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학기 지리조사법 답사보고서목차Ⅰ. 개괄Ⅱ. 화산지형Ⅲ. 기타지형Ⅳ. 나가는 글※ 참고문헌◎ 답사일정 : 2011년 5월 27일~28일◎ 답사장소 : 철원, 연천, 전곡 (승일교, 고석정, 대교협곡, 차탄천 일대 등)대교협곡, 고석정, 승일교선상지주상절리6-Ⅰ. 개괄원산의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을 거쳐 서해안까지 전개된 좁고 낮은 긴 골짜기인 추가령 구조곡 또는 추가령 열곡은 경원선이 통과하고 있다.(네이버 백과사전) 평강 서남측의 압산(鴨山)에서부터 분출한 4기 현무암 용암은 추가령 열곡의 주방향을 따라 열하 분출의 형태를 이루었으며, 이 지역의 많은 계곡과 저지를 메우고, 일부는 한탄강을 따라 흘러내려 임진강에 이르렀다. (이민부 외, 2004b: 834)용암대지로 덮이기 이전의 철원-평강 지역은 추가령 열곡의 일부로서 유역 대부분의 하계는 한탄강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화산 분출에 의한 용암대지는 주로 한탄강을 흘러내리면서 임진강에 도달하게 되었다. 철원, 연천, 전곡 일대는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 형성된 이러한 용암 지형과 용암지형 형성 이전의 원하천지형이 공존하고 있다.Ⅱ. 화산지형1. 용암대지그림1. 현무암화성암 중 분출암의 하나로 SiO2의 함량이 52%미만높은 온도에서 분출하여 결정이 보이지 않는다.그림2. 승일교 옆 용암대지그림3. 사진의 좌측은 화강암만이 발견되고, 우측은 기반암인 화강암을 현무암이 덮어 용암대지를 이루고 있다.철원 일대를 답사하는 동안 현무암(그림1)으로 이루어진 용암대지를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그림2). 현무암으로 된 용암의 흐름은 추가령과 전곡 등지의 낮은 골짜기를 메워 철원 ·평강 용암대지를 형성하게 되었고 기반을 이룬 화강암 또는 화강편마암 지층 위에 현무암이 두껍게 퇴적되어 있다. 철원-평강 용암대지는 한탄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길이 약 95km, 면적 약 125㎢이다.(이민부 외, 2004b: 834)고석정 일대는 용암대지의 일부가 하천 쪽에 이르러서 절리를 따라 형성된 수직곡벽(김주 존재한 화강암이 동시에 나타나는 곳으로 기반암 위에 용암이 흘러와 덮인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림3에서 볼 수 있듯이 고석정 주변은 비대칭적인 지형이 나타나는데 한쪽은 수직, 수평 절리가 다양하게 분포하는 화강암 기반암이 보이고, 한 쪽은 현무암에 의한 용암대지가 나타난다. 식생이 많이 자라서 육안으로 자세히 확인할 수 없지만 현무암이 그림3에서 볼 때 우측 부분은 화강암과 현무암, 그리고 현무암과 현무암 위에 퇴적 또는 풍화된 토양층의 경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고석정 주변 화강암 기반암에서는 강력하게 작용하는 힘과 용암으로 인해 변성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는데(그림4, 5) 주변 곳곳에서 엽리와 주름진 흔적 등이 관찰된다.그림4. 화강암의 엽리 및 지의류그림5. 화강암의 변성 흔적그림6 농경지가 잘 발달된 철원그림7 대교천 옆 농경지 어디까지가 용암대지인지는 경관을 통해서 알 수 없으며, 조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한편 철원 지역은 그림6의 지도에서처럼 하천 주변이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어 철원 오대쌀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벼를 재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흔히 하는 오류가 논농사가 진행되는 곳 모두가 용암대지일거라고 하는 생각인데, 실제로 평평한 곳 전부가 용암대지는 아니며 곳에 따라서 60m밖에 안 되는 지역도 많다고 한다. 벼를 재배하는 곳은 운적토일 것으로 추측된다.2. 백의리층은대리 일대는 선캄브리아대 연천군층의 변성퇴적암류가 기반암을 이루고 있으며, 이 기반암 위에는 두께 20-40m의 신생대 제4기 현무암이 평탄한 용암대지를 형성하고 있다(이민부 외, 2004a: 100). 백의리, 은대리 일대에서 발견되는 지층을 ‘백의리층’이라고 하는데 용암이 갑자기 구 한탄강의 강바닥으로 흘러들어 강바닥에 있던 원력이나 자갈 위를 그대로 덮은 흔적을 그림9에서처럼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다.가장 아래 하천의 바닥에 있던 원력과 자갈이 층층이 쌓여 있고, 그 위에 물과 만난 용암이 갑자기 식으면서그림8. 맨 아래 원력들이 보이는 층은 구 한탄강의 바닥이나암이 식으면서 형성된 층과 현무암층이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백의리층)형성된 층과 그 위로 용암대지를 형성하고 있는 현무암층이 보인다.한편 용암 분출은 한탄강 상류인 철원 화지리에서 최고 11매, 상월리에서 6매, 전곡 고문리에서 4매, 문산 동파리에서 1매가 나타나는데(이민부 외, 2004b: 834) 현무암질 용암은 분출된 후에도 가스를 약간 포함하며 방출되다가 남은 가스는 기포를 이루면서 용암류의 표면으로 모여 작고 동그란 구멍들을 많이 만들어 놓는다. 현무암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구멍을 기혈이라고 하는데(권혁재, 1990:415) 사진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한 매의 상단에는 기포가 올라와 기혈이 형성되는데 이 기혈과 기혈의 사이가 한 매라고 한다.3. 주상절리그림9는 천연기념물 제436호로 지정된 한탄강 대교천 현무암 협곡의 사진이고, 그림10은 전곡 선바위 근처에서 촬영한 것이다. 암석이 지각변동에 의하여 어떤 힘을 받을 때나 화성암이 급히 냉각하여 수축될 때 생긴 틈을 절리라고 하는데, 방향에 따라 주상절리, 판상절리, 방상절리 등으로 구분된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지형은 수직으로 발달된 절리로서 주상절리라고 한다. 권혁재(1990)는 용암이 식을 때는 수축하여 절리가 많이 발달하는데 특히 유동성이 큰 현무암질 용암류가 식을 때는 절리가 규칙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고 한다. 냉각 중에 있는 용암의 표면에는 수축 중심점들이 생기는데 이런 점들을 잇는 중앙에는 직각 방향의 틈이 벌어져 수직적인 기둥으로 무수히 분리하게 된다고 했다. 현무암질 용암에 의해 형성된 이 지역에서 주상절리를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그림9 대교협곡 주상절 리가 식생에 의해 일부분만 노출되고 있다.그림10 선바위 일대 주상절리4. 고호소 환경그림11. 고호소였으리라 추정되는 차탄천 동쪽사면 하단부에서 발견된 환원층차탄천은 강원도 철원에서 발원하여 경기도 연천을 경유하여 전곡을 거쳐 한탄강과 합류하여 흐르다가 임진강과 합류하는 지류이다. 이민부 외(2006)에 의에서 분출하여 한탄강을 따라 흘러내린 용암은 차탄천의 하류인 전곡읍 일대의 하곡을 메워 넓고 평탄한 현무암 용암지대를 형성시켰다. 한탄강 곡저를 메운 용암은 한탄강 지류들의 유입부를 막으며 역류하여 용암댐을 형성하였고, 이로 인해 호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용암대지의 하류 쪽에서부터 두부침식과 하방침식이 빠르게 진행되어 현재와 같이 긴 협곡의 하도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대교협곡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길고 좁은 하도는 이러한 결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천읍 차탄리의 동쪽 사면 하단에는 토탄을 포함한 두꺼운 점토 및 모래층이 나타나는데, 이는 과거 용암류가 댐 역할을 하면서 차탄천의 하도가 막혀 형성된 고호소에 의한 퇴적층으로 분류된다.(이민부, 2007:17에서 재인용)수면 밑에서는 산화물이 산소를 잃어버리는 환원현상이 일어난다. 소택지, 배후습지 등의 점토질 퇴적물이 일반적으로 회색 내지 청색을 띠는 것은 환원 작용 때문이다.(권혁재, 1990: 35) 과거에 호소가 형성된 차탄천 등지의 토층의 하부에는 환원 작용에 의해 형성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는 그림11과 같은 회색의 환원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증거를 통해 앞에서 언급한 호소환경에 대한 추론이 가능하다.Ⅲ. 기타지형1. 선상지그림12 단층선과 나란히 나타나는 연천 차탄리 일대그림13 단층경면의 뜯긴 흔적, 두 지괴가 움직인 방향에 따라 그어진 금과 이에 대하여 직각으로 나있는 미세한 단이 관찰됨지형면이 단층선과 나란히 나타나는 것은 지형의 형성 과정이 단층작용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을 의미한다. 단층 운동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지반의 승강과 기울어짐 작용에 의해 형성된 급경사 사면의 전면에 위치한 완사면에는 배후산지를 흐르는 지류하천에 의해 공급된 하성퇴적물과 사면이동물질들이 쌓여 선상지와 같은 퇴적지형이 형성되기 쉽다.(이민부, 2001:361에서 재인용)차탄천의 중류에 해당되는 연천읍 차탄리의 동쪽 사면에는 용암댐에 의한 호소 및 선상지성 퇴적층이 산록의 하단부에7:16) 이러한 지형면은 연천 단층대의 주향과 일치하며 지표에 기반암이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퇴적층이 두껍다.(이민부 외, 2001:346) 차탄천 곡저에서 산지쪽으로 분포하는 선상지 지형면은 해발고도 60-120m까지 완만하게 경사져 있으며, 해발고도가 높은 배후산지로부터그림14. 연천읍 차탄리 동쪽사면의 선상지성 퇴적층의 주상도풍부한 암설이 공급되어 규모가 큰 선상지가 형성되면서, 차탄천은 하곡의 서쪽 산지 쪽으로 치우쳐 흐르고 있다.(이민부 외, 2001:349, 352)차탄천 하곡의 동쪽 사면에 분포하는 선상지 지형 면에서는 개석곡을 따라 많은 곳에서 노두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이민부 외 2001:352) 확인되는 퇴적층의 두께는 3m이며 그 중 한 지점을 선정해 주상도를 그려보았는데 그림12와 같다. 맨 아래층은 앞에서 언급한 고호소 환경에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회색 환원층이 관찰되며, 그 위에는 상부 사면에서 운반된 sand와 역이 협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며,(이민부 외 2001:352) 특별한 층의 구분은 없으나 중간 부분에도 환원층으로 추정되는 회색층이 관찰되고 있어 호소성 퇴적물과 선상지성 퇴적물이 혼재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선상지성 퇴적층에는 pebble급의 각력이 군데군데 박혀있다.2. 하천의 퇴적 작용하천이 곡류하게 되면 유수는 관성에 의해 외측으로 흐르게 되어 더욱 굴곡이 심해지게 된다. 이 때 하천이 강기슭에 부딪쳐서 깎여지는 부분을 공격사면, 반대쪽을 보호사면 또는 활주사면이라고 한다. 하천의 공격면은 침식을 받아 후퇴하며, 그 맞은편의 하안은 모래, 자갈 등이 쌓여 포인트바가 형성됨으로써 전진한다.(권혁재, 1997:409) 공격사면은 침식력이 강해 사행을 강하게 만드는데 공격사면에 부딪친 하천은 약간 떨어진 하류의 맞은편 기슭에 부딪쳐서 되돌아오게 되므로 하천의 양쪽 기슭에는 번갈아 공격사면과 보호사면이 이루어지게 된다. 유속이 빠른 공격사면은 침식을 많이 받아 수심이 깊고 절벽을 이루며, 상대적으로 유속이 느전)
권운 : high-level clouds (11-12km)권층운 : high-level clouds (9-10km), sheet-likeCloud types (2/10)권적운 : high-level clouds (6-9km), small, rounded white puffsCloud types (3/10)고층운 : mid-level clouds (3-4km), wide waleCloud types (4/10)고적운 : mid-level clouds (5-9km), rounded masses Cloud types (5/10)난층운 : low-level clouds (2-3km), produce precipitation Cloud types (6/10)층적운 : low-level clouds (1-2km), rounded massCloud types (7/10)층운 : low-level clouds (below 0.5km), like fogCloud types (8/10)적운 : Puffy clouds Cloud types (9/10)적란운ThunderheadsNear ground to above 50,000 feet적란운 : powerful thunderstorms, Near ground to above 12kmCloud types (10/10)As you can see, There are ten main cloud types.They are classified into a system that uses 권, 고, 층, 적, 난 words to describe the height or precipitation or the appearance.If w ten main cloud types easily.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개천과 그 곳의 주위에 이루어진 수풀에서 무수히 많은 동물과 식물을 보고 듣고 느끼던 적이 있다. 인간은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있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그 때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어릴 때부터 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유난히 많았다. 그러한 호기심이 많았던 그 시절의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책 한 권을 가지고 오랜 시간 씨름을 했었다. 그 책의 제목은 완벽하게 생각이 나지 않지만 "마야·잉카 문명" 이었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에 우리 집에 있었던 책으로 어렸을 때 읽을 당시에도 종이가 노랗게 변색되어 뚝뚝 끊어지는 그런 책이었다. 그런 허름한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자주 들춰보며 내가 모르는 시대를 거쳐간, 그리고 이제는 화려한 역사를 과거에 묻어둔 채 사라져 버렸다는 마야 문명에 대한 환상을 주체하지 못하고 문화를 연구하고 역사의 사실을 밝히는 학자가 되기를 꿈꾸었었다. 지금은 책을 통해서 보는 이 세상을 언젠가는 내가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가슴으로 느껴보리라 마음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내 손에서 그 책을 놓은 지 벌써 8,9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을 하면 참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는 어느덧 자연의 즐거움에서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꿈꾸던 내가 아니라 화려하고 복잡한 도회지의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내가 서있다. 하지만 새삼 세월이라는 것에 치여, 이 세상이 바라는 가치에 치여, 그토록 꿈꾸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세계문화기행」이라는 책을 읽은 후의 일이었다. 잊고 있던 꿈들이 단숨에 찾아오는 느낌. 당장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나 내가 꿈꾸었던 이 세상의 수많은 역사의 흔적과 사람의 모습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숨에 책 한 권을 읽어 내려간 후에 어찌할 수 없는 흥분에 몸을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그동안 참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꿈에 대한 깨달음은 참으로 역사가 그리고 문화가 내가 이렇게 내 생활을 일구며 바쁘게 살아가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만의 조용한 흐름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었다.책 속에는 수많은 도시와 국가와 민족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코발트색 하늘과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바다의 청과 청의 만남. 책 속에서 읽은 지중해는 시원한 바람을 내 가슴속으로 불어 넣어주고 있었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에는 그 모습이 많이 퇴색해 버렸지만 오랜 기간 세계의 중심 지역으로써 위세를 날렸던 지중해. 하지만 나에게는 유럽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와 동방의 문화가 접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마련했던 지중해 지역에 대해서는 헬레니즘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피상적인 형태로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성 소피아 성당의 눈부신 모습, 신화로써 들어왔던 트로이의 흔적.. 글자를 통해서 상상만 하던 모든 것들이 한 장의 사진으로 정지되어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감격적이었다. 어느새 내 마음은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신비로 가득한 지하암굴도시에 대한 생각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어릴 때부터 여러 루트를 통해 보고 들었던 이집트 문명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상을 차체하고 오리엔트· 중동문화로의 걸음을 재촉했다. 요즘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이슬람세계가 속해있는 이곳. 수업을 들으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나는 그들의 참 많은 부분을 알지 못하고 그저 지엽적인 하나의 단편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 이런 상태는 쉽게 예를 들어 산골의 소녀가 우연히 접한 자동차 사진을 보고 사진 속에 그 자동차만이 자동차의 전부라고 믿어버리는 듯한, 즉 한 컷의 사진만이 뇌리에 남아있는 듯한 상태를 이야기한다. 많은 부분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진이 더해진 상태에서의 깨달음은 이미 말로써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발달된 문화가 있었고, 과거의 역사가 있었고, 사람사이에서 벌어지는 즐거운 웃음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활기가 있었다. 9.11테러와 미국의 아프간에 대한 폭격이전에 내 머리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편견들은 쿠웨이트라고 하면 대포와 폭발음이 떠오르게 했다. 책 속의 한 구절에서 걸프 해를 아름답다고 표현한 것을 처음에 이해 할 수 없었던 것도 그런 생각의 연장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배우고 느끼는 가운데 내가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가치관이라 이름 붙인 것이 있는데, 그 가치관이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형성되어버린 여유가 없는 딱딱한 인식과 사회를 한가지 시선을 가지고 보는 편협한 시각을 떨치고 일어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틀을 갖고자 하는 것" 이다. 그렇게 항상 나를 돌아보는 나인데도 참 세상이 강요하는 주된 논리에 너무나 많이 젖어있었다. 획일화된 하나의 생각 속에 어떤 문제 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무의식 속에서 강한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소름이 끼쳤다. 찬란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이제는 현재의 약자로의 위치에 서 있는 문명들을 생각할 때, 내가 실제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의 사진을 보고 놀랐던 것처럼 우리나라가 만약 국제 사회에서 지금의 그들과 같은 입장에 처해 있어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가진 뛰어난 문화의 흔적과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왜곡시켜 인식하게 된다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나의 존재의미조차 상실하는 슬픔을 느낄 것만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동안 가졌던 편견을 깰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어 유쾌한 감상이 들었다.타지마할이 있는 인더스 문명에 대한 기대는 다른 문명을 만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타지마할에 얽힌 사랑의 이야기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던 감수성 풍부했던 여고시절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에 대한 비난들이 일부에만 해당하는 것일 뿐 아직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에 감동할 줄 안다. 순수한 가슴들이 있음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사랑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어른으로서의 감동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의 감동과는 또 다른 차원의 감상이었다.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슬프다가 아니라 그 슬픔에서 승화된 열정과 사랑의 결정체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고 애타는 샤 자한의 사랑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에 대한 갈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인도를 가난에 허덕이고 초라함으로 가득한 후진국의 처지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독특한 문화의 향기를 갖고 있더라는 부분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와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마도 이렇게 뜨거운 영혼을 가진 왕의 피를 이어받은 인도인들의 정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인도에서의 아름다운 사랑에 정서적으로 즐거움을 느꼈다면,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에 대한 글을 읽는 내 태도는 참 이성적이고 지식적이었다. 얼마전 이 것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지식을 통해서 중앙아시아에 눈걸음(?)이 멈추었을 때 아는 부분이 나온다는 것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인류의 발전을 인류문명의 편리함과 연결이라는 차원에서 보았을 때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실크로드. 각개의 문화가 (주체성을 가진 채) 섞일수록 발전의 길을 걷는 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지 않더라도 단절되었던 세계의 다른 문명들을 이어주는 통로였던 실크로드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비나 물이 거의 없고, 폭풍이 잦아 죽음의 땅이라고 알려진 타클라마칸 사막이 인류의 삶을 살찌게 한 바탕에 있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벽화가 남아있는 인도의 크고 작은 석굴들, 헬레니즘 문화적 요소를 가득 담고 있는 불국사 석굴암,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도시 아프라시압의 궁전벽화, 중앙아시아의 돈황 벽화에 등장하는 한국인 사절들...... 교역과 교류의 증거, 모두 실크로드의 정신들인 것이다. 요즘 다 문화, 다 종교, 다 인종 속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해야하는 21세기 사회의 패러다임에 발 맞춰 과거 문화와 무역의 동·서 만남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이곳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고 하니 역사가 현대 속에 살아 숨쉬는 듯한 생각이 들고 여기에 생긴 문화들이 제 가치를 인정받는 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았다.이미 많은 부분을 알고 있고 이번에 수업시간을 통해서 새롭게 또 배워나갈 동남아시아와 3년째 언어를 배우며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국에 대한 감상을 넘어가니 마야·잉카 문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꿈으로 채색된 신비로운 고대 문명. 그저 표면적인 의미만을 좇아 읽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지난날의 나에 비해 사실의 측면에 역사적인 시각까지 첨가된 조금은 커버린 나를 느끼며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찬찬히 문명의 숨결을 읽어 내려갔다. 남아있는 것들이 보여주는 아름답고 놀라운 역사의 유산들. 인류가 저지른 범죄...라는 말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발달된 문명의 힘이 꺾인 것이 겨우 몇 백년전의 일인데도 얼마나 많이 변하고 또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찬란한 역사의 계단을 밑에서부터 흔들어버린 인간들의 욕심과 무지에 치가 떨렸고, 인류의 후손으로서 아픔과 아쉬움만 켜져 갔다. 하지만 그러한 인류의 죄악의 틈에서도 역시 사람은 살아가고 있었고 그 사람들에 의해 문화는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남아 있는 흔적에서 과거의 영광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것에서 우리들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것들을 현세대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말이다. 마야·잉카문화에 대한 아쉬움을 접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눈을 감고 내가 돌아본 세상의 많은 곳에 대한 설레임을 가다듬어보았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개천과 그 곳의 주위에 이루어진 수풀에서 무수히 많은 동물과 식물을 보고 듣고 느끼던 적이 있다. 인간은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있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과 그 때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어릴 때부터 모르는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이 유난히 많았다. 그처럼 호기심이 많았던 그 시절의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책 한 권을 가지고 오랜 시간 씨름을 했었다. 그 책의 제목은 완벽하게 생각이 나지 않지만 중국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에 우리 집에 있었던 책으로 어렸을 때 읽을 당시에도 종이가 노랗게 변색되어 뚝뚝 끊어지는 그런 책이었다. 그런 허름한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자주 들춰보며 내가 모르는 시대를 거쳐간, 그리고 이제는 화려한 역사를 과거라는 시간에 간직한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중국에 대한 환상을 주체하지 못하고 문화를 연구하고 역사의 사실을 밝히는 학자가 되기를 꿈꾸었었다. 지금은 책을 통해서 보는 이 세상을 언젠가는 내가 직접 가서 내 눈으로 보고 내 가슴으로 느껴보리라 마음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내 손에서 그 책을 놓은 지 벌써 8,9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을 하면 참 믿어지지 않지만 지금 여기에는 어느덧 자연의 즐거움에서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꿈꾸던 내가 아니라 화려하고 복잡한 도회지의 생활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내가 서있다. 어린 시절의 호기처럼 사놓았던 "중국어 회화" 책은 구석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나의 변심을 탓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삼 세월이라는 것에 치여, 이 세상이 바라는 가치에 치여, 그토록 꿈꾸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은 「중국문화답사기」이라는 책을 읽은 후의 일이었다. 물론 난 나름대로 관심을 지속하고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책을 덮은 순간 찾아온 잊고 있던 꿈들이 단숨에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당장 이 답답 상관없이 그들만의 조용한 흐름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절로 느끼게 해주었다.책 속에는 수많은 도시와 그곳에 산재해있는 문화에 대한 다양한 글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동안 서북쪽에 위치한 둔황이라는 곳은 고원과 사막이 이루고 있는 황량한 곳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약간은 논외의 이야기 같긴 하지만, 난 스스로 삶을 살아가면서 배우고 느끼는 가운데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가치관이라 이름 붙인 것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관이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형성되어버린 여유가 없는 딱딱한 인식과 사회를 한가지 시선을 가지고 보는 편협한 시각을 떨치고 일어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틀을 갖고자 하는 것" 이다. 그렇게 항상 나를 돌아보는 나인데도 어린 시절에 피상적으로 들어왔던 한가지 사실을 그것의 전부인양 생각했던 꽉 막힌 사고 방식을 발견하게 되어 매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인식도 하지 못하고 닫혀있던 생각 속에서 소중한 인류의 문화 유산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니... 머릿속에서 고정관념처럼 쌓였던 그런 황량함은 책 속에 나온 삼위산과 명사산의 금빛과 막고굴의 형형색색의 벽화들을 통해서 어느 덧 풍요로운 땅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바닥을 제외한 벽과 천장, 그리고 나머지 모든 부분에 채워진 그림과 불상조각들은, 막고굴이 있는 낭떠러지를 비추는 순간의 영상을 극락의 실현의 꿈으로 받아들였던 악준과 염원을 담아 진심을 담아 하나하나 파고 세세히 조영했던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인식과 상호 작용하여 1000~150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나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다.영국의 대영 박물관을 보면 많은 중국의 유물들이 쌓여있다. 우리 유물을 연구하는데 다른 나라에 사정해고 돈을 내야만하고, 일반인들은 겨우 사진을 통해서나 접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 중국에서도 역시 벌어지고 있다. 물론 제국주의를 겪었던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다들 그렇겠지만 중국의 막고굴의 경우에는 인식과 노력만 있었다면 충분히 지켜낼 수 있었던른 나라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던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으로 인해 힘들었던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내팽개치고 자기의 안위만 생각했던 관리들의 안일함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여간 그 문화의 정신이 살아있는 그 민족만이 정신의 작용물인 문물의 진정한 가치를 두 배 세 배로 배가 할 수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은화로 두둑한 주머니를 짤랑대며 펠리오와 다른 서양인들을 정중하게 전송하던 왕원록의 들썩이는 뒷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질 따름이었다.이별을 노래한 중국의 대표적인 왕유의 시는 양관을 소재로 하고 있다. 양관으로 가는 길은 황량하고도 거친 풍경으로 이어지지만 그 곳의 서쪽을 향해 보면 아름다운 모래의 향연인 명사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막에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참 정감이 가는데 이 곳에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희소성의 가치가 절묘하게 조화된 초승달 모양의 호수가 있었다. 그곳에는 물까지 담겨져 있다고 하니 숨겨진 보배를 찾는 느낌이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정말 제목 그대로 영혼을 울리는 사막과 푸른 샘물이라는 생각이 든다.학식을 갖추고 자연과 정사의 조화를 추구했던 유종원으로부터 이어지는 문인들의 끊이지 않는 역사의 끈을 이어온 유후사와 인류의 흔적이 남겨진 백련동을 지나면 어느덧 중국민족들에게 천년의 복락을 제공하였던 도강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위대한 규모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외경에 대한 서술이 인상적이었지만, 고통의 세월을 느끼게 하는 만리장성의 건축이 시작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완성된 도강언이 아직도 수많은 민중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고 가뭄과 장마로 고통받던 이곳을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만리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고 말한다면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했다" 고 말하는 이 글의 한 문장이 얼마나 옳고 멋진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사명에 의해, 자신의 본분을 다해 진정 훌륭한 치정을 행한 이빙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힘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차지하고 있는 동정호. 수많은 문인과 호걸들의 발을 붙잡았던 동정호의 매력은 문학의 문외한이요, 감각이 무딘 나에게도 자연 안에서 철학을 발견하고, 또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느끼게 하였다. 이러한 감상을 갖고 내 마음 속에 맞이한 여산의 글들은 동정호에서 느낀 감상들에 더해져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을 생으로 삼았던 사람들 속에 나도 융화되고, 더 나아가 더욱 발전된 나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위대한 것을 위대하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없다는 생각만이 가득하니 참 안타까웠다.와신상담(臥薪嘗膽)과 서시의 역사가 살아있는 쑤저우. 유럽의 아름다운 휴양지 베니스와 비슷한 자연적인 입지에 우리 한국인의 정서와 비슷한 중국인의 정신 세계가 녹아있는 쑤저우의 매력은 작가가 "중국문화의 평온한 후원" 이라고 말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갈등을 덮을만한 포용력을 지닌 고요하고 맑고 안온한 공간으로 내 눈앞에 그려졌다. 역사적인 고통과 슬픔을 간직하면서도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고 사람의 정이 녹아있는 고상한 운치의 쑤저우가 꿈결처럼 내게 다가온다.많은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작용들이 농축되어 있는 어떤 곳에 대해 짧은 말 몇 마디로 정리하려고 하는 나의 욕심이 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남의 마을을 겸손함과 평온함, 그리고 누구에게나 베풀어주는 드넓은 포용이라고 정의 내려버리고, 과거 문인들의 꿈의 이상향으로 생각했다는 천주산을 옆 눈으로 보며 가볍게 지나면, 뒤에 나오는 신객과 더불어 가장 인상깊게 여겼던 천일각이 등장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한 일가의 숙원... 하지만 나는 그런 대단한 문학사적인 의의보다는 그 오랜 시간동안 그 곳을 지키면서 이루어졌을 한 개인, 개인들의 정신적인 갈등과 고뇌의 무게를 엿보았고, 어떤 신념 속에서 행동하는 인간의 정신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천일생수" 염원이 절도(?)라는 어처구니없는 것들로 퇴색되어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 오랜 세월 쌓여진 시간의 알았지만 말이다. 이 글 속의 중국인들의 눈, 작가가 서술해 놓은 문장 속에 펼쳐진 상하이 사람들의 모습은 이해득실 따지기를 좋아하고 쓸데없는 소모전을 해대는 것으로만 그려지는 등 상당히 의외의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단언하며 이야기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나는 우리나라사람들이 "빨리 빨리 문화"라는 것이 있어서 나라를 망친다는 이야기들을 식민사학에 바탕을 둔 자기 비하 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하이 사람들에게 가해지고 있던 많은 편견의 시선과 비판의 목소리는 그 곳의 고유성과 특수성, 그리고 장점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것이 그런 결과를 낳았고,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방향에 있어서 다양한 문화적인 맥락과 특징을 한가지 유동적이지 않은 고정적 시각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내가 여기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이기에 지금의 감정이 나중에 경험을 하고 나서도 같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다만 이런 말이 떠오른다. "한 장소의 사람이라도 다양한 상황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시간의 흐름 속에 사람들은 변하고, 믿음은 그것을 더 쉽게 이루게 한다." 이 말이 사족(蛇足)일지는 모르겠다.지은이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이 많이 녹아있는 3부는 특별히 기행문이라고 하기보다는 기억 속에 살아있는 아련한 추억과 정신적인 교감이 묻어 있는 간단한 수필이나 일기 같았다. 환상처럼 살아있는 예쁜 선생님들과 비구니 암자의 꽃밭, 한과 의구심이 함께 어우러진 패방의 존재감. 과연 이것들의 연결고리는 무엇일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막연함이 내 앞에 놓여져 있었다. 풍류와 멋이 가득한 야항선이 조용히 물을 가르며 평화로운 풍경 속에 놓여지고, 그리고 진리와 지식이라는 이름들이 가득 담겨져 중국의 정신의 근간에 면면히 채색되어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에 대한 감동 중에 가장 커다란 것은 역시 앞에서 말했다시피 산객이라는 두 글자였다. 사실 산객이라는 사람들의 인생이 준 감동은 단순히 글로써 표
우리는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 라고 표현하곤 한다. 거리 상으론 한시간도 안 되지만 국민들 사이의 정신적인 거리는 지구상의 어느 나라보다도 멀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것이다. 아직도 일본의 교과서 서술 문제나 한일 양국의 정치적 현안과 맞물려 여론의 쟁점이 되곤 하는 우리나라와 일본간의 숙명과도 같은 평행선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파생된 양국의 (서로의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독립이후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새 천년을 맞이한 한일관계의 연결고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식민지의 잔재들을 육체와 정신적인 측면 양쪽에서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역사와 문화를 저열화 시켜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자기 비하와 익명성 속에 안주하는 식민지 신민을 만들기 위한 일제의 노력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연구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러한 정책과 책략의 연장선에 있는 많은 현상들 가운데 식민사관이 우뚝 서 있다.식민사관이란, 일제 어용학자들이 한국 침략과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역사관으로써 한민족의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역사 발전 과정을 부정하고 한국사에서 타율적이고 정체적인 측면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우리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민족의식을 말살하려한 식민지 정책의 한 방책이었다. 이러한 식민사관을 창조시킨 역사 연구들은 정당화의 요구로 인한 더욱 철저하고 광범위한 과정이었던 만큼 (정당한 목표를 가지면서 운영이 가능한) 자국인의 연구라는 것이 상황적으로 열악하거나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속에서 일본인의 독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과거의 상황은 역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발산되어 (우리가 알든 모르든) 계승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와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광복후의 역사 연구, 현재의 연구, 그리고 앞으로의 연구에서 우리나라의 몇 십 년의 역사 연구가 녹아있는 일제시대의 연구를 외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부의 관할 아래 더욱 확대되어 사용되었다. 3.1 운동 이후 한글과 조선사 금지 등으로 자극을 받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활발한 역사연구는 식민지 자체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에 대한 위기의식과 더불어 일제가 문화정책을 행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문화정책은 한국인의 역사인식을 식민주의에 적합한 상태로 돌리려는 조선사편수회 경성제대, 청구학회의 활동과 더불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동경제국대학에 국사과와 사학과를 설치하면서 랑케의 문헌 고증사학에 입각한 근대적 방식의 한국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는데, 특히 요시다와 하야시 등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들의 연구는 한국으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침략정당화의 틀로써 작용하면서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첫째는 "일선동조론" 이요, 둘째는 "만선사" 와 "타율성론"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정체성론"이다.주자학이나 한학이 중요한 사상적인 흐름으로써 대두되던 일본의 에도 시기에는 자국의 학문적이고 사회적인 풍토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는 국학자들이 등장하여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중요한 것이지 「사서삼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하였었고, 이러한 개념은 침략주의 정객들에 의해 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했었다. 이러한 과거의 흐름의 계승한 침략주의 어용학자격(御用學者格)인 시게노나 호시노 등 동경제국대학의 교수들은 「국사안」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일선동조론을 제기하였다.한국과 일본은 외국이나 이민족이 아닌 일본에서 갈라진 같은 민족으로 일본은 한 핏줄인 한국을 만주 몽골 중국의 침략에서 보호하고 융화해야한다는 주장으로 우리 민족의 독자성과 존립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한일합방과 한국침략은 한 민족이 합쳐지는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온정 깊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라고까지 인식되었다. 《역사지리》나 《동원》등에서 발견되고 있는 사다기치 등의 집필자는 독립운동은 한일관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면서, 한일 양국은 유물 언어 신화 풍습 등에함되는 대아세아주의(大亞細亞主義)에까지 확대되었다.하지만 이러한 명치유신의 상황에서 뻗어 나온 일선동조론은 증거에 근거한 산물이 아니다, 또한 일본과 한국과의 근친성·일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이는 양 민족 간의 연대와는 전혀 상반되는 의식의 틀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는 한국을 독자적인 민족, 혹은 국가로서 존중하는 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친근성을 강조하더라도 한국인으로서는 모욕으로밖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 독선적인 일선동조론은 단순히 역사가의 한국관이었던 것은 아니다. 제국시대를 통틀어 영구적인 지배를 합리화하는 지배관이요, 사상 관이었다.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는 일선동조론적 인식 속에는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의 동정은커녕 병합을 비판한 견해도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고 한국인에 대해서는 야만스러운 미개인이라는 사고로 일관하고 있다. 이처럼 연대를 한민족으로써의 연대를 강조하던 일선동조론이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모순 속에서 그 것의 허구성을 알 수 있다.아시아 대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청일전쟁 이후 등의 시기에 《동양사》등이 저술되는 등의 활동이 있었고, 만철에 설치된 만선지리역사조사실의 이나바, 이케우치, 시라토리 등은 만주사를 중국에서 분리시켜 중국의 만주에 대한 주권행사를 제한하는 역사적 논거를 제시하고, 한국사를 만주사에 종속된 역사로 파악함으로써 한국사의 독자적인 발전과 주체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만선사를 주장하였다. 국사의 독자성·자주성을 부인하고 민족·영토·경제의 세 방면에서 보아 한국은 태고 적부터 대륙 특히 만주와의 불가분의 관련 속에서 존재해 왔다는 주장은 그 뒤 만주국 성립이후 만선불가분론을 더욱 발전시켜, 만선사 체계의 재인식이라는 인식을 통해 한국의 큰 역사적 사건은 모두가 대륙정국의 반영이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만선사관은 이후 한국사의 타율성론으로 발전해가게 되었다.타율성론은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한민족의 주체적인 힘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중국지배세력의 이민족인 위만 조선과 기자 조선으로부터 뿌리를 찾고 한사군과 임나일본부 등으로부터 과거에도 다른 나라에 의한 지배가 행해졌음을 보여준다는 남한경영론 또는 임나일본부설이다. 또한 정치적 문화적으로 한 개 내지 그 이상의 힘들 사이에서 세력 항쟁에 시달리고, 때로는 하나의 압도적인 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반도에 위치하고 있기에 대륙이 강하면 대륙에 해양이 강하면 해양의 영향권 하에 들어오는 반도적 성격에 따라 중국만주 일본의 종속적인 영향 하에 있다는 환경 결정론적인 입장에 서있는 반도적성격론이 그 두 번째다. 반도적 성격론은 외교관계, 정치면, 사회면, 문화면에서도 나타나 사대주의라는 성격을 만들어 내 한국사회와 문화의 변화가 종주국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 버렸고, 한국인의 의식구조 생활 등의 일상적인 모든 것을 규정하여 민족성으로까지 발전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논리 속에서 일본의 온정 깊은 지배를 통해서 다양한 국가의 침입을 받던 한국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 이점이 있다는 침략미화론으로 형성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식민사관중의 하나인 당파성론인데 이는 조선시대의 문화의 수준이 낮고 고루하다는 전제 아래, 사화와 당쟁 등의 역사적인 사건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던 소모전적 싸움으로 인해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였고 이는 좋지 않은 민족성의 소치라는 관점이었다.하지만 임나일본부의 일본부라는 용어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던 연도적인 측면이나, 기록연도의 오차 등으로 인해 사료로서의 가치가 별로 없는 일본서기 자체의 오류, 칠지도 등 의 고고학적인 유물과 유적들의 흔적 등을 통해서 근거가 상당히 부족한 주장임이 후대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고, 한 국가의 성격이라는 것은 단지 지리라는 하나의 틀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무대는 발해 멸망 이전까지는 만주까지 포함되는 역사였으며, 삼국시대에 적극적인 성향이 조선시대의 소극성과 보수성으로 돌변한 것은 시대적 환경에 따른 변화였다는 사실, 또한 침어 내어 우리 민족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였다. 또한 당파성에서 비판되어 온 붕당정치는 사림의 공론을 토대로 한 상호공존과 견제체제로서 그것이 과열 변질되기까지 명분대결 정책 대결을 통한 의견 수렴이 이루어졌고, 다양한 논의와 시비는 정치의 활성화를 가져왔었다. 또한 붕당정치 자체는 성리학적 붕당론의 적용에 따른 것으로써 좋지 않은 민족성의 소치라는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식민사관의 세 번째 틀인 정체성론은 타율성론과 더불어 식민사관의 주된 지주로써 이전에 일본인이 인식한 한국사상의 중요 부분을 점하여,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을 낳게 한 큰 토대가 되었고 후진·낙후한 한국인의 생활을 향상시켜 주었다는 한국통치 미화론의 기초로 작용하였다. 정체성론은 한국사가 왕권 교체 등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구조에서는 아무런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여 오랫동안 내적 발전이 없이 머물러 있었으므로 근대화를 하려면 타국(특히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야기한다. 정체성론은 식민지배 정당화에 있어서 세련된 논의에 대한 욕구로 인해 "미개 민족을 깨우치는 것은 우리의 의무" 라는 등의 기치를 들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던 서양제국주의세력에서 가져온 이론으로써 stationary character의 번역이었다.일제 관학자 후쿠다는 19시기말, 20세기의 조선은 일본의 후지와라 시대인 10세기에 정체되어 있다고 이야기하며 봉건제 결여론을 주장하였다. 당시는 마르크스의 사회진화론에 의해 자본주의 근대 사회로의 이행은 봉건제를 반드시 거쳐야하는 역사적인 단계로써 인식되었기 때문에 봉건제가 없는 조선은 정체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토지 조사 사업을 정당화하는데 이론적인 틀을 제공한 와다 이치로는 한국의 전근대적 사회는 개인에게는 토지 소유권이 없고 수조권과 경작권만이 있는 사적인 소유개념이 잡히지 않았던 공유의 사회라고 이야기하였고, 촌락내의 사회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씨족 공동체적 생활이 영유되었으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되지 못하는 등 기성 사회의 특성을 그대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