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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조준의 정치사상
    1. 들어가는 글2. 조준의 정치사상1) 정치이념2) 통치체제론3) 국방관4) 수취체제관3. 나오는 글참 고 논 문1. 들어가는 글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그 사회의 모순이 격화되어 더 이상의 개선이 불가능하게 느껴지고 개혁의 한계가 체감될 때 혁명이 이루어져 왔다. 그것은 정권의 교체나 새로운 왕조의 개창으로 이어지며 모순극복의 노력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모순의 점철과 혁명의 부재가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도 하다.고려말, 조선초는 이러한 혁명의 시기였다. 지배층의 토지겸병으로 토지소유관계의 문란이 격화되는 등 정치·사회 모든 면에서 모순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변화와 개혁, 나아가서는 혁명을 주도했던 인물로 조준과 정도전이 있다. 이들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건국시킨 주체세력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이었다. 즉 조준과 정도전은 고려말의 대외적인 제모순을 통감하여 당시의 문란된 정치·사회구조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적극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정치활동과 사상은 고려말기의 제모순을 극복하려고 하는 데에서 출발하였다.이들은 전제개혁을 주도하고 창왕을 폐위시키는데 앞장섰으며 구 정치세력을 몰아내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실로 조선왕조는 이들을 대표로 하는 문인들의 이론과 이성계를 대표로 하는 문인들의 힘이 합쳐짐으로써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특히 조준과 정도전의 경우는 정치가 겸 사상가로서 여말선초 시기의 정치와 사상에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연구는 고려에서 조선에로의 전환이라는 격변기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 논점이 되어 학자들의 관심을 모아 왔다.그리하여 이성계와 정도전에 대해서는 전문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조준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다른 연구의 일환으로서만 다루어져 왔을 뿐이다.본고에서는 장득진 씨의 데에서 생긴 것이다. 즉 조준의 정치사상은 여말의 제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조준은 조선초기에 8년 간이나 수상직을 역임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정치적 기반을 안정시키는데 정력을 기울여 새 왕조 치국의 근본을 세웠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구명함은 비단 조준이라는 한 개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조선 건국의 정치이념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여기에 조준의 사상사적 위치가 있는 것이다.1) 정치이념조준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사상체계에 밑바탕이 되는 기본정신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은 곧 조준이 국가의 정치에 대하여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말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정치사상에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조준이 생각한 정치이념은 堯舜이래 夏·殷·周 3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하였으며, 여기에다 중국의 역대 제도와 고려 초기의 정치제도를 참작한 복고주의적 정치를 구현하는데 있었다. 그가 이러한 정치이념을 가지게 된 이유에는 대체로 두 가지 면이 있다 하겠다. 하나는 고려 말기의 혼란한 정치제도를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데에서 생긴 현실적인 면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유입된 주자학의 영향으로 생긴 사상적인 면이라 하겠다.그러면 조준이 생각한 정치이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는 곧 仁政과 法治라 하겠다. 그는 인정을 정치의 이상으로 하였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한 법치를 강조하였다. 인정과 법치가 서로 조화되어야만 비로소 훌륭한 정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바로 그의 생각이었다.인정에 관한 조준의 생각을 잘 나타내 주는 시로는 그의 「夜泊金陵」에백 년의 영욕으로 사람은 장차 늙는구나.6代의 흥망은 새가 하늘로 사라지는 듯하다.天下에서 제일 강한 것은 오직 仁뿐이다.鍾山은 隱隱하고 달은 어른어른하다.) 『松堂集』1, 七言絶句 「夜泊金陵」라 하는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이처럼 조준은 인정을 강조하였지만 여말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당시의 실태는 다음과 같았다. 즉, 均田制로서 국가를 통치하여 성업을 이룬 반면 秦은 정전제를 무너뜨리고, 신라는 균전제를 지키지 못해 망했다고 조준은 설명하였다. 요컨대 인정이란 전제를 바르게 하여 국용을 풍족히 하며 백성의 생계를 후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전제를 바로잡아 백성이 안정되면 국가의 정사가 저절로 잘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조준은 정치이념의 이상으로 인정만이 아닌 법치도 중요시하였다. 인정이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통치수단의 도구인 법치가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법치란 법령을 엄격하게 하고 기강을 세움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체제이다. 조준은 기강을 신체의 혈맥과 비교하여 혈맥이 있으면 기가 있어도 통하지 않는다 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국가도 기강이 없으면 법령이 있어도 행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법제를 엄격하고 견고히 하기를 주장하였다. 요컨대 국가는 기강이 없이 법치를 이룰 수 없고 기강은 법령을 통한 법치에 의해서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기강과 법치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그러면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 있는가. 조준은 이에 대해 "진실로 상법이 명확하지 않으면 기강이 서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그는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범법한 자를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와 같이 조준이 생각한 정치이념은 인정과 이를 행하기 위한 조건으로 강력한 법치를 강조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정치이념이 국가의 권력구조인 통치체제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장득진, 1984「趙浚의 政治活動과 그 思想」『사학연구』38, pp.189-1922) 통치체제론고려 후기의 정치체제는 종래와는 달리 도평의사사가 도당으로서 최고의 정무기관이 되었고, 처음 임시적인 국방·군사문제의 회의 기관에 지나지 않았던 도병마사가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로 개칭되면서 국사 전반을 총괄하는 일원적인 집권기구로 변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준은 周와 고려 태조의 設官分職의 제도이러한 통치체제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낮은 관직의 사람이 높은 관직의 사람을 받들어 상하가 서로 긴밀하게 유지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일들이 서로 통솔되어 국가의 정사가 쉽게 행하여 진다고 하였다. 또 그는 당시 도평의사사의 권한을 축소시키기 위해 도평의사사 안의 행정기구인 6色掌에 대하여 국가의 잡무만을 처리하도록 하고 중요업무는 6부 소속의 郎官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여 6부의 역할을 중요시하였다.이처럼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선행조건으로 정치의 권한이 재상에게 있어야 하며, 국가의 정책결정에도 재상이 큰 영향을 끼쳐야 한다. 조준은 이러한 재상의 직책을人主의 직책은 宰相과 의논할 뿐이요, 재상의 직책은 君子를 들이고 小人을 물리쳐百官을 바로 잡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재상으로 얻으면 천하가 다스려지거늘하물며 一國의 정치야 이를 것이 있겠습니까.) 『高麗史』118, 列傳 31 趙浚傳라고 하여, 군주의 직책과 재상의 직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재상의 직책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쳐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인데 반해 군주의 직책은 이러한 재상을 얻음으로써 그와 함께 의논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한편 조준은 백관의 근본을 6부라 하고 政事가 나오는 곳이라 하여, 이것이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으면 군주와 재상이 아무리 힘쓰고 노력하여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조준은 6부를 행정체계의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이 6부는 누구에 의해 통제를 받는가. 이것은 곧 재상이다. 6부를 중심한 백관이 재상의 통제를 받는다는 사실은 결국 만민을 다스리는 최고의 정책집행자가 재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조준은 재상의 지위에 대하여,宰相의 지위는 군주의 다음으로 함께 天位를 같이하고 天工(天事)를 대신하는 자입니다. 그 존중함은 다른 것과 비교할 바가 없습니다.) 앞의 글라고 하였다. 곧 재상은 위계상으로는 비록 군주의 다음이긴 하지만, 그와 함께 천위를 같이하고 천공을 대신하는 자이다. 여기서다. 특히 공민왕 이후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국가의 정치체제가 혼란되고, 백성들의 피해도 극도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준의 국방의식이 나오게 된다. 게다가 그의 초기 관직 생활이 거의 외직에서의 외적의 격파에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조준의 국방에 대한 생각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국가가 외적에 의해 위기에 처해 있으면 통치체제의 확립이나 수취체제의 공정 등도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에 조준은 국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방체계는 보잘 것 없었다. 그는 국방이 안정되어야만 비로소 국가의 정치제도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그가 생각한 국방관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조준이 구상한 국방관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첫째는 군정을 개혁하여 군대와 군사를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변경의 주·군을 강화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자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그는 군정을 개혁, 단일화하여 당시 군사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조준은 군정을 단일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안을 제시하였다.軍政이 여러 곳에서 나오면 號令이 엄숙하지 못한 것인데, 지금 한 道안에 3인의節制使가 있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東北面과 西北面 외에는한 道에 한 사람의 節制使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하십시오.) 위의 글근세에 병제가 크게 무너져서 用兵한지 30년에 軍政의 통솔이 없습니다.……원컨대지금부터는 閑散 4品 이상을 3 軍에 소속시켜 軍에 將佐로 두고, 5品 이하는 府衛에소속시켜 軍薄司에 통속되게 하면 上·下가 서로 매이고 體統이 서로 연결되어 軍政이한 곳에서 나오게 됩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한 곳으로 통일한 연후에 軍令을 밝히고士卒을 훈련한다면……어디를 지킨들 견고하지 않으며 어디를 공격한들 빼앗지 못하겠습니까) 앞의 글위의 내용은 군정이 나오는 곳이 많으므로 군령이 제대로 행하여지지 않고, 제였다.
    인문/어학| 2002.06.21| 6페이지| 1,000원| 조회(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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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연구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연구』를 읽고{ 한국중세국제교류사Ⅰ. 들어가는 글21세기 현재의 우리는 아직도 근대 와 전근대 를 논해야 하는 모순적 사회에 살고 있다.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데서 온 뿌리 깊은 사회적·계급적 모순과 분단 이라는 민족적 모순은 전근대 를 벗고 현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오랜 과제인 것이다. 특히 미국의 패권주의가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힌 세계 여러 나라에 의해 묵인, 옹호되는 국제 정세와 일부 수구 언론과 정당에 의해 반통일적 행태가 자행되는 국내 현실 속에서 분단의 극복은 민족의 미래가 걸린 선결과제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분단의 연원을 역사 속에서 구조적으로 해명하는 일 또한 큰 의미를 갖는다 할 수 있다.남북의 분단은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과 이에 편승한 외세 의존적이고 기회주의적 지배집단의 책동에 의해 직접적으로 연유된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이미 민족주의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특히 1920년대 이후 전개된 민족해방운동의 양대 노선, 즉 부르주아적 민족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대립과 분열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두 노선은 기본적으로 식민지배를 극복하고,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개혁운동이었지만, 그 운동의 방향은 식민지배를 극복하는 방법과 입장, 운동의 주체와 연대세력의 설정 등에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내었다. 독립운동노선에서 상대적 독립론과 절대적 독립론, 실력양성론과 무장항쟁론, 그리고 주체로서 부르주아 계급과 노농계급 등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차이와 대립의 연장선 위에서 체제를 달리하는 남북의 분단이 나타나게 되었다.이러한 1920, 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대한제국말기와 일제강점 초기에 여러 계층의 민족주의운동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사상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항 이번부터 과제로 떠오른 반봉건 근대화, 반제 자주화의 문제를 둘러싸고 각 계층이 대응하는 행동과 사상, 국권회복운동과 그 이념적 성격을 각 계급의 사회경제적 이해까지 지적하고 있다.그러나 이제까지의 연구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곧, 대체로 국권회복·구국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저항적인 면만을 강조하고, 일사불란한 획일적인 운동으로 파악하여 그 내부의 계급적인 이해관계로 인한 차별성과 다양성을 검토하지 못한 것이다.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연구에서는 이를 모두 국권회복과 실력양성론으로만 정리하고, 이를 다시 국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로 연결하였는데, 그 내부 운동론의 차이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는 계급적인 이념(대지주적 입장과 중소지주적 입장 등)과 사상적 배경(유교적 입장과 기독교적 입장 등)의 차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의병전쟁에 대한 연구에서도 의병의 전개과정에서 평민의병장이 나타나고 독립군 으로 전환했다고 하면서도, 그 이념을 대개 척사위정론에만 한정하여 한계를 지적할 뿐이고, 의병의 신분구성과 거기에서 연유하는 반봉건적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대개 두 운동의 관계를 구국 혹은 국권회복 이라는 면에서 상호보완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계급적인 문제를 무시한 것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서울과 지방에서 전개되는 애국계몽운동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새로운 사회세력-중소지주·부요호층·부상·중소자본가 등-의 동향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국권회복이라는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현상들이 전면에 부각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이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1920년 이후의 민족운동을 이해하는 데도 저항성·항일만이 강조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일정의 극복을 시도하고자 한다.Ⅲ. 대한제국기 정치사상의 제논의근대민족주의운동의 배태기로서 한말, 일제강점 초기의 운동과 사상은 바로 국권이 상실된 식민지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통감부의 정치에 의해 점차 식민지 수탈체제로 강제적인 재편성이 이루어지던 때였다. 농업부문에서 식민지지주제의 재창출을 근간으로, 국유지조사와 토지침탈화운동은 종래의 중세적인 지주제를 처리하는 방향에 따라 크게 지주적 입장과 농민적 입장이라는 상반되는 두 개혁운동으로 나타났다. 전자는 개화파의 문명개화론(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 등)으로, 후자는 농민층의 항쟁과 농민전쟁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상반된 운동노선은 조선 후기 이해 계급 분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지주층·부요호층·농민층의 이익을 각각 대변하는 것이었고, 아직 부요호층이 근대사회를 이끌어 갈 선도적인 부르주아계급으로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 그들의 이익이 보장되는 범위에서 지주층이나 혹은 농민층과 각각 연합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는 한말, 일제강점 초기에서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었다.1. 지주적 입장지주적인 입장에서는 문명개화론의 전통 위에서 지배층·지주층을 기반으로 하고, 이들이 주체가 되는 근대적인 국가를 구상하였다. 서양의 근대적인 정치사상을 수용하면서도 그들의 기득권을 부정하지 않는 논리-입헌군주론·국가유기체설·군주주권론 등-가 특히 선호되었다. 또한 농민층의 항쟁과 의병전쟁을 부정하고,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를 근대화·문명화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신문·잡지 발간, 학교설립과 교육, 산업진흥 등의 문화운동을 추진하였고, 이를 통해 우매한 민중층을 그들의 주도 아래 조직하기 위하여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실력을 양성하고 점진적으로 국권회복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그런데 문명개화론자의 문화계몽운동이 애국=국권회복 이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운동에는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명맥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 관료층은 물론, 서양학문의 수용을 인정한 유교지식인도 동참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지방의 지주층·상인층·부요호층에서도 환영받고 있었다. 이들은 유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유교를 근본으로 하여 서양의 근대사상을 수용하고자 하였으며, 사회진화론에 동의하면서도 근대주의적인 문명화를 반대하우, 자신들의 경제적인 이득이 보장되는 범위 안에서는 농민층과 반제·반봉건 투쟁을 조직하고, 의병전쟁과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지주적인 입장의 운동에 일정하게 가담하여 그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주층이 대거 제국주의 침략과 결탁하였던 것과는 달리, 어느 정도 제국주의의 경제침략에 대해서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대항도 1920년대 말을 고비로 하여 해체되지만, 그때까지 발전하였던 민족자본의 범주를 형성할 수 있었다.2. 농민적 입장한편 농민적 입장의 논의는 실학파의 토지개혁론을 계승한 논자에 의해 정리되었다. 기본적으로 농민층의 몰락을 농민적 토지소유의 달성으로 해결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근대적인 입헌군주제를 구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적인 개혁도 일본의 군사적 재정적인 원조 아래 추진되는 문명개화 는 반대하고, 토지개혁을 통한 내자동원·군대양성 등을 주장하였다. 물론 이런 입장은 앞서의 부요호층과도, 그리고 농민층과도 연결되지 못하고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였지만, 1920년대 이후의 논의와 관련시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그리고 농민층의 반봉건·반제국 항쟁은 의병전쟁으로 계승되었다. 농민전쟁의 실패로 사실상 농민적인 입장의 근대화가 좌절되었지만, 그 이념을 계승한 일련의 운동 속에서 이 노선을 스스로 발전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농민전쟁 이후에 농민층은 반제·반봉건 의식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고, 그들의 항쟁 속에서 이런 인식을 구체화해갔다. 여전히 각 농촌에서는 분산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민란 이 일어나 농민적 토지소유를 지향하였고, 소상품 생산자로의 발전과 농촌소상인의 자립·발전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의병전쟁을 통해서 농민경제를 위협하는 제국주의 세력을 비롯하여 반봉건적 국가, 관료집단, 지주층에 대해 항쟁하면서 반봉건과 반제국주의의 이념을 명확히 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의 무력항쟁을 서서히 민족적인 차원의 전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그러나 아직 농민층은 스스로 자립적 주장도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의병전쟁에 농민층을 수합하려는 자세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이 유교사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복벽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1910년대를 거치면서 대개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이 추하고 있었던 무력항쟁론, 특히 유인석이 주장한 지구전을 위한 근거지론 은 1910년대 이후 그 지역에서 무력항쟁이 발전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그리고 유생층 가운데는 농민층의 몰락을 중시하고, 이를 중세적인 소농경의 안정이라는 점에서 해결하려 하였던 논자도 있었다. 물론 중세적인 신분제의 유지라는 강한 명분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계성이 있는 것이었지만, 지주제 자체를 어느 정도 개혁하려고 하였던 점은 지주제를 유지하려던 문명개화론자의 입장과도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의병전쟁을 통해서 농민층의 무장력을 수합할 수 있었던 논리적 근거도 바로 이런 점에서도 구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소농경영의 지향은 중세적인 신분제의 극복과 같은 자기 한계의 극복이 수반되면 농민적인 입장과 맥을 같이할 수 있는 논리였기 때문이다.Ⅳ. 강점 전후 국권회복운동의 재편과 동향이렇게 본다면 일제강점 초기의 국권회복운동과 거기에 담긴 국가건설론은 조선 후기 이해 전개된 중세체제 극복의 방안, 즉 지주적 입장의 개혁론과 농민적 입장의 개혁론이 국권상실이라는 현실 속에서 재편되면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재편은 바로 이 시기에 현실적으로 전개된 문화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이 매우 다양한 집단의 계급적 이해관계 위에서 전개되고 있었던 점에서 가능하였다. 외형상 운동이 단일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두 운동은 각각 계급연합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합의 결과, 당연히 현실의 조건이 변화되면 그 연합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명개화론의 문화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진보적인 유생층이나, 보수적 척사위정론자의 의병전쟁에 결합되어 있던 민중층의 자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것이다.
    인문/어학| 2002.06.17| 6페이지| 1,000원| 조회(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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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하멜표류기를 읽고 평가B괜찮아요
    『하멜표류기』를 읽고­서양인을 통해 본 조선, 조선인­Ⅰ. 『하멜표류기』의 저술과 그 의의1653년 나가사키로 출발했던 동인도 회사 소속의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베르호는 64명의 승무원들과 함께 실종되었다. 그로부터 13년 뒤 스페르베르호의 승무원 8명은 이상한 모양의 배를 타고 신기한 옷을 입은 채 일본 고토 열도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중 서기였던 헨드릭 하멜은 13년 동안의 조선 억류생활을 기록한 항해일지를 본국에 보냈고 이것은 출판과 동시에 세계적 선풍을 일으켰으며 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하멜표류기』란 제목으로 우리 나라에도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3년간의 긴 억류생활에 비해 짧은 기록일 수도 있는 책이지만 분량의 다소에 관계없이 당시의 조선이라는 나라, 그 속에 투영된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이 조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서양인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는 점은 상당한 흥미를 유발하고 이 책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겠다.특히, 하멜일행이 사신 등의 자격을 가지고 방문을 한 것이 아니라 난파로 인해 오랜 세월 억류되었다는 상황은 그들이 조선과 우리 선조들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객관적 시각을 확보해 주는 동시에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Ⅱ. 서양인의 눈을 통해 본 조선, 조선인먼저 눈여겨볼 점은 조선의 서구에 대한 무지이다. 이것은 제주도민들이 퍼뜨렸다는 소문에서 알 수 있는데, 그들은 하멜일행에 대해 무얼 마실 때 코를 돌려 귀의 뒤쪽에 갖다 놓는다 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소문이 퍼질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은 서구와 서양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동시대에 더욱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 섬나라 일본이 서구와 교류하면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시대에 발빠르게 적응해 나갈 때 대륙과 연결된 조선은서구의 존재파악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늦게나마 찾아 온 문화적 접촉과 인식전화의 기회인 하멜일행의 표류사건은 당시의 폐쇄적인 조선 지배층에게 어떠한 자극도 주지 못했다.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대외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조선지배층의 좁은 안목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멜일행이 일본으로 탈출한 후 받은 일본 관리로부터의 치밀한 심문은 허술했던 조선지배층의 반응과 더욱 비교된다.이러한 점들은 이후에 펼쳐질 우리의 암울한 근대사를 아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더욱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물론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우리가 일본처럼 발빠른 대응과 치밀함을 보였더라면 근대기의 오욕적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이런 지배층의 전반적 무능과 대비되어 보여지는 것이 일반 민초들의 따뜻한 인정이다. 『하멜표류기』 곳곳에서 보이는 이러한 인정은 지배층보다 오히려 일반 백성들이 다른 문명에 대해 발빠르게 대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개방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인문/어학| 2002.06.17| 2페이지| 1,000원| 조회(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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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광해군
    {목 차1. 들어가는 글2. 떠오르는 후금과 몰락하는 명3. 광해군의 대후금정책1) 정보수집과 보안노력2) 기미책의 실시3) 방어대책의 수립4. 명의 원병요청에 대한 대응1) 출병문제의 논의 과정2) 명의 의심 해소와 재징병 회피5. 나오는 글{ 한국중세국제교류사{ 한국근현대사{ 한국근현대사{한국중세국제교류사{{ 한국근현대사1. 들어가는 글조선시대의 임금들 중 가장 극명하게 다른 두 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는 사람이 바로 광해군일 것이다. 역사 속에서 철저하게 외면되고 평가절하되던 광해군은 20세기에 들어서 일제 관학자들과 친일 사학자에 의한 연구에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교과서나 개설서 등에서 광해군을 이처럼 '탁월한 외교전문가'로 부각시켰던 근거는 1959년에 발표된 이병도의 「광해군의 대후금정책」이란 논문이었다. 그 이전에도 이나바 이마키치와 다카와 고조가 광해군을 재평가했었다.그것은 다분히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만선사관{) 만선사관이란 결국 한국사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만주를 중국의 관할로부터 떼어냄으로써 궁 극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낸 식민사관인 것이다.을 강조하는 데 악용되었다.그렇다면 그러한 정치적 의도로 각색되지 않고서는 여전히 광해군은 昏君이고 廢主인가? 이 글에서는 일제에 의해 이용되었던 광해군에 대해서 한명기 씨가 쓴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의 내용을 바탕으로, 특히 광해군의 대중국 실리외교를 중심으로 외교적 측면에서 그의 진정한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2. 떠오르는 후금(後金)과 몰락하는 명(明)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17세기 초반은 대외적으로 대단한 격변기였다. 조선, 일본, 명나라가 뒤엉켜 치렀던 16세기 말엽의 임진왜란이 동북아시아 차원의 세계대전 이었다면, 17세기 초반은 각국이 세계대전이 남긴 후유증을 수습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정착되어 가는 재편기였다. 그런데 이 무렵 동북아시아 질서재편의 소용돌이 속에 태풍의 눈 이 나타났다. 바로 누르하치가 세운 여진족 왕조 성장을 이전부터 우려해 마지않던 대세력가의 출현 조짐으로 여겨 누르하치에게 건주위도독첨사 란 직함을 내려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오히려 이 직함을 이용하여 다른 여진부족이 갖지 못한 정치적 우세를 획득하고 명나라 상인들과의 무역을 독점하여 더욱 힘을 키워갔으며 1589년 왕을 칭하는 등 명을 위협할 만한 뚜렷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1592년과 1598년 두 차례에 걸쳐 누르하치가 조선에 원병파견을 제안한 것은 이러한 세력의 확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 하겠다.이와는 대조적으로 명은 왜란을 전후한 무렵 내부로부터 병들고 있었다. 당쟁은 격화되고 신종은 지도력을 잃고 있었다. 더군다나 萬曆三大征{) 임진왜란과 영하에서 일어난 보바이의 난, 사천지방에서 일어난 양응룡의 반란을 만력삼대정 이라 한다.과 자금성의 두 번에 걸친 대화재, 황태자의 혼례식 등으로 인한 엄청난 비용의 소비로 재정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내놓은 신종의 희한한 방안{) 인색하기로 소문난 신종은 자신의 개인금고, 곧 내탕 속에 어마어마한 양의 은화를 챙겨두고 있었는데 그는 금고 속의 은화를 푸는 대신 궁정의 환관들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은을 모았다.은 稅之弊{) 신종이 파견한 환관들은 태감이라 불리며 각지에서 광세, 상세라는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은을 수탈하면서 엄청난 횡포와 폭력을 휘둘렀는데 이를 광세지폐라 한다.를 만들어냈다. 이에 민변 , 노변 이라 불리는 크고 작은 저항운동이 전국을 휩쓸었고 정권 자체의 안보에도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3. 광해군의 대후금정책광해군 초반 조선과 건주여진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하게 유지되었다. 누르하치는 광해군 즉위 직후 초피를 선물로 보내오는 등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조선 역시 그들이 정성스러운 호의를 보인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북경을 다녀온 사신 등의 보고를 통해 누르하치의 잠재적 위협에 대한 우려는 점증하였다. 그러던 중 누르하치의 세력을 명에서조차 우려한다는 것과 일본군과는 비교.우리의 방비대책은 의당 미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한다. 척후병을 멀리 보내고 봉수를경계하고 간첩을 신중히 하고 기율을 밝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병가에서 마땅히 먼저강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어책이 아니라면 비록 石城과 湯池가 있어도 모두 형식으로끝나고 말 것이다.위의 전교에 나오는 척후병이나 간첩에 대한 언급은 광해군이 무엇보다 정보 수집에 열심이었던 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누르하치 집단의 동향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는데 초기에는 여진족 부족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기도 하였고, 이후 1619년에는 원병을 이끌고 출병했다가 항복하여 후금에 억류되었던 강홍립을 통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얻어 내었다.한편 광해군은 후금의 정보탐색과 더불어 조선의 정보가 후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철저히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비밀 보호 차원에서 조정의 중대사를 朝報에 내지 못하게 하고 잠상배들을 통한 정보 유출을 엄히 경계하였다. 변경지역에서는 수상한 자들이 출몰하는 것을 막으라고 지시하고, 당시 팔도에 흩어져 살고 있는 歸化胡人들의 동향을 감시하는 한편 그들이 요동지방으로 귀환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2) 기미책의 실시후금과 명에 대한 정보파악 노력을 바탕으로 광해군의 기미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획득된 정보를 토대로 후금의 동향과 의도를 미리 파악함으로써 임기응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예로, 1610년 만주 일대에 조선과 명이 합세하여 후금을 공격하려 한다는 풍문이 번지고 그에 대한 누르하치의 반발이 커지자 비변사는 평소 교섭이 있었던 여진인들을 통해 이 소문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것을 누르하치 집단에게 알려 주도록 하였다. 곧 평소에 닦아 놓은 정보망의 활용을 통해 후금의 의심을 살 수 있는 단서를 사전에 피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으로 누르하치 집단을 회유하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고, 적어도 명의 강요에 못 이겨 원병을 파견하기 전까지 누르하치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조선과 후금의 우호오히려 침략에 대비한 군사적인 방어대책의 마련문제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국방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대단해서 즉위 이후 1년 동안 경연은 한 번도 열지 않았음에도 국방문제만은 무엇보다 철저히 챙겼다.방어대책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무기확보를 위한 노력이었다. 그 중에서도 화포의 확보와 활용에 힘썼는데, 후금을 막는데는 화포의 사용이 최선책이라는 생각은 당시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서 화포의 제작에 힘을 기울여 1613년(광해군 5년)에는 본래부터 있었던 鳥銃廳을 火器都監으로 확대, 개편하여 각종 대포를 주조하였다. 또 중앙 차원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장인들을 시켜 破陣砲를 제작하였고 韓嶠假 등에게 전차를 만들게 하는 등 장비 마련에 노력했다.무기확보 이외에도 국방관계 전문가의 임용과 장수 확보에도 상당한 신경을 썼다. 당시 후금에 대한 기미책은 왕 자신이 주도하였지만 광해군 초반의 군사적인 방어대책을 마련하는 데는 이항복과 이덕형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양자 모두 왜란 당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여 군무에 밝았던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는데 광해군은 이덕형에게는 군무를 전담하여 처리하라고 지시했고 이항복은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서북 변방지역의 수령 천거권을 위임할 만큼 신임하였다. 또한 장수확보를 위해 왜란 당시 용맹을 떨쳤던 의병장 출신의 곽재우를 北兵使로 제수하고 남쪽에 파견되어 있던 명장 한명련을 북방으로 올려 보냈다.이와 함께 병력 확보를 위한 노력으로 승군의 활용에 주목하여 그들을 방어에 투입하고 유정 등 왜란에 출전했던 승려로써 지휘관을 삼기도 하였다.또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피난대책 마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강화도를 피난지로 삼으려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신료들은 海島를 피난처로 삼으면 유사시 고립될 우려가 있고, 인화와 물력 유지에도 문제가 있다고 반대했지만 광해군은 강화도 정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명의 징병요구 자문이 온 이후에는 강화도의 정비를 더욱 중시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곡물의 비화이론의 사상적 기반과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을 들어 그에 응하려는 입장이었다.이에 광해군은 출병 회피를 위해 외교적인 절차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유번이나 왕가수는 어디까지나 명의 신료일 뿐이며 번국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칙서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입장에서 직접 북경으로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조선의 피폐한 사정을 알려 징병을 면제받거나, 최악의 경우라도 군대를 징발하되 압록강 연안의 의주에서 위엄만 과시할 뿐 국경을 넘지 않으려고 의도하고 있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회자를 교리 이금을 시켜 요동으로 보내고 박정길을 진주사로 삼아 황제에게 우리 사정을 알리게 하고 성절사 윤휘, 사은사 신식에게도 비슷한 내용으로 주문하도록 지시하는 등 외교적 채널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였다. 특히 이금이 가져간 자문에서는 왜란 이후 조선의 피폐한 상황, 병농이 분리되지 않은 나약한 군사력, 일본의 침략 위협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현실, 황제의 칙서가 없다는 절차상의 하자 등을 이유로 출병에 응할 수 없음을 완곡히 표현하였다.이같은 왕의 의도를 당시 대북파의 대표격인 이이첨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춘추대의와 재조지은을 상기시키면서 군대 출병을 생각할 시기에 외교문서를 통해 요행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반박했다. 다른 비변사 신료들도 춘추대의와 재조지은을 내세원 출병에 응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이이첨 등의 주장을, 피폐한 군대를 호랑이굴로 보내는 것 이라 일축하고 자신의 전교를 바탕으로 속히 문서를 만들어 발송할 것을 지시하였다.그러나 명 조정에 직접 사정을 호소하여 출병을 막아보려던 광해군의 의도는 원정군을 감독하기 위해 요동에 파견나온 經略 楊鎬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는 이금이 이유번, 왕가수에게 전달하려고 가져온 회자의 내용이 왜란 이후 조선의 처참한 형편을 나열한 뒤 출병을 기피하고 관망하려는 것임을 들어 도로 가져가도록 퇴짜를 놓았던 것이다. 이런 사태가 빚어지자 비변사와 삼사 등은 역시 관망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진
    인문/어학| 2002.06.17| 6페이지| 1,000원| 조회(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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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한국전쟁의 원인 평가C아쉬워요
    {< 목 차 >Ⅰ. 들어가는 글Ⅱ. 한국전쟁의 원인과 그에 대한 논쟁Ⅲ. 나오는 글{ 한국 현대사 레포트Ⅰ. 들어가는 글일제 하의 질곡과 고통을 이겨내고 구시대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려 했던 우리 민족에게 분단은 더 큰 모순과 갈등을 안겨 주었다. 이로 인해 생성된 민족적 모순은 외세의 영향과 함께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강만길 교수는 『20세기 우리 역사』에서 한국전쟁 이라는 명칭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적합 한 명칭을 역사학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을 생성해 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통일 이라는 풀기 힘든 과제를 남겨 놓았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적 구조 역시 전쟁이 가져다 준 치유되지 않은 상처인 것이다.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그 이후 한국현대사의 직접적 연원이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대한 총체적 해명과 인식은 한국현대사를 한 단계 전진시킬 수 있을 것이며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인식적 디딤돌이 될 것이다.이러한 인식 하에서 그동안 학계에서 많은 논쟁이 되어온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 숙고해 보고자 한다.Ⅱ. 한국전쟁의 원인과 그에 대한 논쟁한국 전쟁의 원인을 규명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한국전쟁연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였다. 그 중에서도 누가 전쟁을 시작하였는가 라는 물음은 개전의 책임론과 연결되어 많은 소모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여기에는 한국선공설, 미·남한 침략설, 미·남한 유도설, 북한 주도설, 소련책임설, 북한·소련·중공 합동협의설 등이 있으나 사실상 그 해 6월 25일 새벽에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를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 문제의 초점은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느냐보다 오히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역사적·구조적 필연성의 규명인 것이다.전통주의 시각은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을 공산주의혁명을 통한 세계제패의 야욕을 가진 스탈린에 의해 계획되고 지령되어 김일성이 일으킨 불법적 기습남침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전쟁의 원인을 팽창주의적이고 침략 지향적인 소련의 대외정책과 그것을 막지 못한 미국의 대한정책의 약화에서 찾고 있다. 물론 이들은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역할과 결속 정도를 설명하는 데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는 있으나 공산주의 진영의 팽창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기본입장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정부와 남한정부의 공식입장이기도 하다.이것은 극단적인 냉전논리가 지배하던 50, 60년대의 대표적인 견해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이에 반하여 수정주의는 전통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국제정치를 보는 새로운 시각으로서 이들에 따르면 팽창주의적인 것은 소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국이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지어서는 이들은 초기수정주의와 후기수정주의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북한과의 전쟁을 통해 국내의 제반 위기를 해소함으로써 정권을 지속시키려 한 남한정부와 국내의 경제적 위기탈출 및 세계적인 반혁명 총노선의 강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정부 사이의 음모 또는 유도로서 한국전쟁의 발발원인을 설명한다. 따라서 수정주의 시각에서 주목하는 한국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대한공약의 강화, 맥아더의 개인적 야망, 미국내의 정치·경제적 위기, 그리고 이승만 정권의 위기와 38선 선제공격, 북진통일론 등이다.한편 후기수정주의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팽창주의적·공격 지향적이라는 기본적 전제를 수용한 위에 식민지시대에 역사적 연원을 둔 해방 후 한국사회의 제반 모순구조 및 갈등, 즉 남북한간의 갈등 및 남한내의 갈등 등 내인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전쟁의 원인을 설명하려 한다. 이들은 한국전쟁을 해방 후 또는 식민지시대부터의 한국사회의 제갈등의 연속선상에서 파악, 한국전쟁은 이러한 갈등이 국제냉전과 맞부딪치면서 폭발하여 6월 25일을 기해 전쟁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전쟁의 기원은 단순히 6월 25일이 아니라 해방 직후, 또는 일제 식민지시대까지로 올라간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현대사 연구에 이정표적 영향을 끼쳐온 커밍스에 의해 대표된다.이러한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제논의는 각기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으며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통주의적 시각은 냉전의 논리가 만들어낸 산물로서 미국이 팽창주의적 야욕을 감춤 없이 드러내 놓고 있는 현재의 상황들을 볼 때 -물론 현재 미국의 모습을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큰 설득력을 갖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수정주의적 시각 역시 전통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했다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편향적 시각에 빠져들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모든 역사적 사건과 문제들이 그러하듯 그 원인에 있어서 단편적이고 편향된 시각을 통해서 보는 것은 전술했던 역사적·구조적 필연성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차단시킬 우려가 있다.이런 인식 하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내적·외적 요인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내의 일제하와 해방 후를 관통하며 보여지는 계급모순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민족모순이 미국의 팽창주의적 야망의 실현을 위한 일련의 다분히 유도적인 정책과 결합하여 한국전쟁이 야기된 것이다.
    인문/어학| 2002.06.17| 3페이지| 1,000원| 조회(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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