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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영화와 정치성
    영화와 정치성‘영화가 정치와 맺는 관계에 대해 서술하시오’ 라는 과제를 받고 처음에는 듣기만 해도 어려운 정치와 관계를 맺으라고 하니,,, 너무 막막한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었다.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와의 관계라,,, 그러나 생각을 해보니 우리나라 정치가 영화에 반영된 것도 많았던 것 같다. 과거사든 현재사든 정치가 영화에 반영되어 재구성되고 만들어진 영화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그렇게 생각 중에 70년대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다룬 ‘실미도’가 먼저 떠올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발사를 소재로 한 ‘효자동 이발사’도 생각이 났다.그러나 꼭 정치가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도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라는 영화로 인해 대통령이라는 범접하기 힘든 이미지를 코믹적으로 연출하였기에 대통령에 대한 좀더 친숙하고 열린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하여 16대 대선에서는 권위적인 이회창 총재 보다는 친근함이 표출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더 많은 이점으로 다가간 것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반영한 영화가 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을 다룬다면 반발을 하지 않지만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한 영화를 만든다면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 나와 법정소송까지 가는 실정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이 그 예인데, 이 영화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친일적인 접근으로 인해 현 거대 야당의 대표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개봉당시 법정 논란까지 갔던 영화이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을 통한 새로운 시각 속에 아직은 선진국적인 정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우리나라이기에 작은 형태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개봉된 ‘ 화씨911’ 이라는 다큐 영화는 개봉당시 전 세계적으로 이슈를 몰고 다닌 영화이고, 실지로도 부시정권에 대한 신뢰도를 많이 떨어뜨린 영화이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못 꾸는 영화이다.이광모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의 흥행 성공이 과거사를 다룬 영화에 투자를 불러들인 측면이 있으나 민감한 소재일수록 인간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으나 아직도 여러 감독들은 정치를 반영한 영화를 준비 중 이라고 한다.먼저,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은 1974년 인혁당 사건을 영화로 준비 중이다. 사형 선고 후 20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던 이 사건은 이미 연극으로도 공연된 적이 있지만, 박찬욱 감독은 “내 능력이 닿는데 까지 최대한 상업적으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보이겠다”고 밝혀 인혁당 사건은 국정원의 과거사진상규명 대상에 올라 있기도 하다.또,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도청에서 20여 명의 사수대를 이끌다 사망한 윤상원씨 이야기도 스크린에 옮겨진다고 하는데, 윤씨는 80년대의 대표적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제작사 ‘기획시대’ 윤인택 대표는 5.18항쟁은 이제 역사적 비밀이 거의 벗겨진 상태라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에 어렵지 않은 상황이라며 최대한 영화적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언론통폐합과 광주항쟁 모두 가해자측 사람들은 상당수가 한나라당의 전신인 구 민정당과 관련돼 있다.뿐만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을 만든 MK픽쳐스는 후속작으로 1950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인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노근리 전쟁’을 준비 중 인데, 황규덕 감독은 “미국 쪽에서 무슨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반미영화가 아니라 반전영화”라고 설명했다.이처럼 영화는 우리나라 과거의 정치사를 주제로 재구성하여 만들어 지기도 하고,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리기도 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현재 우리나라 정치에도 영화를 미치기도 한다.우리의 이야기이고 우리가 겪고, 과거에 우리 부모님이 겪었던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집중되고 흥행에도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된다.현재에도 우리나라 정치를 반영한 영화가 많이 흥행했는데도 또 이렇게 많은 다른 정치영화가 개봉 준비 중 이라니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온통 아프고, 슬펐던 과거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많다는 것이다. 살아 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실미도’나 친일적 행동을 비판하는 ‘그때 그 사람’등 많은 영화가 우리 가슴 속에 거작 이지만 가슴 아픈 영화로 남아있는데 아직도 가슴 아파하며 봐야할 영화가 개봉 준비 중 이라니 너무 안타깝다. 물론 안 보면 그만 이지만 우리의 이야기인데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이렇듯 영화에 정치사가 반영되기도 하고, 정치가 영화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그리고 긍정적인 정치사 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정치사가 반영된 영화가 많고, 준비중인 영화도 많다.정치가 영화에 영향을 미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영화는 그 나라의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가치관, 유행 등을 모두 반영하여 만들어 지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그 나라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문/어학| 2010.08.29| 2페이지| 2,000원| 조회(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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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행문]전통문화답사 -해인사
    전통문화의 이해란 과목의 문화답사라는 과제...그냥 막연히 생각하면 문화답사라는 것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막상 문화답사를 떠나려고 하자 어디를 가야할지 무엇을 보고 와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래서 일단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생각해보며 지도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고구려는 보고싶어도 볼 수가 없는 곳에 있어 “우리 고구려 문화 답사 가자”고 하며 웃음으로 넘겼다.그리고 백제는 하루만에 갔다오기엔 너무 멀게 느껴졌고 신라의 유적지 경주는 수없이 많이가봐 식상하게 느껴졌다.“에휴,,,,,,,, 어딜갈래?” 하면서 서로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찾아보았다.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과 여유가 맞아야 했기에 멀리는 가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매일 보는 집 근처라든지 심심하면 엠티가는 장소인 경주는 너무 식상해서 쉽게 결정하지 못하였다.그러나 어떻게든 결론은 있는 법!!!드디어 “합천”으로 결정을 내리고 이제 합천 해인사부터 이것저것 조사해보기 시작했다.우리가 어떻게 갈 수 있고 가서 무엇을 보고 와야하며 하는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말이다. 합천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해인사 외에도 많은 유적지들이 있었다.하루만에 다 돌아보고 올 수 있을지 마음이 급해졌다.1월7일 일요일 아침, 드디어 출발했다.새벽 4시에 눈을 떠서 준비하고 5시에 나서려는데 문제가 생겼다.디카 배터리 충전을 안한 것이다.어쩔수 없이 한시간 이라도 충전을 하고 6시에 집을 나섰다.볼것들은 많은데 시간이 지연되어 마음만 더 급해졌다.그렇게 출발해서 합천에 도착한 시간은 9시였다. 도착한 시간까진 아주 만족했다.이제 서서히 둘러보면 되겠구나 생각했다.그러나 여기서 또 문제발생.... 길을 몰라 어디를 가려고 해도 한참 헤매여서 간다는 것이었다.먼저 휴게소에서 가져온 지도를 펴고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기로 했다.그러나 표지판 하나 없어 찾아가기가 힘들었지만 지도를 보고 열심히 찾아갔다.여기쯤 이겠거니 할 때 쯤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있고 아주 낡고 허름한약 되는데 이는 온갖 물듦이 깨끗이 사라진 진실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라 한다.그 세계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고 그러한 세계는 모든 번뇌가 다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에서 펼쳐진다고 한다. 이러한 경지가 곧 해인삼매이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참 된 근원이요 본래 모습이다.해인사라는 절 이름은 바로 이 말에서 따온 것이고, 말하자면 화엄경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인 셈인 것이다.그리고 해인사의 역사를 보면 해인사의 윤곽을 대강이나마 집작할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선 뒤의 일이라고 한다.조선조에 들면서부터 내리막길을 걷는 불교 사태 속에서도 해인사는 왕실의 비호 속에 온존하다가 성종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사세를 키우는 계기를 맞는다. 1488년 인수, 인혜 두 왕대비가 세조비 정희왕후의 유명을 받들어 당대의 고승 학조스님으로 하여금 해인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여 1490년에 공사를 마쳤던 것이다.이때 세워진 각종 건물의 총 칸수가 160칸이었다고 한다.해인사는 아마도 성종대의 중창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해인사의 틀이 잡혔으리라 생각된다고 하지만 이때의 모습이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다.임진왜란 때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던 해인사는 1695년부터 1871년 까지 176년 사이에 짧게는 1년, 길게는 수십 년의 간격으로 무려 일곱 차례나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여 여러번 제 보습을 바꾸었다.그 가운데 1817년의 대화재는 천여 칸의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때 마침 추사 김정희 선생의 아버지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었던 관계로 해인사의 중창을 후원하게 되고 이때의 복구는 이전 모습보다 대폭 축소된 형태로 이루어졌고, 그때의 모습이 부분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해인사도 안타까운 역사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예전에 160칸의 건물이 있었다니...... 하지만 오늘 우리가 찾은 해인사는 그렇게 웅장하지는 못하였다.해인사 입구에 도착하자 일요일 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엄청나게 부쩍거렸다.입장료가 한사람에 3 받침은 신라 석탑의 전형인 5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붕돌 추녀 끝은 살짝 들어올려져 완만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지붕돌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종이 달려 있는데 본래의 것은 없어지고 나중에 다시 매단 것이라 한다.탑의 꼭대기 역시 일부가 소실 되어 꼭대기를 떠받치는 받침대와 위로 핀 연꽃, 바퀴만 남아있었다.1926년 6월에 이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상층 받침의 돌 함속에서 9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 되었는데 석탑을 수리하고 나서 이들 불상을 다시 탑 안에 봉안 하였다고 한다.또 이 석탑 앞에는 코끼리의 눈 모양을 형상화했다는 안상과 연꽃무늬가 조각된 배래석이 있었으나 수리하는 과정에서 석등 앞으로 옮겨졌다.다음으로 대적광전으로 갔는데 거기에서는 스님께서 벽에 새겨진 그림을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시고 계시었다.처음부터 듣지는 못하였으나 중간부터라도 듣고자 자리를 잡고 설명을 열심히 듣고 기록하였다.먼저 장자율사에 대한 그림이었다. 선덕 여왕이 장자율사를 정치에 이용하려 하였으나 명예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여 선덕 여왕이 신하를 시켜 죽이려 하였으나 장자율사가 개를 데리고 하루를 살지언정 명예를 않겠다하여 신하가 선덕여왕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자 선덕여왕도 어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다음으로 최치원선생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히라 스님이라는 그림이었는데 이는 왕건 때 신하가 왕복장을 하고 왕건 대신 죽었을 당시 왕건이 도망다니다 위험에 처했었는데 히라 스님이 거미줄을 쳐서 왕건이 목숨을 건지게 되어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다음 그림은 스님이 동자스님을 두고 외출시 동자스님이 채공을 하다 손이 비어 피가나 호랑이에게 피맛을 보여주자 야성이 강한 호랑이는 동자스님을 잡아먹어 스님이 돌아와 그것을 보고 화가나셔서 산에 산신들을 다 불러모아 호랑이에 의한 호환이 없도록 호랑이를 없애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잠시 그림 설명을 끝내고 스님께서 불교의 애기를 해주셨다.스님께서는 불교는 부모를 보시지 않고 삭발을 하여 효사상이 없다고 비판들 하는 것에는 모르나 80먹은 노인도 행하지는 못한다”라고 하시어 백나천이가 이 말씀을 듣고 불교를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이 그림 설명을 끝으로 우리는 팔만대장경판을 보러 올라갔다.나무로 만들어진 대장경판을 오래 보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은 적정한 온도와 습도의 유지, 직사광선의 차단, 원활한 통풍과 환기이다. 그리하여 팔만대장경판이 보관 되어 있는 곳은 바닥 부터가 다르다고 하셨는데 장경판전이 들어선 자리는 배수가 잘되는 토질이라 하셨다. 또 집이 앉을 자리에는 석회, 숯, 소금을 겹겹이 다져넣고 그 위를 황토로 마감하였다 한다. 석회, 숯, 소금 따위는 모두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나 습도가 높은 여름철에는 건물 안의 습기를 빨아 들여 습도를 낮추고, 반대로 건조한 때에는 머금었던 습기를 내뿜어 적정한 습도 유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또 하나의 설명은 앞뒤로 나란히 있는 수나라장과 법보전의 앞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살창들의 크기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는 수나라장의 살창은 위가 크고 아래가 작았으나 법보전의 살창은 위가 작고 아래가 컸다. 이 이유는 수나라장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와 법보전 뒤에 산에서 나오는 찬공기가 어울려져 온도와 습도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 하셨다.또 세종대왕 시절의 애기를 해주셨는데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농사를 짓지 못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노략질을 많이 하였는데 어느 날 세종대왕에게 팔만 대장경을 주면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여 세종은 협상을 보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반대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팔만대장경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정말 다행인 이야기다. 그때 일본의 침략에 견디지 못하여 팔만대장경을 넘겨버렸다면 우리의 중요하고 소중한 역사 하나를 빼앗겨 버렸을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그리고 팔만대장경은 경판의 양도 81340매에 이르고 낱낱 경판은 거의 한결같은 크기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경판 하나의 크기는 대체로 가로 70cm, 세로 24cm, 두께 2.8cm이고 무게는 3.25kg량사로 향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월광사까지 이르게 되었다.월광사는 다행히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월광사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 혹은 태자로 전해지는 월광태가가 신라에 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는데 최우의 싸움터가 지금의 월광사터이며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 월광사였다는 애기가 전해져 오고 그가 세웠다는설도 있다.그가 세웠든 그를 위해 세웠든 월광사란 절은 이 ‘비운의 태자’와 깊은 관련이 있었던 듯한데, 까마득한 세월 탓인지 지금은 이런 옛 사연과는 동떨어진 분위기의 새절이 그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은 통일신라 시대의 쌍탑이 옛터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월광사의 두 탑은 모두 신라시대 방형 삼층석탑으로 크기나 양식이 같아 조형적으로 여러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그만큼 많은 차이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특히 기단부가 서로 대조적이다. 공통점은 주로 석재를 짜맞추는 방법에서 나타나는데 지대석과 하층기단 중대석을 같은 돌로 만들면서 여덟 매의 돌로 짜맞춘 점, 하층기단 덮개돌을 네 장의 돌로 덮은 점, 그 윗면의 이중 굄대를 아래는 둥글게, 위는 모나게 깎은 점, 상층기단 면석을 여덟 장의 돌을 조립하여 세운 점, 상층기단 덮개돌을 네 장으로 마무리한 점, 그 아래에 턱을 지워 부연을 나타내고 윗면에는 1층 몸돌을 받치는 굄대를 이중으로 마련한 점 따위 등이 같았다.반면 차이점은 거의 세부 형태에서 드러난다. 서탑은 상하층 기단 중대석의 버팀기둥이 각각 둘씩 새겨진 데 비해 동탑은 하나뿐이며 서탑은 상하층 기단 덮개돌 윗면에 물매가 거의 없으나 동탑은 그 물매가 뚜렷한 점, 서탑은 상층기단 덮개돌의 부연이 여느 석탑과 비슷하게 두꺼운데 비해 동탑은 그것을 아주 얇고 깊게 새겼다는 점, 서탑은 상층기단 덮개돌의 굄대가 아래위 모두 모나지만 동탑은 아래는 둥글고 위는 모나다는 점 등이 서로 대비된다.탑신부는 두 탑이 그려내는 분위기만 다를뿐 조형적인 수법과 세부는 거의 같다. 두탑은 모두 몸돌과 지붕돌을 제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고 있으며, 몸었다.
    독후감/창작| 2006.07.18| 8페이지| 3,000원| 조회(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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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축제
    축제 (축제, 祝祭, 1996)한국 / 1996.06.06 / 드라마 / 107분감독 : 임권택출연 : 안성기, 오정해, 한은진, 정경순, 박승태40대의 유명작가 이준섭(안성기 분)은 시골에 있는 노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는다. 준섭의 도착에 따라 장례가 시작되고 시집와서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모셔온 준섭의 형수는 그 시어머니의 죽음에 그동안 고생해온 자신의 설움이 은근히 복받친다. 5년이 넘게 노망을 앓아온 87세 할머니의 죽음은 상가에 온 사람들을 그리 슬프게는 하지 않는다. 더러는 노골적으로 호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어머니의 죽음을 놓고 조금씩 생기던 가족간의 갈등은 13년전 집돈을 훔쳐 가출한 준섭의 이복조카 용순(오정해 분)이 나타나면서 깊어진다. 요란한 복장과 천연덕스런 행동... 용순은 자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복언니 형자(홍원선 분)와 대판 싸우고 상가를 나간다. 모친상을 통해 준섭의 문학세계를 재조명하는 기사를 쓰러운 기자 장혜림(정경순 분)은 용순에게 따라붙어 이런저런 질문으로 은근히 용순의 부아를 돋구고 용순이 어릴 적 계모와 이복 형제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사랑해 준 할머니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음을 알고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으면서도 직접 어머니를 모시지 않은 삼촌 준섭에 대해 적의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아낸다. 장례의 둘째날... 염습과 성복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이 준비한 상복을 입는동안 용순은 자신이 직접 준비해온 어디에 서 있어도 눈에 띄는 호사스러운 상복을 입는다. 장혜림은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은 몸으로 취재하느라 분주하고 준섭의 친구들은 바다로 나가 낚시를 즐기고 산일을 맡은 우록 선생은 와서 어른들과 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본격적으로 문상객들이 밀려든다. 밤이 되면서 여기저기 노름판이 벌어지고 조의금을 슬쩍해서 노름을 계속하는 사람, 윷놀다 끝내 싸우는 사람들. 갖가지 해프닝들로 상가는 소란스러운데 그 와중에 소리하러 온 소리꾼은 만취해서 실려나가고 하는 수 없이 새말의 소리로 초경이 시작된다. 초경 이경 삼경을 지내는 것은 발인 전날밤을 보내는 이 지방의 풍습이다. 그러나 초경에서 삼경으로 가면서 사람들은 술에 취하고 점점 노골적인 놀이판으로 변한다. 만취한 용순은 앙칼진 목소리로 이 놀이판에 찬물을 끼얹는데. 발인날, 상여를 메기로 한 서울패들은 읍내 여관에서 늦는다. 그러면서도 준섭은 일을 진행시키는데 상여가 나가고 용순은 장혜림이 건네준 준섭의 동화를 본다.장례 첫째날장례는 일반적으로 3일장을 치른다.저녁 늦게 운명하면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임종(臨終)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것을 말하며 운명이라고도 한다.병원에서 임종하였을 경우에는 곧바로 사망진단서(5매)를 발급받도록 한다◎ 수시(收屍)수시는 친척이나 친지 중 범절에 밝은 분이 하도록 한다.● 숨을 거두면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눈을 곱게 감도록 쓸어내리고 팔다리를 매만져 가지런히 한다.● 햇솜으로 코와 입을 막아 오수의 누출이나 미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손발이 굽어지지 않게 곧게 펴서 남자는 왼손을,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하여 배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00두다리는 똑바로 모아 백지나 붕대로 묶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흰 천이나 혹은 희고 깨끗한 홑이불로 덮는다.● 수시가 끝나면 병풍이나 검은색 휘장으로 가리고 그 앞에 고인의 사진(영정)을 모시고 양쪽에 촛불을 켜고 00 향을 사른다.이때는 영정에 검은 리본을 두르지 않는다000(영정의 검은 리본은 성복후에 걸치는 것이 원칙이다)● 고인을 모신 방은 차게 하며 방을 비우지 않도록 한다.◎ 발상(發喪)초상이 났음을 외부에 알리고 상례를 시작함을 말한다.유가족은 흰색이나 검정색의 검소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귀걸이나 목걸이 등 치장을 하지 않는다.고인에 대해 애도하고 근신하며 큰소리로 곡하는 것은 삼간다.흔히 근조(謹弔)라고 쓴 등을 대문 앞에 달아 놓거나 상중(喪中), 혹은 기중(忌中)이라 쓴 네모난 테두리의 종이를 대문이나 집 입구에 붙여 초상을 알린다.◎ 장례방법, 일정 등의 결정유족과 상주는 친인척 중 장례에 밝은 사람을 호상으로 정하고 함께 장례에 대한 제반 사항을 결정한다.장의사와 함께 상담하는 것도 좋다.● 장례방법 : 가족장, 단체장, 기타 죽은 이의 사회적 지위나 활동, 유언에 맞추어 정하고 특정의 종교적 예식으 00로할 것인지의 여부 등을 결정한다.● 화장이나 매장 여부를 결정하고 화장일 경우 화장장의 예약관계, 매장일 경우 묘지 등을 결정한다.● 부고의 범위와 방법 : 부고대상을 정하고 방법(신문, 전화, 전보, 서신 등)을 정한다.● 기타 장의사 등과 협의하여 제반용품 및 영구차량등의 견적,예약을 진행한다.● 사망신고 및 매(화)장 수속을 진행한다.◎ 부고(訃告)고인과 유족의 가까운 친지나 친척, 지인,단체(회사)등에 부고를 낸다.꼭 알려야 할 사람에게는 빠짐없이 알리되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결례이다.부고에는 발인일과 장지를 포함하도록 한다.인쇄물에 의한 개별 고지는 금지되어 있으나 구두, 사신(私信)에 의한 것은 허용된다.신문에 부고를 낼 경우에는 많은 유족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은 피해야 하며 단체나 행정기관, 기업체 등의 명의로는 부고를 내지 못한다.부고는 상주의 이름이 아니라 호상(護喪)의 이름으로 보낸다.장례 둘째날◎ 염습(殮襲)염습이란 시신을 정결하게 씻기어(염) 수의를 입히는(습) 것으로 입관전에 행하는 절차이다. 염(殮)은 전통적으로 향나무나 쑥을 삶은 물로 시신을 정결하게 씻기었지만 근래에는 소독된 솜이나 거즈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남자의 염은 남자가, 여자의 염은 여자가 한다.습(襲)은 죽은이에게 수의를 입히는 절차로 수의는 미리 아래위를 구분하여 단번에 입힐 수 있도록준비하여 놓는다. 수의는 모두 오른쪽으로 여미며 고(옷고름)를 내지 않는다.수의를 준비하지 못했을 경우 고인이 입던 옷 중에서 화학섬유가 아닌 섬유질로 된 옷(비단, 명주, 베 등)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수의로 써도 된다.◎ 반함(飯含)죽은이의 입에 불린 생쌀을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좌, 우, 중앙에 각각 1숟가락씩 넣고, 동전이나 구멍이 뚫리지 않은 구슬을 넣어준다.망자가 먼 저승길을 갈 때 쓸 식량과 노자돈이라 여겨 행하지만 최근에는 생략하는 추세이다.◎ 입관(入官)시신을 관에 모실 때는 시신과 관 사이에 깨끗한 백지나 마포, 삼베, 혹은 고인이 입던 옷 중에서 천연섬유의 옷을 골라 둘둘 말아 넣어 시신이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평소 고인의 유품 중 염주나 십자가, 성경 등을 넣어 드리기도 한다. 입관이 끝나면 관보를 덮고 명정을 발치쪽에 세운다.◎ 영좌 설치시신앞에 병풍이나 검은 휘장을 치고 그 앞에 영좌를 설치한다.영좌란 고인의 사진이나 혼백을 모셔 놓는 자리로 사진(영정)에 검은 리본을 두른다.-제사위에 영정을 모시고 영정 양 옆으로 촛불을 밝힌다.-제상앞에는 향탁을 놓고 향을 피운다.-영좌의 앞에 조문객을 맞을 자리를 마련하고 옆에 상주자리를 깐다. 상주의 자리는 거친 자리로 까는데 그 까닭은 죄인이라 초토(草土)에 몸을 둔다는 뜻으로 조문객을 맞는 상제들이 방석을 깔고 앉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복(成服)입관이 끝나고 영좌를 마련한 뒤 상복을 입는다.성복(成服)이란 정식으로 상복을 입는다는 뜻으로 상제(喪制. 고인의 배우자, 직계비속)와 복인(服人. 고인의 8촌 이내의 친족)은 성복을 한다.전통적인 상복으로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입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이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상복을 올바로 입는 법으로남자의 경우-한복 : 흰색(검정색) 바지저고리에 흰(검정)두루마리를 입고 건을 쓴다.-양복 : 무늬 없는 흰 와이셔츠에 검정색 양복을 입고 검은 넥타이를 맨다.-검정색 양말과 구두를 신으며 두건을 쓴다.-평상복 : 부득이한 경우 평상복을 입는데 이 때에는 점잖은 색(진한 감색이나 밤색)으로 입고 왼쪽 가슴에 상장이나 흰 꽃을 달고 두건을 쓴다.여자의 경우-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흰색 버선(양말)과 흰색 고무신을 신는다.- 양장을 할 경우에는 검은색을 입으며 양말이나 구두도 검정색으로 통일하는 것이 좋다.???더운 여름이라도 긴 소매를 입고 속이 비치지 않는 단순한 디자인의 옷을 선택하며 액세서리를 ???달거나 치장을 하지 않도록 한다.
    독후감/창작| 2006.07.18| 4페이지| 1,000원| 조회(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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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영화와 정치성 평가A좋아요
    영화와 정치성20034223 양수구‘영화가 정치와 맺는 관계에 대해 서술하시오’ 라는 과제를 받고 처음에는 듣기만 해도 어려운 정치와 관계를 맺으라고 하니,,, 너무 막막한 기분이 든 건 사실이었다.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와의 관계라,,, 그러나 생각을 해보니 우리나라 정치가 영화에 반영된 것도 많았던 것 같다. 과거사든 현재사든 정치가 영화에 반영되어 재구성되고 만들어진 영화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그렇게 생각 중에 70년대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다룬 ‘실미도’가 먼저 떠올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발사를 소재로 한 ‘효자동 이발사’도 생각이 났다.그러나 꼭 정치가 영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도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라는 영화로 인해 대통령이라는 범접하기 힘든 이미지를 코믹적으로 연출하였기에 대통령에 대한 좀더 친숙하고 열린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하여 16대 대선에서는 권위적인 이회창 총재 보다는 친근함이 표출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더 많은 이점으로 다가간 것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반영한 영화가 정치의 긍정적인 측면을 다룬다면 반발을 하지 않지만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한 영화를 만든다면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 나와 법정소송까지 가는 실정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이 그 예인데, 이 영화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친일적인 접근으로 인해 현 거대 야당의 대표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개봉당시 법정 논란까지 갔던 영화이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을 통한 새로운 시각 속에 아직은 선진국적인 정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우리나라이기에 작은 형태의 비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개봉된 ‘ 화씨911’ 이라는 다큐 영화는 개봉당시 전 세계적으로 이슈를 몰고 다닌 영화이고, 실지로도 부시정권에 대한 신뢰도를 많이 떨어뜨린 영화이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못 꾸는 영화이다.이광모 감독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의 흥행 성공이 과거사를 다룬 영화에 투자를 불러들인 측면이 있으나 민감한 소재일수록 인간 본질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으나 아직도 여러 감독들은 정치를 반영한 영화를 준비 중 이라고 한다.먼저, ‘올드보이’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은 1974년 인혁당 사건을 영화로 준비 중이다. 사형 선고 후 20시간 만에 형이 집행돼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던 이 사건은 이미 연극으로도 공연된 적이 있지만, 박찬욱 감독은 “내 능력이 닿는데 까지 최대한 상업적으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보이겠다”고 밝혀 인혁당 사건은 국정원의 과거사진상규명 대상에 올라 있기도 하다.또,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도청에서 20여 명의 사수대를 이끌다 사망한 윤상원씨 이야기도 스크린에 옮겨진다고 하는데, 윤씨는 80년대의 대표적 운동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제작사 ‘기획시대’ 윤인택 대표는 5.18항쟁은 이제 역사적 비밀이 거의 벗겨진 상태라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에 어렵지 않은 상황이라며 최대한 영화적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언론통폐합과 광주항쟁 모두 가해자측 사람들은 상당수가 한나라당의 전신인 구 민정당과 관련돼 있다.뿐만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을 만든 MK픽쳐스는 후속작으로 1950년 7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인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노근리 전쟁’을 준비 중 인데, 황규덕 감독은 “미국 쪽에서 무슨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반미영화가 아니라 반전영화”라고 설명했다.이처럼 영화는 우리나라 과거의 정치사를 주제로 재구성하여 만들어 지기도 하고, 이를 통해 국민들에게 알리기도 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현재 우리나라 정치에도 영화를 미치기도 한다.우리의 이야기이고 우리가 겪고, 과거에 우리 부모님이 겪었던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집중되고 흥행에도 성공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된다.현재에도 우리나라 정치를 반영한 영화가 많이 흥행했는데도 또 이렇게 많은 다른 정치영화가 개봉 준비 중 이라니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온통 아프고, 슬펐던 과거를 주제로 한 영화가 많다는 것이다. 살아 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실미도’나 친일적 행동을 비판하는 ‘그때 그 사람’등 많은 영화가 우리 가슴 속에 거작 이지만 가슴 아픈 영화로 남아있는데 아직도 가슴 아파하며 봐야할 영화가 개봉 준비 중 이라니 너무 안타깝다. 물론 안 보면 그만 이지만 우리의 이야기인데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이렇듯 영화에 정치사가 반영되기도 하고, 정치가 영화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그리고 긍정적인 정치사 보다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정치사가 반영된 영화가 많고, 준비중인 영화도 많다.정치가 영화에 영향을 미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영화는 그 나라의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가치관, 유행 등을 모두 반영하여 만들어 지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그 나라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후감/창작| 2006.07.18| 2페이지| 2,000원| 조회(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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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와 현실]민주공원을 다녀와서,,
    화창한 날씨인 토요일 오후, 역사와 현실 과제를 하기 위해 민주공원으로 향했다.민주공원에 가본 적이 없어 가는 길을 몰라 조금 돌아가게 되었지만 민주공원에 도착하여 나의 눈에 펼쳐진 풍경은 나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시원하게 불어오는 산들바람,,,, 너무 좋았다.주말이라 그런지 나들이 나온 가족들도 많았고 사생대회가 펼쳐지고 있어 민주공원은 많은 사람들로 분주했다.학생들의 그림을 구경하면서 먼저 나는 민주항쟁 기념관으로 향했다.이 곳에서는 시립박물관의 내용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끝난 박물관에 이어 그 이후 민주를 위한 우리의 피나는 노력들이 전개되고 있었다.먼저 항쟁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그 당시 부산의 모습이 설명되어있었다. 1945년 8월 15일광복을 맞이한 30만 부산 사람들은 일제 잔재를 씻어 내고 질서를 회복하면서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부산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도시로 부활 하엿고 부마민주항쟁과 6월항쟁을 거치는 동안 부산은 불의의 역사를 극복하는 저항의 선두에서서 투쟁하였던 것이다.다음으로 민주의 뿌리를 보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김구, 전태일, 문익환등의 말들과 그들이 사용하였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김구는 통일 조국의 건설이야 말로 진정한 민족 독립이라고 여기고 남북 분단의 고착을 막기 위해 자신을 바쳤다. 오직 정의의 깃발을 자고 절대 다수의 애국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통일과 완전 자주, 독립을 실현하기 위해여만 계속 분투하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그리고 옆에 환하게 웃고 계신 김구선생의 사진과 쓰시던 안경의 태극기 위에 놓여져 있어 그것을 보는 나의 마음이 찡하였다. 표정은 저리 환하신데 받으신 고통은 얼마나 쓰라린 아픔이 되었을까…저기 있는 저 태극기를 들고 얼마나 뛰어 다니셨을까 생각하니 또 한번 고개가 숙여졌다.옆에 있는 전태일은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반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라는 말은 인간 평등을 바탕으로 한 노동자의 절규였으며 민주되어 시민들이 대거 합류한 항쟁으로 발전되었고 이승만대통령의 하야 이후 대학과 고등학교를 포함한 학원 민주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부모의 품에서 따뜻한 밥을 먹으며 공부하는 것에 열중해야 할 어린 나이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거리에 태극기를 들고 뛰어 들어 싸워야만 했던 젋은이들,,,, 목숨을 내놓은 상황에서 두려움을 버리고 뛰어들어 싸워야 했던 그들의 마음, 그리고 그들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씨끄러운 함성소리와 함께 태극기를 휘날리며 뛰어다닌 그들의 모습이 들리고 보이는 듯 했다.4.19민주항쟁으로 드높았던 민주의 함성과 주주통일의 열망은 이듬해인 1961년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쿠데타로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1970년대에 냉전체제의 해체로 위기를 맞게 된 박정희는 1972년 유신을 단행하여 독재권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유신체제는 대통령의 권한을 총통 수준으로 강화하고, 행정부에 대한 국회의 견제기능을 무력하게 하며 민주세력의 저항에 긴급조치라는 재갈을 물리는 등, 그나마 유지되던 최소한의 민주절차와 인권을 부정하는 폭거였다. 민주세력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공작정치를 비롯한 각종 통제장치를 동원하여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민주화 운동의 물결앞에 결국 박정희의 철권통치는 무릎을 꿇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독특한 형태의 민주화 운동이었던 양서협동조합운동은 진보적인 서적을 매개로 하는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민주세력을 결집하고 확산시키려 하엿다. 이것은 억압적인 정권은 언제가 진보적인 서적에 금서라는 딱지를 붙여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진보적인 서적을 두루 읽고 지식과 양심을 교류하는 것은 권력이 만든 규범을 부정하는 것이고 나아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것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1970년대 말 한국사회는 동일방직사건, YH무역사건, 김영삼의원제명사건을 거치면서 정권 말기의 폭압성과 난 것은 공포와 고립의 시간들이라는 것이었는데 한 평도 되지않는 한 사람이 누울 수도 없는 크기에 쇠창살로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것도 섬뜩할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다가 죄인이 된 양심수들은 이 감옥 안에서도 쉬지 않고 반독재투쟁에 참여하고 교도소 내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독방은 이러한 양심수들의 교도소 내 민주화투쟁을 방해하고 탄압하는 수단으로 흔히 악용되었다.독방체험은 현재 교도소에서 운영되고 있는 독방을 재현하여 많은 양심수들이 처했던 고난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여 보고 오늘날 한국의 인권 실태에 대해 생각해 보는 프로그램 이었다. 하지만 나는 체험을 해보지 못했다. 아니 안 해봤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는 것도 섬뜩한데 내가 저 안에 갇혀야 한다면 참을 수 없는 너무나 큰 공포라 느껴 졌기 때문이다. 독방옆에서도 독방에 갇혀 지내야 했던 비전항 장기수 김동기님의 라는 글이 있어 그들의 공포와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옆에는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온 몸을 헌신하신 지도자들, 폭력적이고 반민족적인 독재 권력이나 불의한 권력에 의해 꽃다운 젊은 생명을 빼앗기거나, 스스로르 희생하여 권력의 부당성을 고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발전과 민족통일의 달성에 작은 밀알이 되고자 한 열사들의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그 중에서도 우리학교 옆에 있는 경성대에 재학 중 건국대 농성사건 해명, 군부독재타도, 미제국주의 축출의 유서를 뿌리고 분신, 투신 사망을 한 진성일이라는 젊은이와 부산대 재학 중 학내에서 투신 자살한 양영진, 고등학생이라는 젋은나이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강수영, 초등학생의 어린나이에 민주항쟁에 참여하여 사망한 박점도라는 어린이가 나의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하였다.그 어린나이에,,, 정말 너무나도 꿈이 많고 할 일이 많은 젋은 나이에 나라의 민주를 위해 싸우다 간 우리의 젋은이,,, 그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우리는 반성하고 정의를 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그리고 마지막에 민주주모습등이 재현되고 있었고 너무나 혼란스러웠던 그 당시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다음은 이기원 작가의 임산부의 죽음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산달이 다 되어 보이는 배가 많이 부른 임산부가 누워있고 반신이 잘려진 체 칼을 들고 있는 누군가가 임산부의 배를 찔러 피가 흐르는 모습이었다. 생각만해도 너무나 끔찍했고 인간도 아니니기에 반신이 잘려진체 표현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신학철 작가의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라는 작품은 우리의 젋은이의 모습이었는데 머리는 흥클어지고 얼굴에 난 많은 상처와 흘리고 있는 피,,,, 그 당시의 우리 젋은이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그리고 김서경의 바로잡지 못한 역사 속에서라는 작품은 일본 교과서 파문 사건과 지금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있는 독도에 관한 신문기사가 나열되어 있었고 그 위에 분단된 우리의 현실을 나타내 듯 태극기의 (가운데 둥근 부분)이 파란색과 빨간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방정아의 분위기 파악 못하는 박정희씨라는 작품은 국민들은 피를 흘려가며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데 박정희는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살고있는 삶을 비난하는 듯 했다.박주현 작가의 아! 대한민국이라는 작품은 군용모자를 쓰고 피를 흘리고 있는 젋은이의 두상으로 그 당시의 피를 흘려야 했던 우리 젋은이를 나타낸 것이엇다.오윤선 작가의 사월목-사스레피란 작품은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리는 우리나라를 표현하는 듯 했다.이렇게 여러 작품을 감상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한 뒤 부산광복기념관으로 향하였다.광복기념관으로 와서 나는 일체침략과 부산이라는 주제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서구열강의 무력에 굴복하여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자신들이 당한 똑 같은 방식으로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였고 거대한 함선 운양호를 끌고와 조선을 위협한 후 876년 2월 조선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그러면서 일본은 부산의 자본을 침탈하여 그 기반 위에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에서 주도권을 장악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침략에 대한 부산인들은 힘, 여성, 청년 등 각 계층의 독립운동은 조직적으로 정비되었고 이에 따라 다양한 대중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부산 3.1 독립운동을 살펴보면 돌래 범어사 학생의거, 구포장터 의거, 명호시장 의거, 가덕진 의거, 동래고보 장터의거, 좌천시장 의거, 일광 의거, 기장읍 의거, 일신여학교 의거가 있었다. 특히 일신여학교 어린 소녀들의 항쟁은 부산, 경남 3.1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상 그 의의가 높다고 할 수 있다.옆에서는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소녀들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다음으로 노동운동의 전개를 보게 되었는데 1920년대 전반을 보면 부산의 근로대중은 일찍부터 일제 독점자본의 수탈과 지배로부터 생존권을 보장 받기 위해 노동자 단체를 결성하여 저항하였다. 노동의 의의와 계몽을 강조하고 경제적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사상을 근거로 하여 항일노동운동은 발전하였다.그러다 1920년대 후반기에 와서는 1925년 11월 하순에 조직된 부산인쇄직공조합의 동맹파업이 실패로 끝나자 극심한 일경의 탄압으로 침체 국면에 빠졌다.1930년대 전,후반기에 와서는 합법적인 근로대중의 항일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또한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국가총동원령을 위시한 각종 악법을 제정하여 노동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 탄압하였으나 근로자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꾸준히 지속되었다.그리고 일제 말기 학생운동을 살펴보면 민족지성을 표방한 학생들은 사회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부산항일학생운동은 경남학도 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민족적 차별에 학생들은 울분과 의분을 참지 못하여 폐회식 마지막 순인 일본 국기 하강식 때 일본 국가 대신 우리의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노다이 죽여라”, “왜놈 죽여라”고 절규하였다. 노다이사건은 불과 1일간의 항일투쟁이었으나 엄중한 일제의 보도 통제 속에서도 우리 학생들의 민족정기는 전국에 널리 메아리쳐 갔다.또한 3.1운동 이후 일제가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한발 물러나 문화통치라는 다소 완화된 지매체제로 전왔다.
    생활/환경| 2005.06.29| 6페이지| 3,000원| 조회(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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