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초패왕 '항우' >한 학기 동안 중국의 여러 역사 인물들을 공부하면서 한명 한명 모두 인상 깊었지만, 그 중에서도 서초패왕 '항우'란 인물이 가장 인상 깊었다. 그 이유는 그에 관한 영화가 재미있고, 코믹한 부분 또한 가미되어 있어 가장 즐겁게 관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항우의 한 여자만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항우 에 대한 자료를 찾을 때 이 인물의 인생에서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 많은 한자성어의 유래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그렇게 때문에 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그의 일생과 주요 활동 및 공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항우(項羽)는 (서기전 232∼202) 중국 초(楚)의 왕. 이름은 적(籍), 우(羽)는 자이다. 서기전 209년 진(秦)을 멸망시키고 함양(咸陽)을 함락하여, 의제(義帝)를 옹립하였다. 그는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으로 자처하였다. 서기전 206년부터 서기전 202년까지 한(漢)나라와 싸워 처음에는 우세하였으나 도량과 재략이 부족하여 인재를 얻지 못하고 해하(垓下)에서 유방(劉邦)에게 크게 패하여 오강(烏江)에서 자살하였다. 중국에서 한나라는 최초의 제국문명으로 손꼽는다. 이전에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가 있지만, 기간이 짧고 곧 멸망한지라 진정한 제국문명을 이룬 나라로 보지 않는다. 최초의 제국건설을 두고 다툰 두 영웅은 바로 유방과 항우였다.항우는 강동의 귀족출신이었다. 그는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글공부 쪽과 무예를 익히는 쪽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병법을 익혔다. 그러나 병법도 깊이 있게 익히지는 못하고 곧 싫증을 내었고, 집안의 도움을 받아 군사집단을 만들어 독립한다. 일종의 창업을 한 셈이다.24세에 독립하여 항우의 활약은 눈부셨다. 진시황의 폭정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그의 수완은 대단하여 3년만인 27세에는 이미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자의 명단에 자기의 이름을 올려놓는다.하지만, 유방을 만나면서 그의 그런 활약은 하는 인재들과, 그런 조언을 또한 받아들일 줄 아는 유방이었기에 항우를 이길 수 있었다. 반면 항우는 범증이라는 준재가 있었음에도 보필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유방의 술수에 속아 범증을 의심까지 하여 그를 떠나보내고 만다. 범증은 유방과 그의 참모 장자방(장량)이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이런 유방과 항우의 차이는 그들의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항우는 너무도 잘난(야유가 아닌 진짜) 인간이었기에 타인을 품을 수가 없었다. 때론 자신의 고집속에, 때론 자만속에 있었다. 반면 유방은 하급관리 출신에, 백수생활을 겪은 사람이기에 타인을 품을 수 있었다. 그만큼 인생의 경험이 많았던 거다.항우의 그런 측면은 유방과 벌인 패권경쟁에서 패한 후 곧 자살한데서 볼 수 있다. 그 패배는 사소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강동으로 돌아가 힘을 길러 재기하라는 견해를 묵살하고, 항우는 목숨을 끊는다. 싸움에서 패하는 것은 늘 있는 일임에도 항우는 너무 잘난 사람이었기에 목숨을 버린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한때의 패배라는 굴욕을 참을 수 있는 그릇은 아니었다. 천자의 그릇이 되지는 못했습니다.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그릇이었기에 그는 투항한 10만의 병사를 생매장해서 죽이는 일까지 저질렀던 것이다.또 다른 항우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항우의 이름은 적(籍)이고 자가 우인데 항적보다는 항우로 불린다. 원래 하상(下相, 강소성 숙천현) 사람이었는데 그의 숙부 항량과 함께 회계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장 8척의 대장부로 힘은 능히 산을 뽑을 만하고 겹으로 된 눈동자를 가진 희대의 장사이었다. 소년 시절에 학문을 가르쳤으나 학문도 싫어하고 검술을 가르쳤으나 검술 또한 싫어하였다. 항량이 크게 실망하여 노여워하자 항우가 말하기를"학문이란 성명을 기록할 정도면 족하고, 검술은 한 사람의 적밖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 따위는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만인의 적을 상대하여 싸우는 기술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항량은 그의 기백을 기특히 여겨에서 일어나 패현의 자제 3천명을 거느렸고, 항량. 항우는 여러 현을 지배하는 군에서 일어나 정병 8천명을 거느렸다. 자제와 정병은 그 질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자제란 그저 나이가 젊을 뿐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않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정병이란 여러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여 철저한 훈련을 받은 군사를 말하는 것이다.항우는 스스로 서초 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여 양.초의 땅 구군(九郡)을 통치하고 팽성(彭城)을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진의 토벌에 공로가 있었던 여러 장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고 왕으로 봉하였다. 이때 왕으로 봉함을 받은 제후는 진의 항장 장한. 장사 혼. 동예를 비롯하여 경포. 한광 등 18명에 이르렀다.항우는 진나라를 평정하자 진나라 토벌에 공이 있는 자에게 영지를 주어 제후로 삼는 분봉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분봉제는 전국 시대의 혼란과 진나라의 악정에 시달려 온 백성들이 바라던 평화와 통일의 실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천하를 통일하기 전의 군웅 할거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위에 항왕은 영지를 주어 제후를 봉하는데 있어서도 논공 행상이 그 공평성을 잃어 자기의 기분에 맞는 사람에게는 좋은 땅을 주어 왕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봉작을 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 여러 장수 가운데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자가 많았다. 이런 결과는 마침내 제후들이 각기 영지로 돌아간 후 한달 남짓해서 산동 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모처럼 평화를 갈망하던 중원 천지가 다시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항우군은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동정 서벌 왔다 갔다 하느라 완전히 지쳐버렸고 더구나 안정된 후방 기지가 없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유방은 군사적으로는 뒤졌지만 군사들은 휴식을 취하였고 군량도 풍족하였다.장기적인 소모전 끝에 항우군은 점점 피폐해지고 전재의 주도권은 점차 한군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항우도 이런 불리한 정세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제왕 한신이 군사를 진격시켜 초 것이었다.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항우는 이 조건을 수락하였다. B.C. 203년 9월 양군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인질을 돌려보냈다. 강화의 조건에 따라 항우는 무장을 풀고 동쪽으로 향하였다. 유방도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량과 진평이 한왕에게 '초나라는 군사가 피로하고 군량이 다 떨어졌으니 이것은 하늘이 초나라를 망하게 하는 때'라면서 공격하자고 진언한다.한왕은 이들의 말을 들어 즉시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양하 남쪽까지 항우군을 추격하다가 일단 멈추고 한신과 팽월에게 사자를 보내어 각각 그들의 군사를 이끌고 고을(固陵)에서 합류하여 초나라를 치라고 하였다.항우는 해하(垓下, 안휘성 영벽현)에 진을 치고 한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항우의 군사는 10만이었다.천하를 놓고 마지막 승부를 가리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한신은 자기가 가진 모든 병력과 제후들의 군사를 모두 합쳐 30만에 이르는 군대를 진두 지휘하였다. 한군은 여러 겹으로 해하의 항우 진지를 포위하였다. 성내의 군량은 거의 바닥이 나고 사기는 떨어져 탈주병이 속출하였다.한신은 해하에 모여든 여러 군사 가운데서 초나라 출신 군사들을 골라 일반 군사들에게 초가(楚歌)를 가르치게 하였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사면에서 자기 고향 노래만 들려 온다는 말로 자기를 도와야 할 고향 군사들이 모두 한군에 가담하여 고립 무원의 지경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한신은 겹겹으로 에워싼 전군에게 초가를 부르게 하였다. 역발산 기개세의 천하 장사 항우도 사면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노래를 듣자 점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는 절박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야음을 타고 점점 크게 들려오는 초가에 귀를 기울이던 항우는 크게 놀라며"아, 한나라는 초의 땅을 이미 다 차지하였는가? 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가!"항우는 밤중에 일어나 장막 속에서 술잔을 손에 들었다. 우희가 그 잔에 술을 따랐다. 우희는 항우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줄곧 항우를 는 항우가 타고 다니던 애마의 이름이다. 검푸른 털에 흰 털이 섞이고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였다 한다. )항우는 이 노래를 푸념처럼 읊조리며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었고 감히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뒤 우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정사에는 아무 언급이 없고 다만 [초한춘추(楚漢春秋)]에 우희의 화답이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한병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했고사면에 들리는 건 초나라 노래 소리뿐대왕의 기개가 다하는 날첩첩 어찌 삶을 바라리오.우희의 최후의 장면에 대해서 후세 문인들은 여러 가지 각색을 가했다. 우희는 항우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항우의 검을 청해 받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도 한다. 또 항우가 자기로 인하여 번뇌할까 두려워 자결했다고도 한다. 혹은 항우가 우희에 대한 번뇌를 끊기 위해 우희의 목을 쳤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그후 우희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가냘픈 풀이 싹터서 자라니 후세 사람들은 이 풀을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항우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렸다. 날이 셀 무렵에야 항우가 탈출한 것을 안 한군은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항우를 추격하게 하였다. 남으로 달아나던 항우가 회수를 건널 무렵에는 8백기 가운데 겨우 백여기가 따를 뿐이었다. 도중에서 모두 탈락해 버린 것이다. 항우가 동성(東城, 구강현)에 이르러 따르는 자를 점고해 보니 겨우 28기에 지나지 않았다. 항우는 말을 멈추고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5천의 기병이 바짝 쫓아오고 있는데 우리는 겨우 28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구나.'이렇게 생각한 항우는 28기의 장정을 향해 말하였다."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이 되었다. 그동안 70여회의 싸움에서 한번도 패해 본 일이 없었는데 지금 이 같은 곤경에 처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려는 것이지 결코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다. 나는 이제 죽음을 각오했다. 마지막으로 한의 포위를 무너뜨리고 장수를 베고 기를 쓰러.
몇 개월 전 친구와 국악연주회를 가볼 기회가 있었다. 한번도 그런 큰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좀 부담스러웠으나 가는 마음부터가 설레였다.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국악에 대한 나의 느낌을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국악연주회는 국립국악원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상설로 저렴한 가격으로 국악공연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들어설 때 큰 건물과 깨끗한 구조들, 그리고 예악당, 우악당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국악 냄새가 풍겼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실내에 들어섰을 때 가슴이 설레였다.국립국악원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5시에 국악공연을 갖는다. 토요상설 국악 공연은 청소년부터 일반에 이르기까지 국악을 쉽게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국악의 모든 분야에 걸쳐 기악 45종, 성악 27종, 무용 24종 등 총 96 여종의 대중적인 작품을 구성하여 12가지 형태의 프로그램이 순차적으로 공연되었다.○ 관악영산회상 - 상령산 < 기악합주 >이 곡은 영산회상이 관악곡으로 변조 편곡 된 곡이며 딴 이름으로 표정만방지곡 또는 대풍류라고도 한다. 성악곡이었던 영산회상이 기악곡화 되고 다시 관악곡으로 변주된 이 곡은 국악 관악곡 중 가장 대곡이며 장중한 곡이다. 편성악기는 피리, 대금, 소금, 아쟁, 장고, 좌고, 박 등이며 오늘 연주는 그 첫 번째곡 상령산을 연주한다. 상령산은 피리군과 소금, 대금, 해금, 아쟁 등의 악기군이 서로 선율을 주고 받으며 잇대는 독특한 형식으로 된 곡이다.- 총 21명의 대 인원이 각자의 악기를 가지고 합주하였다. 느리고 편안한 느낌이였고, 간혹 북의 소리가 연주의 힘을 더해 주었고 아쟁의 아증스런 소리가 독특하였다. 그리고 해금을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연주를 시작할 때에는 한 사람이 나와 박을 한번 침으로써 연주가 시작되었고 연주가 끝난 다음에는 박을 세 번 침으로써 연주의 끝을 알려주었다. 우리 나라 악기 특유의 소리를 직접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 나라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기악합주곡이였다.○ 처용무와 여무 < 무용 >처용무는 신라시대의 처용설화에서 유래된 가면춤이다. 5인이 각각 5방색 동, 남, 중앙, 북, 서의 옷을 입고 추는 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된 춤이다.이번에 공연되는 처용무와 여무는 진찬의궤(1829년)와 진연의궤(1902년)의 회무도에 처용과 여령이 같은 회무하는 도식이 전하고 있어 이를 근거로 하여 새로이 재현한 춤이다.- 뒤에서 북, 장구, 피리, 대금이 연주되고 탈을 쓴 무용수 5명과 여자무용수 8명이 춤을 추었다.초반부에서는 큰 활동 없이 제자리에서 다리굽힘과 팔을 위아래로 휘젓는 정도가 주된 무용이었고 중반부에서는 여자 무용수들이 둘씩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자리를 이동하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후반부에서는 4명씩 모여 춤을 추다가 8명이 모두 모여 춤을 춘다. 탈을 쓴 무용수들은 북과 장단에 맞추어 주로 춤을 추었다.우리 나라의 고운 한복과 머리모양, 그리고 탈을 함께 감상할 수 있었고 부드럽고 얌전하면서도 선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무용이었다. 여자무용수들의 치마 끝으로 살짝 엿보이는 하얀 버선의 귀여움이 무용의 멋을 더했다.○ 민요민요란, 그 나라의 국민들이 오랜 생활을 해오는 동안 자연스럽게 발생한 생활 음악이다. 민요의 구분은 크게 나누어 남도 민요와 경서도 민요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경기 민요는 맑고 깨끗한 창법으로 경쾌하고 유장한 것이 특징이다.. 한강수 타령 - 민요에 흥을 맞추어 살며시 몸을 흔들며 노래를 하였다.. 개성난봉가 - 한 사람이 이야기 식으로 노래.후에 후렴부분에서 모두 같이 에헤야~~~ 하는 부분이 시원하였다.. 밀양 아리랑 - 가장 많이 들어보았던 아리랑 .. 힘찬 노래 소리에 같이 따라 부르 고 싶을 정도로 흥겨웠다. 밝고 쾌활한 민요였다.. 뱃노래. 자진 뱃노래 - 끈적끈적한 맛이 있고 조금 더 빠른 느낌의 뱃노래였다.어이야디야~~ 의 후렴부분이 재미있었다.○ 가야금 산조 < 기악 >산조란, 즉흥적인 음악이란 뜻을 가진 곡으로 허튼가락이고도 한다. 19세기 말경 김창조가 (1865-1918) 가야금산조를 처음 만든 이후 이를 기본 틀로 하여 여러 산조가 형성되었다. 현재 연주되는 산조에는 김죽파류, 강태홍류, 최옥산류, 김병호류, 김윤덕류, 박상근류 등 여러 류파가 있으며 대개 느린 진양으로 시작하여 중모리, 중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 ( 휘모리, 단모리 ) 로 끝맺는다.-가야금 줄을 튕길 때의 소리 - 줄을 울리는 소리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빠른손놀림이 정교하였고 줄을 가지고 연주 할 수 있다는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오른손은 줄을 잡거나 튕기고 왼손은 줄을 누르거나 흔들었다. )○ 부채춤 < 무용 >무속에서 사용하던 부채에 근원을 둔 민속무용의 일종으로 화려한 의상과 부채를 이용하여 공간과 조형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 가장 한국적인 멋으로 인식되는 춤이다.- 처음 부채춤의 막이 올랐을 때 아름다운 의상과 화려한 부채를 보고 절로 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무용수들의 몸짓 하나 하나와 손놀림 그리고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였다. 우리 나라의 선적인 아름다움을 부채춤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부채춤에서 부채로 파도 모양을 만들어 출 때에는 내가 마치 파도 에 휩쓸려 갈 것만 같았다. 뱅글뱅글 도는 춤이 많고 굉장히 활동적이며, 하나같이 모두 환한 미소로 웃으며 부채춤을 추는 모습이 눈부셨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선풍기인(?) 부채를 갖고 춘 춤으로 꽃 모양을 나타낼 때에가 가장 하이라이트였다.(마지막 부분)○ 산조 < 기악 합주 >산조란 즉흥적인 음악이란 뜻이 담긴 곡으로 허튼가락이라고도 부른다. 가야금 산조가 처음으로 만들어져 이를 기본 틀로 하여 여러 산조가락이 편작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독주곡 형태인 산조를 합주 형태로 구성한 곡이다.- 각각의 독특한 악기의 음색을 들을 수 있었고 흥겨운 음악이였다.처음엔 다같이 합주 → 피리, 가야금의 독주 → 합주 → 아쟁의 독주 → 합주 → 대금과 거문고의 독주 → 합주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느린 부분에서는 농현을 그리고 빠른 부분에서는 리듬미컬함을 느낄 수 있었다.○ 평시조, 지름시조 < 전통성악 >시조는 시조시를 사설로 하여 부르는 3장 형식으로 된 노래이다.처음엔 평시조만이 있었으나 지름시조, 사설시조 등 여러 형태의 시조가 생겨난 것으로 보여 평시조가 원형이라고 하겠다. 시조를 부르는 방법은 다른 노래와 달리 하나의 정해진 가락에 다양한 종류의 시조시를 얹어 부를 수 있다.- 수업 시간에 배운 이론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한 음을 길게 끊기지 않고 시조를 노래. 그리고 하나의 음을 떠는음, 꺽는음을 사용. 요성이 많았고 노래에서 가사 한음을 길게 늘여서 부르고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음의 변화를 주었다. 음의 높낮이나 강약의 정도도 달라졌다. 지름시조를 노래할 때에는 초장에서 소리를 지르는 듯 했다. 시조를 노래할 때 아쟁, 대금, 피리, 장구가 연주를 해주었다.○ 흥보가 < 판소리 >판소리는 1인의 창자가 북 장단에 맞추어 긴 줄거리의 극적 가사를 노래하는 형식으로 소리, 아니리(독백), 발림(몸짓)으로 구성된 음악이다. 본래는 12마당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는 것은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의 5마당이다.
목차서론- 주제- 주제 선정이유 : 왜 사회문제인가본론- 문제 정의 : 원조교제- 이론에 따른 문제 정의 : 갈등주의에 따른 원조교제 정의- 문제의 현황 및 실태 : 원조교제의 현황 및 실태결론- 문제의 해결 방안 및 대책- 참고 문헌1. 주제- 많은 부분 사회에 드러나지 않고 있는 원조교제는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2. 원조교제가 왜 사회문제인가?- 원조교제는 사회적 가치와 규범에서 벗어나며, 상당수의 사람들이 원조교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또 원조교제의 원인이 인간이 만들어낸 현상이며, 다수의 사람들 또는 영향력이 있는 일부 사람들이 문제로 판단하는 것이고, 우리 사회가 원조교제의 개선을 원하고 있다. 또한 원조교제 문제의 개선을 위해서 집단적인 사회적 행동이 요청되어 지기도 한다.이러한 이유로 원조교제는 사회문제임에 틀림이 없다.또한 원조교제는 사회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문제가 사회에 다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그 심각성 또한 증가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1. 원조교제란..?1 원조교제의 발단원조교제란 말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지난 1990년대 중반.일본의 성적 타락을 빗대어 말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 샌가 한국으로 건너오게 되었 다.90년대 말에는 급기야 원조교제를 다루는 영화들까지 나오게 되었다.그런가 하면 30∼50대의 여성이 20대의 남학생과 만나는 역원조교제까지 생기게 되 었다.2 원조교제의 정의'원조'와 '교제' 두 단어가 합성되어 나온 말이다.성인남성이 어린 여학생들에게 경제적 '원조'를 해주면 여학생들은 '교제'를 해 준 다는 개념으로 '교제'의 내용은 단순한 데이트로부터 성관계까지 이르고 있다.3 원조교제와 매춘의 차이점매춘은 말 그대로 직업성인 여성이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이다.그러나 원조교제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어린 학생들이 돈 뿐 아니라 별로 값 나 는 것도 아닌 작은 물질만으로도 몸을 내주는 데에 문제가 있다2. 갈등이론에 따른 원조교제의 정의갈등이론에 따른 원조교제를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다.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정.반.합의 변증법적 갈등의 본성을 형성하게 된다는 변증법적 갈등에 의해, 원조교제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경제적으로 부유한 자, 또 사회적으로 힘이 있는 자, 즉 원조교제에서 돈을 주고 성을 사고자 하는 사람에 해당된다. 이에 반하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 또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의 위치와 힘을 갖추지 못한 자, 즉 돈을 받고 자신의 몸으로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에 해당된다. 특히나 반에 해당하는 사람이 어린 학생의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이러한 정과 반에 의해 서로 갈등을 하며 결국은 둘이 서로의 욕구를 채우고자 사회적 가치와 규범에 벗어난 행동을 함으로써 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이렇게 나타난 결과가 바로 원조교제이다.3. 원조교제의 현황 및 실태검찰이 청소년 성 보호법 시행 이후 입건된 원조교제 사범 142명을 상대로 조사 분석한 `청소년 성매매의 실상과 대책'은 원조교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원조교제 어떻게 이뤄지나 = 성인남성과 청소년간의 첫 접촉 수단은 인터넷(66.7%) 과 전화방(26.0%) 이 압도적이었다.첫접촉에서 성관계로 이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4시간 이내'가 57%로 가장 많았고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은 경우도 12%나 됐다.성관계 장소는 여관 등 숙박업소(73.3%) 가 대부분이었지만 성인남성의 집에서 이뤄진 사례도 16.3%나 됐다.성관계 대가로 청소년들이 받는 돈은 `10만원대(40.8%) ', `5만원 미만(19.7%) ',`5∼10만원(9.2%) ' 순으로 10만원 안팎이 가장 많았고 성관계 회수는 1회(57.9%) , 2회(25.6%) 가 전체의 83.5%에 달해 원조교제 사범들이 단속을 의식, 1~2회 교제를 선호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원조교제 누가 하나 = 원조교제에 나선 성인남성은 35세 이하가 78.9%였다.직업별로는 회사원(42.3%) 과 자영업자(16.9%) 가 가장 많았고 학생(10.6%) 도 적지 않았으며, 학력별로는 대학 재학 이상의 고학력자가 절반을 넘었다.미혼자(63.9%) 가 기혼자보다 많았으나 적발된 기혼자중 30% 가량은 자녀보다 어린 청소년과 원조교제를 했다.원조교제 동기는 `호기심'이 56.6%로 가장 많았고 이밖에 `우발적(15.9%) ', `성욕해소(14.2%) ' ,`어린 여성을 원해서(13.3%) ' 등 순이었으며 초범이 88%를 차지했다.그러나 대상 청소년들의 경우 원조교제를 2회 이상 경험한 `유경험자'가 61.1%에 달했고 `용돈마련'이 목적인 경우가 50.7%여서 청소년들이 `쉬운 돈벌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원조교제에 나서고 있음을 보여줬다.원조교제에 나선 청소년들은 중3∼고2 수준인 15∼17세가 69.3%나 됐다.* 신종 원조교제 속출 = 인터넷 사이트에서 원조교제 상대를 찾을 때 흔히 사용하는 ID와 대화명은 `알바녀',`원조녀', `$' 등으로 윤락이나 돈을 암시하는 경우가 전형적. 그러나 이런 명칭이 사이트 운영자의 주요 삭제대상이 되자 `아루바', `언조'등 일부 어휘를 변경하거나 `신림 1:1 15'(신림동에서 살고 있는데 1대 1로 만나 15만원을 주겠다) 등 변형된 ID나 대화명도 등장했다.또 성인남성만 처벌받는다는 점을 악용, 청소년이 상대를 협박해 금품을 뜯어내는 `공갈형', 아예 원조교제로 생활비를 버는 `생계형', 상대의 지적,경제적 수준을 가려 만나는 `선택형', 여러 명이 혼음하는 `변태형' 등 신종 원조교제도 늘고 있다.이와 함께 성인 여자가 남자 청소년을 만나는 `역원조교제'도 등장하고 있으며 원조교제를 빙자해 성인 남성을 끌어낸 뒤 강도 행각을 벌이거나 돈만 받고 도망치는 사기극도 벌어졌다.원조교제범 30%, 자식보다 어린소녀와 관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른바 `원조교제'를 한 기혼 남성 10명중 3명은 자신의 자녀보다 어린 청소년과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지검 소년부가 27일 서울 팔래스 호텔에서 열린 심포지엄 `청소년 성보호, 이대로 좋은가'에서 발표한 원조교제 사범 142명에 대한 수사기록 분석자료를 통해 밝혀졌다.자료에 따르면 원조교제의 대상 청소년 연령은 15∼17세가 전체의 69.3%로 가장 많았고 원조교제를 한 기혼남중 자녀의 나이가 16세 이상인 경우가 전체의 29.5%를 차지, 10명중 3명꼴로 자식보다 어린 청소년과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첫 만남 후 4시간이내에 성관계를 가진 경우가 57%나 됐고 댓가로 지급된 돈은 10만∼20만원이 40.8%로 가장 많았으며 최초 접촉방법은 인터넷이 66.7%로 원조교제의 창구 역할을 했다.성관계 제의는 76.8%가 남자 쪽이었지만 여자 쪽이 제의한 경우도 14.8%나 됐는데 검찰은 최근 청소년이 인터넷에서 윤락이나 돈을 표시하는 아이디를 사용해 먼저 유혹하는 등 적극적인 경우, 성인 남자는 불구속 처벌하도록 구속기준을 바꿨다.남성 피의자의 나이는 26∼30세가 36.7%로 가장 많았고 직업은 회사원(사무직) 이 42.3%로 주를 이뤘으며 대학 재학 이상이 52.8%에 달했다.원조교제에 대한 처벌은 100명 가운데 6명 정도만 실형이 선고되고, 60%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며 작년의 경우 검찰이 청구한 남성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의 39%가 법원에서 기각되는 등 처벌의 강도가 비교적 약했다.신만성(愼滿晟) 서울지검 소년부장은 "청소년 성매매는 성관계의 횟수나 초범 여부가 영장기각의 사유가 될 수 없다"며 "소위 원조교제는 일회적인 청소년 윤락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좀더 엄격한 처벌이 요구된다"고 말했다.1. 원조교제 문제의 해결 방안 및 대책현 원조교제 방지 법안을 위해 새정치국민회의는 금품을 주기로 하고 19세미만 청소년과 성행위를 한 성인의 신상을 공개하도록 하는 법안을 마련키로 결정했다. 제안된 방침은 이러 한 퇴폐관행이 더 이상 확산되기 전에 방지하려는 정부의 확고한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방침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관계 당국에 따르면 어른의 잘못된 성적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청소년의 수가 놀랄 만큼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남자와 10대 소녀가 금품을 주는 대가로 불법 성행위를 하는 '원조교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드문 일이었고 대체로 일본에 국한된 비도덕적 관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불과 10년 전 만해도 생각할 수 도 없었던 순진한 여학생과 중년남성간의 성관계 가 급격히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청소년 보호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통계자료는 우리의 우려를 뒷받침해준다. 통계수치에 따르면 올해 매춘에 연루되어 체포된 사람의 절반 이상이 16세 미만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매춘 방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여당의 결정은 접대부로 청소년을 고용하는 술집이 늘어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수치스러운 관행을 저지른 뻔뻔스러운 어른의 신상을 공개하는 법안이 문제를 어느 정도 감소시킨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서울과 대도시내 청소년을 비행으로 유혹하는 바나 룸살롱, 기타 퇴폐영업소는 증가하고만 있다. 이런 추세의 부분적 이유는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 내 증가하는 퇴폐적 영향에 민감하다는 사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