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전통 윤리』 교과서의 내용과 구성에 관한문제점 및 개선방안목 차Ⅰ.서론Ⅱ. 『전통 윤리』 교과서의 성격, 목표, 내용과 구성, 교수방법1. 성격 2. 목표3. 내용과 구성 4. 교수방법Ⅲ. 『전통 윤리』 교과서 내용과 구성상의 문제점1. 내용상의 문제점 2. 구성상의 문제점Ⅳ. 『전통 윤리』 교과서의 개선방안Ⅴ. 결론Ⅰ.서 론최근 경기도 연천 최전방 GP(감시 초소)에서 평소 군대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던 김일병이 총기를 난사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8명의 장병이 목숨을 잃고 수명의 장병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경기도 과천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아들이 부모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받았다는 이유로 친부모를 토막 살인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해 전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최근 우리 사회의 급격한 외래 사조의 유입과 산업 사회로의 진전은 전통적인 가정교육의 기능과 우리사회에서 소중히 간직해 왔던 전통적 가치와 규범의 중요성을 약화 시켰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카르마”, “스페셜포스”와 같은 총을 쏘아 사람들을 죽이는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면서 사람의 생명 존중과 공동체 의식에 대한 감각이 점차 무뎌져 가고 있으며, 심각한 개인 위주의 사고 그리고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위 총기 난사 사건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에 반해 가정에서는 맞벌이 부부가 증가함에 이러한 현상에 대한 부모님들의 가정교육은 잘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실상 교육은 학교나 학원에 맞기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입시 위주의 학원 교육은 청소년들의 올바른 삶의 가치 형성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의 인터넷 사용의 급증하고 있으며, 쏟아져 들어오는 음란하고 폭력적인 정보에 청소년들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삶의 가치와 생명 존중 사상, 경로 효친 사의 윤리적 삶의 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아는 지식 못지않게, 오늘날 변화된 시공간에서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사고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조상들의 윤리적 삶을 재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사상들에 대한 윤리적 의의와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셋째, ‘전통 윤리’는 조상들의 윤리적 삶의 내용에 대한 지식, 사고력 못지않게 중요시되어야 할 학습 요소가 바로 윤리적 행동 실천력 배양이다. 전통 윤리는 지행일치(知行一致)를 공부나 수양의 궁극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개인의 정신과 몸을 수양하기 위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언행을 조심하고 삼가는 자세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어떤 윤리 사상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수양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조상들이 지켜온 전통 윤리는 대체로 이러한 행동 실천을 강력하게 전제로 하고 있다.다음으로 ‘전통 윤리’의 4개 하위 영역별 목표는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다.)Ⅰ.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전통 윤리의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그 본질과 기본 이론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전통 윤리를 오늘날의 실제 생활 속에서 계승하려는 자세를 지닌다.Ⅱ. 전통 윤리에 나타난 개인?가족생활에서의 윤리적 규범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오늘날의 실제 생활에 적용, 실천하려는 능력과 태도를 지닌다.Ⅲ. 전통 윤리에 나타난 친족, 이웃, 교우 관계에서의 윤리적 규범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오늘 날의 실제 생활에 적용, 실천하려는 능력과 태도를 지닌다.Ⅳ. 전통 윤리에 나타난 국가, 사회에서의 윤리적 규범과 자연관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오늘 날의 실제 생활에 적용, 실천하는 능력과 태도를 지닌다.위에 열거한 4개의 하위 영역별 목표는 성격상 다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전통 윤리의 의미와 그 기본 이론에 대한 학습을 목표로 하는 것과, 이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개인, 가정, 사회, 국가 등의 생활 영역별로 추구되어야 할 전통 윤리 규범의 이해와 실천 되어 있다. 각 대단원의 첫 부분에는 ‘이 단원의 공부를 위하여’가 있다. 이것은 대단원의 도입글로서, 단원을 배우기 전에 단원의 취지와 목적에 관한 것을 다뤘다. 그리고 역점을 두어 공부해야 할 내용을 강조하였다.‘본문’은 교과서의 주된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지도해야 할 지적 내용과 정의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 교과서에서는 종래의 교과서에서보다 가급적 본문 진술 내용을 양적으로 축소하였고, 실감 있는 사례 중심으로 구성하려고 하였다. 교사들은 본문 외에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례들을 추가적으로 많이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명언 또는 명구’는 주제 수준에서 1개씩 제시하였는데, 이는 소단원은 학습하기 전에 이 명언으로 하여금 학습하게 될 단원을 미리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좌우명이 될 수 있도록 암기시키는 것은 물론, 학습 내용을 보충?심화하여 확대시키는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학생들에게 자체 조사 및 관련되는 명언?명구의 수집도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런 명언은 학급의 급훈으로도 추천이 가능할 것이다.‘사진 또는 삽화’는 본문의 내용을 보완하고 시각적 효과를 얻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전통 윤리」교과서에서는 가급적 참신하고 컬러화 된 사진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시사성을 상실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교사들은 정보화 시대에 맞춰 교사 개인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수시로 수업 관련 내용을 보여주거나, 신문을 활용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여 항상 새로운 자료를 수집?보충하여 활용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탐구 과제’는 교과서를 하나의 학습 자료로 사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단원이나 제재에 따라 매우 다양한 학습활동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것은 본문 내용의 이해도를 측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는 학생들 스스로 해결하는 과제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논술형?수능형?심층 면접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탐구과제는 교사의 창의적인 학습 활동 전개가 요청되며 한 주제 당 2~3개의 ‘탐구 과제’는 할당된 차시윤리 자체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교육이 주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구체적인 전통 윤리를 학습하는 데 있어서 항상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이 있다. 흔히 그러하듯이 어떤 윤리 사상이나 철학이 당시 시대에 신선하게 품고 있던 생동적 의미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퇴색해지면서 무뎌지기 쉽다. 애초에 신선한 생각의 정신이 마비되거나 마모되면서 그 자리에 습관적이고 경색된 사고로 변질됨으로써 그것이 애초의 의미를 대신호가 마는 현상이 발생한다.따라서 전통 윤리 사상을 윤리 일변도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급적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학습 기회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통 윤리는 조상들의 지혜가 오랜 동안 축적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실로 다양한 정보가 축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낡은 인식의 질곡을 벗어 던져버릴 수 있는 다양하고 폭넓은 사고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Ⅲ. 『전통 윤리』 교과서 내용과 구성상의 문제점1. 내용상의 문제점가. 교과서 내용의 양과 범위의 문제점.도덕과의 내용은 생활영역 확대 원칙에 따라 개인, 가정?이웃?학교, 사회, 국가 생활영역으로 구성되어 진다. 중학교 도덕에서는 1, 2학년에서 위의 네 영역을 차례대로 2개씩 나누어 학습하고, 3학년에 개인, 가정?이웃?학교 생활영역을, 고등학교 1학년 도덕에서 사회, 국가 생활 영역을 심화, 보충하여 학습하게 된다. 이렇게 4학년에 걸쳐 학습하게 되는 4영역을 심화 선택 과목인 전통 윤리에서는 한 학년, 한 교과서 안에서 모두 학습하게 된다. 이렇게 전통 윤리는 매우 복합적이고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우선 사상적인 내용만도 유교 윤리 사상 등 9개 이상이 되고, 그 성격을 보더라도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고유한 것과 외래적인 것,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본질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한편으로 근본 원리와 덕목(가치)과 실천 양식으로 나누어지고 또한 개인의 인격 수양에 관한 것과 사뒤로 중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또 다른 예로서 「Ⅱ.4.형제 자매 관계와 우애」에는 형제, 자매 관계의 본질이라는 제제 속에 효와 우애라는 주제를 가지고 효와 우애의 관계는 “형제, 자매는 부모의 살과 피를 나눈 동기간이므로, 형제, 자매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를 실천하는 길이 된다.” 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그 뒤에서 조상들의 우애 정신과 실천이라는 제제 속에 또 다시 형제, 자매간의 우애 있게 지냄이 효를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고전을 예시로 하여 서술하고 있다.마. 부적절한 비유비유를 적절하게 사용하게 되면 그 내용이 딱딱해지지 않고, 학생들 또한 쉽고, 친근하게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교과서를 읽는데 있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법적으로나 그 비유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면 학생들은 이해도 쉽게 할 수 없고, 내용과 비유된 부분의 연결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예는 다음과 같다.「Ⅰ.3.전통 윤리의 본질과 기본 이론」에 유학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군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군자를 설명하면서 군자의 예로 ‘조광조’를 들고 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조광조=군자’라는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군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군자는 주위와의 조화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고 나와 있는데, 이에 반해 조광조의 경우는 자신의 이념을 너무 내세워 다른 훈구파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바. 현실과의 괴리전통 윤리 교과서는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 행동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전통 윤리 교과의 전체적인 성격 즉 교과 목표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우리 조상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따르고 실천해 왔던 윤리적 삶의 기본 정신과 지혜를 오늘날에 다시 찾아내어 배우고 실생활에 적용하게 함으로써, 훼손된 전통적 가치와 규범을 회복시켜 이 땅 위에 훌륭한 도덕 공동체를
三國의 儒學삼국의 유학 윤리교육과 2학년 김종학Ⅰ. 서론한국 고대사회에서 한문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국과의 오랜 역사적 관계로 보아 매우 오래 된 것임은 틀림없다. 한문의 사용은 우리 문화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 왔으며,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전달하며 민족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고대사회에서 한문의 사용은 단순히 문자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한자의 사용으로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상과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유교의 경전이 한문으로 되어있고, 그 내용의 근본가치를 유교사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한문과 유교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Ⅱ. 學術과 儒學1.고구려▶건국 초부터 한문을 사용하여 역사를 기록하였다.▶太學- 한문을 사용하여 학술이 발달하고, 국가발전에 필요한 인재의 양성이 요구되어 만들어진 교육기 관이다.-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되었다.- 경학을 중심으로 하여 사학, 문자학, 문학 등의 학술이 교육되어 졌고, 5경을 중심으로 장차 국가 의 관리가 될 귀족들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책으로는 『오경』 및 『사기』, 『한서』, 『후한서』, 『진춘추』, 『옥편』, 『자통』, 『자림』이 있으며, 『문선』 을 특히 애중(愛重)) 이러한 기록에서 보면, 아직 맹자는 물론 논어도 경전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漢) 대의 효제(孝悌) 중심의 유교를 5경 중심으로 수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광개토대왕비와 삼국사기에도 잘 나타난다.하였다.▶경당( 堂))『당서(唐書)』에 의하면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고 궁벽한 시골이나 백정 같은 천한 집에 이르기까지 상부 상조하였다. 거리 옆에 큰집을 지어 경당이라 이름하고, 미혼의 자제들이 모여서 경전을 외우고 활쏘기를 익혔다.또한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풍속이 서적을 사랑하고, 목축을 하는 천하고 가난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리마다 큰집을 지어 놓고 이를 경당이라고 불렀는데, 미혼의 자제들이 밤낮으로 여기에 모서는 태학과 경당에서 오경을 중심으로 가르쳐서, 이를 습득하고 활용한 것은 고구려 학술에서 경학을 중시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고구려의 유학사상은 오경을 중심으로 한 한 대의 경학을 수용한 것이라 하겠다.2.백제▶일찍부터 박사의 제도가 있어 오경박사(五經博士) 등 각 부분에 전문인 박사들이 활약하여 일본에까지 초빙되어 일본문화를 개발하고 지도하였다.▶근초고왕시대에 왕자 아직기와 박사 왕인을 일본에 보내어 유교경전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내용을 전달함으로써 왕실의 스승이 되었다. ⇒ 이를 볼 때 백제에서 상당한 유교발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또한, 이시기에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함. - 『서기(書記)』▶백제의 교육기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경학에 대한 박사의 명칭으로 보아 고구려의 태학과 같은 기관이 설립되었으리라 추정되며, 오경을 중심으로 한 유학사상이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초기에는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남방문화도 받아들여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킴. ⇒ 오경박사 외에 역박사를 따로 둔 것과, 음양오행을 잘 이해하고 의약과 점상술이 발달했던 것이 남조문화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양(梁)나라에서 예를 강의할 육후를 초빙한 것은 백제에서 예학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백제 문화의 특징은 중국의 문화와 학술을 수용하여 토착화하는 한편 이를 일본에까지 전파하여 일본 고대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는 것이다.3.신라▶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문화의 발전이 늦었으며, 학술 면에서도 중국과의 직접교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뒤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북방으로부터 중국문화를 배운 유민들이 남하하면서 일부 지식인들이 한문을 이해하고 그 속에 내재된 사상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중국과의 직접교류 이후에 한문의 사용이 점점 보편화되어 문화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 한문의 사용은 유교사상의 이해와 활용이 점점 깊어지고 넓어졌음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파악된다.▶지증왕 때 상복이 제정되고 법흥왕 때에 율령이 반포되고, 관복이 정해졌는데,것으로 보여진다. 화랑들의 교육에 효제충신의 윤리가 중시되고, 노래와 음악·여행 등으로 정서를 도야하였고, 또한 신체의 단련을 추구하였다. ⇒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Ⅲ. 政治理念과 儒學1.고구려▶초기부터 한문을 사용하였고, 국가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태학에서 오경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니 고구려의 정치이념에 휴학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그리고 대외적인 항쟁이 계속되던 삼국시대에 자주정신의 함양과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당시 선진국인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유학사상을 활용하여 공동체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은 시기 적합한 일이었을 것이다.▶광개토대왕 비문의 첫 부분에 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건국설화가 나오는데, 여기에 통치이념이 잘 나타나 있다. ⇒ 동명왕이 18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승천할 때 세자 유리왕에게 "도로서 다스려라(以道輿治)"라고 말한 것은 정치를 함에 있어서 신의 위력이나 무력에 의존하지 말고 도로서 하라는 것이다. - 덕치주의(德治主義)) 유교의 이상적 정치를 왕도라 하는데, 왕도정치는 덕치요, 인정이며, 궁극적으로는 도로서 하는 정치이다. 힘이 아닌 도를 정치원리로 제시한 것은 패도가 아닌 왕도정치의 내용으로 덕치주의 정신과 상통한다.▶이러한 덕치주의의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태조가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면서 한 말, 모본왕 때 두노(杜魯)가 포악한 왕을 백성의 원수라고 추방)고구려의 정치이념에 있어서 왕이나 신하들이 유교정치이념에 따라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2.백제▶백제의 국가체제는 어떤 확고한 부족조직의 기반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 아니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방의 유이민(流移民)이 건설한 것인 만큼 일찍부터 중국 문화를 수용하고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국가 질서를 수립하였다.▶당시 백제에서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여러 부족들의 통합이 시급하고 국가체제의 정비를 통한 국력의 신장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제왕학(帝王學)으로서의 유교적 정치이념과 수용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백제가 중앙집고 정사를 펴는 장소로서 『예기』 「명당편」에 나오는 명당과 관계 있다고 할 수 있다.초기에는 부족집회장을 계승한 회의기관이 되고 실무를 집행하는 국가의 중심적 정청(政廳)이었으나 후기에는 간간히 개최되는 중대회의 이외에는 의례적인 반형식적인 존재가 되었다.▶백제의 경내(京內)지역 편제에 오부제가 있다. 이는 고구려의 오부제와 달리 방위적인 구분으로 명칭을 붙인 것이니 이것은 오행사상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이와 같이 백제에서는 유교의 제도를 받아들여 관제 행정조직 등을 정비하고 정치원리로서 애민사상과 충의정신) 다루왕 때 가뭄이 계속되자 왕이 죄수들을 사면하여 죽을죄도 용서해준 것과, 비류왕이 백성을 위문하고 환과고독(鰥寡孤獨)에게 곡식을 하사한 것은 유교적 인정을 베푼 것이라 하겠다. 계백과 백제멸망 후 흑치상지의 국권회복의 의리정신에는 충의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을 활용하여 공동체의식을 함양하고 통치이념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3.신라▶부족사회인 육부의 촌장들이 제정일치적 성격을 띠고 통치해 오던 신라는 점점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 나아갔다.) 신라의 유교사상의 수용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나 백제보다 훨씬 뒤떨어진다. 이는 지증왕 대에 이르러서야 국호를 신라라 정하고, 임금의 칭호를 거서간·차차웅·이사금으로 부르던 것을 왕으로 부르고, 법흥왕 때에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을 제정한데서 드러난다.▶삼국이 서로 다투던 시기에 신라의 당면한 문제는 국가안보였다. 이에 국가의 질서와 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유교적 정치이념과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다.▶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체제를 정비하고 직제를 정비한 내물왕은 중국과 직접 교류를 통해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다. 내물왕은 백성이란 마음(常心)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통치자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 두었는데 이는 소박하지만 유교가 정치이념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진흥왕 순수) '순수(巡守)'란 『예기』 「왕제편」에 나오는 유교정치의 한 행사로서 천자가 지방을 순행관찰 이념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여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안민의 정치이념은 문무왕에게도 계승되어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겠다.이렇듯 신라에서는 유교정치사상을 활용하여 국민을 단합하고 외교를 펼쳐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Ⅳ. 生活과 儒學1.고구려▶고구려인들이 대학과 경당에서 오경을 중심으로 한 교육을 받고, 유학사상에 근거한 정치제도 아래서 살았으니 그들의 제반생활상이 유교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결혼풍습에 초기에는 매매혼의 풍습의 남아 있었으나, 유교의 예법에 따라 매매혼의 풍습이 사라졌다.▶부모와 남편의 초상에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이는 공자가 말한 부모의 상은 3년이 천하의 통상(通喪)이라 함을 따른 것으로 유교의 『의례』와 상통하는 점이다.▶묘지제도의 침향(枕向)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다. 이전에는 해가 뜨는 방향과 햇볕이 뜨겁게 비쳐주는 방향이 다시 생명을 부활한다는 사상에서 동침과 남침 이였으나,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점점 북침으로 바뀌었다. 이는 우리 고유의 생사관이 바뀌었음을 나타내 준다.) 『예기』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는 것은 삼대에 공통된 예법이다. 어두운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라고 전해진다.▶고구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고분의 벽화를 들 수 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으로 사신도를 들 수 있는데, 남주작, 북현무, 좌청룡, 우백호, 그리고 천장에는 별자리의 그림, 큰 새를 타고 날아가는 신선의 그림 등이 있는데 이는 「예기」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이다.) 유교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며, 그 속에는 『주역』의 음양사상이 들어 있으며, 동서남북의 수호신과 중앙에 사자(死者)가 안치되었다는 것은 오행의 관념을 나타낸 것이다. 큰 새를 타고 날아가는 신선의 모습은 인간세계를 떠나가서 선계(仙界)로 가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이는『예기』에 몸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 관념을 상징.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비교 96602007 김종학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비교】☆근세의 철학인 합리론☆중세 철학이 신 중심의 철학이라면 근세 철학은 인간 중심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중세의 철학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의한 정신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에 의하여 강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것이 중세 말기에 이르러 스콜라 철학의 붕괴와 더불어 철학은 교회의 권위에 구속됨이 없이 자유로이 그 탐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근세 철학은 자기 자신을 자각한 인간이 자유로운 정신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비판하며 철학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자기자신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입장에서 철학을 전개시키기 시작한 것이다.근세의 대표적 철학은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 등을 들 수 있다. 대륙합리론의 대표자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이다.합리론은 이성론 또는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라고도 하는 것으로, 인식의 원천은 감성적 경험에서가 아니라 선천적 이성에 의한다고 주장한다.☆데카르트(Descartes)☆1.데카르트의 생애(1596∼1650)데카르트는 프랑스 뚜레느주의 라 아이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1604년에서 1612년까지 라흐레슈의 예수회파 학교에서 스콜라적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근대 수학에 관한 기초를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1612년 파리의 교외에 은거하면서 기하학을 연구하여 해석기하학을 창시하기도 하였다. 1617년 네덜란드 군대에 입대하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평화로운 시기였으나 1619년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바바리아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방법서설에 기록한 경험들이 이 때에 겪은 것들이다. 1629년 이후 20여 년간 네덜란드에 머물며 철학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의 대부분의 저서들은 이 시기에 집필된 것들이다. 1649년 스톡홀름의 프랑스 대사 샤뉘를 통하여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와 편지 왕래를 갖게 되었고, 이러한 교류에 의하여 여왕은 군함을 보내어 데카르트를 데려오게 하였다. 그, 회의에서 회의에의 과정을 끝까지 추구해나갔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그의 유명한 『방법론 서설』이 된 것이다.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회의를 통한 진리의 길을 모색해 나갔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전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로서의 명제를 얻게 된다.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판단이다. 이 말이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인 동시에 대륙 이성론의 기초가 되었다.데카르트에 의해서 역사는 학문과 삶에 있어서 신앙이 아닌 새로운 토대 위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니, 소크라테스의 회의가 그리스 철학을 탄생시켰고,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의가 중세철학의 발단이 되었다면, 데카르트의 회의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1)「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는 철학도 수학과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명백한 직관적 진리를 구한 다음 이것을 기초로 하여 점차 새로운 진리를 연역하고 전개해가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체의 것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로 임하여, 우리들이 보통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전혀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데카르트는 자기 철학의 기초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각도에서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해 보기로 하였다. 그는 수학, 감각 등 모든 것을 회의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회의는 회의를 위한 회의가 아니라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한 회의였다. 즉 방법적 회의였다. 그러므로 수학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면서도 회의해 보는 것은 모순이 아니며, 실제로 존재하는 외계를 회의해 보는 것도 다만 학문의 방법론상 그것에 대해 일단 회의를 제기해 보았다는 것으로 우리는 해석해 볼 수 있다.데카르트는 우리들이 일체의 것을 의심해 보았을 때, 우리들은 단 하나의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의심하는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일체의 것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한다는 사실, 우리들이 사유하면서 존재한다 관념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부 세계의 존재에 의문을 갖는 회의주의적인 주장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먼저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가능한 것이다.데카르트에 있어서 신의 관념은 신에 의해 우리들에게 생득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이 신의 관념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 신의 존재의 증명은 인성론적 증명이라 불리워지는 것으로서 데카르트의 독창적인 것이다.데카르트는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도 시도하고 있는데, 이러한 신의 개념이 갖고 있는 의의는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 즉 주로 물체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매개로서의 논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데카르트에 의하면 신은 선하고, 완전한 자이기 때문에 일체의 완전한 성질을 갖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성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성실성을 신뢰하는 이상 우리들은 감각에 의해 보여지는 물체의 존재를 진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나에게 물체의 존재를 믿게 하는 경향을 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아무 것도 없다면 신이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실한 신은 우리를 속이는 일이 없으므로, 물체는 존재한다는 것이다.데카르트는 이상의 신·정신·물체를 실체라 불렀다. 그에게 있어서 실체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의 세 가지 중 참된 의미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신뿐이고, 정신과 물체는 신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전혀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신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도 역시 실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신은 무한적 실체이고, 정신과 물체는 유한적 실체이다.실체는 여러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실체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을 속성이라고 하고, 그 밖의 다른 성질들, 즉 속성을 예상하고서야 비로소 생각될 수 있는 제 2차적 성질을 양태라고 한다.(정신의 속성은 사유, 양태는 감정·의지·표상·판단 등)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정 있는 점을 단한 곳에 한정하여 이것을 松科腺이라 하고 송과선은 정신이 있는 자리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입장은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3.데카르트 철학의 의의데카르트의 비판적인 회의의 방법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의 존재와 물질계의 존재까지도 확증해 나갔다. 생각하는 나란 정신이며 그리하여 정신과 신과 물질은 데카르트의 세계를 이루는 기본 개념이 된다. 그에 의하면 신뿐만 아니라 정신과 함께 물체도 실체이다. 정신과 물질은 서로 독립된 영역이라는 점에서 대등하며, 뿐만 아니라 신은 이제 물질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어떠한 구실도 하지 않으며, 물지의 영역 즉 자연계는 전적으로 기계론적으로 설명되며 인간은 정신과 물질의 관련에 있어서 문제되고 해석된다. 신과 관련을 떠난 자연과 인간이 신앙의 제약을 벗어난 새로운 사유의 원리에 따라서 이해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데카르트 철학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완성 또는 거의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송과선 이론을 제외하면 서로 관련시키지 않고 각각 연구할 수 있는, 병행되면서도 독립된 정신과 물질의 두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마음이 육체를 움직일 수 없고, 육체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 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데카르트는 물질 세계에 대하여 엄격하게 결정론적이다. 모든 동물은 자동 기계이며, 모든 물질의 운동은 물질적인 법칙에 의해 결정되며, 정신현상도 마찬가지로 결정적이다. 그런데 인간에 있어서는 신과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그가 당시의 과학에서 배운 것과 스콜라 철학 사이에서 모순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이 모순이 새로운 스콜라 철학이 되지 않도록 한 것이며 다른 두 철학파의 원천이 되었다.데카르트에 있어서 철학의 방법론적 근거는 수학에 있으며, 수학의 방법론적 핵심은 연역성이라고 보았다.』, 『신학·정치론』, 『윤리학』등이 있다.2.스피노자의 사상스피노자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데카르트 철학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스피노자도 역시 수학을 학문의 모범이라고 생각하고, 기하학적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여 철학을 극히 엄밀한 논증적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성에 의하여 일체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이성에 대한 절대적 진리는 스피노자 철학에 있어서의 제 1의 전제를 이루고 있다.1)자연은 실체이고 실체는 곧 신이다.스피노자에 의하면 자연이란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세계 혹은 우주가 아니다. 자연이란 정신을 포함한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것이다. 따라서 자연 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자연을 창조한 초월적인 신 혹은 인격신도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스피노자에 있어서 신은 곧 자연이며 자연이 곧 신이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흔히 범신론이라고 부르는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일컬어 신이라고 칭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연관과 신관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스피노자에 있어서 철학의 출발점은 실체이다. 실체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이 되고 아무 다른 존재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무한자로 받아들인다. 또한 실체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해야 하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실체 외에 아무 것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견해이다.스피노자에 있어서 자연과 실체는 용어상의 차이일 뿐, 둘 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신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제약이 없어야 하고 제약이 없기 때문에 신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자연이 신의 창조물이고 따라서 신과 구별되는 존재라면 신은 무한한 존재일 수가 없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자연이 곧 신이며 신은 곧 자연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目 次 】Ⅰ. 서 론Ⅱ. 본 론1.理氣論1)理와 氣의 정의2)理와 氣의 관계3)理氣論2.四端七情論爭1)논쟁의 철학사적 의의2)논쟁은 왜 일어났는가?한국윤리사상 사단칠정론(이황과 기대승)3)논쟁의 내용과 전개4)이황과 기대승의 입론 근거Ⅲ. 결론(논증에 대한 종합족 고찰)【 四 端 七 情 論 】Ⅰ. 서론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물음은 가장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철학적 과제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철학자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규정한다. (공자의 性善說, 맹자의 性惡說) 인간에 대한 규정의 필요성은 사회 현실을 더욱 적절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이와 같은 점에서 조선시대 주자학자들이 '四端'과 '七情'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심리 현상을 분석한 것은 나름대로 충분한 자기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만하다.이 논문에서는 이황과 기대승이 '四端七情' 논쟁에서 각각 朱子學을 어떻게 이해하였고, 그 내용은 무엇인지, 왜 그렇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Ⅱ.본론1. 이기론1)이와 기의 정의理는 陰陽五行의 변화와 생성을 주재하는 이치로 形而上의 세계를 말한다. 즉,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 궁극적인 이치라고도 할 수 있다.氣는 만물을 생성하는 질료적인 것으로 形而下의 세계이다. 즉, 물질 세계를 만드는 재료로써, 물질계에 한정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2)이와 기의 관계주희는 '이는 우주 만물의 원리이자, 각 사물에 내재해 있는 것이므로 氣없이는 理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氣는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반드시 理의 원리에 의하여 움직이게 된다. 이렇듯 理氣의 관계는 둘이면서도 나눌 수 없는 관계라 하였다.3)이기론理와 氣로써 우주와 인간을 설명한 性理學의 形而上學 이론으로, 心性論과 함께 성리학의 근간을 이룬다. 理와 氣는 처음부터 불가분의 개념이 아니었으나 宋代에 성리학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철학 범주가 되었다. 氣는 만물을 생성하는 질료형이상학적 원리보다는 인간의 선악과 의리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으므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더 관심을 깊게 가졌다. 그리하여 서경덕은 氣一元論, 이황은 理氣二元論이면서도 理氣不相理論 등의 학설을 전개했으며, 후에 각기 다른 학파를 형성케 하였다.2.사단칠정 논쟁1)논쟁의 철학사적 의의조선 초기의 주자학은 단순히 사상계만을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 통치의 기본 이념으로서의 역할까지 담당함으로써 명실공히 새로운 사회의 이념으로 각광받게 되었다.사실 조선시대 주자학은 발생 초기부터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의 경우처럼 주자학 발생의 전제조건이 되는 자연 과학이 경제적 토대 등 사회적 諸條件이 충분히 조성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통치 이념으로서의 기능을 무척 중시했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불교를 대체하는 일종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주자학은 엄밀한 학문적 체계나 독자적인 성격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일종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기능 하는 것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전개시키기보다는 주로 국가통치의 방법으로서의 정치이론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주자학의 자기 한계성은 이언적과 서경덕에 이르러 점차 해소되기 시작해서,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일어났던 四七理氣 논쟁은 본격적으로 주자학 자체가 지니고 있던 문제점이 노출되어 재정리하는 입장에서 논쟁을 전개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 주자학의 전개 양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四七論爭은 조선 중기 주자학과 더 나아가 조선 주자학의 성격을 가름하는 성격을 지닌다.2)논쟁은 왜 일어났는가?四端이라는 개념은 맹자가 性善說의 근거로 제시한 인간심리 현상중의 일부를 말한다. 곧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을 각각 仁·義·禮·智로 설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七情은 『禮記』에서 인간의 감정을 통칭하여 喜·怒·哀·懼·愛·惡·欲으로 지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주자학에서는그것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은 性이다.性과 情에 대한 구분은 위와 동일하지만 여기서는 四端이 아닌 喜·怒·哀·樂, 곧 七情은 情이고,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性이라고 했다. 여기서 性을 仁·義·禮·智로 보는 것은 위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러나 四端과 七情이 다 같이 情임에도 동일 개념으로 보지는 않았다. 四端은 맹자가 性善說의 근거로 제시한 것인 만큼 純善無惡한 것이고, 七情은 발동하여 중절한 경우는 善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惡이므로 有善有惡한 것이다. 이 경우 인간의 선한 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四端 곧 善한 情은 純善無惡한 性에 의해서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의 논쟁은 주희의 心性論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七情 중의 惡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문제가 다르다. 단순하게 보면 七情은 情이고 情의 근거는 性이므로 七情도 性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七情 중의 惡도 純善無惡한 性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필연적으로 논리적인 모순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주희는 "四端에도 不中節이 있다"고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사단의 경우도 반드시 純善無惡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가능하게 된다. 이 경우 앞서의 전제와 어긋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善한 심리 현상마저도 일관성 있는 설명을 기대하기 어렵다.이러한 주희의 四端七情 논쟁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四端七情 논쟁은 주자학의 心性論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황과 기대승 두 사람의 논지는 四端과 七情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에서 갈라진 것이다.3)논쟁의 내용과 전개논쟁의 발단은 정지운(鄭之雲)의 「天命道」를 이황이 수정하면서 비롯되었다. 「천명도」에서 정지운은 "四端은 理에서 發한 것이고, 七情은 氣에서 發한 것이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했는데, 이황이 "四端은 理가 發한 것이고, 七情은 氣가 發한 것이다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더 나아가 四端은 七情 속에 포함된 것이므로 四端과 七情을 상대적 개념으로 대응하여 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곧 七情은 인간의 심리 현상을 통칭한 것이고, 그 중에서 선한 것이 四端이라는 것이다.-理와 氣의 관계를 현상세계에서는 理와 氣를 나눌 수 없다고 규정.-理를 氣속에 부속된 내재 원인 정도로 보고 있음.※기대승의 이러한 입장은 理의 무작용성을 강조함으로써 이황의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까지 이를 수 있는 문제였다.②이황의 제1서-자신의 주장에 무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편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이 타당함을 설명. 기대승의 주장을 일부는 수긍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점을 반박-四端과 七情이 다 같은 情이라는 점에는 동의. 그러나 다 같은 情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理發·氣發로 四端七情을 설명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자신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해 本然之性과 氣質知性을 근거로 삼음.(주자학에서 性은 理가 氣 속에 타재(墮在)할 때만 성립하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에서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여 각각 理와 氣로 나누어 설명해 왔다. 따라서 情도 그렇게 나누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이황의 생각이다.)-四端은 仁·義·禮·智에서 방생하지만, 七情은 외물에 감촉되어 발출된다고 주장.(四端과 七情을 완전히 나누려 시도)-주희도 四端과 七情을 각각 理가 發하고 氣가 發한 것으로 말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주장에 문제가 없음을 주장.③기대승의 제2서-이황의 편지가 당초 자신이 제기했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주장이 반박을 받자 다시 논점을 정리하여 훨씬 구체적으로 이황의 입장에 무리가 있음을 지적.-四端과 七情이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七情 중에서 中絶한 것이 四端이라고 주장.-七情이라는 인간의 심리 현상은 善한 경향을 지니는 四端과 그렇지 않은 非四端으로 구분된다고 주장.(칠정 〉사단, 비사단) → 이황이 四端과 七情을 각각 다른 것으로 나누었고, 이황도 七情속의 한 부분에서 전혀 좁혀지지 않았고, 이후로도 좁혀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여전히 기대승이 주장한 四端과 七情의 개념 규정을 받아들이면서 이들을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대. 理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 四端이고, 氣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 七情이라 주장.-天地之性이라고 해도 氣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는 점을 들어 마치 氣 없는 理가 없다는 주자학의 기본 입장을 긍정하는 듯하면서도 도리어 그것을 근거로 理와 氣를 나누어 이해하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⑤기대승의 제3서-새로운 수정안 제시.-四端을 理가 發한 것으로 보는 것은 괜찮지만, 七情을 氣가 發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주장.-四端이든 七情이든 다 같은 근원을 가졌음을 비유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각각을 理發·氣發로 나눌 수 없는 근거를 제시. 七情 중에서 中絶한 것은 四端과 마찬가지로 理에서 發한 것이라고 하여 四端은 七情 중의 中絶한 것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情이 發하는 것은 理가 움직임에 氣가 갖추어지고, 혹은 氣가 감응함에 理가 탄다"고 하여 이황의 주장에 대한 수정안을 제시. → 四端과 七情을 다 같은 情으로 보는 자신의 心性論 구조는 그대로 두고 이황의 입장을 일부분 수용한 것이다.-情의 움직임을 四端과 非四端으로 구분함으로써 四端의 경우는 理가 움직임에 氣가 갖추어지는 것으로 보고, 四端이 아닌 경우는 氣가 외물에 감응하여 움직임에 理가 타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다 같은 情이 어떤 경우는 善이 되고 어떤 경우는 惡이 되는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四端을 理가 發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황의 입장에 가까워진 것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四端과 七情의 관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논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 다름없다.4)이황과 기대승의 입론 근거이황의 입장에 대한 기대승의 반론은 두 가지 근거를 지녔다.첫째, 四端과 七情의 내포와 외연을 따질 때 四端은 七情 속에 포함되는 구조이므로 결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