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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어]제망매가,처용가 에 나타난 배경설화 및 문학적 표현기법
    【목 차】0. 서 론. 향가의 개념가. 향가의 형식나. 향가의 사적전개다. 향가의 작품세계라. 향가의 문학사적 의의1. 본 론. 祭亡妹歌에 나타난 배경설화 및 문학적 표현기법(0) 개 요(1) 배경설화(2) 내 용가. 處容歌에 나타난 배경설화 및 문학적 표현기법(0) 개 요(1) 배경설화(2) 내 용2. 결 론3. 참고문헌0. 서 론. 향가의 개념(0) “향가”의 명칭 : 혁련정(赫連挺),「균여전」에 그 명칭이 처음 기록됨.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일연(一고전문학사 향가국문학사 향가然)의「삼국유사」등에 사용, 적어도 11세기부터 사용. 도솔가(兜率歌), 사뇌가(詞腦歌), 시내가(詩內歌), 사내악(思內樂) 등으로도 불림.(1) 향가의 개념 :() 한자의 음(音), 훈(訓)을 빌어적는향찰(鄕札)표기에 의해 기록된 신라,고려시대의 시가(가) 향가가 노래로 가창되고 전승되다가 나중에 그것을 향찰로 기록∴향찰표기가 아닐수도(나) ‘향(鄕)’ - 향가를 범패(梵唄)와 찬불가(讚佛歌)와는 대립적인 위치인 우리말 노래(다) 「삼대목」: 향가가 진성여왕 시대의 주류적인 양식이었고, 많은 호응으로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음을 의미(라) 현전하는 향가 : 「삼국유사」14수 +「균여전」11 수 = 25수의 시가를 지칭가. 향가의 형식(2) 4구체 :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민요적 시형 예)「서동요」,「풍요」,「헌화가」(3) 8구체 : 4구체 + 4구체(4) 10구체 : 8구체 + 감탄사로 시작되는 낙구(落句) 2구(5) 4구체에서 10구체로의 발달 : 공동의 노래에 기초한 민요적 성격 → 개인의 서정을 담는 정서의 확장을 의미나. 향가의 사적전개(0) 상고시대 : 4구체 민요격 향가인「서동요」→8구체와 10구체의 발생(1) 신라 진평왕 대 :10구체의「혜성가」등장 (「삼국유사」) → 사뇌가의 효시가 되는 작품※「혜성가」: 불교의 이념 + 유교적 제도 + 무속의 전통 → 신라시대의 사회상 반영 상위계층의 향유 → 공동의식적, 정치적 성격(2) 통일신라시대 : 사뇌가() 일대적 유행 성을 뚜렷히 형상화1. 본 론. 祭亡妹歌에 나타난 문학적 표현기법(0) 개 요제망매가와 같은 향가는 모두 배경설화를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고전시가들이 시로써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시와 이야기가 하나로 결합된 종합 예술의 형태도 전승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전의 시들을 고전시라 하지 않고 고전시가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망매가 역시 그 배경설화를 가지고 있다. 제망매가의 배경설화를 살펴보도록 하자.(1) 배경설화신라 서라벌의 사천왕사에는 피리를 잘 부는 한 스님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월명이었는데, 피리의 명수인 월명이 일찍이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 가기를 멈추었다. 그래서 그 동리 이름을 ‘월명리’라 하고, 그의 이름 ‘월명’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그는 향가도 잘 지어 일직이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릴 때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노래를 불러 제사를 지냈더니, 문득 광풍이 불어 지전이 서쪽으로 날아가 사라지게 되었다.(2) 내 용이 노래는 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가 지은 10구체 향가로 삼국유사에 전한다. 일명 ‘제망매영재가’라고도 하는데 죽은 누이의 재를 올리며 미타 신앙을 호소한 추모가도 현존 향가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세상에 태어났다가 덧없이 죽은 누이를 간절히 생각하는 마음과 인생의 무상을 절실히 느끼며 사후 극락에서 만나보겠다는 염원을 적절한 비유로써 잘 호소하였다. 오누이의 사별을 한 가지에 난 나뭇잎이 가을철에 떨어져 나간 것에 비유한 것이나, 극락에서 만날 것으로 기다리며 살겠다는 불교적 요수가 강하다. 여기에서 ‘ 한 가지’란 부모를 뜻하며, 나뭇잎은 변화무쌍한 삶을 살다가는 사람, 작품에서는 자신과 누이를 나타내고 있다.이 노래 역시 대부분의 10구체 향가와 마찬가지고 기, 서, 결의 세 단락의 시상 전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처음 1구에서 4구까지는 누이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괴로움을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체념과 혈육 도 닦아 기다리고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이 부분으로만 뛰어난 것은 아니라 그 전의 8구에 걸친 내용들이 이 두 구와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그 화자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 된다고 생각한다.‘생사 길은 여기에 있는데 나는 간다는 말로 못다 이르고 어찌갑니까.’ 라는 구절에서 사람의 앞길을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의 무상함과 함께 죽을 때 ‘이제 곧 죽겠습니다. 죽을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살이가 작품 초반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 저’ 에서는 우리가 비록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누구 먼저 세상을 뜨고 세상에 남는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비록 짧은 몇 행의 시구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의 진리와 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뒤지지 않는 표현들인 셈이다.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이라는 표현 역시 인생에 대한 허무함, 무상감에 대한 표현이 잘 나타나 있다. 젊었을 때의 요절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현대로 보면 갑자기 찾아온 병마나 뜻하지 않은 사고 때문에 세상과 연을 끊게 되는 수많은 사별의 모습들이 이 모습 안에 담겨 있다는 생각에서 이 구절 역시 손을 놓을 수는 없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을 끌어서 쉽사리 자리조차 뜨지 못하게 만들어 내는 구절은 마지막 두 구이다.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고저’는 이미 슬픔을 견뎌낸 것이 아니다. 불교에 대한 믿음이 강하기도 하여 슬픔을 불교적으로 승화시키고 있어 보이고는 있지만 그 뒤에 감춰진 누이의 죽음에 대한 애달픈 감정이 고스란히 앞의 시구들과 얽혀 있는 것이다.생각해보라. 누이가 자신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슬픔 감정을 어찌 표현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통곡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 멍해져서 아무 표정조차 짓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고 번민하고 역시 그 표현의 우수성으로 인하여 가치를 인정받는다. 아무로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법에 대한 시도나 참신한 표현 방법은 분명 문학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이 작품이 주목을 받고 오랜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빼어난 비유적 표현도 한몫을 거들겠지만 그것보다는 여기에 내재되어 있는 정서상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가족의 죽음을, 자신이 사랑하는 누이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 그것은 우리 인생사에서 누군가 겪어야 할 일이며 자신 본연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월명사가 보여준 태도는 적잖은 메아리를 울리고 있는 것이다.물론 이 두 구는 뒤에 시조의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시조 종장 첫 머리가 반드시 삼음절이어야 하고, 그 삼음절이 많은 부분 감탄사로 되어 있다고 할 때, 그 감탄사의 기원이 되는 부분이 바로 제망매가와 같은 십구체 향가에 있는 ‘아으’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구는 우리 시가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 더구나 이 제망매가는 향가의 완성된 형태이기도 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그러나 그러한 국문학적인 역사적인 가치에 대한 논의가 아니더라도 죽음을 맞게 된 형제와의 사별의 슬픔에 대한 대처의 자세가 얼마나 고귀하고 승화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가가 바로 이 작품의 생명력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가. 處容歌에 나타난 배경설화 및 문학적 표현기법(0) 개 요처용가는 제망매가와는 달리 8구체의 노래이다. 4구체가 10구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나온 작품이다. 이 노래는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벽사진경이라 하여 사악함을 피하고 경사스러움을 쫓는다라는 것을 내세우는 작품이기도 하다.처용가 역시 제망매가와 함께배경설화를 갖는데 그 배경설화부터 살펴보도록 하자.(1) 배경설화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에는 서울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장이 얕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길거리에 풍악이 그치지 않았고, 시시 풍우가 순조로웠다. 그때에 대오아이 개운포에 놀러나갔다서는 비범하고 호탕한 풍류아의 기질이 나타나고 있고, 둘째 단락 5구에서 6구에서는 그러한 인물의 익살이 잘 나타나 있으며 마지막 7구에서 8구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애인이 되어버린 아내에 대한 체념이 나타나 자신의 아내까지도 대상에게 바치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처용가의 내용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와 둘째,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셋째, 신라 시대에도 멀리 서역 지방과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다.그런데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는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시의 범주를 벗어난 무격 사회에만 있을 법한 풍습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노래는 헌강왕 때 나타났다는 남산신, 금강연신, 지신과의 연관 가운데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처용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불교 신앙적 관점과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불교 신앙적 관점은종교적 의도를 문학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으로서, 처용을 호국 호법의 용으로 보고 그의 왕정 보좌와 가무는 중생 교화의 임무 수행이자 불교적 교화 가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역사적 관점은 신라 말기의 역사적 현실과 처용 설화 전체 문맥을 결부시켜 해석하는 입장이다. 처용을 중앙의 왕권에 순복하지 않는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이 개운포로 나가 유희를 즐기게 하는 것은 지방 호족의 무마책이고 동해 용왕의 조화는 지방 호족의 중앙 왕권에 대한 도전의 표시이며, 용의 아들 처용의 입경과 왕정 보좌는 고려의 기인 제도와 같이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잡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중앙 귀족 자제의 타락한 모습으로 파악한다.마지막 7구와 8구에 나타난 ‘본디 내것이었는데 감히 누구 빼앗는다.
    학교| 2006.05.09| 11페이지| 1,500원| 조회(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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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 존경하는 인물 이순신
    존경하는 인물 이순신 장군두번 백의종군하고 시기와 모함 속에서도 자신의 인품과 인간적 무게로 다시 일어난 장수, 그는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지도자였다.-잘 났고 잘 했고 잘 마친 인물나는 이순신이 16세기 후반을 살다가면서, 「잘 났고」「잘 했고」「잘 마쳤다」는 말로 그 53년의 생애를 정의하고 싶다.그는 몸이 스러진 뒤에야 1등공신이 되었지만, 살아서는 공을 세울수록 주위에서 「헐뜯겼고」위에서는 어쩐지 「마뜩찮아」해서 「어처구니 없는」일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 더욱 그를 돋보이게 했다.이순신은 정말 잘 난 인물이었다. 그가 어려서 놀이할 때에도 매양 진치는 형상을 벌여놓았고 늘 다른 아이들이 대장으로 받들었다던가, 21세 겨울에 비로소 붓을 던지고 무예를 배웠는데, 말타고 활쏘기에 아무도 따를 자가 없었다던가 하는 것은 어느 범상한 장수만 되어도 있을 법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에게는 남이 감히 범할 수 없는 「드레」가 있었기에 남다른 일이 가능했다.이순신의 인품이 우뚝하게 보이게 한 것중 하나가 명나라 장수를 휘어잡은 것이었다. 그가 53세 되던 임란 마지막 해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해군 5천명을 거느리고 강진 서남쪽에 있는 고금도에 이르렀는데, 장수(진린)는 사납고 오만했으며, 그 군사들은 오자마자 사뭇 약탈을 일삼아 백성들은 괴롭혔다. 이순신이 처음 그들을 맞을 때에는 소잡고 술 거르고 물고기를 낚아 푸짐하게 대접하다가, 어느 날 군중에 명령을 내려 크고작은 군막을 한꺼번에 헐게 하고 장군 자신도 옷과 이부자리를 배로 운반해 싣도록 했는데 이를 보고 진도독이 이상히 여겨 전령을 보내자, 이렇게 대답했다.「우리 작은 나라 군사와 백성들이 귀국 장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마치 부모를 바라보듯 했는데 이제 귀국군사가 행패를 부리고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이 견딜 수가 없어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려고 하므로, 나도 대장의 몸으로 혼자 남을 수가 없어서 같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 참이라고 여쭈어라」이 말을 듣고 진도독이 달려와 이순신의 손을 잡고 만류가 무덤 앞 석인이 넘어져 하인 수십명이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 웃옷 청포를 벗지 않은 채 등으로 떠밀어 석인을 일으켜 세웠다. 이를 보고 모두들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탄복 했다.27세 때 훈련원에서 보이는 무과별과시험에 응시해 말을 달리다가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여 모두들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왼쪽다리가 부러졌음에도 한 발로 일어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 싸맬 만큼 침착했던 이순신은 4년 뒤 무과에 급제하였다.첫 벼슬로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종9품)이 되었을 적이었다. 감사 이후백이 각 진을 순행하면서 변방 장수들에게 쏘기 시험을 받았는데 하도 벌이 심해서 「곤장감사」란 별명이 붙어 모두들 벌벌 떨었는데, 이순신에게만은 매우 친절히 대해주면서 건의하는 말까지 들었다.「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해서 변방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릅니다」종9품의 최말단 무관이 종2품 관찰사로 병마절도사를 겸한 까마득한 상관에게 감히 엄두도 못낼 말을 한 이순신에게 감사는 「그대 말이 옳다, 난들 정곡을 가리지 않고 그러겠느냐」하기까지 했다.-율곡의 면담을 거절하기도34세 되던 해 임기가 차서 돌아와 훈련원 봉사로 있을 적에, 병조정랑 서익이 자기가 친근한 자를 순서를 뛰어 참군을 시키려 하자, 그는 담당관으로 허락하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를 건너뛰어 올려주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뒤처지니 공평치 못할 뿐더러 법규도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병조정랑이 위력으로 우겼으나 끝내 듣지 않으니 상관은 크게 성이 났지만 어쩔 수가 없게 되니, 「아무는 병부랑이면서도 훈련원 일개 봉사에게 굴복했다」고들 했다. 그래서 그가 이순신에 대해 깊은 혐오를 품었다.그가 3년 뒤 군기 경치관(특명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실무를 검사케 하는 관원)이 되어 발포에 와서 군기를 보수하지 않았다고 보고하여 이순신을 파직케 하니 모두들「군기보수는 정밀하기 으뜸인데도 벌을 받게 된 것은 지난 날 훈련원에서 굽히지 않은 자세 때문이다」라고들 했다.이무렵 병조판서 죽는 것이요, 통감강목에도 임자년 6월에 장량이 죽었다고 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가 죽지 않았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보통 무사로는 엄두도 못낼 말」이라고 놀라워 했다.이순신이 통제사로 있을 적인 선조 28년 8월 정승 이원익이 도 제찰사로 영남·호남을 둘러봤는데, 전라도에 이르자 해군들로부터 올리는 호소문이 수없이 많았다. 정승은 그것을 일부러 조치하지 않고 모두 말아서 축신을 청해서 이 해군 호소문을 그 앞에다 쌓아 놓으니 몇 백 장이나 되었다.오른손에 붓을 쥐고 왼손으로 종이를 끌어당긴 이순신은 물 흘러 내려가듯 판결을 내어 잠깐 사이에 결말을 지었다. 정승과 부찰사들이 판결문을 집어보니 모두 다 사리에 합당했다. 이원익이 놀라며, 「우리도 이렇게는 못 하겠는데 그대는 어찌 그리 능란하오」하니까, 「모두 해군에 관계되는 일이라 늘 보고 듣고 해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여느 장수보다 이순신은 글에 능했다. 문관들도 문집을 남기기가 흔하지 않는데 무관이면서도 일컬어 「충무공 전서(??? ??)」를 남겼거니와, 그는 고금 병서를 두루 섭렵하여 마음에 간직한 것이 많았다. 또한 그 바쁘고 복잡한 난중에 있으면서 7년 동안 일기를 써와 중요한 사료가 되게 함은 물론 반 초서로 쓴 그의 글시 또한 탈속한 명필이었다.이렇기 때문에 조정에 보고하는 장계는 왜적과 싸워서 이길 적마다 다른 장수보다 훨씬 신속하고 상세하게 아뢸 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시샘도 받았고 심지어는 남의 공을 가로챘다는 모함까지 받았다.「한바다에 가을 빛 저물었는데(?????)/찬 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고나(?????)/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새벽 달 창가에 칼을 비치네(?????)」(노산 옮김)이 한시는 유명한 시조「한산섬 달밝은 밤에…」와 함께 충무공의 우국 충정이 잘 스며있다. 훗날 정승 판서를 비롯, 한다 한 선비 문장가 30명이 「높을 고(?)」「칼 도(?)」운자로 차운(??)하여 시를 지어 이 명장의 간절한 마음을 기렸다.현종 때 예조판서를편 다리에 부상까지 입으며 목숨을 건 전투로 승리했으나, 병사 이일은 앞서 녹둔도 수비병력 증원 요청을 묵살한 때문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피해를 입힌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꺼려서 혹독한 태형으로 이순신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 들었다.-공을 세우고도 벌을 받아그래서 구속당하게 된 이순신이 형들을 차려놓은 국문장으로 들어가려 할 적에 병사의 군관 선거이가 평소 친한 사이라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것이 좋겠소」하고 하자, 그는 「죽고 사는 것이 천명인데 술은 마셔 무엇하오」라며 정색을 했다. 선거이가 다시 그럼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물이나 마시라고 했으나, 이순신은 목이 마르지 않은데 물을 '? 때문에 마시겠소라며 들어가서 국문을 받았다. 이일이 패군한 심문서를 받으려 했으나 이순신이 단호히 거절했다.「내가 병력이 약하기 때문에 여러번 군사를 증원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병사가 번번이 들어주지 않은 그 공문이 여기에 있으니 만약 조정에서 이것을 알면 죄가 내가 있지는 않을 것이요. 또 내가 힘껏 적과 싸워서 적을 물리치고 추격하여 사로잡힌 사람들을 되찾아 왔는데도 패군의 죄를 씌우려는 것이 옳단 말이오」조금도 말소리나 동작이 떨리지 않으니 이일이 도리어 대답이 막히었으나, 불리하게 조정을 보고하여 마침내 이순신은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공을 세우고도 상은 커녕 벌을 받는 첫번째 시련이었다. 이런 무관의 풍토에서 어느 누구 몸바쳐 군인이 되려들겠는가.이순신은 다시 여진족의 시전부락 정벌에 공을 세워 특사를 받게 되었다.이순신은 진법에 뛰어났다. 일찌기 병서를 두루 익혔는데 그간 발포 만호로 있을 적에 감사 손식이 남의 헐뜯는 말을 듣고 순행차로 능성에 와서 이순신을 벌주려고 마중오라고 불렀다가 진서에 관한 강독을 끝내고 진도를 그리게 했다. 이순신이 붓을 들어 자세하게 그려 나가자 감사가 꾸부리고 한참 들여다보다가「어쩌면 이렇게도 자세하게 그리는고…대가 진작 몰랐던 게 한이로고…」라며 신중하게 대했다.이렇게 뛰어난 장재였음에도 무과에 급없다고 하자 그는 장계를 올려 「바다로 오는 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한 것이 없다」고 조정을 설득하여 해군 폐지를 방지했다. 이순신은 매일 부지런히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으니, 그의 「난중일기」대목만 봐도 알 수 있다.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 수선을 하지 않아 곤장을 쳤고, 성밑에 사는 토병 박봉세가 석수랍시고 돌 뜨는 데로 가서는 이웃집 개에까지 폐해를 끼쳤기로 곤장 80대를 때렸으며(임진 1월 16일), 북봉 연대(신호대) 쌓는 데로 올라가 보았다(2월 26일).석수들이 새로 쌓은 해자 구덩이와 성벽 더 올려 쌓는 데를 순시하고 승군들 돌 줍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므로 우두머리를 잡아다 매를 때렸고(3월4일), 무기를 확인해 보니 활-갑옷-투구-전통-환도 등이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없이 된 것이 많으므로 색리-궁장 감독 등을 처벌했다(3월7일).배를 타고 소포에 이르러 쇠사슬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며, 종일토록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았다(3월 27일)고 할만큼 이순신은 좌수영 관하 각 포구를 직접 나가 술시하고 훈련시키고 무기를 가다듬게 하여, 방비에 겨를이 없었다.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하루 전 왜병은 저들의 소굴 대마도를 떠나 현해탄을 건너오려던 그 무렵, 독창적으로 모은 거북선을 시승하고 있었다. 부산포나 동래성 등에서는 벌떼처럼 적선이 수평선 너머 바다를 메워 오는 것도 모르고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순신은 쾌청한 아침 날씨에 거북선에서 지자 포와 현자 포를 쏘고 있었다. 이날 정오에 그는 활 10순을 쏘는 연습을 하는 등 적을 막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임란 직전 방비에 만전 기해「거북선은 크기가 판옥선만한데 배 위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지나 다닐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송곳과 칼을 꽂아 사방으로 발 붙일 곳이 없게 했으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입은 총구멍이 되고 뒤는 거북의 꼬리처럼 만들고 밑에는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의 총구멍이 있는데, 배 모양이 었다.
    독후감/창작| 2005.06.06| 12페이지| 1,500원| 조회(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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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 [ Socrates ]요약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국적 : 고대 그리스활동분야 : 철학출생지 : 그리스 아테네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魂:psych)’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추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平靜淸朗)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독후감/창작| 2005.01.24| 2페이지| 1,000원| 조회(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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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1770. 12. 17 독일 본에서 세례받음~1827. 3. 26 오스트리아 빈.독일의 작곡가.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과도기의 주요인물이다.베토벤의 음악세계는 하이든 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전통에 입각했고, 문학계의 동시대 작가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표현된 새로운 시대정신을 포괄했으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좇았다. 베토벤은 이전의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생생하게 삶의 철학을 대사 없는 음악으로만 표현해 음악의 위력을 드러냈다. 그의 몇몇 작품들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 자신은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르는 여러 낭만주의자들의 작품들에 대해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따르게 된 특질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설명적 음악인 표제음악에 대한 그의 이상에 있었다. 베토벤은 교향곡 6번 〈전원 Pastorale〉과 연관해 표제음악을 "회화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표출"이라고 정의했다. 음악 형식에서도 위대한 혁신가였던 그는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 현악4중주 등의 영역을 확대했고, 교향곡 9번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성악과 기악을 한데 결합시켰다. 그의 개인적 삶은 병든 귀에 대한 영웅적인 투쟁으로 점철되었고, 중요작품들 중 일부는 그가 완전히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마지막 10년간 작곡된 것이었다. 궁정과 교회의 후원이 사라진 때에 살았던 그는 악보 출판과 작곡료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내적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최초의 직업적인 음악가였다.생애와 작품초기생애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 요한 판 베토벤과 마리아 마크달레나 판 베토벤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 북서부 본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생존한 자식 중 맏아들이었다. 플랑드르 출신인 그의 가문은 말린 지역에까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할아버지 때 처음 본에 정착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쾰른 대주교 선제후의 궁정 합창단에 들어가, 음악감독의 자빠져,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 309에서 볼 수 있듯이 셈여림의 대조에 대한 시도가 진부하고 종종 부적절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현상은 베토벤의 초기 소나타들과 그밖에 당시 그가 작곡한 여러 작품들에서도 발견되는데, 후기 만하임 작곡가의 교향곡이 본 궁정 관현악단에서 고정 레퍼토리로 연주되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그의 규범적 양식에서 잠시 이탈한 것에 불과한 데 반해 베토벤에게는 계속해서 기본적인 요소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급작스러운 '피아노'(여리게), 예기치 않은 폭발, 광범위한 도약 진행에 의한 아르페지오 음형(여러 옥타브에 걸쳐 빠르게 화음의 구성음들을 위아래로 연주하는 기법으로, '만하임 로켓'이라 함) 등 만하임 악파의 이러한 요소들은 베토벤의 음악적 개성의 중심 특징이 되었고, 또한 성악 양식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해 기악음악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베토벤은 만하임 악파 계보의 전성기 최후의 인물이다.초기의 영향같은 세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대중음악과 민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러한 영향은 1790년 발트슈타인을 위해 작곡한 발레 음악과 초기 가곡, 제창에 의한 합창 등에 특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의 많은 성숙기 작품들에는 라인란트 지방 춤곡의 강한 리듬의 영향이 보였으며, 그밖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슬라브 켈트 등 다른 지방의 토속적 음악 어법의 영향도 보였다. 그는 20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자라든지 민속음악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화성의 규범적 진행에서 벗어나 종종 민속 선율의 이례적인 선율형(型)을 허용하곤 했다. 파리와 예술적인 교류를 많이 했던 만하임과 프랑스어를 번역한 희가극을 주로 공연한 본의 국립극장으로부터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유행에 민감했던 본의 사교계는 프랑스 혁명에 공감하는 분위기였고, 이러한 기운은 베토벤 교향곡의 알레그로 악장에서 나타난다. 한편 그의 교향곡 스케르초 악장에 자주 나타나는 지그그후 3년 동안 그는 베를린 프라하 등지를 순회공연했으며, 이밖에도 상황이 허락되는 대로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1800년부터는 대대적인 규모의 공개 연주회를 시작해 외국에 널리 명성을 날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19세기로 접어드는 시기는 베토벤의 작품활동 시기 중 제1기에 해당하며 그가 아직 18세기적인 기법과 사고에 묶여 있던 시기이다. 당시 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대개 피아노 독주곡이나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작품이며, 그밖에 현악 3중주 E 장조 작품3, 3개의 현악 3중주 작품9, 6개의 현악 4중주 작품18, 교향곡 1번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영역과 기법을 확장해갔으나 아직까지는 주로 피아노 음악 작곡가로서 알려졌다.귓병의 악화연주가에서 작곡가로의 방향 전환은 점차 귀먹어가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최초의 징후는 1800년 이전에 나타났지만, 이후에도 몇 년 간 그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족의 저택에서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경쟁해 연주를 계속했고, 바이올린 연주자 게오르크 브리제토버(베토벤은 그에게 〈크로이처 소나타 Kreutzer Sonata〉를 헌정함) 등의 대가들과 공개 연주회를 같이 열었다. 그러나 1802년경에 이르자 그는 자신의 병이 영구적인 것이고 점차 악화되고 있음을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시골이었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두 남동생 앞으로 쓴 유명한 ' 하일리겐슈타트 유언장'을 통해 귓병으로 인한 고통을 표현했다. 그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있는 창작의 요구를 다 채우지 못하고서는 세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 "나는 운명의 끈을 붙잡겠다"라고 적었고, 또다른 곳에는 "병에서 치유만 된다면 나는 온 세계를 담아낼 것이다"라고 적었다. 병세는 개선되지 않았으나 위에 나타난 그의 바람들은 모두 이루어졌다.1819년경이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귀가 먹어 의사소통을 위해 노트를 가 새로운 대본과 베토벤 자신의 상당한 손질 끝에 빈의 무대에 다시 세워졌고, 이후 이 작품은 독일 극음악의 고전이 되었다. 그밖에 다른 몇몇 오페라 작곡을 구상했으나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작곡가로서의 생활기반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베토벤은 항상 공식적인 수입원이 없이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베토벤은 돌봐야 할 가족이 없다는 점에서 모차르트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있었다.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라이프치히의 〈국민음악 신문 Allgemeine musikalishe Zeitung〉의 평론가들은 베토벤에 대해서만큼은 오랜 관습인 거만한 비방조에서 벗어나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베토벤은 아직 저작권 개념이 채 형성되지 않던 시대였지만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은 앞선 작곡가들이나 슈베르트와 후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출판업자와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의 흥정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한 빈 음악계의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자신의 의욕적인 작품들을 공연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것은 물론 베토벤을 후원한 리히노프스키 공 같은 후원자들 덕분이기도 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은 베토벤에게 매년 정규적으로 600플로린을 지급해주었고, 그밖에도 교향곡 4번을 헌정받은 오페르스도르프 백작처럼 베토벤에게서 곡을 헌정받은 여러 귀족들은 후한 대가를 치러주었다. 황제의 동생인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베토벤에게 가난은 그다지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귓병이 점차 악화된 데다가 화를 잘 내는 습성이 겹쳐 점점 빈 음악가들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1808년 5번 교향곡과 6번 교향곡을 초연한 자선 연주회(이 연주회에서는 〈코랄 판타지아 Choral Fantasia〉 작품80도 연주됨)에서 사람들과 크게 다툰 베토벤은 아예 빈을 떠날 결심을 했다. 이러한 그의 결심을 전해 들은 그의 후원자 루돌프 대공, 로프코비츠 후작, 킨스키 후작 등은 베토벤이 빈에 계속 남아 작곡활동을 하기만 하면 세 사람이 합심해 이 곡의 악보를 복사해서 섭정을 하고 있던 영국의 조지 왕세자에게 보냈으나 조지 왕세자는 이것을 받고도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아 그를 화나게 했다. 이 연주회로 그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었지만 한편 메첼과 다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811년 화폐가치가 절하되었지만 1813년부터 이듬해까지 베토벤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면할 수 있었다. 7번 교향곡의 초연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청중은 이 곡의 알레그레토 악장을 반복해서 연주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베토벤의 음악은 전유럽에 알려졌으며 〈피델리오〉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베토벤은 애국적 칸타타 〈영광의 순간 Der glorreiche Augenblick〉으로 프랑스의 몰락을 기념했다. 전쟁이 다 끝난 1814년 빈은 짧은 순간 승리감에 도취되었지만, 얼마 안 가 오스트리아의 경제가 붕괴되고 빈 이후 거의 40년 동안이나 침체상태를 면하지 못했다.만년메테르니히의 오랜 통치와 이른바 비스마르크 시대가 계속되면서 예술은 소박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베토벤의 창작 시기는 또다른 국면을 맞았다. 게다가 그는 귓병으로 인해 전보다 더욱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렸다. 새로 작곡하는 작품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1815~27년에 작곡된 작품은 1792년 이후 작곡된 전체 작품의 양에 비할 때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수의 작품이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전에 그가 작곡한 어떤 작품들보다도 음악적으로 깊이가 있고 작곡가의 성숙한 관념의 세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 점차 비사교적으로 되어간 그는 자기 자신과 경제적인 문제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언제나 좋은 결과를 본 것만은 아니었다.이무렵 베토벤은 런던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일찍이 1803년 베토벤은 에든버러의 출판업자 조지 톰슨을 만나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민요를 가지고 소나타를 작곡하면 이것을 출판해줄 것을 의뢰했었다. 비록 처음에 계획한 소나타는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톰슨은 그에게 성악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
    독후감/창작| 2005.01.24| 14페이지| 1,500원| 조회(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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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문화] 프랑스의 인종주의
    1. 서론1998년 7월 12일, 프랑스 파리의 외각에 위치한 생 드니 축구장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프랑스 전역은 축제 분위기로 휩싸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에도 오르지 못했던 프랑스가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3 : 0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이로 누르고 우승했기 때문이다. 지난 대회에 출전조차 하지 못했던 팀이 다음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란 분명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놀라운 결과 때문에, 사람들은 프랑스 축구팀의 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의 축에는 알제리 출신의 지네딘 지단이 자리하고 있었다.프랑스 대표팀은 전통적으로 백인 이외의 인종은 합류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98년의 대표팀에서는 다수의 유색 인종 선수가 함께 뛰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내부에서는 흑인과 함께 뛴 월드컵 우승이기에 진정한 프랑스 대표팀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축제에 동참했다. 이러한 부분만 본다면, 프랑스 사람들 특히 프랑스에 살고 있는 백인들은 자신의 나라에 이주해 온 유색 인종들을 자신들과 동일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이와는 다소 대조적으로, 1989년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헤드 스카프 사건을 살펴보자. 파리 근교의 한 중학교에서 수업시간에도 헤드스카프를 착용하기를 고집한 세 여학생을 퇴학시킨 것이 이 사건의 주요 내용이다.{ 프랑스 내 이슬람교도들의 종교문화 와 프랑스 세속문화 의 충돌, 1p.이 사건에 대응했던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프랑스 내부에는 인종주의적 색채가 상당부분 드러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부터 9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프랑스는 백인, 유색인의 연합팀을 이끌고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는 드디어 프랑스 내부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게 되었다.이를 위해서 우리는 프랑스의 인종주의의 본질이 어디에 기반을 하합리적이며 강인한 데에 반해서, 유색인들은 조잡하고 미개하다는 식의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현재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 문화 속에 드러나는 인종주의는 대부분 19세기 당시의 문화적 우월감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영국이나 프랑스는 현재 백인들만의 국가가 아닌 아프리카나 아시아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국가이다. 하지만, 여느 이민 국가가 그러하듯이(특히 백인 중심의 국가의 경우) 다수의 이민자들에게 행해지는 각종의 사회적인 불평등을 보면, 적어도 이민자들은 산술적인 의미에서의 국민일 뿐, 기존의 구성원들과 동등하게 여겨지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프랑스의 경우에는 1974년에 제 3세계로부터의 노동 이민을 금지했는데, 이는 결국 후진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을 막아서 제 3세계 사람들이 감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인종주의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프랑스의 인종주의는 정치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하지만, 사실 문제의 본질은 매우 심각하다. 앞서 언급한 헤드 스카프 사건 을 다시 한번 언급하기로 한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세 명의 여학생은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징계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교육부 장관인 죠스팽이 퇴학이 부당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을 때 교사들의 반응이다.교원노조연맹(FEN)은 이 의견에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지식인들조차도 교사들이여, 항복하지 마시오 라는 제목의 공개편지를 발표했다. 그들의 논지는 제 3공화국의 기본 이념은 정교분리이며, 공화국의 기본이 되는 것은 학교인데, 공화국의 기반이 되는 학교에서 기본 이념인 정교분리 원칙이 붕괴함은 곧 공화국의 존립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가 된다는 것이다.{ 박단, 「프랑스 내 이슬람교도들의 '종교문화 와 프랑스 '세속문화 의 충돌-1989년 헤드스카프 사건을 중심으로-」『역사와 문화』제5권 (2002), 푸른역사, 11-12p.이 부분에서 그들의 논스카프보다 매우 명백하고 뚜렷한 종교 행위이다. 하지만, 왜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가. 제 3 공화국의 이념을 따르기 위해서는 식사 전의 기도 행위는 퇴학으로 연결되기에 충분하지만 왜 그들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가.또,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의 경우에도 어떻게 종교 성향이 짙은 학교를 운영하도록 허가할 수 있는가. 그들이 반박의 근거로 내세운 제 3공화국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소녀들의 퇴학을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장관의 견해가 아니라 그들이 인정한 가톨릭 학교의 존재가 아닐까.{ 위와 동일이러한 의문점들을 통해서 위 사건의 본질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을 듯 하다. 가톨릭 적인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세속문화 에는 매우 부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종교문화 이기 때문에 견제해야한다는 논리이다. 또한, 이 문제에서 발단이 되었던 것이 이슬람교라는 것과 그 종교가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온 유색인종들의 종교라는 점에서 위의 분쟁이 공화국 이념의 수호라는 거창한 이름에 기대고 있을 뿐, 사실상의 인종주의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2) 문화적 다원주의현재의 인종주의는 19세기에 진행되었던 제국주의적 팽창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팽창의 주체는 영국,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이었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인(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백인)들의 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사실, 두 가지 다른 문화가 충돌하게 되었을 때, 각 구성원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Tahar Ben Jelloun, 「딸에게 설명한 인종주의 (Le racisme expliqu ma fille)」, 1998, X520, 5p.역사를 통해서 보자면 이러한 견제는 어느 한편의 완전한 소멸을 가져올 수도 있고, 두 문화의 발전적인 융합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전자(前者)의 경우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야하는 필요성이 대두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들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고, 그들 기준으로 다른 문화가 재편되어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미국적 표준(American Standard) 에 필적할 만한 코카서스 인의 표준(Caucasian Standard) 라고 부를 수 있다.프랑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에게 비판이 되는 것은 그저 제 3세계로부터의 이민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유입된 이슬람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지, 그들이 원론적으로 주장하는 공화국 이념의 수호는 아니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는 급속하게 단편화될 수밖에 없다.하지만, 현재의 사회는 단편적인 기준으로 동일시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를 고려해야하는 입체화 된 사회이다. 보다 쉬운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현재의 사회는 3D(Three Dimensions)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편화된 시각은 평면적인 정보만 인식할 수 있는 2D(Two Dimensions)이다. 3D를 2D 그래픽 카드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기준에 의거한 판단은 현실에는 바람직하지 않다.서구 문화는 그 사유 과정에 있어서만 나르시스와 닮은 것이 아니다. 결국 다양하게 존재하는 사회적 변수를 읽지 못하고 단편성만을 강조한다면, 신화 속의 나르시스와 같이 자기 파괴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달리 말하자면, 현재는 다원주의 사회인 까닭에 그에 맞는 의식과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3) 전망 및 해결 방안1989년 헤드 스카프 사건 이 있은 후 약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인데, 프랑스에서는 어떤 변화가 진행되어 왔을까. 가장 큰 변화는 1989년 당시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위치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장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헤드 스카프로 대변되는 이슬람 문화만이 명백한 종교 행위로 규정되어 처벌의 대상이 되었으나, 2003년 현재에는 프랑스인 대다 법적 토대를 구현하게 되었다. 따라서 1989년의 사건에서 소녀들의 퇴학을 찬성한 진영이 내세운 공화국 이념의 수호 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거의 이슬람교에 치우친 것보다 충실한 비판의 근거로서 자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비 이슬람권의 변화이고, 이슬람 내부의 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먼저, 이슬람교의 소녀들은 1989년까지만 해도 부모의 강요, 또는 주변에 모여 사는 이슬람교도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헤드 스카프를 착용한다는 경우가 다수였으나,{ 박단, 「프랑스 내 이슬람교도들의 '종교문화 와 프랑스 '세속문화 의 충돌-1989년 헤드스카프 사건을 중심으로-」『역사와 문화』제5권 (2002), 푸른역사, 16p.2003년 현재에는 헤드 스카프의 착용이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되었으며, 선택의 경우에도 부모에 의한 영향이 아니라, 착용하는 사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박단, 「 헤드스카프 를 두른 마리안느, 프랑스 공화국과 정교분리원칙-2003년도 정치권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 『문화사학회 17차 연구발표회 발표논문집』, 2003, 4p.또한, 프랑스에 이슬람교가 운영하는 사립학교가 세워졌다는 점도 한가지의 중요한 변화이다. 이는, 이제 프랑스 사회에서 이슬람 문화가 가톨릭 문화와는 다른 독특하고 낯선 종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른바 세속문화 의 일부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1989년 이후, 헤드 스카프 사건과 같은 문제로 인해 발생한 갈등은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으나 2003년 미국의 이라크 공격으로 인해 다시금 이슬람 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쩍 증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002년과 2003년에는 회사원 및 공무원이 헤드 스카프를 착용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됨에 따라 1989년의 문제를 다시금 반복하게 되었다.{ 위와 동일이 문제는 1989년과는 달리, 2003년이라는 시간적인 배경이 정교분리원칙의 적용에 대해서 정치권에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인문/어학| 2005.01.24| 7페이지| 1,500원| 조회(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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