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서 론1. 작가소개◆ 작가 이청준◆ 감독 임권택2. 축제의 의미◎ 본 론3. 등장인물 소개4. 줄거리5. 축제의 가족상6. 영화를 통한 감독의 시선◎ 결 론7. 비평가들의 영화평론※ 참고 사이트1. 작가소개? 작가 이청준1939년 8월 9일 전라남도장흥군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을, 1978년 《잔인한 도시》로 제2회 이상문학상을, 1986년 《비화밀교》로 대한민국문학상을, 1990년 《자유의 문》으로 이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1965년에 《사상계》 신인상에 《퇴원》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병신과 머저리》(1966), 《굴레》(1966), 《석화촌》(1968), 《매잡이》(1968) 등의 초기작에서 현실과 관념, 허무와 의지 등의 대응관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하였다. 경험적 현실을 관념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그의 진지한 작가의식이 때로는 자의식의 과잉으로 나타난다거나 지적 우월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이청준의 소설적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어 《소문의 벽》(1971), 《조율사》(1972), 《들어보면 아시겠지만》(1972), 《떠도는 말들》(1973), 《이어도》(1974), 《낮은 목소리로》(1974), 《자서전들 쓰십시다》(1976), 《서편제》(1976), 《불을 머금은 항아리》(1977), 《잔인한 도시》(1978), 《살아있는 늪》(1979) 등의 무게 있는 작품을 발표하였다.이청준은 그의 소설에서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과 그 횡포에 대한 인간 정신의 대결 관계를 주로 형상화하였다. 특히 언어의 진실과 말의 자유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른바 언어사회학적 관심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면서 《잔인한 도시》에서 닫힌 상황과 그것을 벗어나는 자유의 의미를 보다 정교하게 그려내기도 하고, 《살아있는 늪》에서는 현실의 모순과 그 상황성의 문제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사장(2002)가족사항 7남매 중 장남, 1979년 15살 연하의 영화배우 출신 채혜숙(예명 채령)씨와 결혼, 2남학력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원론 과정 1기주요작품 《전쟁과 노인》《증언》 《상록수》《족보》《깃발 없는 기수》 《만다라》《안개마을》 《길소뜸》 《씨받이》 《연산일기》 《아제아제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 《창》 《취화선》1936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광주 숭일고등학교를 3년 중퇴하고 1956년 신생영화사 영화 제작부에 입사하였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1987년 《씨받이》로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감독상·작품상을 수상하였다.1989년 《아다다》로 몬트리올영화제, 《아제아제바라아제》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 참석했고, 1993년 《서편제》로 상하이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1996년에는 임권택 영화제를 개최하였다. 또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흥행영화 《손에 손잡고》를 감독하였고, 서울올림픽 공식영화 《88 서울의 신화》 총감독을 맡았다. 1990년에는 독일 BR 3TV에 《길소뜸》이 방영되었고, 1993년에는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주간'이 설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영화연구소 자문위원이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동국대학교 연극영상학부 겸임교수, 1996년 이후 한국영화연구소 이사장(초대)으로 있다. 조선 후기의 화가 장승업의 일대기를 그린 《취화선》으로 제55회 칸영화제(2002)에서 감독상을 받았다.작품에는 《전쟁과 노인》(1962), 《증언》(1973), 《상록수》(1978),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1979),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3), 《길소뜸》(1985), 《씨받이》(1986), 《연산일기》(1987),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창》(1997), 《춘향뎐》(2000), 《취화선》(2002) 등이 있다.2.에서 죽은 사람은 가족'신'이 되므로 죽어 신이 되어 가는 망자나 뒷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일이므로 장례식은 축제라는 결론이다. 이런 것 외에도 도교적으로 나비가 되는 경우에도 비슷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 외에도 다성적인 언어의 축제라는 등, 뒤에 평론가가 다양한 축제의 양식을 분석한 것도 있습니다. 용순이가 장례식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축제의 무질서성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또한 영화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동화" 소설에서는 조금 언급되는 그 할미꽃 동화에서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지혜와 키를 나누어주고 조금씩 어려지고 키도 작아지셨다가 사라지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같은 것을 축제라고 비유하고 표현하려는 것입니다.3. 등장인물 소개준섭 40대의 유명작가, 시골에 있는 노모가 돌아가심.용순 준섭의 이복조카, 어렸을 적 집안의 천덕꾸러기, 준섭의 대한 강한 적개심을 보임.장혜림 준섭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 온 여기자.준섭모 17살에 시집와서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신 할머니(그녀의 죽음으 로 인해 온 가족 친지들이 모임).형자 용순의 이복언니, 어려서 돈을 가지고 도망간 용순을 그리 좋게 여기지 않음.4. 줄거리임권택의 줄거리40대의 유명작가 이준섭(안성기 분)은 시골에 있는 노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준섭의 도착에 따라 장례가 시작되고 시집와서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모셔온 준섭의 형수는 그 시어머니의 죽음에 그동안 고생해온 자신의 설움이 은근히 복받친다. 5년이 넘게 노망을 앓아온 87세 할머니의 죽음은 상가에 온 사람들을 그리 슬프게는 하지 않는다. 더러는 노골적으로 호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놓고 조금씩 생기던 가족간의 갈등은 13년전 집돈을 훔쳐 가출한 준섭의 이복조카 용순(오정해 분)이 나타나면서 깊어진다. 요란한 복장과 천연덕스런 행동... 용순은 자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복언니 형자(홍원선 분)와 대판 싸우고 상가를 나간다. 모친상을 통해 준섭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기패들은 읍내 여관에서 늦는다. 그러면서도 준섭은 일을 진행시키는데 상여가 나가고 용순은 장혜림이 건네준 준섭의 동화를 보게된다.5. 의 가족상1965년 로 등단 이후 30여년의 작품 활동 기간 동안 작가 이청준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주요한 문학적 모티브가 되어왔다.실제로 작가자신 8세때 여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반면, 95세를 일기로 10여년전(94년)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청준에게는 어머니이자 곧 아버지였다. 더욱이 말년엔 치매인 노모를 가까이 모시지도 못하고 먼 장흥 땅에 남겨두고 서울 살이를 해온 것이 그에겐 벗어날 수 없는 짐을 지워준 셈이었다.몇해전 이청준은 상당 부분 자전적인 요소가 포함된 소설 를 내놓음으로써 그 '어머니'의 결산편을 보여주고 있다.는 소설가인 이준섭이 노모의 사망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팔순 노인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여든 집안 식구들과 이웃들, 지인들은 망자의 생전 음덕과 30대에 청상이 된 며느리와의 해로, 치매로 인한 말년의 고통 등을 회고하면서 묵은 갈등을 해소해 나간다.그러다가 고요한 질서를 깨뜨리며 등장한 용순의 출현은 새로운 갈등요소로 떠오른다. 용순은 준섭의 이복 조카이다. 제 아비의 주검 곁에 버려진, 짐승새끼 같은 아이 용순은 과부가 된 큰엄마와 배다른 형제들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었다. 그 후 13년이 지나 유일하게 자신을 혈육으로 인정해주고 감싸준 그 할머니의 장례식에 나타난 것이다.용순은 삼촌인 준섭에게, "글써서 할머니 팔아먹고 식구들 팔아먹고 고상한 체하는"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모든 가족들에게 독설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용순은 우연한 기회에 준섭이 쓴 동화 를 읽고 비로소 깊은 사랑과 용서와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 동화는 준섭이 실제로 어머니의 얘기를 쓴 것으로, 늙음이 결코 추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하여 지혜와 사랑을 나눠주고 당신의 몸은 점점 작아져서 사라져간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제목 '축제'는 정한과주는 사람이 이미 곁에 없는 할머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죽은 자를 보내기 위해 산 자들이 모인다.그러나 장례식이라는 그 모임의 절차 안에서 죽은 이가 산 자들을 화해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함께 살아가도록 거든다. 그래서 서로 넘을 수 없는 오해와 미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던 가족들과 용순이가 할머니를 떠나보낸 뒤에 마지막 순간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순간은 더 없는 삶의 긍정이 화해에 있음을 보여 주는 시간이기도 하다.바로 그 시간의 흐름 안에 동화의 이야기가 끼어든다.두 개의 이야기는 그 어느 쪽이 다른 한쪽을 자기의 이야기 안에 귀속시키는 대신 동시적으로 진행되면서 서로에 대해 말을 건다. 그러니까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대화하면서 현실과 동화, 리얼리즘과 알레고리, 장례식과 비전 사이를 자유로이 넘나든다. 이것은 임권택 감독이 그동안 추구해 온 인본주의의 하나의 결산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 를 보면서 다시 이청준 작가는 소설를 완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화와 영화, 영화와 소설이 서로에게 기대어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기의 힘으로 버티어 선다. 이것은 두 명의 예술가가 서로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함께 이루어낸 지혜의 나눔이기도 할 것이다.7. 비평가들의 영화평론1996.06.26.『미디어오늘』축제 - 산자와 죽은 자의 화해를 위하여…산자가 죽은 자에 대해 말하고, 죽은 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것은 한국문화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죽은 자에 대한 예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임권택 감독의 는 한편으로는 우리를 지배하는 죽은 자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죽은 자로부터 산자인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일상생활 속의 ‘우리 집단’의 구조를 담고 있다. 이것은 장례식 그 자체를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는 죽음에 대한 슬픈 상념에 빠져들지는 않는다.말하자면 여기 그려진 것은 죽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경계로 죽은 자와 산자 사이쳐진다.
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 - 李佑成東明王篇과 帝王韻紀의 硏究序문학사의 방법이나 관점과 같은 것은 이 논고의 논제 외에 속하지만, 나는 이 논고에서 두 가지의 조그만 성과를 시도해보았다.첫째, 문학의 연구에 있어서 역사과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보려한다.둘째, 문학의 생성?발달을 민족의 성장과정 내지 민족의 정신적 전개 방향과의 내면적 연관에서 직접 파악해 보려고 한다.1. 李奎報?李承休의 世界(1)12?3世紀의 歷史的 事情동아시아의 역사는 10세기에 접어들면서 커다란 변혁기를 맞이했다. 당이라는 세계제국이 몰락하고 아시아의 안정이 동요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제국적 지배질서가 붕괴되고, 제국의 내부 및 주변의 제 민족들이 각각 독자적인 움직임을 개시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외사정으로 인해 고려중기는 많은 대외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침략과정 속에서 나름대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는데,첫째, 바로 금나라(여진족)의 침략시에 제기된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이다. 이들(묘청의 세력)은 귀족정치에 대한 불만과 귀족의 비굴한 외교에 대한 굳센 반발이라는 사상적 배경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금을 협공해서 멸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천도파의 금에 대한 저항의식이 얼마나 강렬했나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일부 술수가의 책략의 그치는 것이 아니라 널리 민중의 심리에 결부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둘째, 대몽항쟁을 바탕으로 한 민족의 자주의식의 발로이다. 이후 몽고가 금을 멸하고 일어났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집권을 한 최씨정권은 대몽항쟁을 바탕으로 전기 귀족의 정치 지배관계의 폐쇄성에 비하여 보다 넓은 지반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강고한 결속과 과감한 조치로써 모든 가능한 힘을 동원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 낡은 고려왕실과 반동적 관료군에 의하여 몽고에의 강화(講和,교전국 끼리 싸움을 그만두고 화해함)와 강화로부터의 출륙이 결정되었고, 결하여 칭제건원을 내세운 서경 천도운동이나 대몽항쟁속의 각 지방의 영웅적 전투나 삼별초의 난에 있어서 ?민중의 심리의 귀일과, 민중의 에네르기의 축적에 의한 민족적 저항정신의 발산?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2?3세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였다. 이시대의 저항정신이 현실적 제약에서 더욱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다시 발효되어, 그것의 분발(噴發)이 문학의 정화(精華)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 이 시대의 대표적 문학자인 이규보?이승휴에 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2)李奎報?李承休의 生涯와 思想무신의 집권은 두 가지 중요한 역사상의 의의를 지니는데, 하나는 낡은 귀족세력의 청산이요, 다른 하나는 신진사인의 진출이었다. 이규보와 이승휴는 이 시대에 선후했던 신진사인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시대적 간격이 있었는데, 이 근소한 간격 동안에 고려의 국가?사회는 만장의 파란 속에 급전하게 되었고, 거기 따른 시대적 환경의 변천은 두 사람의 생애와 사상에 커다란 특색을 가지게 했다.먼저 이규보를 살펴보면 당시 이규보의 가문은 지방에서 진출해온, 가계도 관위도 대단치 못한 처지였으나, 일정한 토지와 노예를 소유하여, 새로운 사회조건에 적응하면서 전진할 기반을 닦아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규보는 과거에 세 차례나 응시해 낙방했는데, 이는 이규보 자신이 자기의 감흥을 자유롭게 읊조리는 풍월시를 즐겼을 뿐, 부자연한 과거문체에 흥미를 끌지 못했던 셈이다. 이러한 성격은 과거에 오른 후에도 당국자의 환심을 얻지 못하여 오랫동안 불우한 생활을 겪어야 했다. 이 불우한 생활이야말로, 그에게 문학수양을 위한 가장 뜻 깊은 시기였다. 요(遼)?금(金)이래의 비굴한 외교관계속에서도 그의 생래(生來)의 방달(放達,마음이 활발하여 거리낌이 없음)한 안광(眼光)과 초예(超睿)한 두뇌와 반발적이 체질은 현실에의 충동과 문학에의 침잠을 통하여 시대의 정신을 체득하고, 민족의 맥박에 심호흡을 가해서 『동명왕편』과 같은 역사적 명작을 완성하게 한 것이다.그는 스스로 백운거진출을 더욱 열망했다. 이규보가 여러 문사와 함께 최충헌의 저택에서 천엽유화(千葉榴花)를 부(賦)한 것이 최씨정권에 접근하게 된 최초의 계기였다고 하거니와 최충헌?최이 부자 양대에 걸쳐, 그는 그의 문학으로 최씨정권에 마음껏 협조했다.강화시대는 그의 문학적 활동에 있어서나 사환의 영달에 있어서 일생에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 그의 시와 산문의 대부분은 긴박한 국난의 극복과 초조한 민심의 위무(慰撫,위로하여 어루만짐)에 관한 것이었고, 그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관자(官資)도 승진되어 어느덧 재상의 한 사람이 되었다.이규보의 일생에 비하여, 이승휴는 한 사람의 시인으로 더욱 불운한 시대에 처했던 사람이다. 최씨정권이 성립된 지 29년 후에 출생한 그는 대몽항쟁의 시기인 1252년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다음해에 있은 몽고군의 대공세로 인해 삼척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이시기에 몇 사람의 노예를 거느리고 약간의 전초를 자영하는 소토지 소유자였는데, 신진사인인 그는 어디까지나 관료로의 진출을 단념할 수 없었다. 10년 후인 40세 때에 도병마 녹사(都兵馬 綠事)가 되었다. 이후 왕에게 그의 존재가 알려져 차차 등용되게 되었는데, 그의 정직한 성격은 현실과 서어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소(疏)를 올려 시사를 극론하다가 왕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고 만다. 옛 고향으로 돌아온 이승휴는 그의 전초에 입각하여 신시대를 지향하는 지주로서 시대의 진운에 보조를 맞추는 사람이 아니고, 도연명과 같은 전원의 일민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후 그의 이상은 갈수록 도피적이어서, 만년에는 전적으로 불교에 몰입했다.이러한 사고방식은 그의 처세관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는데, 이는 전기 「촌거자계문(村居自誡文)」에 국사와 세론에 일체 함구를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한데서 잘 나타난다. 또한 음풍영월을 완전히 제거치는 못하나, 되도록 하필을 삼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시집은 산실의 이유도 있겠지만, 전체 분량이 얼마 안 되는데다가 만년의 작이 더욱 적은 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그가1)영웅시로서의 『동명왕편』『동명왕편』과 『제왕운기』를 다같이 서사시로 규정할 수는 있으나, 이 두 작품은 그 주제에 있어서, 그리고 그 구성에 있어서 상당히 틀리다. 『동명왕편』은 동명왕 이라는 한 사람의 창국의 영웅을 찬미한 시였음에 대하여, 『제왕운기』는 「동국군왕개국연대」,「본조군왕세계연대」라 하여, 한 개의 중심인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군개국으로부터 작자자신의 시대까지를 포함함 민족의 전역사기간의 중요사실을 서술한 것이다. 따라서 『동명왕편』을 영웅시로, 『제왕운기』를 역사시라고 불러둔다.동명왕설화는 이규보 자신의 『동명왕편』서(序)에서 밝힌 바와 같이 민간에 비교적 널리 유포되었고, 중국 측 사적에도 일찍부터 수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반 지식층들은 이규보 자신의 고백과 같이, 이러한 설화는 로 돌려버리고 조금도 관심을 표시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규보 자신은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읽은 후에 종래의 태도를 일변하여 이 설화의 가치를 크게 강조하게 이르렀다. 민족설화에의 인식의 전회, 그것을 뒷받침한 민족의 자기파악?자기이해의 고귀한 정신작용은 12?13세기의 역사적 사정을 상세히 더듬어 보면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중의 심리의 귀일과, 민중의 에네르기의 축적에 의한 민족적 저항정신의 발효였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혼미한 현실 속에 시인은 자기거점을 〈민족〉에서 발견하고 민족에의 귀의를 통하여 전총과 유서(由緖,사물이 유래한 단서. 전하여 오는 까닭과 내력)에 새로운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그런데 시인이며 문장가였던 이규보가 동명왕을 재현시킴에 있어, 시로써 수단을 삼았던 것일까. 그것은 정사의 체제상 크게 신이한 일을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가가 자기규범에 구애되어 생략하지 않을 수 없는 신이한 설화를, 시인은 아무 제한 없이 자유스럽게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의 특권이 이규보의 현명한 선택에 의해 구체화된 것이다.또한 이규보는 단조롭기 쉬운 개인전기적 서술에, 이 되었다.다음으로, 영웅의 성격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작자는 의기와 신념에 차 있는 창국의 영웅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대 영웅들에게 공통된 성격의 일면을 부여해놓았다. 고대 서사시 속에 발휘된 영웅들의 개성에 모두 공통된 것은, 후세의 소위 도덕성이란 전혀 보이지 않는 것과 그 대신 보편적으로 나타난 것이 자연적 인간의 소박한 아욕뿐이란 것이다. 영웅들은 소박한 자기의 욕망을 실현키 위해 단순한 완력만이 아니라 얼마든지 간계를 이용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웅의 간계에 대하여, 혐오를 느끼기는커녕 도리어 일종의 호감조차 깨닫게 되는 것은 모든 사회윤리가 구속을 주기 이전의 것, 즉 고대적 인간체취에서 풍겨지는, 건강하고 신선한 매력 때문인 것이다.정리하자면, 『동명왕편』은 한 개의 영웅시로서 성공적인 작품이었으나 한 걸음 나아가 민족서사시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보다 더 높은 차원이 요구될 것이다. 그것은 동명왕이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고려인〉에게는 창국(創國)의 영웅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 족이라는 한 부족의 족장일 따름이요, 민족의 공동의 시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동명왕 설화는 부족적 지역적 성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2)역사시로서의 『제왕운기』위와 같은 부족적 지역적 설화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공동의 시조를 발견하고 거기에서 발원한 민족의 활동의 전 과정을 서술한 것은 이규보를 거쳐 이승휴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했다. 『제왕운기』는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서사시의 대성이며, 특별히 역사시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제왕운기』가 민족시조인 단군을 내세워, 민족생활에 대한 횡적 포괄의 광범, 종적 전망의 유원(悠遠,아득히 멂), 다각적 취상(就床)의 복잡함을 종합해놓고, 그 모든 것의 출발을 민족시조인 단군에게로 귀일시킨 점은 우리 민족의 역사인식의 발전에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중 하나로서 『사기』『유사』이래의 산문가들이 한결같이 우리 민족의 역사권외에 내쳐버린 발해다.
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 - 李基白1. 머리말『삼국유사』를 보는 관점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주로 역사학의 입장에서 보려고 한다.2. 史書로서의 三國遺事『삼국사기』→ 왕명을 받들고 김부식 이하 10여명의 편찬위원들이 편찬한 정사(正史), 기전체(紀傳體)『삼국유사』→일연이라는 개인이 편찬한 사찬서(私撰書), 저자의 관심의 각도에 따라서 자유로이 주제를 선택할 여지가 더 많이 허락되는 체제『삼국유사』가 지니는 특징첫째로, 저자 개인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나타낼 수 있는 극히 자유로운 형식의 사서류(史書類)이다.『삼국유사』는 일반사화나 불교사화를 가리지 않고, 저자 일연의 관심이 가는 사화들을 수집하여 이를 적절히 분류 편집하였다고 보아서 좋을 것이다.둘째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는 달리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일연은 자신의 의견을 협주(挾註)로 기입하여 인용문과는 구별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양자를 혼동할 가능성은 없다. 이러한 원칙은 대개 관철되고 있다. 그러나 때로 일연은 자기의 의견을 본문 속에서 말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그것이 협주로써 만족 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이런 때에도 일연은 그것이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을 밝혀두곤 했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편찬은 전거를 밝혀서 인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거기에 자기의 의견을 첨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다만 유감인 것은 본문의 인용문 중에는 전혀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들도 상당히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필시 당시에는 거의 출처를 밝힐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명한 것이고, 따라서 너무 자주 출처를 밝혀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한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셋째로,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데 이러한 방식을 취한 결과 일연은 자연히 많은 사료를 수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요컨대 일연은 현대 역사가들의 사료수집을 연상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물론 자기의 논거를 굳게 뒷받침해 주려고 한 데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짧은 기간에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삼국유사』의 저술을 위하여 오랜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말하여 준다. 일연은 여러 사료를 널리 수집하여 그들 사료 사이에 개재되는 차이점을 가리고 나아가서 자기의 고증을 첨가함으로 해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3. 歷史的 位置일연은 간절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삼국유사』를 통하여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삼국유사』는 『삼국사기』가 합리적인 사실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데 대해서 비합리적인 사실을 주로 다루고 있다.『삼국유사』는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의 9편으로 되어있다.이렇게 보면 결국 『삼국유사』전체가 선이의 기록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기사 내용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신이란 바로 비합리적인 사실들을 말한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비합리주의를 정면으로 표방하고 나선 역사서였다고 하겠다. 그러면 일연이 이렇게 신이만을 적고자 한 의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그것은 유교의 합리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의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일연의 불교적 입장은 분명히 유교의 현세주의?합리주의에 비판적이라 할 밖에 없다. 이 같은 입장이 앞서 지적한 두 가지 주제로 나타났던 것이다.첫째 주제인 일반적인 역사적 신이에 대한 기록은 요컨대 한국 고대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새로이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된다.둘째 주제인 불교적 신이에 대한 서술은 요컨대 신앙의 옹호를 위한 것이었다.불교 관계 기록은 우선 양적으로도 전체의 반을 넘는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비교적 잘 정리된 불교문화사(佛敎文化史)인 것이다. 이를 통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은 모두 현실세계의 논리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신앙의 세계였던 것이다.이같이 신이의 설화로써 합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는, 그러한 설화들이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술이 전거를 중요시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삼국유사』의 세계는 그러므로 신화와 전설의 세계이며, 신앙의 세계였다. 이 세계는 당시의 사학계가 이루어놓은 합리주의에의 접근이라는 전직전인 자세와는 다른 복고적인 것이었다.4. 現代的 意義첫째는 『삼국유사』가 지니는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전거를 밝혀주었음으로 해서 그러하다.이것은 오늘날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무한한 가치를 제공해주고 있다. 더구나 인용된 많은 원전들이 남아 있지 않는 오늘에 있어서 특히 그러하다. 다만 일연은 반드시 원사료의 전문을 충실히 인용하는 방법을 쓰고 있지를 않다. 일련의 인용문에는 자구의 탈락과 변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탈락이거나 오독이나 필사의 잘못에 의한 것이지, 내용의 변개는 아니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의 기사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 나올 때, 『삼국유사』가 흔히 원사료의 본 모습을 더 많이 전해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이전의 원사료명의 제시는 그 사료적 가치를 크게 더해주는 것이다.
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歷史敍述 - 高柄翊『삼국사기』에 대해서는 종래로 여러 가지 비평이 많았으며, 그 대부분은 부정적 비판으로 종시(終始,마지막과 처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편찬자 김부식이 당시의 고려 정계에서 높았던 역할로 말미암아, 그리고 또 『삼국사기』의 내용으로 보아서, 지나친 유가윤리와 중국 중심의 사상에 사로잡혀서 건조하고 왜곡된 역사상을 심었다는 비평을 들어왔다.본고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삼국사기』의 찬술(撰述,책이나 글을 씀)에 따른 몇 가지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어서 『삼국사기』의 성격을 구별하고 아울러 이런 비평의 타당성 여부를 고찰하려 한다.1. 撰述의 經驗『삼국사기』도 다른 여러 사서와 마찬가지로 군왕의 명령에 의해서 찬술된 사서이다. 순전히 김부식 개인의 자발적인 의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종의 명에 의해서 엮어진 칙찬(勅撰,칙명에 의해 책을 엮음)의 사서이다. 그러니 후대에 나온 『고려사』『동국통감』등과 마찬가지로 관찬(官撰)의 서이며 이 점 『삼국유사』나『동사강목』『동사찬요』등과 같은 순전한 개인저술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군왕의 명을 받아서 찬술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한 가지는 혼자서 집에 들어앉아 저술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정부 속의 편찬기관을 이용해서 여러 사람의 협력을 얻어서 편찬하는 방식이다. 당대 이후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의 정통적 왕조사의 편찬은 말할 것 없이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삼국사기』가 편찬된 경위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업을 위해서 사관 속에 일군이 사관(史官)이 배치되고 김부식이 감수국사로 임명되어 찬진이 명해진 것은 틀림없다. 대체로 보아서 이들은 김부식과 가까운 관제에 있었던 사람들로 보여진다. 이들은 각기 보문각?수궁서?금오위?국학 등 각색 관서에 직위를 가지면서 『삼국사기』의 편찬을 위해서 참고(參考)로 차출된 것이라 보여지며, 김부식 자신의 선정으로 모여진 것이라 추측된다. 이들은 정식 사관이라기보다는 임시적인 편찬원이었으며, 기』가 완성되었지마는 이것은 반드시 이 일 자체가 10년 걸렸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김부식은 아마도 그가 시중직으로부터 퇴임한 인종 20년 이후에야 『삼국사기』편찬에 전념한 것으로 추측되며 그렇다면 대략 3년간의 시일이 걸린 것이 된다.『삼국사기』편찬에 있어서 김부식과 들이 각기 어느 부분을 어느 정도로 집필했는지를 분명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김부식이 전서(全書) 또는 그 중의 대부분을 직접 집필하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부분은 분명히 그 자신의 집필에 계(係,사무나 직업 담당의 작은 갈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바, 그것은 김이 일인칭을 사용하고 있는 부분이다. 요컨대 전서(全書) 가운데서 분량으로는 얼마 안되는 것이지만, 종관적(綜觀的)이고 주관적인 서술부분은 김부식이 직접 집필한 것으로 보이니 즉 본기(本紀)?열전(列傳)의 여러 곳에 삽입된 논찬과 그리고 지(志)의 서론 해당부분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 사실(史實) 자체의 서술은 70세가 된 감수국사인 김의 집필에 계(係)한다기보다는 그를 도왔던 여러 참고(參考)들의 집필에 계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수사자(修史者)로서의 김부식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료의 선정, 편목(編目)의 작성, 사료의 채록여부 결정, 칭호?표현 방식의 결정, 그리고서는 자기 자신이 논찬과 서론 해당부분을 집필하는 일이었다 할 것이다.2. 論贊(필자가 붙인 논평)『삼국사기』가 중국의 정사의 체제를 답습한 것인 만큼 논찬(論贊)이 라는 위주의 시론(試論)을 갖추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런 논찬은 일률적으로 논왈…(論曰…)이라는 표현으로 시작되며, 본기와 열전에 도합 30칙(則)이 삽입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논찬은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타사의 일반적인 체모(體貌)와 다른 점이 없다. 다만 그 위치가 약간 다를 뿐이다.『삼국사기』에 있어서는 본기에서는 어떤 특정한 사건 서술 직후에ㅡ그러니 권중에 본문 한가운데에ㅡ들어가 있는 것이 많고, 열전에서도 권말이 아니라 권중에 대상론을 삽입한다는 융통성이 엿보이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그러나, 논찬의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전반적으로는 역시 그 내용이 이라는 유교적 윤리평가로 일관되어 있고, 이런 형식적인 윤리관에다가 중국 중심의 사대적(事大的)사고방식이 거리낌 없이 노출되어 있음을 본다. 본기의 논찬에 공통되는 내용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포폄을 목적으로 한 유교 윤리적 평가와 중국 중심의 예론으로 시종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열전의 논찬은 찬에 박힌 형식주의적 윤리평가에서는 약간 벗어나서 비교적 개성 있고 현실적인 평가가 가해졌음을 볼 수 있다.형식상의 정제에 구애됨이 없이, 논평을 가해야 할 필요를 느낄 적에 어디에나 수처(隋處)에 논찬을 삽입하는 방식은 후대의 여러 사서(권근『삼국사략』, 서거정?최보 『동국통감』, 오운 『동사찬요』, 안정복 『동사강목』『고려사절요』)에도 계승되었으니, 이것은 같은 왕조사이면서도 『고려사』가 좀더 정제된 형식을 갖추어 편말마다에 논찬을 붙인 것과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오히려 12세기 고려의 김부식 에게 있어서는 유가적인 형식주의 예론(禮論)이 14세기 이후 조선왕조의 사가들의 그것보다는 융통성과 현실성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군왕의 칭호를 원명 그대로 기록, 즉위년 칭원법을 따르고 있음.『삼국사기』의 논찬들이 유교적인 윤리평가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이것은 비단 『삼국사기』에게만 특유한 현상이 아니라 전후대의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도 전연 마찬가지이며, 특히 조선시대의 사서에서는 이런 원칙론 적이고 현실을 몰각한 윤리평가와 예절판단이 훨씬 더 고루하고 심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김부식은 이 점에서는 오히려 유교적 형식 윤리에 빠짐이 덜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3. 捏造?刪削(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글자나 구절을 지워버림)김부식 당시에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직접적인 사료와 문적(文籍)들이 이용될 수 있었고, 특히 『삼국사기』의 바로 선행자라고 생각되는 이른바 『구삼국국사』가 본기뿐인 편년체로서, 지?표?열전이 없었던 것을 『삼국사기』는 이들을 편보(編補)하고 논찬을 붙여 기전체(紀傳體)로서 만들어서 정사의 체재를 갖추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된다.일반적으로 시조설화에는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는 것이 보통인데, 김부식 등이 이를 많이 줄였을 것은 생각할 수 있지마는, 현재의 『삼국사기』의 동명왕 주몽에 관한 설화 서술과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의 문과를 비교해 보아도 우리는 오히려 유자(儒者)로서는 의외일 만큼 많이 원형을 남겼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백제?신라의 시조 등에 관해서도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거의 거리낌 없이 재현되어 있음을 본다. 따라서 『삼국사기』가 기존 사서들 속에 들어 있는 사실들까지도 대폭 산삭(刪削)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삼국사기』도 일종의 사료집 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기존 사료의 채록에 있어서는 함부로의 개서?날조를 상정(想定, 어떤 정황을 가정적으로 생각하여 결정 함)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산삭을 가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고 또 과다한 사료를 앞에 놓고 일정한 크기의 책을 편찬해야 할 적에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김부식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사료나 선행 사서에 대해서 임의로 개필을 가하고 사실 서술을 변개하고 또는 전무한 사실을 날조 삽입했다고는 도저히 보기 어렵다. 다만 그의 견해로 보아서 채록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료를 불록(不錄)했다든지 또는 황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삭제해버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김부식은 산삭에 있어서도 상당한 조심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요컨대 『삼국사기』에 대한 전통시대 사가들의 평은 이 책이 소략하다는 데에도 지향되고 있지마는, 주로 황탄?불경?비리하다고 하는 데에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한다면 조선시대 유자들 보기에는 김부식이 불가신의 황탄지사들을 더 삭제해 버렸어야 옳았다는 뜻이 된다.김부식 등이 이용할 수 있었던 삼국측 자료는 불과 10지넓게 채진(採進)?수집치 못했음을 비난했음은 실로 개절(凱切,아주 알맞고 적절함)한 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삼국사기』에는 중국 측 사서로부터 많은 채록?보충이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중국과 관련된 사건의 기사는 거의 전적으로 중국 측의 여러 정사와 『자치통감』『책부원귀』『통전』등에서의 인용으로 채워져 있고 심지어는 삼국 내부의 사정인 지(志)부분의 여러 기사까지도 이에 힘입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료가 적고 특히 고구려 측의 기족이 전승됨이 적은 데서 온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삼국사기』가 허다한 결점과 약점을 가진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마는, 여기에는 본래의 사료가 적었다는 점,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중국 측 자료로부터의 보철(補綴,보충하여 한데 엮음)이 많았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니 김부식 등이 사료를 더 넓게 그리고 철저하게 수집?이용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 할 수 있어도, 마치 김부식이 함부로 사실을 날조하고 임의로 신축과 산첨을 마구 가해서 역사상을 전연 왜곡해버렸다 함은 위에서 본 바로서 지나친 혹평이라고 단언 할 수 있고, 또 조선시대 사가들이 너무 황탄불경지사(荒誕不經之事)가 많다고 비난하는 것도 실당(失當,이치에 맞지 아니함)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요컨대 김부식은 전통시대의 사가들에 의해서나 현대의 사가들에 의해서나 그가 처해 있던 편사상(編史上)의 또 시대상의 제 제한을 도외시한 혹평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4. 三國 각국에 대한 자세삼국 중에서 신라가 특히 치중되어 왔음은 일찍이 지적되어 왔다. 김부식이 경주인 이었다는 데서 그러할 뿐 아니라 신라가 다른 두 나를 통합하고 오래 존속했으며 신라의 문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어서, 이것이 가장 많이 반영되어 있었을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왕조의 정통론으로 보아도 김부식의 고려조가 형식상으로는 신라의 선(禪)을 받은 후제제이기 때문에 고려조의 신하인 김부식 으로서는 신라를 추중(推重,추앙하여 존중히 여김)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정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朝鮮前期의 歷史認識 - 鄭杜熙1. 머 리 말조선 전기에는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 ????? 등 관찬사서를 위시하여 박상의 이나 오운의 등 사찬사서들도 적지 않게 편찬 되었다. 이전의 어떠한 시대에 비하여서도 이와 같이 많은 사서가 편찬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한 특징이라고 하여도 좋은 것이다.근년에 이르러 조선전기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또한 사학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조선 왕조의 건국을 전후한 사회적인 변화를 구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당시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추진하였던 사회 세력에 대한 연구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학사 연구는 이들 사회 세력의 역사관을 이해하려는 한 중요한 과제가 되었던 것이다.2. 연구의 개황1960년대에서 70년데 초까지는 주로 고려사 해제가 조선 전기에 편찬된 사서에 대한 관심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사서에 대하여는 거의 관심이 표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에 대하여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도되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데 중반부터 이 시기의 사학사 연구는 보다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가기 시작하였다.3. 관찬사서1) 고려시대사태조 때의 편찬을 시작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가 완성될 때까지 고려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조선 왕조는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의 편찬 문제는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관심사였으며, 처음부터 편찬자들의 주관의 개입 문제를 놓고 크게 대립된 견해가 있었다는 것은, 가 단순히 지나간 과거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조선의 지배층의 현실 의식이 크게 반영된 사서였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1)고려국사는 태조 4년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찬진한 최초의 고려시대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는 그 책이 현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후 의 편찬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이기백 ‘고려사해정도전의 를 태조대의 사대부 중심의 역사 서술이라고 규정하고, 태종의 개찬은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변태섭 ‘고려국사의 편찬내용과 사론’- 지금까지 의 편찬에서 정도전 개인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음을 반성하면서, 편찬에는 당시의 예문춘추관원이 두루 관련되었으며, 이에 따라 정도전의 사적인 견해가 많이 반영된 사서라는 종래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였다.정도전의 의 사론이 그 뒤 나 의 사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함을 입증하였다. 아마도 이 점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의 편찬이 많은 논란 끝에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태조대의 의 편찬이 그 기초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2) 고려사이기백 ‘고려사해제’- 는 유교에 바탕을 둔 도덕적 합리주의 사관에 바탕을 두고 편찬된 사서이며, 조선 왕조를 건설하고 그 국기를 다져 놓은 사대부 계층의 고려 왕조 사관을 제시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그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조선 왕조의 전설의 필연성을 제시해 준 것이며, 따라서 권문세족에 의하여 지탱되어 나가던 구 왕조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 사대부들의 승리를 정당화 하려는 노력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까닭으로 때로는 사료로서의 를 바람직스럽지 못한 것으로 만들기도 하였다는 것이다.(이기백의 견해는 매우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아쉬운 점이 많다.)한영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비교’-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비교를 통하여 그는, 와 는 외형상으로는 서로 보완 관계에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군신간의 상층된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다고 보았다. 요컨대 그는 정치사적인 입장에서 당시의 사학사를 연구한다고 표명하였기 때문에 편찬 과정에서 생긴 각종의 문제나, 체제를 에워싼 논의 등도 모두 정치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를 친왕적인 사서로, 를 신료 중심의 사서로 규정하게 된 것이었다.(사학사 연구를 당시의 정치사적인 입장에서 다룬 것이 대 중국의 전사와 등의 그것과 대조하면서, 세가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 이실직서의 원칙을 세웠으며, 상서는 처음에만 쓰고 이후에는 생략한다는 원칙 등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것인데, 결론적으로 이를 통하여 가 자주적인 역사의식과 이존기실의 엄격한 역사성을 지닌 사서임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변태섭 ‘고려사의 내용분석’-지→를 모델로 삼았으며, 는 편찬자의 사론을 싣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으면서도 지에는 서문을 씀으로써 그들의 관점을 나타내려고 하였다는 것, 의 찬자들은 고려의 토속적이면서도 고유한 제도 문물을 비천시하였으면서도 이를 모두 지에 수록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을 있는 대로 쓴다는 원칙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열전→기전체사서에서 사람들이 시비와 득실을 나타내는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찬자들이 가장 의욕적으로 집필한 부분, 열전 또한 그 구성의 모델을 에서 찾았다는 점, 우왕?창왕의 세가를 반역전에 편입한 것은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 문관 위주 과거위주로 열전이 편찬되었다는 점, 반무인정권 반원적인 입장에서 서술되었으며, 이는 찬자들이 조선 왕조를 건국한 세력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태도 였음.그리고 지에서 예문지가 빠지고, 열전에서 유학전, 문원전, 석노전 등이 빠진 것 등을 중요한 겸함으로 들 수가 있다는 것이다.변태섭 ‘고려사에 표현된 역사관’- 는 우선 전반적으로 편찬자의 주관이 제약되고, 객관적 평가 위에서 엄격한 역사성이 견지된 사서라는 결론에 도달.변태섭 ‘고려사?고려사절요의 사론’- 는 논찬부작의 편찬 원칙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사서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만큼 주관성이 적게 반영된 사서라는 결론.변태섭 ‘고려사 편찬에 있어서의 객관성의 문제-고려사 평가의 긍정적 시각’- 는 매우 객관적인 사서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기존 사료의 재구성을 원칙으로 편찬되었으며, 편찬자의 주관이 개입된 스스로의 논찬을 만들지 않았으며, 조선 왕조의 건국 후 60여년이 지나 객관적인 서술이 가능한 여유를 가지고 있을 때 만들어졌음, 논찬의 편찬 내용 훨씬 풍부함, 훨씬 성의 있고 여유 있는 편찬 태도를 지녔지만 찬자 자신의 논찬을 싣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도 주관성이 그만큼 적게 반영된 사서.(와 가 왜 그러한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다.)한영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비교’-는 세종대에 짜여진 골격을 토대로 하여 의 체제를 따라 편찬된 까닭으로 근본적으로 친왕적인 사서가 되었으며, 는 신료 중심의 편년체사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비슷한 시기에 이 두 사서가 출현한 것은 신료들이 자기들 중심의 사서를 다시 편찬함으로써 친왕적 사서를 극복하려 하였기 때문이라 설명하였다.(양서의 연구에 있어 결론이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2) 동국사략정구복 ‘동국사략에 대한 사학사적 고찰’ - 의 편찬 경위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체제, 서술 및 여러 이본들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그 결과 은 정도전의 에 연결시켜 전대의 역사를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완전히 정리하려는 의도 하에서 편찬된 것이라 함을 알게 되었다. ‘고대적인 습속의 잔대를 청산하고 불교?도교적인 이단을 배격하여 유교 윤리의 사회로 변혁시키려는 강력한 욕구’를 가지고 편찬된 사서가 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은 와 비교하여 볼 때 편찬자의 주관이 너무나 반영되어 사료적인 가치는 없으나, 조선 시대 사서의 편찬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였다.(에 나타나는 현재성은 왜 그러한 방식으로 표현되었을까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한영우 ‘15세기 관찬사서의 편찬’- 태종이 정치적 실권을 갖지 못한 권근에게 편찬의 주역을 맡겼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근본적으로 왕권 강화에 유리한 사서로서 편찬된 것이라 하였다. 은 성리학적 가치관을 가지고 성리학이 아닌, 한당적 유학과 도?불의 이단 문화가 융성하던 삼국 문화를 이해하게 되니 삼국 문화에 대한 비판 의식이 무척 강하게 반영된 사서라는 것이다.(의 편찬 동기나 의의를 너무 단순화한 것 같음.)3) 삼국사절요정구복 ‘삼국사절요에 대한 사학을 원칙적으로 모두 기술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의 서술상의 특징은 직서 위주로 서술된 점과 신라의 기술에서 객관적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 그리고 세주를 이용한 점과 사론을 붙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함으로써 선대의 역사에서 경험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학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사서가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 내용이 그대로 에 반영되지 못한 것은 성종대의 지적인 풍토가 그 이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던 것이다.(사론의 부재가 의 직서주의를 설명하는 한 요인이 되기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한영우 ‘15세기 편찬의 추이’- 가 세조의 사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편찬의 주도권이 세조에 있지 않고 신하들에게 있었으므로 세조가 처음 구상한 것과는 아주 다른 사서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의 성격을 민족사를 자랑스럽게 쓰는 것으로, 의의가 있는 사서냐 아니냐를 구분하려고 한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인 것 같다.)4) 동국통감정구복 ‘동국사략에 대한 사학사적 고찰’- 은 그것이 편찬될 때까지의 역사의식을 모두 담고 있으며, 조선 초기에 발달된 역사 정리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그리고 이 책이 조선 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원전처럼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사학하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있던 시대에 만들어짐으로써 이 양 세력의 견해가 모두 반영된 사서였다는 것이다. 정구복은 특히 이 책의 사론의 분석에 중점을 두었다. 에는 편찬자가 쓴 사론 204편과 기왕의 사서에 실린 사론 181편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사서보다도 많은 사론들이 실려 있는 것이 본서의 특징이라는 것이다.한영우 ‘동국통감의 편찬 경위와 역사서술’- 의 편찬에는 시종일관 세조 자신이 앞장서서 일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즉 여느 사서와는 달리, 신하들이 건의한 다음에 편찬에 착수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세조의 발의와 명령으로 이 일이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