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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현상]개똥녀 사건에 대한 나의 생각
    신문방송학과 20020409 서태범처음 개똥녀에 관한 소식을 친구에게 듣고 나도 참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욕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그녀의 사진이 아무런 여과 없이 얼굴이 공개 된 상태로 돌아다닌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인터넷상에서의 네티즌들의 폭언과 비난의 수위를 파악하고는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이런 생각이었다. ‘한사람인생 망치는거 일도 아니구나.’ 교수님의 말대로 이 여자 진짜 주민등록증 말고 남아 있는 게 없을 것이다. 얼굴이 전 국민에게 알려진 마당에 살던 동내에서 어떻게 살 것이며 직장에는 어떻게 전과 같이 다닐 수 있겠는가. 아마 시간이 많이 흘러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어느 정도 잊혀지기 까지는 아마 숨어서 살다 시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진다고 이 여자가 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러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길을 다닐 때마다 ‘누가 알아보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으로 항상 불안해하면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또 겨우 안정을 찾아 일상생활에 적응했다고 치자. 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로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내가 ‘개똥녀’ 라는 사실이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쩌지? 이렇게 평생을 불안에 떨면서 살아야할 것이다. 또 이 고통이 당사자만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그녀의 가족, 친척, 친구들이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아파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받을 정신적 고통은 얼마나 심각할 것 인가. 전 국민 마치 합심이라도 한 듯이 한 여자의 인생을 아무 죄의식 없이 짓밟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잘못을 하긴 했다. 잘못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개똥을 치우지 않은 경범죄의 죄 값치고는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우리가 그녀의 인생을 망쳐도 될 만큼 그녀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과연 개똥을 치우지 않을 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우리는 한번쯤 이 질문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이 노상방뇨한 대가로 그녀가 당하고 있는 만큼의 대가를 치른 다면 어떻겠는가? 아마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이다. 개똥치우지 않은 것이나 노상방뇨나 같은 경범죄다. 이렇게 비교해 놓고 보면 그녀가 지금 한번의 실수로 얼마나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녀에게 얼마나 가혹한 가혹하다 못해 잔인하기 까지 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궁금한 것이 하나있다. 처음에 얼굴도 가리지 않고 그녀의 사진을 그대로 올린 그 사람은 지금 맘 편하게 살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한사람의 인생을 그렇게 간단하게 망쳐버리고 과연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맘 편하게 살고 있을까 말이다. 이것이 개똥녀 문제의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녀가 잘못을 했다한들 어떻게 그녀의 인권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그녀의 얼굴을 그냥 공개 했다는 말인가. 그 사진이 공개되면 그녀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사진을 올렸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이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신종 폭력이다. 이보다 강력하고 무서운 폭력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죽도록 맞는 것보다 인터넷 폭력이 훨씬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주먹한번 휘두르지 않고 익명성 뒤에 숨어서 마우스 클릭 한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온라인상에서 우리의 양심과 도덕심이 땅에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인터넷에 익명의 이름으로 올라오는 정보들이 과연 믿을만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번에 리포트 때문에 개똥녀에 관한 내용을 찾다가 이런 글을 발견했다.(아래 글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녀를 옹호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 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개똥녀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이 반듯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 또한 확신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만약 앞에 글이 개똥녀 사건의 진짜 내막이라면 이 일을 어쩔 것 인가. 이렇게 우리는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이름도 모르고 믿을만하다고 검증되지도 않은 어떤 한 사람이 올린 사진과 글로 그녀를 그렇게 매도 한 것이 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확실한 정보도 아닌 것을 마치 확실한 정보인 것처럼 믿고 더 나아가 그 정보를 가지고 누군가를 비판하고 욕하는데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당신이 학교에서 친구와 좀 심하게 장난(왜 남자들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때리면서 장난을 치며 놀지 않는가.)을 치며 노는 당신의 모습을 찍어서 학교 폭력의 실태라고 인터넷에 그대로 사진을 올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당신은 하루아침에 학교에서 애들이나 때리고 삥이나 뜯고 다니는 양아치가 되어버리는 것 이다. 이처럼 미디어라는 것은 조작이 가능하고 그 정보가 모두 확실한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인터넷의 정보는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하다. 누구나 쉽게 정보를 퍼뜨릴 수 있고 꼭 검증받은 사람이 아니어도 정보를 퍼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너무나 쉬게 조작된 정보를 퍼뜨릴 수 있는 것이다.지금까지 말한 사실을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개똥녀가 잘못은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질에 비해서 너무나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고. 그녀를 비난 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그녀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는 모습이 발견되며 또 그녀에 관해서 알려진 사실의 정확한 진위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을 살펴 볼 때 네티즌들의 그녀에 대한 비난 반응에는 확실한 문제점이 있으며 하루 빨리 그 문제점을 바로 잡아서 제2 제3의 개똥녀가 절대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겠다.
    사회과학| 2005.12.14| 3페이지| 1,000원| 조회(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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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감상문]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영화 이퀼리브리움
    이 영화를 예전에 봤었다. 하지만 그때는 워낙 이소룡, 이연걸, 토니쟈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나인지라 단순히 주인공의 멋진 액션에 중점을 두고 봤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운 관점으로 영화를 보면서 저번에 봤을 때랑은 느끼는 것도 달랐고 드는 생각도 많이 달랐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저번에 봤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의미들이 영화속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영화를 보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이렇다. 3차 대전 이후의 21세기 초 지구. 3차 대전 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사랑, 증오, 분노, 질투, 시기 등의 감정들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인류는 인간의 감정을 철저하게 말살 한다. '리브리아'라는 새로운 세계는 '총사령관'이라 불리 우는 신부의 대리인의 통치하에, 전 국민들이 '프로지움'이라는 약물에 의해 통제되고, 이 약물을 정기적으로 투약함으로서 온 국민들은 사랑, 증오, 분노, 질투, 시기 등의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여기서 주인공은 성직자로 나오고 도시의 최고 권력자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부로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성직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성직자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주인공은 '리브리아'에서 철저히 전사로 양성된 특수요원이다. 그는 '프로지움'의 투약을 거부하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며 살아가는 반역자들을 제거하며, 책, 예술, 음악 등에 관련된 모든 금지자료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다. 성직자라는 사람이 아무 죄의식 없이 감정을 느끼는 자들을 신기에 가까운 사격술로 죽여 버린다. 그들을 쏴 죽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들이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성직자라기보다는 심판자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불리는 감정을 느끼는 자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은 어디를 찾아봐도 볼 수 없다. 그들을 찾아서 죽이기에 바쁘다. 완전히 씨를 말려 버리려 한다. 이것은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교훈에 완전하게 위배되는 상황이다. 돌아온 탕자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돌아온 탕자 즉 죄 많은 우리가 예전에 하나님을 몰라 죄악 가운데 빠져 딴 나라에서 흥청망청 돈 써대듯 세상에서 죄악을 지으며 살 다가가 기근이 닥쳐서 힘들어할 때. 그때 예수님의 구원함을 믿고 다시금 아버지께 돌아가면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겨 사랑으로 맞아 준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성경에도 나와 있는 이 교훈의 모습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들을 회유하려는 노력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발견 즉시 쏴 죽이기 바쁜 것 이다. 이 영화에서 기독교의 모습이란 것은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권력 집단, 지배 집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들은 그들의 지배방식에 맞춰서 권력을 집행하는 권력집행의 도구일 뿐인 것이다. 과연 이 영화가 기독교의 모습을 지나치게 외곡해서 표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종교가 지금까지 순수하게 종교의 역할만을 해왔던가? 대답은 누구나가 알 수 있듯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독교의 역사가 피의 역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십자군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는가.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팔고 돈을 받고 추기경 자리를 팔고 중세의 암흑기에는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죄 없는 수많은 여자들을 불태워 죽이고. 이것은 지금까지 기독교가 저지른 악행의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만큼 끔찍하고 잔인한 역사가 있을까 할 만큼 기독교의 역사는 피로 흠뻑 물들어 있다. 얼마나 많은 잔인하고 끔찍한 악행이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는가. 이것이 과연 진정으로 신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기독교라는 것은 언제부턴가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지배의 수단, 권력의 수단, 권력의 집단이 되 버리고 말았다. 내가 볼 때는 종교=권력이라는 말은 완벽하게 성립하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수많은 악행들도 모두 기독교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집권층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권력 유지를 방해하는 것들을 잔인 하리 만큼 철저하게 짓밟아 왔다. 자신들과 다르게 생긴 집단, 자신들의 뜻과 다른 집단, 자신들과 다른 믿음을 가진 집단들에 대한 철저하게 배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에 나와 있는 돌아온 탕자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할 만큼 기독교의 철저한 배타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배타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이 영화 이퀼리브리움 의 시대인 것 이다. 이 영화에서도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완벽한 권력집단, 통치 집단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들은 프로지움 이라는 약물로 사람들의 감정을 제거해 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당위성으로 4차대전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짜 이유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가 만약 통치자인데 내가 통치하는 사람들이 감정이 없다면 얼마나 통치하기 쉬울 것 인가. 그들은 불평, 불만도 없을 것 이며 그저 시키는 데 로 말을 잘들을 것이다. 이처럼 편리할 순 없을 것이다. 이것이 프로지움 을 복용시키는 진짜 목적은 아닐까? 그리고 현실의 기독교에서 이 프로지움 의 역할은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이라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는 지옥의 끔찍한 고통, 종말을 끊임없이 강조 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끊임없이 신자들에게 구원만이 살길이라고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4차대전을 막기 위해 프로지움 복용을 강요하는 리브리아 의 모습과 지옥의 끔찍한 고통을 막기 위해 구원 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모습이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는 구원 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자신들의 세력권 안으로 신자들을 끌어 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권으로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영화에서처럼 철저히 배타적인 태도로 대한다. 예전에 이런 일도 있지 않았는가. 한 기독교인이 전기톱으로 장승을 잘라 버린 일. 이런 일이 왜 이러날 수 있었겠는가. 기독교이외에 다른 종교나 가치관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정 못하는 것을 넘어 서서 기독교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배타적 생각이 머리에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그런 단편적인 현상가지고 기독교 배타성을 확대 보편화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건은 기독교의 단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상은 크건 작건 간에 몇 천 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몇 천 년 동안 꾸준히 반복되고 있는 일을 가지고 과연 단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기독교의 배타성문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 즉 권력을 가지려는 욕망 그리고 그 권력을 유지 하려는 욕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독후감/창작| 2005.12.14| 2페이지| 1,000원| 조회(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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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표현의 자유와 포르노
    표현의 자유와 포르노. 참으로 다루기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인 것 같다. 사회적으로도 자주 이슈화 되는 문제인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았다. 내 생각을 풀어나가기 전에 먼저 과연 표현의 자유와 포르노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포르노란 용어는 포르노그라피의 약어로, 그리스어로 'pornoi(창녀)'와 'graphos(문서)'의 합성어인데, 성적인 행동의 묘사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현재에는 보다 좁은 의미인, 성적 자극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도한 묘사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표현의 자유란 개인이 국가로부터 탄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그럼 왜 표현의 자유와 포르노를 묶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항상 부딪쳐서 불협화음을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불협화음이란 포르노도 표현의 자유라는 주장. 그러니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주장과 포르노는 표현의 자유로 볼 수 없다. 그러니 법으로 포르노를 구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부딪히는 소리일 것이다. 두 주장중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사람은 누구나 국가로부터 탄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포르노도 이 권리를 보장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내 생각에 포르노를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란 위에서 말했듯이 개인이 국가로부터 탄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권리를 보장한 것이다. 하지만 포르노에 무엇인가 말하려는 의견이 들어 있는가? 그렇담 포르노가 말하려는 의견이란 무엇인가? 또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가? 포르노 한편을 보여주고 그 사람에게 이것을 만든 사람이 이것을 통해 무슨 의견을 말하고 있는 것 같나요? 하고 물었을 때 뭐라고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아무 말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 올라있을 것이다. 나도 포르노를 봤지만 포르노를 보고난 후 그 포르노를 만든 사람이 말하려는 주장이나 의견들을 느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단지 성적인 흥분만을 강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포르노에는 단순히 인간의 성적 자극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도한 묘사밖에는 없다. 이런 포르노에서는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이것을 만든 사람이 말하려는 의견이나 주장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아무런 주장도 말하려는 것도 의견도 없는데 이것도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표현하려는 것도 말하려는 의견도 없는 단지 성적인 자극만 발생시키는 포르노라는 것을 표현의 자유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왜 끊임없이 포르노가 표현의 자유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내 생각에 포르노가 표현의 자유라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포르노를 이용해 상업적 이익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포르노를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함으로서 법의 구속력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함과 동시에 자기 방어. 자기 정당화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포르노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르노라는 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지 포르노 산업은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야 포르노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 음지에서 불법으로 행해지지만 외국의 몇몇 나라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포르노가 합법적이기 때문이다. 여기 포르노가 합법적인 나라의 들의 모습을 보자. [영국 런던의 소호 지역은 이를테면 한국의 대학로다. 이곳 `신사의 나라' 한복판에 포르노물로 가득 찬 섹스숍이 버젓이 들어서 있고, 서점에선 일반 서적과 포르노물을 함께 판다. 문화적 자부심으로 가득 찬 프랑스의 거리 가판점에는 와 포르노 잡지들이 나란히 진열돼 있고, 밤이면 유료채널 텔레비전 `카날+'가 심심찮게 포르노를 틀어준다. 일요일 밤이면 공중파 텔레비전의 채널에서 서슴없이 포르노를 방영한다. 지난 1일 중국에 반환된 홍콩 거리의 신문가판대에는 동양여자들의 벗은 몸만 찍어 만든 홍콩판 가 거리낌없이 놓여 있다. 일본? 위성에서 쏘아대는 영화전문텔레비전에서 늦은 밤마다 규칙적으로 포르노를 방영한다. 게다가 시청자의 투표로 최고의 여자배우를 뽑아 `하이라이트'만 모아 보여주기까지 한다. 성기 부분이 모자이크 처리된다는 점에서 프랑스와 다를 뿐이다. -이성욱 기자 : 한겨레신문 97/07/11자 기사 중 일부-] 이렇게 포르노가 합법적인 나라들의 포르노시장 규모는 엄청나다. 곧 포르노로 돈버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다. 이 밖에도 인터넷 정보의 70%가 음란 정보라고 하니 정말 엄청난 규모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이런 막대한 돈줄이 음지에서 조용히 숨죽여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법으로 포르노물 음란물을 금지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법으로 금지 하고 있는지 보기로 하자. [형법에 의하면 특정의 성적 표현이 음란물에 해당되는 경우, 이를 유포시키거나 만드는 등의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된다. 즉, 형법은 음란한 문서 도화 필름 기타 물건에 대해서 반포, 판매, 기타 임대하거나 공공연히 전시 또는 상영하는 경우(제243조)뿐 아니라 동 목적으로 제조, 소지, 수입, 수출하는 경우(제244조)까지를 규제하고 있다.]이처럼 철저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암암리에 활동하면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있는 이 포르노 시장을 양지로 끌어 올린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마 포르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사람들에게 퍼지며 누구나 쉽게 맘만 먹으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포르노 업자들 에게는 지금보다 더 엄청난 부를 안겨다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포르노도 표현의 자유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포르노도 표현의 자유라는 주장은 포르노로 돈벌기 위한 사람들의 자기 정당화 수단이자 사업 확장을 위한 구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에는 진정으로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들 보다 위와 같은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포르노도 표현의 자유라는 주장에서 순수성을 찾기는 힘들다는 생각이다. 표현의 자유와 포르노라는 문제는 어쩌면 예술과 외설, 음란의 문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이것이 예술이냐 외설이냐 예술이냐 음란이냐 이 문제도 지금까지 사회문제로 계속 이슈화 되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장정일 씨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 도 예술이냐 음란이냐의 논란에 휩싸여서 논란이 많았다. 당시 이 논란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다음과 같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음란성 여부가 다투어진 사건에서 대법원은 '음란'이란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침해하기에 적합한 것을 가리킨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음란의 판단기준에 대해서는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통념에 따라 객관적으로 판단하되 그 사회의 평균인의 입장에서 문서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규범적으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며,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고,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 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00. 10. 27. 선고 98도679 판결).『시민과 변호사』 2002년 8월호 중 포르노, 성적 표현인가 인권침해인가? -박선영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위원. 법학박사)-에서 인용.]예술이냐 음란이냐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예술과 외설, 음란의 차이에 대해서 난 이렇게 생각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 표현 방식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전달하려는 의미나 감동이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표현 방식이 인간의 성행위 또는 성적 표현일 지라도 그 속에 그것을 접한 대중들에게 줄 뭔가 뚜렷한 가치 있는 의미나 감동이 들어 있다면 난 이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성행위나 성적표현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뚜렷한 가치 있는 의미나 감동이 있느냐 없느냐. 하지만 외설은 우리에게 주려는 뚜렷한 의미나 감동이 없다.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을 수 없다. 그저 단순하게 우리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여 성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외설은 예술성 보다는 상업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순간의 강렬한 자극으로 더 많은 대중들을 끌어 들여서 많은 이익을 남기려는. 결국 예술의 순수성을 버리고 돈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술은 없고 외설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회과학| 2005.12.14| 3페이지| 1,000원| 조회(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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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 감상문]권현형의 달콤한인생
    권현형의 달콤한 인생 감상문먼저 소설의 제목에 끌렸다. 달콤한 인생 이란 말의 어감이 좋아서 그런 건지 많이 들어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이병헌 주연의 영화 달콤한 인생 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제목을 보는 순간 끌렸다.시를 읽으면서 나무로 된 마루가 있고 흙으로 된 마당이 있는 시골집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전형적인 시골집. 그 시골집 지붕을 하얗게 덮는 하얀 함박눈. 왜 하필 함박눈이 생각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함박눈이 가진 포근한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함박눈이 이 시의 분위기와도 잘 맞는다는 걸 내 머리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함박눈은 너무나 포근한 느낌이고 왠지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것 같다. 내 마음의 더러운 부분을 그 깨끗한 하얀색으로 모두 덮어줄 것 같은 그래서 내 마음도 깨끗해 질 것 같은 느낌. 그래서 포근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어차피 그 하얀 눈은 녹고 말겠지만. 시를 다 읽은 후에는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거대한 울림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잔잔한 감동. 잔잔해서 더 좋은 것 같은 그런 감동. 잔잔하게 밀려오는 감동의 그 느낌 자체가 좋았다. 이런 잔잔한 감동의 바탕에는 작가와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난다. 감동은 잔잔하지만 그 잔잔함 속에 배어있는 그리움의 색깔은 짙다. 이런 느낌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대상이 눈 말고 또 있을까. 눈은 소리 없이 조용히 내린다.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너무나 평온하고 잔잔한 느낌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리 없이 잔잔하게 내리는 눈 이 온 세상을 덮어 버린다. 세상을 온통 흰색으로 만들어 버린다. 흰색 이외에 다른 색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세상은 짙은 흰색이 되어 버린다. 15번째 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날 공교롭게도 첫눈이 온다. 우리는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첫 눈으로 인해 평소와는 다른 제사 가 될 것임을. 첫눈으로 인해 작가와 작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찾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제삿날에 내리는 눈은 평소에 내리는 눈과는 다르다. 그것은 곳 아버지이고 아버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첫눈은 하얗게 아버지를 비춘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서글퍼지는 것이다. 너무 하얗게 빛나서 아름답지만 눈이 부셔서 잘 볼 수는 없는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서글픈 그런 모습으로 눈은 어머니의 가슴에 녹아들고 어머니의 막걸리에 녹아든다. 남편이 녹아있고 아름다운 추억이 설탕처럼 녹아있는 달콤한 막걸리. 첫맛은 달콤하지만 끝 맛은 씁쓰레한 그 막걸리의 맛. 이 맛이 바로 그리움의 맛이다. 그리움의 뒷맛은 언제나 씁쓰레하다. 그 맛은 곧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다. 흰눈은 어머니의 옛 연인이다. 옛 연인을 하염없이 보고 또 보지만 그 맛은 씁쓰레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녹아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슬프다. 막걸리에 녹아들어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온 눈은 결국 머니의 몸속에 머물 수 없다. 떠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시신다. 아마 어머니가 마신 눈의 양과 어머니가 흘린 눈물의 양은 똑같지 않을까? 어머니의 무시는 모습은 슬프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너무나 맑고 깨끗하다.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작가는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어머니의 눈물 같은 사랑을 꿈꾼다. 다이아몬드 같은 사랑을 꿈꾼다. 어머니의 눈물 같은 사랑을 기다린다. 이것은 곧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그리고 첫눈 내리는 날마다 어머니의 눈물 같은 사랑을 맡을 수 있는 작가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독후감/창작| 2005.12.14| 1페이지| 1,000원| 조회(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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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상문]공각기동대
    공각기동대를 고등학교 때 봤었다. 그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있던 나인지라 이 유명한 작품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기대에 부풀어서 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유명하니까 엄청 재미있을 줄 알았던 내 기대와 달리 막상 보고 나니 내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지루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특히 인형사와 쿠사나기의 대화내용은 그때 당시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수업시간에 다시 주의 깊게 보면서 조금은 이영화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공감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에 놀랐다 일단 너무나 사실적이고 완벽한 영상미에 놀랐고 또 하나는 그런 내용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작가의 상상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상상력의 깊이가 너무나 깊고 심오하고 철학적이라는 것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애니메이션이 심도 깊게 다룬 핵심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은 바로 인간의 기억일 것이다. 인간의 기억.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이 가지는 의미는 얼마나 큰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을 해보니 우리는 평소에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 하거나 생각하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도 이 애니메이션을 보지 않았다면 심각하게 이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 것이고 약간 과장한다면 어쩌면 죽을 때 까지 못해 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기억이란 것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능력으로 인식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인간이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명작으로 평가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시 여겨서 우리가 평소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러나 인간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한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서 애니메이션을 본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 이것이 이 애니메이션이 높게 평가 받는 이유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높게 평가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극중에 나오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은 기억으로 산다.” 이 말을 천천히 되새기며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니 정말 명언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기억 없이는 자신을 지탱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나에게 지금 까지 살아온 기억이 하나도 없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보았다. 일단 나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나라는 인간이 이러이러한 존재라고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고 배우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의 기억이 종합되어져서 확실하게는 아니지만 그나마 자신이 어떠한 존재 이고 어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식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억이 없다면 어떨 것인가?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스스로 정의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이 복잡해지면서 잘은 모르겠지만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왜 태어나게 되었나? 나는 왜 존재 하는 것인가? 등등의 의문이 끊임없이 생길 것 이다. 문제는 기억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영원히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들 때문에 끊임없이 고민 하게 될 것 이라는 것이다. 정말 고통스러운 일 아닌가. 이렇게 기억이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혼란을 야기 시킨다. 그럼 만약 극중의 청소부처럼 철석같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자신이 존재를 정의 해주던 기억이 송두리 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되어진 거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때 인간이 느끼는 혼란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혼란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극중의 쿠사나기도 청소부의 기억조작 사건을 겪으면서 자신의 기억이 진정한 자신의 기억일까 혼란을 격 게 된다. 그녀는 뇌의 일부분만을 빼고는 모두 사이보그다. 그리고 어디서나 네트에 쉽게 접속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걸어 다니는 컴퓨터라고 해도 맞을 것이다. 이런 그녀가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니까. 결국 인간에게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열쇠는 기억이 아닐까?네트 상에서 발생한 생명체인 인형사. 이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대사처럼 네트는 방대하다. 그 방대한 네트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프로그램들 활동하고 있다. 인형사도 원래는 공안 6과 외무성에서 만든 프로그램 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고 자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이 스스로를 하나의 존재로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터미네이터 에서도 전략 방어시스템인 스카이 넷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고 자신을 없애려는 인간들에게 핵전쟁으로 복수하지 않는가. 이런 상상은 우리는 불안하게 만든다. 인간의 상상력은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지 않는가. 과거 몇 십 년 전 SF 영화들에서 상상되어지던 일들이 지금 현실에서 진짜로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네트 속에서 프로그램이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은 공각기동대가 나오기 이미 오래전에 나왔던 상상이다. 그러나 이전의 상상들보다 공각기동대가 더 깊이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다. 바로 자의식을 가진 프로그램을 하나의 생명체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형사는 말한다. 공안 9과로 온 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그가 9과로 오려고 한 이유는 쿠사나기와 융합하기 위해서다. 인형사는 네트에서 발생한 하나의 새로운 생명체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생명체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형사는 완벽한 생명체가 되려고 한다. 종족을 번식시키려고 하고, 진화하려고 하고, 다른 생명체처럼 죽음을 얻으려고 한다. 정말 이러한 상상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인형사는 끊임없이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노력을 하지만 네트에 갇혀있는 불완전한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완벽한 생명체들처럼 영원히 번식하며 진화를 할 수 있는 핵심 코드인 개성을 가진 자손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인형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개성이 없이 자신의 카피만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반복해도 종의 번식이 될 수 없고 진화도 이룰 수 없다. 단지 복사체만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복사체들은 모두 똑같다. 같은 크기의 능력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복사체에게 진화란 있을 수 없다. 계속 그 능력 그대로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프로그램을 버전업해주지 않으면 그 프로그램은 더 좋은 성능을 영원히 발휘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개성을 가진 자손을 만들려는 것은 자신의 종에 대한 영속성의 욕망도 들어있지만 그 보다 더 강력한 것은 진화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진화의 욕망. 종족 번식의 본능과 더불어 생명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가장 강력한 본능일 것이다. 인형사가 쿠사나기와 융합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네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라면 쿠사나기는 네트 밖에서 가장 강력하고 완벽한 존재이다. 가장 완벽한 조건과 힘을 갖춘 가장 우월한 존재, 우성인자를 가진 상대와 융합하려는 것. 이것은 종족을 번식하려는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강력한 본능이다. 그래야 더 좋은 뛰어난 우성의 자손을 낳을 수 있고 그래야 종의 진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손을 낳은 후에도 안전한 환경 속에서 안정적으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형사는 완벽한 생명체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쿠사나기와 융합하여 완벽하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로 거듭난다. 융합으로서 이루어낸 인형사와 쿠사나기의 진화는 두 가지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완전한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생명체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로 해석 될 수 있다 . 그 들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인간에 의해서 창조 되었지만 100%인간에 의해서 창조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아를 깨달음 얻은 것은 그들 스스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그들에게 자의식을 심어준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태어난 생명체. 그들은 무한한 능력을 가졌으며(네트 밖에서의 신체능력도 인간보다 월등하고 네트 안에서의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능력은 인간을 훨씬 능가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생성 기원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인간은 인류의 생성기원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다만 신이 만들었다고 진화에 의해서 발생 했다고 추측할 뿐이다. 이렇게 그들은 인간보다 완벽한 존재다. 인간 보다 완벽한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인 것이다. 나의 비관론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새로운 생명체에게 인간이 지배당하는 것은 어쩌면 시간 문제 아닐까?
    독후감/창작| 2005.12.14| 3페이지| 1,000원| 조회(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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