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21st Anniversarry of the Gwangju Uprising-Colonialism, Authoritarianism, Democratization and Human Rights of the South East Asia-강연 요약본... (바로 다음에 수업이 있어서 한 명의 발표밖에 듣지 못했습니다)200112282 법학계열 안샘물'친일파"의 재등장과 한국 민주주의강창일 (배재대학교, 한일관계사)1. 친일파의 범주와 성격일제가 1945년 패망하여 쫓겨나기까지 근 40 여 년 동안,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을 통상 '친일파'라고 한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아래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일제의 한반도 강점에 협력한 사람들을 "식민지 1세대 민족반역자"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민족 분열정책에 의해 전향, 변절한 지도자들을 "식민지 제1세대 변절 부일파"라고 한다. 일제가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하여 실시한 황국신민 교육을 받고 자라 민족의 독립을 방해하여 민족을 배신한 자들을 "황민 부일파" 라고 한다. 1937년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을 도발하고 나서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칠 때 전쟁 참가를 독려한 자들을 "제2세대 변절 부일파" 라고 한다.2. 해방이후 '친일파'의 재등장해방이후 연합국에게 일제가 패함으로써 독립이 이루어지고, 미군정의 대한정책의 실패, 일제의 철저한 통제체제에 기인한 갈래갈래 찢어진 한국사회, 동서냉전의 기류 등의 배경을 등에 업고 해방이후 부일 협력자들은 재등장했다. 1948년 8월 건국되고 나서 반민특위의 활동이 무산되고 나서 부일 협력자들은 경찰, 군, 관계, 경찰, 법조계 등을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학계의 지도층으로 활약하게 된다. 부일 협력자들은 변절자인가, 황국신민인가를 묻지 않고 집단 세력화되어 갔다. 거기다가 1961년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 세력이 계속 이어져갔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이라고 비판받고 있는 한일 협정이다.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권력의 전면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전두환 등은 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지만 박정희 친일 집단으로부터 철저히 교육받은 적자이기 때문에 식민지 잔재 청산과 친일파 청산의 과제는 구호에 그쳤다.3. '친일파' 청산 운동의 함의한국은 해방 이후 장기집권, 군사 쿠데타, 유신체제, 군사정권 등 독재 권력과 통제체제로 자유를 억압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말살하면서 굴종적인 삶을 살도록 하였다. 민족정기가 제대로 서지 않는가 하면, 정의와 도덕에 대한 불감증으로 탈법과 탈세 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금전 만능과 졸부적인 천민자본주의가 판을 친다. 맹목적인 권력 지상과 권력 집중의 사회구조와 정신구조가 짜여져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이러한 병적인 풍조와 구조는 반민주적이고 반시민적인 사회를 만드는 토양이 되었다. 이것이 곧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친일파'는 반민족세력이고 반민주세력이며 반시민적이고 반통일 세력이었다. 민족분열을 일삼고 부정과 부패를 만연시킨 정의롭지 못한 세력이었다. 때문에 '친일파'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 유산의 청산은 민족 통일국가, 성숙한 시민사회의 형성이라는 '근대'의 완성을 위한 실천적 과제로서 한민족에게 부여된 임무라고 하겠다.
목 차Ⅰ. 들어가면서Ⅱ. 1980년대 말의 경제상황Ⅲ. 1990년대의 경제상황1. 경제사회발전구상(1)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2) 신경제 5개년 계획2. 결과Ⅳ. IMF 구제금융 체재1. IMF 경제 위기의 내용2. IMF 경제 위기의 원인(1) 경기 과열과 과다투자(2) 소비의 실패(3) 산업경쟁력의 위기(4) 비합리적 행위를 규율할 수 있는 매커니즘의 부재(5) 정책적 오류3. IMF 경제 위기의 결과Ⅴ. 나오면서Ⅰ. 들어가면서한국은 1962년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정부주도하에 국가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급진적인 공업화와 급격한 수출증대를 이룩하여 공업국과 수출입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0년대에는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함으로써 1인당 국민총생산 급속히 늘어나 국민생활수준도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 더 나아가 1980년대에는 소위 3저현상을 비롯한 대외여건이 혼전되고 국내에 있어서도 인플레도 수습되어 안정적 적정성장을 이룩하였다.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각종 보상 욕구가 분출되고 권위가 무너지는 등 경제외적 요인이 경제를 크게 압박하게 되었고,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렸던 여러 가지 사회 제반적인 문제들이 제기 되면서 1960년대 이래로 고도성장의 일변도를 걷던 한국에게 변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기가 한국경제가 선진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큰 전환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경제가 급격한 경제사회적 여건의 변화에 직면하자 정부도 1992년부터 시작되는 제 7차 5개년계획에서는 종전의 성장주의를 탈피하여 보다 내실있는 경제발전을 추구하기로수정하였다. 그리고 93년 2월 출범한 김영삼정부는 한국병으로 불리우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 7차계획을 폐기하고 이른바 신경제 5개년계획(93∼97)을 수립하여 국정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나 김영삼의 신경제 5개년계획을 바탕으로한 경제정책은 초기에는 의욕적으로 추진되어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구조적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고 그 결과대 후반에는 경제성장률의 둔화, 제조업의 퇴조와 서비스업의 비대화, 기업의 의지와 노동자 노동효율의 저하, 수출보다 내수를 겨냥한 투자증대, 무역적자시대로의 회귀,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의 저하 등이 나타나 경제불안을 가중시켰으며 총체적 난국) 경제위기 : 원인과 발생과정 이종규 저 한국은행 특별 연구실과 경제의 위기라는 표현이 실감날 정도로 제6차계획 후반기의 경제사정은 매우 악화된 상태를 보였다.) 한국경제의 이해 법문사 참조Ⅲ. 1990년대의 경제 상황1. 경제사회발전구상1990년대의 정부에게는 1980년대 후반 그리고 1990년대 초반에 드러난 한국경제의 위기를 타개책이 꼭 필요했다. 정부의 제7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92∼96)은 21세기 경제사회의 선진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한다는 기본목표아래 기업의 경쟁력강화, 사회적 형평제고와 균형발전, 개방 국제회, 통일기반조성 등을 3대전략으로 삼았다. 그러나 93년 2월 출범한 김영삼정부는 한국병으로 불리우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점(고임금으로 인한 국가경쟁력약화, 고물가, 부동산가격상승, 세계화의 무드에 제대로 대응하지못함 등)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 7차계획을 폐기하고 새로운 신경제 5개년계획(93∼97)을 수립하여 국정지침으로 삼았다.⑴ 제7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92∼96)정부가 제시한 제7차 5개년계획의 기본골격은 앞으로 우리경제의 규모와 구조가 선진화되고 남북통일기반이 조성되는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경제환경을 내실화·효율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내적으로는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선으로 향상되는 것과 함께 국민 생활양식이 달라지는 한편으로 남북간 교류가 확대되고 대외적으로는 개방화·정보화가 추진되는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사회 경제 전분야의 제도와 관행을 선진화 하겠다는 구상이다.이를 위해① 산업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② 사회형평과 균형발전을 촉진하면서③ 경제국제화를 추진해 나간다는 것을 3대 기본전략으로 삼고 하고 있다. 대체로 6차 5개년 계획과 줄거리를 같이 하고는 있지만 시장개방과 남북가 들어서면서 기존의 7차 계획 대신 신경제 5개년계획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신경제'란 지난 30년 동안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정부의 지시와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 경제 운용형태를 벗어나 정부와 민간이 모두 참여하여 함께 만들어 가는 경제라는 뜻으로 규정하여, 1980년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민간주도경제'와도 차별화 시켰다.신경제 5개년 계획의 기본골격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경제제도의 개혁이며, 다른 하나는 추진할 경제정책의 중점과제들이다. 경제제도의 개혁이 필요한 까닭은 국민들의 참여와 창의를 유발시키기 위한 것인데, 이를 위해 정부규제의 완화와 공정한 경제질서의 구축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경제제도의 개혁에는 재정, 금융, 행정규제, 의식개혁 등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중점적으로 추진할 경제 시책① 성장 잠재력의 강화 : 여기에는 기술개발의 촉진,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노사관 안정, 공정거래질서의 정착,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 및 농어촌사회의 개발 등이 주요수단으로 제시② 국제시장기반의 확충 : 이를 위해서 셰계화·개방화를 더욱 촉진시키며 후진국 대한 자본협력을 강화하고 남북경제협력을 증진시킨다는 것③ 국민생활여건의 개선 : 이를 위해서 주택난을 완화시키고 대도시의 교통난을 줄 줄이며 환경을 개선함과 동시에 사회복지를 증진시켜 나 간다.끝으로 신경제 5개년 계획에서는 현재 우리 경제가 급속한 활력감퇴와 경쟁력의 저하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보고 모든 경제 주체가 고통의 분담을 통해 신경제건설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즉 정부는 경비절감과 공무원 봉급인상을 억제하며, 기업은 경영혁신을 추구하고, 근로자는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하고, 농민은 추곡수매가 인상의 요구를 자제하며, 가계는 절약을 체질화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임금인상→물가상승→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 결과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의 실시, 세계화추진 등을 국가정책으로 설정하였다. 특히 이때 실시된 혁신정책은 기적이란 찬사를 받아 왔던 우리 경제는 97년 말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를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IMF구제금융이란 치욕적 상황을 빠져들었다. 대기업의 부실화로 말미암은 금융기관의 부실이 대외신인도의 급락을 초래하였고 이것이 바로 외환위기로 이어져 마침내 IMF의 구제 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1.IMF경제 위기의 내용1997년 말 외환위기 형태로 표면화된 1997년 경제위기는 불경기-교역조건 악화-기업부도-금융위기-해외외환위기의 파급-외환위기 등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나타났다. 외환 위기 이후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시 기업부도-금융위기 등이 재차 반복되는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1997년 경제위기는 과거의 경제위기와는 달리 우리나라 ㅏ경제시스템 전반에 내재된 문제점이 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위기 : 원인과 발생과정 이종규저 한국은행 특별연구실1996년 경기는 비교적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1994∼1995년 중 적자를 지속하던 경상수지는 1996년 적자폭이 GDP의 5% 수준에 육박하는 230억 달로로 확대되었다. 경상수지 적자 확대는 반도체 등 주요 수출품의 가격하락으로 수출신장세가 둔화된 반면 수입이 꾸준히 증가한 데 주로 기인하였다. 특히 1996년 중에는 수출물량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수출단가가 큰폭으로 하락함으로써 수출 채산성이 악화되는 상황이었다.경상수지 적자폭이 확대됨에 따라 총대외지출부담이 1995년말 1,200억 달러에서 1996년 말 1,600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자료 : 한국은행 국제부(1998)경기 둔화 등의 영향으로 기업부담이 증가함에 따라 1997년 들어서는 기업부도가 확산되고 그에따라 금융기관의 부실도 누적적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을 필두로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등 대기업의 부도가 이어졌다. 대기업 부도는 한국 경제의 잠재적 병폐) 정경유착, 연고자본주의 등가 표출되는 계기가 됨으로써 대외신인도를 하락시키는 결정적인화조달이 어려워진 국내 금융기관들은 국내외환시장에서 결제용 외환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상응하여 한국은행은 보유외환을 공급하여 국내금융기관의 외화자금수요를 충족시켰으나 금융기관들의 신인도가 회복되지 않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외환보유고가 소진되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IMF에 긴급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었다.1997년 경제 위기는 여러 유형의 위기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며 그에 따라 그 성격도 기업위기, 은행위기(금융위기), 외환위기, 정책적 위기 등 여러 가지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경제시스템 전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파국 직전에 다다랐을 정도로 파급 범위가 넓었고 그 영향도 심대하였다.2.IMF 경제위기의 원인(1) 경기과열과 과다투자엄청난 외채를 동반하여서 결국은 기업과 금융기관의 부실을 가져온 일차적 요인은 국내의 저축률을 상회하는 기업들의 높은 투자(투자수요가 국내 저축을 초과할 때 기업은 투자재원을 해외로부터 조달한다.), 그 중에서도 중복과잉투자에 있다. 이는 곧 수익성의 하락과 부실화를 확대시키면서 국제수지 악화를 초래해 경제 전체를 위기로 몰아 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효율적 중복과잉투자는 재벌기업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 , 거품을 제거하는 고통스런 구조조정을 하기보다는 경기를 인위적으로 떠받치는, 인기를 의식한 무리한 성장정책을 실시한 정부도 이러한 중복과잉투자 확대를 용인했다고 할 수 있다.정부가 발표한 통계에서도 입증이 된다. 한국이 해외로부터 차입한 달러를 주제별로 보면, 97년 11월말 현재 금융기관이 1115억 달러, 기업체가 434억 달러, 그리고 정부 공공차관이 20억 달러로 합계 1569억 달러이다. 그러면, 이렇게 빌려온 달러는 누가 어디에 주로 썼는가? 대부분의 달러는 궁극적으로 재벌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외채의 가장 많은 부분은 바로 투자 목적, 그것도 중복과잉투자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2) 소비의 실패한국인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먹고살아야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러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법학계열 1학년 02분반200112282 안 샘 물Ⅰ지금 전 세계의 이슈는 뭐니뭐니 해도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이 중심이된 서방세계간의 전쟁이다. 9.11 월드트레이드센터 테러의 보복전의 성격을 띠는 이 전쟁은 주변 상황과 역사를 살펴보면 초 강대국 미국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와 그것에 반대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간의 싸움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냉전의 시대가 끝나면서 세계는 안정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 아니라 새뮤얼 헌팅턴이 예언한 대로 "문명의 충돌"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문명의 충돌의" 한가운데에 바로 종교가 자리 잡고 있다. 중동에서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근본주의의 첨예한 갈등, 북아일랜드의 개신교와 가톨릭 갈등, 인도와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지에서 진행중인 종교분쟁) 종교다시읽기 한국종교연구회 지음 p.6, 그뿐만 아니라 레바논에서의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 수단에서의 북부 이슬람 아랍 세력과 남부 기독교 흑인 세력간의 갈등등 세계각지에서 종교로 인한 분쟁이 진행중이다.한국의 종교는 한민족 특유의 다원주의적 삶의 태도와 다원주의적인 종교문화로 철저한 다종교, 다교파, 다종파 상황의 전형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불교, 유교,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 천도교 그리고 최근에 들어온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이원규, 종교 다원주의 상황과 한국교회-Peter. L. Berger의 사회학적 이론을 중심으로 ,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제3세계신학연구소게다가 많은 수의 교파(종파)들이 이들 종교 가운데서 나누어져 공존하고 있다. 여기에 민중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민간신앙까지도 고려한다면 한국 사회는 가히 종교의 전시장이라 할 수 있다.세계의 일련의 분쟁들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종교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타 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특히 한국의 종교적인 상황을 보면 다원화된 종교간의 이해에 대한 고민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라 할 수 있다.Ⅱ타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 바로 배타주의와 포괄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이다. 배타주의는 '진리는 오직 하나이고, 그것은 우리 종교에만 있다'는 태도이다. 그리고 포괄주의는 '온전한 진리는 우리 종교에 있지만 다른 종교들에도 부분적이긴 하지만 진리가 있을 수 있다'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원주의는 '종교들이 제시하는 진리는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진리로 수렴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중에서 대부분의 종교학자들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할 건전한 관점은 다원주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원주의가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정답을 주지는 못한다. 사실 종교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배타성을 가져야 한다. 종교적 믿음이란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을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검증 가능성 여부를 떠나 나의 실존이 무언가를 총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다시읽기 한국종교연구회 지음 p.39그런 배타성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종교를 믿는다고 할 수 조차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적인 배타성이 문제되는 것처럼 극단적인 다원주의도 극단적인 상대주의와 다를 바가 없게 되 버린다.Ⅲ그렇다면 우리는 타 종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것은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을 두가지로 나누는 것에서 먼저 시작해야 한다.종교 내부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어느 정도 종교의 배타성을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종교, 즉 죽음과 그 죽음을 우리에게서 구원해 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의 문제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것은 바로 종교 내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종교를 믿고 또 그 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을 믿는 사람은 적어도 그 종교안에서는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그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이성의 관점에서 이것은 어째서 틀렸고 저것은 또 어째서 틀렸다고 재단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의 진리만을 믿고 있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배타적이라고 몰아붙이면, 결국은 어떤 종교도 인정하지 못한채 극단적 냉소주의에 빠지고 말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은 그 종교 안에서 인정해야 한다.그러나 종교 외부적 관점, 즉 사회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바라볼때는 종교는 다양한 문화현상중의 하나) 조윤호 전남대학교 교수님의 현대의 종교 2001년 9월 3일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업중에...
"인도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 그는 반영·독립운동을 하다가 몇 번이나 감옥에 갇히면서도 일관해서 폭력을 배제하고 제 2차 세계대전 후의 인도독립을 쟁취한 국민의 영웅으로서 사후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한층 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간디 자서전은, 간디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간디는 4가지 계급 가운데 3번째에 해당하는 바이샤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상이었고 간디에게는 3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있는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간디는 아버지로부터 정치가의 자질을, 힌두교의 열렬한 신자였던 어머니로부터 종교적 자질을 이어 받았다. 13세 때 간디는 같은 나이의 상인의 딸과 결혼했다. 어린 간디는 결혼생활 때문에 학업을 게을리 한 적도 있었다. 간디의 유아기 성격에 관해서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다. 누가 조금만 괴롭혀도 금방 울곤 했다.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거나 또한 꾸중을 들을 것 같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단 한번 체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체벌 그 자체보다도 정신적인 면에서 매우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너무 슬픈 나머지 엉엉 울었다"간디는 삼촌이 담배를 즐겨 피웠기 때문에 그 흉내를 내어 담배를 피운 적도 있었다. 담배꽁초를 주워서 몰래 숨어서 피웠는데 결국에는 하인이나 형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서 담배를 사서 피우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자신이 한 일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그 괴로움은 날로 심각하게 되어 마침내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간디는 모든 것을 고백한 노트를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에게 가지고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꾸짖지 않았다. 비난도 하지 않고 아무런 벌도 주지 않았다. 단지 잠자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간디는 그 아버지의 숭고하기까지 한 관용에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후 훔치는 것은 물론 담배도 완전히 끊었습니다.간디의 어린 시절을 보노라면, 먼저 간디도 우리 '보통사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지금부터 노력하면 간디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너무나도 순수했다는 점. 우리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것은, 벌써 그때부터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로서의 싹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정직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직한 가치관을 지켜온 간디가 부럽기만 하다.간디의 어린 시절을 지나 그 다음의 생애를 간디 자서전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인 1888년 9월, 영국으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1891년에 변호사가 되어 인도에 돌아온다. 1893년까지 인도에서 활동하던 간디는 중요한 사건의 변호를 위해 당시 영국의 또 다른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로 향하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간디의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간디는 1등 석의 차표를 가지고도 백인에게 기차에서 쫓겨나는 경험을 하고 나서 독립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20년 동안 남아프리카에 머물면서 그곳의 인도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그는 수 차례의 투옥을 비롯해서 온갖 고초와 굴욕을 겪으면서도 투쟁을 해나간다. 그는 이곳에서 '싸떠그라하 운동을 벌인다. 이 싸떠그라하는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으로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의 기본 교리인 아힘사(비폭력)를 그 근본으로 하고 있다. 결국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무저항 운동을 펼쳐 인도인들의 많은 권리를 찾아 주었다.이미 남아프리카에서의 활동으로 유명해진 간디는 1915년 귀국하여 인도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남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인도에서도 '싸떠그라하'를 펼치죠. 그는 소금행진 등 3차례의 대대적인 운동과 11회의 단식을 통해 영국에 저항하였고, 인도국민회의를 강화한다. 이렇게 인도의 독립 운동에 몰두하던 그는 1930년대 이후에는 주로 사회 문제에 전념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힌두 사회의 체질 비판, 불가촉 천민의 구제, 무슬림과 힌두 사이의 대립 완화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에 반대하여 통일된 인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인도는 나뉘어 독립을 하게 된다. 또한 분리 독립 후 벌어진 서로에 대한 학살을 저지하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행하기도 한다. 인도가 통일이 된 후인 1948년 1월 20일, 그는 공개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중 '나투람 고드세'라는 힌두 광신교도가 쏜 총에 쓰러지고 말죠. 그는 쓰러지면서 '헤, 람(신이시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간디 자서전의 부제는 바로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 이다. 그 부제를 보면서, 이 책과 정말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는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와 일화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고 진리에의 끝없는 정진의 모습을 보여준다.간디의 사상은 바로 "싸떠그라하"라는 말로 표현 할 수가 있다. 싸떠그라하는 "진리 파지", 즉 진리를 깨닫는다는 의미다. 독실한 힌두교도였던 간디는 이 진리라는 것을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싸떠(진리)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는 "신이 진리다"라는 말보다는 "진리가 신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한 표현이라고 했다. 싸떠그라하는 바로 인도 독립운동의 기술로 사용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아힘사 (비폭력)이었다. 간디는 아힘사의 방법으로만 진리, 즉 신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이 아힘사를 고수하였다. 즉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완벽한 진리를 깨달을 수는 없고, 완벽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이 아힘사라는 힘을 빌려야 한다고 한 것이다. 아힘사는 인도의 종교인 힌두교, 불교 , 자이나교의 기본직인 원칙으로 단순히 남을 해하지 않는다는 수동적인 의미보다는 남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뜻했다. 그래서는 간디는 아힘사란 말과 사랑이라는 말을 동일시 하였죠. 또한 간디는 사떠그라하를 펼침에 있어서 타인이 고통받는 만큼 자신도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자기 스스로 당하는 고통을 비폭력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고요, 이러한 고통은 자신이 힘이 없어서 당하는 것이 아닌 폭력을 충분히 휘두를 능력이 있음에도 고통을 당하는것을 의미했다.간다 자서전에 있는 이런 간디의 표현은 진리의 구도자로서의 간디와 그 진리를 아힘사라고 생각한 간디를 너무나도 잘 드러내 준다."생명 가진 모든 것을 평등시하는 것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 정화가 없으면서 아힘사의 법칙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의 허망한 꿈일 뿐이다. 혼이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실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정화는 생활의 모든 행동의 정화를 뜻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정화란 지극히 옮아가기 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정화는 필연적으로 자기의 환경 정화에까지 가고야 만다. 그러나 자기 정화의 길은 좁고 험하다. 완전한 정화에 이르려면 생각으로나, 말로나, 행동으로나 절대적으로 정욕을 버려야 한다. 사랑과 미움, 친밀과 소원(疏遠)의 대립으로 되는 세속의 흐름을 초월해야 한다. 나는 내가 끊임없이 쉬지 않고 노력은 하면서도 아직도 내 속에 그 세 겹의 정결히 되어 있지 못함을 안다. 세상의 칭찬이 내게 달갑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슴을 찌르는 때가 많다. 교활한 정욕을 정복하기란 내가 보기에는 무력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인도에 돌아온 후도 언제나 내 속에 보이지 않게 정욕이 잠재해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그것을 알게 될 때 낙심은 않지만 부끄러움을 느낀다. 경험과 실험은 나를 붙들어 버티게 해주고 기쁨을 준다. 나를 무(無)에까지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제 스스로 자기를 동료 피조물 중의 맨 끝에 세우지 않는 한 그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아힘사는 겸허의 궁극점이다."
국화와 칼-집단주의와 수치의 문화-동양문화사 리포트처음"국화와 칼" 라는 책이름에서부터 느낄 수 있듯이 이 책은 일본 문화에 대한 일종의 분석서이다.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은 미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의 행동을 연구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미 국무성은 이 책의 저자인 루스 베네틱트에게 연구를 위촉한다. 저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일본이라는 땅에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였다. 이것은 문화 인류학자에게 있어서 큰 치명타였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대부분 연구할 나라에 대해서 알기 위해 그 나라를 방문한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루스 베네딕트는 그러한 절차를 거치지 못하였다. 즉, 그녀는 문헌과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통하여 그들의 사상과 문화에 대해서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학문의 연구에서 그 대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보다 엄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객관성을 확보했다.이 책은 보통 문화 인류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문화 인류학이란 무엇이며 이 책은 어떤 문화 인류학적 인식에 근거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류학이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학의 정의라면 철학의 정의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대학을 가보면 철학과는 인문대학에, 인류학과는 사회 과학 대학에 있다. 그것은 인류학은 사회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학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는 학문인 것이다. 문화 인류학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류의 가치는 똑같다 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인류학자들은 중동 지역의 일부 다처제를 분석하면서 "왜 그 사람들이 일부 다처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가"에 주목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연역적으로 연구하는 것. 그것이 인류학자의 첫 번째 목표이다. 어느 민족이 뛰어나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등의 평가는 아무 쓸모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 식이 아닌 그들 식의 잣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문화 인류학적 특징은 이 "국화와 칼"이라는 책 전체에 흐르고 있다.중간먼저 이 책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처음' 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한 나라의 평범한 국민생활을 주의 깊게 관찰함으로써 미개부족이건 문명국이건 인간의 행동은 일상생활 속에서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행위란 아무리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당사자에게는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는 것이며 그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라는 전제 속에서 서양인이 본 일본을 진술하고 있다.이 책은 13장에 걸쳐서 바로 일본인이 일본인답게 하는 것, 외부인에게는 일관성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인의 행동과 성격'을 써내려 갔다. 1장에서는 연구 과제를 일본으로 정하고, 2장에서는 전쟁중의 일본인에 대해 다룬다. 제 2차 대전을 일본은 '미국의 물질과 일본의 정신과의 싸움'으로 생각했다. 무모하게도 보이는 일본의 임전태세는 정신을 우위에 두고 천황에 대해 무조건 충성하는 일본인들의 문화적 태도를 반영한 것이- 1 -다. 그리고 전쟁 중 포로가 된 일본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항복을 죽는 것보다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3장과 4장을 통해서 일본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는 말이다는 것을 제시하고 그런 맥락에서 메이지유신을 분석한다. '각자가 자신에게 알맞은 위치를 갖는다' 라는 말은 그들의 질서와 위계제도를 신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신봉하는 서구인들의 가치관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이들은 위계제도를 존중하는 것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데 그것은 절대로 '강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위계 서열은 가족 내의 연장자와 연소자 간, 남자와 여자 사이에 모두 적용되는데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연장자나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존경을 표시하여야 하고, 반대편은 그만큼의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연장자의 특권은 그가 마치 폭군처럼 멋대로 권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정신적 재산의 관리자와 유사한 행동을 하게 된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일가의 명예를 유지하는 강한 책임을 갖게 되는 것이다.천황은 바로 '알맞은 위치'의 최 상부에 존재한다. 따라서 아래로는 천민에서 위로는 천황에 이르기까지 위계제도가 빈틈없이 짜여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은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지도처럼 정밀하게 규정되고 모든 사회적 행동이 정해진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작가는 5장 6장을 통해서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빚을 지고 있다'는 개념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빚은 서양적인 의미에서의 'obligation'이 아니라 의 즉, '같은 시대에 포함되는 공동채무의 거대한 망상조직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이다. 은혜란 윗사람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나는 누구에게 의무의 부담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신과 동등한 사람에게 은혜를 입을 경우 일본인들은 불유쾌함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이때 일본인이 표현하는 용어는 '나는 모욕을 받았다','나는 감사한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최대의 은혜란 천황으로부터 입은 것이며, 그 아래에 아이들이 부모에게 지는 은혜가 있다. 모든 사람은 이것을 갚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은혜를 입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나 그것은 곧 부채이기 때문에 반드시 갚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보답은 천황에 대해서는 충으로, 부모에 대해서는 효로 표현된다. 이러한 의무는 강제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것은 제한된 관계에서만 적용된다. 일본 군인의 용감성은 바로 천황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인 것이다.그런데 7장과 8장에서 은혜에 대한 의무는 의리와 같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 의무는 가까운 육친의 세계에서 조국과 천황에 대해 지는 것이며, 태어나자마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의리는 '본의 아니게 되는 것',달리 말하면 계약관계의 이행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일본에서 '의리를 갚는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서 '의리를 지키지 않는 인간'이라는 지칭은 그 사람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다. 의리를 지키는 것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이름에 대한 의리는 자기 위치에 맞는 예절을 다하는 것에서 직업적 명성을 드높이는 것,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 복수를 행하는 것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일본인들이 모욕당하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고 패배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2 -이 책에 의하면 자신에 대한 공격(자살)과 타인에 대한 공격(전쟁의 도발)은 사실 의리를 지키기 위한 행위의 두 가지 표현일 따름이다. 패전 후 일본이 미국인의 예상과는 달리 점령군에 그토록 호의를 보인 것도 사실상 패전국으로서의 명예를 옹호하는 쪽으로 모든 주의를 전화시켰기 때문이다. 불변한 것은 명예의 추구이다. 일본인들은 태도의 변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이름에 대한 의리'의 밝은 면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김동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참조했습니다.)그리고 9장 인정의 세계 10장 덕의 딜레마 11장 자기수양 12장 어린아이는 배운다 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일본 문화의 일반적 특징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패전후의 일본인들의 상황에 대해 분석한다.국화는 일본의 황실을 상징한다. 일본인들은 나라꽃인 벚꽃보다도 국화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꽃들이 피지 않는 차가운 가을에 홀로 피는 국화는 깨끗하고 청결하고 조용하고 엄숙하고 고귀하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한다. 역자는 "국화와 칼" 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그렇게 예의 바르고 착하고 겸손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일본 사람들 속에 무서운 '칼'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흔히들 일본인의 양면성을 설명할 때 '국화와 칼'을 자주 인용하는데 국화는 일본인의 친절하고 축소 지향적인 면을, 칼은 날카롭고 잔인하고 합리적이며 확대 지향적인 면을 나타낸다. 이러한 양면성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다테마에'(의례적인 태도)와 '혼네'(본심)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