 면에서도 한?일 국교정상화의 당위성이 있었다. 국교정상화 이후부터 정부수준과 민간수준에서의 정기적인 한?일간 회의가 개최되게 되었다.한국과 일본은 각각 미국과의 안보조약을 통해 간접적인 동맹관계에 있기는 하였지만, 한?일간 직접적인 안보협력은 터부시되었으며, 그 결과 협력이 크게 부족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가 위치한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함에 있어서, 특히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동참시키고 한반도의 안정을 확보함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일본이 우리의 대북 포괄적 포용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한반도 안정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포기시키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우리측과 긴밀한 협력을 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서 앞으로 이러한 양국간 협력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3. 對중 외교정책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한국과 중국 관계는 국제적 냉전과 지역적 냉전으로 인해 적대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었다. 특히 중국은 한국전쟁에 직접군대를 파병하여 북한과의 혈맹의 동맹관계를 맺었고, 한국과는 자연히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한국은 북한과 군사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을 늘 북한과 동일시하여 왔었다. 그러다가 국제적 냉전대결구도가 완화되고 중국의 유엔에서의 중국대표권 획득과 미국과 중국, 일본과 중국 관계가 정상화되어 가면서 북한과 중국의 동일시현상이 차차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또 중국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하였다.지리?역사?문화?감정이 가장 가까운 한?중 양국은 이데올로기, 생화풍습을 초월하여 교류?협력을 증진해가고 있다. 그러나 모순이 없을 수 없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11월 중국을 방문하여 ‘21세기 협력동반자 관계’임을 공동선언하고 폭넓은 교류?협력을 다짐했으며 많은 현안문제가 해결되어가고 있다. 한?중간 협력 동반자관계는 양국이 정치, 경제, 문화, 국민교류 등 다방면에 걸쳐 폭넓은 협력을 추구해 양국의 번영은 물론 동북아와 아?태지역의 안정,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21세기를 명실상부한 아시아?태평양 시대로 만들기 위해선 한?중 양국의 더욱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겠다.)
목 차-= 유 일 한 평 전 =-Ⅰ. 요 약Ⅱ. 유한양행의 기업정신Ⅲ. 기업가 정신ⅰ. 유일한의 기업경영 철학ⅱ. 기업신용ⅲ. 직원신뢰ⅳ. 공?사구분ⅴ. 투명경영ⅵ. 청빈과 근검절약Ⅰ. 요 약유기연은 1861년에 태어나 아홉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자립적인 인생을 개척해야만 하였다. 추수철인 가을에는 집집마다 찾아가 일손으로 품을 팔았고, 그 돈으로 명주와 삼베 같은 천을 다루는 옷감 장사를 하였다.그 중에 과부의 외동딸인 김확실(후에 김기복으로 개명)을 만나 27세의 나이로 결혼하여 6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이 바로 유일형(유일한)이였다.유기연은 노일 전쟁이 한국 땅에서 벌어질 것을 알고 그 피해가 염려 되어 장남이라도 미국으로 보낼 것을 결심한다. 마침 미국 선교사가 유학 보낼 한국인 아이 두 명을 찾고 있었고 유기연은 장남 유일형을 부탁하게 된다.유일형은 1904년 아홉살의 나이로 미국에 건너갔다. 처음으로 캘리포니아주 어떤 소학교에 입학은 하였지만 언어 풍속은 물론 인종까지 다른 곳이라 적응이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건너간 지 2년이 못 가서 가정이 폐가가 되어 학비 한 푼 부쳐주지 못하게 되었다.그래서 교회 목사의 소개로 36세와 38세의 독신 자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게 되었고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하였다.유일형은 16세가 되었을 때 자기를 돌봐준 두 자매를 떠나 헤스팅스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미국에서 고학하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가 신문보급소를 찾아가 신문배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신문보급소에서 유일형의 이름을 잘못 표기하여 ‘유일한’ 되었다. 유일형은 자신의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일본에게 주권을 뺏긴 상황에서 ‘유일한’이라는 이름에 잃어버린 조국이 담겨 있고, 하나의 대한제국이라는 의미와 세계 제 1의 대한제국이라는 의미도 돼서 아버지 유기연에게 개명할 것을 편지로 허락 받았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일한은 1916년 21세 때 미시건주 앤 아버에 있는 미시건대학에 입학하였다. 학비를 벌기위해 동양인으로서 할 만한 장사가 없는가 주변을 관찰하다 앤 아버에 꽤 많은 중국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중국의 향취가 배어 있는 동양의 제품들, 즉 비단, 손수건, 부채, 쟁반, 그 외 각양 일용품을 도매해 와서 장사를 하였는데 예상외로 큰 수익을 올렸다.졸업반 공부를 마친 유일한은 상과 전공를 살려 미시건 중앙철도회사 회계사로 취직하여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 직원으로 월급만 받아먹는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중국 제품 판매 같은 작은 규모의 장사가 아니라 대규모의 사업을 펼칠 계획을 세웠고 중국인뿐만 아니라 미국인까지 좋아하는 숙주나물 사업을 선택하게 된다.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처음에는 유리병에 담아서 운반하고 판매하는 방법을 고안했지만 운반이 용이 하지 않고 햇빛에 약하여 금방 말라버리는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중 여자친구인 호미리에 도움으로 숙주나물 통조림화에 성공했고, 대학 동창인 스미스와 동업하여 1922년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였다. 중국 음식점과 미국 가정의 쇄도 주문으로 4년 만에 50만 불이라는 경이로운 수입을 올렸다.미국에서 질 좋은 녹두를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중국이나 한국에서 녹두를 구입하여 숙주나물의 질을 높일 계획을 세우고 중국부터 방문하여 중국 상인과 계약을 맺은 후 한국에 방문했다. 방문한 한국은 어릴 적에 뛰놀던 동네 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일본식 건물들이 들어와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약해 보였다. 한국인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으면서도 약이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한국에서 사업하게 된다면 음식 장사보다는 의약품 수입을 먼저 해서 국민건강에 기여하는 사업부터 해야겠다고 느꼈다.유일한은 미국으로 돌아와서 ‘라초이 식품회사’와는 별도로 ‘유한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한국과 중국, 러시아 등지의 토산품을 취급하였다. 1925년 그 회사가 설립될 무렵, 호미리와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귀국하여 저번 한국 방문시 생각했던 사업을 구체화하기 위해 미국 의약품 수입업체인 유한양행을 설립하게 된다.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약품 판매 사업까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유일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철저한 공정을 거쳐 사업을 착수 하였다.사람들은 유한양행 의약품들이 미국에서 직수입되었다는 것을 알고 검증이 제대로 안 된 일본계 약품들보다 신뢰할 만하다고 여겨 차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유한양행은 의약품의 호응도에 힘입어 다른 종류의 제품들도 수입하여 판로를 개쳑해 나갔고 엄청난 수익률을 올리게 되었다.차츰 수익을 올리게 되자 유일한은 사업의 방향 전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약품을 비롯한 여러 미국 제품들을 수입해서 팔기만 하려고 회사를 설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였다. 약품부터 시작하여 유한양행도 직접 제조하여 파는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민족기업으로서 내실을 기할 수 있을 것이었다.유일한은 가정상비약만이라도 우선 직접 재조하여 팔기로 하고 소규모 시설을 갗춘 공장을 세웠고 점층적으로 확장해 나갔다.1936년 6월 20일 서대문구 본사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발족시켰다. 자본금은 50만 원으로 하고 이 자금은 금전출자와 현물출자로 충당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24일, 주식 1주당 액면가 50원씩으로 하여 신주 5천 주를 전액 불입하고 자본증가 등기를 마쳤다. 창업 이래 10년간 이어져온 기업의 개인 경영은 막을 내리고 새롭게 법인체로 거듭나게 되었다.유일한은 유한양행 경영뿐만 아니라 유한공고 같은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1965년 3월 유한공업고등학교가 개교되었는데, 개교되기까지 인가 과정이 복잡하여 예기치 않은 어려움들이 많았다. 유일한은 이 일을 위해 개인 주식과 대지를 내어놓았다.1969년 10월 30일 제 44기 정기주주총회가 열렸고, 이 총회에서 유일한은 생애 마지막으로 감당한 제 11대 사장직을 사임하고,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동탑산업훈장을 조권순의 목에 걸어줌으로써 사장직과 경영권을 그에게 완전히 이양하였다.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자신의 소유 주식 전부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유언장을 남긴 채 파란만장하면서도 올곧았던 76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Ⅱ. 유한양행의 기업정신첫째, 항상 국민보건을 위해 일해야 한다.둘째, 우리 민족이 일본 민족보다 못하지 않다.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일해야 한다.셋째, 유한양행은 결코 개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 길을 통하여 경제수준을 높여야 한다.
괴물 미쟝센 분석● 시작하며..괴물을 선택한 이유는 가장 간단히 말하자면 재미있게 본 영화 중 하나이고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단연 교수님께서도 이 영화를 보셨을 것으로 기대 되어 진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한국에서 1230만 관객을 돌파 하였으며 역대 한국영화 중 미국 박스오피스 100만 달러를 넘는 기록을 세웠다. 이에 이어 중국에서도 ‘한강괴물’로 개봉하여 중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다. 제 25회 브뤼셀 국제 판타지 영화제에서 대상격인 황금까마귀상을 받았다. 특히 심사위원단은 ‘괴물’은 “위대한 괴물을 창조한 영화”라고 평가하여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간단히 줄거리를 요약 하자면 평화로운 한강 둔치에서 강두의 아버지(변희봉)와 강두(송강호)는 매점을 운영하였다. 강두에게는 사고 쳐서 난 딸 현서(고아성)가 있었으며,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강두는 2남1녀중 장남이였고 둘째는 박해일, 막내는 여자 프로 양궁선수인 박남주(배두나)였다. 연구원들이 한강에 흘려버린 독극물 포름 알데히드로 인해 돌연변이 괴물이 생긴다. 그 괴물이 한강에 나타나서 현서를 잡아간다. 갑자기 나타난 괴생물체로 인해 한강은 모두 폐쇄되고, 도시 전체는 마비된다. 하루아침에 집과 생계, 그리고 가장 소중한 현서까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그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그들 스스로 현서를 찾게 되고 괴물과 맞선다. 마침내 괴물은 물리쳤지만 현서는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미장센 분석은 처음 접해보아서 낯설기도 했지만, 촬영 기법을 분석한다는 말은 왠지 모르게 흥미가 끌였다. 영화를 보는 것을 즐겼고 표출된 내용만 보았던 나로서는 한층 깊이 있게 들어가 더 영화를 이해하고 더욱 즐길 수 있게 된다는 희망을 가진 것 같았다. 이로 인해 유심히 관찰해 가며 영화를 한번 더 감상 하게 되었다.아버지 송강호가 하교하는 딸을 방기며 뛰어가는 장면으로 야외에서 촬영하였다. 자연광을 이용하여 전체적으로 환한 배경을 나타내었다.괴물이 송강호의 딸 고아성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을 잡아먹는 장면으로 수평각(eye-level)쇼트로 촬영 하였다. 또한 카메라가 피사체를 먼 거리에서 잡아주는 롱 쇼트 촬영기법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기법으로 이미지에서 보듯이 대상(고아성)이 잘 안보이게 된다. 괴물이 확실히 잡어 먹었는지 궁금증을 유발시켜 관객들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위 두 개 이미지는 딸이 괴물에게 잡혀가는 장면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정면과 측면에서 클로즈업을 하였다. 클로즈업을 함으로서 배우의 표정을 섬세하게 볼 수 있었다.아래 두 개 이미지는 딸을 잃은 상황에서 딸이 원하던 새 핸드폰을 사주기 위해 모아든 쌈짓돈을 바라보는 장면을 클로즈업하였다. 딸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다.고아성이 괴물 서식지인 하수구에 고립된 상황이다.첫 번째 이미지는 밑에서 피사체를 올려다보며 찍는 로우 앵글(low-angle)쇼트고두 번째와 세 번째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찍는 하이 앵글(high-angle)쇼트다.괴물 바이러스로 인해 병원에 격리된 가족이 딸을 구하기 위해 탈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촬영기사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핸드헬드 촬영이다. 이 효과로 쫓기는 가족의 긴박감과 현실감을 느끼게 해준다.매점 문 틈 사이로 딸을 잡아간 괴물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괴물에 대한 분노와 상황의 긴장감을 잘 나타내 주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이용하였다. 이 부분은 특히 두 배우의 얼굴을 교차하며 뚜렷히 보여줌으로써 배가되는 효과를 얻고 있다.괴물을 발견하고 쫓는 장면으로 카메라를 이동차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카메라 전체가 이동하며 촬영하는 달리쇼트이다.박해일이 괴물과 맞서다 죽은 아버지와 검거된 형의 현상수배 사진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현상수배사진은 점층적으로 클로즈업이 되어가며 박해일 얼굴과 교차했다.로우 키 조명을 이용하여 조명을 측면에 비춰 얼굴의 한쪽은 밝고 반대쪽은 어둡게 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억울하게 현상수배된 가족의 그리움, 여러 가지 심정이 잘 내포 되어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세계가 놀랄만한 고도성장을 이루어 왔다. 지속적인 경제성장과정에서 절대적 빈곤이라는 사회문제는 상당히 해결되지만, 상대적 빈곤이라는 개념으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Ⅰ. 소득의 집중도소득의 집중정도 즉 소득불평등 척도로 로렌츠 곡선, 지니 계수, 10분위 분배율 등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회지표에서는 국제적으로 비교가 용이한 지니계수로 나타내고 있다.ⅰ. 로렌츠 곡선에서 소득이 완전 평등하게 분배된다면 OP의 대각선이 되는데, 파란색 선이 완전평등선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소득분배가 이처럼 완전 균등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다. 가령, 인구의 40%가 소득의 20%를 갖고, 인구의 60%가 소득의 40%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를 표시한 것이 곡선 O에서 P까지의 둥그런 곡선인데 이것이 로렌츠 곡선이다. 즉, 로렌츠 곡선이 대각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소득이 더 불평하게 분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대각선과 로렌츠 곡선 사이의 노란색 면적을 불평등 면적이라고 하는데, 소득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이 면적은 크게 나타난다.로렌츠 곡선은 각국의 소득 분배 상태나 한 나라의 시기별 소득 분배 상태를 한 눈에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러 나라를 비교할 때는 나라의 수만큼 곡선을 그려야 하며 또한 계층 간의 불평등 정도를 시각적으로 밖에 판단할 수 없어 정확한 불평등 정도를 파악하기에 한계점이 있다.ⅱ. 지니계수에서 불평등 면적(노란면적)을 면적 OAP로 나눈 값이 바로 지니계수이다.지니계수는 0에서부터 1까지의 값을 가지며 0에 가까울수록 더욱 평등한 분배를 뜻하며 반대로 1에 가까울수록 더욱 불평등한 분배를 뜻한다.Ⅱ. 우리나라 소득 집중 현황년도별19961997199819*************2200320041분위3.23.22.62.72.92.93.02.72.52분위5.05.14.74.64.74.64.74.84.63분위6.16.35.95.85.85.75.86.16.04분위7.17.36.96.86.96.86.97.17.15분위8.28.38.07.97.97.87.98.18.26분위9.39.49.19.19.19.19.29.39.47분위10.710.810.610.510.510.510.510.710.88분위12.412.412.312.312.212.312.412.512.69분위15.115.015.015.014.715.015.115.015.310분위22.922.324.825.325.425.424.623.823.6지니계수(소득집중도)0.2910.2830.3160.3200.3170.3190.3120.3060.310※자료출처 : 통계청에서 1980년 중반 이후, 즉 경기가 안정되기 시작한 때부터 1997년까지는 지니계수가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1997년은 가장 낮은 지니계수의 0.283의 수치를 보이며 이때 우리나라의 소득이 가장 평등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IMF관리체제(98년)이후 지니계수가 계속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다 99년 0.32라는 최고치를 나타내며 그 뒤부터는 조금씩 하락했다.전체적으로 우리 나라의 소득 분배는 경제 성장과 함께 지속적으로 개선되어 왔으나 경제위기가 생기자 그 피해가 주로 저소득층에게 돌아감으로써 분배상황이 다시 악화되는 현상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자료출처 : 한겨레신문 2007년 9월 10일자에서보듯이 도시 근로자가구 중 소득 수준 상위 20% 계층과 하위 20% 계층 간의 소득 격차인 ‘5분위 배율’은 5.04배다. 즉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5.04배 많이 번다.전체 소득 격차에 견줘 재산 소득 격차가 더 심한 것은 가계가 보유한 금융자산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계층 간 금융자산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Ⅱ. 결론60년대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해왔지만, 분배라는 문제는 성장과정에서 도외시된 채 전반적인 소득불평등의 문제는 아직도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경제성장이라는 밀폐된 유리상자 안에서 분배라는 식물을 관리하며 길들여 왔다. 정치 선전적인 구호는 요란했지만 계층간의 상대적인 소득격차는 일정한 패턴을 유지한 채 정체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임시변통적이고 사후적인 대책에만 급급한 채 거시적이고 사전예방적인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거나 실시하는 데는 미흡한 면이 있다. 그동안 누적되어온 소득분배 문제는 어느 한 가지 정책처방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노동시장정책, 조세정책, 소득보장정책, 기회평등정책 등 다양한 정책들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실시해야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Ⅰ. 사회후생함수의 의미사람의 효용수준이 U₁, U₂로 주어졌을 때 다음과 같은 관계를 통해 사회후생의 수준(SW)을 그 함수값으로 나타내 주는 것을 사회후생함수라고 부른다.SW = f ( U₁, U₂)1, 2 두사람으로 구성된 어떤 한 사회에 대해 위와 같이 정의되는 사회후생함수가 존재한다면, 두 사람의 효용수준이 어떤 조합으로 주어진다 해도 그것과 관련된 사회후생의 수준을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이 함수만 알고 있으면 어떤 변화가 개선인지의 여부도 즉각 판단해 낼 수 있다.이 사회후생함수는 1과 2의 효용수준이 주어져 있을 때 이를 종합해 하나의 사회후생수준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함수의 성격은 두 사람의 효용수준을 어떤 가치판단하에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Ⅱ. 사회무차별곡선사회후생함수로부터 동일한 수준의 사회후생을 주는 U₁과 U₂의 조합들로 만들어지는 사회무차별곡선을 도출할 수있다. 어떤 사회후생함수가 내포하고 있는 가치판단의 성격은 바로 이 사회무차별곡선의 모양에 반영되는데, 그 가치판단의 예로는 공리주의적, 평등주의적, 롤즈적 가치판단이 있다.ⅰ. 공리주의적 가치판단사회후생함수는 다음과 같이 개인의 효용을 단순히 더한 것으로 사회후생을 정의하고 있다.SW = U₁+ U₂이 경우 사회후생은 두 사람 사이에 효용이 어떻게 분배되는지에 관계없이 단지 개인 효용의 합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특징이 있다.만약 사회후생함수가 이 형태를 갖는다면 이로부터 되출되는 사회무차별곡선은 과 같다.U₂기울기 = -1U₁ⅱ. 평등주의적 가치판단효용수준이 높은 경우에는 사회후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낮게, 그리고 효용수준이 낮은 경우에는 사회후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높게 반영해 계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부자들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소득을 재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의 유력한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평등주의적 가치판단이다.U₂?a (기울기 = -2)?b (기울기 = -1)?c (기울기 = ⅓)U₁평등주의적 가치판단을 반영하는 사회무차별곡선은 보는 것처럼 원점에 대해 볼록한 모양을 갖고 있다. 사회무차별곡선을 따라 a점에서 c점으로 이동해 갈 때 그 곡선 기울기의 절댓값의 크기는 작아지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a점에서 사회무차별곡선의 기울기가 2의 절댓값을 갖는다는 것은 2의 효용을 2단위 감소시키고 그 대신 1의 효용을 1단위 증가시키면 사회후생은 예전의 수준에서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1의 한계효용 1단위가 2의 한계효용 1단위보다 2배다 더 큰 사회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 된다.ⅲ. 롤즈적 가치판단U₂45?U₁한 사회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의 생활수준을 가능한 한 가장 크게 개선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이다. 소위 최소극대화의 원칙이라고 불리는 이 주장은 실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회후생함수를 그 배경에 깔고 있다.SW = min ( U₁, U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