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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말약의 이백과 두보 평가D별로예요
    1. 유협(劉 )의 일생자(字)는 언화(彦和). 제량 시기의 문학 이론가로『문심조룡(文心雕龍)』이 대표적 저술이다. 남북조는 중국 문단에 첨차 유미주의적인 문학풍조가 성행하면서 문학론도 더욱 발전하는 시기이다. 유협은《문심조룡(文心雕論)》을 통하여 문학의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강조함므로써 당시에 극성하던 유미주의적인 풍조의 폐단을 바로잡으려 했다. 또한 그는 유가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도가와 불가 등의 사상도 받아들이면서 중국문학비평 이론의 체계적인 서술을 시도하였다.그는 현재의 강소진강(江蘇鎭江)인 당시의 경구(京口)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는 분명하지 않은데 대략 추측해 보면 송(宋)나라 명제(明帝)의 태시(太始) 원년(元年)인 서기 465년을 전후하여 태어나서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보통(普通) 3년인 서기 552년에 사망하였으니, 대략 57세까지 살았던 것 같다.유협은 서족(庶族)출신이다. 그가 어릴적에 부친이 죽어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고생스럽게 독서하였으며, 생활이 빈곤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가 20세쯤 되어서 모친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유협은 몰락한 서족 서생의 처지로서 관직이 없었다. 이 무렵 승우화상(僧祐和尙)이 유협을 발견하게 된다. 승우(僧祐)는 유협의 어려운 처지를 동정하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아껴 유협에게 정림사에서 자신을 도와 불경을 필사하고 정리하는 일을 시켰다. 이때가 대략 서기 487년 전후로서 유협의 나이 23,4세 때였다. 근 10년간 불경 초록 작업을 하였는데 역사 기록에 의하면 『삼장기(三藏記)』『법원기(法苑記)』『세계기(世界記)』『석가보(釋迦譜)』『홍명집(弘明集)』등은 모두 승우가 일생 동안 편집한 대형의 불고 경전들이다. 그래서 유협은 정림사에서 10년간 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다. 492년에 승우가 세상을 떠나고난 후. 유협은 불경 초록 작업을 일단 마루리 짓고 정림사를 떠나 또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유협은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사상을 밝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서를 주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한(漢)나라 때에 경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상세하게 주석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비록 경전에 대한 깊은 견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일가를 세우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은 〈문(文)〉을 연구하고자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협은 〈문(文)〉을 계통적으로 논의하는 저술, 즉 『문심조룡』을 집필하게 되었던 것이다.《문심조룡(文心雕龍)》은 아주 빠른 기간내에 씌어진 책이다. 대략 3,4년의 시간이 걸려 서기 501년 이전에 씌어졌다. 당시 유협의 나이 33,4세 정도였다. 유협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 저술이 사회적 명성이 있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고 곧 심약을 생각하였다. 〈심약(心弱)〉이라는 사람은 제(齊)나라 말년에 황실의 자제인 등의 사람들과 같은 문인 집단에 속해 있었다. 소연은 왕위를 찬위하여 양나라를 세우고 양의 무제(武帝)가 되었다. 심약은 그를 보좌하여 공을 세웠다. 그래서 상서령(尙書令)겸 태자사(太子師傳) 벼슬에 올라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의 학문은 깊었으며, 시문에 틔하였고 제와 양의 문단에 우두머리격이었다. 심약은 이 『문심조룡(文心雕龍)』을 읽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심약은 유협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하여 그를 양의 무제에게 추천하기에 이른다. 심약의 추천은 아주 효과가 있었다. 양무제 천감(天監) 원년(서기 502년)에 유협은 명예직인〈봉조청(奉朝淸)〉을 맡도록 명받았다. 5년 후 유협은 구체적인 관직인 거기창조참군(車騎倉曹參軍)의 직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는 궁정의 차륜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서기 511년 유협은 태말현(太末懸)의 현령이 된다. 기록에 의하면 현령으로 있으면서 정치적 공적이 현저했다고 한다.513년 유협은 전임을 명받고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다. 다시 남강왕(南康王) 소적(蕭績)의 공문서를 처리해 주는 일을 맡았다. 소적은 양무제의 4자였다. 그리고 인위장군(仁威將軍)이라는 이름을 받고 있었다. 유협은 동시에 동궁통사사인(東宮通事舍人)의 임무를 겸임했다. 동궁은 황태자의 거처를 말한다. 이때의 황태자는 양무제의 장자였던 소통(蕭統)이었다. 시호를 소명(昭明)이라 하였는데, 후에 그를 소명태자(昭明太子)라고 칭하였다. 통사사인이라는 직책은 상주문(上奏文)을 상신 보고하는 것이었다. 원래 이 직무는 명망이 높은 사족을 선발하여 그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유협은 이 직책을 겸임할 수 있었으니, 이는 그의 벼슬길에 있어 일대 전진이었다. 이후 유협은 보병교위(步兵校尉)로 승진한다. 이는 황궁의 위병을 통솔하는 직책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유협에게 하나의 명예직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통사사인(通事舍人)의 자리에 있었다.승우가 죽고 난 후 정림사에서 수집된 허다한 불경들은 시급히 정리되어야 했다. 공원(公元) 51년에 양무제(梁武帝)는 명령을 내려 유협과 승려 혜진(慧震)으로 하여금 정림사로 가서 불경을 정리하도록 했다. 이 때 유협의 나이 대략 54,5세였다. 그때까지 유협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20여 년 동안 그는 다만 황태자의 주위에서 일을 했을 뿐이다. 그에게 한가닥의 슬프고 처량한 느낌이 들었으리라. 그는 불경 초록을 완료하고 『중경요초(衆經要炒)』를 편성했다. 그리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출가를 허락해 주기를 청한다. 마음의 뜻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머리를 모두 잘랐다. 무제는 마침내 허락하여 유협은 이름을 혜지(慧地)로 고치고 승복을 입고 중이 되었다. 이로부터 일 년이 지나지 못하여 522년에 이 뛰어난 문예이론가는 세상을 떠난다.『문심조룡(文心雕龍)』제외한 유협의 저작은 오늘까지 남아 전하는 것으로 불교 교리를 논술한 《멸혹론(滅惑論)》과 비문한 편이 전할 뿐이다.2. 『문심조룡(文心雕龍)』이라는 글자의 의미『문심조룡(文心雕龍)』이란 책이름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은 바로 글을 씀에 있어 용심(用心), 즉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문장을 짓는 원리를 지칭한다. 유협은 이 서명에 관해 전국시대 사람 환연(環淵)이 지은 『금심(琴心)』과 왕손(王孫)이 지은 『교심(巧心)』에서 〈心〉을 빌려왔다고 하면서,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교묘한가〉라고 말했다. 『금심』과 『교심』은 모두 철학 저서로서 문학과는 관계가 없다. 유협보다 약간 앞서 진(晋)나라 사람 육기(陸機)는 『문부(文賦)』에서 〈나는 항상 시문을 읽으면서 작가의 용심을 깊이 이해하고자 했다〉라고 하였다. 『문부』의 주요 내용은 바로 〈용심〉에 관한 논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는 예술의 구상 문제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用〉과 〈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육기의 주장이다. 이렇게 볼 때, 『문심조룡』의 서명은 『문부』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조룡(雕龍)〉은 수사(修辭)를 가리킨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추연(騶衍)은 천문(天文)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시대인 추석(騶奭)은 추연이 주장한 이론을 바탕으로 문장을 썼다. 그 문장은 매우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마치 용의 몸에 아름다운 무늬를 새기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추연을 〈담천연(談天衍)〉으로, 추석을 〈조룡석(雕龍奭)〉으로 불렀다. 그래서 그 후 문장과 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조룡(雕龍)〉이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을 「조룡」으로 정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유협은 자고로 문장은 정교하게 갈고 닦음으로써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기 떠문이지, 추석의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붙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유협이 살았던 시대에는 비문학적 문장이나 문학적인 산문을 모두 〈문(文)〉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문〉과 병렬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이 바로 〈시(詩)〉였다. 『문심조룡(文心雕龍)』은 〈문(文)〉뿐만 아니라 〈시〉를 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장의 〈문〉만이 아니라 산문의 〈문〉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다.이렇게 볼 때, 『문심조룡(文心雕龍)』이라는 서명은 문학의 창작 원리와 수사 기교를 뜻한다고 하겠다.3. 문심조룡의 등장배경유협이 『문심조룡(文心雕龍)』을 짓게 된 목적은 다음과 같다.첫째, 진(晉), 송(宋)이래의 문학은 그 내용은 공허 괴이하면서도 수사는 신기 화려하기만 하였다. 유협은 이러한 당시의 문풍을 바로잡고 유가적 사상체계와 형식을 전범으로 하는 문학형식을 선양하기 위해서 『문심조룡(文心雕龍)』을 지었던 것이다.둘째, 위진(魏晉)시기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은 양과 질적인 면에서 비약적 발전과 변화를 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조비(曹丕)의 『전논논문(典論論文)』,조식(曹植)의『여양덕조서(與楊德祖書)』,응장(應場)의『문질론(文質論)』, 육기(陸機)의 『문부(文賦)』, 이충(李充)의 『한림론(翰林論)』과 같은 여러 문학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단편적이어서 문학원리를 규명해 내는 데이는 미흡한 점이 너무 많았다. 따라서 문학비평의 기준을 세워야만 하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에 결국 전면적이고 체계적이며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전문적인 문학비평저작인 「문심조룡」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4.문심조룡의 구성과 내용《문심조룡》은 〈원도(原道)〉편에서 시작하여
    인문/어학| 2001.06.09| 5페이지| 1,000원| 조회(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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