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경작가는 하(夏)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라고도 한다. 실제는 BC 4세기 전국시대 후의 저작으로, 한대(漢代:BC 202∼AD 220) 초에는 이미 이 책이 있었던 듯하다. 원래는 23권이 있었으나 전한(前漢) 말(BC 6세기)에 유수(劉秀)가 교정(校定)한 18편만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그 중 이하의 5편이 가장 오래 된 것이며, 한(漢)나라 초인 BC 2세기 이전에 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4편, 4편이 이어졌고, 한대(漢代)의 지명을 포함하였으며, 4편, 1편은 가장 새롭다.에서는 천하의 명산을 산맥을 따라 기술하고 산과 산의 거리 ·산물(그 산에 사는 怪獸와 鳥類)등을 적었으며 보옥(寶玉) ·동철(銅鐵) ·약초 등의 산물이 기술되어 있으므로 전국시대에서 진(秦)시대에 걸쳐 성행하였던 방사(方士)의 연단술(鍊丹術)과의 관련을 생각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먼 나라의 주민과 그에 관한 신화 ·전설을 많이 실었다. 이 책은 고대 중국의 자연관을 아는 데 귀중하며 신화의 기재(記載)가 비교적 적은 중국 고전 중 예외적 존재로서도 중요시된다.전등신화4권 20편과 부록 1권으로 되었으나 원본은 40권이다. 1378년에 쓴 자서(自序)가 있다. 이는 당나라 때의 소설을 본떠 고금의 괴담기문(怪談奇聞)을 엮어서 쓴 전기소설로서 명대(明代)의 유일한 문어체(文語體) 소설집이다. 이 《전등신화》의 속찬(續撰)과 의작(擬作)은 그 후 동양 3국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이정(李禎)의 《전등여화(剪燈餘話)》, 소경첨(邵景詹)의 《남등인화(覽燈因話)》 등이 곧 그것이다.이 책은 조선 명종 때 창주(滄洲) 윤춘년(尹春年)이 정정(訂正)하고, 수호자(垂胡子) 임파(林芭)가 집석(集釋)한 구해본(句解本)이다. 《전등신화》는 일찍이 한국에도 들어와서 이를 모방하거나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新話)》가 있다.괴담구체적으로는 민간 전승의 설화에 나오는 괴담이나 연극에서의 원령극(怨靈劇), 문학에서 괴이소설 등을 말한다. 고대인의 자연숭배와 외포심(畏怖心), 또는 종교적인 신비감이 초월적인 존재를 믿게 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낳게 한 데서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에게 초현실적인 것에 대한 흥미와 관심은 공통된 것이어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 흥미를 끄는 가운데 존재해 왔다. 그 중에서 독자의 소박한 공포심과 초월적인 괴이 그 자체에 대한 흥미에 치우치지 않고, 그것이 지니는 신비적인 환상미와 요염미, 그리고 요괴의 출현과 활동을 인간성에 근거한 필연성으로 파악, 묘사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낭만주의 문예의 한 분야인 괴이소설인데, 과학의 진보와 함께 예술작품으로서의 괴담은 SF 등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중국의 괴담문학】 공자의 《논어》에 보면 지식인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논할 일이 아니다.”라는 훈계 같은 글이 있다. 그러나 중국인은 괴이를 즐기는 습성이 강한 민족이어서 괴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한말(漢末)에서 육조(六朝) 전반에 걸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괴이를 논하는 풍습이 생겼으며, 그것을 기록한 것을 지괴(志怪)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신선(神仙) ·요괴(妖怪) ·예조(豫兆) ·재생(再生) 등 초자연적인 이야기가 취급되었지만, 기본적 성격은 어디까지나 사실로 믿어온 것에 대한 기록에 불과하였다.당(唐)나라 때는 육조지괴(六朝志怪)에서 볼 수 있는 인지(人智)를 초월한 불가사의한 현상을 소재로 허구를 구성하고 인생의 제상(諸相)을 이야기하는 개인적인 창작 전기(傳奇)가 생겨났다. 전기는 중당(中唐) 이후에 최성기를 이루고 송(宋)나라 때까지도 계속 만들어졌다. 명(明)나라로 들어서자 구우(瞿佑)가 《전등신화(剪燈新話)》를 저술하였고, 이어 포송령(蒲松齡)이 민간전설에서 취재한 일대 로망 《요재지이(聊齋志異)》를 저술하였다. 또 청(淸)나라 때는 유가(儒家)의 귀신부정론에 반발하여 괴담 기담집이 몇 권 나돌았으며, 원매(袁枚)의 《자불어(子不語)》, 기윤(紀臍)의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대체로 중국의 괴이문학에서는 음울한 무서움은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초자연적인 존재나 현상과 인간계와의 교섭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묘사한 데 특색이 있다.【서양의 괴담문학】 괴담적 요소는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서도 볼 수 있고 근원은 오리엔트 시대에서 비롯되었다. 단편적인 영향은 구약성서는 물론 《아라비안나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민간의 속신(俗信)에까지 미치고, 중세에는 《아서왕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유령》을 비롯하여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에 고딕식 건축을 배경으로 공포와 괴기를 목적으로 한 고딕 소설이 유행하였다. H.월폴의 《오트란토 성(城)》(1764)을 효시로 한 이 유행은 유럽 대륙까지 파급되어 낭만주의 문학을 자극하였다. E.A.포의 《어셔가(家)의 몰락》(1839) 등도 이와 관련된 작품이며, 이 밖에 영국의 델라메어, 독일의 E.T.호프만, 프랑스의 P.메리메, G.de 네르발, P.A.M.빌리에드릴라당 등도 초자연적인 신비성을 시정이 풍부하게 표현하였다. 또 민간에도 각종 망령이나 생령(生靈) 등의 전설이 있다.【한국의 괴담문학】 고대부터 민간설화 속에 괴담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고려시대에 박인량(朴寅亮)이 설화문학으로 집대성한 《수이전(殊異傳)》이나, 중국 진(晋) ·당(唐)의 전기문학(傳奇文學)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패관문학(稗官文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전기소설의 효시를 이루는 것은 조선 세조 때 김시습(金時習)이 지은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이것은 한국 민간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 《전등신화》의 영향 아래 이루어진 한문소설집이다. 그 밖에 초자연적 도술(道術)의 세계를 보이는 괴담소설로서 《전우치전(田禹治傳)》 《박씨전(朴氏傳)》 《금방울전》 《김원전(金圓傳)》 《삼설기(三說記)》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국 괴담소설의 영향을 받아 한국적인 바탕 위에 이루어진 소설들이다.금오신화한국 전기체 소설(傳奇體小說)의 효시이다.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원래는 이 5편이 작자가 지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이 5편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도 국내에는 필사본밖에 없고 일본에서 간행된 것이 1927년 《계명(啓明)》 제19호에 최남선(崔南善)에 의하여 소개되었다.《금오신화》의 소설적인 특성은 첫째,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재자가인적(才子佳人的) 인물이라는 점, 둘째, 문장 표현이 한문 문언문(文言文)으로 사물을 극히 미화시켜 표현한 점, 셋째, 일상적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내용을 그린 점 등인데, 이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의 일반적인 성격이며 이런 점에서 중국소설 《전등신화(剪燈新話)》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나아가서 이들 작품 세계는 인간성을 긍정하고 현실 속에서 제도(制度) ·인습(因襲) ·전쟁 ·인간의 운명 등과 강력히 대결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한편, 한국 소설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그때까지 조신설화(調信說話)에서 최치원(崔致遠) 설화를 거쳐 《국선생전(麴先生傳)》에 이르러 소설의 단계에 접근하였으며, 《금오신화》에 이르러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을 확립시켰고, 새 출발의 전기를 맞게 되어, 그 이후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김시습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 ·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듬뿍 받았다.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