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S. Eliot의 전통- 전통은 역사의식을 내포한다.- 호머 이래의 유럽문학 전체와 그 일부를 이루는 자국 문학 전체가 동시적 존재를 가지고 동시적 질서를 형성한다는 감정을 가지고, 작품을 쓰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먼저 문학사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작품들을 읽고, 자기 나름의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자기 가신이 가진 재능의 단계를 넘어서 이전에 나왔던 작품들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서 작품들의 우열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이 선행되어야 만이 문학사에 남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다.2. 개성 멸각론(몰개성론)- 시인은 자기의 개성을 표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보다 더 우월한 무엇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예술의 기능은 인생에 존재하는 질서를 깨닫게 하는 것인데 시인조차 복잡한 사회의 현상에 매몰되어 있는 현대 사회에서 현실의 총체적 구조를 발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시인의 내면성의 표현만으로는 진실을 확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개성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성을 갖춘 개성을 이야기(전통과 통하는 개성)- 아무것도 모르는 체 이야기하는 것이 개성이 아니고, 보편적인 것을 이해하고 자신의 특징적인 것을 투영시킨 것이 진정한 개성(낭만주의의 개성에 대한 반발, 보편성을 가진 개성의 강조)3. 객관적 상관물- 독자들이 읽고, 보편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소재.-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사건들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건. 즉 객관적 상관물이란 정서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 등을 지시하는 가운데 간접적으로 정서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정서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시적 기법이라 할 수 있다.- 반응은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동일한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형상화 해야 한다.Ex> ‘슬프다.’ 라는 것은 저마다의 상황이나 생각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때문에 모두 ‘슬프다.’라는 것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4. 감수성의 통일- 어떤 것에 대하여 감정을 느끼는 것(시인의 가장 큰 특징)- 객관적 상관물과 연결되는 개념- 감정이란, 이성 ? 지성의 통제를 받아서 이성과 감성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 상상이라는 관념적인 것을 이성적인 것과 통합하여 감각적인 것으로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내어야 한다.- 서로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것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하는 것※ 감성의 분열dissociation of sensibility 엘리어트가 그의 논문 「형이상학파 시인들」에서 쓴 용어. 엘리어트는 17세기 이전의 영시와 그 이후의 영시를 구분하면서 사고와 감정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 상태를 일컬어서 이 용어를 썼다. 위대한 시인들은 감수성의 통일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엘리어트 시관의 하나이다. 그는 이 용어를 쓰면서 엘리자베스 조의 시인들은 감성의 통일이 있었으나 밀톤과 드라이든에 와서 분열상을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밀톤은 지성이 없는 정서만을 노래했고 드라이든은 정서가 없는 지성의 세계만을 읊었다는 것이다. 엘리어트의 이러한 견해는 그 후 미국 신비평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5. I. A. Richards의 언어의 용법- 상징적 또는 지시적 기능은 과학적인 용법으로 객관적 세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단어들을 사용한다. 그 대상의 성질을 잘 설명하는 데 목표를 둔다.(인식적 기능, 진술)- 감정적(정서적) 기능은 말이 가지고 있는 연상 작용에 의하여 주관적인 감정이나 태도를 환기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 이것은 감정이나 태도의 환기만을 주안점으로 하고, 필자나 독자의 관심은 말과 사물 사이의 어떠한 객관적 관계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삼아서도 안 된다. 읽는 대상에게 어떤 감흥을 주는 것이 목표.(영향적 기능, 의사 진술)- 우리가 올바르게 시를 읽을 때는 ‘지적인 의미’에서의 신뢰나 불신의 문제는 결코 생기지 않는다.6. 가치론- 문학의 심미적인 영향만을 보고 있음.- 문학은 바람직한 심리적 영향을 을 주는 이외의 지식, 진리의 창출과 발견, 그것의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리차즈의 시를 보는 태도)- 이것은 문학을 보는 4가지 관점 중에서 효용론에 가깝지만, 신비평 이론가들이 이것을 대입한 것은 효용적인 측면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 대입.- 심리적인 영향의 핵심은 여러 가지 복잡한 경험을 통합하여 평형과 화합을 이룬다.- 상황 속에 축적된 잡다한 경험들의 파편들을 최대한도로 살려서 그것들의 평형과 화합을 이룩한 상태라는 것.- 문학적 경험은 서로 반대 되는 경험을 화해시키는 데에 있다.- 코울릿지의 상상력에 빗대어 설명, ‘상상력이라는 것을 서로 반대되는 것을 하나로 합하는 마술의 힘’- 문학은 상상력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상력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비극’이다. 비극은 2가지 전혀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데, 그 먼저 연민의 감정(=애련, 동정)이 생기는데, 이것은 (도와주기 위해서)가까이 가려고 하는 감정이고, 두 번째는 공포의 감정인데, 이것은 연민의 감정과는 반대로 멀어지려고 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것의 조화가 이루어진 것이 ‘카타르시스’이다.- 시는 두 종류로 나뉘는 데, 바로 배제의 시와 포괄의 시이다.- 배제의 시는 곧 삭제에 의한 체제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한가지의 소재 한가지의 감정만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반응을 좁힘으로써 안정과 질서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특수하고 좁게 한정된 경험을 질서화 하여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배제의 시는 아이러니컬한 독법을 견뎌내지 못한다. 때문에 배제의 시도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그것대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가장 위대한 시라고는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여기에서 아이러니란 반대의 충동 곧 상호보족적인 충동을 시 속으로 끄집어들이는 것을 뜻한다.)- 포괄의 시는 곧 통합에 의한 체제화라고 할 수 있는데, 2가지 이상의 소재에 2가지 이상의 감정의 통합이 이루어 진 것을 뜻한다. 또한 시 속에 복잡한 요소들이 잘 통합되어 있는 것을 뜻한다.※비유 - 보조관념과 원관념으로 이루어 진 것.(예> 호랑이(보조관념) 같은 선생님(원관념)). 정말 좋은 비유는 비유의 효과가 큰 것인데, 원 ? 보조 관념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배치될 때( 전혀 관계가 없을 때) 이러한 효과를 얻기가 쉽다.※ 리차즈의 문학 - 복잡한 요소들을 하나로 합하여 놓은 것. → 영향(즐거움) → 가장 잘 나타는 것이 상상력 → 가장 잘 합하여 놓은 것이 비극 → 시는 아이러니의 존재의 유무에 따라 포괄의 시와 배제의 시로 나뉨 → 이 중에서 아이러니가 있는 포괄의 시가 더 가치 있는 것※ 신비평이 리차즈의 효용론적인 관점을 받아 들였는가? - 작품 속에 복잡한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만을 차용하면 되기 때문에, 즉 효용론적인 측면을 만을 제외한 문학 비평의 방법만을 차용하면 됨.리차즈의 이론 - 문학 = 여러 가지의 결합체 = 가치론신비평 - 문학 = 여러 가지의 결합체7.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 신비평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방법- 리차즈의 비평 방법론인데 신비평에서 차용- 말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이해 - 외연, 함축, 어조(태도), 의도- 불신의 자발적 중단(willing suspension of disbelife) - 소극적 수용 능력(negative capability)(불신의 자발적 중단은 ‘불신’ 즉 자신이 반감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그것의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를 자기 스스로 인식하고 중단하는 것을 의미)- 감상적 태도의 배제(감상이 주인이 되어서 대상의 전체적인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음)- 교훈 찾기의 배제(리차즈와 신비평의 차이점)※교훈 찾기의 배제 - 리차즈는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보여주면, 교훈을 직접 드러내거나 우선적으로 찾으려 하지 않아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했다.8. 의도의 오류(intentional fallacy)- ·작품을 해석하는데 작가의 의도를 중요시하면 오류가 생긴다.- ‘시인’과 ‘시속의 화자’를 분리해서 서로 독립적인 객체로 볼 것을 강조.- 시는 탄생하자마자 작자로부터 분리되어 작자가 어떤 의도를 갖던지 간에 통제를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서 세상에 떠돌게 된다는 생각이다. 시는 사회에 속한다.- 시란 개인의 사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공공소유의 객체이며, 작자의 경험이란 문제에 관하여 말하자면 비평의 입장에서 보아 중요한 것은 텍스트 내에 구체화되어 있는 것뿐이다.- 작자의 의도란 문제에 있어서는 과연 그가 한 편의 시를 성공적으로 썼느냐 못 썼는냐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며, 그것 역시 텍스트에만 의존하여 판별될 수 있는 것이다.9. 영향의 오류(affective fallacy)
1940년대 시와 그인식????????????????????????????????????????????????????????????우리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1940년대라는 한 시기를 그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식민지 치하의 한국문학은 그 어느 것이든 직접, 간접적으로 일제에 대한 어용이 강요되지 않은 때가 없었으나 특히 1940년대만큼 가혹한 시기는 없었다. 1940년대 문학이 지닌 그 독특한 성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어의 공적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까닭에 한국어를 매체로 한 문학이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문학의 본질이 언어에 있다는 이는 곧 한국문학의 말살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한국문학을 그 이념상으로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그 이전부터 자행되어 온 일본 식민지정책의 문화적 실천운동이 적극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이 시기 한국의 일본 국책문학을 일본의 한 지방문학으로 귀속시켰다. 셋째는 문단적으로 일본의 국책을 실현시키기 위한 어용 문학단체가 결성되어 문인들을 조직적이고도 강압적으로 작품 창작활동이나 사회활동에 동원시켯다는 점이다. 이제까지는 일본의 국책 실현을 공개적으로 표방하고 나서 범문단적 조직은 없었다. 넷째, 1940년대 문학이 그 전시기와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전재 동원문학이라는 점이다. 즉 1940년대 일본의 국책문학은 태평양전쟁의 승리를 위한 대민 선무공작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 시기에 강요된 대부분 문학작품의 주제가 전재의 당위성과 조선청년의 지원 입대 및 전쟁영웅상의 찬양 등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일본의 한국문학 말살정책- 문학을 통한 소위 내심일체 식민지 정책은 일본 파시즘의 아시아 대륙 침략과 더불어 점점 가속화되다가 1930년대 말에 오면 그 극에 달하게 된다. 일본이 파시즘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 것은 정당 내각과 의회정치가 실질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30년대부터이지만 만주사변의 발발, 제 1차, 제 2차 사상검색, 도고 군부반란사건을 거쳐 중일전쟁이 시작 친일 어용잡지가 다수 등장하였는데 문예지로는 국민문학등이 대표적이다. 이상의 언문, 언어 탄압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직접적으로 문학 창작활동과 대내외 정치활동을 통해 문인들을 한국인의 일본성문화 작업의 선동자로 동원하였다. 그리고 그 효과적인 실천 방안으로써 일제는 총독부의 적극적인 비호아래 가리시마, 쓰다 등 일인을 앞세워 친일 어용 문학단체를 결성시켰다. 이상으로 우리는 1940년대 문학의 비극적 드라머가 연출될 수 있었던 시대 상황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서 문학사적 의미로 1930년대와 구별했던 1940년대 암흑기는 어느 때부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그것은 1941년을 분수령으로 삼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태평양전쟁이 이 해에 발발하여 일본 국수주의가 국민 총동원체제를 확립시킴으로써 문학도 이에 흡수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문학의 본질이라 할 언어가 사용금지가 일년 뒤이긴 하지만 이 무렵부터 실시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우리 문단을 대변하고 있었던 양대 순수 문예지가 이 해에 폐간됨으로써 민족문학의 발표매체가 모두 상실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민족문학 활동의 종언을 뜻한다. 넷째는 《국민문학》을 필두로 하여 다수의 친일 어용잡지들이 이 해에 창간되었고 친일문학을 일컫는 소위 국민문학이라는 용어가 이 무렵부터 확실한 개념으로 정립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국책을 실천하는 문학으로서 이 용어는 그 전에도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이후부터는 친일 어용문학의 공식명칭으로 통용되었다. 다섯째, 조선 문인의 조직적 동원체제로서의 문학단체가 이 시기에 결성되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시기 문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기존의 문학사들이 이 시기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 주고 잇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이 시기의 문학을 칠체 공백기로 돌리려는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비록 그것이 굴욕적인 행위라 하더라도 마땅히 우리 문학사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1940년대 로서의 의식과 일본 식민지정신에 있다. 따라서 소위 국민시 역시 이러한 문학 정신을 형상화한 작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체로 이 시기의 국민시가 지닌 요건은 다음과 같다.1) 이념적으로 그것은 완전한 내심일체와 한민족의 일본화를 실현시키는 데 기여하는 시작품이다. 여기에는 물론 일본 제국주의의 파시즘, 그리고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이라는 지상 명제가 내포된다.2) 언어면에서 국민시는 일본어로 표현해야 한다. 한민족의 완전한 일본 황민화는?천황이 사용하시는 말을 우리의 국어로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3) 표현 형식면에서 국민시는 일본 전통문학의 관습이나 양식을 빌어 씌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라서 일본의 전형적인 시가 창작이 적극 권장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춘 국민시의 창작이란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문학이 독자를 전제로 하여 씌어진다고 할 때, 그 독자에게 수반되는 제약이 필연적으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언어상의 문제에 있어서 비록 국어상용이 강요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층을 제외할 경우 민중의 대부분은 아직도 일본어에 익숙치 못한 상태였다. 문학이 고차원적 언어행위이고, 국민문학의 발상이 대중 선동에 있다고 할 때 이는 일본어시의 전면적인 창작이 불가능함을 뜻하는 것이다. 일본문학 양식의 강제 접목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므로 1940년대 한국문학에서 위의 세가지 요건을 충족시킨 국민시의 전면적이고도 즉각적인 창작은 실시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제가 일부 한글시 창작 등 과도기적 양상을 묵인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1940년대 문학이 왜 공백기일 수 없는가에 대하여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더 부연한다면 1940년대 암흑기가 비록 반민족문학의 조류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극소수나마 순수문학 내지 민족문학 활동도 명맥을 잇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분명 1940년대는 그 나름의 민족문학을 지니고 있었다. 1940년대 강권에서 오는 저항을 일시적으로 완충시키고자 하는 저의 때문이었다. 한국어의 공적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한글시의 창작을 어느 정도까지 허락했던 이유 역시 저들의 필요에서 오는 것이다. 즉 일반 민중은 아직 일본어의 해독이 어려웠으므로 그들이 일본어에 숙달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였고 이 동안 그들의 국책을 선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한글 사용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는 유식계급을 상대로 간행한 반도 유일의 문예지 《국민문학》이 전면적으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신문이나 종합지들이 아직 한글로 인쇄되고 있었던 데서 증명된다. 따라서 암흑기의 한글 순수시는 전면적인 일본어 시 창작을 위한 과도기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암흑기의 순수시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국민시에 참여하지 않고 순수시만을 창작했던 시인이다. 둘째, 국민시의 창작에 가담하면서 한편으로 순수시를 쓴 경우이다. 셋째. 일제의 탄압을 피해 숨어서 시를 쓰다가 해방 이후에 이를 발표한 시인들이다. 이중에서 둘째 유형은 진정한 의미의 순수시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암흑기에 발표된 순수시들은 대체로 상실의식이 형상화되어 있으며 여기서 연유되는 허무를 노래하고 있다.진정한 의미에서 1940년대 암흑기의 문학적 순수성을 지키고 민족문학의 맥을 계승한 시인들은 모국어와 국권의 회복을 고대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숨어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시는 해방과 더불어 빛을 보게된다. 윤동주의 생시에 몇 권의 시와 수필을 발표한 바 있으나 시는 그의 사후, 유고시 형태로 발견되어 1948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에 묶여 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한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유고시의 발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거둔 작품상의 성공 등은 그의 문학을 40년대 시사의 주역으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윤동주는 암흑기를 대변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 된다. 일부에서 윤동주를 가르켜 저항직한 시사의 정리와 체계롸를 위해서는 이러한 시와 시인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가능한 한 다각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해방 이후 벌서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지나간 날들을 한번 점검해 본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항상 과거를 올바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현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며, 동시에 미래의 바람직한 방향을 가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라서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의 문학적 상황과 1950년대의 시단 상황을 자료정리와 개관의 측면에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일제 식민치하 36년은 암흑시대와 같은 것이었다. 일제 하에서의 문화운동은 무단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범위와 체제내에서 가능했으며, 문학의 시대적 응전력도 한계지어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36년의 식민지 체험은 뿌리깊은 허무주의와 도피주의의 비극적 세계관을 형성하게 한다. 특히 일제 말의 수탈과 억압은 빼앗긴 자, 쫒기는 자로서의 패배의식을 심화함으로서 민족적 열등감을 부채질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한 것도 또한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해방은 민족사의 일대 전기가 됐음은 물론 시사에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해방은 빼앗겼던 주권의 회복과 함께 민족적 주체성과 동질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확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해방은 모국어인 한글을 회복함으로서 민족문화의 새로운 정립과 발전을 이룩하는데 주체성과 동질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일제 말에 강요되었던 창씨개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민족 고유성 말살정책과 강제적인 조선어 사용금지 조처는 민족정신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민족문화를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므로 해방은 국가적인 면에서 주권회복과 함께 민족문화사면에서 모국어 회복이라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해방이 주체적 능동적 노력에 희한 것이기보다는 연합국의 승리라는 타율적인 힘에 의존한 것으로서 부정적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당
1930년대 시와 그인식????????????????????????????????????????????????????????????1930년대는 한국시사에서 본격적으로 시의 본질에 도달된 시와 시론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시기에는 1920년대 의 감정의 홍수와 외래사조의 무분별한 모방으로부터 벗어나 시인들이 자기 자신을 찾아서 하나의 독립된 예술작품으로서의 새로운 시를 생각할 수 있는 지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0년대의 우리 시에는 낭만주의, 상징주의, 대카당스, 탐미주의 등의 문예사조가 혼합되면서 각기 나름대로의 수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 문예사조 의 이입을 거친 우리 문단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이나 서구문학의 주지주의, 이미지즘, 모더니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현대사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한편으로는 20년대 말의 계급주의, 민족주의, 등 이데올로기 문학으로부터 벗어나 시의 미학만을 추구하겠다는 순수한 예술 심미적 태도를 지닌 시인들이 탄생하였다. 소위 시문학파로 불리는 자들은 독자적이고 순수한 시를 창작하여 고도의 예술성을 획득하였다. 새로운 시형태의 추구, 깊이 있는 은유,예리한 감각과 신선한 이미지의 사용으로 그들의 시는 당시에 이체로운 존재였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져 우리 문학이 민족주의를 지탱할 수 없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시문학파의 시인들이 시의 본질에 입각한 순수예술적시만을 추구했다는 것은 당시 현실로서는 오히려 가장 성실한 문학자의 자세가 될 수있었다.1930년대의 주지주의, 모더니즘, 초현실주의 등 외래 문예사조의 혼류 속에 전통정신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하려는 노력이 시문학파의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시문학파는 서구문학의 영향을 우리자체내의 내부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남겨 주었다는 점에서 귀중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게 된다. 무비판적인 서구문예의 수용과는 달리, 서구문학이 한국문학의 구조 자체내에서의 변화에 어떤 기여를 하게될 때 그 외국문학의 영향은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시문학파의 시와시론이, 외국문학의 영향을 주체성을 가지고 수용하여 우리 민족의 시와 시론을 제시할 수 있는 고귀한 터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시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순수시론의 이론적 근거를 탐구한 박용철은 계급주의 문학의 내용 위주의 시들을 비판하고 시의 유미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서 예술로써의 시 장르의 확립과 이론적 체계에 큰 영향을 준 시인이다.박영철의 시의 정신적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순수서정시의 지향이다. 그가 시에 대한 견해 즉 시론을보인 것은 낙향시절, 시를 발표하기 이전에 고향에서 영량에게 보내 편지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떠나가는 배」의 창작을 계기로 그는 시에 대한 생각은 ?속에 덩어리가 있어야 나오는 것이며, 그래서 가장조잡하게 독후의 통일적 정서를 우미애상, 숭고 등 추상적 형용사를 써서 윤곽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이다. 이것은 기교보다는 속에 덩어리가 있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한 덩어리는 시의 내용이 되는인생체험 일 것이다. 또 그는 ?정서를 푹 삭후?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때 문맥상으로 보아서 푹 사후어야 할 것은 바로 정서의 덩어리라고 생각된다. 푹 삭후어야 한다는 것은 곧 순화시키는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할 때,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이 좋은 시를 만드는 선행 조건이 될 것이다. 시의 내용으로서의 정서의 순화는 체험의 깊이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며 내면적인 상징화 과정과도 관계된다. 순화된 정서 속에는 의미나 관념이 끼여들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대상을 주체로부터 분리시키기보다는 대상과 자아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내상을 체험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순화된 서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또한 그는 시간의식이나 사회의식이 제거된 음악과 같은 한낱 객관적 존재라고 시를 생각했다. 시간과 공간, 사회와 관념이 제거된 존재란 결국 초월성을 지닌 절대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 이미 완성의 경지에 이른 것이며, 그것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그러한 시는 무엇을 지시하거나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시의 창작과정으로서의 시론이 아니라 감상자의 입장에서 본 것으로 시가 분석을 거부하는 절대적 존재로서 생명의식을 지닌 것이라는 생각이다.하나의 꽃과 같은 존재인 시에서 감상자와 비평가가 탐구해야 할 것은 일상생활보다는 내용으로서의 순화된 서정이다. 여기에 박용철의 순수시론의 거점이 있다. 시를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은 곧 시에서 심미적 예술성을 찾아내려는 낭만주의적 성격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시문학》3호의 편집후기에서 이데올로기가 난립하는 현대라는 상황 속에서 순수한 서정으로서의 미의 추구가 고성에 서있는 것 같은위험과 외로움을 내포하고 있는 작업 인줄 알면서도 순수시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은박용철이 1930년대의 문학적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 시사가 시의 본질에 접근한 수수한 서정의 탐구과정을 철저히 겪지 못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이 이러한 순수 서정의 세계에 몰입하게 될 때 시는 자연히 절대적이고 개성적인 미의 세계에 경도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시에서 관념과 의미가 배체되며 시대나 사회의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시에서 관념과 의미가 배제되면 시대나 사회의식을 찾을 수 없게 되고 개성과 기교가 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단.박용철은 A?E하우스의 「시의 명칭과 성질」을《문학》2호에 번역하고 나서 한층 더 발전된 시론을 전개한다. 순수시 이론을 전개한 논문으로서 그가 종래에 생각하고 있던 정서 위주의 존재로서의순수시론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이었다. 이 논문이 박용철 시론에 수용됨으로써 한국근대시론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박용철의 시론이 30년대 수수시의 이론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시의 의미적 지성에 속하는 것이나 그것을 따로 독립해서 생각할 수없으므로 시로부터 분리하여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 그 이유는?시는 말해진 내용이 아니요, 그것을 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우스만은 이상적인 시에 대해 언급하면서 윌리함 블레의크의 예를 들어 그의 시가 ?순연한 시의 의미가 아주 적게 섞에 있기 때문에 시적 정서 이외의 것은 간취되지도 않고 상관되지도 않은 시?라고 설명하였다. 이렇게 하우스만의 시론은 박용철의 순수시론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또한 그는 시를 쓰지 않고는 죽어도 못 배길 내면적 필연성을 지니게 될 때 시인은 자신의 생활을 시화 할 수 있다. 시인의 체험은 다양하고 많을수록 좋다. 모든 체험을 다모아야 하고 또한 그것을일증ㄹ 수 있어야 하고 그 체험이 시인의 피가 되고 눈이 되고 몸짓이 되고 이름없는 것이 될 정도로 완전히 용해된 다음 어느 순간에 시의 최초의 말로 발생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진술들은 시는 곧 체험이며 이 체험이 완전히 시화되어 우리의 정신이나 정서를 구성하는 그 무엇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것이 우연히 어떠한 순간에 시의 과정을 거칠 때 시의 한 구절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어떤 의도적인 시 창작도 생각할 수 없다. 시인은 단지 시 이전의 상태에 머물러 참을성 있게 기다려햐만 된다. 그러면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표현의 기다림을 지속시키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시정신은 시가 꽃이나 나무와 같은 존재로 변용하기위해서 체험의 양이 많을수록 좋고 또 그 체험은 질적인 순화과정을 거쳐야 한다. 심두에 불을 붙인다는 것은 우선 표현 이전의 고시적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시적인 것은 한낱 시정신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만으로 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통한 표현의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언어를 통한 표현의 과정은 시간상으로 볼 때 시적 체험 이후 즉미래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시적인 체험과 표현의 문제는 하우스만의 시론대로 분리 될 수 없는성질의 것이다. 박용철은 표현의 문제는 고시적인 것과 교호작용을 통해서만이 궁극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겉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지만 시인의 마음속에 뮤즈를 향해 타고 있는 불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데올로기나 시대, 사회로부터 시를 지켜 주는 순수정신이다. 그러나 시인 의 심두에 불붙은 무명화가 지속적으로 타오르기 위해서는 고시적인 자리에 무작정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된다. 박용철에게 있어서는 교호작용에서 필수적으로 탐구돼야 할 시의 방법론적인 문제보다 그가 궁극에까지 도달하기를 영원한 수수한 시정신의 탐구가 더 중요한 과제였다.박용철은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내용위주의 시론을 거부한다. 그는 현실의 정확한 인식은시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사항이며 시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인식할 뿐 아니라 일반인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사항이며 시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인식할 뿐아니라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체험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을 체험 속에 용화시켜 다시 탄생되는 존재로서의 시론을 가지고 예술로 승화되지 않은 시의 무의미성을 논의한 것이다.시는 현실에 대하여 직접적인 반응을 나타내기 않지만 현실을 깊이 있게 체험 속에 수용하여, 꽃과 같은 새로운 형체를 지닌 또 하나의 존재로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시의 언어는 일상어와 같은 전달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시속에 쓰일 때는 직설적이어서는 안되며 용해의 과정을 거쳐 창조적 구성과 질서 가운데서 또다른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박용철의 기교에 대한 이론은 시의 시론는 결국 표현되어야 할 그 무엇이 존재할 때 의의를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예술 이
1920~30년대 프로시의 전개과정???????????????????????????????????????????????????????????????????????????????????????????1. 프로시의 논의의 시사적 의미 관계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흐름으로 전개되었던 프로문학운동은 근본적으로 3. 1운동 이후 일제강점의 시대적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 전반에 일어난민족운동의 확산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것은 일정한 사회의식의 문학내적 수용이라는 의미에서 우리 근대문학사의 독특한 산물이다. 즉 민족사적, 특수성 아래 사회주의이념을 그 사상적 기초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민족저항운동의 형태로 구체적 실천을 보였다는 점에서 우리 근대문학의 독자적 성격을 형성하는 하나의 준거가 된다는말이다. 따라서 일정한 사회의식을 표출하기 위한 장치로서든, 혹은 외적으로 사회의식을투사하는 대상으로서든 문학을 사회적, 현실적 삶과의 관련 아래 이해하려는 관점을 획득하는한편, 이를 위해 과학적 인식을 전제로한 문학관을 확립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1920~1930년대프로문학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을 잘 보여준다.지금가지 프로문학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진 각 장르별 전개양상에 대한 연구는 전반적으로 동일한 논의의 틀 및 접근 태도 아래 이루어 져 왔다. 그것은 무엇보다 프로문학의 각 장르가 장르 고유의 문학사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공통의 문학적 인식과이념적 지향을 내포한 까닭에 창작적 실천상 동일한 시대적 양상과 변모 과정을 보인데 그 이유가 있다. 시 장르의 입장에서 보면 프로시사는 곧 프로문학의 관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아울러 프로문학 운동사라는 커다란 테두리로부터 그 내용성이 유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프로시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이 근대문학사 서술과정으로부터 배태되었음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분단 후 이데올로기적 편견 아래 카프나 프로문학 자체를 외면 내지 폄하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카프 맹원이었던 백철은 『신문학사조사』(1966)를 통해 프로문학의 형성배경 및 전개과정, 전향 후의 변모양상에 이르기까지를 일관된 문학사적 관심과 실증적인 자료 제시에 의해 기술한바 있다.2 프로시의 용어지금가지 이루어진 프로시의 논의과정에서 먼저 검토해야 할 사항은 개념들의 내포와 변별 기준의 문제이다. 논자들은 대체로 논의 대상인 카프의 활동을 전후한 시기에 나타난 일련의 경향을 지칭하는데 있어서 경향시, 카프시, 신경향파시, 프로시 등과 같이 다양한 명칭들을 사용함으로써 일관성이 결여된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경향시라는 용어는 개념상으로 볼 때 경향성을지닌 시라는 포괄적 의미로 이해된다. 김성윤은 『카프시 전집』(1988)의 머리말에서 편찬 대상작품을?1920년대 초반부터 카프가 해체되었던 1935년 이전까지의 시들로 카프맹원들의 작품뿐만 아니라,카프와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던 작가들의 시, 그리고 전문 창작가가 아닌 일반인의 시 중에서 경향시로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으로 규정한 바, 이 용어는 신경향파 시기와 카프 시기의 시들 사이에서 변별성을 고려하기 어려우며, 실제적 논의에 있어서, 작품들의 내적 특징보다 카프의조직 문제를 기분으로 한 결과, 경향성의 개념을 구체적인 시사상의 특정 유형에 적용 틀로 설명하는 데어려움을 보인다.이에 반해 카프시라는 용어는 ?카프 조직원의 시?로 명확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의 효율성을부여한다. 그러나 실제 논의에 있어서는 오히려 카프 조직을 전제로 하기보다는 계급 이데올로기라는 대상의 이념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프로시?와 대체되는 개념으로 사용함으로써 역시 전체적 특징에 대한 해명에이르는 기준으로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한편?계급시?라는 용어는 비록 그 내포상 프롤레타리아 계급성을 지칭하지만, 용어의 외연상 구체적인 대상을 상정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카프를 중심으로 한 문학의 성격을 계급주의로 규정하고, 그것을 당대의 민족주의 문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카프 발생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해 볼 때 프로문학운동의 내적 추동력에 있어서 민족주의적 지향을 배제했다고 볼 수만은 없다. 단지 그 내용이 민족의 계급적 상황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따름이다.3. 시기구분프로시의 시기 구분 문제는 프로시의 전개과정을 시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형태화할 것인가의 물음에 관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프로문학운동의 논리적 전개 추이와 그 방향성이 시 창작에 어떻게 연관되어발전했는가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즉 프로시라는 단일한 범주를 설정하고 그것을 단계화하여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창작의 지향과 논리적 뒷받침에 있어서의 일정한 변화, 발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기존의 논의가 대체로 카프 조직의 변모과정에서 비추어서 프로시의 변화를 살피려는 태도를 견지한 것도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프로시의 시기 구분은 보통 1927년 신경향파시기, 1929~30년까지의 목적의식기를 거쳐 볼셰비키와 과정,1930년 이후 본격적인 활성화 시기의 세단계로 파악되어진다.4. 프로시의 시사적 의미프로시가 1920년대 이후 한국 근대시사의 전개과정에 미친 영향은 개항 이후 사회 전반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출현한 자유시의 존재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자유시가 우리시의 형태를 혁신함으로써 시의 근대적 면모를 확보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프로시는 현실인식과 정치적 이념이라는 요소를 시의 창작 기초로 수용함으로써 서정장르로서 시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 기여한 점을 간과 할 수 없다이것은 근본적으로 프로시가 카프를 중심으로 한 구체적, 현실적 문학운동의 실천과정에서 배태된 집적물로의통일된 방향성을 지녔던 때문이다. 즉 프로시는 카프라는 규범적 조직의 정치적 지향 이념의 테두리에서끊임없이 시를 통한 실천으로 그것을 구체화시키고자 했으며, 동시에 시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계속적으로 확보해 나가는 것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구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시는 스스로?운동으로서의 문학?과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대립적인 가치를 함께 포괄하며, 또한 시적 전개과정에서 그것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로시의 시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은 그것이 문학운동으로서의 의미규정으로부터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동시에 우리 근대시사의 전통에 대한 의미관련으로부터도 독립된 것이 아니다.프로시의 사적전개과정을 프로문학 운동 전반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두드러지는 것은 우선 창작 주체로서의 시인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이라는 이념을 획득하고 그에 따른 계급의식을 강화시켜 나감으로써, 시의 목적성이 창작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즉 신경향파 시기를 거쳐 1, 2차방향전환에 이르는 운동상의 실천적 계기에 맞물려 프로시인들의 계급 이데올로기에 의한 현실의 조명을 자신의 내적 대응의 준거로 삼았던 바, 이것은 곧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의 창작방법에 의해규정된 것이다.한편 프로시는 근본적으로 독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역시 문학 창작을대중에게 전달시킨다는 운동상의 목적에 의거한 것이다. 임화의 단편서사시 창작에 의해 제기된 김기진의 대중화론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 독자 대중을 감화시켜야함을 강조한 것도 프로시의 창작 여건이 창작방법상의 지도와 관련하여 방향성을 획득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프로시의 사적전개는 카프조직의 변천과정에서 재기된 내?외부적 투쟁론과 병행하여 조명되는 것이며, 그 결과로서 작품이 갖는 시사적 의미가 검토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시 작품이 갖는 한계를 생경한 이데올로기의 표현에 의한 정치지향성과 과도한 감상성으로 지적하는 것은 프로문학 운동의 논리에 대한 일반적 수용을 경계하고 작품 자체의 논리를 중요시한 다는 점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문학운동 상의 이론투쟁 과정과 당대의 시시 속에서 프로시가 확보해나간 창작상의 논리가맺는 상호연관마저 사상해 버릴 위험성도 내포한다.프로시의 시사적 성과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제기하는 또 다른 요인은 이러한 운동의 이론적 토대와 사회적 전개양상을 자생적인 것이 아닌 외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데 있다. 즉 프로문학자체가 혁명기 러시아로부터 일본을 거쳐 굴절되어 수용된 것이라는 점에서 프로시를 전통적 시사의 중심에 놓기를꺼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시의 출발 자체가 일제 강점하의 사회적, 현실적 토대로부터 이루어진 것이고 보면, 이론적, 방법적 차원에서의 의식적 수용의 저변에는 민족적 삶의 현실에 대한 의식과 전망의 확보를 지향하는 정신적 토대가 자리잡고 있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민중들의 사회의식의 추이를 살펴볼 때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외래성의 여부, 즉 비교 문학적인 관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방법과 정신의 괴리가 단지 한계로서 시사속의 단절로 귀결되고 말았는가, 아니면 극 극복 양태로서 사적연속성을 새롭게 획득하고 있는가를 밝히는데 있다.
한국현대 시사 연구(1)???????????????????????????????????????????????????????????????????? 우리가 흔히 개화기라고 부르는 시기는 보통 1870년대~1910년대를 말하지만, 개화기 문학은 이보다는 조금 늦게 1890년대 이후 성립된다. 그 내용에서 개화기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는 개화기 문학은 산문에서는 역사?전기 문학과 이른바 신소설류가 그 중심이되고, 시가에서는 전통 시가의 형식을 계승한개화 가사, 개화기 시조와 외래 문화의 영향으로 새로이 소개된 시형인 창가와 신체기사 그중심을 이룬다개화가사 와 개화기 시조는 공통적으로 개화 의식에 대한 비판적 경계가 그 중심 주제를 이루면서 작가도 봉건적 인물이거나 미상인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 창가와 신체시는 개화기의 신흥 문물에 대한 찬양과 진취적인 시감을 드러내는 전문적 작가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 창가와 신체시는 개화기에 활발하게 설립된 각종 학교의 교가와 응원가 그리고 기독교의 찬송가와 서양식의 행진곡 등의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아 성립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대의 가사와 시조, 그리고 민요의 형식도 동시에 존재하고 그 어떤 하나의 형식이라고 볼 수 없는 이른바 자유시형을 지닌 시가도 다수 발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개화기 시가의 어떤 작품을 특정한 한 형식에 담아 두거나, 최초의 신체시 아니면 최초의 자유시 등으로 규정하는 것은 올바른 작품 이해의 방법이 되지 못한다.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1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태산 같은 농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나의 큰 힘 아느냐 모르느냐, 호통까지 하면서,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2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내게는 아무 두려움 없어,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무리 큰 물었다.그 형성시기부터 한국의 근대시는 아주 독특하고 개성적인 단면을 드러내어 주었다. 우선 한국의 근대시는그 형성 초기에서부터 표현매체의 개혁과 혁신에 선구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즉 한문어투와 문어체에 의해 상투어화하고 진부해진 고전시가의 표현방식을 지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거기에는 때로 순수 국어에 속하는어휘들이 대담하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국어국자에 대한 관심으로 규정 할 수 있다.본래 한민족의 문화활동에서 국어 국자운동의 대두는 그것을 근대화의 횃불을 드는 일에 비견시킬 수가 있다.서양의 여러나라의 근대 민족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그 민족국가의 구성원들이 제일 먼저 손을 뻗치기 시작한것이 자기 고유의 언어를 정비, 확립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런 정비, 확립의 단계를 거처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비로소 민족국가로서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살펴볼 때, 한국 근대시의국어국자에 대한 관심은 바로 그것이 근대화의 대로를 닦는 일에 비견될 수 있다. 한국의 근대시가 차지 할 수 있는보람내지 의의는 우선 여기에서부터 드러난다고 하겠다.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 근대시가 보여 준 문체, 형태에 대한 개혁시도다. 한국의 근대시는 그 형성에초기 단계에서부터 이와 같은 단면을 강하게 드러내어 준다. 이전 발표된 고전시가는 대개 형태가 3?4조나 4?4조의 잣수율를 기조로 한것이었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이 제작한 후기 창가 가운데 하나로 그 외형이 7?5조의 잣수율로나타난다. 이것으로 판단해 보건데 그 외형에서부터 개화기 시가들이 대담한 변혁을 감행한 단면을 읽어 낼 수 있다.또한 구문을 통해 다른 고전시가의 경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개화기 시가의확기성의 문체와 형태를 통해서도 확인 됨을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이다.형성기의 한국 근대시가를 문제삼는 경우 또하나 유의해야 할 것이 그 제작자와 제작의식의 변화현상이다.고전 문학기에 있어서 우리 문학과 시가는 서로 구분되어 두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들은 직접적이고 충동적일 뿐 정신의 질서와 정리에 기여할 수가 없었던것이다.한편, 지배계층은 서민계층의 빈터를 메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량을 보유한 쪽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잡다한 현상을 제 나름대로 해석?평가하고 체계?정리할 수 잇는 능력도 보유한 편이다. 그러나 풍류생활로서 즐겻을 뿐 생활현장에 서는 법이 었었다. 이런 작품들은 대체가 생활현장에서 거리를 지닌 것이되었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문학작품 또는 시가의 바람직한 제작의식 상태는 앞서 말한 지배계층의 상층,고급문하의식과 피지배계층의 일반, 기층문화의식의 효과적으로 융합?조합된 경우의 것이다. 그래야만 그 작품들이 생활과 현실을 수용한 가운데 우리 생활을 수집?체계화하는 정신의 불꽃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가 지나쳐 볼 수 없는 것이 한국의 근대시가 그 형성 초기에서부터 바로 이와 같은 단면을 드러내기 시작한 점이다. 한국의 근대시는 그 제작자들 계층을 개방시키는 단면을 드러냈다. 창가와 신체시의 단계를 거치면서 한국근대시의 제작 계층이 더욱 개방?통합되는 모습을 보였다.한국 근대시가 우리에게 까치는 보람은 그 제작자들을 살피는 경우에도 확인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한국 근대시사 위에는 당대의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인력이 동원되었다. 육당 최남선을 비롯한 여려 작가들은 한국의 문화와 문학에새로운 시야를 타개해 내었을 뿐 아니라 그 내면세계의 깊이나 넓이를 개척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당시우리 주변에서 가장 신선한 행동철학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을 실천해 낸 유능한 사회개혁운동가이기도 했다. 뿐만아니라그들은 그와 같은 정신세계의 일부는 바로 창가와 신체시에 집약되었다.한편 주요한과 김억은 한국 근대시의 본론화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분들이다. 일찍부터 그들은 해외 근대시의기법을 수용하고자했다. 이분들이 있기 전까지 우리시는 아직도 창가?신체시의 외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체였다.또한 개화계몽, 설교투의 군때를 시원스럽게 의 시는 예술적 추구경향이 강하게 일어났다모더니즘의 기치를 내걸고 나온 시인들은 이 범주에 속한다. 김영랑은 시문학적 순수서정시를 대표하는 양질의 작품을 남긴 시인이다. 그의 시는 민요조의 가락에 개성적인 감각을 담은 단형 소곡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이상은 격렬한 실험의 자취를 남긴 작품을 쓴 시인이다. 모더니즘와 작품의 진출 후 우리의 시는 언어의 미화에만집중하고 인간과 그 존재방식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하고드는 것과 거리를 지닌게 되었다. 서정주는 한결 본능과 충동을강하게 시의 제재로 수용하였으며, 유치환은 생의 바탕을 허무로 보면서, 그러나 끝내 생애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정신의 단면을 보여 준 시인이다.이육사와 윤동주의 시는 일제치하라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반영한다. 이들은 민족의 현실과 역사를 생각하는 양심의등불을 지킨 언어로 시를 쓴 시인이다. 이육사는 「절 정」의 작품을 통해 스스로를 역사의 소명에 응해 희생시킬 각오와결의의 자리에 몰아 넣었다.박목월, 박두진, 조지훈등은 일제가 우리말을 사용 금지시키기 바로 직전에 시단에 등장한 시일들이다. 이들은일제의 압박으로 인하여 민족의 현실이나 역사의식을 노래할 계제를 찾지 못하고, 자연에 작품의 자리를 설정해 내었다.그리고 가능한 한 한국어를 곱게 다듬어 쓰는 입장을 취했다.1945년 8월 15일 일제는 우리는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은 그와 동시에 극심한 혼란을 몰고 왔다. 그리고 이어 얼마 뒤에는 동족상잔의 슬픈 전란이 몰아 닥쳤다. 그리하여 한 동안 우리 시는 민족의 심금을 울릴깊이를 지닌 체험을 형상화할 겨를을 갖지 못했다. 이후 근대시는 새로운 지평을 맞이하게 된다. 우선 6. 25전쟁이후 한국의 근대시는 그 제작자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해 갔다. 그들은 그들만의 개성적 목소리와 만만치 않은패기를 가지고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고 자 힘썼다.또 하나의 한국 근대시의 역사적 의의를 논의 할때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일제치하이다. 우리는 한국근대시의효과적인 이해를 위해서 식민지적 질곡을 고려에 시와 소설을 다수 싣고 있으며, 1919년의 3.1 운동의 실패는 때마침유행하던 세기말적 풍조와 맞물려 많은 지식인 시인으로 하여금 허무와 좌절을 읋조리게 하였던 것이다 ?- 양승준, 양승국 『1996, 한국 현대시 400선 -1,1996』1900년대와 1910년대에 걸쳐 전개된 약 20년 간의 우리 문학에서 서사적 양식인 소설 쪽보다 서적적 양식인 창가, 가사, 신시 등이 우세한 현상을 보였다는 사실, 다시말해 서적적 양식 쪽이 일층 날카로운 현실인식을드러내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장르가 안고 있는 특징과 그 것의 변형관계를 염두에 두지 안으면안된다. 우리의 개화기 공간에 나탄난 육당의 창가인 「경부텰도 노래」라든가 신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등이 순정한 서정시에 해당되지 않는 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들시가는 리듬을 동반한 현실묘사의 한 방식임엔틀림이 없으나, 그 분절 방식이나, 길이나 규모에 있어 서정시의 인식 범주를 휠씬 웃도는 형태를 이루어 놓았다.다시말해 시의 일종이되, 서사적 양식에서 보는 저 수미일관성이나. 인간을 상호관계 속에 두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엔매우 미달된 형태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1900년대 시의 대표적인 작품을 「해에게게서 소년에게」로 본다면,시대적 요청으로 보여지는 육당의 계몽적 성격과 이 시의 형태의 관련 양상을 밝히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보여진다.한국의 계몽을 울리도록 제법 날카롭고 민감히 현실의 한부분을 포착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육당의 민감성이라든가, 당시의 한국적 계몽적인 으식 수준의 저차원에서 각각 관계없음은 아닐 터이나, 그에 못지 않은 요인으로서 육당이 시도한 여러 가지 시가의 형태적 특성에서도 연유되었던 것이다.저널리즘적 지식이 단편적 부분적임은 마치 소년기의 육당의 인생체험의 단편적 부분적인 성격과 엄밀한 대응관계성립시킨다. 동시에 그것은 시쟝르의, 현실적인 부분적이나 날카로움과 소년기의 감수성의 순산적이고 날카로움의 대응관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계몽적 성격인 지식 전달을 목적의 으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