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水畵란 山水,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自然, 그 자체에 대한 表現인 同時에 우리들 人間 스스로가 自然을 대하여 보고 느낀 感想을 繪畵的으로 表現한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東洋인들은 山水를 단순한 우리를 둘러싼 環景이 아니라 人格처럼 살아 꿈틀대는 生命體로 생각하였던 것이다.그러므로 東洋의 山水畵는 다른 어떠한 繪畵 장르들보다 人間의 思想이나 哲學的 생각들을 보다 다양하게 作品에 담아왔을 뿐 아니라 人間의 자연에 대한 感想을 敏感하게 反影하면서 東洋인의 美意識을 나타내는 데 앞장서 왔다. 이런 점에서 山水畵는 東洋인이 지니고 있는 自然觀을 높은 次元으로 昇華시킨 藝術的 表現으로서 創意力의 代表的 表現體이다.우리 나름대로의 文化를 유지하여 왔지만 中國文化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던 우리의 文化는 朝鮮시대에 이르러서는 中國에서 전래된 것을 충실히 따르는 경향이 어느 때보다 큰 시절이었다.당시 사회에서는 中國의 정형화된 山水畵가 유행하던 시기였고, 옛 그림 중에서 眞景山水畵는 거의 없었다. 아마도 권위적인 유교적 사회 구조 속에서 가치기준을 논하던 朝鮮시대에, 전통에 도전장을 던지며 眞景을 추구한다는 것은 고독한 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中國그림에서 확립된 관념적인 山水에 불과하였다.그러나 명이 멸망하고 청이 세워진 후 당시 朝鮮에는 명나라의 정통을 잇는 것은 바로 朝鮮이라는 생각 즉 ‘朝鮮이 곧 中華’라는 생각이 彭排했다. 이러한 우리 文化에 대한 自負心이 社會 전반에 걸쳐 흐르면서 美術쪽에서도 우리의 孤遺한 것을 찾고자 하는 勞力들이 일어났고 그 勞力이 바로 ‘眞景山水’의 樣式으로 나타났다. 우리 나라 山川에 대한 發見과 民族 自覺의 意志가 內包되어 새로운 畵風의 登場이 촉진된 셈이다.이러한 분위기가 무르익은 朝鮮후기에 이르러 南宗 山水畵가 中國에서 流入되면서 종래의 圖畵院의 畵員들이나 그리는 것이 그림이라는 認識이 바뀌어져 士大夫들도 그림에 觀心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社會的 認識이 變化하던 시기에 나타난 겸재는 기존의 中國的인 구도와 筆墨法을 果敢히 버리는 劃期的인 일을 단행한다.이러한 歷史的인 脈絡에서 볼 때 眞景山水畵의 出現은 當代에 自然스럽게 나타난 必然적인 結果이며 韓國的인 畵風의 樹立이라는 繪畵史的 意義를 지니게 된 것이다.眞景山水畵는 實景山水畵를 일컷는 말로 名勝이나 古蹟 등의 실제의 景致를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朝鮮시대에는 眞景이라는 말로 表現하여 眞景山水라고 하기도 하였다. 東洋의 수묵山水畵는 실제의 景致를 寫生에 의해 그리기보다는 觀念的 理想鄕의 山水를 表現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時期나 地域에 따라 다른 畵風의 山水畵가 발달하게 된 것은 實在하는 山水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先人들의 그림을 模倣하는 것을 自然스럽게 생각했던 당시에는 先人들의 그림이나 畵譜를 보고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에도 李寧이 〈례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김강산도〉 등을 그린 기록이 있어 실경산수화가 그려졌을 것이라는 推測은 있으나 남아 있는 作品은 없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나타난 眞景山水畵의 양식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 山川을 실제로 그린 唯一한 作品들이 되는 것이다.韓國의 山川을 남달리 사랑한 謙齋는 어떻게 하면 中國의 화법에서 벗어나 韓國적인 實景 또는 眞景을 새로운 技法으로 表現하느냐를 고민하고 摸索했다. 그의 初期作品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謙齋는 初期에 觀念山水적인 南畵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눈앞의 實景 속의 특징을 어떻게 하면 中國의 畵法을 超越하여 새로운 技法으로 表現하느냐 하는 問題를 갖고 그 問題에서 벗어나기 위해 現實적인 山水에 대한 느낌과의 거리를 좁히려 하는 데서 根本的인 해결책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眞景山水라는 이름으로서 韓國적 山水畵의 정착과 독자적인 전개를 펼쳐 나가게 된 것이다.韓國 繪畵史의 新紀元을 마련한 정선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서울과 그 근교 한강등 우리의 自然을 나름대로 再解析하여 個性的인 筆法을 構築하였다. 즉, 그는 대상을 선택하여 과감하게 변형시키고 그에 따른 전경오감도식의 원형과 대각선 양도법, 거침없이 내리그은 뾰족한 암봉의 수직피법, 그와 대조적인 토산의 미점구사, 미량감 넘치는 바위의 적묵덧칠, 능란한 편필과 수직의 소나무 묘법, 산등성이의 습윤한 거마피와 듬성한 태점등 개성적인 화법과 남성적인 필치로 해석해 내었다. 이런 화풍은 그가 습득한 傳統畵風, 南宗畵風, 회화식 表現법의 습득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그것을 우리 자연 경관에 어울리는 자기 양식으로 완전히 소화하여 일관된 감각의 정선체로 이룩한 것이다. 이로서 韓國 眞景表現의 전형이 이루어 졌으며 후배 화가들에게 모범으로 정착되었다.이러한 정선의 眞景山水畵는 「인왕재색도」와 같이 단순화 시키면서도 實景의 면모를 잘 살린 경우도 있으나, 금강산도 등에서 처럼 심한 과장과 생략이 눈에 띈다. 특히 긴 족자형태의 「박연폭포」는 폭포를 엄청나게 높인 변형과 바위의 시커먼 적묵 덧칠이 바로 그 과정이 극심하게 나타난 좋은 예이다. 즉 정선은 자신이 눈으로 본 實景을 그대로 그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출한 화법의 틀에 맞추어 새롭게 재구성해 낸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의 眞景山水畵는 더욱 혁신적인 것이고 그만의 개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양상은 당대의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의 南宗畵風의 山水畵 - 명대 오파계 南宗畵風을 정착시키는 과정속에서 - 에서도 드러난다.정선이후 후기 이후의 眞景山水畵는 두 갈래의 흐름을 보인다.그 하나는 정선의 화풍을 답습한 일군의 작가들이고, 또 다른 유형은 정선에 공감한 선비화가들이 탐승과 기행을 하는 동안에 절승을 表現한 예이다.정선을 그대로 계승한 화가. 즉, 정선 일가 작가로는 강희언, 김윤경, 정선의 손자인 정황, 김응환, 일명화가인 거연당 등이 손꼽히며 장시흥, 정충엽도 眞景사생에서는 정선의 화풍을 따랐다. 이들은 대체로 정선의 시각과 表現의식이 아닌 외형적인 화법과 필치를 답습함에 그쳤지만 강희언, 김충경의 眞景작품의 경우에는 사생풍의 신선한 감각과 개성미도 어느정도 엿보인다.
1. 유산소 운동에 대한 다음 사항을 기술하시오.? 정 의에어로빅스(Aerobics), 에어로빅 운동이라고도 한다. 숨이 차지 않으며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운동으로 몸 안에 최대한 많은 양의 산소를 공급시킴으로써 심장과 폐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강한 혈관조직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규칙적으로 실시하면 운동 부족과 관련이 높은 고혈압, 동맥경화, 고지혈증, 허혈성 심장질환, 당뇨병 등의 성인병을 적절히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만 해소와 노화 현상을 지연시킬 수 있다. 조깅, 달리기, 수영, 자전거타기, 에어로빅댄스, 크로스컨트리, 마라톤 등이 여기에 속한다.? 강도 및 빈도 설정방법운동 강도는 최대운동능력의 40∼85% 범위에서 처방한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성인은 60∼80% 범위에서, 최대운동능력이 낮거나 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40∼60% 범위 내에서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운동 시간은 운동 강도에 따라 다르게 정한다. 일반적으로 준비 운동과 정리 운동을 제외하고 1회에 15∼60분 정도가 적당하다. 미국 스포츠의학회는 초기 운동 강도를 선택할 경우, 20∼30분 지속할 수 있는 운동 강도와 운동 시간을 권하고 있다. 운동 빈도는 각 개인의 건강과 체력 수준에 달려 있다. 정상 성인의 경우 최소한 일주일에 3회 정도는 운동을 해야 심폐 지구력이 향상되는데 체력 수준이 높아지면 5회 정도로 늘려야 심폐 지구력의 지속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최대운동능력이 낮은 사람은 1회 운동 시간을 5분 정도로 하여 하루에 3∼4회 정도로 나누어서 하는 것이 좋다. 운동 빈도를 주 5회 이상으로 할 경우에는 걷기, 달리기 등 체중 부담을 안고 하는 운동과 수영, 자전거타기 등 체중 부담이 없는 운동을 번갈아 실시하는 것이 좋다.? 지속시간에 따른 에너지 소비량 산출방법운동시 에너지 소비량은 운동 중 소비한 산소량을 구하여 계산한다. (실용적인 이유로 인하여 1L의 산소 소비당 5Kcal의 에너지를 소비한 것으로 체력상태를 고려하여 적당한 강도의 운동을 선택하여야 할 것이며 자신의 환경요건도 감안하여야 할 것이다.자신에게 적합한 운동강도는 현재 자신의 연령과 (실질적인 신체연령을 파악하면 더욱 좋다) 평소 자신의 생활습관(운동빈도)과 자신의 기초체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자신의 신체적성을 발달 혹은 최소한 유지는 시킬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설정하여야 한다. 물론 전문가와 상담하여 운동강도와 프로그램을 설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점차 운동강도를 높여가며 자신의 신체에 큰 무리가 오지 않고 약간의 힘든 정도의 강도로 운동을 실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3. 자전거타기(Cycling)이 건강에 좋은 이유를 설명하시오.자전거 운동은 다른 유산소운동과 같이 심폐기능을 발달시키는 운동이다. 특히 자전거운동은 다른 운동에 비해 흥미롭기 때문에 건강을 위한 신체활동을 하면서 기분전환을할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한 운동이다. 자전거 운동의 주된 효과는 다음과 같다.1) 자전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심장과 폐기능이 발달된다. 심장은 기능이 향상되는데 좌심실의 용적은 커지며 심장 수축력은 증가한다. 또한 안정시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분당 심박출량이 일정하다고 할 때 이것은 심장이 기계적인 일을 적게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정상인의 안정시 심박수가 일분에 70회 정도일 때 마라톤 선수와 같이 우수한 지구력의 운동선수는 60회 정도의 값을 갖는다고 한다. 이것은 심장 기능이 우수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전거 운동으로 폐는 탄력성이 증가하여 단위 시간에 공기를 최대로 마시고 내쉴 수 있는 능력(최대환기능력)이 커진다. 또한 기도가 확장되어 기도를 통한 공기의 이동속도가 향상된다.2) 자전거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순환기 계통의 기능이 향상된다. 순환기는 혈액을 심장에서 온몸으로, 온몸에서 심장으로 이동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이때 영양물질과 산소를 공급하고 노폐물과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열과 호르몬을 전달하기도 한다. 자전거 운이 증가하여 굵기가 굵어지며 굵어진 근육안에는 글리코겐이나 ATP 등 많은 에너지원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게 된다.5) 건강증진 운동으로서 자전거 타기는 달리기나 걷기 운동처럼 지루하거나 인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건강을 증진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운동이다.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운동으로서 자전거 운동은 먼저 체중이 하체를 압박하지 않으므로 하체 관절에 이상이 있는 환자, 골다공증 환자 여성 및 노약자들이 운동하기에 좋다. 또한 비만환자는 운동시 50% 수준의 운동강도로 l시간 정도 운동하는 것이 필요한데 달리기나 걷기 운동은 과체중때문에 하체관절의 손상에 대한 위험이 있으나 자전거 운동은 전혀 그러한 위험이 없어 비만치료를 위한 운동으로도 적합하다.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전거 운동을 할 때는 운동 전체 흐름과 순환기 계통을 미리 적절하게 자극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달리기에 비해서 하체 운동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심장과 폐를 강하게 자극하여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전거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초기에 자전거 운동에 익숙해지도록 규칙적인 연습을 한 후 훈련에 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l0분 내외의 짧은 시간으로 시작하여 점차 연습시간을 늘린 후 30분 정도를 편안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속도나 움직인 거리보다는 페달을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돌리면서 시간과 거리를 늘리는데 관심을 두어야 한다. 자전거 운동시 운동량은 평지에서 운동을 한 경우 자전거 속도와 운동지속시간에 의해 결정되나 언덕길을 달리거나 바람의 영향이 있었다면 운동량을 파악하기는 힘들어진다. 이론적으로 같은 심박수에 도달할 때까지 달리기와 자전거 운동을 했다면 운동량이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전거 운동시 심폐기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최대심박수의 65% 이상을 나타내는 자전거 속도를 유지하여 충분한 시간동안 지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체로 체력을 키우거나 체지방을 감소하기 보다는 먼저 기초체력을 향상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운동을 시작할때에는 근력운동보다는 기초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유산소 운동을 실시하여 심폐지구력 등을 키우는 것이 좋다.초보자는 운동을 하는 습관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운동에 지칠 수가 있으므로 운동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운동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유산소 운동의 경우에는 달리기나 자전거 타기 등을 할 때 실내의 헬스클럽보다는 주변의 공원같은 곳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근육운동을 함에 있어서도 운동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는 1~2달 정도는 운동의 자세를 잡거나 근육에 자극을 주는 방법을 터득하는 식의 운동이 좋다.운동의 흥미를 잃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도달 가능한 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운동이 좋은데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으로서는 팔굽혀펴기나 윗몸일으키기 혹은 철봉등이 있다.5. 심폐지구력, 근력, 유연성 운동에서 ‘적당한 강도’를 산출하는 방법을 쓰시오.심폐지구력 운동에서의 운동강도는 보통 최대 산소섭취량의 60~80%로 여겨지는 데 보통의 경우 이 지점을 찾기 위해서 해당 지점의 심박수 수치를 사용함으로 강도를 유용하게 산출할수 있다. 이러한 심박수 수치를 목표심박수 범위라고 하며 자신의 최대 심박수의 60~80%되는 범위가 최대 산소섭취량의 60~80%범위이며 개인차, 환경조건 등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조절이 필요하다. 결국 운동을 하고 있는 개인이 느끼기에 너무 힘들지 않고 약간의 숨참이 느껴지는 정도가 자신의 심폐지구력을 향상시키는 역치일 것이다.근력운동의 경우 자신이 최대로 낼 수 있는 근력의 85%이상을 적당한 운동강도로 삼으며 이는 자신이 운동을 실시할 경우 6~8회정도 실시가 가능한 강도이다. 반면에 근지구력 운동의 경우에는 60% 이하의 강도로서 보통 자신이 지칠때까지 실시하는 정도가 적당하다.유연성 운동의 적당한 강도는 신체의 각 관절 부위별로 가동범위를 늘려가며 약간 뻐근한10~20분무산소(근력) 운동각 대근육 운동 중심으로2set 이상씩( 15분 정도 )◇ 지방 감소량은 유산소운동보다 덜하지만 몸에 탄력을 줄 수 있으며 기초대사량이 증가하여 칼로리를 소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② 중급자를 위한 프로그램 (약 5개월 간 / 하루 1 ~ 1시간 30분씩 / 주당 4일 이상 )운동 분류운동 종목특기사항유산소 운동러닝 머신 20 분싸이클 10 ~ 20 분◇ 총열량 200 ~ 250 Kcal 정도 소모(평균시속 6 ~ 7 ㎞)◇ 최대 심박수의 60 ~ 75 %를 유지하도록 합니다.( 옆 사람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무산소(근력) 운동각 대근육 운동중심으로3set 이상씩( 20분 정도 소모)◇ 12 ~ 15회 할 수 있는 무게③ 고급자를 위한 프로그램 (약 6개월 이상 / 하루 1시간 30 분 이상 / 주당 5일 이상)운동 분류운동 종목특기사항유산소 운동러닝머신 30분사이클 20 ~ 30분◇ 총열량 300 Kcal 이상 (평균시속 8 ㎞ 이상)◇ 유산소 운동 시간이 힘이 들면 중간에 * 불완전휴식후 다시 하도록 합니다.( * 불완전 휴식 : 스트레칭 하면서 휴식)무산소(근력)운동각 대근육과 소근육중심으로 2set 이상씩(30 분 정도 소요)◇ 10 ~15회 할 수 있는 무게◇ 대근육 : 대흉근(가슴), 광배근(등), 대퇴사두근(허벅지), 복근◇ 소근육 : 이두, 삼두, 삼각(어깨), 전완(팔목위), 비복근(종아리),척추기립근(허리), 대퇴이두근(허벅지 뒤쪽)출처 : www.health114.to살빼는 운동 부분7. Warm-up과 Cool-down의 의미와 실시방법에 대하여 기술하시오.Warm-up이란 운동을 실시하기 전에 하는 준비운동으로서 문자 그대로 체온을 어느 정도 상승시켜서 근육이나 관절의 유연성을 증대시키고 스포츠 활동에 대한 정신적 준비를 이루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일부 프로선수들의 경우에는 체온이 상승될 경우에 운동수행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각자의 상황에 맞는 적용이 필요하다. 반대로 Cool-down은 운.
목 차Ⅰ. 들 어 가 며- 답 사 지 역 선 택- 답 사 일 정 및 경 로- 답 사 지 역 개 관Ⅱ. 본 문1. 고 인 돌 - 강 화 지 석 묘2. 강 화 고 려 궁 지3. 망 양 돈 대4. 용 흥 궁5. 성 공 회 성 당Ⅲ. 끝 맺 음Ⅰ. 들어가며답사조가 짜여진 이후로 답사를 다녀오기까지 답사지역을 정하는 문제는 쉽지 않았었다. 물론 조원이 3명이었고 그나마 한명은 도중에 학교를 나오지 않아 실질적인 조원이 2명이었기에 의견의 교환은 매우 쉬웠으나 답사를 다녀오기 직전까지 어디를 다녀와야 하는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문제는 어려웠다. 내심으로는 좀 먼 곳을 다녀오고도 싶었지만 여러 개인적인 사정들로 인하여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우리 수업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많이 존재하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보니 강화도 지역이 가장 거리 및 문화유적들의 분포가 적당한 곳으로 선택되었다.답사는 5월 22일 토요일 오전에 출발하여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경로는1. 신촌 그랜드마트 앞 집결2. 신촌-강화 고속버스 이용외포리 하차3. 망양돈대 답사4. 시내버스 이동5. 강화지석묘 답사6. 시내버스 이동7. 용흥궁, 성공회 성당고려궁지 답사(도보이동)8. 택시이용 터미널 이동9. 고속버스로 신촌도착으로 설정하였다.최초의 의도는 외포리까지 들어간 이후에 강화도 안쪽에 있는 적석사와 고인돌군, 석조여래입상, 오층석탑까지 모두 둘러보려 하였으나 교통편을 좀 더 확실히 숙지하지 못함으로 인하여(택시를 의도하고 갔으나 택시조차 다니질 않는 지역이었다) 버스노선이 적석사와 고인돌군은 지나질 않고 오층석탑지역도 그냥 지나쳐버려서 결국 망양돈대로부터 시작하여 강화지석묘-용흥궁,성공회성당-고려궁지로 이어지는 답사를 하게 되었다.강화도는 면적 302.14㎢, 남북길이 30㎞, 동서길이 12㎞, 해안선길이 99㎞이다. 1999년 12월 현재 2만 96세대에 6만 565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가장 큰 섬으로, 최고점은 마니산(摩尼山:468m)이다.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강화의 북방식 고인돌은 한반도의 서북부인 황해도?평안도 지방과 만주 요동반도 일대에 연결되고 있어 이들과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강화에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고려산 주위의 강화읍?송해면?하점면?양사면?내가면 등 1개 읍 4개 면에서 무려 110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발굴 조사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40여 기가 확인되어 지금까지 강화에서 알려진 고인돌은 대략 150여 기 정도이다. 이 가운데 약 2/3가 북방식 고인돌이고, 약 1/3이 남방식 고인돌으로 확인되었고, 형식이 분명하지 않은 고인돌의 석재들이 매몰되거나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도 다수 발굴되었다. 특히 강화에 상당수의 남방식이 북방식과 함께 혼재하여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되었다.1966년에는 하점면 부근리 점골 고인돌 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서 청동기시대의 집자리가 발굴되기도 했다. 고려산 북쪽 끝자락쯤에 자리잡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작은 기둥을 세웠던 기둥 구멍(小孔)이 발견되었고, 角形 토기의 바닥 모양을 갖춘 토기 조각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발해 연안 동쪽의 전형적인 무문토기 문화의 초기 유형으로 당시까지만 해도각형 토기가 임진강 이남에서 발견된 것은 강화도가 처음이었다. 이런 유형의 각형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 유형으로 이러한 초기 각형토기가 유행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7세기경부터이다. 이 시기는 강화도 고인돌 무덤의 축조 시기와 부합되는 것으로, 청동기시대 집자리 유적이 고려산 북쪽의 고인돌 무덤을 축조한 인류의 생활 터전이었음에 틀림없다.강화에는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시기의 유적들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에 강화에 살던 사람들이 돌로 만든 지배계층의 무덤이다. 이와 같은 고인돌이 150여 기가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적 구성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대단했음을 짐작케 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고인돌이 아닌 중국의 요령, 창녕 지방의 고인돌. 스톤헨지 등 새로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강화도에서 직접 발견 된 것도 아닌 그런 유물들이 문 앞에 있다는 점. 다른 명쾌한 설명도 없이 진짜 고인돌은 저만치 떨어져 덩그러니 놓여있었다.(강화지석묘4,5,6,7,8) 그리고 붉은 색으로 화려한 문은 만들어 놓았지만, 정작 고인돌에 대한 설명은 부족한 느낌이었다. 뭐..물론 작년 고인돌 축제를 마치고 난 흔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축제가 끝났고 그 여운을 남기고 싶었다면 조금은 더 성의있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 버스정류장에 고인돌 사진을 넣어둘 센스(버스표지판)로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한 쪽에 놓인 게시판 하나로는 고인돌에 대한 작은 인식을 갖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고인돌에 대한 가벼운 설명이라도, 강화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려주는 작은 안내판 하나, 안내자분 한 명이 무척이나 아쉬웠다.사실 이런 마음은 강화도를 보는 내내 계속 되었었다. 강화도는 그 지역적 특성 덕분에 한반도의 왕실들이 한 번쯤 거쳐간 역사가 있다. 덕분에 그 작은 섬 안에는 고대 청동기 유적에서부터 현대의 유적까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만약 그 유적들을 조금만 더 살렸더라면 경주처럼 의미가 깊고 사람들도 많이 알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2. 강화 고려궁지? 고려궁터(사진11)는 몽고의 침략에 39년동안 항전했던 때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몽고가 두번째로 쳐들어오자 고종은 천연의 요새인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당시 최고 실력자인 최우가 이령군을 동원해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규모는 당시 개경의 궁궐에 비해서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강화궁궐에는 정궁을 비롯 행궁, 이궁, 가궐 등의 많은 궁궐이 있었다고 하나 남겨진 것은 빈 궁터와 공사진행중이라는 안내판만이 서 조선시대의 역사자료를 저평가하고 있지는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궁터 곳곳에서 진행되는 복원공사를 보면서 이곳이 왕궁터가 아닌 고려왕궁의 옛모습을 다시 되찾고,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풍부한 설명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유적지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다.3. 망양돈대(망양돈대1,2,3)? 돈대란 경사면을 절토(切土)하거나 성토(盛土)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擁壁)으로 받친 부분으로서 여기에는 건물을 짓거나 분수 ·연못 ·화목(花木) 등이 조성되는 경우와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추어 방위시설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① 정원시설로서의 돈대:그 형상은 경사가 가파를 때에는 자연적으로 옆으로 길쭉한 모양이 된다. 돈대는 그 밑에 조성되는 화단과 원외(園外)의 자연경관에 대한 전망대 구실을 하여 화단이 밝고 다채로운 것에 반하여 어두운 녹색에 덮인 시원한 그늘을 가진다. 한국 고대 민가의 정원 뒤뜰에는 돈대의 형태가 눈에 많이 띄는데, 이것은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에 근거를 두어 언덕을 등진 곳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뒤뜰에 경사지가 생겨나, 이러한 방법으로 평지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꽃나무를 심고 괴석(怪石)이나 세심석(洗心石)과 같은 점경물(點景物)도 놓았다.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후정과 전남 해남에 있는 윤선도(尹善道) 생가 뒤뜰에 있는 돈대는 그 좋은 예이다.② 방위시설로서의 돈대:조선시대 《남한지(南漢志)》에 인조 때 수축한 남한산성에 돈대 2기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나 유적은 전하지 않는다. 그 후 1679년(숙종 5) 강화(江華)에 53개소의 돈대가 설치되었으며, 그 형태는 돌을 원기둥형으로 쌓아 곳곳에 총구멍을 설치하고 위에는 낮은 성첩(城堞)을 쌓았다. 1796년(정조 20)에 축성된 수원성곽에도 3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는데, 벽체에는 총구멍을 설치하였고 돈대 위에는 대포의 일종인 불랑기(佛狼機)를 놓았다. 또한 그 재료를 전(塼)으로 하여 화포의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다.철종의 즉위 배경 :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순조의 비인 순원 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왜냐하면 종묘에 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 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 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용흥궁 : 용흥궁이란 용이 일어난 궁이란 뜻인데 여기서 용이란 임금, 곧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을 가리킨다. 1849년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였을 때 원범(元範. 철종의 본명)은 강화에 살고 있었다. 원범은 1831년(순조 31)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원범의 증조 할아버지가 사도세자이고,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와 그 궁녀 사이의 소생 은언군(恩彦君)이었다. 은언군은 소년시절부터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제주에 유배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조 연간에는 이복형인 정조의 끔찍한 비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에 유배되었고 순조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결국 죽임을 당했다. 원범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원범이 11살 되는 해에 죽었다. 이러한 집안 사정 탓으로 원범은 종실(宗室)이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그 처지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14살이 되던 해에는 어떤 역모 사건의 바람에 휘말려 전가족이 교동을 거쳐 강화에 와
햇빛 자르는 아이영화는 시작하는 부분에서 롱테이크를 통해서 어려운 집안 환경을 보여주며 아이가 처해있는 도피하고픈 현실을 보여준다. 부모들이 모두 일을 나간 후에 아이는 동생과 함께 방안에 갇힌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다른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에 아이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가위로 손에 상처를 내어 자신이 가진 종이나비에 피를 문지르는 행위는 아마도 그 나비에 자신을 동일시 시키는 행위인 듯 하다. 자신은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없지만 나비는 훨훨 날아 세상을 맘껏 돌아다닐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것이다.어느 순간 창문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햇빛은 과도할 정도로 아이에게 집중이 되고 아이는 그 햇빛 속에서 아름다운 상상속에 빠져든다. 아이는 햇빛이 자기 자신에게만 비춰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햇빛을 자기 자신을 현실로부터 탈출시켜서 바깥세상으로 이어주는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햇빛 속에서 아이는 한없이 행복한 꿈을 꾸게 되고 현실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 된다. 하지만 그 행복을 만끽하려는 바로 그 순간 동생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햇빛은 사라지며 아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동생은 아이를 구속하고 있는 현실인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햇빛을 멀어지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사라진 햇빛을 아니 도망간 햇빛을 다시 붙잡기 위해 올라간 밥상이 엎어지면서 아이는 넘어지고 동생은 죽게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부모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하지만 시종일관 아이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듯 하다. 오히려 자신을 버린 햇빛을 생각하는 듯 하다.다시 부모들이 일을 나가고 아이는 혼자 남겨지고 햇빛이 다시 찾아오지만 이전의 햇빛이 비출때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이전의 햇빛이 들어올 때는 영화의 음악도 환상적이고 밝은 분위기였으나 이제는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음악이다. 즉, 아이가 이전에 느끼던 햇빛은 자신을 행복한 꿈을 꾸게 만들고 바깥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친구였다면 이제는 자신을 유혹하여 바깥세상을 그리워하게 하고 그로인해 동생을 죽게 만들고 자신에게 고통을 준 적대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아이는 자신을 방안에 가둬 세상과 단절시킨 부모들에게 그들이 자는 동안 방문을 걸어 잠금으로 똑같은 행위를 가한다. 또한 햇빛으로 인해 자신이 고통을 느꼈듯이 햇빛도 고통을 느끼기를 바라고 햇빛을 향해 가위질을 한다. 햇빛을 잘라버림으로써 상상속의 세계와도 단절하는 것이다. 아이의 상상과의 단절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 대신 바깥세상을 훨훨 날아다녀줄 것으로 믿었던 나비가 결코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불태워버리는 것이다.영화는 초반에 구슬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한다. 구슬에 비친 아이 자신의 모습은 바로 서 있으나 구슬을 통해 본 주위의 모습은 거꾸로 서 있고 또 왜곡되어 있다. 아마 이를 통해서 아이가 자기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려 한 듯 하다. 또한 빛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단순한 빛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눈동자나 구슬에 비춰지는 모습이라던가 혹은 수도관 속에서 물을 통한 빛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수도관에서 나는 소리와 함께 빛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 전체에서 시종일관 아이의 표정은 무표정하며 그것은 아마도 희망을 잃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이는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청각이 배제되고 시각이 부각되어 햇빛과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햇빛을 잘라버리고 나비를 불태우는 것은 아이가 이제 상상속의 세계와 단절하는 것, 즉 유년기의 꿈을 버려보이는 행위로도 비쳐지기도 하지만 아이 그 나름대로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저항 내지는 단죄로 보이기도 한다.
원래 澗松美術館을 房門하기로 한 일요일이 토익시험이라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뒤늦게 澗松美術館을 다녀왔다. 비록 몇년전에 澗松美術館에 갔다왔지만 이미 기억이 稀微해져 美術館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름다운 많은 나무들과 여러 石造作品들을 볼 수 있어서 다른 世界에 온 느낌이었다. 꼭 遺蹟地 같은 곳에 온 느낌을 받았다. 마침 謙齋 鄭敾의 그림을 展示하는 其間이어서 學窓時節에 敎科書에서 보았던 謙齋의 익숙한 그림들이 눈에 띄었다. 예전에 房門했을 때는 너무 많은 학생들과 함께 움직여서 그런지 美術品들을 여유있게 觀覽하지 못했는데 個人的으로 美術館을 가니 내가 보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볼 수 있어 여러 美術品들을 좀 더 자세히 보고 그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修業을 통해서 그림으로만 보아왔던 수많은 그림과 陶磁器등의 作品을 보면서 우리 文化의 優秀性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고 그 展示物들을 보며 왠지 모를 親熟함을 느끼며 나는 역시 韓國人이구나 하는 同質感 또한 느끼게 되었다. 아름다운 文化財들을 보는 순간 나의 情神은 이 文化遺産을 남긴 우리의 祖上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는 그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澗松美術館에 있는 수많은 文化財들을 보며 그것이 國家나 다른 團體가 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 民族의 가장 暗鬱한 時期였던 日帝 時期에 個人이 熱情과 信念을 가지고 우리 民族의 情神을 支?하는 文化遺産을 保護하기 위해 모은 것이라니 실로 그에 대한 尊敬이 절로 들었다. 澗松美術館을 세운 澗松 全鎣弼, 보통 사람들이 獨立志士하면 日帝에 抗拒하여 직접 物理적인 힘을 行事하거나 그들의 拷問에 犧牲된 사람들을 생각하지만 澗松 全鎣弼이야말로 그들못지 않은 眞情한 愛國志士인 것이다. 文化가 없으면 情神이 없고 情神이 없으면 비록 肉體는 그 자리에 存在한다 하더라도 더 이상 人間으로서의 存在價値는 없는 것이다. 人間이 다른 動物들과 區別되는 점이 무엇인가. 바로 人間만의 孤遺한 文化와 情神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중요한 우리의 文化와 情神을 지키기위해 日帝時代의 수많은 文化財 掠奪에 抗拒하여 우리 文化財를 收集 保護하는 行爲야 말로 우리의 얼을 지킨 眞情한 愛國行爲인 것이다.全鎣弼의 本貫은 旌善, 號는 澗松이며, 서울 종로에서 中樞院議官 全泳基와 密陽 박씨(朴氏) 사이의 2男4女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曾祖父때부터 지금의 종로일대의 商圈을 掌握한 富豪의 相續者로 태어나 당시 日本의 와세다大 法學剖를 卒業한 엘리트 知識人이었던 그는 당시 美術史學者였던 韋滄 吳世昌을 만난 이후 25세부터 古書를 收集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그 營域을 그림과 陶磁器로 넓혀나갔다. 그가 스물아홉이 되던 1934년 성북동에 일만여평의 땅을 구입 北壇莊이라는 건물을 지어 守藏品을 看守하기 시작하였고 19 38년 日帝의 强力한 物資統制令에도 불구하고 당시 文化財 流出의 가장 큰 通路였던 京城美術俱樂部에서 열리는 日本人들의 美術品 競買에 참가 수많은 우리의 文化財들을 求入하여 保護하였다. 그가 우리 文化財들을 保護하기 위해서 인천항에서 日本으로 搬出되는 浮屠塔을 막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갔던 일이나 美術品 競買에서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巨額을 投資하여 文化財를 사들인 일, 좋은 文化財가 있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던 逸話는 英國人이었던 개스비로부터 文化財를 사들인 일 등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