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몇 달간의 유럽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동아일보에서 외국어 기사 편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나는 여느 때처럼 기사를 편집하는 작업을 하기위해 오늘의 기사들을 읽어보았다. 2년간 편집 일을 하면서 나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기억에 남는 기사들은 별로 없었는데, 그날따라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가 있었다.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이명박 후보가 한나라당에서 대선주자로 뽑힌 후, 당 색깔을 바꾸겠다는 기사도 아니었고, 서울공대에서 교수 시킬 사람이 없다며 신임교수 지원자 40명을 부적합 판정을 내려서 채용을 미뤘다는 기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올 초 ‘32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기사로 본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는‘인혁당 사건’에 대한 국가 보상 판결에 관한 것이었다.‘인혁당 사건 8명 유족에 245억 배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의 내용은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고 우홍선 씨 등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의 유가족들이 국가로부터 245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받게 되었다는 것, 더불어 32년간 이자까지 더해서 실제 유족들이 받는 금액은 시국사건에 관련한 국가 배상 중 최고액 612억여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이전부터 나는 아무리 억울하게 죽었어도 국가에서 보상받는 금액이 턱없이 적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기사를 읽고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처음에는 든 생각은 ‘내가 없는 몇 달 동안 우리나라에서 국가 보상액이 많아진 계기가 있었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도대체 인혁당 사건이 어떤 사건이길래 이런 판결을 받았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검색해 보았다.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이라는 대규모 지하조직에 의한 국가전복기도가 있었다고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으로 1975년 4월 8일 당시 8명이 사형 확정, 다음날 9일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었다. 이것만 읽고는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써오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푸른 혼] 이라는 소설 제목을 들었을 때, 작가는 알고 있었지만 처음 듣는 소설이름인데다가 주제 또한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당황했다.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학교에 갓 복학한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곧 인혁당 사건에 관련 된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 자체만으로도 나의 구미를 당기는 촉매제 역할로 충분하였다. 이런 기대 반으로 첫 책장을 열었기에 두꺼운 책을 단번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나의 생각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내가 단순히 ‘기사’안에서만 보았을 때의‘인혁당 사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은 객관성을 강조하는 ‘기사’와 작가 개인의 생각이 개입된 ‘소설’과의 차이점일 수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무표정인 ‘기사’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아픔’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남편을 잃은, 아들을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이었고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일반 시민들의 아픔을 깨달은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대를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억울하지만 어느 곳 하나 호소 할 곳도 없이 아픔을 참아야만 했다. 곪아 터진 가슴을 끓어 안고 산 지난 30여 년간은 살아도 살아 있지 못한 삶이었을 것이다. 내가 유족이었다면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의무감에서 오는 삶이었을 것이다. 죽은 이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푸른 혼]이라는 제목을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 뒤에야 인권을, 자유의 혼을 얻을 수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라고. 이것은 살아서 빨갱이로 몰려서 죽었지만, 혼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제목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더불어서, 죽은 혼만은 빨갱이가 아닌 ‘푸른 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유가족들이 떠오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한번은 어른들이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을 보았다. ‘과거사를 왜 들춰내서 저러는거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은 후 ‘왜 과거사 청산이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중요한 일인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끝내도 되는 것은 그렇게 끝내고, 명확히 규명해야 할 것은 규명해야 할 것 이다. 이러한 과거의 일을 반성하는 자세를 이끌어 내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미래를 이끌 우리의 후손에게도 다시는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이러한 만행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더불어서 나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무비판적인 소시민적 삶을 살고 있지 않았나?’하는 것이었다. 아직 짧다면 짧은 23년이라는 내 삶을 되짚어 보면, ‘믿을 수 있는 기관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맞겠지’혹은 ‘신문기사와 같은 방송 매체에서 다들 그러니까 그게 맞는 걸 거야’ 하는 안이한 생각들로 살아왔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수용해왔던 것이다. 문제는 나 같은 사람이 하나 둘이 모여서 이룬 사회는 결코 ‘인혁당 사건’과 같이 특정 권력에 의해서 꾸며진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된다 하더라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회는 과학이 발달한 정보화 사회일 뿐, 30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빚 좋은 개살구’와 같은 죽은 사회일 것이다. 그래서 나부터 오늘부터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 번 더 다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신문기사 편집 일을 할 때만이라도 신문기사에 적힌 내용을 그대로 수용 할 것이 아니라 미디어로 행해지는 또 다른 모습의 권력의 힘이 있는가에 여부에 초점을 두고 기사를 읽어 보겠다.나의 생각에 빗대어 본 문학사적 의의① 문학의 공리주의와 예술지향주의의 중용적 입장이전의 문학사를 되짚어보면 문학에 대한 생각은 크게 공리주의와 예술지향주의 두 가지로 생각 할 수 있다. 이것은 이광수와 김동인으로 대표 되는 문사적 예술가와 전문적 예술가에 대한 것으로 축약할 수 있다.첫 번째, 문학을 바라보는데 공리주의적 시각을 가진 이광수는 자신을 ‘문으로 두 여인을 이끄는 모습은 작가를 대변하는 ‘형식’이 선형과 영채로 대두되는 독자를 끌어내는 매카니즘으로 구성 되어 있다. 또한 그의 또 다른 작품 [개척자]에서도 봉건적 타파와 자유연애와 같은 새로운 사상을 독자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두 번째, 이러한 시각을 가진 이광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김동인 작가이다. 그는 문학작품은 ‘허구다’라고 말하고, 작가는 자신이 만든 인형의 조종술사에 불과 하며 소설의 공간은 그러한 인형들이 움직이는 곳이라는 현실과는 완벽하게 분리된 세계인 것이어야 한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문학작품은 미(美)를 추구하는데, 현실이 개입이 된다면 미(美)는 2차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로서의 전문가의 모습을 지닌 김동인 작품들은 당시의 현실을 배제하고 짓는 작품이니 만큼 당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공감이 되는 내용이다.이러한 두 가지 관점으로 봤을 때, [푸른 혼]은 이광수와 같이 ‘작가가 사회에 미치는 역할’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과거이기는 하나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지어진 이야기 이므로 ‘문학은 허구다’라고 본 김동인 쪽 보다는 이광수와 같은 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또한 소설 속에는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독백을 하는 장면에서 실명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지금 현재도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실화임을 알 수 있고 작가의 목적이 있어 보인다는 것 또한 그러한 생각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이광수 소설과 김원일의 [푸른 혼]을 비교를 해보면 이광수는 현실을 소설 속에 개입시키긴 했지만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쓰지 않았다. 단지 그의 사상을 선각자의 입장에서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문학을 이용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푸른 혼]은 작가 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일깨워 줘야하는 선각자의 입장으로라고는 보기 힘들고 단지, 숨겨진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식으로 소설을 구성하였다. 또한 작가 자신.하지만, 작가가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유가족들의 ‘아픔’과 자신에 대한 반성적 시간,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 등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광수가 의도적으로 독자들에게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면, 이 부분이 그와 다른 점이다. 과거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들이 행하여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과거사 규명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과 더불어 자기반성에까지 도달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은 이광수와는 또 다른 의의라고 할 수 있다.독자들에게 '아픔'을 전해주는 것, 이것은 작가가 예술가로서의 전문가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선구적 역할을 했던 김동인과도 유사점이 보인다.사회적, 정치적 색깔을 띠지 않고 글만 쓰는 소설가의 모습으로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소설 속에 감정의 영역(미묘한 변화)을 건드렸다는 것이 바로 유사점이다. 개인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은 채 사회적 의무만을 강조한 이광수의 소설과는 달리 김동인의 소설은 개인적인 내용들이 다뤄진다. 이것들을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표현이 되었는데, [푸른 혼]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주인공들의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로 인한 가족들의 심경과 그의 입장을 잘 말해주고 있다. 또한 [푸른 혼] 다섯 번째 이야기는 영혼들이 만나서 대화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실제 일어날 수 없는 일로 주인공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만을 말할 뿐 사회에 대한 어떠한 개입도 시키지 않았던 김동인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개인의 사건으로 당대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순적 구조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② 위대한 시대를 조명 (1970년대가 왜 문학사적으로 위대한 시대가 되었는가)위대한 시대가 되려면 두 가지가 충족 되어야 하는데, 그 첫째가 시대배경이고 둘째가 천재의 존재 여부이다. 이로 비추어볼 때 1930년대와 1970년대는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시대로 위대한 시인다.
제 3장소크라테스는, 이상국의 근본은 수호자의 인격양성이 관건이라는 것과 이런 인격완성을 위한 교육으로는 시가, 음악, 체육에 걸쳐 이루어져야한다고 한다. 3장의 전개는 수호자에게 어떤 것을 들려주고, 들려주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해 대화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단, 여기에서 말하는 수호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넓은 의미의 수호자라는 말은 밖으로 나라를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으로 국민 상호간의 평화를 유지하게끔 하는 한층 높은 계급에게만 주어져야 한다는 말을 한다.신들과 부모를 존경하고 친구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하려면 죽음의 공포와 관련된 ‘두려움’에 대해서는 들려주어서는 안 된다. 라는 말을 한다. 이는 그렇게 될 경우에 t호자들이 지나치게 흥분을 하거나 나약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애통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한다.통치자로서 수호자는 공익을 위해 거짓말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진리의 높은 평가 실현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통치자 이외에 거짓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대중에게 있어서의 절제란 명령자에 대해 복종을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식욕, 정욕에 대해 스스로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에게는 유명한 사람들의 참을성 있는 행동들에 대한 행적을 들려줌으로써 그들은 배우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수호자는 뇌물을 받고 돈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다.시인, 소설가들이 정의는 當者의 해가 되고 남에게는 득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과오이고 그것들은 막아야하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또한 이들로 하여금 반대의 것 - 정의는 당자에게 이익이 되고 남에게 해가 된다. - 을 말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이야기하는 자가 필히 택해야하는 모범적 형태로써 시의 표현법에 있어서도 모방이 아니라 단순한 서술을 권한다. 소크라테스는 문학에 대한 검열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이는 그가 문화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천성이 시의 서술이나 모방을 통해 모든 것을 모방하고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 없다고 한다. 수호자는 국가 수호에 전념해야 하고 용감하고 절도 있고 존경받을 만한 이들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한다.수호자들에게는 위기의 순간에 결단을 내릴 때나 평화 시의 하모니와 용감한 사람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리듬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한다. 단, 이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아름답고 양순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광경과 음향 속에서 모든 것의 선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건강한 고장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소크라테스는 노래와 송시가 언어와 선율 그리고 운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비탄하고 애통하는 가락은 버려야 한다고 한다. 가락 중에 술에 취한 것, 그리고 유약하고 나태한 것은 수호자의 성격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두 가락은 그대로 남겨 놓아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데, 곧 불가피할 때의 음조와 또한 평화의 음조이고 불행의 가락과 또한 행운의 가락이고, 용기의 가락이며 또한 절제의 가락이라고 한다. 그는 가락 다음에는 운율이 따르고 이것이 용기 롭고 조화된 생활의 표현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볼 것을 말한다. 젊은이들이 이것에 대해 바르게 생각을 한다면 그들은 우아함과 조화된 것을 글의 영원한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고 그렇게 된다면 다른 창조적, 건설적 기능들은 그러한 것들로 충만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이로써 예술가들은 아름다움과 우아한 것의 진정한 성질을 알아볼 수 있는 양질의 재질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고 한다.음악교육은 다른 것보다 유력한 수단이며, 운율이나 화음이 정신 속 깊이 찾아들어서 거기에서 힘차게 뿌리박고 우아함을 심어주고, 올바르게 교육된 자에게는 우아함을,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추악함을 알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교육을 받은 자는 민첩하게 예술이나 자연에 있어서 누락된 안목을 갖고 그가 찬미하고 즐길 때 그는 선을 받아들이고 도리를 깨달았을 때에는 교육을 통해 친숙해진 오랜 친구를 알아보고 환영할 것이라고 한다. 올바른 음악적 수련은 정신을 우아하게 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절제에 유약해져서 식욕, 정욕에 관한 우를 범할 수 있다고 한다.체육에 있어서 그 훈련은 세심하고 그리고 일생을 통해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또한 그는 훌륭한 정신이 그 자신의 뛰어남으로 하여 가능한 한 육체를 발전시킨다는 말을 한다. 이것 또한 수호자가 갖춰야 하는 것 중에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가변적 요건이 있는 전쟁에서 이기고 건강이 꺾이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수호자는 용감하고 온순한 성품을 둘 다 지녀야한다고 한다. 이 둘이 조화를 이루어야지, 음악에만 매료되어 인생을 기개 없이 유약하게 보내거나, 체육에만 힘써 음악적인 교양이나 문화와도 멀어지게 되어선 안 된다. 무절제와 질병이 국가에서 늘어날 때 법정과 병원은 늘 문을 열어야 하고 이러한 것은 명예롭지 못한 국가의 증거가 되므로 진정으로 자기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국가가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라는 것을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은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각자 그 사람에게 적당한 직분이 주어진 사회가 이상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모든 국가가 이상적이진 않기 때문에 의사와 법률가가 필요한데 의사는 직접 앓아본 사람이 환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법률가는 나이가 많고 악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좋다고 말한다. 수호자의 생활 방식은 그들 자신의 재산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 되고 병영에서 병사들과 공동생활을 한다.제 4장앞에 3권에서는 수호자의 역할과, 그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4권부터는 국가를 유덕하게 하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네 가지 성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앞에서는 거론 되지 않았던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급과 그들의 역할을 개인의 정신에 있어 세 가지의 기능과 대치하고 있다.이전까지 수호자를 중점으로 알아보던 터라 다른 계급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을 해야 올바르고 정의로운 삶이 될지 궁금하게 되었다.우선 그가 주장한 정의의 네 가지 성질 중에서 지혜에 대해서 알아보자.“지혜” 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나의 생각은 단순히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극복 할 수 있는 힘’ 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나라 안에서 정치를 할 때 이것은 어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어느 누구 희생 되지 않는 최선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 최우선이다.우리가 앞서 창건한 국가에 있어서 국민들 사이에 국가에 있어 어떤 특수한 것이 아니라 전체에 관해서 충고하고 또한 어떻게 자국내정과 다른 나라들을 다루어 나가야 하는지, 여기에 관해서는 어떤 지식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 최소의 부분 또는 계층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지도하고 지배하는 부분 자체에 내제하는 지식이라는 것 때문에 전체 국가는 이처럼 자연에 따라 구성된 마당에 있어서는 지혜로운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용기”라는 것은 두려워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의견을 얻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내가 생각하는 “용기”와 그가 주장한 “용기”는 일맥상통 하는 부분이 있다. 어떠한 유혹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흔들림이 없이 지켜나가야 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참아내며 지조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대체 그것이 무엇이고 또한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법이 교육을 통해 마음에 심어놓는다.소크라테스는 병사들을 뽑고 음악과 체육을 가르치는 그 이유를 그들로 하여금 법이라는 색깔에 의해 완전하게 염색되도록 그들을 미리 마련하는 데 있어서의 영향을 생각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짜 및 가짜 위험에 관한 법칙과 일치되는 진정한 의견을 얻어내는 보편적인 힘을 또한 용기라고 할 수 있다.공자 또한 세속적 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강조 하였는데, 법적으로는 죄인일지라도, 도의 관점에서 잘못이 없을 때는 인간 양심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있다.공자의 이 관점은 양심을 지키면서, 지조 있게 살라는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비슷한 부분이다.“절제”어떤 쾌락이나 욕망을 질서잡고 통제하는 것이다. 보다 나은 것이 보다 못한 것을 통제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고 이것은 칭찬 하는 말이다.
제 1권이야기는 밴디스 여신의 축제가 있는 날, 소크라테스가 베이라이에우스로 갔다가 포레마르코스의 집에 초대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곳에서 케파로스와 늙음 과 재산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의구심을 품게 됨으로써 이에 대한 사람들의 토론이 이루어진다.우선, 케파로스 노쇠하고 고령에 달한 사람으로, 소크라테스는 과연 그러한 고령은 인생의 고달픈 시기인지 궁금해 한다. 케파로스는 대부분의 노령에 달한 사람들은 통탄하고 비탄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며 소포클레스의 말을 예로 들며 노령을 광폭하고 사나운 한 폭군으로부터 겨우 빠져나온 것 과 같이 느낀다고 하였다.케파로스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늙음에 대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단지 노령 탓이 아닌 성격 탓이라는 의견을 말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케파로스의 늙는다에 관한 생각은 단지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케파로스는 재산에 대한 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많은 재산이 남을 속이고 사기 치거나 빚을 지지 않고 평온하게 그리고 정의롭게 살수 있는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그러고 나서 핀다로스가 말한 희망이 늙음을 달래주는 내용의 시를 말한다. 거기서부터 소 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한 논의로 주제를 옮긴다.여기서부터 케파로스가 대화에서 빠지고, 그의 아들인 포레마르코스가 토론에 참여하는데, 포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부채를 갚는 것이 곧 정의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에게는 이익을, 적에게는 해악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결론 내린다. 이것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친구와 적의 구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외관상의 느낌을 말하는 것인지 묻는다.이에 포레마르코스는 친구란 진실로도 외관상으로도 선한 자를 친구라 한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포레마르코스에게 인간의 본성에 무지한 사람들이 이러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한 채 친구를 사귀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정의를 빚을 갚는 데서 이루어지고 친구에게 진 빚을 선으로서 적에게 진 빚을 악으로 갚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임을 일깨워 준다.건조가 습기를 생산하지 못하듯이 정의로운 사람은 사람을 해칠 수 없고, 그 반대되는 자인 부정한 자의 짓으로 누구를 해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정당치 않다 말하고 처음 포레마르코스가 생각한 정의는 부유하고 세력 있는 자들의 생각일 뿐이라며 정의(正義)에 관한 이 정의(定義)가 무너지면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지 묻는다.소크라테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트라시마코스가 다른 이의 의견을 묻고 반박만 하고 정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를 진정시키고 그에게 정의를 배우기를 요청한다.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지배자의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에 해가되는 법을 제정하면 지배자는 강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또한 소크라테스는 여러 가지 기술의 쓰임에 관한 질문을 통해 어떤 지배도 지배자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이익이 되는 것 또는 자기의 기술에 적합한 것을 명령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기술의 입장은 지배자의 입장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며 양치기를 예로 든다. 그에게 있어 정의는 지배자에겐 이익이 되고 고용인에겐 불리하다는 것이며 부정은 그와 반대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언제나 부정한 자와 비교해서 패자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모든 국가에 있어서 정의에 관한 동일한 원칙이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곧 그가 말하는 정의라 한다. 소크라테스는 기술은 대상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며 지배자로 간주할 수 있는 지배자의 기술은 국가에서나 사생활 에서나 그의 자녀나 국민의 이익만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배자의 보수의 형태는 금전 명예거부에 대한 벌이라는 세 가지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통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진해서 공직을 맡게 된다는 것이다.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덕이라 하고 부정을 악이라고 주장한다.정당한 사람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능가 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한다. 반면, 주정한자는 자기와 같거나 말거나 다 능가하려 한다 는 결론을 끌어낸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공정한 자는 현명하고 훌륭한 자이며 부정한 자는 악하고 무지한 자로 분류된다고 말한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정의는 지혜며 부정은 무지이다. 또한 부정은 증오를 가져오고 정의는 우애를 낳는다고 말한다. 정의로운 자가 부정한자보다 지혜나 덕에 있어서 또는 실력행사에 있어서 행동의 통일이 되지 않는 부정한 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부정한 자가 올바른 자보다 행복한 삶을 산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이야기에 소크라테스는 어떤 것이든지 목적이나 용도가 있고, 그것은 다른 것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와 같은 것이 고유의 덕이라고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 또한 덕이라는 우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에서 그 고유의 덕이 결여 되었을 때 그 기능을 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소크라테스의 이러한 결론에, 정의라는 것은 정신의 덕이고, 부정은 정신의 결여라는 것에 다들 인정하게 된다. 따라서 올바른 자는 행복하고 무지한 자는 비참하다 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비참보다 행복이 더 유익하므로 정의가 부정보다는 이롭다는 것에 도달한다.제 2권그라우콘은 부정을 행하는 것은 선이고 부정을 당하는 것은 악이라고 한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고달픈 것이고 그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기피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정을 행하고 당한 당하는 가운데 그리고 다같이 경험해보고 한쪽만을 피하고 다른 것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합의를 통해서 상호계약을 맺는다. 법을 통해서만 합리성과 공정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정의는 양자의 중간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선이 아니라 차선이라 한다. 즉 이익을 발생하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부정을 행하는 사람이나 부정을 당하는 사람, 양자에게 자연적인 것들은 그들의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오직 법의 힘에 의해서만 정의의 길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또한 리디아인 코레오서스 조상인 기게스의 예를 통해 인간이라는 것은 자진해서 또는 정의는 인간에게 유별나게 좋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불가피하다는 데서 정의를 지켜나간다고 말한다.그러면 이들의 삶은 진정 어떠한가? 정의로운 자와 부정한 자의 생에 관한 진실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들은 완전히 분리할 수밖에 없다. 먼저 부정한 자를 기술을 가진 거장에 비교한다면 그는 아무리 부정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그의 힘과 친분, 기술, 인맥을 통해서 그의 부정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그는 최고의 명성을 얻는다. 즉 외관상으로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반면 정의로운 자는 정의만을 몸차림하여 세상 다른 djEJs 부와도 관련이 없고 그가 최고의 인물이면서도 최악의 인물인 양 생각되는 자라면 사람들은 과연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까? 정의로운 사람은 매맞고 고문당하고 결박되고 그의 눈은 타버릴 것이고 그리고 최후에는 모든 고생 끝에 처형되고, 그 때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만 보였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고 부정한 자는 현실적이다. 외관을 고려하면서 사람에게는 명성을 얻고 신들에게는 풍성하고 장대한 희생과 공납을 바쳐서, 정의로운 자보다 신의 은총을 더 받을 것이라 말한다.아데이만토스는 그 동생의 대화를 좀 보충해서 정의를 행하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격과 명성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 말한다. 즉 아데만토스의 주장은 앞에서 선의 종류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아데이만토스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 정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정의와 덕은 명예롭지만 괴롭고 힘이 들고 악과 부정은 손쉽고 오직 법과 소문에 의해 질책을 받는다고 했다. 정의는 부정보다 소득이 적고 덜 행복하다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정의가 훌륭하다고 하지만 멸시하고 무시한다. 아무리 진실하고 정의롭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면 이득이란 하나도 없을 것이고 오히려 고통과 손해만 본다고 말하고 부정하더라도 정의롭다는 평가만 얻어낸다면 천국과 같은 인생이 나에게 약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인물에 있어서 가문이나 재산에 있어서나 조금이라도 뛰어난 자라면 자진해서 정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기록에 남은 고대 영웅들로 시작해서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의의 찬미자 가운데 부정을 비난한 자가 없었으며, 정의로부터 나오는 영광과 명예 그리고 이득을 제외하고는 정의를 예찬한 자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역사적으로도 정의가 최고의 선이고 부정이 최악이라는 것을 보여준 예가 없었음을 놀라한다.
이웃 - 노만 맥라렌노만 멕라닌은 그 꽃을 갖기 위해 울타리를 치지만 안았어도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수록 두 남자는 인간이 아닌 악마의 모습으로 변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진리는 지켜지기 힘들어 보인다. 작가의 반전평화적인 사상을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재미있게 창작했다는 것에 더욱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두 이웃이 과격한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모두 파멸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웃’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저 영화 만들려면 엄청 힘들었겠다.’ 하는 것이었다.One of Those Days, How to Kiss, 25 Ways To Quit Smoking -빌 플림튼One of Those Days는 보면서 정말 끔찍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면도하다가 코 자르고 불에 지지고 청소기에 발 들어가고 진짜 재수 옴 붙은 그런 날을 일상처럼 표현 한 것인지? 그냥 상상하는 데로 표현 하는 것인지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은 참으로 쉬우면서도 난해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도대체 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단순히 신기한 것, 새로운 상상, 그것을 표현하는 것 등등에 감탄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진지한 작가만의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How to Kiss 는 정말 특이한 영화였다. 두 남녀가 나와 여러 가지 키스를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정말 다양했다. 딥 키스, 프렌치 키스 등을 하는 주인공들은 어느 순간 머리를 먹기도 하고.... 신기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작가의 상상력이 여과 없이 드러난 작품이었다.‘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하는 의구심과, 존경심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25 Ways To Quit Smoking 또한 기억에 남는 것이 참 많다.이것을 보면 담배 끊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작가의 상상력에 박수를~~사우스 파크 - 트레이 파커, 맷 스톤이 영화는 한마디로 ‘엽기’다. 정말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이것 또한 애니메이션이만든 두 명의 감독은 처음에 장난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예상밖의 흥행으로 이렇게 까지 되었다고 한다.오프닝의 가사를 들어본다면 가시 돋친 말들이 숨겨져 있다. 영화는 많은 부분 과장스런 현실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비판의 강도도 지나치게 신랄해 지옥에서 악마의 마음을 뺏어버린 후세인이나 윈도우98의 버그 때문에 즉결 처형되는 빌 게이츠와 같이 특정인물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은 통쾌하다 못해 사뭇 충격적이다.한편의 뮤지컬 같은 느낌은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비슷하지만, 귀여운 캐릭터가 아기를 발로 차서 집안에 던져놓으며 욕을 퍼붓는 과격하고 대담한 장면 등은 건전한 디즈니 만화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디즈니 만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런 점들이 조금 낯설긴 했지만 날카로운 독설과 상상할 수 없는 욕설이 난무하는 이 영화에는 꿈과 희망만을 노래하던 만화영화와는 비할 수 없는 불건전하지만 불쾌하지 만은 않은 짜릿함이 있다.정말 귀여운 파우스트- 에밀콜사상 처음으로 사람모습을 한 캐릭터가 등장한 애니메이션이란다.리틀 니모, 공룡 거티, 모기이야기, 루스타니호의 침몰리틀니모는리틀 니모는 옛날 애니메이션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어찌보면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오묘하기도 한 작품이다.이런 신기한 작품을 보게 되어서 정말 기뻤다.어디서 이런 것들을 볼 수 있겠는가! 애니메이션의 이해 수업을 듣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몰랐다.모기이야기는 모기가 사람의 얼굴에서 피를 빨아 먹다가 너무 많이 먹어서 날지도 못하고 배가 너무 불러와서 펑 하고 터져버리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모기의 움직임 특히 날갯짓이라든지 다리의 움직임 눈의 모습은 옛날 애니메이션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한 부드러움을 가진 애니메이션이다.공룡 거티 그의 애니메이션 중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 중의 하나다.실제 이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면서 멕케이는 화면속의 공룡거티와 말을 하고 조련사나 된 것처럼 행동하며 새로운 형식의 애니메이션 상영을 시도한 사람이었다.공룡거티는 거대한 동물이 바위 뒤에서 같다.다큐멘터리의 색채가 강해서인지, 사건 자체가 암울해서인지 몰라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기분이 많이 침체됐다.비비스와 버트헤드 -마이크 저지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먹었다. 눈감고 왼손으로 그린 듯한 펜 선과 엉성한 구도, 도대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메인 캐릭터 등 (여태껏 이쁘고 귀여운 캐릭터들만 익숙해서)은 어떻게 이 애니메이션이 미국에서 그리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나하는 의문도 만들었다.미국의 어떤 평론은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보고 이렇게 한마디로 평했다고 한다. '볼 것 없는 백인 쓰레기 문화'.난 미국엔 한번도 안 가봤고, 아직도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백인들 보면 괜히 한번 쳐다보는 '촌놈'이라서 '백인 쓰레기 문화'란 게 어떤 건지 확실히 감은 안 잡히지만, 뭐 그간 접해온 미국영화들에서 약간의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하지만, 문제는 이런 쓰레기 문화를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정말로 하나같이 전부다 진짜로 바보같다.하지만 아무래도 좀 이상한 것이 자기들의 이름도 제대로 못 읽고, 혹 읽더라도 자기들하고 이름이 똑같다면서 낄낄거리고, MASTER CONTROL을 '마스터베이션'으로 읽는, 이 정말로 멍청한 두 주인공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생화학무기의 위험으로부터 미국을 구해내고 대통령 으로부터 직접 상장을 받는다.비비스와 버트헤드가 하는 말도 순 욕 투성이다. 욕을 비롯하여 섹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그대로 반영된 그 애들이 하는 짓거리는 고매하고 점잖으신 분들이 보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겠다.권위 있어 보이는 우리의 교장선생님과는 달리, 이 뚱보 아저씨는 모텔에서 매저키즘을 즐기다가 비비스와 버트헤드에게 들키고 만다.우리의 자랑스러운 양아치인 비비스와 버트헤드는 이런 권위와 기만 사이를 유유히 돌아다니면서 자신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서도 그들을 충분히 골탕 먹이는데 성공한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 하야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히로의 행방불명은 2001년 작품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년의 작품이 될 것 같다. 이제 은퇴를 준비 한다고 들었다. 영화는 시골로 이사를 오던 치히로의 가족은 이상한 산길로 접어들고 거기에서 이상한 통로를 지나자 귀신들의 마을로 들어선다. 여기서 부모님들은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되고 치히로는 센의 도움을 받아서 온천에서 일하게 된다. 이 온천은 800만 실들의 휴식처로 신들이 온천을 즐기러 오는 곳이다. 평화로운 온천장에는 치히로가 들어오고 나서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10리 밖에서도 악취를 풍기는 오물신이 찾아오는가 하면, 조용히 지내던 얼굴없는 요괴가 금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며 종업원들을 현혹시킨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던 어느 날용으로 변했던 하쿠가 상처를 입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치히로는 가마할아범의 도움으로 생과 사의 갈림길을 운행하는 죽음의 기차에 오른다. 오직 편도만이 운행되는 기차였지만 지금껏 자신을 돌봐준 하쿠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부모님을 마법에서 풀리게 하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 없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는 달리 용감해진 치히로는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기찻길을 따라 마법사의 언니를 찾아 간다. 치히로는 마녀의 언니를 만나 갈등을 해소하게 되고 치히로는 자신의 부모님을 구하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하야오 감독의 전매특허인 비행신이 나오고 실사 같은 아름다운 배경, 바람과 자연이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처음 문화개방을 앞두고 엄청난 진통을 겪은 것에 비해선 우리의 문화에 쉽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좋은 품질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 한다. 특히 하야오 감독은 휴머니즘이라는 인류의 공통된 사상을 주테마로 하는 명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에는 특별히 제국주의적인 코드는 보이지 않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이 보는 것보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더 낫다고 생각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야 말로 제국주의의 표본이라고 불 소재를 생각해 냈을까? 일본인들의 생각이란...역시 애니메이션의 강국은 다른 것인가?처음부터 끝까지 웃음 밖에 안 나왔다. 현 일본사회에 대한 풍자가 작품 전체에 배어있는 듯 하다. 이 이야기는 인물의 지극히 현실 고정적인 시각이 일으키는 사건들을 통해 일본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 듯 하다.노부오는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인물인데 그러던 어느 날 독감에 걸리고 만다. 새로운 제품들을 계속 써도 낫지 않던 노부오는 현실은 그가 처한 상황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쪽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의 시각은 여전히 현실로만 얽매여있고, 그는 동료가 가르쳐 주었지만 눈 앞에 놓인 현실인 파란 병 속의 빨간 캡슐만을 쫒게 된다.그의 현실 고정적인 시각으로 인해 결국 그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혼란이 도래한다. 그 혼란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테두리 속에서 발버둥친다.여기서 노부오가 보여주는 지극히 임시방편 적인 사고방식 은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하나의 분위기로서도 느껴진다. 군부는 노부오 를 잡기위해 훗일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순간 대처의 방법으로 거대한 병력을 소모하고, 엄청난 시설을 파괴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현실의 상황' 이었던 것이다. 노부오가 군대의 공격에 허둥지둥 쫓기는 모습은 그냥 웃어 넘겨 버리기엔 조금 씁쓸한 장면이었다. 현실에 쫓기면 서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나약한 모습이 어렴풋이 비쳐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프린스 앤 프린세스단지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한 내용이려니 생각했다.하지만 이것은 여느 공주, 왕자 이야기와는 달랐다.우선 여러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이 되어있고 또 중간에 쉬는 시간도 있었다.^^;참 신기했는데...내용도 재미있었다.그 중에서 싱싱한 무화과의 맛과 바보스러우리만치 순수한 소년의 정성에 감복해버린 거만한 여왕 편에서는 역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법칙을 그대로 따른 장면이었다.황당.
달과 6펜스, 이 둘은 같은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속성이 전혀 다른 원(圓)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달'은 이상, 예술을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광기(光氣) 혹은 광기(狂氣)이며 스트릭랜드를 그림에 대한 정열로 이끄는 예술적 창조 욕구를 말한다. 이에 반해 '6펜스'는 화폐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현실, 즉 스트릭랜드가 버린 일상 세계의 생활이나 세속적 규율 및 인습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예술의 세계와 일상 세계의 대립,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이중성과 대립은 스트릭랜드의 인간성에도 나타난다.그는 예술지상주의의 화신이라고 할 만한 인물인 동시에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생을 살아간 인간이다.가족을 등지고 홀연히 자신의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가 하면, 어려운 시절에 자신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들(스트로브 부부)을 배신하며 그들을 예술적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이렇듯, 저자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를 지독한 이기주의자에 냉소주의자, 파렴치범으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스트릭랜드를 진정으로 비난하는 것 일까?저자가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딘가에 사로잡힌 영혼은 아름답다’라는 것이다.태어났으니까 마지못해 사는 인생들, 뚜렷한 목표 없이 속세의 홍수 속에서 겉잡을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 우리는 그의 비윤리성을 탓할 수 없고, 반사회적인 모습을 비난할 수 없다.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도덕만이 인류를 고귀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 된다는 도덕적 규율은 언제나 사람에게 죄의식만 심어주고 인간을 퇴폐하게 만드는 장치로 전락하게 되어버린다.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격식을 차리는 고상한 인물로 표현 되고 있는 스트릭랜드의 부인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추구 되어지는 도덕적 인물상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인상이 풍겨진다.반면에, 스트릭랜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성의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독특한 개성을 지닌 그의 모습을 더욱더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저자는 스트릭랜드 부부의 모습을 표현하며, 도덕적 규율의 이중성은 인간사회와, 인간 내부에 있는 양면성과 모순을 표현하고 이 또한 하나의 인격체를 완성하는 중요한 부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진실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그 아름다움에 가치가 있다고 정의 하고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나 아브라함 덕분으로 입신양명한 알렉 카마이클은 자신들의 허영과 안락을 위해서 아름다움을 희생 시키고 있는 인물로 표현한 것이다.하지만, 예술을 위한 삶을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의 고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명제이기는 해도 이토록 흔치 않은 극단적인 예를 들면서 탐미주의적인 글로 이것을 표현 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또한 저자 서머싯 몸은 스트릭랜드의 입을 통해 여성비하를 천연덕스럽게 한다는 것에서 요즘의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노발대발 하게끔 만들고 나의 눈살도 찌푸려지게 하는데,“여자들이란 한 번 좋아지면 그 상대방 남자의 영혼까지 차지해야 직성이 풀린단 말이오. 왜냐하면 여자는 약하니까 어떻게든지 지배권을 잡으려고 날뛰는 거지. 그렇게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거요. 여자들의 마음은 좁기 때문에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일은 싫어하지. 물질적인 일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이상에 대해서는 시기심을 갖게 마련이오. 남자의 영혼은 우주의 끝까지 헤매고 다녀도 싫증을 모르는데, 여자는 그것을 자신의 가계부라는 틀 속에 가두려는 거요. 당신도 우리 마누라를 잘 알고 있잖소? 블랑슈가 조금씩 온갖 계책을 부리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알았지. 참으로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올가미를 씌워 나를 묶어 놓을 작정이었어. 자기 수준으로 날 끌어내리려고 했던 거요. 나라는 존재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오직 나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했을 뿐이오. 그녀는 나를 위해 무슨 일이고 기꺼이 해줬지만, 내가 원하는 단 한 가지만은 예외였지. 즉 나를 가만히 내버려 달라는 것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