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근현대사 보고서>백범의 혼을 담는다- 백범기념관 답사를 중심으로 -□ 목 차Ⅰ. 서 언Ⅱ. 백범 기념관을 찾아서ⅰ. 백범기념관을 답사하게 된 이유ⅱ. 백범기념관을 답사하며ⅲ. 백범기념관을 나오며Ⅲ. 백범 김구의 생애ⅰ. 치하포 사건ⅱ. 상해망명ⅲ. 해방 이후Ⅳ. 백범 김구의 서거에 대하여ⅰ. 사건의 진상ⅱ. 암살 관련 자료Ⅴ. 백범 김구에 대한 인물론과 사상Ⅵ.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사항 : 백범 연보□ 방문사진 ? 독후감 ? 시 별첨Ⅰ. 서 언2007년 여름, 경제부문에서는 많은 파장이 일어날 사건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수개월에 걸친 조사와 협의를 통해 2007년 11월 5일 한국은행은 2009년 상반기에 발행 예정인 고액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10만원권은 ‘백범김구’,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한국은행은 ‘백범김구를 화폐 인물로 선정함으로써 독립애국지사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통일의 길을 모색한 지도자로서 미래의 바람직한 인물상을 제시하는 등의 효과가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2007년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지폐의 도안 인물로 백범김구 선생님이 선정되셨을까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까?“나의 소원은 통일,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누구나 입으로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 국회의원이 그렇고, 장?차관이 그렇고, 고급공무원이 그렇고, 장성이 그렇고, 재벌이 그렇다. 그러나 입방정이 아닌,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고금을 통틀어 몇이나 될까? 다시 묻자. 당신은 진정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가? 만약 살아있다면 이 물음에 "그렇소."라고 답해도 한 점 부끄럽지 않을 사람 백범 김구(1876~1949).동학농민혁명의 청년장교이자 독립운동가, 명성황후 시해에 항의하는 뜻에서 일본인 장교를 처단한 의혈청년이자 교육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님의 기념관이 효창공원에 세워져 있다. 선생님이 가신지 53년이 지난 2002년에 순국선열들께서 흘리신 피와 땀과 눈물이 보이는 현장에서 무한한 감사와 함께 무엇인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아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 속 한켠에서는 아직도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선열들에게 보일 수 없다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한 없이 죄송스럽게 느껴졌다.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1919~1932),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1932~193 9)ㆍ한인애국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1939~1945)ㆍ한국광복군, 자주통일운동, 서거와 추모 순서로 전시가 되어있는데,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백범일지의 기록에 관한 자료들과 친필본 그리고 암살범에게 저격당할 때 입고 있던 선생의 혈의(血衣), 돌아가시기 전에 만들었던 데드마스크가 전시돼 있던 것이다. 전시물들을 차례로 돌아보는 것은 대한민국의 보통에 사람이라면 그냥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일 것이다. 백범 선생의 혈의를 볼 때는 과거의 그 날에 민족의 혼이 가시던 순간이 생생히 떠올라 자꾸만 참았던 목구멍 깊이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억지로 참지만 눈물이 맺히는 것까지는 막을 순 없었다. 본디 감상이 풍부하던 나였지만 보통의 애국심만으로도 이 모든 것을 느낄 수가 있을 듯 싶었다.「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전시장에서 보았던 글귀 중 유난히 나의 발목을 잡아 끌었던 문구이다. 백범선생님이 암살 직전 서산대사의 선시 한편을 휘호로 쓴 유묵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민족적 염원을 담은 독립활동에 대해서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의 후손들을 위해 남겨진 메시지가 영상화면과 함께 나의 가슴속에 찡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을 가슴에 품고, 태극기를 보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글귀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ⅲ. 백범기념관을 나오며백범 김구 선생옥은 하였지만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부인이 교원으로 있던 안신학교의 일을 돕다가 신천동산평의 농감이 되어 농장 내의 소작인들에게 근검절약, 상부상조의 질서를 가르치는 한편, 학교를 세워 자녀교육에 힘쓰도록 하였다. 술과 노름으로 일삼던 그 농장은 백범의 노력으로 희망의 새 동산으로 변화되어 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백범은 자유롭게 뛰어들지 못하는 자신의 가석방신세를 생각하면서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결단을 내린다. 망명이었다. 3윌 3일 사리원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넌 백범은, 1945년 11월 23일 그의 나이 70세에 환국하기까지, 27년간 근대사에서 가장 긴 시간을 버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붙들게 되었다.ⅱ. 상해망명대한제국 시기에 정열적으로 구국계몽활동을 벌이다가 세 차례나 투옥되어 10년 동안이나 잔인한 고문과 인천 부두 축조공사 등의 고된 노역에 시달렸던 백범 김구는 l919년 3.l운동이 발발하자 서둘러 망명길에 올랐다. 백범은 안동(安東)을 거쳐 독립운동을 돕던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선박 편으로 그 해 4월 l3일 상해에 당도하였다. 그날이 마침 3.l운동의 결정(結晶)으로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포일이었다.이름 구(龜)를 구(九)로 고치고 백범이라 자호(自號)하였던 김구는 안창호(安昌浩)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였다. 초창기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호는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백범을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백범은 임시정부가 그래도 활기찼던 초창기를 지나 안팎으로 존립의 위험이 닥칠 무렵 내무 총장에 선임되었다.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코자, 독립운동사상 최대규모의 국내외 대표가, 그것도 제제 창명한 인사들이 모두 상해에 모여, 신망있던 안창호와 김동삼(金東三) 등이 차례로 의장이 되어, 개최하였던 국민대표회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놓고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倉造派)로 분열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주석 김구가 환국한 것이다. 수백개로 난립한 정당, 좌우와 중립으로 노선이 분화된 정국의 수습은 이제 임시정부가 떠맡게 되었다.좌파의 인민공화국은 임시정부와 대등한 정부적 존재로 자처하였고,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임시정부 이상의 권위를 행사하려했다. 그런 가운데 한민당이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대립이 심화되어 자연 이승만과 한민당의 결속이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백범이 중경에서 계획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특별정치위원회의 구성도 쉬울 수 없었다. 그럴 때 1943년부터 걱정되던 신탁통치안을 노골화한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소식이 전해왔다. 그것은 12월28일의 일이었다. 5년 간의 신탁통치와 그 기간에 필요한 임시정부를 미소 주둔군사령관으로 구성된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가 한국의 정당과 협의하여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오자 백범은 곧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결의를 하고 각정당 대표와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하면서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것은 이미 추진하던 특별정치위원회의 대안이기도 했다. 백범이 선봉에 선전국적인 반탁열기와 반탁정변에 놀란 것은 미군정 당국과 인민공화국을 이끌던 좌파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장군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전부터 신탁통치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한 바 있지만 백범의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설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하지는 임정요인을 감금 추방할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반탁운동에 동참하고 있던 좌파가 놀란 것은 임시정부가 주권행사를 선언하고 나서면 그들의 인민공화국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니더라도 반탁운동을 통해 백범과 그의 임시정부가 전국민적으로 부상하여 인민공화국이 무척 격하되고 있었다. 그래서 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l일 임시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할 것을 제의하고 이튿날 10시까지 회담할 것을 요구했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정국에 맞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왜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을까?우선 암살의 주류 및 배후를 이루는 집단이 권력핵심에 또아리를 틀고 진상 규명작업을 막아왔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 국회에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강신옥)가 구성돼 95년 12월 조사결과를 발표했으나 이전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진상 규명작업이 안두희의 입에 너무 의존해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의 증언을 수시로 뒤집어 정작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준 측면도 많다.ⅱ. 암살관련자료① 1949년 6월26일 정오 조금 시각. 초여름 햇살이 눈부시던 일요일 서울 서대문 경교장 2층 거실에서 네발의 총성이 들렸다. 육군소위 안두희(당시32살)가 쏜 총탄에 백범 김구는 머리를 책상위에 얹고 손은 테이블 한 모서리를 쥔 채 쓰러졌다. 사건 뒤 체포된 안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곧 15년 형으로 감형되고 50년 7 월 소위로 복귀했다. 그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대령까지 진급했으나 이승만 정권 몰락 뒤 뜻있는 이들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암행을 계속 했다. 특히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등은 은신중인 안을 집요하게 찾아내 역사적인 증언을 이끌어내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애초 단독범행이라던 안은 일부 배후를 털어놓기는 했지만 계속 말을 뒤집어 진상규명작업을 혼란에 빠트리다가, 96년 10월23일 버스기사인 박기서의 습격을 받아 숨졌다."선생님이 안두희 총탄에 쓰러진 것과 거의 동시에 서대문서 경비주임 이 경교장으로 뛰어들어 왔어요. 그리고 잠시 뒤 군복차림의 정체불명 청년 4~5 명이 들이닥쳐 안을 지프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암살사건 당시 백범의 수행비서로 현장에 있던 선우진(77)씨는 31일 범행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는 경찰과 군 등 당국이 이미 선생의 암살작업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45년 말부터 백범이 암살되기까지 가장 가까이서 모신 측근중의 한사것이다.
를 읽고...“대~~~한민국~!”2002년 여름, 목청 터져라 외쳐대던 그 함성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붉은 물결이 하나 되어, 광화문 네 거리와 시청 앞 광장을 물들일 때, 북받쳐 오르던 그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환희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점입가경으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자꾸 귓가에서 ‘대한민국’이란 함성소리가 메아리치는 환청 속에 빠져들곤 했다. 두 손을 쭉 뻗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나라사랑을 확인하던 그 감정과 김구 선생님의 애국심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만약 광화문 네 거리의 붉은 물결 함성 소리를 김구 선생님이 들으셨다면,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회한에 잠기시지 않았을까 한다.현재 우리 사회는 애국심을 운운하기에는 너무도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다. 조금이라도 손해 볼까 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에게서 목숨을 담보로 한 애국심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듯 하다. 그래서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란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대적인 상황이기에 앞서 개인의 자질 문제가 아닌가 한다. 그 시대에도 모든 사람들이 다 애국자이지는 않았지 않는가? 하물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 송병준도 있지 않았는가? 특히 몇 년 전, 뉴스에서 송병준이 1억 5천 엔에 나라를 팔아넘기려 했던 녹취록에서 우리나라를 빼앗으려 했던 일본인들도 어이없어 했음을 알았을 때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꼈던 것이 기억난다.를 읽으면서, 수없이 자문해 보았다. 과연 이 시대가 진정한 독립의 반열에 올라 있는가? 문화적 자주성을 확립한 채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긍지를 살릴 수 있는 정신이 있는가? 과연 이 시대에 김구 선생님이 살아 있다면 울분을 토하며 자결하고 싶으신 생각이 없지 않겠는가? 민족이 무엇인지, 국가가 무엇인지 터럭만큼의 각성도 없는 밥벌레에 불고할 뿐이라고 호통을 치시지 않겠는가?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진다. 지역이기주의가 만연한 님비 현상과 이웃 간에 높다란 벽을 세워 둔 채 점점 더 높다랗게 쌓아올리는 불신의 벽은 또 어찌할 것인가?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는 옛날, 상놈과 양반으로 나뉘었던 시대처럼 또 다른 계급사회를 낳고 있지는 않는가? 분열과 반목을 동반한 채, 초등학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치 풍토를 보신다면, 정말 끔직하고 실망스러워, 다시 마곡사에 들어가 세상과의 인연을 단절하실 지도 모르겠다.고등학교 때, 독립기념관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다. 독립운동가 33인의 모습을 그대로 본 뜬 밀랍인형들 속에 동그란 검은 테 안경과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김구 선생님을 보면서 막연하게 가졌던 생각은 우리 현실과는 동떨어진 ‘먼 나라’ 사람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저 역사책 속에서나 봄직한, 시험점수를 잘 받기 위해 죽도록 외워대던, 역사 속 인물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경외심을 갖기 보다는 동그란 안경이 지적으로 보이게 한다든가, 두루마기가 잘 어울린다든가, 얼굴은 좀 못생겼다든가 하는 우스운 소리를 하며 지나쳤던 적이 있었다. 결코 어린 나이라고 할 수 없는 고등학교 시절이지만, 독립기념관이 갖고 있는 엄숙함과 박제처럼 서 있는 그분들이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솔직히 난 위인전에 나오는 훌륭하신 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위인전 속에 인물들이 주는 박제 같은 느낌이 싫었다. 태어날 때부터 훌륭한 사람들 같았고, 또 자라면서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영특함과 영민함을 두루 갖추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갖고 있는 특출함을 나처럼 항상 중간 정도의 평점만을 유지한 채 살아온 보통 사람들에게 자격지심을 줄 수 있는 대상밖에 더 되겠는가? 아무리 용을 쓴다 한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그들의 꼬리인들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위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은 그처럼 곱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는 기존의 위인전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관상서를 공부한 김구 선생님이 자신의 관상에 얼마나 비관하고 좌절했던가? 어느 한군데도 귀격, 부격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 몸에 천격, 빈격, 흉격밖에 없다 하지 않았는가?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의 한 구절을 보고,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으로 비관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어찌됐던 관상으로 보나 집안 내력으로 보나 그다지 좋은 조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김구 선생님의 조건들이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나에게 조금은 위안이 된 것도 같다.를 읽으면서 다른 위인전과 다르다고 생각한 결정적 이유는 걸러내지 않은 솔직담백함이다. 딱딱하고 정제된 느낌보다, 오히려 정제되지 않아서, 편안하고 가깝게 김구 선생을 느꼈던 것 같다. 한 장 한 장 읽으면 읽을수록 김구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시는 분이 어쩜 자신의 속내를 이리도 솔직하게 풀어 놓으셨을까?’‘ 위대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기에 김구 선생님에게 한결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으며, 오히려 존경심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그 중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병세가 위중한 아버님을 위해 허벅지 살을 베어내기로 결심하고, 어머님이 계시지 않는 동안, 왼쪽 허벅지에서 살 조각 한 점을 떼어, 고기는 불에 구워 약이라 드시게 하고, 흐르는 피도 드시게 하였는데, 왠지 적은 느낌에 다시 칼을 들어 그보다 크게 살 조각을 떼어내려고 할 때에는 처음보다 천백배의 용기를 내어 살을 베었지만, 살 조각은 떨어지지 않고, 고통만 심했다. 두 번째는 다리 살을 베어 놓기만 하고, 손톱만큼도 떼어내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 탄식했다. ’손가락이나 허벅지를 베어내는 것은 진정한 효자나 하는 것이지 나와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중략) 설한풍이 뼈에 사무치는 때 뜰에 상청을 설치하고 조문을 받는데, 독신상주라 나는 잠시도 상청을 비울 수 없었다. 살을 썰어만 놓고 떼어내지도 못해 다리는 고통이 심했지만, 어머님께 알릴 수도 없었다. 조문객 오는 것조차 괴로워 허벅지 살을 벤 것에 대해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떼어낸 허벅지 살의 고통을 참아내지 못해 후회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보통 위인전을 보면 ‘허벅지 살을 떼어낸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철주야 아버님을 잃은 슬픔에 목이 메여 말도 잃은 채 허공만을 바라보았다.’라는 식의 묘사 글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난 김구 선생님의 고통을 즐기는(?) 잔악무도한 의 독자로 기억될지도 모르는 영광을 감수하기로 했다.김구 선생님의 한평생은 험난한 파도 속에 던져진 조각배 같다. 어찌 보면 그 인생유전은 김구 선생님의 사상과 신념으로 더욱 거세졌을 것이다. 말썽꾸러기였던 어린 시절을 거치면서(이상하게 위인들은 말성꾸러기들이 많다. 만약 나중에 내 아이가 말썽꾸러기라면 야단치기에 앞서 혹시 위인이 될 재목은 아닌지 유심히 관찰해 봐야겠다.) 질풍노도의 청년 시기에는 숱한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동학’에 몸담았을 때에는, 그동안 익혔던 병법을 토대로 진두지취 했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해 인천옥에서 옥중생활을 겪기도 했으며, 또 마곡사에서 스님이 되기도 했다.‘너무 줏대 없는 종교관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을 읽고 난 후에는 그런 생각을 가졌던 내 자신이 부끄럽고 김구 선생님에게 죄스런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나는 공자 ? 석가 ?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지만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으로서 하여야 할 최고의 임무는 첫째로 남의 절제도 아니 받고 남에게 의뢰도 아니 하는 완전한 자주 독립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