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무엇이 유교인가? 유교의 정의가 무엇인가?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에서는 우리나라의 그리고 아시아의 전통적으로 이어온 가치관을 중심으로 우리식, 아시아식 자본주이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하지만 솔직히 유교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릴적부터 유교 때문에 우리 나라가 잘 못 되었고 결국 일본에게 치욕스러운 식민지 생활까지 하게 되었다고 배워왔다. 조선 시대의 양반들은 타락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웠으며 끝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또한 그렇게 만든 것은 모두 유교 때문이다. 이는 역사시간에 늘상 배웠던 내용 아니었던가!, 요즘에도 그런 말을 많이들 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제도가 잘못 되었느니, 권위주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느니, 여성차별문제가 심각하다느니, 학벌주의가 심각하다는 등 그 모든 것 뒤에는 항상 유교라고 하는 우리의 전통 사상이 있었으며 언제나 그것을 비판해왔다. 모든 것이 유교때문이라고 배워왔는데 함재봉교수는 유교에 대해서 아시아적 가치이며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사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나로써는 혼란 스럽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자본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은 분명 외래 사상이다. 민주주의 사상에 대한 의미와 중요성을 분명 우리는 서구인들과 다르게 이해 하고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서구의, 즉 유럽의 자유주의는 아시아에서는 분명히 다른 차이가 있음을 누구나 인정 할 것이다. 20세기에 있었던 두차례의 대전을 치루는 동안 우리는 서구의 강한 문명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살아 남기위해 그들의 문명을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 들여 왔다. 그 당시 식민지였던 아시아 국민들에게는 서구의 문명은 신의 말씀으로 들렸을 것이다.하지만 21세기가 된 지금 서양의 문명은 우리에게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그들 사상의 모순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고 또한 썩어서 곪아 터지고 있다. 그들의 자유민주주의는 콩한쪽도 나눠먹는 우리의 전통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난 1997년 IMF의 도움국제화 세계화를 추구하는 이 시점에서 저자는 유교라는 전통사상을 제기한다. 유교가 보편적인 의미를 갖게된 것은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유교권 국가들의 놀라운 경제발전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발전과 변화를 가능케 하였을까?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인 우리는 놀라운 경제적 정치적인 발전을 성취했지만 오늘날 한국은 가치관의 혼란과 이상의 상실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성숙은 비록 가난과 압제와 같은 근대화 초기의 문제점들을 해소하였다 하더라도 오히려 근대사회의 본격적인 도래로 인하여 파생되는 문제들은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우리의 전통 사상은 바로 유교이다. 한국의 전통사상이 비록 유교사상 하나만은 아니지만 지난 600여 년 동안 정치 이념과 체제. 제도의 차원에서 지속적이고 의식적으로 추구되어온 사상은 유교이다. 하지만 유교 사상과 체제는 외세의 침략을 막지못하고 결국은 나라 주권마저 빼앗겼다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급속히 그 힘을 잃어갔다. 그래서 지금 한국 정치와 사회는 특유의 동인(動因)을 밝혀주고 직속적인 생명력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한국 정치론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으며 이를 설명할 이론은 부재한 상황이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 동시에 도덕 정치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가능한가? 이처럼 상이한 전통과 논리를 갖고 있는 사상과 인간관은 과연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방향을 성정하기 위해서는 전통 유교 사상에 대한 재인식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주의 사상은 극단적인 형태의 소극적 자유만을 신봉하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반공동체적이고 반도덕주의적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자유이다. 우리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후 전통 사상에 대한 회의와 환멸은 극도에 달한 반면 근대는 철저하게 일본의 독특한 재해석을 이미 거친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국한 되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근대와 전근대사상의 충서 본다면 경제발전은 참다운 경국제민의 전제 조건에 불과하다. 유교가 말하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들에게 윤택한 경제생활을 누리게 하거나 개인의 행복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틀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결국은 윤택한 경제생활을 바탕으로 도덕과 인륜이 살아 숨쉬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유교 국가론은 구체적인 정책에 있어서는 자유시장경제주의보다는 서구의 복지국가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서구 복지국가가 계급간의 이해관계를 국가기제를 통하여 절충하는 과정에서 태동된 것인 데 반해 유교국가는 가족과 같이 구성원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 유교사상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인들의 국가관을 볼 때 그것은 분명 서구의 자유자본주의 국가와는 여전히 다른 모습일 것이 분명하다.3장 아시아적 가치논쟁의 국제정치학어느 사이엔가 아시아적 가치론 이 우리 지성계의 중심적인 화두로 자리잡았다. 이런 논쟁을 하게된 계기는 바로 아시아국가들의 빠른 경제성장과 정치적인 안정에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의 아시아 경제 위기는 우월하게 부각되던 아시아의 가치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기 시작하였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가치 의 가장 강력한 주창장다. 그는 동양인들 특유의 가치관과 동아시아가 구축한 정치경제체제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서구적 가치관의 위선과 체제의 한계를 들춰내고 있다. 1993년 4월 한국을 포함한 40개 아시아 국가가 「방콕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이는 인권은 본질적으로 보편적인것이지만 국가와 지역적 특성,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종교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원칙과 가치들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고 덧붙였다. 아시아의 정부와 지도자들은 인권이란 의식주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생존권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안보권이라고 주장한다.아시아적 가치론자들은 동아시아가 이룩한 경이적인 경제발전의 근본 요인이 경제 발전을 우선하는 가치로 두는 국가 주도형 경제 발전 모델이었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핵심은 강력한 국가로써 초래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 주도형 경제모델의 해체와 신보수주의 정책의 채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적 가치를 미국적 가치로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자유주의 정신은 국가와 정부를 극단적으로 불신하는 데서 출발한다는점에서 우리에게 맞지 않으며 또한 그런 바탕에서의 시장은 개인의 능력과 자율에 대한 확신을 주지만 복지문제를 등한시하는 문제를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미국의 가치와 제도가 한국의 선택이 될 수는 없다. 미국적 가치와 제도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항상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도 불분명하며 우리의 경험이나 사상으로 볼 때 미래의 국가체제는 여전히 강력한 국가를 요구한다. 강력한 국가는 책임성을 갖춘 동시에 효율적인 정부가 되어야 하며 국민들의 안위와 복지를 보장하며 덕치로써 이끌어야 한다.4장 아시아적 가치와 민주주의 -유교민주주의는 가능한가?-서구의 가치에서는 아시아적 권유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서구인들의 자유주의적 인간은 타인과 절대적으로 독립된 존재요 자유로운 존재이다. 심지어 가족과 친구 국가나 사회로부터도 궁극적으로 독립된 존재이다. 그래서 서구의 자유주의는 정부와 계약을 통해 권력을 위임한 것이며 권력을 남용하는 순간 정통성을 잃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는 국가와 정부에 대한 시민 개개인의 끊임없는 견제와 비판이 있어야 유지 가능하며 이는 국가와 정부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서 출발하는 것이 자유주의다. 유가의 사상가들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존재로 간주하였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도덕성과 윤리성을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유교적 인간은 항상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규정함은 물론 자신의 행동방향과 원칙을 정한다.많은 부분에서 자유주의와 유교적인 가치는 차이를 보인다. 지금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서구의 자유주의적인 가치관과 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속에서 형성되며 그것을 제시하는 지식인의 가치관과 역사의식, 당위론을 반영한다. 최근 동양과 서양이라는 논쟁이 부상한 것은 바로 경이로운 경제발전과 모범적인 민주발전을 이룩하였다는 자신감이며 우리 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필요해서이다. 동아시아는 식민지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교를 버리고 서구의 사상을 받아 들였다. 메츠거(Thomas Metzger)는 동아시아가 서양의 문물을 빨리 그리고 비교적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서양의 근대문명이 해결책 내지는 대안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헤겔의 동양사관이후 동양의 역사를 정체적인 역사로, 서양의 역사를 진보적인 역사로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의 진보과정과 유사한 역사를 동양사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은 이제 지각 있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극복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지식인들이 서구역사의 시기 구분법을 이용하여 자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있다.동양은 서양과는 다른 역사발전의 방향성이 있고 동양사상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추구하는 이상이 있다. 그리고 동양의 전토은 서양의 전통 못지 않게 활력이 넘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저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양에 대한 맹목적인 우월감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6장 경복궁의 복원과 전통의 재평가광복 50년을 맞아 구 조선 총독부 건물이 철거 됐다. 이는 단순한 미적인 조화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이유 우리의 것 이 다시 나타났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이다. 그러나 새로 그 자태를 드러낸 경복궁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여기에는 자연경관의 회복과 전통 건축의 재음미의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근본적인 사상과 이념, 가치관,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조선 말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정치사상은 유교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하지만 해방된 후에 독립된 민족국가의 체제나 이념으로 유교를 주장하거나 유교국가의 부활을 꾀하는 정치세력은 전무하였다. 수.
조선책략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조선책략은 주일청국참사관(駐日淸國參事官)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黃遵憲)이 1880년경에 저술한 외교문제를 다룬 책으로 원명은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다. 조선·일본·청나라 3국은 서양의 기술·제도를 도입하고 습득하여야 하며, 러시아의 남하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동양 3국이 수호하여야 하고, 미국과 연합하자는 내용인데, 1880년(고종 17)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저자로부터 직접 받아 가지고 와서 고종에게 바쳤는데, 고종은 이 책의 내용을 대신들로 하여금 검토함과 동시에 이를 전국의 유생(儒生)들에게 배포하여 그들의 식견을 넓히려 하였으나, 오히려 유생들의 반대를 받게 되었다. 유생들은, 일본은 양이(洋夷)와 같으며, 서양과 수교한다든가 연합한다는 것은 가톨릭교를 퍼뜨리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연명(連名)으로 상소까지 하였다고 한다.나로서는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은 그 당시에 전 세계적인 식민지건설로 고통을 겪던 아시아의 한 나라로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당시에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당시에 전 세계, 특히 유럽은 이미 많은 전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의 화력은 우리보다 월등히 앞서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많은 발전을 한 상황이었고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의 경쟁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들간의 경쟁적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 이였고, 또한 세력균형이나 여러 가지 조약 등 훌륭한 외교적 전략을 만들었다. 유럽에 비해 사상적 그리고 과학 기술적인 변화가 적었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유럽의 열강아래 식민지로 변하는 상황 이였고 당시로서 우리나라는 오랜 유교사상을 고수해 왔으며 내적으로 양반들의 부패와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 사이의 정치적인 싸움이 계속 되었던 만큼 조선 자체로서도 혼란이 많았던 시기였다. 게다가 많은 위정자들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우대하는 사대주의에 깊이 빠져있던 상황 이였다.물론 조선에서도 많은 지식인들이 중국이나 일본의 급변하는 상황을 깨닫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등 나라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정치적인 몰락으로 이미 강대국으로 갈 시기를 잃고 있었다.19세기 전반 근대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 열강(列强)은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하여 종교·상품·군함·대포 등을 앞세우고 아시아 각국에 침입하였다. 이런 모습이 당시 조선으로서는 열강은 돈에 미쳐 날뛰는 오랑케 나라로 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는 조선을 경악시켜 서양의 침입을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으며, 또한 가톨릭교의 유행과 서양 상품의 범람은,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체제를 지키고 양화(洋禍)를 막으려는 움직임을 낳게 하였다. 더욱이 서양 함선의 잦은 출몰과 그들의 통상(通商) 요구는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고 쇄국정책을 펴는 결과를 초래했다.유럽의 열강들은 제국의 건설을 위해 이익이 되는 나라를 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식민지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더욱 심각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단기간 내에 조선을 개혁하여 유럽열강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 이였던 만큼 타국의 세력을 이용해 적의 세력을 막고자 하는 의도는 좋다고 본다. 특이나 오랫동안 동맹국 이였던 중국과의 동맹은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거기에 덧 붙여 일본의 세력과 손을 잡고 유럽열강과 경쟁할 수 있는 미국과의 동맹 또한 당시로서는 현명한 생각이라 판명된다. 또한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전략으로 본다면 중국을 통해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응케 할 수 있으며 일본을 통해 바다 쪽에서의 다른 열강을 견제하고 특히 유럽 열강과 견줄 수 있는 미국의 힘은 반드시 필요한 것 이였다. 더욱이 황준헌은 프랑스나 영국 등 다른 서유럽국가와는 달리 미국은 식민지에 욕심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하지만 황준헌의 이런 생각은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단순한 동맹을 한다는 것은 좋은 생각임에 틀림없으나 동맹이라는 것이 자국의 이익을 위한 세력 동맹이지 아무런 이익이 없는 동맹은 아니라 생각된다. 즉 과거처럼 대의명분으로 타국을 도와 주는 시기는 벌써 지났던 것이다. 유럽의 예를 들자면 독일(당시에 프러시아)은 통일을 위해 프랑스와의 일전(당시의 남독일 지역은 프랑스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지방을 획득하기 위해서 프랑스와의 전쟁은 필연적 이였다)을 앞에 두고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하기 위해서 러시아 그리고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전쟁결과 러시아는 흑해중립조항의 폐기를 보게 되었고, 이탈리아는 프랑스가 그동안 간섭하던 법왕령의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다. 만약 독일이 아무런 이익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면 러시아나 이탈리아는 오히려 프랑스와 동맹을 맺여 독일을 공격하는 상황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의 동맹은 분명히 이익에 움직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일본 미국이 우리와 동맹을 맺는다면 분명 어떤 이익을 바랄텐데 우리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비장의 카드가 없었다. 다시 말해 강한 군사력도 없었고 상대국들에게 줄만한 이익도 없던 것이다. 그저 과거의 형제국가니 뭐니 해서 정의에 호소할 따름 이였다.황준헌은 청과 일본 미국과의 연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청나라는 오랜 시간동안 의리로서 그리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같음을 주장하고 있으며 일본은 조선을 정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고 미국에 대해서는 신의(信義)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저자가 청국인 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황준헌 역시 당연히 중화사상적인 판단을 했다고 생각된다. 특이나 일본에 대해서 평가하는 부분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또한 황준헌은 가장 큰 위험을 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의 남하라고 생각했고 만약 조선이 러시아의 손에 들어간다면 중국이 큰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당장 러시아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 등 여러 열강들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조선으로서는 믿을 만한 강한 동맹국이 필요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적도 아군도 없던 시기였다. 약소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그런 상황에서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있었다.또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고종이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읽고 중요하다 여겨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많은 유생들의 반발로 그러지 못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외교론은 영국의 해롤드 니콜슨 경이 지은 외교학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국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교의 문제가 원시 사회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생성·변모했는가를 머리에서 다루었고 동시에 어떠한 외교가 이 시대에 가장 바람직한 것인가를 다루었으며 끝으로 외교의 실무적인 면과 외교 용어를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저자는 이 책이 외교의 이론서이며 또한 실무 서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직적 외교의 기원에서부터 외교이론의 발전 구외교에서 신외교의 변화 민주주의적 외교 이상적인 외교관 유럽외교의 유형들 최근에 나타난 외교 관행의 변화 외교 절차상의 문제점들 외교 업무 외교용어 외교의 어제와 오늘까지 총 11장이며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 한다면 다음과 같다.1장 조직적 외교의 기원조직적 외교의 기원(起源)이란 원시 공산 사회로부터 출발하여 근대 사회로 까지 최초의 국가 생성에서 이웃 국가와의 관계에서 외교란 용어의 발생 등을 들 수 있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따른 외교의 정의는 "외교(外交)라 함은 협상(協商)에 의하여 국제관계(國際關係)를 다루는 일이며, 국제 관계가 대사나 사절에 의하여 조정(調定)·처리(處理)되는 방법이며, 외교관의 업무(業務) 또는 기술(技術)이다."라고 쓰여져 있다. 그러면 외교 즉 diplomacy란 용어의 기원은 어디 에서 왔는가? 그것은 '접는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인 diploun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 제국 당시의 모든 여행증, 도로 통행증, 그리고 통행료 납부증은 두 겹으로 된 금속판에 인쇄되어 접은 다음 독특한 방법으로 꿔 매어져 있었다. 이 금속 통행증을 diploma라고 불렀다. diplomacy 또는 diplomatic이라는 용어가 고문서 연구라는 뜻이 아니고 국제 관계의 형태나 처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외교 임구가 정치가나 정략가와는 구별도는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을 받고 일정한 형식으로 자신의를 부활 시킨 군사적, 정치적 신분 질서의 이론과 상업의 계약에서 야기된 부르조아적 개념이다. 전자는 권력 정치의 경향을 보여 주는 전사·영웅 이론이고 후자는 이익 정치의 경향을 보여주는 무역업자·상인의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사이론의 외교란 또 다른 어떤 수단에 의한 전쟁이고, 상업이론의 외교란 평화적인 상업에 대한 도움이라고 볼 수 있다. 전사파는 남을 약탈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외교 정책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법이 민간적이라기보다는 군사적인 견해로부터 구상처리 되었다. 그러한 협상자들이 취하는 방법은 군사적인 전술에 가까운 것이다. 협상 목표는 승리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는 회유, 신뢰, 떳떳한 대결 등은 표면화되지 않는다. 양보라든가 조약의 체결은 분쟁의 최종적인 해결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약화와 퇴각의 증거요 약점이다. 상업파는 전사파와 반대로 협상이 민간적 개념의 기초로 이루어져 있다. 협상이란 단순히 생사를 건 투쟁의 양상이 아니라 어떤 항구적인 이해를 이루기 위한 상호 양보에 의한 시도인 것이다. 국가적인 명예는 국가적인 정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상충되는 이해 관계를 조정해 줄 수 있는 두 협상자 사이의 타협점이 있을 수 있다. 이 타협점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솔직한 토론이 필요하며, 인간적인 이성과 신뢰 그리고 정당한 흥정의 통상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전사파는 폭력의 위력을 과시하며 상업파는 신용의 힘을 과시한다.3장 구외교에서 신외교로의 변화그 다음의 구외교에서 신외교로의 변화는 흔히 시대를 구분해서 고대와 중세 암흑기 시대를 구외교라 하고 1차대전 이후를 신외교라 하는데 특별하게 나눌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시간은 항상 흐르고 시대에 따른 외교도 가변 하기 때문이다. 사실 17-8세기 외교와 오늘날의 외교의 사이에 현저한 차이점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저들의'외교는 암흑(暗黑)이고 오늘날 '우리는' 외교는 광명(光明)한 것처럼 그 둘을 분명하게 나누려고 하는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가간의 비밀외교가 이루어져 왔고 이런 비밀외교로 국민들은 원치 않았던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1차대전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개방외교를 주장했지만 베르사이유 조약도 역시 결론적으로는 비밀외교가 되어 버렸다. 개방외교는 바로 민주주의적인 외교이다. 하지만 개방외교는 많은 문제점이있다. 우선 국민들이 무지하다는 점과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국가간의 중요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국민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는 너무도 오랜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점은, 대중은 사고에 기초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에 기초를 둔다는 것이며 민주외교가 주권적 민주주의의 무책임한 태도에서 유발되는 불확실성을 문제점이 있다. 저자는 개방외교를 위해서는 우선, 유권자들이 정책과 협상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둘째, 직업적인 외교관이 필요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국민들이 자세한 내막보다는 일반적인 원칙을 교육받아야 한다고 말한다.5장 이상적인 외교관저자는 우선 이상적인 외교관은 신뢰와 호감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협상의 기술에 대한 일반적인 상상의 경향은 기만보다는 신용과 신뢰를 분명히 선호하고 있다. 이런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외교관은 진실해야 한다. 진실성이 우선이라면 두 번째는 바로 정확성이다. 단지 지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도덕적인 정확성도 의미한다. 외교 협상자들은 마음과 정신에 있어서 모두 정확해야 한다. 또한 외교관은 침착성이 있어야 한고 상냥해야 하며 까다로운 성격을 억누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니콜슨경은 이런 모든 것들이 갖추고 있어도 겸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상적인 외교관의 마지막 덕성은 바로 충성심이다. 직업적인 외교관은 여러 가지의 상이하고도 때로는 상극되는 충성을 바쳐야한다.그는 군주, 정부, 외상 그리고 외무성에 충성해야 한다.6장 유럽외교의 유형들유럽외교의 유형은 먼저 저자는 미국의 외교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의 직업 외교관 제도가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기들 스스로 독자적인 외교를 발전 시킬만한각한다. 이탈리아 외교관들은 특히 협상의 기술이라는 면에서 뛰어났다.7장 외교 관행의 변화최근에 나타난 외교 관행의 변화는 예전의 동맹국 사이의 협정은 일상의 외교적 의견 교환에 의해서는 신속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몇몇 동맹국의 수상이나 전문가가 원탁에 마주앉아 긴박한 문제를 토론하는 회담식 외교가 등장했다. 하지만 우선 회담식 외교가 성공하려면 사전에 회담의 범위와 계획이 합의되고, 참석자의 견해가 모순되지 않는 것이 확인되어야 한다. 회담식 외교의 장점은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협상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방법은 막대한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고 높은 유동성을 취할 수 있다. 또한 빈번한 모임으로 수상들은 서로의 얼굴을 익히게 되고 때로는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위원회의 정점은 외상으로 하여금 의회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하게 해주는 반면에 공개적으로 토론할 수 없는 비판과 제안에 대해 의회에 안전판을 제공한다는 점이고 단점은 외상에게 과중한 노고를 부과 한다는 점, 침묵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정치적 이익과 상업적 이익을 결부시키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처음 안 사람들은 독일인이었고, 미국인이 뒤를 이었다. 대사가 자유주의자들과 접촉을 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미묘한 일임에 반해, 공보관은 그 접촉을 지속시킬 수 있다. 어떤 나라가 건전한 정신을 회복해서 분쟁보다는 협동이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길 바랄 뿐이다.8장 외교 절차상의 문제점들이 번 장에서는 문명국들에 의해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외교 절차상의 규칙에 관한 것이다. 군주 국가에 있어서의 외교관들은 왕족의 바로 밑의 서열에 속해 있었다. 영국에 있어서의 대사의 서열은 왕족의 바로 밑이였다. 국가간의 서열문제는 중요한 것이며 회의석상에서 어떤 순으로 앉는 문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서열은 1815년 비엔나 회의에 의해 사절이 도착한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일자에 따로운 사절을 영접하는 행사는 없어지고 새로운 대사나 공사가 신임장을 제정하는 공식 접견 때까지 모든 예식을 연기하는 것이 현대의 관행이다. 신임사절의 도착에 대한 의전은 나라마다 다르다. 워싱턴의 외교절차에서는, 대사는 그의 전용차를 타고 국무성으로 가서 국무장관의 안내를 받아 백악관으로 간다. 그들의 청실(Blue Room)에 도착하면 대통령이 국무장관을 대동하고 들어 온다. 그의 인사말을 읽고 대통령이 이에 답하면 절차는 끝난다. 신임장을 제정하면 사절은 그때부터 권한을 충실히 위임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다음 각료들과 그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 사절을 방문하는 것이다. 외교관이 소환장을 제출하지 않고 다른 임지로 전보되는 경우는 후임 외교관이 자신의 신임장을 제출하면서 선임자의 소환장을 동시에 제정한다. 군주가 사망하거나 찬위된 경우에는 새로운 신임장이 필요하나 그 신임장이 처음에 제출될 때와 동일한 의전에 의해 제출되지는 않는 것이 통례이다.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퇴임할 경우 그의 전임자가 교부했던 신임장이나 그의 전임자에게 증정되었던 신임장이 정당성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혁명이나 폭동에 의해 수립된 정부를 승인하는 문제는 그 혁명 정부가 어는 정도 국토 전반을 통치할 수 있는 행정 기구를 가질 때까지 보류한다. 혁명 정부와 외교적인 접촉을 할 때는 신임할 만한 특사를 파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특사들은 혁명정부에게 신임장을 제출하지 않는다. 사절이 신임장을 증정한 날부터 공식적으로 소환될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켜 '재직중'이라고 말하는데 외교관의 일은 첫 번째는 보고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주재국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다. 외교관이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는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하는데 첫째로 외상에게 보내는 공식문서는 일련번호를 기재하고 공관장이 서명한다. 이 문서는 '귀하'(Sir)라는 단어로 시작되며(외상이 직위가 있으면 경(My Lord)), 본문은 동일한 주제에 관해 이미 앞서 보고한 바에 관하여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급박한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대 전쟁.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려해야 할 것이다.【배경과 원인】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 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미국과 프랑스·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간의 항쟁에 있었다.그러나 러·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 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Cairo·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Byzantium·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 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이와 같은 정세 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 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한편 1903년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독일의 정부·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5년 또는 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 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 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제 1차 세계대전 각 국의 참전외교】1. 이태리의 참전이태리는 3국동맹의 일원이었으나 프랑스의 외교솜씨로 약화7월 28일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하자 이태리는 3국동맹의 원조의무발생사유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선언8월 3일 중립을 선언함으로써 일단 참전하지 않음1915년 협상국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다.1915년 5월 23일에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을 함으로써 대전에 참전오스트리아와 영토분쟁으로 3국동맹은 유리된 상태에서 영국, 프랑스 등의 참전권유연합국은 이태리에게 아시아, 터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 획득에 원조 약속2. 터키의 참전1914년 8월 2일 터키는 독일과 동맹조약을 맺고 엄정 중립을 약속독일과의 방위의무원조를 맺으므로 해서 독일편에 서게됨8월 20일 독일군함 2척이 다다넬스해협으로 진입함 이에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단절10월 29일 터키함대는 독일함대와 합류하여 러시아의 항구 오데사와 세바스토폴리를 포격이에 러시아는 다다넬스 해협을 점령10월 31일 러시아 영국 프랑스 가 터키에 선전3. 일본의 참전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다영국의 대독일 개전과 때를 같이하여 영국과의 동맹조약에 의거 행동할 것을 선언1914년 8월 3일 일본은 최초로 독일의 함대가 홍콩을 공격한다면 일본은 영일 동맹조약에 따른 책무를 다한다. 고하였다.영국은 일본을 전쟁에 개입시키고 싶지 않았으나 8월 7일 일본에게 중국근해에 있어 독일의 무장선을 공격해 달라고 하였다이에 일본을8월9일 영국에 회답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1독일의 순양함의 수색과 격파를 위해서는 개전선언을 할 필요가 있다.
컴퓨터의 발달과정1. 컴퓨터 이전시대숫자기호 발명은 BC 20C경 이집트에서 시작하였고, 아라비아 숫자는 AD 1C경 인도에서 발명하여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하여 전파되었다. 최초의 계산도구는 조약돌이나 손가락이었다. 그 후 BC 25C경 중국에서 주판을 발명하였다. 주판 이 후로 더욱 발전하여 1617년 네피어 봉(Napier's Bones) 이라는 주판보다 성능이 월등한 곱셈용 계산도구가 만들어 졌고, 1642년 파스칼린이라는 톱니바퀴를 이용한 계산기가 발명되었다. 또한 1673년 독일인 라이프니쯔는 사칙연산이 가능한 기계적 계산기를 만들었는데 무려 300여 년이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1822년 바베지(Babage)는 대수표를 계산하는 미분기를 발명했고 또한 해석기관(Analytical Engine)은 완전하게 작동하는 기계제작은 실패하였지만 오늘날의 컴퓨터 부품과 유사하였는데, 바베지의 해석기관의 기본적인 특성은 숫자는 물론 갖가지 지시를 계산기 내부에 전달하는 입력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 입력 장치를 통해 투입된 숫자를 명령대로 계산하는 연사 장치 또는 처리 장치를 가지고 있고, 명령된 과제를 다른 과제와 혼동하지 않고 정확한 순서에 따라 처리하는 기능을 가진 제어 장치가 있고, 숫자가 처리될 때까지 보존하고 있는 기억 장치이며, 마지막으로 출력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구조와 특성은 오늘날의 컴퓨터가 갖추고 있는 5가지 기본 요소로 발전되었다.1880년대 미국인 허만 홀러리스(H. Hollerith)의 천공카드 시스템이 인구조사 자료를 처리하는 기계를 만들었다.2. 컴퓨터 이후 시대1936년 하버드 대학의 에이큰(H.H. Aiken)교수는 바베지의 해석기관을 그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모방하기로 하고 MARK-1 이라는 거대한 최초의 자동 계산기를 제작하였다.1943-1946년 ENIAC이라는 세계최초의 전자식 컴퓨터가 만들어졌다. ENIAC은 1만 8천여개의 진공관을 사용하며, 1천5백여 개 relay, 6천여 개 switch, 무게 30톤, 174kw/h 전력소모를 하는 컴퓨터였다. ENIAC은 군사용 목적으로 탄도계산을 하는데 만들어졌다. ENIAC은 앞서 제작된 전기 계산식 컴퓨터보다 그 처리 속도가 1,000배나 빠른 최초의 전자식 범용 디지털 컴퓨터로 인정받고 있으며, 분당 5,000회의 덧셈과 500회의 곱셈을 할 수 있었다.1944년 ENIAC이 완성되기 전, Hungary수학자 폰 노이만은 내장형 프로그래밍 컴퓨터를 생각했다. 이 프로그램 내장 방식은 ENIAC악처럼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마다 수천 개의 스위치와 회로를 변경시킬 것이 아니라, 숫자의 형태로써 컴퓨터의 명령어를 컴퓨터의 주기억 장치에 저장시킬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1946-1952년 EDVAC이라는 ENIAC을 대폭적으로 개선한 컴퓨터를 만들었다. EDVAC은 프로그램 내장 방식을 사용하여 머큘리와 에커트에 의하여 1952년에 완성하였다. EDVAC은 수은 지연 회로를 주기억 장치로 채택하여 1024 words의 저장 용량과 20k words의 보조 기억장치를 보유하였으며 2진수를 사용하였다.1946년 영국인 모리스 윌키스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프로그램 내장 방식에 의해 최초로 작동하는 컴퓨터 EDSAC을 만들었다.3. 1세대 컴퓨터(1946-1959)1세대 컴퓨터의 특징은 진공관을 사용하며, 2진 연산의 개념, 자료의 임의 접근, 프로그램 내장 방식 채택하였다. 종류에는 UNIVAC-1, IBM 701, IBM 650 이 있다.UNIVAC-1 은 이전까지의 실험목적이나 학문적인 목적의 컴퓨터 제작에서 벗어나 상업적인 목적의 전자식 컴퓨터였다. UNIVAC-1은 자료 처리 전용으로 개발되었으며, 자기 테이프를 보조기억장치로 채택, 인구 조사 , 대통령 선거 결과 예측으로 사용되었다.IBM 701 은 1953년 IBM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이다. 701은 분당 150라인을 인쇄할 수 있는 프린터가 작용되었고 기본입출력장치로 천공카드기와 카드입력기가 사용되었다.IBM 650 은 그 당시 사용되었던 천공 카드 기계를 논리적으로 개량시킨 것으로 세계에 약 1천여 대가 설치되었다.4. 2세대 컴퓨터(1959-1964)2세대 컴퓨터의 특징은 트랜지스터를 사용이다. 트랜지스터를 채택한 컴퓨터는 진공관을 이용한 컴퓨터의 외형보다 1/100도 안되었으며, 가열 전극이 필요 없기 때문에 전력 등의 에너지 소모도 훨씬 적었다. 그리고 그 동작 속도도 빠르고 정확성도 높아 생산성, 경제성의 향상에 기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환성의 한계와 저급 언어의 사용이라는 문제점도 있었다. 종류에는 UNVAC-2, IBM 1401 있다.IBM 1401은 1959년 IBM에서 소개한 상용 메인프레임 컴퓨터로 단종되기 전까지 10,000개가 판매되었다. 초당 4000번의 덧셈을 할 수 있고 사이클타임은 12마이크로 초(1/1000000)이었다.5. 3세대 컴퓨터(1964-1971)3세대 컴퓨터의 특징은 집적회로(I C)를 사용한 컴퓨터이다. 1964년 IBM이 IBM S/360탄생을 발표하였다. 시스템 S/360은 서로 호환성을 지닌 6대의 컴퓨터 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40대의 입출력 장치와 보조 기억 장치를 사용할 수 있고 16,000개부터 1백만 개의 기억 단위를 갖는 주기억장치로 구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의 가장 큰 문제는 운영 체제와 소프트웨어의 신뢰성으로서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6. 4세대 컴퓨터(1971-1980년대 중반)이 시기는 여전히 IC기술이지만 고밀도 집적회로, 초고밀도 집적회로의 사용에 따라 이 기간을 4세대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 시기의 컴퓨터 발전의 특징은1진화적 발전시기 - 3세대 컴퓨터의 구조를 갖지만 더 빠르고, 가격이 더욱 싸 며, 더 큰 주기억 용량과 보조 기억장치를 갖는다, 또한 컴퓨터 입력 수단이었던 천공카드 시스템이 자기 테이프(magnetic tape)와 자기 디스크(magnetic disk)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2자료 처리 방식의 변화 - 일괄 처리 방식에서 자료 지향 방식으로 서서히 바뀌 게 되었다. 즉 모든 자료를 일괄하여 즉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컴퓨터 시스템에 자료를 입력하여 즉시 처리하는 방식이다.3데이터 통신의 출현 - 데이터 통신의 발달로 전화선이나 다른 통신 매체를 이 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에서 발생한 자료의 즉시 입력이 가능해짐으로 은 행의 입출금 업무, 기차나 비행기 좌석 예약업무가 가능해졌다.4프라이버시와 컴퓨터 범죄 - 수 십 억 개의 문자를 저장할 수 있는 보조 기억 장치가 등장함에 따라 갖가지 정보를 저장하게 되고, 그 에 따라 개인 정보가 침 해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5마이크로프로세서의 출현 - 1969년 Intel사에서 호프(T.Hoff)는 계산기의 연산 및 논리 기능을 한 개의 칩 속에 배치시킬 것을 고안하여 실질적으로 단일 실리 콘 칩으로 컴퓨터의 중앙 처리 장치(Central processing unit: CPU)를 만들게 되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