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론2. 본 론1.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와 그의 문학1) 박종화의 삶2) 문단 데뷔 무렵3) 단편과 소설발표4) 신문소설 연재2. 월탄의 1920년대 문학3. 월탄 문학의 평가와 문학사적 의의3. 결 론1. 서 론우리 소설사를 통하여 역사소설을 일생 동안 쓴 작가로 월탄(月灘) 박종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광수나 김동인은 일반적인 생활 현실에서 소재를 택했다가 뒤에 역사소설에 손을 댔지만, 박종화는 그의 첫 작품부터 역사소설을 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등 장편 역사소설을 들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그의 삶과 1920년대에 그의 행적을 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2. 본 론1.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와 그의 문학1) 박종화의 삶호는 월탄(月灘).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20년에 휘문의숙(徽文義塾)을 졸업, 그 해 10월에 문학지 《문우(文友)》를 창간했고 1921년에는《장미촌(薔薇村)》의 동인이 되어 ,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1922년 1월에 홍사용(洪思容), 이상화(李相和), 나도향(羅稻香),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백조(白潮)》창간호를 발행, 한국문단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고 1924년에 첫 시집 《흑방비곡(黑房悲曲)》을 냄으로써 문단에서의 지위를 확립, 단편·평론·수필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으나 초기에는 주로 시인으로 활약하였다.한국문단에 카프문학이 등장했을 때 그는 끝까지 민족과 역사를 떠난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하며 스스로 민족을 주제로 하는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 1936년에 , 1937년에 , 1940년에 , 등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정신을 역사소설로서 표현하였다.일제 말기에도 끝까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지 않고 문인보국대(文人報國隊)에도 참가하지 않았는데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명월관(明月館)에 초대했을 때는 보국대에 참가한 문인들과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하였다.광복 후에는 적색문학운동(赤色文學運動)에 대항하는 민족진영 문학운동의 지도자로 등장, 전국문필가협회(全國文筆家協會)·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全國文化團體總聯合會)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고, 1949년에는 서울신문 사장, 1955년에 예술원(藝術院) 회장으로 추대되었다.1957년에 장편 , 1958년에 , 1959년에 , 1962년에 , 1965년에는 를 「한국일보」에 연재하기 시작, 1968년까지 1,603회에 걸쳐 집필하였다.1965년에는 수필집 《달과 구름과 사상(思想)과》를 펴내는 한편 장편 , , 1966년에도 계속 장편 , 1969년에는 장편 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1970년에는 《월탄 회고록 20세기 한국의 증언》, 수필집 《한 가닥 세월을 열고》, 1972년에도 수필집 《달여울에 낚싯대》를 펴냈다. 1977년 전 8권을 간행하였고, 1981년 숙환으로 평창동 자택에서 영면하였다.박종화는 제1회 문학공로상(1955)을 비롯하여 문화훈장 대통령장(1962), 5·16민족상 제1회 문학상(1966),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등을 수상하였다. 60년 동안의 문학생활을 통해 시집 3권, 장편소설 18편, 단편 12편, 수필·평론집 3권과 회고록을 남겼는데, 장편은 거의가 2∼6권의 방대한 분량이다.2) 문단 데뷔 무렵문학동인지 《문우 (文友)》를 발간하면서 문학수업을 시작하였고, 1921년 《장미촌 (薔薇村)》 창간호에 처녀작 과 의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에 발을 내디뎠다.다음해 《백조 (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창간호에 와 의 두 편의 시와 이라는 수필을 발표하였고, 이어 이라는 평론과 라는 처녀 단편, 시 과 을 발표함으로써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1924년에는 조선도서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에서 처녀시집 《흑방비곡》을 출간하였다.3) 단편과 소설발표단편 , (1924), , (1925) 등을 쓰면서 소설가로 전신함으로써 좌절로 끝난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현실부정의식의 출구를 열게 되는 역사소설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문단시평이나 문단회고담을 계속 발표하였으며 이라는 문제의 비평을 쓰기도 하였으나 당시 비평계의 논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36)와 (1937)로부터 역사소설로 전환하였으며, 단편 ,(1940) 등과 장편 (1940)을 잇달아 발표하여 역사소설 작가로서의 재량을 인정받았다.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 (靑苔集)》을 발간하였다. 광복 후의 감격과 흥분 속에서 쓰여진 (1945)은 앞선 , 와 함께 삼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고, (1946)와 (1947) 및 단편 를 통해서도 민족적 울분을 토로하였다.1947년에는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진영의 대표자로서 1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韓國文學家協會)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 제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4) 신문소설 연재1954년 서울신문사 사장을 사임하고, 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란과 공무로 잠시 중단되었던 창작생활을 다시 계속하였다. 을 「조선일보」에 전 946회로 연재하였고, 단편 (1955)과 장편 (1958),(1959) 등을 거의 같은 무렵에 연재하여 인기를 모았다.1961년에 회갑기념으로 《월탄시선 (月灘詩選_》을 출간하였다. 다음해 「조선일보」에 를, 「부산일보」에 를 각각 연재하였다.1964년 를 「한국일보」에 4년에 걸쳐 연재하였으며, 그 뒤 수상록 《달과 구름과 사상(思想)》을 출간하였다.1965년 을 「중앙일보」에, 1966년 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였다.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하여 같은 해 10월 제1회'월탄 문학상'을 시상하였다.칠순을 맞는 1970년 제3수필평론집에 해당되는 《한자락 세월(歲月)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영원(永遠)히 깃을 치는 산(山)》을 내놓았다.1969년부터 1977년까지 장장 8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은 우리나라 신문소설사상 2, 456회라는 최장기록을 남겼다.그 뒤 발표한 수상록 《화음·격음 (和音激音)》과 회고록 《역사(歷史)는 흐르는데 청산(靑山)은 말이 없네》 등은 그의 문학적 생애를 증언하여준다.2. 월탄의 1920년대 문학월탄 박종화의 1920년대 문학은 그의 그 후 작업에 비추어 볼 때 빛이 바래는 것이 사실이다. 박종화는 시와 소설, 평론, 수필 등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긴 그의 20년대는 그의 최초의 소설 등 몇 편의 소설과 《흑방비곡(黑房悲曲)》과 같은 시집이 발간되었다.
1. 서론현진건의 과 같은 작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주의 작가이다. 아래에서는 한국 근대 소설사의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현진건의 생애와 그의 작품, 그리고 그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2. 본론1) 현진건의 삶현진건(玄鎭健 1900∼1943)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빙허(憑虛)이다. 그는 1900년 8월 9일 구한말에 득세한 개화파 집안인 대구우체국장을 역임했던 현경운(玄慶運)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열 한살 때 생모를 여의고, 1915년 이순득(李順得)과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외국어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그 이전에는 고향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학교를 마친 뒤에는 상해로 건너가 호강대학( 江大學)에 입학해 공부한 뒤, 1919년 귀국하여 한말 주일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당숙 보운(普運)에게 입양되었다.1920년 《개벽 開闢》에 를 발표함으로써 문필활동을 시작하여(1921)로 문명을 얻었고,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홍사용(洪思容), 이상화(李相和), 나도향(羅稻香), 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 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한다.그는 전통적인 한국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격동기의 개화 지향적인 주변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어렵고 혼란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가까운 사람들의 모습을 대하면서 자신의 삶을 정립했다. 그는 생활에 절도를 유지했고, 문단의 세기말적 분위기에 초연했다. 조혼한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여성 관계에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그는 한 시대의 문제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문화적으로 서구 취향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의식을 지탱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대처하여, 생활고 문학을 하나로 일치시켜 살았던 작가였다.2) 현진건의 작품운수좋은 날-1924년《개벽》6월 호에 발표되었다.- 인력거꾼의 가난한 생활상과 기구한 운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으며, 1920년대 사실주의 단편소설의 백미로 평가된다. 특히 며칠간 허탕만 치다가 연달아 큰 벌이를 한 김첨지가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하던 설렁탕을 사들고 왔으나 아내는 이미 죽어 있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강렬한 대비는 사회적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내준다빈처-1921년《개벽》12월 호에 발표되었다.- 가난한 무명작가의 고민을 그려낸 자전적 소설이다. 주인공 K(나)는 갓 결혼해서 지식에 목말라 중국으로 일본으로 방랑하다 6년만에 돌아왔다. 돌아와 글쓰기를 시작했으나 수입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무명작가라서 아내가 세간이나 옷가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얻어온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간다. 어느 날 은행에 다니는 T가 찾아와 자기 아내에게 줄 새 양산을 자랑하자 아내는 몹시 부러워한다. 다음날 처가에서 사람이 와서 장인의 생일임을 알게 된 아내는 막상 입고 갈 옷이 없다. 그녀가 당목 옷을 입고 나서자 비단옷을 사주지 못한 나의 마음은 쓸쓸하다. 인천에서 기미(期米)로 한몫 잡은 처형은 만발한 꽃 같은데 아내는 시들고 메마른 낙엽 같다. 처형이 새 신을 사주니 아내는 내키지 않는 듯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기뻐하는 게 분명하다. 그것을 보면서 나도 빨리 출세해서 아내를 기쁘게 해줄 수 있었으면 하니, 아내는 반색을 하며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무명작가인 나를 믿어주고 궁한 살림에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 아내의 위안과 원조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는 줄거리이다. 가난한 아내와 그녀를 생각하는 지식인 작가의 심리와 생활을 잔잔하게 그려냈으며, 아내의 독백인 "그것이 어째서 없을까?"로 시작되는 서두는 당대 소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혁신적인 것이다3) 현진건의 문학과 문학사적 의의현진건이 처음 발표한 는 습작 정도의 작품으로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의 출세작이요, 문단의 디딤돌을 공고히 한 것은 였고, 그의 문단 생활을 집약시킨 것은 《백조》의 동인 활동이었다. 는 '보수 없는 독서와 가치 없는 창작'에 해가는 줄을 모르면서도 언젠가는 작가로 대성하겠다는 가난한 소설가의 빈처상을 그린 신변 체험 소설이다. 현진건은 이 에서 리얼리즘의 기법을 시도하여 호평을 받았다. 신변적인 이야기이기는 해도 빈틈없이 조화된 구성과 실감나는 표현으로 리얼리즘기법에 의한 작품을 이룩한다. 이후 등 주옥같은 단편을 발표하고 《백조》동인이 되어 활동한다. 현진건은 《백조》에 등을 발표하며 사실주의 기법에 의한 단편문학의 금자탑을 이루어 갔다.현진건은 이후 6년 동안에 완숙한 단편 15편을 발표한다. 자서전적인 신변소설의 경지를 벗어나 인생을 투시하고 재현하는 소설을 씀으로써 염상섭과 함께 한국의 리얼리즘 문학의 금자탑을 이루어 가기 시작한다.현진건이 한국 문학사에 남긴 발자취는 뚜렷하다. 흔히 사실주의 문학을 정착시키는데 끼친 공을 가지고 그의 업적을 논의하곤 하지만 그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문학이 감당해야 할 몫을 후세에 명쾌하게 제시해 준 작가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문학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그가 문학 활동을 하던 때는 한국에 근대소설이 비로소 정착되기 시작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는 전형적 근대소설 작법에 의해 작품을 써서 초창기 소설의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문제에 예민하게 대응하여 그것을 소설화했다.그의 소설세계의 변모 과정은 크게 대략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초기소설에서는 근대사회가 식민통치체제로 바뀌는 잘못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식인을 통해, 근대사회의 파행된 모습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과도기 지식인의 삶은 취급했다. 이것은 자전적 소설인 등에 순수한 젊은이가 구체적인 생활 안에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좌절의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한 양심적 지식청년의 고민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일종의 자아와 세계의 불화 단계라고 할 수 있다.두 번째는 그러한 불화 관계에서 벗어나, 지식인들의 사회의식이 성숙되면서 현실을 바로 보고 작가의 몫을 인식해 사회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단계이다. 창작집 《조선의 얼굴》(1926)을 간행한 이 시기에는 제목에 나타나 있듯이 그의 의식이 자전적 세계를 벗어나 식민지의 민족적 현실 및 고통받는 식민지 민중의 문제로 옮겨간다. 도시 하층민의 운명을 그린 (1924) 미숙한 성의식(性意識)과 노역으로 고통받는 농촌여성을 그린 (1925), 땅을 잃고 뜨내기 노동자로 전전하는 한 이농민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1926) 등은 1920년대 단편문학의 한 정점으로 기록된다.마지막으로 1930년대에 들어, 일제 식민 통치가 더해지고 민족의 앞길이 암담해지자, 모든 사회가 발붙일 곳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 때 현진건은 민족의 미래를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유토피아로 설정한다. 〈무영탑〉(1938∼1939), 〈흑치상지 黑齒常之〉(1939∼1940, 미완), 〈선화공주 善花公主〉(1941, 미완) 등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민족해방에 대한 강렬한 동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30년대의 암울한 시대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외면적인 통속성이 강화되고, 민족정신은 내재화, 추상화의 경향에 빠지고 말았다.이밖에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개벽 65호, 1926) 등의 비평문을 통하여 식민지시대의 조선문학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 시조의 개념역사적으로 볼 때, 시조는 조선조 오백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창작되고 또 향유되었던 문화이다. 그러나 시조는 조선시대로 끝나지 않고 현재에도 그 창작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조 때 시조를 가리켜 '고시조'라 하여 근대 이휴의 시조와 구별하기도 하지만, 고시조나 근·현대의 시조나 그 형식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시조의 형식은 시조를 시조답게 설명해 주는 가장 확실한 특징이 된다.시조의 형식은 전체가 조·중·종장의 3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장은 3∼4자 정도로 된 네 개의 마디로 이루어져서 대체로 15자 안팎이 되며, 따라서 작품 한 편은 대체로 45자 안팎이 되지만, 이것을 글자의 수효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규칙은 없기 때문에 그 글자의 수효에 변화가 많은 것도 형식적인 특징이 된다. 다만, 종장의 첫째 마디는 반드시 3자로, 역시 종장의 둘째 마디는 5자가 넘도록 표현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시조의 형식을 설명할 때, 두 개의 마디가 합쳐야 뜻이 있는 말이 된다는 관저가에서 이를 '구(句)'라 하여 시조를 가리켜 3장 6구의 형식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이상의 형식적 전형은 '평시조'를 가리킨 것이고, 이와는 달리 그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사설시조'는 형식에 다소 차이가 있다. 사설시조도 전체가 초·중·종의 3장으로 되어 있는 것은 같으나, 종장의 첫째 마디가 3자를 가리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느 장의 어느 마디든지 마음껏 길어질수 있으며, 그 길이에 제한이 없듯이 정해진 통일성도 없어서 작품에 따라 그 길이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 사설시조의 형식적 특징이 된다.2. 시조의 명칭과 종류시조라는 잘르 이름은 본디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준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시절가'란 '이 시절의 노래'라는 뜻이 들어있는 말로서 여기에 곡조를 뜻하는 '조'가 붙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옛 가락'또는 '본디의 가락'이라는 뜻을 가진 '고조(古調)'에 상대되는 개념을 지닌 말로 이해되기도 한다.시조의 명칭이 이처럼 '가락'또는 관계가 깊다. 오늘날 우리가 시조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가곡(歌曲)'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노랫말이었으며, 똑같은 노랫말을 가지고 '시조'라는 음악으로 노래하기도 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는 음악적 관습이다.이처럼 시조는 노래를 전제로 했고 본디 음악의 명칭이던 것인데, 이걱이 근대, 즉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음악에서 쓰던 명칭을 그대로 문학 장르의 이름으로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시조를 다시 나눈 평시조 또는 사설시조라는 명칭도 실은 시조 음악의 종류를 가리키는 '평ㅇ시조' '엇시조' '엮음시조' 또는 '사설시조'…… 등의 구분에서 빌어다 쓴 것이 그대로 문학적인 용어로 굳어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제목 아래 여러 수의 시조가 이어지는 것을 가리켜 '연시조(連時調)'라고 하는데, 음악이란 이런 명칭이 없이 순수하게 문학적으로 명명된 것임을 알 수 있다.3. 시조의 발생과 연원시조의 발생은 두 가지로 다시 나누어 생각할수 있다. 하나는 '시조가 언제 생겨났는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조는 어디서 혹은 어떻게 해서 생겨 났는가?'하는 것이다.시조의 발생 시기는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모든 문화 양식이 그러하듯이, 문학의 장르도 어느 날 일시에 창안되어 향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말에 생존하였던 여러 사람의 작품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러한 창작이 가능하려면 그 기반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시조의 태동은 고려 중엽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추론의 결과일 따름이며, 시조가 어디서 혹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이를 위해서 그 당대 혹은 전대의 문학 양식에서 형식적 연원을 찾는 노력이 있었다.그 하나는 중국 문화이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었던 한시(漢詩)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인데, 한시 특히 절구(絶句)의 형식이 짤막한 형태를 갖고 있음이 시조와 흡사 하며, 런가 하면, 향가(鄕歌)를 설명하는 삼구육명(三句六名)이라는 말이 시조의 3장 6구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아 향가에 근원을 둔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며, 반면에 시조가 지니고 있는 단형성에 주목하여 두 줄 형식의 짧은 민요에 한 줄의 노랫말이 더 붙어서 석 줄 양식의 시조 형식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도 하였다.이런 견해들은 그럴듯함에 못지 않게 들어맞지 않는 구석도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완전한 설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한시 기원설은 한시가 지는 4단 구조와 시조가 지닌 3단 구조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하며, 향가기원서은 10구체 향가가 지닌 노랫말의 실상과 시조의 구조가 부합하지 않는가 하면, 민요기원설은 두 줄 양식에 한 줄이 더 붙은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또 음악적 계층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시조의 연원에 관해서는 본디 시조가 음악으로 향유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시조를 노래하는 음악이었던 가곡의 형식은 '만·중·삭대엽(慢·中·數大葉)이 〈정과정(鄭瓜亭)〉삼기곡(三機曲)에서 나왔다'는 기록을 음미할 만하며, 이를 참고하여 음악 형식의 출현과 관련지어 고찰한다면 새로운 시각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4. 시조 문헌 기록의 특이성고시조 작품의 자료는 야담 기록, 개인 문집, 악보, 가집(歌集)등 여러 가지 문헌에 기록되어 전한다. 그 중 양적으로 풍부한 문헌은 가집이다. 가집은 18세기에 들어서야 활발하게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해동가요(海東歌謠)》,《가곡원류(歌曲源流)》등이다. 이들은 모두 가곡이라는 음악의 노랫말을 곡조별로 나누어 기록한 것인데, 이것들을 옮기고 베껴 적은 것이 여러 이본으로 전하고, 더러는 이들 문헌과는 관계 없이 독자적으로 노랫말을 기록한 것도 있다. 이러한 문헌들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첫째, 문헌마다 노랫말의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청구영언(靑丘永言)》이라 하더라도 이본에 따라 동일한 작품의 노랫말이 부분적으로 다르기도 하고 표기가 달리 되어 있어 시조를 기록한 동일 작품의 작자를 각기 다르게 표기하기도 했고, 작자의 성을 달리 적어 놓았는가 하면 이름의 한 부분을 달리 적기도 하고, 아예 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어 작자를 확정하기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다.자료를 전하는 문헌의 이러한 상황은 시조가 노래로 향유되고 따라서 구전되어 온 사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런데 시조가 노래로 불리고 구전되었던 사정은 시조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비슷비슷한 노랫말을 가진 작품 또는 비슷한 투로 된 작품이 많은 점은 구전을 위한 장치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고, 교훈적이거나 명분을 드러내는 데에 치중ㅇ하는 작품이 주된경향을 보이는 점은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하는 데 따른 사회적 제약과의 연관을 생각하게 하며, 좀스럽고 외설적인 내용의 작품에 작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 점도 이런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5. 시조의 작자기록에 나타난 시조 작자는 학자나 무인 들을 비롯하여 상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가집이 아닌 개인 문집에 작품을 남긴 사람의 경우도 문집을 지닐 만한 학식이나 신분을 갖춘 사람들임은 물론이다. 이 밖에 기녀들의 작품이 상당하고, 조선조 후기로 오면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가객들이 다시 작자로 등장한다.작자의 분포가 이러하다는 것은 시조가 계층적으로 상층인의 문학이었음을 말해 준다. 기녀나 가객들이 신분은 상층에 속한다고 하기 어렵지만 그들이 시조를 노래하는 한은 상층인의 의식이나 생활에 봉사하거나 또는 스스로 그것을 표방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이는 시조를 노래하는 음악이 하층민의 그것인 민속악과는 다른 정악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또 기녀나 가인들이 종사한 일 자체가 상층인의 생활과 더불어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점으로도 입증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작자를 밝혀 적지 않은 작품을 두고 '무명씨 작'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무명씨'라는 말은 '이름이 없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를 왕후장상이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시조가 하층민의 장르이기도 했다는 말도 되는데 이는 음악의 분류나 그 향유계층 또는 방식을로 볼 때 시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다만, 조선 후기로 일컬어지는 18,9세기로 오면서 신분의 이동과 계층의 변화가 심하게 일어났다는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음악문화에 여러 가지 변화가 오면서 다양한 계층들이 시조를 공유하는 변화를 보였음은 사실이다. 시조 작품 가운데 민속악인 잡가류에서 보는 노랫말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판소리의 단가 노랫말이 그대로 시조집에 실리기도 하고, 민요에서나 볼수 있는 노래말까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상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 후기 사회에서 나타난 작자층의 변모다.6. 시조 주제의 역사적 전개시조으 주제가 전개되는 양상은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것은 시조가 상층의 문학이었던 점과 부합한다.조선왕조의 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멸망에 대한 회고와 새로운 사회의 삶에 대한 찬양과 각오가 주조를 이룬다. 길재, 이색 등으로 대표되는 회고의 주제와 맹사성, 김종서 등으로 대표되는 성은의 찬양과 각오 등은 이런 두 경향을 보여준다.이어서 정치적으로 몰아닥친 사육신 사건은 새로운 국가의 지표였던 유교적 덕목의 표방과 정치적 권력과의 충돌에서 빚어진 갈등이었으며, 이 시기에 성삼문으로 대표되는 절의의 주제가 강조되었던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조선조 상층인의 경건주의적 이념 지향을 결정지워 준 것으로서, 벼슬에 나아가서는 성은에 대한 감사와 충성을, 물러나서는 안빈낙도의 삶을 표방하면서 상호의 삶을 즐기는 태도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념 지향적 태도가 시조의 주된 주제를 오륜가나 도덕가 같은 교훈 지향으로 이끌어 간 것은 당연하다.그러나 노래가 본디 정감의 표현이라는 측면도 강조되었는데, 거기에는 한시에서 흔히 보는 바와 같은 경물을 통한 정서의 제시 방식과 정감 그 자체의 표출이라는 방식이 함께 나타난다. 황진이, 신흠 등으로 대표되는 정ㅇ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