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동북아 국제 정치와 러시아, 일본 전쟁1. 의화단 사건계속되는 서방의 수탈과 사회혼란으로 인해 중국의 민중은 각지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자주 서양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였는데, 1898년부터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운동이 그대표적인 예이다.의화단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하북,북경,천진,산서,하남,내몽고,동북등지로 발전해 갔다. 의화단의 구호는 '부청멸양(청조를 돕고 서양세력을 축출)'이었다. 즉 침략자를 내몰고 국가를 재건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서양선교사 살해와 교회 방화, 철도 파괴등극단적으로 서방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이었다.의화단이 마침내 북경의 외국공관을 습격하기에 이르자 서양제국주의 8개국(영국,미국,일본, 러시아,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이태리)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직접 이들과 대치하고 북경과 천진을 함락시켰다. 결국 의화단운동은 진압되고 서테후와 광서제도 북경을 탈출하기에 이른다. 1901년 9월, 청정부는 결국 열강에 항복하고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내용은 막대한 배상금 지불, 외국 군대의 주둔 인정등을 담고 있어 중국이 사실상 열강의공동 관리하에 들어간 것과 같은 형세가 되었다.2. 러시아, 일본의 대립1) 러시아의 만주 점령의화단 사건의 진압을 위해 만주 전역을 점령, 8월의 철군 성명에도 불구하고 만주에서의주둔은 계속되었으며, 이같은 행동은 열강의 반대에 부딪친다. 1900년 10월 영국, 독일 협정, 영국, 일본 동맹 체결2) 청국, 러시아 간의 합의(1902년 4월 8일)영일 동맹 체결 이후 러시아는 일본에 대해 신중하고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자 하였고 온건파의 주장에 따라 만주 철병이 결정되지만, 예정대로 이행되지 않는다.3) 러시아의 새로운 동북아 정책 노선과 뤼순 회의러시아 국내에서 다시 강경파가 대두하며, 1903년 4월, 5월 두 차례에 걸친 회의에서 새로운 동북아 노선이 결정되었다. 이 노선은 매우 모험주의적이고 일본과의 대결을 전제로한 정책이었다. 7월 뤼순 회의에서 북만주에 한한 계속적인 북부 지역 점령의무의미함을 합의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남만주에도 계속 주둔하였으며, 이같은 상황은 일본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데에서 기인하였다.4) 일본의 강경론 대두일본은 청일 전쟁 직후부터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일본 국내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요구하는 여론이 팽배하였다.5) 러일 교섭 (1903년 8월-1904년 1월)일본의 기본 입장 : 조선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하고,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 균등 원칙 주장.러시아의 기본 입장 : 만주에서의 배타적 권리, 북조선에 중립 지역 설정 요구, 조선에서일본의 정치, 경제적 우월권은 인정하나 군사적인 우월권은 인정 안함.6) 교섬 실패와 전쟁 발발러일 전쟁의 원인 : 일본의 북진 정책, 러시아의 전통적인 남하 정책, 베조브라조프 일당의 모험주의 노선3. 러, 일 전쟁1904∼05년에 만주·한국·동해에서 싸운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 1904년 2월 8일에 일본함대가 뤼순군항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시작되어, 1905년 9월 5일에 강화를 하게 된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전쟁이다. 한국과 만주(중국 동북지방)의 분할을 둘러싸고 싸운 것 이지만, 그 배후에는 영·일동맹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 초전이었다. 러시아는 패배의 결과로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전승으로 한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만주 진출이 확정되었으나 미국과의 대립이 시작되었다.1) 전황1904년 2월 8일 일본연합함대의 여순항 기습으로 러일전쟁 시작, 1904년 1월 27일 여순항의 러시아 함대 3척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선전포고 없는 전투에서 일본은 승리하고,제물포함의 러시아배, 러시아 기함 빼뜨로빠블로로프스끄 등을 차례로 격파한뒤 1905년5월 동해에서 발틱함대가 대패하게 된다. 일본은 계속해서 승리를 해나갔고 러시아의 전쟁에서 쉬운 승리를 이끄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양국모두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강화쪽으로 돛대를 돌리게 된다. 러시아는 러시아의 재정경제 상태를 교란시키고 국민의 빈곤을 만을 고조시키고 있다 라는 한마디로 전비지출과 관련한 문제로, 일본은추격적을 벌릴 여유가 없었다는 것과 전선이 만주로 확대됨에따라 더 이상의 작전수행을할 여력이 없었던 이유에서였다. 결국 1905년 6월 8일 양국에 강화권고문을 보낸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에서 일본정권 고무라 주따로 외상과 다까히라 코고로 러시아 정권의 윗테 주일공사로젠의 참석하에 1905년 8월 9일 예비회담이 열리게 된다.2) 각 국의 입장영국은 일본을 적극 지원. 영국은 프랑스나 러시아측의 전쟁 방지를 위한 중재를 모두 거부. 전쟁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 그러나 일본을 위해 전찰를 조달하고 제3국의 러시 아원조 제공을 저지함.미국도 일본에 호의적. 개전 전 중국의 영토보전, 기회균등론 등 일본의 제안은 미국의 입장과 일치. 미국은 1904년 1월 전쟁이 발발하면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관계에 있었으나 영국과 충돌하는 것도 피하고 싶었다. 이에 프랑스는 평화적 해결을 원함. 전쟁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발틱함대에 석탄 공급 등의 편의를 제공.독일은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장.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려 동 부국경에서 안심하고자 하는 계산. 독일은 전쟁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이 기 회를 이용하여 러시아에 접근하여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와해시킬 계산을 하고 러시아 의 발틱함대를 지원하려 함. 하지만 발틱함대가 동해에서 섬멸당하자 러시아에 강화를 충고.3)강화 회담동북아지역에의 안정을 위해 평화중재자 역할을 하고자 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초기 평화협상안 권고를 무시했던 양측이 선회함에 따라 니콜라스 2세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협상테이블로 이끄는데 성공을 하게 되는데 이에 1905년 8월8일 포츠머스에 각국 대표자들이 임명되었고, 8월10일 첫 공식회의를 가졌다.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포츠머드 조약을 체결하여(1905.9),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요동 반도의 조차권과 북위 50사할린을 양도 받고,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경제상의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포츠머드 조약이 체결되기 전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1905.7)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해주는 대가로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곧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어(1905.8) 정치,경제,군사상의 특수 이익을 보장받는데 성공하여, 이제 명실공히 세계 열강이 인정하는 한반도 지배가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일본측 요구러시아의 초기 대응전쟁 배상금 16억엔(미화 8억달러)요구절대 배상불가 의 강경입장조선에서의 일본 지배권 인정할 것조선의 주권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인정뤼순-하얼빈간 철도 이양 문제중국에게 철도 판매 후 일본에게 판매금을 지불하겠다고 주장러시아의 극동에서의 해군력 제한부분적 인정, 러시아의 국가위신에 손상시킬 수 있는구체적 약속 거부오호츠크해 및 베링해에서의 어업권 인정만(灣)이나 강(江)까지 확대되지않는 조건에서 인정만주횡단 철도 이용의 상업적 목적으로의 제한병력수송가능함에 합의 후 전략적 목적 제한뤼순의 조차권 일본으로의 이전 요구중국이 동의한다는 전제하에 수용사할린 섬의 양도거부입장 고수이처럼 최초 일본의 요구에 대부분 수용하였으나 배상금 문제와 사할린 양도 문제로 협상회의는 계속 연기되고 결렬위기에 빠지게 되자, 루즈벨트의 양측에 대해 평화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막후 설득으로 러시아는 남부 사할린의 양보하고, 일본은 배상금 지불요구를 철회하고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받음으로서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되게 된다.이로써, 전쟁 초기 러시아의 중국대륙진출을 견제하려던 미국과 영국의 계획이 이루어졌고 러. 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도 당시 동북아 정세의 역학관계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던 데 그 원인이 컸다 할 것이다.4) 러, 일 전쟁의 영향러일전쟁은 일본으로 하여금 '대국주의'와 팽창주의에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다. 강대국 러시아를 격파하였다는 자부심은 곧 바로 대륙침략으로 연결되었다. 일본은 조선문제었다고 보고 이후 만주에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의 본격적인 만주 진 출은 영,미를 자극하고 영, 미의 견제가 시작되었다.러시아는 전쟁에 패배하여 국내질서가 더욱 불안정해짐. 러시아가 나아갈 길은 중앙 아시아와 발칸반도밖에 없었다. 중앙아시아 문제는 1907년 영국과 협상으로 평화적으로 조정되었으나 발칸반도는 열강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이렇게 볼 때 러일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하는 세력들의 형성을 촉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영국이 접근하게 되어 독일을 포위하는 형세를 취하 고, 일본은 만주 진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러시아를 발칸 반도쪽으로 나아가게 하였 던 것이다4. 일본의 조선, 만주 진출 - 러일전쟁의 결과는 포츠머스 강화회담과 을사조약으로 이 어져 한국은 주권을 일본에 거의 빼앗기고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1) 한일의정서 (1904년 2월 23일)한국정부는 러일 간의 급박한 사태를 감안,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군대를 서울에 투입하고 2월 9일에는 인천앞바다에서 러시아 함정 2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2월 23일에는 한국정부를 강압하여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의정서에 따 라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통신망을 접수하였으며, 경부,경의선의 부설권, 연 해의 어업권, 전국의 개간권까지 획득하였다. 한국정부는 전쟁이 일본의 승세로 기울자 같은 해 5월 18일자로 러시아와 체결하였던 일체의 조약 협정의 폐기를 선언하였다.2) 제 1차 한일 협약이에 일본은 8월 22일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한국과 체결, 한국의 외 교권을 거의 박탈하는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성립시켰다. 전승국이 된 일본은 1905 년 7월과 8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각각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인받았다. 이 어 9월의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한국의 독점적 지배를 확인받음으로써 한 국의 일본 식민지화는 졌다.
긴장완화와 다극적체제*요약*미· 소 양 진영의 날카로운 대립은 1953년부터 조금씩 누그러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의 사망(1953)에 따르는 소련 정권의 변동과 서부 유럽에 있어서의 대소 유화 정책론의 대두, 그리고 1953년의 한국 휴전과 1954년의 인도차이나 휴전, 중국· 미얀마 사이의 평화 5원칙 등은 모두 대립 완화의 원인과 징조였다.특히 소련의 수폭 실험 성공(1953), 대륙 간 탄도탄의 성공(1957), 인공 위성 스푸트니크 호의 발사 성공(1957. 10.) 등의 핵무기의 눈부신 발달은 국제 문제의 해결에서 힘에 의한 투쟁이 하나 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필연적으로 두 진영의 대립을 완화에의 길로 나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대체로 1955년부터 국제적 긴장 완화 (detente)의 징조는 현저하게 보여지게 되었다.1956년 흐루시초프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평화 공존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또 한편 미국에서도 1961년 케네디의 등장으로 평화 공존의 무드는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제네바에서의 미·소·영·불 수뇌 회담,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도 중립주의와 평화주의 사상의 고조, 수에즈 동란의 비확대화, 흐루시초프의 전면적 군축 제안, 서부 베를린의 자유화 제안 등 대립 완화의 분위기가 진행되어 갔던 것이다.한편, 공산 진영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둘러싼 이른바 '교조주의'와 '수정주의'의 대립· 논쟁이 나타나면서 자유 진영과 마찬가지로 다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국제 정치의 무대에 서 다극화를 촉진시킨 것의 하나는 1962년 10월 쿠바 위기였다. 미· 소 양국은 무력 행사를 하 지 않고 그 위기를 해결하였는데, 그것은 양 당사자가 전면 전쟁을 회피하고 평화 공존 노선 추종의 확인이라는 원칙 아래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어쨌든 이러한 사실은 두 진영 내부에서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전면 전쟁을기'는 제2차 대전 직후의 냉전 체제에서와 같은 의미와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극화의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보여지게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1) 국제 정세의 다극화소련의 변화 - 서독과 국교(1955), 흐루시쵸프의 미국 방문(1959) →평화공존 정책위기감 고조 - 베를린 장벽(1961), 쿠바의 소련 미사일 기지 설치(1962)양극화 현상 완화 - 제3세력 등장, 동구권 공산국들의 독자노선 선언, 중소 국경 분쟁, 프랑스의 독자노선2) 냉전의 종결긴장 완화 - 중화인민공화국의 UN가입(1971),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1975)미·소대립 완화 - 고르바초프의 개혁(1985)냉전 종결 - 미·소 정상의 냉전 종결 선언(1987)3) 미국의 발전아이젠하워 - 인종 차별 금지, 풍요한 사회 건설케네디 - 뉴프론티어 정책존슨 - 베트남 파병닉슨 - 중국과 국교, 베트남에서 미국 철수, 워터게이트 사건레이건 - 미국의 부흥→무역 적자 증가4) 서유럽의 발전·영국 : 애틀리(노동당)→처칠(보수당)→대처(보수당)·프랑스 : 제4 공화국(1946)→제5공화국(1958)·서독 : 아데나워(기민당)→브란트(사민당)→콜(기민당)·이탈리아 : 공화국 체제(1947)·에스파냐 : 왕정 부활(카를로스 1세, 의회민주정)→노동당 집권5) 동유럽 공산 체제의 붕괴·소련 :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개혁과 개방 주장)→엘친(독립국가 연합)·동유럽 : 공산정권 수립(소련의 위성국)→소련의 지도력 저하→유고의 독자 노선제1절 서구냉전구조의 재편성드골은 얄타회담 결과로 초래된 현대의 양극체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한 두 나라의 분쟁이 각 진영에 소속된 다른 나라들을 개입시키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주장하였다. 드골은 '사심없는' 프랑스를 제3의 강대국으로 부상시키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 및 NATO 통합 군사기구로부터 탈퇴 등 독자적 안보정책 수립, 독일과의 협력강회를 통한 유럽통합정책, 제3세계주의의 명분하에 독자적 영향권을 행사하기 위한 對아프리'미국의 핵무기 독점반대'를 주장했다. 그는 특히 케네디의 대계획(Grand Design), 즉 맥나라마의 유연반응전략(flexible response)-모든 분야에서 균형잡힌 군사력의 보강으로 억지의 최대효과를 높이자는 이론으로 통합억지체계 중시-에 따라 미국이 핵억지력과 핵무기를 독점하여 유럽을 소련 위협으로부터 방위하고 유럽 각국은 재래식 무기만을 보유케 하려 한다고 지적하였다. 드골은 미국의 이같은 핵정책이 유럽의 방위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보고 덜레스의 '대량보복전략(massive retaliation)'-우리가 선택한 수단과 장소에서 즉각적으로 보복하는 대량의 힘에 의존한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프랑스의 독자적 핵軍과 핵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드골은 미국과의 핵타협의 실패로 나토를 탈퇴(1966. 3)하고 앞으로 가상적국을 소련과 함께 미국도 포함시킬 것임을 명백히 했다.제2절 중소분쟁과 아시아냉전구조의 제편성드골외교가 자유진영 내의 갈등이라면 중소분쟁은 사회주의블록의 균열이라 볼 수 있으며 밀월시대부터 논쟁시기, 분쟁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1. 중·소 밀월시대(1949∼1957)→ 소련의 중공승인(1949)→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1950)→ 소련의 對중공 경제원조의 증대(1953)→ 중·소 합작회사의 청산 합의(1954)2. 중·소 논쟁기→ 스탈린 격하운동: 후르시초프의 '1인 숭배 배격론'이 모택동의 지위 위협→ 평화공존론(후르시초프)→ 인민공사운동: 중공의 인민공사의 발족을 소련은 반동적이라고 비난→ 대만위협의 위기: 군사행동에 대한 사전협의를 규정한 중소조약 위반→ 대만문제: 후르시초프의 두 개의 중국안에 대한 중공의 반발→ 중·인도 분쟁: 소련의 중립적인 입장고수로 중공의 비위를 거슬림3. 중·소 대립 및 분쟁기1 이념전쟁: 교조주의(중공) 對 수정주의(소련)→ 평화공존문제(제22차 공산당 대회, 1961)→ 사회주의에로의 평화적 이행문제→ 전쟁불가피론에 대한 논쟁2 알바니아 문제: 소련의 친유고정책과 중공의 친알바니아 정책의 대립1969. 3)제3절 닉슨독트린과 아시아냉전구조의 재편성1.배경1955년 후르시초프의 '평화공존론' 이후 중·소의 대립 속에 中·美 관계개선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즉 1964년 프랑스는 앙드레 말로(Andree Marlaux)를 파견해 중국을 승인하였으며 독일의 브란트 수상은 '동방정책'(1969.10)을 통해 2차대전 이후의 국제질서와 동독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미국의 키신저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여 협력을 위한 정지작업을 수행하였다. 1971년 4월 중국이 미국의 탁구팀을 초청한데 이어, 7월 15일에 중국은 닉슨 대통령 초청 및 수락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미국과 중국의 관계회복과정은 특히 일본을 소외시킨 가운데 진행되었다. 주미 일본대사의 다음 말은 일본이 중미 관계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 알 수 있다.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2. 진행중국은 1971년 10월 알바니아의 제안에 따라 안보리 이사국에 가입하는 한편 대만을 안보리에서 추방하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닉슨 대통령의 중공방문 발표가 있었고 다음 해(1972) 2월에 「닉슨-모택동 회담」이 있었다. 이 회담의 주된 내용은 하나의 중국 인정, 대만은 중국의 일부임을 인정, 중국의 통일 문제는 중국인에 있다, 그러나 1954년 이래의 미·대만 간의 방위조약은 유효하다는 것이었다.1972년 9월에는 일본 다나까(田中)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여 「다나까-모택동 회담」을 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중국정부가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두 나라간의 전쟁상태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또한 '오히라 성명'에 의해 대만과의 조약이 이미 실효성을 잃었음을 선언하고, 장래 평화우호조약을 협의 할 것을 결정하였다.3. 닉슨 독트린의 국제정치적 의미첫째, 아시아 민족주의의 재평가이다. 미국은 원조나 무기 없이 수하르토라는 민족주의적이며 우익적인 군부에 의해 인도네시아의 좌익정부가 우익정부화되는 것을 로써 중-소간의 민족주의적 대립을 유도하였다.둘째, 아시아 내의 세력균형정책이다. 미국은 키신저의 발상엥에 따라 중공으로 하여금 소련을 견제케하는 동시에 일본을 견제케 하려는 정책을 구상했다. 키신저는 1815년 이후 유럽의 국제질서에 있어서 영국이 나폴레옹 이후 패권을 장악하려는 러시아와 프랑스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도록 중부유럽을 지원한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다. 요컨데 미국은 중국을 국제정치의 무대로 끌어들여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한편 일본의 발흥을 억제하려 하였다.셋째, 아시아 문제의 아시아화 전략의 채택이다. 미국은 월남전 패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으로부터 아시아 문제를 아시아인화 함으로써 일단 월남전의 수렁에서 벗어나 보려 했다. 이는 주한 미군의 부분철수와 함께 '한반도 문제의 한국화'라는 남북한 통일론의 등장을 가져왔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이완된 한미관계를 이용하여 유신치제라는 적나라한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했다.넷째, 미국군사전략의 변화이다. 닉슨독트린을 계기로 미국은 전아시아에서 군사선을 해제(disengagement policy)시킴으로써 중공의 모든 核을 소련으로 향하도록 유도했다. 특히 이데올로기와 미국의 군사력에 이해서가 아닌 아시아 민족의 세력균형을 통해서 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원칙이 천명되었다.미국은 특히 지상군을 철수하는 대신 해·공군력을 보강하는 군사전략을 수립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경험을 토대로 군사력에 있어서 지상군과 기지전술을 포기하고 기술집약적인 해상정책으로 변환하였다. 그 일환으로 한국의 美지상군 중 보병 2개 사단의 1만 2천명이 철수하였다(1970. 10까지). 그 대신 미국은 "아시아 국가 중 水路(sea route)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는 인식 하에 미국의 해·공군력으로 보완하는 '도서·수로전략'을 전개했다.4. 닉슨 독트린의 평가마샬플랜(1947)으로 시작된 냉전체제가 베를린 봉쇄(1948)와 한국전쟁을 계기로 격화되었으나 중소대립(1962)과 프랑스의 독자행동(1966)으로 냉전체제는 균열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