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잘, 통한다?"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빨리 친해지기 위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지연, 혈연에서 취미나 관심까지 무엇이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조금 더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잘 맞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잘, 통한다."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상대방의 취미나 관심 등의 사항을 미리 파악하고 만나게 된다면 공감대를 만들어 가기가 좀 더 쉬울 것이고, 상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따라서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고객을 대할 때 고객의 기본적인 욕구를 파악하게 된다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가 좀 더 쉬울 것입니다.고객의 기본적인 욕구일반적으로 고객은 다음의 네 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첫째, 고객은 이해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서비스를 받는 고객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효과적으로 전달 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고객이 항상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고객의 메세지를 바르게 해석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와이프가 "지금 '도둑들' 이라는 영화가 그렇게 재미있대"라고 이야기 했을 때에는 나는 '도둑들'을 보고 싶으니 같이 보러 가자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대답에 "어 그래?"라고만 대답을 한다면 곧바로 토라질 것입니다.둘째, 고객은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고 싶어 합니다. 마치 친한 친구나 가까운 사람이 오랫만에 방문을 하였을 때처럼 고객도 그런 대접을 받고 싶어합니다. 만일에 이방인처럼 대우를 받은 고객은 다시는 당신을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셋째, 고객은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긍심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는 자신이 중요한 존재로 인정을 받는 것을 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객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고 또한 그들도 그렇게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성공으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실제로 본인이 자주 찾게 되는 단골집의 경우 음식의 맛 보다는 그곳 주인이 나에게 아는 체를 해주며 작은 서비스 하나를 주는 곳인데 서비스 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갔을 때 내가 이만큼 대접받고 있다 것을 자연스레 알리기 위해서기도 합니다.넷째, 고객은 편안함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물리적, 정신적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편하게 기다리고, 휴식하고, 대화를 나누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합니다. 편안함은 이러한 물리적 안정감 이외에도 심리적 정신적인 편안함도 포함되며, 이러한 것을로 말미암아 원하는 바대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고객은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고객의 욕구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고객의 욕구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고객과 공감을 통해 원하는 바를 좀 더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라서 우리는 고객의 욕구를 파악하여 만족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합니다.
『문화주의와 구조주의 비교』1. 문화주의문화주의라는 용어는 현대 문화연구센터의 전 소장이었던 리처드 존슨이 세 이론가 -즉, 리처드 호가트, 레이먼드 윌리엄즈, E.P. 톰슨- 의 연구를 연관시켜 주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이루어진 이들의 연구는 이 저자들의 특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화주의의 기반이 되는 업적들로 보며, 존슨은 이 연구를 연관시켜주는 어떤 특정한 이론적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의 주요한 양상을 깨고 있다. 호가트와 윌리엄즈는 리비스주의의 비판을 시작했으며, 톰슨은 마르크스의 기계적이고 경제적인 형태에서 벗어나고 있다. 이들을 함께 묶는 것은 한 사회의 문화 - 즉 문화의 텍스트적 형태나 기록된 행위들 - 를 분석함으로써, 그 사회의 문화적 작품과 실천 행위들을 만들고 소비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행동과 사상의 유형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과 역동성,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과 갈등 등을 부각시켰고, 또 구조주의가 문화의 조건을 이루는 사회 구조만을 강조하는 것을 비판하고, 끊임없이 창조하고 도전하는 인간 주체의 활동을 중시한다. 이들은 구조보다는 인간에, 이데올로기보다는 일상의 경험에, 지배 계급의 전략보다는 피지배 계급의 전술에 관심을 기울였다.1) 리처드 호가트1930년대의 노동계급의 문화는 ‘풍요롭고 충만한 삶’이라 할 수 있고 강한 공동체의식이 그 특징으로 민중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이다. 이것은 공동체적이고 자생적인 대중문화이다. 예를 들면 대중가요에 대한 노동계급의 선호를 이해하고 대중의 감정적인 요구에 만들어진 문화를 존중하였다. 이는 리비스의 엘리트 위주의 문화에서는 많은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그러나 호가트는 1950년대의 대중문화를 비난하였다. 대중미학을 논하는 대신 대량문화의 조작적인 힘을 증명하는 예를 많이 들었다. 신문만화, TV 드라마, 또 대중소설 등에서 보이는 1950년대의 대중문지 일반적 범주가 있음을 밝힌다.첫째, 문화는 어떤 절대적 보편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인간이 완벽함에 이는 과정이나 그 상태라는 것이다.두 번째, 문서화된 기록들, 즉 기록된 텍스트와 실천행위로 이루어진 문화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과 경험들이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양하게 기록된 지적, 상상적 작업의 유기체이다.마지막은 문화에 대한 사회적 정의인데, 문화는 특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묘사라는 것이다.여기에는 문화를 보는 세 가지 방식이 들어 있는데 첫째는 특정한 삶의 방식의 표현이라는 인류학적인 주장과 두 번째 ‘어떤 의미와 가치의 표현’이라는 것과 세 번째 문화 분석 작업이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특정한 문화에 내재되거나 표출된 의미와 가치들을 명확히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정의는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문화, 특정한 삶의 표현인 문화와 이 특정한 삶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방법으로서의 문화 분석’이며 이는 문화주의의 일반적 관점과 기본과정들이다.그는 문화는 동 시대의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고 해석되어야 된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특정한 시대의 문화는 그 역사적 시기로 전환시켜서 다른 각도의 동시대 해석을 견주어보고 판단하는 것이 ‘실제 문화적 과정’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윌리엄스는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란 개념을 사용한다. 감정구조란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들이다. ‘이 용어는 집단적, 문화적 무의식과 이데올로기의 중간에 있는 그 무엇을 지침 하는데 쓰인다. 윌리엄스는 일상생활의 텍스트 및 실천행위들과 교류하는데서 만들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있는 경험‘을 문화라고 정의하고 있다.리비스와는 많은 부분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먼저 예술을 다른 문화행위와 차별을 두지 않고 취급하였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있는 경험’이라 하여 대중문화에 대한 민주주의적 정의의 기반을 만들었다. 리비스와는 달리 ‘일반 문화’를 요구하여 반리비스적 연구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문화주의의 구조주의적인 측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문화주의 자체를 거부한다.2. 구조주의구조주의는 어떤 문화 현상이나 활동, 산물들은 자족적인 상호 '관계'들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기호체계(systeme signifiant) 혹은 사회제도로 보았다. 이전의 인간중심의 사변적 논리에 머물고 있던 문화주의에 비해 문화의 형성이 전체 사회의 구조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세계는 사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이 구조주의 사고이며, '요소'를 전체와의 '관계'를 통해 파악함으로써, '요소'는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관계'를 인식하려는 사고 방법이다. 즉 부분의 요소는 전체의 구조 안으로 통합이 될 때 의미가 있고, 비로소 인식이 된다. 따라서 구조주의적 시각의 궁극적 추구 대상은 인간 정신의 영속적 구조를, 세계를 체계화하는 범주들과 형식들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이는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연구에서 시작되어 언어학적 패러다임에 기초를 두며, 문화를 언어처럼 구조화 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구조주의자로는 인류학의 끌로드 레비-레비스트로스, 문학과 문학 연구의 롤랑 바르트,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루이 알튀세르가 있다. 이들은 소쉬르의 영향을 받았으면 그의 용어를 사용하여 서로 다르게 연구하였다.1) 페르디낭 드 소쉬르소쉬르는 언어를 단어를 쓸 때 단어 자체의 글자를 의미하는 기표(signifier)와 단어의 개념, 정신적 이미지인 기의(signified)로 나누고 이는 종이의 양면처럼 하나를 이루어 기호sign를 만든다고 하였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인위적이다. 개가 개라는 단어를 가질 어떠한 필연적인 이유도 있지 않고 이는 순전히 관습, 문화적 동의의 결과이다. 의미라는 것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본질적 교류의 결과가 아니라 차이의 관계이다. 신호등을 예로 들어 빨강이 정지를 의미하는 것은 정지라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초록을 진행으로 하. 언어가 만들어내는 의미는 결국 조합과 선택, 유사성과 차이의 관계 속에서 그물망처럼 짜인 상호작용의 결과이다.언어학의 두 가지 이론 접근 방식이 있는데 주어진 언어의 역사적 발전을 연구하는 통시적 접근과 역사상 한 시점에서 주어진 언어를 연구하는 공시적 접근이 그것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과학화를 위해 공시적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나 작품의 연구에 그 구조적 특성에만 초점을 맞추어 구조주의자들이 문화에 대한 접근 방식이 비역사적이라는 비난을 받게되는 빌미를 주었다.소쉬르의 또 하나의 구분은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하였다. 랑그는 언어의 체계, 즉 언어를 조직하는 법칙과 관습이다. 이는 사회적 제도에서의 언어이며 의사소통을 위한 집단의 계약이다. 파롤은 개별적 발화(utterance)로 언어의 개별적 사용을 말한다. 그러므로 랑그와 파롤은 구조와 실제 수행을 말하면 구조는 동일하지만 수행은 이질적일 수 있는 것을 말한다.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연구에서 두 가지를 빌려 오고 있다.첫째, 문화 텍스트나 실천행위의 내재적인 관계들, 즉 의미를 만드는 ‘문법’에 대한 관심이다. 둘째, 의미라는 것은 항상 내재적 구조가 만들어낸 선택과 조합의 관계들이 상호 교류한 결과라는 시각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문화적 텍스트와 작품들 또한 언어를 연구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연구하는 것이다.즉, 구조주의자들은 문화적 텍스트나 작품에 내재하는 규칙들에 대한 연구이고 이는 의미를 존재하게 하는 구조들에 대한 연구이다. 그러므로 구조주의자들은 의미의 생산을 지배하는 규칙과 관습(구조)을 밝히는 이들이다.2) 끌로드 레비-스트로스와레비-스트로스는 원시사회의 ‘무의식적 기반’을 알아내는데 소쉬르를 이용했다. 그는 요리, 예의범절, 의복, 미적 활동 등등의 문화적, 사회적 행위의 여러 형태들을 서로 다르긴 하지만 각기 의사소통의 방식이며 표현의 형태로 보고 언어체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분석하였다. 다양한 파롤의 형태를 에서 일어나는 상호교류의 결과라는 것이다. 남성은 여성이 있음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이다.모든 신화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며 게다가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기능을 가진다고 말하며 이는 사회의 문제와 모순은 마술처럼 해결하려는데 있다 신화는 모순을 추방하고 이 세계를 이해할 만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하나의 문화로서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우리 자신과 우리 존재 사이의 갈등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3) 롤랑 바르트는 프랑스 대중문화에 대한 에세이 모음집으로 대중적인 모든 것들, 레슬링, 장난감,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관광, 과학에 대한 태도 등을 소쉬르의 언어학적 모델을 이용하여 분석하였다. 그의 목적은 대중문화의 텍스트와 실천행위들 속에서 함축되어 있는 것들을 밝혀내는 것이며, 그의 원칙은 ‘명백한 것의 허위성(false obvious)’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부르주아 규범’에 대한 공격이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항상 혼돈되어있는 자연과 역사를 거부하며, 말없이 진행되는 장식적 외양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의 남용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는 대중문화에 기호학적 방법론을 적용시킨 가장 의미 있는 시도이다. 소쉬르의 기표와 기의, 그리고 기호라는 도식에 이차적이 의미작용의 단계를 추가하였다. 일차적 의미작용에서 만들어진 기호는 이차적 의미작용에서 다시 기표가 된다. 외연(denotation 일차적 의미작용)은 내포 (connotation 이차적 의미작용)로 대체시키고 있다.일차적 의미작용(Primary signification)외연적 의미(Denotation)이차적 의미작용(Secondary Signification)내포의미(Connotation)1.9기표Signifier)2. 기의(Signified)3.기호(Sign)Ⅰ.기표(Signifier)Ⅱ.기의(Signified)Ⅲ. 기호 (Sign)이처럼 신화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것은 이차적 의미작용 또는 내포 의미의 단계에서이다. 신화도 언술행위의 한것이다.
미국 현대 사진전 관람기수업이 없는 금요일. 평소 같았으면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 시간이지만 나는 지금 약속 장소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 있다. 시청역 9번 출구로 1시까지. 도착까지 앞으로 10분여 남았다. 벌써 5분 남짓 약속시간이 지났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조금 전에 그녀에게서 2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며 미안하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와의 첫 데이트. 처음으로 그녀에게 함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날. 사진전을 같이 관람할 계획은 없었지만, “사실은 좀더 일찍 그대를... 보고파~.” 하는 이문세의 노래처럼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오래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수업과제 핑계를 대며 사진전까지 같이 관람하게 된 것이다. 내가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도착했고, 시청역에서 갤러리까지 그녀와 함께 걸은 10여분, 제법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따스하게 느껴지던지, 심지어 눈이라도 펑펑 내려줬으면 하는 바램까지 들곤 했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호암 갤러리 이 사진전을 보고 기말고사대체 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순간 긴장하기도 하였지만, 그녀와 함께 있다는 행복감과 순간 내 머리를 스쳐지나간 예전의 기억(처음 과제를 받았을 때, 호암갤러리를 에버랜드 옆 호암 미술관으로 착각해서 하루 날잡아 에버랜드에 놀러갈 생각으로 들떠있었다는...)이 나를 다시금 웃음 짓게 하였다. 티켓박스 앞에서 동국대학교 학생임을 밝히고 50%할인된 티켓2장을 받아들고 전시관 입구로 들어가면서부터 내생에 첫 사진전 관람이 시작되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밝고 조용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문화생활이라고는 기껏해야 극장에서 영화를 보거나 기껏해야 대학로의 연극정도 밖에 경험하지 못했던 나는 극장이나 소극장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기는 이 갤러리란 곳에 들어서자 처음의 긴장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낯선 분위기에 위축되고, TV에서 보아왔던 갤러리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저 건너에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만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전시회를 보고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내 옆에는 그녀 때문에 별다른 내색도 못하고 그녀와 함께 라는 현실에서 힘을 얻어 속으로 잔득위축되긴 하였어도 겉로는 웃으며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간 나는 이내 긴장을 풀고 오히려 자신감까지 갖게 되었다. 한산한 갤러리를 메우고 잇는 것은 교수님의 과제 때문인지 내 또래의 학생들이었고, 간간이 눈에 띄는 낯익은(수업시간에 보았던) 사진들과 작가가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갤러리 안에는 많은 작가들과 사진들이 현실, 정체성, 일상이란 타이틀에 의해 구분되어 걸려 있었는데 솔직히 어떻게 그렇게 나뉘어진 것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진전이라고 해서 멋진 풍경사진을 기대하고 왔던 나로서는 대부분이 인물이나 정물로, 만들어진 사진들 이어서 약간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곧 전시된 사진들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러 작품들 가운데 왠지 모르게 끌리는 작품들이 간간이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현실이란 테마 안의 사진들 가운데서는 정물이나 미니어처를 이용한 사진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지이크 벌먼의 네커 큐브 정물이란 사진은 마치 조각 맞추기 퍼즐을 연상 시켰는데, 일상적인 재료의 배치를 통하여 3차원 형태로 보였다. 작품설명에는 리얼리티 본질에 대한 재치 있는 표현이라고 하였지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흔히 볼 수 있는 작업실 주변의 정물(TV나 선풍기 등)로 감정적 혼란을 나타낸 비자 셀민스의 작품 또한 괜찮아 보였다.허나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이 가게 만든 것은 미니어처들을 이용해서 촬영한 사진들이었다. 로리 시몬즈나 제임스 케스비어의 작품들이 그것이었는데, 로리 시몬즈의 작품들은 대체로 밝은 느낌을 주었고 제임스 케스비어의 작품들은 대체로 어두웠다. 로리 시몬즈의 작품은 인형극을 연상시키는 귀엽고 깔끔한 느낌으로 시선을 끌었다면 케스비어의 작품들은 어두운 색감으로 깔끔하게 표현된 감옥이나 병실 등의 절제된 사진들에서 고독과 소외가 묻어났으며, 왠지 모를 친밀감까지 느껴졌다. 최근 나의 감정의 느낌이 묻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정체성이란 테마 안의 사진들은 대체로 인물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또한 수업시간에 등장했던 사진들이 간간이 눈에 띄어 가장 감상하기에 편하면서 부담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존 코플란츠나 니콜라스 닉슨, 루카스 사마라스, 신디 셔먼과 같은 작가의 사진들이 눈에 띄었는데, 노화된 자신의 신체를 찍은 존 코플란츠의 사진, 솔직히 징그러웠다. 아름답지도 않았고, 하지만 늙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살아 있으며 건재하다는 것을 신체의 일부를 클로우즈업 해서 나타내거나 설정된 포즈로 표현하는 것이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하였다. 뒤로 돌아서 네모난 모양으로 등을 표현한 사진(자화상)을 보았을 때는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보여주셨던, 어떤 여인이 나신으로 자신의 몸을 이용해 원을 표현했던 작품이 문득 떠올랐다.또한 니콜라스 닉슨과 신디 셔먼의 작품들도 수업시간에 보았지만 갤러리에서 직접 보니 새삼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의 부인과 네자매를 표현한 니콜라스 닉슨의 사진에서는 정말 친밀함과 영속성을 느낄 수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정체성을 느끼게 해주는 정말 드라마틱한 사진이었다. 수업시간에도 접해봤고, 이번 전시회의 포스터에 담겨있기도한 신디 셔먼의 사진은 뭐랄까, 어찌 보면 가볍게 보이면서도 메시지를 담고 잇는 것 같았다. 무제 필름 스틸이라는 사진들에서는 수업간에 보지 못했었던 사진들도 볼 수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그냥 분장으로서 재미있는 사진들을 연출했다 하고 느껴진 눈요깃거리였을 뿐이었지만, 갤러리 안에서 다시보게된 신디 셔먼의 사진들은 예전의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새롭게 보였다. 미리 묘사된 정체성에 치용되어, 번쩍이는 겉모습에만 치중하는, 나를 아니 우리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 외의 사진들에서는 신비한 촬영기법이 눈에 띄는 루카스 사마라스의 파노라마라는 사진도 한동안 내 시선을 빼앗았다.일상이란 테마 안의 사진들은 정말 말 그대로의 일상이었다.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말 평범한 장면들, 심지어 어떤 작품들은 평범을 넘어서 진부하게 보이기까지도 하였다. 내 책장 안의 개인앨범을 펼치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진들과 거의 비슷해 보였고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이 아닌 미국이기에 미국사람들 이라는 것 외에는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한가지 특색이 있는 작품이었었다면 월리엄스 이글스턴의 붉은 천장이란 작품이었는데, 붉은 색의 천장에 매달려있는 전선와 백열등이 나타나 있는 사진은 정말 많은 생각을 갖게 하였다. 불타는 사랑을 나타내는 듯 보이기도 하다가, 붉은색의 흥분과, 혼란스러움, 방탕한 퇴락문화까지 느껴졌고, 켜져있지 않은 백열등에서는 황폐함 마져 느껴졌다. 나 혼자만의 느낌일지는 몰라도, 화려한 붉은바탕 한가운데의 꺼져있는 백열등, 스스로 인생의 주인공이면서 주인공 자리에 있으면서, 화려한 배경들과 조연들에 가리워져 허울뿐인 주인공이 된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약간 씁쓸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저 전구가 환한 붉을 밝히면, 그 불빛이 붉은 배경들을 압도하고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언젠가는 나도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전시회 관람을 마무리하였다.
= 목 차 =Ⅰ. 서론Ⅱ. 본론1. 일상생활 속에서 선(禪)을 실천하는 것이 인생.2.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데 선(禪) 이 필요한 곳이 우리 인생 속.3. 내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 삶의 근원적 인 문제를 풀어주는 것이 선(禪), 그리고 인생.Ⅲ. 결론Ⅰ. 서 론선이란 범어 드야나의 음사어인 선나를 줄인 말로서, '고요히 생각하다’는 뜻으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전념 하에 깊게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선은 인도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사유법인‘요가’에서 발전한 것으로, 인도 특유의 기후와 풍토 속에서 자라온 인도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선은 형식과 표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어떤 교리나 이론을 숭상하기보다는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 인간 본성의 진실한 자아로 바로 돌아가 곧바로 부처가 되고, 곧바로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선은,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특히 현대에 들어, 이러한 선의 중요성이 반증되고 있다. 요즘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생활 을 살아가고, 이로 인해 쌓이는 스트레스와 각박한 도심 생활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고자 ‘잘 먹고 잘 살자’는 모토의 웰빙 붐이 급속하게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웰빙 붐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을 얻고, 마음의 양식을 키우기 위한 수행을 추구한다. 국내의 사람들은 물론 외국의 사람들도 그러하다. 사회적으로 큰 명성을 가지고 인정을 받았던 사람들도 선을 알고 실천하기 위해 수행을 한다.) 아래에서는, 인생에 있어서 선이 어떻게 그에 적용되는지 알아보도록 한다.Ⅱ. 본 론1. 일상생활 속에서 선(禪)을 실천하는 것이 인생.선은 각자가‘물을 마셔보고 그 물의 차고 더운 맛을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처럼) 좌선의 실천으로 체득하여 스스로 깨닫고 아는 것이지 책을 읽고 문자로써 이해하고 알음알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바보와 천재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면, 바보에게도 천재와 같은 인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천재는 실천할 줄 아는 자며, 바보는 그것을 모르는 자라는 데 그 차이가 있다. 바보는 자기의 표현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였고 또 실은 표현의 기회가 없었다. 그러므로 표현이라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또 안다고 하는 데에서 멈추면 안 된다. 여기에 우리들은 여러 가지 설명을 더하는 것이다.)한 승려가 마조 선사에게“무엇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바위는 부처나 마음에 관심이 없다. 나무는 진리나 정도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행하여 얻을 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일이다. 산과 나무와 물과 풀도, 몸으로 직접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위의 두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천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이다. 생활에 있어서 실천은 중요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분야에서 큰일을 해낸 사람들은 그의 직접적인 실천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실천은 선의 기본적인 이념에 상응한다.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도, 아내가 무슨 고생을 하든지 간에 책을 가지고 공부만 하고 있었다.) 책으로 학습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러한 학자 중심의 선비들은 책으로 학습하는 것만 중요시 여겼다. 이는 선의 기본적인 사상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책으로 학습한 것을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행위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혜를 얻게 된다. 백 번 보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단 한 번의 실천으로 더욱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즘 학습형태를 보면, 책으로 보는 공부보다 직접 해 보는 경험적인 공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은 예전에 비해 수행평가, 실험 등 여러 가지 학습 형태가 많이 발전하였다. 이는 책만 보고 학습하는 것보다 경험적인 실습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것이다.2.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데 선(禪)이 필요한 곳이 우리 인생 속.현대사회에서, 과학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사람들은 물질과 화폐의 가치를 추구하는 등 점점 마음이 황폐화 되었다. 그리고 급격한 도시개발로 인해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주거의 환경이 전원주택에서 아파트로 변모함에 따라 이웃의 얼굴도 모르고 지내는 등 사람들의 생활이 개인화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황폐화되어가고 있다. 옛 선조들은‘나눔의 미덕’이라 하여 계와 두레를 중요시 여기고 마을 주민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왔다.현대사회의 이러한 마음의 황폐함을 치유하는 대안으로 요즘에는 흔히 웰빙 시대라 하여, 사람들은 선의 수행방법인, 인도에서 그 기원을 찾는, 요가를 많이 찾는다. 그리고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사회 각층에서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던 사람들이 마음의 황폐함을 치유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한국의 ‘선’을 찾아서 오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으로 봤을 때, 그의 능력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눈에 살 수 있는 명성을 가진 그러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마음이 있고, 느끼는 것이 있다. 그는 이제, 겉만 포장된 화려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삶의 질’을 찾기 위해 과감히 직업을 버리고도 머나먼 이국땅에 선을 학습하러 오는 것이다.화엄경)에 “우리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철저히 알고 싶으면 응당히 온 법계의 모든 성품은 오직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 이는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은 세계를 보고, 인식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뒷전으로 둔다면, 물질의 이기만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황폐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 속에서, 수행을 통해 마음의 안온함을 얻은 사람과 또는 그와 반대로 마음의 황폐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사이는, 인생의 종착역에서 양자 어떤 쪽이 보람 있는 삶이었으며, 보람 없는 삶이었는지는 명확히 판가름 난다.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보람 있는 삶과 그리고 마음의 안온함을 얻기 위하여 선이 필요한 것이다.3. 내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주는 것이 선(禪), 그리고 인생.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서 작용한다.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서 사회를 구성하고 이를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서 한 개인 개인의 삶은 사회전체의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 즉, 개인의 삶의 근원적인 문제는 중요하다.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왜 살아가는지 의미부여와 함께 그의 이상(꿈)이 부여된다.자경문)에서 야운이 말하기를, ‘사람은 어리석고 지혜로움이 있지만 도는 성하고 쇠함이 없다.’, ‘ 많은 사람이 도를 부처님 법 안에서 얻었거늘 너는 어찌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는가. 네가 비롯함이 없는 예부터 금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와 함께 하며 어리석음에 빠져서 여러 가지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은 하지 않으니 사생의 업해에 빠졌느니라.’라고 하였다.)이 글에서 야운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어리석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의 차이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가에 따라 달려있다는 말이다.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자신이 어떤 쪽을 선택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부처님은 어진 의사와 같아 병을 알고 약을 주지만,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며, 또 훌륭한 길잡이와 같아 바른 길로 사람을 인도하지만, 길을 따르고 안 따르는 것은 길잡이의 허물이 아니다.어떤 누구든지 이러한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따르고 따르지 않는 것은 각 개인의 의지이다. 단지, 우리의 인생에 부처님이 주시는 가르침의 선은,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삶이고, 어떻게 살아야 그릇된 삶인지를 말이다.올바른 삶은 남에게 베푸는 삶이다. 이는 불교의 ‘자비’의 진리에서 체득할 수 있다. 자비란 불교에서 모든 중생에게 행복을 베풀며, 고뇌를 제거 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남과 함께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는 혼자만의 이기를 부리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남과 함께 공존해야하기 때문이다. 남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해해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 불가피 하다. 여기서 말하는 남에게 베푸는 삶이 선에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교훈이다.Ⅲ. 결 론선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있어서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기본적인 근원이 된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상생활 속에서, 책을 통한 배움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탐구하는 배움이 중요하다는 것과,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를 한다는 것과,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풀어준다는 것에 선이 큰 역할을 한다.선은 세상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에 따라 실천하는 사상이다. 즉, 현상을 보고 스스로 깨달아 창조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는 불교만이 갖는 독특한 종교사상으로 다른 종교나 사상, 학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Ⅰ. 들어가며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이 주시하듯이, 사람은 정치와 분리되어서는 살아갈 수 없다. 정치는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이를 정치현상에 반영하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현대사회는 미디어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인해 대중들의 의견을 보다 폭넓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이렇게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변화된 정치현상을 보면서, 이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정치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현재를 알기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한다는 말도 있다.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고찰하는 것은 ‘수박 겉핥기’식의 공부밖에 되지 않는다.이를 위해서는 정치의 개념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시대?문화와 행위주체에 따라 정치가 가지고 있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Ⅱ. 시대? 문화적으로 본 정치의 개념1. 고대 그리스에서는 정치를 국가에 관계되는 모든 것으로 보는 포괄적이고 전체주의적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정치는 국가와 사회의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활동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민중들은 난폭한 자로 규정하고 철학자가 이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고,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주장하고, 인간을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가진 세 종류로 분류해서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을 분석한 정치관을 내세웠다.2. 중세에는 정치를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종교생활에 부수되는 종교의 하위개념으로 보았다. 즉, 최고의 권력자는 신이고, 정치는 종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종교와 일체적인 광의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왕권을 신권에 예속시킴으로서 신권과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하여 나간 것이다. 이러한 중세의 정치관을 신정 정치적 또는 교권 주의적 정치관이라 일컫는다.3. 절대주의시대에는 상업혁명, 종교혁명, 문예부흥 등으로 인해 교회중심의 기존질서가 무너지고 국가와 개인이 교회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정치의 개념이 축소되면서, 정치란 국가의 권력 작용으로 이해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마키아벨리, 보뎅, 홉스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윤리, 봉건, 종교로부터 정치를 분리하고, 정치란 권력 장악 및 행사의 개념으로 보았다. 보뎅은 정치란 법적으로 정당하게 성립된 주권자의 합법적인 권력행사라 보았고, 홉스는 주권의 표현은 정치라 하여, 신민은 무조건 이에 복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홉스는 자기 보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권자에게 자기의 모든 권리를 양도했다고 보았다.4. 근대자유주의 시대에는 절대주의시대와는 정반대의 정치관이 나타난다. 그 원인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시민 층이 승리함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시대에 대표적 학자는 로크와 몽테스키외, 벤담이 있었는데 우선 로크는, 권력자체를 입법, 집행, 외교권으로 나누어서 입법권과 집행권의 절대 분리를 주창하였고, 몽테스키외는 입법권, 집행권, 재판관의 삼권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벤담은 정치는 더 이상 자유보장 수단이 아니라 자유에 대립되는 악으로 보아, 공리주의 정치관을 강조하였다.5.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시대별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1850년부터 1914년까지는 소위 제도주의 시기로 일컬어져,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식적, 법률적 기구를 통한 권력의 행사만을 정치현상으로 보았다. 이 시대의 이상적 인간이란 제도에 잘 순응하는 인간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1950년이 되면 법률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정치의 개념이 국가와 사회영역을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확장된다. 이스턴은 정치란 “희소자원의 권위적 배분을 둘러싼 활동”이라 보았는데 이는 광의의 정치개념을 상징적으로 시사 하는 것이다.Ⅲ. 행위주체로 본 정치개념1. 국가현상설은 ‘정치를 국가의 활동’이라고 보는 이론으로서, 국가현상전부설과 국가현상부분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대에서 근대 초에 이르기까지는 대체로 전부설에 포함되지만, 현대의 국가 현상설은 부분설이 중심이다.2. 집단현상설은 정치를 국가의 전유물로 보지 않고 사회집단에도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여기에는 집단내부현상설과 상호관계설이 있다.집단의 내부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것이 정치라고 보는 집단내부현상설은, 일원론적 주권론을 부정하고 정치적 다원주의를 주창한다. 또한 주권분할을 통한 새로운 연립주의에 의거한 다원 사회의 형성을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것은 영국에서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커뮤니티라는 영역과 국가라는 영역을 나누고, 국가가 커뮤니티라는 영역에 침입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반면에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정치라고 보는 상호관계설은, 대립투쟁설과 이익조정과정설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대립투쟁설은 민족과 민족간의 대립이라 보는 사회학적 국가론, 노동자와 자본가의 투쟁이라고 보는 마르크스 계급이론, 군산복합체사회와 WASP의 투쟁이라 보는 미국의 권력 엘리트론, 엘리트 집단과 대중 집단의 투쟁이라 보는 지배계급이론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또한 이익조정과정설은 집단이론, 신조합주의, 다원적 민주주의(다두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