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서구 교육철학의 관점과 한국 교육철학**Ⅰ. 현대 서구 교육철학의 관점1. 실존주의 (existentialism) 교육철학1) 실존주의의 기본성격① 전통적인 철학처럼 우주의 원리를 탐색하는 데 관심이 있는 철학이 아닌, 좀 더 절 실한 인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② 집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 불안과 초조에 떠는 인간, 조직과 기계문명의 억압 속에서 자신을 잃고 번민하는 인간 등을 구원하려는 염원에서 탄생한 철학2) 실존주의와 교육학-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으로서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 즉 교육에 대해 깊은 통찰을 지니고 있는 실존주의는 교육학에서 교육적 통찰을 탐구하는 중요한 과제를 가진다.3) 실존주의 교육철학① 볼르노의 : 인간의 지속적 성장이라는 전제와 현실에서 드러나 는 비지속적이고 위기적인 삶의 인간 이해에 기초한 단속적인 형식 (예: 각성, 충고, 상담, 만남 등) 들을 대비하는 교육이론② 부버의 의 교육 : 인간의 세계에 대한 `나-너' 의 관계와 `나-그것' 의 관계 의 두 가지 태도 중 인격적 만남의 관계인 `나-너'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래적인 실존을 회복하고자 함. 따라서 참된 교육은 진정한 만남의 관계를 통하여 인간의 본래 적 모습을 회복하는 일을 궁극적 목적으로 함.③ 실존주의 교육철학의 의미: 만남과 같은 단속적인 교육형식은 우연성을 전제로 하 기 때문에 사전에 계획하고 의도적으로 만들 수 없으며, 인간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교 육에서 실존주의는 전인교육과 인간교육이 문제되는 곳에서 의미를 지닌다.2. 분석적 교육철학1) 분석철학 (analytic philosophy) 의 기본성격- 분석철학은 사변철학에 대한 비판을 시초로 하여 나타난 방법으로 형이상학적 명제 를 배제하며 논리적 분석에 의하여 문제를 명확히 하고 해결하는 방법이며, 인간의 사 상과 사고는 언어로 표현되기 때문에 언어분석이 분석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① 논리적 실증주의: 일상언어는 그 다의성과 애매성으로 하여 언어가 가지는 참된 논 리적 구조를 감추고 있으므로 언어의 외형만 가지고는 그 참된 의미를 알아낼 수 없 다. 따라서 일상언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기 위해 인위적 언어 즉, 인공언어(人工言語) 로 옮겨놓아 감추어진 논리적 구조를 명백히 밝혀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공언어 - 모든 애매성과 다의성이 배제되며, 언어적 표현의 표층적인 문법적 형식 은 그것의 심층적인 논리적 구조와 일치② 일상언어철학: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공언어가 과연 일상언어의 골격을 만족스럽게 나타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일상언어의 기능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고조 되는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은 어떠한 완벽한 인공언어도 일상언어의 기능을 대신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라일, 오스틴 등도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면서, 언어적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씌어지는 삶의 양식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고, 일상적으로 사 용하는 자연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을 언어의 구조형식에 맞추어 명확하게 함으로써 철 학적 문제를 해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2) 분석철학과 교육학- 분석철학은 교육철학의 방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분석철학적 입장의 교육학자들은 교육적인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교육철학이라고 보고, 교육적인 문제의 성 격을 먼저 규명한 뒤, 교육과 관계가 있는 개념들 (예: 교육, 지식, 수업, 학습 등) 의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을 하였다.3) 분석적 교육철학① 피터스의 교육개념 분석: 교육이란 가치 있는 활동 또는 사고와 행동 양식으로 사람 들을 입문시키되, 그것이 세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세 가지 기준a. 교육은 가치 있는 것을 전달함으로써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든다.b. 교육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요령과 지식, 원리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c. 교육은 교육받은 사람의 의식과 자발성을 존중하며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② 분석적 교육철학의 의미: 명확한 개념의 정립을 토대로 학문적 논의가 전개되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며, 문제에 포함되어 있는 기본전제나 가정, 논의 전개상의 모순점을 밝혀내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교육의 이념이나 목표를 정립하는 일을 소홀히 하 였다는 비판을 받는다.3. 교육인간학 (educational anthropology)1) 철학적 인간학의 기본성격① 20년대에 쉘러, 플래스너 등이 19세기의 자연과학적 인간학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인간을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데서 출발한 이론으로 전체로서의 인간, 인 간의 본질,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인간의 특수성에 관해서 묻고자 한다.② 신학적 인간학, 자연과학적 인간학, 이성주의적 인간관·초월적 형이상학적 인간해 석, 경험과학적 인간해석과는 구별2) 철학적 인간학의 방법론 - 볼르노에 의해서 제시① 볼르노의 철학적 인간학 방법론의 전제a.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본질적 특성들을 동등하게 수용b. 인간을 인간자신으로부터만 이해하고 인간외적인 존재와의 비교를 통해 인간의 본 질을 규정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을 배제② 볼르노의 철학적 인간학 방법론의 원리a. 객관적인 문화영역을 그 것의 근원인 인간으로부터 파악하고자 하는 원리b. 인간의 삶을 객관적인 형성물로부터 파악하고자 하는 원리c. 인간의 삶의 개별현상들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의 원리: 인간 삶의 임의의 한 현상을 관찰하고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전체적인 이해를 얻고자 하는 것.d. 개방적 물음의 원리: 인간에 대한 물음의 결과가 미리 예견할 수 없는 대답을 위해 서 항상 열려져 있음 => 새로운 현상에 마주칠 때마다 새롭게 편견 없이 시작하고, 새로운 사태에 대하여 문을 열어두고, 인간에 대한 하나의 완결된 본질규정의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3) 철학적 인간학과 교육학- 20년대 말에 철학적 인간학이 성립된 당시에 교육학은 그 흐름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하였으나, 45년 이후에 교육학 안에서 철학적 인간학이 수용되면서 인간학적 관점이 대두되었음.4) 교육인간학① 교육인간학의 과제: 교육의 본질과 과제를 인간의 본질에 비추어 해명하고, 인간을 "교육가능하고 교육필연적인 존재"로서 이해하며 "교육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작업에 있어서 교육인간학은 개방성 의 원리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들에 문을 열어 놓음으로써, 가능한 여러 행위들을 간 접적으로 시사한다.② 교육인간학의 의미: 교육인간학은 방법론적 개방성의 원리에 따라 새로운 관점의 인 간학을 그 자체 내에 수용함으로써 인간존재에 대해 보다 통합적인 전망을 제공하고, 교육현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 이해함으로써 교육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 로 전망된다.4. 전망: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교육철학1)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성격-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관점으로 진리와 지식, 합리성에 대해 우연 성, 임의성, 상대성, 역사성을 기본적으로 강조하고 있다.2) 포스트모더니즘과 교육학 - 포스트모더니즘이 교육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입장① 불행스러운 실패의 개념으로 비판을 받는 부정적 영향: 진리의 우연성과 상대성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입각해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교육의 전통적인 지 적, 도덕적 기반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학교교육에 혼란을 가져다주고, 학교교육의 기능 과 역할에 대해 회의와 불신, 무력감을 확산시키며, 교육활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② 현시대의 정신을 밝혀주고 사고 방향을 제시하는 긍정적 영향: 본래적 의미의 합리 성과 개방성을 지향하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상대주의는 교육과 교육학에 영향을 미침 으로써 학생 개개인의 의견과 권리, 특수성, 고유성, 독립성을 인정하고, 그들 스스로 책임 있게 새로운 의미창조를 실천하도록 도와준다.3) 포스트모더니즘 교육철학의 의미 및 전망① 교육과 교육학을 새로운 관점에서 성찰하는 지적탐구로서의 의미: 포스트모더니즘 교육철학은 모더니즘 교육철학이 지닌 한계와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인식하고, 모더니 즘 교육학이 탐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을 문제시한다.
문화 체계를 통해 살펴본'헬레니즘 시대' 의 교육 제도 및 학교 제도가.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마케도니아와 그 주변 정세)나. 헬레니즘 시대의 다각적 조망(문화, 사상, 철학, 학문, 종교)다. 헬레니즘 시대의 교육(학교 제도 및 교육의 흐름)1. 들어가기 전에 알아야 할 사항들① 마케도니아 정세.기원전 359년, 필립Ⅱ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후 끝없이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암살 당함. → 그의 아들 알렉산더Ⅲ세 가 20세의 나이에 (기원전 336년) 왕위 계승,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 그리스 문화와 정신의 열렬한 찬미자였음.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페르시아 원정길을 준비함.② 헬레니즘 시기재위 10년만에 오리엔트 전역을 정복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 사후 (기원전 323년)부터 로마의 지중해 세계 통일 (기원전 31년)까지의 시기. [드로이젠 이후 이렇게 명명하기 시작]⊙마케도니아에 의해 알아야 하는 이유 : 헬레니즘 시대의 토대가 되므로.2. 가운데 글1)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① 배경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통로를 통해'그리스의 국민적 문화'는 통합적 세계 문화가 되었고,'그리스어'는 세계의 언어인 동시에 보편적 교육의 바탕이 되었음.② 결과 : 그리스 문화를 모태로 동방 정신이 융합한 문화, 범세계적 문화인'헬레니즘' 문화 탄생.2) 헬레니즘 시대의 사상① 배경 :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쇠퇴, 몰락으로 인해 그리스인들은 헬레니즘 시대에 오면서엄청나게 확대되고 다양화되어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한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없어짐.② 결과 :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서로 상반된 것 같으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세계 시민주의, 개인주의적 사고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초국가적, 인간 보편적인 것을 지향하게 되었다.3)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① 배경 : +- 이집트 과학이 그리스의 학문과 융합됨으로써 지적 탐구를 위한 자극이 됨.+- 질적 안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싹틈.+- 실제적인 지식에 대한 욕구가 등장.+- 알렉산더 자신이 과학 연구를 위해 재정을 지원함.② 결과 : 헬레니즘 시대에 개별 과학 발전이 있게됨.→ 가장 대중적인 과학 : 천문학, 수학, 지리학, 의학, 물리학.→ 화학이나 생물학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 : 공업이나 무역에 뚜렷한 관심을 갖 지 않았으므로 실제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4)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① 배경 : i)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윤리학이 사상가들에 의해 가장 중요시되는 학문이 되었음ii)정치 공동체적 생활에 바쳤던 개인의 힘을 이제는 행복한 삶을 실현하고, 개성적 삶을 가꾸고자 하는 문제로 전환하게 됨.② 결과 : i)철학에서 윤리학이 분리되어 실천적 철학 즉, 윤리학이 사상가들에게 가장 중요시 되는 학문이 됨.ii)다양한 관점의 철학 계속 발전.* 에피쿠로스 학파 +-인간의 감각 중시, 쾌락주의+-이상적 경지 : 아타락시아 (정신, 마음의 평정 상태)+-행복 추구 : '우정, 간소한 생활'과 '신체적, 물질적 즐거움' 을 함께 강조.* 스토아 학파 +-인간의 이성 중시, 금욕주의+-이상적 경지 : 이성의 활동에 의한 아파테이아|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행복 추구 :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삶의 최고 목표를 실천적 덕으로 삼을 때 행복은 달성된다고 주장5) 헬레니즘 시대 종교① 배경 : 자기 영혼의 구원과 보존에 대한 질문이 당시 철학의 중심 주제였다.② 결과 : 신비 종교로 알려진 구원 종교의 확산*신비 종교 - 불확실하고 위험한 시대에 살았던 지중해 세계 사람들에게구원 제공하여 대중들에게 널리 퍼지게 됨.3. 헬레니즘 시대의 교육1) 학교 제도의 부흥 : '그리스어'와 '그리스 교육'이 철저히 학교 교육을 전제로 하므로.① 기초 교육 확대 - 도시 자체적으로 초등학교 조직함. 소녀들을 위한 학교도 생겨남.
. 이태준의 소설세계이태준(李泰俊)은 11월 7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진명리에서 아버지 이문교(李文敎)와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적은 철원면 율이리 614번지이다. 호는 상허(尙虛). 아버지 문교는 철원공립보통학교의 교관, 덕원감리서 주사를 지냈다. 그는 그 지방의 지식인으로서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시국에 불만을 품고 살았던 것 같다.1909년 아버지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게 되자 어린 태준은 아버지를 따라 낯선 이국의 도시로 갔다. 그러나 그해 8월 28일(음력) 그의 아버지가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함께 귀국하게 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귀국하는 도중에 어머니가 그의 누이동생 선녀를 분만하게 되어 가까운 포구인 함경북도 이진(梨津)에 내려, 정착하게 되었다.이태준의 약전을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는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찾아낸 자료는 『제2의 운명』(1937년 6월 한성도서 출판부) 책머리이다. 책머리에 적혀 있는 약력은 그의 생애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연구 자료이다.쪽1904년 11월 7일생쪽 출생지: 江原道 鐵原郡 眞明里쪽 현주소: 京城府 城北町 248番地쪽1918년 3월 鐵原私立鳳鳴學校 卒業쪽1918~19년 咸南北, 平南北에서 放浪쪽1920년 4월 京城 徽文高普에 入學쪽1923년 5월 同校 中途 退學쪽1926년 4윌 東京上智大學 文科에 入學쪽1927년 11월 同校 中途 退學쪽1928~1937년 開闢社, 中外日報社, 朝鮮中央日報 등 各社 記者 生活을 거쳐 梨專, 梨保, 京保의 講師 歷任위와 같은 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성장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가시밭길을 걸어온 그 흔적을 『신가정』(新家庭)지 1934년 4월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 게재된 「소설가 이태준씨 앨범」 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때는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우리 융희 3년이요, 서력으로는 1909년, 다시 한말지사 이문교씨는 가족들을 데리고 아라사로 망명하였다.그러나 그때 나는 이런 어른들처럼 만나기 싫은 사람은 없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불쌍하다 하며 돈푼이나 주는 것은 나의 의기를 여간 눌러 놓는 것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큰 무안과 수치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죽음은 나를 귀찮게만 구는 것 같애서 어머니가 애틋하게 그립기보다는 원망스러운 편이었다.인용한 위의 글과 같이 이태준은 자존심이 높고 매사를 짚고 넘어갈 정도로 깐깐하고 주도 면밀했다. 그러므로 그는 남들의 값싼 동정이나 위로에는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태준은 공부 하나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어머니를 생각하고 처음 울기는 열네 살 되는 해 봄이었다. 소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그날 졸업식장에서는 내가 제일 빛나는 아이였다. 첫째로 내려오다 졸업에도 첫째로, 우등으로 하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상장을 타고 답사를 하는 아이도 나뿐이었다. 나는 제일 빛나는 졸업생이었다.그러나 졸업식이 끝난 뒤 졸업장과 상장과 상품을 안고 구경시킬 이도 없는 일가집 사랑 웃방에 돌아와 혼자 문을 닫고 앉을 때 나는 한없이 쓸쓸하였다. 그날 처음 ‘나에게 왜 어머니가 없나?’ 하고 울었다. 종일 울었다.이태준은 1918년 봉명학교를 마치자마자 간이 농업학교에 들어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중퇴하고 말았다. 농업학교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때문이다.농업학교를 중도에 그만 둔 그는 고향을 떠나 원산의 객주집 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심부름꾼으로 고달픈 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읽고 장래에 대한 문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그는 어느 날 외할머니에게 얻은 얼마간의 돈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중에 그는 객주집 심부름꾼으로서는 아무런 일도 해낼 수 없다는 환경을 깨달았다. 그래서 객주집 주인에게 서울로 상경하여 공부하겠다는 뜻을 표했으나 완곡하게 거절당했다. 주인은 이태준을 장차 사위로 삼을 생각이었으므로 원산에서 야학이나 다니라고 권했다.이에 이태준은 주인이 가게를 비운 사이에 거액의 돈을 마련하여 친구 몇 사람과 중국 상해로 떠난다. 안동(安東) 겨우 1929년 『개벽』에 입사했다. 그후 이태준은 『학생』, 『신생』 등의 편집에 간여했다. 이무렵 이태준은 『어린이』지에 동화를 써서 생활비를 충당하기도 했다.그는 1930년 5월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 이순옥(李順玉)과 결혼하여 삶의 둥지를 마련했다. 가정의 화목과 단란의 영향인지 이태준은 이 해에 「기생 사월이」 「50전 은화」 「동심예찬」 「어떤날 새벽」 등을 발표, 활발한 창작의욕을 과시했다. 1931년 중외일보의 기자로 근무하던 이태준은 신문이 폐간되고 조선중앙일보라는 제목으로 재창간되자 학예부장으로 일을 맡았다. 이 무렵 이태준은 조선문단의 주류를 형성해 온 카프에 반대하여 새로운 동인으로 등장한 『구인회(九人會)』에 참가했다. 이때 그는 이화여전, 경성보육학교, 이화보육학교 강사로 나가면서 문장 작법인 ‘작문’을 가르쳤다.이 무렵의 이태준은 방랑과 무절제를 털어버리고 단편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1년에는 『구원의 여상』이란 최초의 장편소설을 『신여성』에 연재하는 한편 신문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작가로서 본격적인 창작으로 가정과 직장과 작가의 직분을 충실히 지켜갔다. 그런 결과 1932년 단편소설 「봄」 「불우선생」 「천사의 분노」 「실락원 이야기」 「서글픈 이야기」 등을 발표하고, 1933년 「슬픈 승리자」 「꽃나무는 심어 놓고」 「법은 그렇지만」 「미어기」 「제2의 운명」 「아담의 후예」 「어떤 젊은 어미」 「코가 복숭아처럼 붉은 여자」 「마부와 교수」 「달밤」 등을, 1934년에 「촌뜨기」 「빙점하의 우울」 「불멸의 함성」 「박물장사 늙은이」 「은희 부처」 「코스모스 이야기」 「점경」 「어둠」 등의 장단편을 발표하고 첫번째 창작집 『달밤』을 한성도서에서 출판하여 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인다. 이태준은 이 무렵 여러 신문사로부터 연재소설을 청탁받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다.중앙일보사에 끝까지 있었다면 나는 동아와 조선에는 장편을 못 실어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나의 첫 신문소설인 「제2의 운명」이 중앙일보에 끝나기 전철로」 등을 발표하였으며, 1937년에는 단편소설 「복덕방」 「사막의 화원」, 중편소설 「코스모스 피는 정원」을 발표하였으며 단편집 『까마귀』를 한성도서에서, 장편소설 『구원의 여상』을 영창서관에서 출간한다. 김치수의 평전을 따라 그의 연대기를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1938년 이태준은 단편소설 「패강랭」을 발표하고 장편소설 『황진이』를 동광당서점에서, 『화관』을 삼문사에서 출판한다. 1939년 2월 『문장』지의 편집자로 활약하면서 신인 작가들을 문단에 배출시켰는데 그 가운데 최태응과 임옥인은 각각 3회의 추천을 받음으로써 기성작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곽하신은 1939년 동아일보의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하였지만 다시 『문장』의 추천을 받은 경우이다. 『문장』지는 1941년 4월에 통권 36호로 종간되고 그는 소설에만 전념하게 된다. 1939면 『딸 삼형제』를 문장사에서 출판하고 『이태준 단편 선집』을 박문서관에서 출판한다. 1940년에는 장편소설 『청춘무성』을 조선일보에 연재한 다음 박문서관에서 출판한다.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보면 이 무렵 이태준은 창작활동을 계속하다가 일제의 정책에 협조한다. 그리하여 ‘상허는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등의 단체활동’에 참가하고 1942년 이광수에 이어 제2회 을 받는다. 이것이 이른바 이태준의 생애에 한 오점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춘원처럼 일본 제국주의 주졸이 되지 않고 그 활동이 소극적이고도 미온적이었으며, 작품 내용 또한 친일 성향이 그다지 격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예술상은 1939년 10월에 주식회사 모던 일본사가 제정한 예술상으로 상금은 오백 원이었다.『문장』지가 폐간된 다음 『이태준 단편집』을 학예사에서, 수필집 『무서록』을 박문서관에서 출판한다. 그는 『왕자 호동』을 끝으로 작품활동을 중단한 채 1943년 『왕자 호동』을 남창서관에서, 창작집 『돌다리』를 박문서관에서 출판한다. 그는 그 후 고향인 철원 용담에 은거하다가 해방을 맞는다.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에 올라와 조선문학년 5월호 『월간중앙』에서 ‘남한정부의 부패한 현실에 대해 작가적 결벽성이 불만을 갖게 되어 월북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증언했다. 그의 이와 같은 월북 동기 이외에도 가난한 삶, 구차스런 환경,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고독한 애수가 결국 도피처를 찾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1945년 장편 『별은 창마다』를 박문서관에서 출판하고, 1946년 그의 문학적 태도와는 달리 홍명희와 함께 월북한다.이태준의 월북은 1946년 7월부터 8월 상순까지로 보는 견해가 옳다. 이태준은 월북한 뒤 이기영, 이찬, 허영숙 등과 함께 소련 방문단으로 출발한다. 그들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지를 여행한 것이 8윌 10일부터 10월 7일까지 약 2개월의 일정이었다. 그의 연재소설 『불사조』는 7월 19일자로 중단되었다.이태준은 1946년 그가 월북한 후에도 장편소설 『사상의 월야』를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했고 1947년 창작집 『복덕방』을 을유문화사에서, 또한 『해방 전후』를 조선문화사에서 출간한다. 그 해에 소련 기행문집 『소련 기행』을 백양당에서 출간한다. 1948년 『농토』를 삼성문화사, 『구원의 여상』을 영창서관에서, 『제2의 운명』을 한성도서에서 『문장강화』는 박문서관에서 출판했다. 1949년에는 장편소설 『신혼일기』를 평범사에서 출간했다.이태준은 월북한 후 박헌영의 비서를 역임했고 북조선 문학예술 총 동맹의 부원장직을 맡기도 했다. 6·25동란 때에는 종군 작가단원으로 서울을 경유, 낙동강 전선까지 다녀간 것으로 밝혀졌다. 1950년 9·28 수복 때에 이북으로 쫓겨 올라간 이태준은 평양에서 은밀히 한국군에게 자신의 귀순 의도를 전했지만 구출 시도에 실패한 것으로 최태응의 「이태준의 비극」과 선우휘의 「납북 및 월북 문인들의 문제」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이태준은 1955년 공식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54년초 이북 남로당 계열 숙청이 시작된 뒤 이태준은 사상 검토 작업중에 과거를 추궁당했고, 1955년 12월 28일 비판받았다. 그 뒤 56년 1월 18일에도 임
하근찬의 문학세계농촌 사람의 눈으로작가 하근찬은 1931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했다. 전주 사범을 다니다 교원 생활을 했고, 동아 대학의 토목과를 다니다가 중퇴를 했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 문예에 가 당선된 뒤 작가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군에 입대한 시절을 제외하고 그는 계속 교육 관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신문사와 잡지사에 관여하다가 최근에는 직장을 갖지 않고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다.그의 교원 생활은 아마도 그의 많은 작품에 나오는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공명적 파악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어 줄 것이다. 국민학교 아동들의 대화나 여실한 묘사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같은 작품이 그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학교 생활이 다루어진 자전적인 작품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농촌의 학교는 그의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어 있다. 등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서는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이 작가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 이유는 작가의 유년 시대와 청년 시대의 개인적 경험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고향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우쭐우쭐 활개짓을 하며 부르는 를 참으로 좋아한다. 달밤 같은 때 먼 곳에서 이 칭칭이 소리가 흘러오면 절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어떤 공동의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팔도의 가지가지 민요의 가락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슬픔인 것이었다. 슬픔이라는 어휘가 좀 정확하지 않은 것 같은데, 뭐라고 할까, 한이라고 할까 정한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유의 것임에 틀림없었다.작가로서의 자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하근찬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농촌과 농촌 인구에 대한 혈연적 동정이야말로 하근찬 세계의 핵심이고 그것은 그가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에서 작가로서의 근거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農村 사람 쪽에 서서하근찬은 굉장한 과작가(寡作家)이다. 이것은 그가 넘치는 정력으로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나서 2천 명의 등장 인물을 창조하고 조종한 발자크유의 창조적 정력과 시장성을 배제하고 시장의 유혹을 철저히 물리쳤다는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순수하다. 그런 뜻에서 그는 말의 장사꾼, 말재주와 글재주와 빌려 온 생각들을 이리저리 꿰매고 발라 맞추어 억척스럽게 말로 된 상품을 찍어내는 말의 장사꾼들이 아우성치는 문학 시장에서 창자에서 나온 말만을 엮어 낸 문 상품 시대의 외로운 시인됨을 지켜 왔다.작가는 현실을 드러내고 현실에 관해서 얘기를 한다. 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이고 공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살이를 다루고 있는 한 사회 현실에 대한 논평이거나 보충임을 면할 길이 없다. 현실을 다루고 현실에서 벌어진 얘기를 다루는 한, 작가는 하나의 관점 혹은 입장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사 공평의 비정적 초원을 의식적으로 노리는 경우에도 그의 관점이 어떤 입장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더 꼬집어 말하면 사회 현실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한 사회 계급이나 계층의 시각을 통해서 관찰하고 처리하게 마련인 것이다. 신과 같은 초월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거의 주제를 갖지 않은 채 자족적인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책을 쓰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꿈에 들려[憑] 있던 플로베르도 얼른 보기와는 달리 속악스러운 프랑스 제2 제정 시대의 부르즈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저금하듯이 아껴 쓰는 그의 글버릇, 민중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 혁명에 대한 병적인 공포증, 노동이 없는 삶의 공허성을 아름다움의 생산에 의해서 보상하고 정당화할 수 있다는 기만적인 믿음, 이 모든 것은 그가 되풀이 공언한 부르즈와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와 의식이 근본적으로 부르즈와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흔히 얘기되는 작가와 작품의 부침 현상도 캐어 보면 작가가 취하고 있는 관점에 연관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 얼리자베드조(朝) 시대의 시와 연극의 부침의 역사는 극히 시사적이다. 당대의 최대 시인 스펜서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극히 호소력이 적고 소수의 연구자를 제외하고서는 일반 독자의 관점 밖에 서 있는 시인이다. 이에 반해서따라서 그가 대변했던 귀족 계급이 사실상 사라진 오늘날 스펜서의 문학은 터무니없이 시대 착오적이고 우리 세계와 동떨어져 있게 되고 그 결과 현대 독자에의 호소력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다양한 계층들이 출입하는 극장을 위해서 각본을 썼고 또 이 때문에 단일한 귀족 계급에의 호소를 노리지 않아도 되었던 셰익스피어는 작품 속에 귀족 계급의 편협한 취향과 세계관을 벗어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호소력을 획득할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관점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호소력의 범위와 영역조차도 결정하는 것이다.처녀작 에서부터 하근찬이 끈질기게 현실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관점으로 채택한 것은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농촌 사람들의 그것이다. 이는 그가 주로 농촌 사람들을 다루고 그들의 가난함과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들을 깊은 공감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도 작가가 의식적으로 농촌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고 작중 인물과 작가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동일성에서 똑바로 나오는 공감이요 사랑이다. 헐벗고 기운 없는 한국의 시골 사람들이 적어도 50년에서 60년에 이르는 고달픈 시기에 하근찬에게서 아주 친근한 대변자를 찾게 된 것이다.앞에서 필자는 굳이 농민이라는 말을 피하고 농촌 사람들이라든가 시골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사실 하근찬 소설의 작중 인물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농민만은 아니다. 가령 이무영이라든가 박경수의 소설에 나오는 농사꾼은 아니다. 그런 농사꾼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나 농촌에 살고 있는 여러 가지 생업에 종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이 농민의 위치를 벗어난 것은 오랜 얘기가 아니지만 땅에만 매여있는 사람만은 아니다. 농민과 함께 농촌에 정주하면서 도회인들과 외래인들을 먹여 살리기에 등골이 휘어 버린 사람들을 기용하여서 겨레의 고난과 없는 사람들의 고달픔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작가의 세계가 그대로 이 작가의 작품 세계인 것이다.그러면 농촌 사람들의 관점을 선택했다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겨레의 최대 다수 구성원의 입장을 대변하였기 때문에, 그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어떤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특정 관점의 채택이 그대로 작품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문학에 있어서 다수자의 관점의 채택이 그대로 작품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문학에 있어서 다수자의 관점의 채택이 그대로 문학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이러한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시험적으로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농촌 사람들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갖가지 허위의식이나 자기 기만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우리의 현실을 관찰하고 증언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겨레의 수난을 가장 무방비 상태로 당해야 했고 또 가장 가혹한 형태로 겪어야 했던 농촌 사람들의 고단함을 보여 줌으로써 그는 겨레의 수난과 삶의 실상을 가장 정직하고 참되게 보여 줄 수 있었다는 점은 하근찬 문학이 거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戰爭에 대하여농촌 사람들의 삶을 다룸에 있어서 전후 작가의 한 사람인 하근찬이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50년 전쟁의 파괴의 흔적이다. 그의 작품으로서 동시대의 전후 작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전쟁을 전쟁현장에서 다룬 것은 거의 없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전쟁이 국토의 대부분의 주민들에게 끼친 상흔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에 서로 다른 전쟁통에 불구의 몸이 되는 재앙을 다루고 있는 에서부터 작가의 관심은 전쟁의 야수성을 고발하는 것으로 작가적 출발을 도모하고 있다. 등이 모두 전쟁의 직접 피해자를 다루고 있다. 의 두칠이도 의 아버지도 불구의 몸으로 돌아온다. 더욱 기막힌 것은 불구인 그들을 도와주는 아무런 사회적 장치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에서는 많은 전사자들이 배경으로 나오고 이들의 가족에게 재앙의 소식을 나 복리를 위해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전쟁을 그들은 철저히 배격하고 거부한다. 전쟁은 그들의 원수요, 재앙의 샘이다. 그것을 어떠한 이름으로도 합리화하기를 거부한다. 이 점 하근찬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다. 누구의 탓이라느니, 필요악이라느니 하면서 사실은 묵시적 내지는 우회적으로 전쟁을 기정 사실화하고 그 필연성을 인정하는 투의 엉거주춤한 태도가 없다. 이러한 거부의 태도는 그것이 농촌 민중들의 자연 발생적인 반응과 태도를 허위의식으로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떳떳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소집 영장을 마을을 전하러 오는 경관의 배타기를 거절하는 의 결말은 실효성 없고 부질없는 사보타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유머 속에 표출된 가장 뼈대 있는 저항 문학의 실례라 불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비슷하게 인분으로 저항하는 도 유머러스한 문학적 저항의 또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인물과 행동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외부 현실에 대한 일직선적인 대응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갖기보다는 (그런 경우도 흔하지만) 상징적인 대응 관계로 해서 빚어지는 수가 많다. 그 점 나 속에 드러나 있는 상징적인 거절은 문학에서 허용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도 암시적인 저항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 하근찬 문학은 전후에 나온 가장 탁월한 반전 문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50년의 전쟁이 끼친 파괴적 영향력과 그 문화적 의미를 하나의 상징적 축도로 보여 주고 있는 이나 전쟁의 비인간성을 깊은 산마을 단위에서 보여 주고 있는 에서나 사정은 마찬가지다. 다시 올 수도 있는 무의미한 살상에 대해서 가장 큰 소리로 거절을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하근찬은 가장 뼈대 있는 전후의 증인 작가요 반전 작가라 할 것이다.일본에 대하여우리 현실의 식민지적 상황에 대한 부단한 상기도 하근찬 문학의 집요한 모티프의 하나다. 일제 시대를 다루고 있는 등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에 대한 묵시적 비판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지난날의 상기에
역사적 탁류의 인식 - 채만식의 탁류와 태평천하한국의 근대문학사를 돌아보는 데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들 가운데 염상섭과 채 만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한국의 지성사라거나 정신사적 측면으로 보아도 빼놓을 수 없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그들의 구체적인 작업에 대한 검토를 통했을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남긴 작업이 그만큼 평범함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작가가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설 자리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에, 그에 대한 해답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내용의 이런 작품을 써야 한다는 방법론적인 지시가 작가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목적을 지나치게 의식한 작가일수록 '좋은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다시 말하면 생명이 있는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박제된 작품을 내놓는다는 사실의 인식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작가의 작품들에 나타난 여러 가지 현상, 특성, 정신 등이 타당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작가의 본질과 역사적 역할을 인식하는 일이며 그 작가를 전통으로서 받아들인다면 그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일 것이다. 하나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떤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작가들이 대부분 실패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채만식은 말하자면 독자들에게 무엇을 불러일으키겠다는 목적 의식에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에 대해서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긴 대표적인 작가의 한 사람이다. 이에 기록으로서 남긴다는 사실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사실보다 훨씬 고차원의 목적 의식에 속한다. 문학이라는 것이 언어를 통한 정신적 작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고차원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 하는 지식인 본래적인 질문 앞에서 신문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신문을 통해 지식인의 생각을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고 셋째, 인문 사회 과학 계통의 대학을 나온 지식인으로서 일제의 침략 정책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기자라는 직업을 택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직업이 같다고 해서 같은 내용의 글이 나오는 것만은 아니지만, 또한 상당한 수의 문인들이 소시민적 지식인으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반면에 그보다 더 많은 정당한 지성으로서 자리를 지킨 지식인들이 많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면, 문인들의 신문사 기자 겸직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채만식의 작품에서도 일본의 식민지 정책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드러나고 있는 것도 당시의 신문사 기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현실 파악의 정당성을 발견하게 한다.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과 일제의 탄압도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일본은 소위 대동아공영을 꿈꾸면서 중일 전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이 땅을 대륙 침략의 발판을 삼고자 하고, 이 땅에서 착취를 보다 강제적으로 집행하고 우리 문화에 대해서는 내선일체라는 표어를 내걸고 한글 말살 정책 등 보다 악랄한 우리 문화의 말살을 획책하며,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한편, 국내의 민족 단체들에 대해서는 그 뿌리조차 존속할 수 없데 탄압하였다. 1930년을 전후해서 우리 문단에는 카프 문학이 전개된다. 많은 작가들이 이 카프에 참가하거나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그것은 카프가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동조했다기보다 일제에 대한 항거 수단으로서의 카프에 동조했다고 보여진다. 사실 카프의 역할이나 그것의 역사인식 태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지만, 채만식도 카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고 카프의 배일적 태도에 상당히 공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등이 이 시대에 발표된 작품이지만, 그것은 동반자의 그룹에 넣기보다는 세태 소설이라는 채만식 자신의 특유한 세계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는 미두장에서 젊은이들로부터 구박을 받고 초봉이를 '돈 많고 부잣집 외동아들이고 서울에서 전문 대학교'를 나왔다는 사기꾼 고태수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딸의 불행이 가져온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부인의 구멍가게에서 나온 돈으로 미두장에서 요행이나 바라며 살아간다. 그는 신식 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 관계를 고수함으로써, '관료주의'에 물듦으로써 '전통적인 것'의 좋은 점도 '신식 문물'의 좋은 점도 자기 것으로 택하지 못한 당대의 어떤 계층을 대표하고 있다. 또한 은행원 고태수는 은행의 급사로부터 출발한 자기의 삶에서 '은행'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받는 생활적.금전적 혜택만을 생각하고 도덕적 이념으로부터 멀어져서 횡령과 간음을 일삼다가 비명에 가고 마는데 그는 그러한 삶을 통해 사회적 혼란의 가장 나쁜 측면을 대변하고 있다. 온건한 사회주의자 남승재는 채만식의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정당하게 삶에 대치하고 있는 인물이다. 병원의 조수로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돈없는 환자를 돌보며, 학교에 못 다니는 어린애들을 모아 야학을 세우고, 자신이 의사가 되었을 때 계봉이와 결혼할 단계에까지 이른다.이러한 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채만식은 식민지 시대에 있어서 '뿌리 뽑힌 자들'의 삶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지주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전통 사회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신식 문물을 제대로 수용할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문물의 가장 피상적인 이점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리하여 '근대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나쁜 악습만을 좇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온 주인공들이 남승재와 계봉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꺼번에 망해 가는 것은 그들이 전통 사회에서 이미 뿌리 뽑힌 자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화'는 '돈'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그 이전에는 돈이 아니라 쌀이었다) 이들의 비극이 모두 그 화폐와 관련된 것을 감안하면 이 전통 사회에서의 '뿌리 뽑힌 자들'의 비극의 의미를 파아할 수 있을실패를 통해서 자기의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고 신문물에 대해서 비판적 선택을 하고 있다.가 정신의 혼란기(일제시대라는 식민지적 상황과 서구 문물이 폐쇄된 이 땅에 거침없이 들어왔다는 점에서)에 있어서 우리 사회의 '뿌리 뽑힌 자들'의 삶과 풍속을 보여 준 것이라면 는 전통 사회 출신의 인물들의 삶을 보여 주는 것이다. 주인공 윤직원 영감은 오랜 지주 가문 출신은 아니다. 그러나 신식 문물이 들어오기 이전에 아버지 윤 동규 세대에 어느 정도 이루어진 부이기 때문에 그리고 토지를 부의 단위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지주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는 말하자면 그러한 지주가 한말에서부터 일제 시대까지 어떠한 삶을 살게 되고 어떠한 사고 속에 머물게 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염상섭의 가 그러한 것처럼 의 주인공 윤직원 영감은 지주이며 전형적인 구두쇠이다. 그는 아버지가 일으켜 놓은 가산을 더 늘이는 데 있어서 뛰어난 역량을 보이는데, 그동안 한말의 화적들로부터 아버지가 피살되었고 화적들의 위협이 없어지자, 직원이라는 벼슬을 사게 된다. 그것은 옛날 지주들이 벼슬을 사거나 벼슬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가 전통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는 의 조부처럼 족보를 만들고 전통 사회 속에서 자리잡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들어와서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현금을 빼앗기면서 다시 불안을 느끼지만 일제의 관헌들이 독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단속함으로써 그 불안도 없어지게 된다. 그의 역사에 대한 태도는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로 압축되고 있는 것처럼, 인색한 이기주의와 소시민적 안락주의에 다름아니다. 그래서 그는 며느리들은 퇴락한 양반 출신에서 골라 지주=양반이라는 전통 사회의 가치관에 명실상부하게 입각할 수 있게 되지만, 그것은 윤직원의 자위 행위의 범주를 못 벗어난다. 그는 사회의 변화에 민감해서 '수형(手形)' 장사로 자신의 부를 유지하고 있고 라디오의 명창 프로에 귀를 기울일 만큼 여유도 생큼 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고민하지도 않았던 계층이다. 그러기 때문에 창식은 첩을 얻고 놀음을 하고, 종수는 군의 고원(顧員) 노릇을 하면서 주색에 빠져 잇을 뿐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없다. 반면에 이 소설에서 삽화처럼 잠깐 언급되고 있는 종수와 같은 인물이 다른 한 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신교육을 통해 '민족' '국가' '사회' '역사' '개인'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과 의미가 무엇인지 인식하려는 의식의 소유자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종학이 동경 유학을 가서 독립 운동에 관여했다가 붙잡혔다는 소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서 종학에 관한 부분이 자세히 나오지 않는 것은 이 작품이 발표될 당시의 상황(1938년) 때문일 것이다.여기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첫째, 윤직원 영감의 태도이다. '우리만 빼놓고 다 망해라'로 요약되는 그의 의식은 전통적인 지주 계급의 이기주의이다. 그는 '화적'이 없어지고 '독립운동가'가 없어진 그 시대를 '태평천하'로 인식하고 있으면서 종학이 사상범으로 붙잡힌 것을 원통해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일제에 건물도 지어 주고 일제의 정책을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는 족보를 만들고 양반으로 행세한다. 이 모든 것은 윤직원 영감이 정신사적 측면에서 전시대의 가장 나쁜 점을 고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의 모든 주인공들이 망해 가는 데 반해서 그가 새로운 사회 속에서 존속하고 있는 이유는 의 주인공들이 '뿌리 뽑힌 자들'인데 반해서 그는 지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아버지 대로부터 '금권의 유세'를 인식하고 있을 만큼 '화폐'로 요약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의 적응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에게는 '민족'이나 '국가'나 '독립'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전'만이 있는 것이다. 채만식은 말하자면 이러한 전통적인 지주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식민지 시대에 대한 아무런 아픔이 없이,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과거에의 복수심에 불타고 있고 윤리적.도덕적 타락의 극을 헤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