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청 특허넷의 아웃소싱목차1.특허넷이란? 2.특허넷을 이용한 특허과정과 시스템 3.아웃소싱 과정과 배경 4.아웃소싱 평가 5.정성적, 정량적 분석 6.위험 구조분석 7.Q A특허넷이란?안방 출원시대의 개막 (발명 출원, 심사, 등록, 공보발간, 산업재산권관련분쟁의 심판) 세계 최초 인터넷 기반 출원 시스템 세계각국의 특허정보 85백만 건 이상 수록 2004년 “정부혁신국제박람회” 출품주요 아웃소싱 시스템시스템 1주요 아웃소싱 시스템시스템 2주요 아웃소싱 시스템시스템 3주요 아웃소싱 시스템시스템 4주요 아웃소싱 시스템시스템 5IV. 특허넷시스템 구축 과정개발기간 '95. 11 ~ '98. 12(3년) 개발 연인원 94,915 명개발비용 S/W : 13,900 백만원 H/W : 17,900 백만원 합계 : 31,800 백만원200020012002CD-ROM 공보발간모바일서비스인터넷 정보서비스인터넷공보온라인 심판/등록온라인 수수료납부개통/운영개 발지속적인 제도개선 및 법령개정'96'98'97'99제도개선/ 법령개정관리 부분의 비대화내부 역량 부족정보 네트워크 환경의 구축IMF로 인한 작은 정부론 대두아웃소싱전자 정부법고정비 심화외적요인내적요인특허넷 시스템의 아웃소싱 배경선택적 아웃소싱-분야별 전문업체에 위탁 응용, 상용 S/W 분야 ---LG CNS H/W 네트워크 및 장비분야 ---한국HP아웃소싱 형태운영 위원회 – 운영시스템 방향의 자문,검토 및 승인, 계약사항 이행여부 검토, 장애 책임 규명, 필요한 조달지원, 관련 조직간의 협조 체체유지지원 운영평가위원회 – 학계전문가, 공공기관, 청내외 사용자로 구성하여 운영평가, 사용자 만족도 조사를 위해 분기별 정기 개최 인력관리소위원회 – 용역업체 인원 신규파견 및 교체 시 인원 선정 역할 수행하기 위하여 수시 개최함.아웃 소싱관리아웃소싱의 주요 동인평가1)비용이 절감되었는가?Hidden cost? (1)시스템의 설비 비용 (2)인력의 교육비 (3)공간 비용 증가 (4)사업 수행을 위한 조직 비용“Hidden” CostVendor ChargesDirect Expenses자체 운영아웃소싱 운영비용 비교 분석평 가평가2) 주력업무에 집중으로 인한 조직의 효율성이 증대되었는가?연도별 심사 심판 처리 시간상표의장특허실용5.06.07.8심판7.17.27.32.79.712.520.623.628.1심사200019991998구분평 가(그림) 연도별 심사관 1인당 심사 처리 건수평 가평가3) 조직이 슬럼화 되었는가?1.공간 절감-모든 문서를 전자화 함에 따라 사무실 공간 절감 2.인원의 감축-사무처의 자동화로 특허 문서관리, 공보 발간, 심사관업무, 우편발송등 업무인원 감축평 가평가4) 고객 서비스 업무의 개선?전청적 공유 가능지식공유 불가능지식공유 문서보관특허의 경우 04년 20개월 소요특허의 경우 96년 37개월 소요심사기간단축전산심사 -85백만 건 전산검색 전자결재수작업심사 -서류를 넘겨가며 검색 (1인당 수만 Page) 서면결재심사결재인터넷으로 발간 -매일 발간책자로 발간, 우편발송 -매월2~3회 발간특허공보발간온라인 열람 전산(키워드)검색 무료이용방문열람 키워드검색 불가 유료이용특허정보이용인터넷으로 공개 이동전화로 안내비공개민원처리과정온라인 출원 -29만 건 중 24만 건(81.4%) 온라인 발송 -81만 건 중 47만 건(58.3%)방문출원 우편발송특허출원 민원회신구축 이후구축 이전구 분평 가(1)조달,관세,철도청 등 공공기관전반으로 확대 (2)운영전략의 고도화 (3)정부간 상호 협력주도 (4)세계 시장의 확대평 가평가5)사회적 파급효과와 국제적 위상120,02933,81028,84632,264소 계48,28211,70811,70412,641심사행정 비용절감71,74722,10217,14219,623특허행정 비용 절감합 계2001년2000년1999년성과지표내부 행정 효과정량적 분석대민 서비스 효과319,674195,28390,98028,799소계290,431182,18381,13822,498인터넷 검색 서비스를 통한 비용절감29,24313,1009,8426,301전자출원을 통한 비용절감합 계2001년2000년1999년성과지표정량적 분석비용과 효과 대비439,703229,093119,82661,063합 계319,674195,28390,98028,799대 민120,02933,81028,84632,264청 내효 과190,29647,40040,80025,100비 용합 계2001년2000년1999년구 분정량적 분석내부 행정 효과대민 서비스 개선비정형 통계 대응 및 통계관련 개선활동으로 통계의 적시성, 신뢰성, 적합성 제고 데이터변경 이력관리체계 구축으로 데이터 추적성 확보 EMK 및 EKP 도입으로 특허청 내 자원의 통합관리 가능 심사관의 심사가능 시간 확대로 업무로드 조절 가능 무중단 재해복구시스템의 구축으로 특허데이터의 보호 및 시스템 안정성 강화 유연한 시스템 구축으로 법 / 제도 및 사용자의 요구와 즉각적 대응24*365 서비스 개시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특허서비스 이용 가능 특허정보 즉시 공개에 따른 행정업무 투명성 제고 접수처리시간의 평균 3일 단축으로 대기시간 감소 민원인 서비스 만족도 제고 제출서류 종류가 459종에서 254종으로 통합 감소되어 작성의 불편함 감소 각종 서식의 간소화로 서식 작성시간 및 오작성건 감소 수수료의 온라인 조회만으로 반환신청을 대신하는 등 수수료 관련 절차 개선으로 불편함 감소 서지작성기내에 방식심사 기능 적용으로 보정/반려 건의 감소, 문서 재작성 및 재 제출 방지 거주주소의 추가로 실거주주소로 통지서가 발송되므로 민원인의 서비스 만족도 개선 E-Mail을 통한 통지서 발송여부 공지를 실시, 출원인의 통지서 확인 시간 감소대산업계 기술개발 촉진효과국가 R D 사업시 특허정보 조사의 기반제공 민간업체에 대한 대용량 DB 보급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실시국제적 위상제고개도국에 지속적인 특허넷 기술이전 특허관련 다자 및 양자협력 강화 글로벌 특허정보네트워크 구축 운영 특허법조약(PCT)에의 가입 등 지식재산권 국제규범 통일화에 한발 앞선 대비 XML등 최신 국제표준수용정성적 분석(1)프로젝트 관리 – 업체와의 종속성,1년의 단기 계약 (2)장애 관리 – 비상계획과 대등조치 (3)프라이버시관리 – 보안관리위험구조 분석{nameOfApplication=Show}
라틴 아메리카를 떠올리다 보면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단어들은 바로 열정과 춤이라 할 수 있다. 멕시코의 살사, 브라질의 삼바, 탱고등이 있다. 티비 속에서도 이런 음악과 춤은 자주 비추어진다이런 춤들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과는 다른 점들이 많이있다. 그 예로 삼바를 브라질의 대표춤이라고는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도 삼바가 있었으며, 멕시코의 살사 또한 실제 우리에게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 쿠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이 글에서는 라틴 음악과 춤의 기원과 발전된 과정 그리고 각 국가별로 라틴음악과 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가.시대적 구분1. 원주민의 음악라틴 아메리카 음악에 대한 연구는 원주민 음악에 대한 기록문서로부터 연구되어 진다.그 예로 1536년에서 1564년에 걸쳐 집대성 되어진 아스떼까 언어로 된 노래 가사 모음집인 (멕시코 음악)에서 아스떼까인들이 북을 사용하고 노래를 불렀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아기의 사용과 방법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그리고 오늘날의 리우데 자네이루 지방 부근에 살았던 뚜삐남바스족의 다섯 가지 멜로디가 나오는데 이는 옛 아메리카 음악의 이론적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이런 연구등을 통해서 보면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은 인간의 모든 활동, 즉 종교, 전쟁, 의식, 출생과 죽음 축제와 오락, 사랑 등에 빠짐없이 관련되어 있었다.또한 고대에 음악은 미학적이라기 보다는 사화적인 기능 역할, 특히 종교적인 기능을 한다 그래서 정복자들은 고대 종교와 관련되어 있을 법한 악기들은 모두 사용금지하고 파괴하여 버렸다.(1)아스떼까아스떼까 사람들의 음악은 예식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매우 진지하게 간주 되었다.특권층으로 이루어진 연주가들은 전문적이고 혹독한 수련에 의해 양성 되었으므로 연주중에 조금만 실수만 범해도 사형에 처해질 정도 이었다.아스떼까인들은 극히 한정된 피리나 조개껍질 모양의 나팔 등의 관악기를 사용했으나 타악기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한 예로 떼뽀나츨리라는 북 종류의 악기는 신의 대여 고전시대의 형식미를 다시 추구하려는 신고전주의, 그리고 아방가르드적 경향이 복잡하게 혼재죄어 있는 양샹을 보여준다,물론 중남미에서의 20세기 음악은 역사적으로 유럽의 고전음악을 모방했던 19세기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당시 유럽의 낭만주의는 지속되고 있으나 거의 활력을 잃고 있으며 그 대신 중남미의 자생적인 대중음악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그후 낭만주의를 거부한 인상주의는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중남미 음악에서도 황혼기를 맞았다.인상주의 음악 이후 아메리카의 현대음악의 진정한 변혁은 1950년대 컴퓨터와 전자기술 그리고 우연과 즉흥성을 강조하는 아방가드르 음악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들 음악가들은 이전까지 중남미를 지배했던 민족주의적인 음악을 배격한다.그래서 이들은 절충적인 입정에서 음악의 내면적인 수준 향상을 꾀하였다. 그들은 보편적인 음악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결과 195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 등 외래 음악에 대한 의존도는 축소되었다.나. 주요 국가별 음악사1.브라질브라질 음악은 포르투칼과 인디오 음악에 흑인 음악이 강한 영향을 미치면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식민지 기간, 특히 1580년부터 1640년가지 포르투칼이 스페인에 합병되어 있던 시기에 스페인 사람들은 브라질에 자신들의 음악인 볼레로, 판당고, 세기디야스를 소개 하였으며 이 음악들은 포르쿠칼의 대표적인 민족 음악인 파두와 경쟁하게 된다.19세기 들어서는 브라질 역시 잍태리 오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데 애착심이 강했던 브라질의 작곡가인 프란시스꾸 마노엘 다시리바는 1847년 국립음악원을 그 뒤 계속해서 왕실 음악 아카데미와 국립 오페라단을 설립하였다.다른 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리로 브라질에서도 19세가 말에 민족주의적 음악이 많은 추종자를 확보하며 예술 전반에 걸처서 자리잡았다.20세기로들어 오면서 브라질에서는 국가적 차원의 민속음악을 개발하는 대신 세계성을 지향하는 반민속주의 운동이 일어 나는데 이 운동은 다른 민족주의였지만 그전 만큼의 인기는 누리지 못했다.그후 꼼빠르사스의 금지로 태어난 룸바는 째즈가 가미되면서 맘보의 모체가 되었다. 쿠바에서 태어난 맘보와 룸바는 모두 아프리카의 영향으로 빠른 박자와 격렬한 동작을 가지며 또 다른 쿠바의 대중 줌인 차차차에 영향을 주었다.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쏜과 룸바가 합쳐져 살사가 등장하며 1960년대부터 중남미와 미국 내의 중남미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쿠바인들의 음악은 선천적으로 음악과 춤을 사랑하고 오락인 문화가 발달한 것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하다.(쿠바의 악기)현대음악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쿠바음악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타악기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주로 전형적인 살사음악을 연주할 때 쓰인다.(1) 끌라베스(Claves) : 한 짝의 막대기를 리듬에 맞게 친다. 일반적으로 전문 연주가들이 없을 경우에도 다른 연주가들이 대신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는 악기이다. 일반적으로 광택이 있는 두개의 단단한 막대기로 연주하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드럼의 나무테를 사용하기도 한다.(2) 마라까스(Maracas) : 씨 말린 표주박 2개를 양 손에 쥐고 흔들어서 울리는 몸울림 악기이다. 박에 나무 손잡이를 대고 박 안에는 작은 돌, 씨앗 또는 둥근 구슬들을 채워 흔들어 소리를 낸다. 일반적으로 두 개가 짝을 이루는데 오늘날에는 박 대신에 가죽, 코코넛 껍질, 플라스틱, 섬유유리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볼레로와 살사의 춤곡에 사용된다.(3) 구이로(Cuiro) : 건조하고 속이 비어있는 악기로서 공명현상이 탁월하다. 긴 타원형의 형태로 마치 빨래판처럼 홈이 파져 있는 공명기 표면을 나무막대로 긁어서 소리를 내는 몸울림 악기이다. 멕시코에서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구이로를 만들어 연주하기도 한다. 인디오의 원시악기 그리고 브라질의 레꾸레꾸 등과 같은 모양의 악기이다. 오늘날에는 금속성 재질로 많이 보급되어 있고 전문적인 연주가용으로는 인조합성 수지를 재질로 한 것도 있다. 살사와 차차차의를로스 차베스와 함께 작곡 워크숍을 했던 낀따나르 역시 우연성 음악에 관심을 많았으며 1970년에 멕시코 시 음악원에 전자음악 스튜디오를 창설하여 멕시코 전자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4. 페루현악기와 편곡, 반음 및 유럽음악에 바탕을 둔 화음의 등장은 안데스지역 음악에 혁명을 가져왔다. 전음계로써 다섯 옥타브의 음을 처리하는 하프는 음악혁명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크기가 축소된 만돌린은 께추아인들의 차랑고나 오늘날의 아이마라스로 모습을 나타냈다. 기타와 바이올린은 그 후에 소개되었지만 메스띠소 사이에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다. 인디오 음악을 말살하려 했던 스페인사람들의 노력은 유감스럽게도 성공을 거두어 순수한 인디오의 음악은 정복 이후에 자취를 감추고 만다. 오늘날 인디오 음악이라고 알려진 음악도 사실은 인디오 음악의 선율과 리듬에 스페인 음악적 요소가 혼합된 것이다. 또 흔히 말하는 끄리오요 음악도 인디오적 요소에 절대적인 스페인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2박자의 민요인 우아이노, 야라비, 산후아니또는 인디오 음악인 반면 끄리오요들의 마리네라는 페루의 민속무곡으로 스페인 풍의 왈츠(vals)가 혼합된 음악이다. 그러나 마리네라는 남녀가 짝지어 손에 쥔 스카프를 흔들면서 손을 잡지 않고 춤을 추는 6/8 및 3/4의 혼합박자로 이루어진 페루의 국민적 무용음악의 하나이다.5. 아르헨티나국민 대부분이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화유산 일부가 인디오 문화에서 연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민속주의에 대한 반감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인디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서 지방 음악에는 특히 인디오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삼바, 가또, 까르나발리또와 그 외의 아르헨티나의 춤들은 인디오적 요소와 스페인적 요소가 혼합되었지만 보통 스페인적 요소가 더욱 강했다.아르헨티나는 19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중남미에서 최초로, 대중사회로 변해간다.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사실, 초기 탱고의 제목들은 매춘 세계의 인물들을 나타낸 것이었다. 탱고의 곡들과 춤에는 가사가 없었고, 주로 즉흥적으로 지어졌으며 일반적으로 외설적인 가사가 대부분이었다. 탱고를 만들었다는 Compadre와 Compadrito란 사람들을 살펴보면, 꼼빠드레는 카우보이들인 가우초의 후예들로서, 19세기 말엽 토지와 재산에 대한 사유 개념이 도입되면서 생활 터전인 팜파를 떠나 도시로 몰려 든다. 강인한 근육, 거친 생활, 먼지 쌓인 모자, 회색 목도리.. 아마도 인디오와 니그로, 그리고 스페인인의 피가 섞인 이 거친 남자들은 들판의 음악 밀롱가를 이 도시 외곽으로 가져오게 되었다.꼼빠드레를 흉내내는 도시 빈민 청년들인 꼼빠드리또는 시간이 나면 흑인 구역에 가서 그들의 음악과 춤을 흉내내기 시작했고, 이들에 의해 밀롱가에 깐돔베의 멜로디가 섞이기 시작하게 된다. 1870년대 말 밀롱가의 리듬에 깐돔베의 멜로디가 섞이고 밀롱가의 스텝에 깐돔베의 코르테가 섞인 새로운 춤과 음악이 탄생하고 이들은 이 춤을 생각해낸 장소 "땅고" 라는 이름을 여기 붙이게 된다. 흥미 있는 사실은 흑인들은 춤을 추는 장소를 "땅고" 라고 불렀고, 꼼빠드리또들은 밀롱가에 깐돔베를 섞은 춤을 땅고라 불렀으며 땅고를 추는 장소를 "밀롱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초기 탱고는 남자들만이 췄다고 한다. 여자가 없다보니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당시 세계에서도 유명한 인신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가난한 유럽의 처녀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팔려오고,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유태인의 포주들에 의해 부에노스 아이레스 외곽으로 팔려가고 이들 중 일부는 단속을 피해 "아카데미"라는 탱고 학교에 들어갔다. 아카데미는 탱고가 추어지던 매춘굴을 말하는데 비교적 상류층이 가던 곳이라고 한다.탱고는 주로 꼼빠드리또가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자기들끼리 탱고를 거리에서 연습했으며 탱고를 추는 곳에서 다른 꼼빠드리또와의 경쟁이 칼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보통 하층민의 문화를 멸시해다.
저희 조의 주제는 ‘이슬람 여성 문제’입니다. 이슬람권의 여러 가지 문화 중 가장 특별하면서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갈리는 ‘여성문제’ 에 관한 문화입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 문화로 , 여성 ‘할례’ 와 ‘히잡(베일)’, ‘에 대한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이것을 단지 이슬람권 그들의 문화, 전통으로 보아야만 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측 입장에서 주장하는 ‘여성인권 문제’로 살펴 볼 것인지 본론. 결론을 통해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첫 번째로, 이슬람권의 ‘여성 할레’ 문화를 살펴보면서 전통문화와 인간의 존엄성간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고,두 번째로, 이슬람여성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베일은 이슬람 여성의 정체성을 나타 내는 도구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압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의 시각과 서구사회의 시각에서 본 베일을 분석해보는 시간을 갖고, 이슬람에서는 과연 베일을 d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할레의 의미-여성의 ‘할레’는 ‘여성 성기 절제(femail genital mutilation)'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왜냐하면 ’할레‘는 ’여성 성기 절제‘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남성의 할레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편의상 ’할레‘로 쓰기로 한다.1) 기원과 분포여성 할레의 기원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첫째, 고대 이집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둘째, 고대 아프리카의 ‘성인의례’에서 시작되어 이집트로 확산되었다는 것이고 셋째,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 홍해지역에서 널리 퍼져있던 제도라는 것이다.오늘날 여성의 할레는 이슬람교도, 카톨릭교도, 개신교도, 무신론자 등을 막론하고 많은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집트와 수단에서는 이슬람교도이건 기독교도이건 관습과 전통에 따라 이것을 시행하고 있는 반면, 이집트에서는 ‘완전절제’가 ‘수간식 할레’로 알려져 있다. 일부 국가의 이슬람교도들은 할레를 받지 않은 여성은 종교적으로 정결하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다. 현재 여성 할레가 시행되는 나라는 다음과 같다. 아프리카에서는 카메룬, 가나, 북부이집트, 케냐, 탄자니아, 말리, 수단, 소말리아, 이디오피아 등이고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교도 등이며,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 동부멕시코, 페루 등이며, 아랍에서는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오만 등이다. 한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에서는 보편적이지는 않다.2)할레의 의미1> 위생상의 의미: 여성의 성기는 불결하고 흉측하다는 속설이 있다. 따라서 할레를 통해 위생을 유지하고 형태를 정돈해야 한다고 믿는다.2> 성 적인 의미: 여성의 성욕과잉을 감소시켜 스스로 정숙함을 유지하도록 한다. 또한 남편에게 성적인 쾌감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3> 서회적 의미: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속됨을 표시한다. 할레를 받지 않은 여성은 정숙하지 못하다는 평판을 얻어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결혼 상대자의 대열에서도 제외된다.4> 종교적 의미: 대부분의 이슬람교도들은 여성의 할레가 종교적 근거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다. 특히 소말리아, 이집트, 수단의 경우가 이에 속한다.3)이슬람교와 여성 할레이슬람교의 제1경전인 쿠란에서는 여성의 할레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할레는 종교적 의무가 아니다. 다만 제2경전인 하디스에서 예언자 무함마드는 과거의 관습인 여성의 할레에 관해 질문을 받자 “여성의 할레는 과도하지 않은 범위에서 가볍게 시행하라. 그것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유익하니라.” 라고 대답하고 있다. 즉, 이슬람교에서 남성의 할레는 의무이지만, 여성의 할레는 영예로운 행동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와같이 여성 할레는 이슬람교 이전부터 내려온 관습일 뿐 이슬람교의 의무 사항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슬람교도들은 그것을 종교적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다.4)할레의 종류 할레(circumcision)할레의 가장 경미한 형태로서, 음핵의 전체 또는 부분을 절제하는 것이다. 부분절제(excision)음핵의 전체를 절제하고, 소음순의 일부 또는 전체를 절제한다. 완전절제(infibulation)성기 절제의 가장 극심한 형태로서, 음핵과 소음순 전체를 절제하고 대음순의 일부를 절제한다.할레의 시술 도구는 칼, 면도날, 유리조각 등이며, 시술 받은 여성은 회복을 위해 최장 40일간 두 다리를 묶어 놓는다.수단의 북부 지방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보고에 의하면, 수단 여성의 99%가 위에 언급한 3가지 형태의 성기 절제술을 받고 있으며, 여성 중 2.5%는 ‘할레’를 12.2%는 ‘부분절제’를 85.3%는 ‘완전절제’를 시술 받고 있다.5) 할레의 피해와 현황여성의 할레는 위생상의 이유보다는 관습상의 이유로 행하여지고 있다. 할레는 의학 지식이 없는 전통적 할레사에 의해 대부분 시술되고 있으며 극히 일부의 경우에만 숙련된 의사나 산파에 의해 시술되고 있다. 통계로 보면 (1998년 기준), 세계의 8000만 이상의 여성들이 할레를 시술받았고, 매일 약 5000명의 소녀들이 할레의 시술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 경우에는 2000년 기준으로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전체여성의 97%가 할레 시술을 받았다고 한다.여성 할레의 의학적 폐해는 심각하다. 비위생적 상태에서 마취 없이 진행되므로 극심한 통증과 함께 폐혈증, 요로 감염, AIDS감염, 과다출혈, 정신적 쇼크 등으로 고통을 받거나 사망에 이른다. 또한 후유증으로는 출산 및 성생활, 그리고 생리 시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는 출산 시 산모의 사망 또는 사산의 원인이 되고 있다.최근에는 이러한 악습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셰계적 움직임보다는 각 국가 내부에서의 계몽이 절실한 상황이지만, 실제로 각 국가에서는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예로써 1995년 4월 이집트의 ‘알 아즈하르’지는 할레의 지속을 허용하는 기사를 실었고, 역시 같은 해에 이집트의 보건성 장관은 여성 할레가 이집트의 뿌리 깊은 전통으로서 90% 이상의 가정이 이것을 고수하고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계몽보다는 오히려 장려하는 쪽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그러나 요즘에 들어와서 보면 근 10년 전만해도 할레에 대해 묵인 해오던 이집트 정부도 할레 근절 운동을 펴오고 있다. 1997년부터 할레를 금지 하였으며 2003년에는 ‘여성의 해’로 지정, 할레 근절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이집트 보건부에서는 ‘할레 금지령’을 내리고 위반시에는 징역3년형의 법적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아랍권 국가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2003년 6월 이집트 카이로서 `여성 할레 방지를 위한 아랍-아프리카 전문가 회의'를 개최하는가 하면 2003년부터 2013년 까지 10년간 추진되는 ‘공동 어젠다’에 따라 할레 퇴치 계몽지역을 지정하고 교육 프로그램 재원도 조달하게 된다. 이번 회의기간 중 10개년 프로그램을 위해 최소 1천500만 달러의 공여 약속을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이슬람 여성들의 히잡: 베일-히잡이란? 일반적으로 베일로 설명되지만 그 형태와 작용 및 의미에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히잡은 국가나 지역, 혹은 시대에 따라 그 모양 또한 매우다양하다.즉 아랍어의 히잡 이라는 단어는 이슬람문화에 기초한 단어라 할 수 있고, 반면 베일이란 단어는 서구문화에서 사용되는 용어라 할 수 있다.베일은 무슬림 공동사회의 관습, 사회적 지위, 집안전통 ,각종 계층 등에 따라 다르다. 베일은 크게 전신 가리개용과 베일용 스카프 등 두 종류로 나뉘며 색상과 길이는 사회 환경과 기후 등의 영향을 받아 다양하다.1) 이슬람권여성의 히잡 착용에 대한 상반된 견해: 서구의 시각으로 볼 때 이슬람권 여성의 히잡은 종속과 억압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반 페미니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또 아랍권내에서도 서구의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들도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 반면에 이슬람권 국가들에서 여성의 히잡 착용은 이슬람 문명의 정체성 및 서구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2) 무슬림여성들의 관점에서 본 히잡 착용이유1>어느 지역 안에서 식민지 세력에 반대하는 국가적 운동과 외국정치에 반대하는 저항의 상징이며 여성운동의 도구이다.2>베일은 무슬림 여성들이 얼굴을 드러낸 천한 계층의 여성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신들의 높은 신분 및 권위가 있는 여성임을 나타낸다.3>베일은 대량 생산할 수 있어 낮은 가격을 가능케 해 줌으로서 하류층 사람들에게 경제적 유익을 주며 유행에 민감할 필요가 없다.
티칼은 과테말라로부터 북쪽으로 350Km 거리에 있는 마야문명의 시원지이다.30m가 넘는 열대의 울창한 정글 위로 회색 피라미드의 머리가 보일 정도로 높게 솟아있다. 티칼 유적을 대표하는 신전 피라미드는 9층 구조로 왕의 무덤이자 신전이었다.정상으로 곧장 연결되는 상승계단은 선이 반듯하여 사뭇 긴장감을 자아낼 정도이다.이곳에는 그 어느 마야 도시보다도 피라미드가 많은데, 대개는 왕의 무덤으로서 또 '카툰(katun, 20년)'의 시간 경과를 표시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쌍둥이 형태로 제작된 것이 많고, 또 그 앞에다 신성문자가 새겨진 비석과 제단석이 있어 연대 측정도 가능하다. 티칼의 중심은 재잘대는 새소리와 작은 동물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정글 속으로 난 오솔길을 한참이나 걷고서야 나타나는 대광장. 의식이 행해졌던 그곳에는 가파른 계단을 껴안고 있는 신전Ⅰ,Ⅱ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8세기 축조된 신전Ⅰ은 피라미드 형태에다 가파른 상승계단, 테라스 구조, 수직형태의 후면 처리, 현실의 정상 배치 등 마야신전 건축의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피라미드를 보여주고 있는 9층 구조는 저승세계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야세계에선 아홉 숫자는 신성한 것으로서, 영원·저승 등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전Ⅰ은 왕의 무덤을 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마주보고 있는 신전Ⅱ는 웬일인지 높이는 비슷하나 4층 구조이고 각층의 네 모서리도 둔각이다. 그래서 긴장감이 덜하고 또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여성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 왕비의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기원전 600년경에 건설되어 10세기까지 존속하면서 마야 고전기(AD250-950)를 빛낸 티칼에는 중남미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67m의 피라미드가 있으며, 또 '사라진 세계'라는 이름의 피라미드 군과, 정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피라미드들도 있다. 피라미드의 박물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 마야 대제사(大祭祀) 센터로서는 가장 남쪽에 있고, 과테말라의 키리과와 함께 모타과강 유역의 마야 세력을 대표한다. 유적으로 많은 비석·제단이 늘어선 대광장을 비롯한 5개의 광장과, 그것들을 둘러싼 피라미드식 대신전, 신관의 주거 유적지를 중심으로 주위의 넓은 지역에 걸친 위성도시 여러 개가 있다. 중심부 건물 가운데 상형문자가 새겨진 1000개가 넘는 계단의 피라미드와 앵무새 머리 표석(標石)이 있는 구기장(球技場) 등이 유명하며, 대광장의 비석 인물상은 다른 마야 조각에서는 볼 수 없는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코판은 6세기 이후 최전성기에 들어섰으나 9세기초 급속히 쇠퇴하였다. 1891년 하버드대학이 처음 조사를 시작한 뒤 각국 조사단에 의해 발굴이 행하여졌고, 최근에는 코판을 구성한 사회조직 해명에 힘을 기울이고있다. 그 중에서도 코판(Copan)은 이외에도 많은 인물석상을 간직하고 있어 여느 마야도시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입구격인 대광장에 서 있는 9개의 인물 석비,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계단 입구의 인물 석비 M(코판의 유적 명칭은 이렇게 A, B, C 등으로 표시된다)과 그 위의 커다란 두상, 코판 역대 왕 16명의 모습을 인물의 특징을 잘 집어내어 그 옆면에 새겨놓은 제단석 Q,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제례행사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토용 등이 그것이다.코판 유적에 이렇게 인간의 얼굴이 많은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왕의 권위가 신의 권위를 압도했기 때문인데, 이는 왕국이 멸망하기 200년쯤 전인 7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8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야스 팍(Yax Pac)왕을 주인공으로 그려놓고 그 아래에 ‘763년 7월 7일’, 곧 그의 등극일을 새겨놓은 제단석 Q는 그 대표적 물증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의존했던 신을 저버리게 됨으로써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멕시코 유카탄반도 북서부의 도시 메리다의 동쪽 약 110 km 지점에 있는 마야 문명의 대유적지. 건조한 석회암 지대에 530년 이전의 일이라 하며, 7세기에 일단 포기되었다가 10세기에 재건되었고, 11세기 이후는 마야 신제국(新帝國)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13세기 초에 이트사족은 아스테크-톨테카족의 연합군에 패하였으나, 이후 가장 번영시대를 맞아 많은 건물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5세기 무렵에 갑자기 폐허가 되었다. 유적은 8 km2의 넓은 지대에 걸쳐 있고, 카스티요(높이 25 m의 피라미드)와 그 동쪽의 ‘전사(戰士)의 신전(神殿)’, 도로 건너편의 ‘천문대’ 등이 알려져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마야인들은 욱스말이 점차 도시기능을 잃어가자 그 중심지를 동쪽으로 옮 겼다. 양(量)과 질(質)에서 점차 커져가는 자신들의 문명을 담아낼 새 그릇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도시(新都市)를 건설했다고나 할까. 그곳이 바로 메리다에서 동쪽으로 120km쯤 떨어져 위치한 치첸이차(Chichen Itza)다. 그래서 이 도시는 후기 마야문명(AD 900년경∼AD 1521년)의 중심지가 됐다. 선대(先代)의 정신적.물질적 가치들이 보다 정제(精製)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치첸이차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피라미드는 「캐슬 피라미드」이다. 이름 그대로 웅장한 성채(城砦)를 닮은 피라미드이다. 길이 55.3m의 정사각형으로, 전체 높이가 23m나 되는 「캐슬 피라미드」는 모두 9 개 층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사방 벽면에 4개의 계단 구조를 갖추고 있다. 피라미드 구조를 찬찬히 뜯어보면 더욱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수 있다. 각각 91칸인 계단수를 합치면 모두 364단(段)이다. 여기다 꼭대기의 제단(祭壇)을 더하면 꼭 태양력의 1년 날수와 같은 365단이 된다. 또 9개 층 계단을 의도적 으로 양분해 놓아 당시의 달수(月數)인 18이라는 숫자를 나타냈다. 그러고 보면 「캐슬 피라미드」는 마야인들의 예술적 건축기술과 천문학 지식수준이 한데 맞물린 문명의 집적체(集積體)그것인 것이다. 피라미드 북쪽 계단은 또다른 신비를 간직한다. 피라미드 밑에. 태양의 빛과 그림자가 오묘한 조화를 이뤄 마치 커다란 뱀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캐슬 피라미드」동쪽으로 흰색 돌기둥 무리가 있다. 촘촘히 서 있는 돌기둥은 그 수가 족히 1천개가 넘는다고 한다. 돌기둥 무리 뒤에는「전사(戰士)의 피라미드」가 있다. 「캐슬 피라미드」서쪽에 위치한 「후에고 데 펠로타」는 길이 146m,폭 36 m로 중앙 아메리카 최대 규모로 밝혀졌다. 그 형태가 비교적 깨끗하게 남아있는 양쪽 벽면에는 전형적인 마야의 깃털장식과 동물가면을 쓴 군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용맹스런 군인을 상징하는 「재규어의 신전」이 벽 위에 우뚝한채 공놀이 장을 내려다 보고있는 모습 또한 인상적일 것이다. 치첸이차 유적지에서 빼놓을수 없는 것이 북쪽에 있는 「세노테」(Cenote)다. 지름이 50∼60m는 족히 넘고 깊이가 40여m에 이르는 대규모 연못이다. 1924년 미국인 고고학자 에릭 톰슨이 발굴작업을 실시한 결과,각종 도자기.흑요 석 등과 함께 인간의 뼈가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었을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노테」는 농사지을 물을 대는 저수지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제소(祭所)로도 활용했던 성지(聖池)였음이 틀림없다. 치첸이차는 마야인들이 천문학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다른 증거를 간직하고 있다. 「캐슬 피라미드」남쪽 300m 지점에 천문대로 사용했을 「소라의 피라미드」가 바로 그것이다.오늘날의 우주관측소에서 볼 수 있는 돔(Dome)형 지붕이 뚜렷하고,내부에는 천체관측에 사용된 이중 구조 물이 남아있다. 마야인들은 돔탑을 둘러가며 나있는 창문에 비친 태양의 각도를 재어 춘하 추분을 정확히 알아맞추었다. 1988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치첸이차에는 이들 유적 말고도 전쟁포 로의 목을 길게 꿰어 벽면에 걸어놓았던 「솜팡틀리」와 「금성(金星)의 피 라미드」등 여러 건축물이 남아있다.제사를 앞둔 제사장이나 사냥에 나설 사 냥꾼들이 몸을 씻거나 도 치첸이트사. 인간의 심장이 제물로 바쳐진제단 차크 모르상이 있다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 서부에 있는 고전기 마야 유적. 1952년 비문(碑文) 신전에서 비취로 만든 판이 덮인 왕의 지하무덤이 발견되고, 그 뒤 미국 학자들에 의해 비문 해독이 이루어져 팔렝케왕조의 일부 역사가 해명되었다. 매장된 왕은 683년 죽은 파카르이고, 그 아들 찬 바알름 시대에 그를 매장하기 위한 신전이 건립되었다. 또 같은 시대에 <태양의 신전> <십자(十字)신전> <나뭇잎모양 십자신전> 등의 팔렝케를 대표하는 우미한 건조물도 세워졌다. 왕과 귀족의 주거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궁전>은 파카르 시대에 건설이 시작되어 그 뒤 왕들에 의해 차츰 늘려 세워진 듯하다. 마야건축에서 유일한 4층 탑이 딸려 있다. 팔렝케의 세력은 764년 즉위한 쿠크왕 시대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팔렝케에서는 디카르나 코판 등에 보이는 비석뿐만 아니라 건물벽 또는 패널에 문자기록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멕시코 유카탄반도 북부 메리다시 남쪽 약 70㎞ 지점에 있는 마야문명의 고전기 후기(AD 600∼900)의 유적지. 건축·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수녀원(修女院)>이라는 안뜰을 둘러싼 4개의 건물과 <총독의 저택>이라는 길쭉한 건물 앞면 윗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무늬는, 그 시대 건축의 특징을 이루는 푸크 양식이다.멕시코 유카탄반도 북부 메리다시 남쪽 약 70㎞ 지점에 있는 마야문명의 고전기 후기(AD 600∼900)의 유적지. 건축·조각들이 매우 아름답다. <수녀원(修女院)>이라는 안뜰을 둘러싼 4개의 건물과 <총독의 저택>이라는 길쭉한 건물 앞면 윗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무늬는, 그 시대 건축의 특징을 이루는 푸크 양식이다. 또한, 만든 시기가 서로 다른 5개의 건조물이 쌓아 올려진 <마술사의 신전(높이 약 27m)> 상부에는 중앙에 신상(神像)이 놓여 있고, 그 신상의 크게 열린 입이 이 건물의 입구로 되어 있는 이른바 체네스 양식으로 되어 있다. 그 밖에 <거북관> <비둘기관> 등의 건물.
은 1905년 강제 고용으로 멕시코 애니깽 농장주의 노예로 팔려간 선조들의 이야기다.그들 중에는 몰락한 양반으로부터 백정의 아들, 숨어사는 동학군의 후예, 장사치, 군인 출신 등등 다양했다. 인력송출회사인 '동경대륙신민회사'의 경성지부는 그들에게 부강한 나라에 가서 돈도 벌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속였던 것이다.주인공은 백정이자 동학농민군의 아들인 천동(임성민)과 몰락한 양반의 딸 국희(장미희)이다.영화는 조선인들이 받는 모진 학대와 수모를 배경에 두고 천동과 국희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꼬박 두 달이 걸려 망망대해 태평양을 항해 한 끝에 마지막 귀착지는 남미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메리다 항구였다.그들을 기다리는 것이란 지상낙원이 아니라 애니깽 농장의 살인적인 무더위와 고된 노동뿐이었다. 이들이 농장에서 수많은 모욕을 당하고 조선인의 생명같은 상투를 자를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시도하지만 그들은 번번히 실패하고 잡혀 돌아와서 심한 고문을 당한다.여기서도 조선인이지만 통역자로서 유영국이라는 사람은 지주의 앞자비 노릇을 하며, 같은 조선인들을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게 한다. 국가의 암울했던 시기에는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같다.어느 날, 멕시코인에게 겁탈을 당할 위기에 놓인 국희를 구하려고 천동이 살인을 저지른다. 이 사건으로 사랑에 빠진 국희와 천동은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는 연인으로 발전하고 양반인 아버지도 백정 출신인 천동의 성품을 알고 그 관계를 인정한다.농장의 지주는 조선인들이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하루는 사진도 찍고, 음식도 배풀면서 그들의 노동을 계속이어 나가게 하는 기만적인 행동을 한다.가혹한 사태를 참다 못한 국희의 아버지는 아들과 천동, 그리고 도와줄 몇사람들을 뽑아서 조선으로 보내 억울한 이 상황을 임금에게 알리려고 한다.천동은 농장을 떠나면서 국희에게 꼭 돌아오겠노라고 맹세한다.그들이 떠날때에서 아낙네들은 그들의 푼돈을 모아서 천둥의 일행에게 전하는 모습에서 한국적인 서로서로 돕는 모습을 볼 수 있다.천동이 떠난후 국희는 조선인들의 생활이 너무나도 궁핍하여 미국인 농장주에게 찾아가서 농사를 짓게 해달라고 말하지만 허락해주지도 않고, 그녀를 겁탈하기까지 한다. 국회가 아이를 가지는 장면이 나왔을때 나는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궁금했다. 다행이도 그 아이는 천동의 아들이었다.국희는 돌아올 천동을 생각하며 그 아이를 굳굳이 키운다.한편 탈출한 조선인들은 조선으로 가는 갈 길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멕시코인들의 배신으로 산전수전을 다 격게 된다.농장에서는 멕시코 혁명으로 시련을 격는다. 북부 반란군이 애니깽 농장에 쳐들어 와서 조선인들은 농장을 벗어날 수 있었으나 국희는 천동을 기다리기 위해 그곳에 남기로 한다.멕시코인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들은 탈출한 조선인들은 불법 입국자 또는 탈출한 노예로 생각하여 오랜세월동안 옥살이를 시킨다.결국 그들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그들이 멕시코를 떠난 ....년후이었다.그들이 배를 타고 조선에 도착하여 초가집을 보는 장면에서 참 “의지의 한국인”이 저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이때는 이미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여 조선은 식민지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상소를 올릴 임금도 존재하지 않았고, 또 다시 그들은 일본인들도부터 옥살이를 하며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천동은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일본은 그들이 노예사업을 조선에서 한 사실은 감추기 위해 그들의 총살 시킨다.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이루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인 것같다.한편 멕시코에서 국희는 열심히 일하고 작물을 재배하여 많은 재산도 가지고, 천동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도 건강한 아들로 성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