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르 Phedre(Racine)』의 비극성 연구Ⅰ. 서 론프랑스의 문학 및 예술의 역사에서 17세기는 고전주의의 세기로 불려진다. 고전주의시기에 가장 인기 있던 쟝르는 연극이었으며, 이 시기를 프랑스 연극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프랑스 고전주의 희곡의 중심에는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그리고 라신이 있으며, 이들 중에서 코르네이유와 라신은 고전비극의 토대를 굳건히 세움으로써 프랑스 문학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다.코르네이유를 고전비극의 창시자라고 한다면 라신은 코르네이유의 뒤를 이어서 고전비극의 전형을 확립시킨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단연 17세기 고전비극의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극작가였으며, 현대적 관점에서도 비극의 정수를 보여주는 극작가로 평가된다. 라신의 비극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것의 바탕이 된 고전주의 이론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1. 고전주의 이론16세기 말엽에서 17세기초에 걸쳐, 르네상스) 정신이 변모하여 싹트게 된 고전주의는 프랑스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초래했다. 무질서와 무정부상태에 대한 조화와 통일에 대한 요구는 17세기 프랑스의 정치?사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예술의 영역에서도 통일성을 요구하였다. 예술의 모든 쟝르와 모든 기질에 유효한 하나의 확고한 이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고전주의 이론’이라는 대원리가 탄생된다. 고전주의 대원리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되며 그것은 다음과 같다.(1) 고대 작가와 자연의 모방고전주의 작가들은 그리스와 라틴의 고대 작가들에 대한 모방에서 예술적인 완벽성을 추구하는 정통적인 선구를 찾았다. 예술의 목적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직접적으로 자연을 모방할 수는 없고, 이미 선택하여 구성작업을 해 놓은 고대 작가들을 모방하면 자연을 되찾게 된다고 생각했다. 17세기 전반인들은 고대 작가와 자연의 모방이라는 예술원리를 정리했다.(2) 작법과 역사적 진실예술가가 천부적으로 지닌 재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거기에 기법이 덧붙2편은 코르네이유의 모방이지만 나머지 9편의 비극은 독창적인 걸작들로 모두 5막 운문극이다. 그 중에서 4편은 1660년대의 작품이고 5편은 1670년대 작품이다.먼저 1660년대의 작품들을 열거해 보면, 『테바이드 Thebaide』(1664), 『알렉상드르 Alexandre』(1665),『앙드로마크 Andromaque』(1667),『브리타니쿠스 Britannicus』(1669)로서, 그리스적 주제로 분류할 수 있는 것은 『브리타니쿠스 Britannicus』를 제외한 나머지 3편이다.그의 첫 비극작품인 『테바이드 Thebaide』는 1664년에 몰리에르(Moliere)가 이끄는 극단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첫 공연이라는 점에서,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테바이드 Thebaide』는 출전으로서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페니키아의 여인들 Phenissai』과 소포클레스(Sophokles))의 『안티고네 Antigone』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걸작은 못되었으나, 그의 불굴의 천재가 이미 엿보이며, 다음 해에 상연된 『알렉상드르 Alexandre』와 더불어 이미 라신의 승리를 예고한다. 오텔 드 부르고뉴(Hotel de Bourgogne)에 의한 『알렉상드르 Alexandre』상연이 대성공을 거둔 다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굳어졌고, 그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불만을 품은 포르 로아얄(Port-Royal)과의 불화 관계에 빠졌다.1667년 11월에 부르고뉴 극장에서 초연을 가진 『앙드로마크 Andromaque』는 가장 순수한 비극적 감동을 재발견한 작품으로서 진정한 비극의 재생을 뜻하는 획기적인 걸작이다. 이 작품의 출전은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아에네이스 Aeneis』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앙드로마케 Andromache』로서 사랑의 갈등을 다룬 비극이다.주제의 관점에서 보면 1669년 12월 13일에 부르고뉴 극장에서 초연된 『브리타니쿠스 Britannicus』는 라신 비극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마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그리스 les rivages sombres", 2막 1장).이와 같이 트레젠 주변은 구체적으로 신화가 가득찬 지역이다. 또한 이 마을에 내리쬐고 있는 태양은 페드르 일족의 선조이기도 하며 따라서 신들과 신화가 감싸고 있는 평온한 마을, 이것이 곧 트레젠의 땅이다. 그러나 그 평화스러운 마을도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순식간에 변한다. 페드르에게 트레젠은 이폴리트 그 자체이다. 이폴리트가 미소를 지으면 트레젠은 사랑이 성취되는 낙원으로 변하고, 이폴리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트레젠은 순식간에 적막한 땅으로 변한다.반면 이폴리트에게는 페드르가 이 곳에 발을 디딘 다음부터 숲은 생기를 잃고, 전차를 타고 바닷가를 질주하며 바라보던 바다 풍경은 사나운 파도가 일고 있는 불길한 모습으로 변한다. 트레젠은 신(神)들이 사는 나라이며, 신화의 마을이다. 결국, 『페드르 Phedre』에서 사랑이 궁정적인 연애의 전례와는 이질적인 파괴적인 정념이었듯이, 자연 또한 목가적인 환상의 공간이 아니라 심층언어로써 신화가 깃드는 현혹적인 파괴의 장(場)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페드르 Phedre』에서 무엇보다도 ‘페드르’라고 하는 라신적인 특이한 인물에 대해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중심 인물이 탄생하게 된 동기를 살펴보기 위해 다시 한번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히폴리토스 Hippolytos』와 세네카의『파이드라 Phaedra』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에우리피데스(Euripides)에게 있어서는 극의 주인공은 제목이 가리키고 있듯이 히폴리토스에 대한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의 복수극으로, 파이드라는 이 복수를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는데 불과하다. 이에 반하여, 세네카에서는 반대로 파이드라의 정념이 주제가 됨과 동시에 주인공의 성격도 일변한다.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주인공은 여신의 복수의 도구로 쓰이고 있느니만큼, 행실이 단정하면서도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도 못했던 불륜의 사랑에 빠져 사랑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다.또한 페드르가 처음 등장하는 제 1막 3장에서 행해지는 유모에의 고백 장면은 어머니 파지파에와 언니 아리안)이 불행했던 사랑의 추억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도 이폴리트에 대한 페드르의 사랑이 그녀의 가문에 악의를 품고 있는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의 의도)임이 나타난다. 결국 라신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페드르의 사랑은 신(神)들의 노여움에 의해 짊어진 ‘내적 숙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노여움을 인간들은 대대손손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페드르는 비너스 여신을 위해 신전을 건립하고) 여신의 노여움을 진정시키려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오히려 여신 대신에 이폴리트를 우러러 받드는 결과가 되어 의식적으로 악의에 찬 계모를 가장하여 그를 멀리 추방한다. 그러나 그것도 헛된 노력으로 끝나고, 가혹한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테제가 페드르를 이 희곡의 무대인 트레젠으로 데려간다. 여기에서 페드르는 이폴리트와 또다시 숙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불같은 연정을 품게 된다.“너무나도 깊은 상처는, 순식간에 또다시 피를 내뿜기 시작했습니다.그것은 이미 혈관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열정 따위가 아니었습니다.정욕의 여신이 힘껏 먹이)를 물어뜯고 놓아주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1막 3장)지금까지 살펴본 바, 우리는 페드르의 모습에서 의지의 힘으로 불륜의 사랑을 억제하려 하면서도, 그 어떤 힘에 의해서 불륜의 사랑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어떤 힘’이란 페드르가 이어받은 선조의 핏속에 숙명과 같이 숨어 흐르고 있는 정념이며, 그것이 결국 페드르의 덕성을 파멸로 이끌어가고 있다.이처럼 『페드르 Phedre』에서는 오해나 착각에 의해서 위기적인 상황이 형성되고, 진실 인지의 지연에 의하여 파국이 초래된다는 극 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물 상호간이 갈등은 그것이 일어날 수 있는 요소는 잠재하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일부러 피해 가는 형태로 사태가 진전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극 구성이 취해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이있어서의 페드르의 모습인 것이다. 결국 ‘결백함’을 그토록 추구하면서도, 실제로 자신은 더럽고 추악한 괴물이 되어 결백한 사람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어넣게 된다는 데에 페드르의 비극성이 있다.자신의 ‘비참함’에 대한 절망감, 이 절망의 극한점에서 하나의 절실한 기원이 솟아 나온다. 자신의 존재가 이 세계를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자신이 존재를 말살함으로써 자기가 지금까지 더럽혀 왔던 이 세계의 본래의 깨끗함을 되돌려주고자 하는 기원이다. 만약 자기가 이 세계의 악의 근원이라면, 자기의 죽음과 함께 악도 소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지금이야말로 죽음은 나의 눈에서 빛을 빼앗아가고,지금까지 더럽히고 있었던햇빛에게 그 전과 같이 티 하나 없는 깨끗함을 되돌려 드릴 것입니다.“(5막 7장))위에서 본 것처럼, 페드르의 죽음에는 단순히 자기가 범한 죄의 대가를 보상한다는 뜻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의 보다 절실한 소망인 빛의 회복, 티 하나 없는 깨끗함의 회복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위의 페드르의 마지막 시구에서 절망의 한계점에 도달함으로써 맛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평온함 같은 것을 느낀다. 그것은 그녀가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 이 전면적인 자기부정에 의해서 이 세계에 더러움을 안겨주는 존재로부터 더러움을 정화해주는 존재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점이 라신이 이 비극 속에서 페드르의 죄스러움을 끈질기게 강조한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페드르가 그토록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기의 비참함에 철저하게 절망해 가는 과정은, 극의 종말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는 깨끗함의 회복이라는 주제에 이르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페드르는 바로 그녀의 죄 많음과 비참함으로 인해서 그 극에 존재하는 것이 지니는 순수성을 증명해 주는 인간으로서 죽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3) 침묵과 고백“입을 열 것인가, 끝내 다물고 있을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말이 존재그 자체가 무대 위에 올려져 있다...... 비극은 말의 의미보다는 있다.
신화와 종교, 그리고 예술의 관계-그리스 신화를 중심으로Ⅰ. 들어가는 말어느 민족이나 그 민족의 창시를 예시하는 신화나 설화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신화의 예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 예로 들고 있고, 현재까지도 예술작품뿐 만이 아니라 생활 곳곳에 그 정신의 잔재들의 존재하고 같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것은 신화라는 것이 단순히 이야기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자체가 그 민족의 정신적 원형질에서 우러나온 장시간에 걸친 정신세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II. 신화와 현대의 상관관계신화라는 것은 현대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저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고, 혹은 예전의 그림들로만 전해져 오는, 주로 영웅담을 담은 이야기들. 어린 시절에는 그냥 무언가에 이끌려서 흥미와 동경심의 일종인 감정을 가지고 누구나 한 번 쯤 빠지기 쉬운 이야기들이다. 이 글이 일단 신화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신화라는 것의 속성에 대해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고대인은 이미 죽어서 없으나 오늘날 인간의 고대 역사가 재발견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과거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깊은 연구는 우리에게 역사상의 사건보다도 고대의 신앙을 조각상, 설계, 신전 및 언어 등을 통하여 알려주고 있다. 다른 상징들은 언어학자와 종교사학자들이 밝혀 왔으며 그들은 이러한 상징들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해 주고 있고 , 그런 다음 이 상징들은 문화 인류학자들의 손에서 재생된다. 문화 인류학자들은 이와 동일한 상징의 형태가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도 문화권에 들지 않은 작은 부족사회의 의식이나 신화 속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한다.사람들은 역사를 말할 때, 문서화된 증거물들이나, 고고학적으로 인증 받은 유적, 유물 등을 근거로 말한다(특히 어떤 역사적 사건들과 관계된). 이런 ‘물건’들은 우리에게 그 시절의 사건들을 알 수 있도록 해 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의 한계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정신적 세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보였다. 심지어 모더니즘의 아우라가 사라진 포스트 모던시대에도 유사(類似) 종교의 형태는 잔존한다. 물론 그것은 전통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대중문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종교와 신화적 사고는 대대적으로 부활하고 있는 듯 하다.인류에게 신화는 경제만큼이나 중요했고 그만큼 보편적이었다. 신화는 늘 근원적인 것으로 회귀하고자 했던 인간의 충동을 채워주었던 마르지 않는 원천이었다. 우리는 신화로의 회귀와 금기를 위반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혔던 이단아들의 면모를 통해, 예술 속에 흐르는 신화성을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현대예술의 정신을 가지고 신화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일 것이다.우선 신화와 예술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분업화되다 못해 파편화 되어 버린 현대인은 잃어버린 삶의 통일성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첫째, 신화적 체엄은 인간 존재의 전체성과 관련된다. 인간은 직관적으로 하찮은 개별성을 넘어서 전체(totality)라고 여겨지는 절대적 실재에게 스스로를 통합시키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보편적 생명과 우주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둘째 신화적 체험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조건 지우며 총괄하는 실재에 대한 믿음이다. 셋째 그것은 아름다운 것, 참된 것, 또는 유용한 것보다는 영원한 것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같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화적 경험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이며 감동적이고 심원한 경험, 곧 강렬함을 특징으로 한다. 이 강렬함이라는 정서는 특히나 예술적 체험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겠다.또한 신화는 예술가로 하여금 근원적인 시간, 곧 신화적 시간으로 안내해 준다. 인간에게는 역사라는 지평과 역사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지평이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엘리아데의 표현대로 성스러운 실재와의 관련을 끊고 시간과 변화의 그늘 속에서, 그리고 역사의 공포 속에서만 살고 있다. 물론 초역사적 지평을 위하여 역사의 차원을 제거하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정체, 피로한 자기반복,죽음의 시간과 그것이 지닌 무게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희망을 엿볼 수 있다.IV. 신화와 종교, 그리고 상징신화와 종교를 한데 묶는 공통점은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인간의 무의식의 영역이다. 무의식의 영역은 상징이라는 수단을 통해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는 이 상징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을 거꾸로 유추해낼 수 있다. 신화와 종교는 모두 무의식을 현실화하는 수단인 상징의 대표적인 예라는 것에서 공통점을 갖는다.런던이나 뉴욕에서는 신석기시대의 "풍요 의식'을 낡은 미신이라고 간단히 생각해 버리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환상을 보았다거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면 그가 성인(聖人)으로 취급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적인 장애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나 미국 인디언의 民譚을 읽지만 그러한 신화나 민담이 오늘날의 영웅이나 극적인 사건과 떠한 연관성이 있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연관성은 있다. 그것들을 대변하는 상징은 아직도 인류에 대한 관련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시점에서 이러한 "영원한 상징"을 이해하고 재평가하는데 중요한 주류가 되는 것은 융의 '분석심리학파(分析心理學派)'이다.상징들이 일상생활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있는 듯한 원시인과, 상징과는 전혀 무관하고 그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현대인 사이의 인위적인 구별을 없애 준 것은 이들의 연구 덕분이다. 융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그 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정신은 발전하는 초보 단계에서부터 많은 발자취를 남긴다. 더욱이 정신의 무의식적인 내용은 정신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의식적으로는 그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시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그것에 스스로를 나타내는 상징적 형태에 반응하고 있다.개인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자신의 꿈이 저절로 생겼다던가 연결이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 기간을 지나 보면 분석가는 그의 환자에게서 일련의 꿈의 심상을 관찰할 수 있는 꿈들이 의미심장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되며 이것을 이해함으로써 환자는 표현할 수가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사실을 믿지 않고 있거나, 의식 속에 종교적인 믿음이 들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재생의 상징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그러나 이것은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상징의 역사를 자세히 파헤칠수록 이러한 상징이 여러 다른 문화에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가에 대하여 자세히 알면 알수록, 이러한 상징 속엔 역시 재창조적인 의미가 존재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상징에 따라서 유년기와 청년기의 과도기, 또는 성숙기와 관련이 있는 것도 있으며 또 다른 상징들은 인간이 피할 수 없이 당하게 될 죽음에 대비하고 있는 노년의 경험과 관련된 상징들도 있다. 융은 여덟 살 난 소녀의 꿈에 어떻게 보통 노년기에서나 있을 수 있는 상징이 내포되는 가를 설명했다. 그 소녀의 꿈은 삶으로 이끄는 이니시에이션initiation(成人過程)이 죽음으로 이끄는 이니시에이션과 똑같은 원형적 형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제시해 주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징적인 개념의 발전은 고대사회의 의식에서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무의식적인 마음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고대나 원시의 신화와 무의식적인 내용에서 표현되는 상징간의 밀접한 관계는 분석가에겐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를 통하여 분석가는 정신적인 의미뿐 아니라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이러한 상징의 의미를 확실하게 하여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이다.V. 그리스 신화에 대한 고찰(1) 인간적인 신화신화는 역사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와 문화 또는 생활상이 어울러져 복합적인 색채를 나타내는 이야기 천이다. 우리는 신화 속에 암호처럼 드러난 상징들의 체계 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사유의 원형적 구조를 읽어 낼 수 있다. 신화적 사유의 원형적 구조는 역사를 통해 다양한 옷들을 걸치고 인간의 의식을 규정해 왔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모습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우선 구·신석기시대를 걸쳐 청동기 초기까지 지배적인 이어 모든 물질을 서로 결합, 생성하게 하는 정신적인 힘인 에로스, 곧 사랑이 생겨났다. 이로하여 우주를 이룰 모든 원초적인 질료가 갖추어졌다. 카오스로부터 뉙스와 에레보스가 태어났다. 뉙스는 밤하늘의 맑은 어두움이고, 에레보스는 땅속의 칠흑 같은 어두움이다. 이 둘은 서로 어울려 맑은 대기인 아이테르와 헤메라를 낳는다. 이렇게 카오스로부터 모든 천체가 운행할 우주의 드넓은 어둠과 낮과 밤의 세계가 생겨났다.밤의 여신인 뉙스 혼자의 힘으로 운명의 여신인 모이라이 세 자매와 신의 분노를 상징하는 네메시스, 석양의 낙원에서 황금사과를 지키는 에스페리데스를 낳는다. 이외에도 뉙스는 인간사의 어두운 면과 관련이 있는 수많은 자식을 낳는다. 즉 파멸(모로스), 고뇌(케르), 죽음(타나토스), 잠(휘프노스), 꿈(오네이라), 비난(모모스), 불행(에스페리데스), 운명(모이라이), 복수(네메시스), 비참(케레스), 사기(아바테), 애욕(필로테스), 노쇠(게라스), 불화(에리스)를 낳는다. 마지막 자식인 불화(에리스)로부터 다시 고통(포보스), 망각(레테), 기근(리모스), 병마(알게), 분쟁(휘스미네스), 전투(마케스), 살인(포노이), 남자 살해(안드로크타시아이), 승벽(네이케아), 논쟁(프세우데아), 의심(로고이), 불법(암필로기아이), 거짓(아바테), 맹세(오르코스)가 태어난다.한편 가이아는 자신의 크기와 같은 자식 우라노스를 낳아 자신을 뒤덮게 하였다. 또 요정들의 은신처인 오레를 낳고, 이어서 폰토스를 낳았다. 이렇게 우주를 생성한 후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어울려 열두 명의 티탄과 퀴클롭스 삼형제, 헤카톤케이르 삼형제를 낳았다.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이 말은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리스 신화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신화에 등장하는 태초의 존재들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존재들을 우리말로 하면 지구(대지), 사랑, 밤, 어둠, 창공, 낮, 운명, 복수 등 형상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 이후의 존재들인 뉙스의 자식들.
근친상간의 금기(Incest Taboo)에 대한 인류학적 해석I. 서론 : 금기(타부, Taboo)란 무엇인가?타부는 폴리네시아 말로 독일어에는 적당한 번역어가 없다. 우리는 이 말에 의해 표현되는 개념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고대 로마인들에게만 해도 이러한 개념은 통용되고 있었다. 그들의 sacer는 폴리네시아인들의 Tabu와 같았다. 희랍인들의 aroV나 히브리인들의 Kodausch도 폴리네시아인들이 타부를 통하여 그리고 아메리카, 아프리카(마다가스카),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많은 민족들이 이와 유사한 낱말들을 통하여 표현하였던 것과 같은 것을 의미했었음이 틀림없다.우리는 타부의 의미를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타부는 우리들에게 한편으로 '거룩한' '신성한'무엇이고, 다른 한편으로 '섬뜩한''위험한''금지된''부정한'것이다. 타부의 반대말은 폴리네시아어의 noa인데, 이것의 의미는 '익숙한' '범접 가능한'이다. 타부에는 "삼가다"의 개념 같은 것이 들어 있으며, 그 본직도 금지와 제약을 통해 드러난다. "성스러운 기피(heilige Scheu)"라는 복합적 표현이 타부의 의미에 대체로 부합할 것 같다.타부에 의해 제약은 종교적 금지나 도덕적 금지와 다소 다르다. 타부에 의한 제약들은 신의 계율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자체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또 도덕적 금지들과 달리 일반적 절제를 필수적인 것으로 선언하면서 그 필수서의 근거를 제시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 타부에 의한 금지는 이유 불문의 금지이며, 그 기원도 불분명하다. 우리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타부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다.II. 본론1. 근친상간의 천태만상전 고려대 김용옥 교수의 저서인 "여자란 무엇인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구절이 있다."우리 욕설에 '니에미 씨비'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너의 엄마를 씹할 새끼', 즉 '너의 모친과 성교 를 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속어에도 '유 마더 팍커(You mother Fucker) '근친혼의 금기'로 번역된다. 엄밀히 따지면 특정 이성 간에는 혼인과 성적 관계를 피해야 된다는 뜻이다. 형제와 누이,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간에는 예부터 어떤 사회에서든지 혼인이 규제되고는 있지만, 고대 이집트 혹은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인세스트의 범주에서도 혼인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전해 오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 프롤레마이우스 왕조와 신성 로마시대에는 형제와 누이 간에, 또 아버지와 딸 간에 결혼한 경우가 특히 유산 계급 계층에서 있었다고 한다.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나일 강과 콩고 강의 분수계 근처에 거주하는 '아봉가라'라는 귀족 집단은 실제로 딸이나 누이들과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애인으로서 신변에 두고 그녀들과 성 관계를 가졌다. 단, 이때 아기는 절대 낳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태평양의 솔로몬 해상에는 트로브리안드(Trobriand)라는 섬이 있는데, 이 원시 사회에서는 한 남자가 그의 자매나 어머니와 성 관계를 갖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아버지와 딸 사이의 관계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들 부족에게는 혼인이나 성 관계에 관한 어떤 규칙이 있기는 하지만 그 범위, 성 관계와 혼인을 구별할 만한 확실한 관행이 없었으며, 또 위반에 대한 벌칙 등 명백한 규범이 없었다.인세스트 터부의 기원에 관한 학설은 가지각색이다. L.H. 몰간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인류사회는 원초적으로 난혼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따라 발생하는 성적 권리, 태어나는 아기에 대한 권리, 공동 소유였던 재산을 개인 소유와 사유 재산으로 이행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인세스트 터부가 생겼다고 설명한다. 한편 S.프로이트 등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일상생활에서 가족 간의 친숙에서 오는 심리적 요인으로부터 금기의 원천을 찾으려고 했다.이처럼 인류 사회에서의 인세스트 터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 오고 있다. 물론 인세스트 터부의 기원에 관해서는 학계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아마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연의 섭2. 근친상간의 금기가 생겨난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들가. 다른 종족과의 결합을 통한 위험제거 이론근친상간 금기에 관한 증거들을 분석하는 데는 자연 선택보다는 문화선택이론이 더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이 이론은 19세기 영국 인류학자인 타일러(E.T.Tylor)에 의해 주장되었는데 타이러에 의하면 근친 교배 금기는 적게는 25명에서 많게는 340명 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계절과 생태환경에 따라 이동하면서 수렵과 채취로 영위하던 수렵채취기에 발생했다고 한다. 이는 병약한 아이가 태어날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집단이 너무 작아 이웃집단과 평화적이고 협동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욕구를 채우거나 위험을 제거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집단 내에서만 결혼을 시키는 집단은 결국 적대적인 이웃과 대치하게 되어 작은 땅에 고립되며 구성원이 20~30명밖에 안되기 때문에 자칫 운 나쁘게 아들만 연달아 낳는 바람에 여자가 모자라 다음 대를 잇지 못하는 위험도 무릅써야 한다. 하지만 다른 집단과 동맹을 맺고 있는 집단들은 더 커다란 인구를 번식시키는데 참여할 수 있으며, 끈질기고 호전적인 다른 집단을 방어하는 데도 서로 지원해 줄 수가 있다. 그리고 먹을 것이 부족할 때는 서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근친상간 금기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는 농경이 시작된 이후 더욱 복잡한 가회로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높아졌는데 농경 집단들 사이에서 확대된 가족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교환을 행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윤택함은 누리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이 집단의 생존을 위협하는 곳에서는 동맹을 통해 자신들 집단의 멸망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근친결혼보다는 다른 집단과의 결혼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커다란 흐름으로 지금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나. 가족제도의 붕괴 방지 이론근친간의 결혼은 가족제도의 붕괴방지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어머니의 외삼촌과 그녀의 딸이 결혼한다면 그녀는 그의 엄마에게 있어 어떠한 관그는 어린시절에 물리적으로 가까이 자라난 남녀는 서로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선천적인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웨스트마크의 원칙은 사회생물학자들 사이에서도 잘 수용되는 이론인데 왜냐하면 로마나 이집트처럼 남개간의 성교가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경우까지도 해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친척이나 가족이 각기 다른 집이나 다른 보육장소에서 자라났다면 웨스트마크의 이론에 입각해 볼 때 서로 성적으로 매력을 느껴 결혼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3.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접근근친상간 금지의 생물학적 가치가 어떠하든 간에 근친상간의 금지가 가져오는 사회적 이득은 어마어마하다. 그러므로 근친상간 금지의 원인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들, 즉 원시인들의 합리성, 본능적 공포, 오랜 기간의 동거에 따른 성적 무관심 등과 같은 가설에 구속받을 필요 없이 사회를 설명하는데 근친상간 금지의 보편성을 그 기반으로 사용할 수 있다.근친상간의 금지는 인간의 사회조직이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모든 조직이 기반을 두고 있는 근본적 구별을 만들어 낸다. '나와 너'의 구별, '우리 집단과 그들 집단'의 구별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이성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규칙이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모든 이성들을 성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이성들과 성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이성들로 나눈다. 내가 나의 누이와 혼인하지 못하고 너의 누이와 혼인해야 한다면, 나의 집단과 너의 집단을 구분하는 사회 분류의 체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근친상간의 금지는 혼인결연의 형성을 가져온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혹은 여자들이 남자들을 -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교환한다는 생각은 사람들이 혼인 결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가족을 형성하고, 혼인결연을 형성하는데 이바지한다. 근친상간의 금지가 확대된다는 사실은 엄청난 사회적 효용성을 가져오는 것이다. 위와 같은 현상의 심층에 위치한 구조를 친족구조, 복합구조로 세분화하여 외부적 교환과 규칙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해보기로 한다그런가 하면 현실적으로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교차적 사촌간의 결론은 교환이 이루어지는 셈이다.나. 복합구조복합구조에 관한 탐구에서는 결혼을 결정하는 “경제적 또는 심리적 메커니즘(외혼제도, 여자증여 그리고 여자를 분배하기 위한 규칙의 필요성)”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고대의 결혼제도는 배분적 교환체계가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여자를 얻는 일은 부를 얻는 것과 다름이 없었고, 부의 재분배는 사활을 건 문제였기 때문에 거기에는 규칙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레비-스트로스는 결혼제도의 구조를 고대 세계의 활력소였다고 할 수 있는 교환충동과 결부시킨다.교환은 원시사회에서는 거래의 형태보다는 상호증여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고대의 교환의 증여원리는 대개 의식을 거쳤다. 예를 들어 축제에 있어서 샴페인은 그 자체로서 여느 때와는 다른 순간을 말해주며, 다시 말해서 이는 무한정 흘러넘치는 소비를 지배하는 축제의 원리이다. 교환에 의한 결혼은 상업정신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고대 결혼은 여자를 상거래나 이해타산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고대 결혼의 축제의 일환이었다.여자의 증여에는 교환의 조건으로서의 이해관계와 축제의 본질인 트임과 넘침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증여-교환’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 포트래치(potlatch) 라는 이름의 제도와 비교될 수 있다. 또한 여자는 효용적인 측면, 물질적인 가치를 지니기도 하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물질적 측면을 강조한 결혼에 있어서 탐욕의 대상인 여자의 분배는 동시에 부의 재분배를 보장해준다.4. 제 학문들의 연구 성과 통합?분석 : 정신분석학, 사회학, 심리학근친상간의 금지가 핵가족을 넘어서 확대되는 것은 행동 심리학의 자극 일반화의 원리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자극일반화의 원리란 특정 자극이나 혹은 자극 상황과 연관되어 학습된 모든 습관적 반응은 다른 자극이나 다른 상황에 의해서도 그 자극의 유사성에 비례해서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차친척 이상의 친척들이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구조주의 언어학과의 비교를 통한 이해I.서론인류학에 구조주의 방법론을 도입한 선구자인 프랑스 문화 인류학자 클로스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구조주의 사상의 모태는 구조언어학의 창시자인 F.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로부터 유래하였다. 소쉬르는 에서 구조언어학적 방법들과 분석용어들을 제시하였는데, 이 방법론과 용어를 신화, 친족관계 등의 연구에 가져와서 적용함으로써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이 창시되었다.구조주의란 과학적 논리에 의해 인간을 해석하려는 하나의 학문적인 방법론이다. '요소'를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 파악함으로써, '요소'는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관계'를 인식하려는 사고 방법이다. 즉 부분의 요소는 전체의 구조 안으로 통합이 될 때 의미가 있고, 비로소 인식이 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개념을 인류학에 수용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을 이해함에 있어, 그 모태가 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의 비교분석을 통한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 보고서의 목적이다.II.본론1.구조주의란 무엇인가구조주의(structuralism)란 문화적 현상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전체의 구조를 설정하고, 그 구조를 해석함으로서 설명을 시도하는 문화인류학의 한 방법론이다. 넓은 의미의 구조주의는 상부구조를 연구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구조주의와 하부구조를 연구하는 방법론으로서의 구조주의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이고, 후자는 마르크스의 구조주의이다. 그러므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연구대상이 친족, 신화, 예술, 종교 등으로 한정되고 있고, 정치와 경제 등은 마르크스 구조주의의 연구대상이다. 인류학에서 구조주의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레비-스트로스 학파의 구조주의를 말한다. 구조주의 인류학은 막시즘이 하부구조의 연구에서 이룩한 성과를 상부구조의 연구에서 이루어 보려는 시도이다.구조주의 인류학에 영향을 준 지적 사조는 크게 3가지인데, 첫 번째는 칸트철학의 인식론이고, 두 번째는 뒤르켐과 모스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회학이며, 세 번째는 서론에서 언급한 소쉬르와 야콥슨으로 대표되는 구조언어학이다.구조주의는 관념론이 아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자기를 가리켜 관념론자라고 하는 주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관념론에 의하면 자연이란 인간정신의 인식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그렇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자연은 객관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이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자연의 법칙은 과학적 탐구로서 접근이 가능하다.외부에 존재하는 실체가 인식의 질료가 된다는 점에서 칸트철학의 물자체와 비슷하나,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는 물자체가 아니라 단순히 자연 그 자체이다. 이 점에서 구조주의 인류학은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칸트주의에 가깝다. 칸트철학과 구조주의 인류학의 차이점은 철학과 인류학의 차이이다. 칸트철학은 인간의 인식이 이루어지는 과정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반면 구조주의 인류학은 문화적 산물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이 있고, 문화적 산물들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한다.2.표층구조와 심층구조많은 원주민 사회에서 토템적 식량 금기를 볼 수 있다. 토템적 식량 금기란 특정의 동식물을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금기시하는 관습을 말한다. 예컨대 오소리 부족은 오소리를 먹을 수 없는 동물로 여기고, 너구리 부족은 너구리를 먹지 못하는 동물로 여긴다. 토템적 식량 금기는 상호 교차적이다. 오소리 부족은 오소리를 잡아먹을 수 없지만 너구리는 잡아먹을 수 있고, 너구리 부족은 너구리를 잡아먹을 수 없지만 오소리는 잡아먹을 수 있다. 따라서 생태계 전체적으로 균형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표층구조는 특정의 동식물들이 식량으로 금지된다는 사실이고, 심층구조는 특정의 동식물들이 식량으로 서로 교환된다는 사실이다.모든 사회들은 근친상간을 금지한다. 근친상간의 금지로 인해 일정한 범위의 여자들과는 결혼할 수 없다. 우리 집단의 여자는 결혼을 해서 나가야 하고, 다른 집단의 여자는 결혼을 해서 우리 집단으로 들어와야 한다. 여기서 표층구조는 특정의 여자들이 혼인의 대상으로 금지된다는 사실이고, 심층구조는 여자들이 결혼제도를 통해서 서로 교환된다는 사실이다.그러므로 혼인과 근친상간의 금지라는 표층구조의 밑에는 여성교환이라는 심층구조가 놓여있고, 토템적 식량 금기라는 표층구조 밑에는 식량교환이라는 심층구조가 놓여있다. 구조주의 인류학에서 구조라고 할 때 표층구조가 아니라 심층구조를 말한다.표층구조와 심층구조에 대한 이러한 변별 역시 구조언어학의 개념에서 차용된 것인데, 언어학의 개념에서 보자면 표층구조는 parole에, 심층구조는 langue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parole은 발화된 언어, 즉 실제로 표현되어진 모든 언어표현을 말한다. 이는 기저에 깔린 언어체계의 규칙을 수용하고 있으며(구조언어학에서는 기저의 언어체계의 존재를 parole을 통한 langue의 증명으로 밝혀낸다), parole의 기저가 된 언어체계 즉 언어의 심층구조를 langue라 한다. 구조언어학과 구조인류학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바로 표층구조를 통해 유추해낼 수 있는 심층구조의 존재양상이다.3.구조란 무엇인가구조주의는 어떤 문화 현상이나 활동, 산물들은 자족적인 상호 '관계'들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기호체계 혹은 사회제도로 보았다. 이 세계는 사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이 구조주의 사고방식의 제1원리이다. 요컨대 어떤 존재나 경험이라도 그것들이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구조'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한 완전한 의미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인간 두뇌의 산물이므로 그 표면 아래에는 공통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성에 대한 인식이다. 구조는 관계들의 조직이고, 이항대립과 매개는 관계들을 조직하는 기본단위이다.기호나 상징은 대립되는 다른 기호나 상징과 구분될 때에만, 즉 구조를 이루고 있을 때에만 의미를 획득한다. 불법의 개념은 합법의 개념이 있어야만 정의될 수 있고, 정치적 진보는 정치적 보수와 구별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불법이나 진보의 개념은 홀로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호나 상징은 고립되어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관계를 맺어야만 의미를 획득하는데,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 이항대립으로 맺어진다.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인간문화의 보편성은 구체적 사실의 수준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수준에서 발견된다. 모든 문화는 인간 두뇌의 산물이므로 그 표면 아래에는 공통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관계성에 대한 인식이다. 구조는 관계들의 조직이고, 이항대립과 매개는 관계들을 조직화하는 기본단위이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 과정은 양극과 매개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정신은 스펙트럼을 이분화하고, 즉 연속체에서 이항대립을 인식하고, 그 논리적 중심을 이용하여 양극단을 중재한다.즉,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에 적용한 구조주의의 근본 개념은 ‘언어’라는 대상을 통해, 소쉬르의 에서 사용된 구조언어학의 변증법을 차용한 것이다. 차용된 주요 개념은 구성단위(구조언어학의 경우 ‘음소’)를 먼저 세우고 그 단위를 둘씩 대립시켜 규정하며, 이를 이용해 하나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을 거쳐 성립된 언어의 체계(langue)가 우리가 실제 사용하는 언어(parole)를 실현시킨다면, 인류학의 체계는 관념과 사실 사이의 종합적 조작매체의 역할을 하며, 사실을 기호로 변형시킨다고 할 수 있다.4.구조언어학과 구조인류학대립이 의미를 부여한다는 인식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프라하 학파에서 시작되었고, 특히 로만 야콥슨에 의해서였다. 전 세계의 모든 언어에서 발견되는 음소간의 복합적인 대립체계는 모든 언어에 공통되는 간단한 체계의 정교한 확대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자음과 모음의 대립, 밀음/소음, 예음/둔음 간의 이중 대립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모음의 삼각형이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음의 삼각형이 발생한다.모든 어린이들은 언어의 기본적인 변별적 특징들, 곧 자음/모음, 비음/구개음, 둔음/예음, 밀음/소음을 구분함으로서 음운 목록의 기본 요소들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기본적인 변별적 특징들을 구별하는 것은 본능 때문이 아니라 구강이나 목구멍, 관련 근육 등이 그렇게 습득하는 것을 훨씬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조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의 '음운'과 같이 언어 체계의 기본요소는 순전히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difference)와 대립(opposition)의 관계에 의해 특성이 결정되는 것이지, 객관적인 사실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문화의 상징화와 관계들의 조직화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범주를 형성하는 데에도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경로가 있다. 문화적 산물들이 만들어질 때 그 과정에는 인간 두뇌의 어떤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특징들이 관여적이다. 그래서 문화현상의 기본구조를 살핌으로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인류학은 범주체계의 개체발생 혹은 범 발생적 발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조주의 인류학은 전 세계의 여러 문화적 맥락에서 유사한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이 논리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5.환유적 기호와 은유적 상징문화인류학은 문화의 연구를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한다. 구조주의 인류학은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 자연과 문화의 경계선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면 동물성에서 인간성으로, 자연에서 문화로의 도약은 무엇일까? 그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문화 중의 문화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을 말하는 자는 언어를 말하고, 언어를 말하는 자는 사회를 말한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언어의 출현은 감성에서 추리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공자의 현대적 의미1. 공자의 생애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공자는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그 선조는 송(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고 어머니는 안씨(顔氏)이니, 노(魯)나라 양공(襄公) 22년에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에서 공자를 낳았다.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도, 늘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예를 올렸다. 자라서 곡물창고 담당 관리가 되었을 때에는 셈하는 것이 공평하였으며, 희생가축 기르는 관리가 되었을 때에는 가축이 많이 번식하였다.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었으며, 돌아온 뒤에는 제자가 더욱 늘어났다.소공 25년 갑신년에 공자의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齊)나라로 망명하고, 그후 얼마 안 되어 노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에 제(齊)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家臣)이 되어 경공(景公)과 통하려고 하였다. 경공이 이계(尼谿)의 땅에 공자를 봉하려고 하였으나 안영이 나서서 반대하니 경공은 그의 말에 미혹되었다. 공자는 드디어 그곳을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정공(定公) 원년 임진년에 공자의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성하고 참람하였으며, 그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분란을 일으켜 노나라에서는 대부(大夫) 이하 모두가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나 시(詩) , 서(書) , 예(禮) , 악(樂) 을 편찬하였다. 제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글을 배웠다.9년 경자년에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公山不뉴)가 비(費邑)를 근거지로 하여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불렀는데, 가려고 하다가 결국은 가지 않았다. 정공이 공자로 중도(中都)의 장(長)으로 삼으니, 1년 만에 사방에서 공자를 본받았다. 드디어 사공(司空)이 되고, 또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정공 10년 봄, 재상(宰相)의 권한으로 제나라와의 화친을 주도하며 제나라 사람들이 침략해 빼앗아갔던 땅을 노나라려주었다.정공 14년, 공자의 나이 56세였다. 재상(宰相)의 일을 맡게 되어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고 국정에 참여하니, 석 달 만에 노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이를 두려워한 제나라 사람들이 미녀와 춤, 말을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季桓子)가 그것을 받아들였고, 교제(郊祭)를 지낸 뒤에는 또 희생 제물을 대부(大夫)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으므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위(衛)나라에 도착하여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역시 노나라에서처럼 조 6만 두의 봉록을 받았으나, 이를 시기한 누군가의 참소로 10달을 머문 뒤 위(衛)나라를 떠났다. 진(陳)나라로 가려고 광(匡) 지역을 지날 적에 광(匡) 지역 사람들이 그를 양호(陽虎)로 착각하고 포위하여 길을 막았다. 풀려난 뒤, 위(衛)나라로 돌아와 거백옥( 伯玉)의 집에 거처하였다. 그곳에서 위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만나지만, 거드름을 피우고 뽐을 내는 그들의 모습에 다시 위(衛)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로 갔다.이 해에 노 정공(魯定公)이 죽자 다시 그곳을 떠나 송(宋)나라로 가서 예의에 대해서 강습하였다, 송나라 사마(司馬) 환퇴(桓 )가 그를 죽이려고 하자 또 떠나서 진(陳)나라로 가서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머물렀다. 초(楚)의 침공으로 진(陳)의 정세가 어수선해지자 3년을 지내고 위(衛)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공(靈公)은 늙어 정사에 태만하였고, 또한 공자를 등용하지도 않았다. 공자는 탄식하며 위나라를 떠났다.진(晉)나라 대부 조간자(趙簡子)의 가신 불힐이 중모(中牟)를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불렀다. 공자가 가려고 하다가 또한 결국은 가지 않았다.공자는 위(衛)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하자 장차 서쪽으로 가서 진(晉)나라의 조간자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황하에 이르러 돌아와 거백옥( 伯玉)의 집에 거처하였다. 어느날 위 영공이 군대의 진법(陳法)에 대해서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고 떠나서 다시 진(陳)나라로 갔다.계환자(季桓子)가 병이 들어 죽을 때에 지난날을 후회하을 하여 후계자인 강자(康子)에게 반드시 공자를 불러들이라 하였다. 장례가 끝난 뒤 강자는 공자를 부르려 하였으나 공지어(公之魚)가 반대하였다. 강자는 그의 말에 따라 염구( 求)를 불러들였다. 다음 해에 공자는 채(蔡)나라로 가서, 또 그 다음해에는 섭(葉)땅에 도착하였다.다시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공자는 또 위(衛)나라로 돌아왔다. 염유( 有)가 계씨(季氏)의 명을 받고 장군이 되어 제(齊)나라와 전쟁을 하여 공을 세우니 계강자(季康子)가 염유의 말을 듣고 공자를 초빙한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난 지 실로 14년 만에 노나라로 돌아왔다. 이 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노나라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으며 공자 또한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공자의 시대에는 주(周) 왕실이 쇠퇴해져 예악(禮樂)이 폐지되었고 시 와 서 가 흩어졌다. 이에 공자는 3대의 예를 추적하여 서전(書傳)과 예기(禮記) 를 편찬하고 시(詩)를 산정하고 악(樂)을 바로잡고 주역(周易)의 단(彖) , 계(繫) , 상(象) , 설괘(說卦) , 문언(文言) 편을 정리하였다.공자는 시(詩) , 서(書) , 예(禮) , 악(樂) 을 교재로 삼아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수가 약 3,000명에 이르렀고, 그중 육예(六藝)에 통달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공자는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의 네 방면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억측하지 말 것 , 독단하지 말 것 , 고집하지 말 것 ,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말 것 의 네 가지를 금기 시켰다.노 애공 14년 봄에 숙손씨의 마부 서상이 기린(麒麟)을 잡으니 이를 탄식하여 공자가 춘추(春秋) 를 지었다. 춘추(春秋) 는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삼고, 주나라를 종주로 하고 은나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하(하), 상(상), 주(주) 3대의 법률을 계승하고 있다. 그 다음해 자로(子路)가 위나라에서 죽었다.노 애공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에 공자가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73세였다.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의 사수(泗水) 부근에 매장되었다. 제모두 3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으로 3년상을 다 마치고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오직 자공만은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6년을 더 지키다가 떠나갔다. 그 후에도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은 무덤가에 와서 촌락을 이루었으며 그곳은 공자 마을 이라 일컬어졌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고, 많은 유생들도 그곳에 모여 예의를 논하고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활쏘기를 하였다. 고황제(高皇帝)가 노나라를 지나며 태뢰(太牢)로써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내자 그 후 제후, 경대부,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연후에 정사에 임하게 되었다. 살아생전엔 그의 능력을 제대로 보아주는 이 없이 아깝게도 박학하면서 일예(一藝)에도 명성을 세우지 못하였으나, 죽은 후에 그 명성이 더 후한 평가를 받게 된 경우라고 하겠다.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 한다 했던 그의 경구처럼, 그는 죽어서 더 큰 이름을 남겼다.2. 공자의 현대적 의미 (공자와의 가상 인터뷰)근래 들어 유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공자를 죽여야 나라가 산다 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의 책까지 출간될 정도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갖가지 부정, 부패가 만연해 있는 원인을 유교로 보고 그에 대한 일침을 가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막연히 유교가 지금껏 우리 사회에 고질적 병폐들을 야기 시켰으니 현재 사회의 부정적 측면 역시 유교에서 연유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위험하다. 과거 한국 사회를 닫힌 사회로 변모시켰던 것은 유교의 근본이념 이라기보다는 그 후에 생성된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때문에 공자와 유교를 한데 뭉뚱그려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자세이다. 이에 유교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공자 선생을 모시고 과연 현대 사회에 만연하는 부정, 부패의 근본 원인은 무엇이며 또 그 해결방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인터뷰를 청해보기로 하겠다.필자 : 안녕하십니까, 공자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공자 : 나야말로 근거 없는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차에 이렇게 변명할 기회를 만들어주니 고맙기 그지없구려.필자 : 예,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기로 하지요. 먼저,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시는지요?공자 : 나는 정말 놀랐다네. 표면상으로는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내가 살던 시대와 변함이 없었지만, 사람들의 의식구조나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접하고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네. 그 동안 하 많은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이렇게 빠르게, 또 부정적으로 변했을 줄은.. 혹자는 그 원인을 유교에서 찾겠다고 하지만, 내가 보는 자네들의 현실은 좀 다르다네. 한국사회의 의식구조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이 망하고 서구의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고 들었네,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가?필자 : 예, 저의 생각도 그러합니다.공자 : 결국 한국사회의 의식구조를 부정적으로 바꿔간 건 천년의 유교 역사가 아니라 백년의 서구사상일세.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얻어다 어울리지 않는 현실에 억지로 짜 맞추느라 급급한 탓에 부작용이 생긴 것이지. 왜 서구사회에서는 이러한 부정적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세. 그들이 고수하는 사회구조와 의식구조는 자신의 땅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네. 맞지 않는 현실에 억지로 짜 맞춘 것이 아니니, 그 부작용은 훨씬 덜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결국 한국사회는 앞으로 되도 않는 억지를 부리는 것 보다는 먼저 자신의 것을 되찾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할 것이라네.필자 : 자신의 것 이란 무엇입니까?공자 : 서구의 의식에 맞추느라 소홀했던 전통사상을 의미하는 것이지. 갑자기 수입된 타국의 사상보다야 천년을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던 전통적인 사상이 더 큰 의미가 되고 난국 타개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필자 : 그렇다면 공자 선생께서 저희가 따라야 할 전통사상의 하나를 추천해 주시지요.공자 : 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