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의 배경과 동기 ■아타 트롤 은 1841년 늦가을에 씌어졌던 것인데 ■엘레간텐 벨트■지에 단편적으로 발표되었다.거의 절망에 빠져서 나는 마지못해성스러운 땅 프랑스를 떠났다자유의 조국이요내 사랑하는 여인의 나라를위 인용은 본서 아타 트롤 제 11장 6연을 옮긴 것이다. 이 6연을 인용한 것은 하이네가 장편 풍자시 아타 트롤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데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하이네는 1841년 여름 '사랑하는 여인' 마띨드를 데리고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과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 산맥의 한적한 온천마을 꼬뜨레에 도착한다. 그가 절망에 빠져서 프랑스를 뒤로 하고 이곳을 찾은 것은 '유형무형의 적들이'벌이는 '대소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이네는 꼬뜨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한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데, 하이네는 이 편지에서 이곳 주민들이 나무처럼 자연 그대로의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조용하고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하이네가 풍자시 아타 트롤 을 구상한 것은 꼬뜨레 마을의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였다. 그리고 그가 '대소동'을 피해 이곳에 온 것은 '유형무형의 적들'을 때려눕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유형무형이 적들이 벌이는 대소동'에 대해서 살펴보자.1830년 프랑스 7월혁명을 전후해서 수많은 독일인들이 파리를 비롯하여 프랑스 각지로 몰려들었다. 독일의 토지귀족들과 신흥부르조아지의 봉건적 착취와 수탈로 인해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던 농민과 노동자는 보다 나은 생활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었고 7월혁명의 이념을 독일에 전파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문필가들은 전제군주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파리로 발길을 돌렸다. 이들 문필가들은 그 경향이 다양하기는 했으나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것은 조국의 정치적 후진성과 경제적 비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중에는 그 이념이나 방법에서 급진적 경향을 띤 뵈르네, 구츠코, 플라텐 등이 있었다. 그 중 뵈르네는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독일 망명작가들의 지도적인 인물로서 전생애를 통해 민주주의 사상에 초지일관성을 보인 뛰어난 문필가였다. 하이네도 7월혁명 이전에는 그러니까 프랑스로 망명하기 이전에는 뵈르네의 사상적 동지이기도 했고 두 사람은 인격적으로 서로 존경하는 사이이기도 했다.하이네가 독일을 뒤로 하고 혁명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 것은 1831년 5월이었다. 그리고 하이네와 뵈르네가 다시 만난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상대방이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를테면 하이네 쪽에서는 뵈르네가 사상적인 면에서 교조적으로 경색되어 있는 것 같았고 뵈르네 쪽에서는 하이네가 어딘가 나약한 데가 있고 동요의 흔적이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동안 둘 사이의 교제는 대체로 원만했다. 그런데 하이네가 독일 망명자들의 모임에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프랑스 금융자본가의 두목 로스쉴드가의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뵈르네는 하이네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후 망명작가로서 하이네의 이런저런 언동에 불만을 가졌던 뵈르네는 그의 '파리 통신'에서 하이네를 비난하고 마침내는 하이네의 인격을 건드리는 발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뵈르네의 눈으로 보았을 때 하이네는 시인으로서 현실의 정치적인 문제나 사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지 실제로 그 현실을 변혁하려고 하는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하이네가 모욕적인 비판을 받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망명가자들의 정치적인 모임에는 참여하는 대신 프랑스 부르조아지들이 개최하는 연회에 자주 드나들었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이 프랑스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했던 루쏘, 볼떼르 등의 무덤이나 혁명의 성지가 아니고 왕실도서관, 루브르박물관 등이었다. 심지어 그는 매춘부들이 우글거리는 환락가에도 자주 모습을 나타냈다. 이런 하이네가 당시 파리에 이주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 ■ 상인 ■ 점원 등 이른바 민중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던 뵈르네에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그러나 하이네는 뵈르네의 모욕적인 언사에 공개적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하이네와 뵈르네 사이의 불미스러운 관계는 뵈르네가 183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지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1840년 7월에, 그러니까 뵈르네 사후 3년 뒤에 '대소동'을 일으킨 한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이네의 루드비히 뵈르네에 관한 각서 였다. 하이네는 이 책으로 인해 사방팔방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가 아타 트롤 서문에서 표현했던 것처럼 '썩은 사과'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던 것이다. 하이네는 '유형무형의 적들이 벌이는 대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칠대로 지치다가 결국 더 이상 배겨내지 못하고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피레네산맥으로 피신하게된다._ 아타 트롤... _하이네 문학의 연구가들은 대부분 그의 풍자시 아타 트롤 이 프랑스 7월혁명 이후에 우후죽순처럼 나타난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 주의 ■ 주장만을 호언장담하는 경향적인 문필가들을 조롱하기 위해 씌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장편 풍자서사시의 주인공이야 말로 이들의 상징이라고 한다.그럼 과연 하이네가 이 시에서 풍자하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일까?1831년 하이네가 독일을 등지고 망명지 파리로 떠날 무렵에 나라 안팎(독일과 프랑스)에는 대체로 두 개의 정치적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복고적인 국수주의자들과 막연한 애국주의를 표방한 학생조합 운동가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1789프랑스 대혁명의 대의에 충실한 각양각색의 민주주의자들과 이른바 '혁명당'이라고 불리는 급진적 속류유물론자들이었다. 하이네가 그의 시에서 풍자의 표적으로 삼으려고 했던 집단은 주로 전자 즉 '조국 독일 선조의 신념'등을 구호로 내걸었던 국수주의자들과 편협한 애국주의자들이었다. 물론 후자의 조잡하고 경색된 속물적 유물주의자도 하이네의 풍자의 대상이었다. 하이네는 또 중세 기독교적 사상에 사로잡혀 도덕적 종교적 의상을 걸치고 점잖은 체하는 애국적 인사들을 조롱의 과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과연 앞에서 언급한 풍자의 대상이 하이네의 의도대로 작품에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일까? 곰(아타 트롤)은 앞에서 언급한 풍자의 대상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일까?이 풍자시의 주인공 아타 트롤은 제 10장 6연을 보면,오늘날의 인간들이 유혈참사극을 벌이는 것은환상적인 신앙심 때문도광신이나 정신착란 때문도 아니다오직 사리사욕 때문이다이것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과 소유권의 본질과 그것이 초래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이런 자본주의적 인간을 '호주머니를 달고 있는 도적놈'으로 규정하고 그런 인간을 타도하라고 그의 막내 자식에게 맡긴다. 10장 14연을 보면,나는 인간을 증오한다 격렬하게!아들아 나는 이 증오를 네게 물려주고 싶다여기 이 제단 위에서 선서해라인간을 영원히 증오한다고!저 간악한 압제자의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라용서하지 마라 네가 죽는 최후의 그날까지선서하라 선서하라 여기서 나의 아들아!아타 트롤은 또 제6장에서 인간 불평등의 근원을 재산과 권력의 독점에서 찾고 독점지배의 타도는 단결에 있다면서 그의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단결, 단결이야말로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다고립분산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단결만 하면 우리들은폭군들을 타도할 수 있는 것이다.단결이다! 단결이다!그러면 저 야만적인 독점지배도 붕괴될 것이다!그때 가서 우리는정의의 동물왕국을 건설하자아타 트롤의 사유재산에 대한 독설과 독점지배를 타도하라는 호소력은 가히 혁명적이고 통쾌하기까지 하다. 또한 제6장 12연에 '종파의 차별이나 가죽과 체취의 차별 따위는 없이 엄격한 평등만이 있어야 한다'는 문구와 '당나귀가 최고 지도자가 되고 사자가 초대를 짊어지고 물방앗간을 간다'는 표현이 나온다. 하이네는 엄격한 평등주의자이고 일상생할에서 편협한 금욕주의자였던 뵈르네와 그 추종자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아타 트롤 을 쓰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만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1842년 하이네는 코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타 트롤 은 "일체의 경향문학에 대한 의도적인 대립물"이라고 썼다. 하이네의 이 말은 그가 아타 트롤 을 쓴 것은 경향문학의 반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비판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결코 경향문학을 반대한 적은 없었다. 그가 반대했던 것은 현실의 대지를 떠나 공상적인 세계를 노래하거나 인간과 생활의 구체성을 현실의 변화 ■ 발전 속에서 폭넓고 깊게 파악하여 그것을 예술적인 형상화를 매개로 하여 노래하지 않고 일면적이고 직접적으로 토해내는 그런 문학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이네는 이 시집에서 풍자의 과녁으로 내세웠던 시인들(40년대 전후에 소위 경향시의 대가들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었던 3월혁명 전기의 경향시인들 헤어베크, 딩겔슈테트, 팔레스레벤)이 주장하고 있었던 정치적인 신념 그 자체는 아니었다. 이러한 신념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하이네 쪽이 더 확고하고 현실적인 데가 있었다. 특권계급과 귀족정치의 굴레로부터 독일 인민을 해방시키고 독일의 정치적 봉건성과 경제적 비참함을 극복하기 위한 일이라면 시인의 명성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선언에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