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물가상승률경제성장률실업률GDP(10억원)1인당GDP197113.59.24.43,379.110,957.58197211.74.84.54,171.6124,506.7919733.212.63.95,378.3157,707.53197424.37.94.07,596.7218,975.56197525.26.24.110,228.1289,903.91197615.311.33.913,997.6390,459.98197710.19.53.817,945.5492,845.77197814.5103.224,233.1655,497.85197918.37.73.831,035.8826,871.64198028.7-6.75.237,788.5991,199.77198121.46.14.554,431.31,405,658.1419827.27.24.454,431.31,384,104.6619833.410.94.163,857.51,600,037.5819842.38.63.873,003.61,806,751.4719852.57.14.081,312.31,992,655.4919862.811.03.894,861.72,301,686.3219873.111.03.1111,197.72,671,608.7619887.110.52.5132,111.83,143,199.0719895.76.12.6148,197.03,491,177.6519908.69.02.4178,796.84,170,771.4219919.39.22.3216,510.95,000,713.6919926.25.42.4245,699.65,616,247.6019934.85.52.8277,496.56,278,911.6419946.38.32.4323,407.17,244,458.1319954.58.92.0377,349.88,368,256.7119964.96.82.0418,479.09,192,289.9519974.45.02.6453,276.49,863,698.4919987.5-6.76.8444,366.59,600,244.1319990.810.96.3482,744.210,355,539.8220002.39.34.1521,959.211,103,624.9120014.13.03.7545,013.311,512,014.45그래프는 다음장에....{{{{{우리나라의 GDP와 1인당 GDP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우선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경제는 70, 80, 90년대까지 고도성장을 하였다.1962년에는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었는데, 정부주도하의 성장, 외자도입 및 수출주도형성장의 경제개발계획전략확립의 계기를 제공했다.1960년 대에는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세워, 국민경제의 부존자원, 즉 그당시에 풍부했던 노동력을 활욜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부족한 천연자원과 자본을 극복할수 있었다.1970년대의 경제를 구조적 변화와 고도의 성장의 시기라 볼 수 있다. 중화학 공업 정책이 실시되었고,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이루어졌다. 70년대의 한국경제는 월남전종식과 2차례에 걸친 석유파동 등으로 심각한 외화부족에 직면하였으나 중동건설 진출로 이를 극복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수출증대를 위해 물가, 분배의 왜곡, 재벌의 비대화에 따르는 독점화현상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970년대말의 2차석유파동으로 80년대 전반기는 세계경제는 stagflation을 겪었다. 하지만 85년 이후에는 경기확장, 물가안정이 다소 이루어졌다.경제성장은 80년대초의 안정화정책으로 성장률이 낮아졌었으나, 83년이후 다시 10%대의 고도성장을 나타냈다. 특히 85년 이후 소위 삼저경기(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에 힘입어 3년 연속(86-88) 12%대의 고도성장을 이루기도 하였다.한편 물가는 초반에는 물가가 불안하였으나 긴축재정 금융조치와 수입원자재가격,단위노동생산비등의 생산비가 안정화됨으로서 86년까지 안정세를 보였으며 86년이후에는 달러기준물가상승이 원화가치상승으로 상쇄되어 원화기준 수입물가가 안정되었다. 그러나 87년 이후 노동생산성증가보다 더 높은 급격한 임금상승, 고도성장에 따른 수요압력등으로 물가불안이 재연되었다.1990년대에는 신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3대개혁과제가 성장잠재력의 확충,국제시장기반의 확충,국민생활여건의 개선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목표중 어느것 하나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였다. IMF사태가 벌어지고, 즉,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경제성장률도 감소했다.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같이 누님의 치마 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씨가 그가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당시 이매방의 할아버지 이대조(李大組) 명인은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아버지의 절대적인 반대에도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의 권유로 목포권번에 입문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사교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수 있었던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후 당대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 선생과 이창조 선생에게도 배우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권번을 다녔다. 그러던 중 이매방이 15살 되던 해 목포역전에다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공연을 주도했던 임방울 씨는 함국향씨를 통해 승무 출 사람을 수소문 하였다. 함국향씨는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이매방을 임방울 선생에게 소개하였다. 이것이 이매방의 데뷔 무대가 되었고 이매방의첫 공연 은 관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그로 인하여 이매방은 임방울씨가 이끄는 예술단체에서 한참동안 공연하게 되었다. 그후 이매방선생은 한 번도 한눈 팔지 않고 오직 외길 춤인생을 살아오면 서 이 시대에 전무후무한 명무(名舞)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이매방선생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값어치와 그의 춤이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매방 선생은 평생 외길로 살아온 천부적인 춤꾼이다.이매방선생에게 있어 춤활동은 곧 그의 삶이나 다름없다. 이매방은 제자들에게 전통 춤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춤의 짜임새,모양새 등과함께 춤사위의 혼을 갖도록 사명감을 고취시킨다. 그는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보인다든지 또는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면 처음부터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제자를 걸러서 받지만 오늘날 한국 춤을 추는 사람 치고 이매방선생의 춤을 조금이라도 맛보지 않은 춤꾼은 없을 정도이다. 현재 이매방선생은 그의제자들이 1990년에 결성한 "우봉전통춤보존회"의 대표직을 맡고 있으며 또한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이매방은 1984년 10월 20일에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과, 1995년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을 받은바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공로장 감사장 등을 국내외에서 받으므로써 하늘이 내린 춤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우리 전통춤의 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다.여성적인 미를 기반으로 한 춤을 추는 그는 젊은 시절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만난 미남 경극배우 매란방(梅蘭芳)의 이름을 따 ‘매방’이란 예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는“한국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중동(靜中動)’이야. 여자같은 요염함과 애절함,슬픔과 원통함이 정(靜)이고,남성적인 박력을 통해 발산하는 것은 동(動)이지.‘동’을 기본으로 하는 서양춤은 천만가지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우리춤을 못 따라가.”라고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무용의 제 맛은 ‘곰삭은 춤’에 있다고 말하면서 “젊은 한국무용가들이 창작을 할 때도 한국춤의 원형과 기본을 버려선 안된다”고 후배 무용인들에게 충고하기도 한다.이매방은 전통춤은 무겁게 추어야하며 참참하고 야물게 움직임 하나하나 소심해야 하고,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려도 천근 만근 무겁게 추어야 한다고 말한다.깊이를 알아야 춘다. 마음이 그대로 춤으로 나타나므로 진선미를 생각하며 추어야한다는 것이 그의 춤 정신이다.한국 무용계를 이끌어가는 대가들 중 상당수가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살풀이춤’은 안춘자, 홍금산, 이길주 등이 이수했고 ‘승무’는 신재자, 임이조, 양종승, 김호동, 박종필, 김지립 등이 맥을 이었다.‘승무’와 ‘살풀이춤’을 동시에 이수한 제자는 송수남, 오미자, 박소림, 김진홍, 채상묵, 송재섭, 최창덕 등이 있다.이매방선생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자택에서 거주하고 있다.**이매방의 경력 및 상벌35년 임방울선생 명인명창대회 「승무」출연81년 우봉전통무용보존회 대표(현)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현)88년 88서울올림픽기념무용제 공연9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살풀이춤)예능보유자 지정(현)92년 프랑스 바르셀로나올림픽개막축전 공연(상) 예술문화대상, 문화훈장, 프랑스 예술문학훈장**이매방의 춤#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장관을 이루는 북가락, 세찬 장삼놀음,빼어난 발디딤새의 춤으로 우리나라 민속춤의 정수라 할만큼 품위와 격조가 높은 춤이다.이매방 승무의 특징은 누구나 첫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의 춤은 처음 보고서 대번에 반할 수가 있다. 보고 이해하고 생각하면서 좋아하는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없이 십년지기를 만난 듯 대번 친숙해질 수가 있고, 첫눈에 반한 연인들처럼 무작정 좋아질 수가 있다.그의 승무에서는 흔히 정확한 발디딤, 현란한 장삼놀음, 가슴을 흔드는 북놀음의 특징을 얘기한다. 이런 요소들은 승무라면 으레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이다. 그의 경우 이런 요소들은 그만의 것으로 부각되고 그만의 특징으로 얘기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다.
1.궁중무용이란??궁중무용은 옛부터 "정재(呈才)"라고 불렸다. 정재의 뜻은 '군왕에게 헌기(獻技)한다'. 즉 '예기(藝技)와 재조를 헌정(獻呈)한다'는 뜻으로 궁중의 여러 행사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연희되는 무용을 일컬었다. 따라서 정재는 군왕 등의 윗분에게 바치는 예술적 형태, 가무악의 통칭이라고 할 수 있다.정재에는 향악정재와 당악정재가 있는데, 향악정재는 우리민족의 예술이고 당악정재는 중국민족의 예술이라고 하는 식의 도식적인 해석은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당악정재의 형식(죽간자(竹竿子), 구호(口號), 치사(致詞))의 유무에 따라 당악정재이냐, 향악정재이냐로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악정재 중에도 창작된 당악정재가 있고, 수입된 당악정재가 있는데, 창작된 당악정재에는 몽금척, 수보록, 근천정, 수명명, 하황은, 하성명, 성택, 연백복지무, 장생보연지무, 제수창, 최화무 등이 있고, 수입된 당악정재에는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 육화대, 곡파 등이 있다. 당악정재 중에서 창작된 당악정재가 오히려 많다는 측면에서 볼 때, 조선초기 궁중무용의 창작과정에서 중국의 무용형식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무용을 창작한 측면이 있을 뿐, 그 무용은 우리민족고유의 예술이다. 또한 수입된 당악정재도 우리민족이 지속적으로 연희하면서, 민족의 예술로 흡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향악정재이든 당악정재이든 모든 정재는 우리민족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전통예술이며, 그 보존, 전승의 가치는 대단하다. 뿐만 이니라 독특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는 정재를 통해 현재의 우리예술을 창작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2.정재의 종류@@무고@@무고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시중(侍中) 이혼(李混, 1252-1312)에 의해 창작된 춤으로그 유래를 보면 시중 이혼이 경북 영해에 유배되어 갔을 때 바닷가에서 부사(浮査),즉 물에 뜬 뗏목을 얻어 그것으로 북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굉장한 음향을 내었기 때문에 북을 두드리면서 춤을 추었다고 하여 무고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전한다.무고의 시대적 변천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무고 한 개를 가운데 두고 2인의 무용수가 춤을 추었고, 조선 초기에는 무고를 가운데 두고 무용수 8인이 8개를, 혹은 무용수 가 6인, 4인이면 무고도 6개, 4개를 두고 그 주위를 돌면서 추을 추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무고 1개를 가운데 두고 4인의 원무(元舞)가 긴 북채로 북을 치며 춤을 추면 4인 또는 8인의 협무(挾舞)가 그 주위를 돌면서 원무와 조화를 이루면서 춤을 추었고 1900년대부터는 협무가 꽃을 들고 춤을 추었다.@@학무@@향악정재(鄕樂呈才)에 속하며, 고려 때 발생하여 궁중행사나 나례의식(儺禮儀式) 등에서추어졌다. 조선 성종(成宗) 때는 《악학궤범》에 기록될 만큼 규모가 커졌는데, 연화대무(蓮花臺舞), 처용무(處容舞)와 연이어 공연되는 궁중무용의 대작에 드는 춤이다.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었다.『악학궤범』의 학무는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을 쓰고, 한말『정재홀기』의 학무에서는 황학(黃鶴)과 청학(靑鶴)을 쓰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한편『악학궤범』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초입배열도에 의하면 청학은 동쪽, 백학은 서쪽에 있어 방위의 색깔에 합치되었다.『정재홀기』의 학무에서는 동쪽 청(靑)의 빛깔은 맞으나 서쪽의 빛깔인 백(白)이 황(黃)으로 바뀌어 예전의 형식에서 벗어난 점이 눈에 뜨인다. 그러나 무보는 『악학궤범』의 무보와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다.@@검기무@@전립(戰笠), 전복(戰服), 전대(戰帶) 등의 무복을 입고 4명의 무원(舞員)들이 추는 칼춤이다.원래는 민간 가면무(假面舞)로 행하던 것인데,조선 순조 때 궁중정재(宮中呈才)로 채택되었고, 궁중연희가 된 뒤로는 가면이 없어졌다.신라 창(黃倡)이 검무를 잘 추어 유명했으며 백제의 왕 앞에서 검무를 추다가 칼을 던져 왕을 죽이고 황창 자신은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신라 사람들이 애국소년 황창을 기리기 위하여 황창 모습의 가면을 쓰고 검무를 추기 시작한데서 유래하는 춤으로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가면은 쓰지 않고 여성 무용수에 의해 매우 유연한 춤사위로 공막무(公莫舞), 첨수무(尖袖舞)라는 이름으로 궁중연례에 자주 연행되었으며 각 지방 감영에 설치된 교방청에서 전승되어 지역 명칭에 따른 여러 종류의 검무가 전해지고 있다. 진주, 통영, 평양, 해주, 호남, 함흥, 밀양 검무 등이 잘 알려져 있다.복식으로는 전복(戰服)을 입고 전대(戰帶)를 띠며 전립(戰笠)을 쓴다.@@춘앵전@@조선조 순조(純祖) 때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모친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의 보령(寶齡) 40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하며, 이른 봄날 아침에 나무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자태를 무용화 한 것이다. 중국 당대(唐代)에는 고종(高宗)이이른 봄날 아침에 버드나무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를 보고 감동하여 악사(樂師)(백명달(白命達)에 명령해 묘사한 음악을 짓게 하고 이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춤을 만들었다는 고사(古史)도 전한다. 꾀꼬리를 상징해 노란색의 앵삼(鶯衫)을 입고 화관을 쓰고 오색 한삼(汗衫)을 양손에 매고 화문석 위에서 추는 춤으로 매우 우아하고 미려하며 춤사위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반주음악은 평조 영산회상(靈山會相)에서 상령산(上靈山), 중령산(中靈山), 세령산(細靈山), 염불도드리, 빠른도드리, 타령 등이 연주된다.@@처용무@@신라 헌강왕(憲康王, 815∼886) 때 발생한 춤으로 처음에는 1인이 가면을 쓰고 추었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국가적 행사인 팔관회(八關會)에서 산대잡희(山坮雜戱)와도 연희되었다.조선왕조에 들어서 초기 태종(太宗, 1400∼1418) 때에는 2인이 추기도 했고 그 후 세종(世宗, 1419∼1450) 세조(世祖, 1455∼1468) 양대에 걸쳐 더욱 발전되어 성종(成宗, 1469∼1494) 때에 오방처용무로 완성되어 궁중나례(宮中儺禮)에서 학무(鶴舞), 연화대무(蓮花臺舞)와 합설(合設)해 추었고, 그 후 역대 궁중 잔치에서 연희하면서 전승되어 왔다. 현재 연희하고 있는 처용무는 1926년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아악사장(雅樂師長) 김영제(金寧濟)와 아악사(雅樂師) 합화진 두 선생님에 의해 재연되어 전해진 것이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전승 보존되고 있다.각각 방향을 의미하는 색상 즉 방위색인 남색-東, 홍색-南, 황색-中央, 흑색-北, 백색-西의복식을 입는 5명의 무용수가 각기 처용의 탈을 쓰고 오방으로 벌려 서서 대무하고 계속하여회무한다.@@수명명@@태종 2년 6월에 하륜이 근천정(覲天庭)과 함게 지어 올린 악장(樂章)을 관현(管絃)에 올리고, 무용으로 만든 것으로 당악정재이다. 『세종실록』권58의 14년(1432) 10월 을유(乙酉)조에 의하면 사신연(使臣宴)에 '향악(享樂)을 쓰지 말고, 오로지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하황은(荷皇恩)만을 쓰되 창기(娼妓)와 공인(工人)은 모두 서서 연주한다'라고 되어 있다.『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하면 근천정과 같이 회례연(會禮宴), 동지(冬至), 정조(正祖), 양로연(養老宴) 등에 연주되었고, 그 곡은 『의례경전통해시악(儀禮經傳通解詩樂)』의 남산유대(南山有臺) 황종궁(黃種宮) 25와 같다.
수업시간에 생각지도 않은 비디오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줄거리도 괜찮았고, 뭔가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평소에 미셸 파이퍼를 좋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대되었다.이 영화에서 부부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가족내의 두 사람의 욕구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서로 너무나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서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영화의 한 장면중에서 주인공의 친구들이 부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부부란, 남녀의 차이점을 서로 수용할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두 주인공 벤과 케이트는 서로의 가치관이나 욕구를 서로 잘 수용해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였던 상대의 버릇이나 성격이 참을수 없는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벤은 덜렁대는 왈가닥 낙천주의자에 가깝고, 케이티는 질서정연한 것을 좋아하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던 것이다..점점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간다. 즉, 배우자에게 기대하고 있는 정도의 차이와 근본적인 삶의 방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이 깊어진 것이다.두 주인공은 대화를 나누다가 바로 싸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두 부부가 같이 있을 때 평온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침묵뿐이었다. 서로 좋게 대화를 시작하려 하면 서로 각자의 주장만 하여 갈등 해결은커녕 싸움만 커지는게 일반적이었다. 부부가 싸움하는걸 보면서 케이티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다. 부부간에 안좋았던 과거의 일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은데 그때의 실수를 벤의 모든 행동과 연관시키려고 했다. 즉, 서로 인신공격을 하고, 원인보다는 증상에만 치우쳐 언성을 높였다. 벤은 아내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두 주인공들의 결혼생활은 겉보기에는 귀여운 아이들도 둘이나 있고, 아름다운 집등 남보기에는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자녀들 앞에서는 행복을 가장하고, 서로간에 갚은 골을 만들어 아이들이 없을때에는 고함을 지르기 일수였다. 이들은 아이들 때문에 이혼을 망설이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그것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방도라고 생각되겠지만 아이들을 위한 행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관상의 사람이 아니라 정신적인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았다.영화를 보면서 보는 입장이라 그런지 참 답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사람하면서 조금만 상대방에게 져주면 안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부부는 사로간의 장점도 서로 인정해주고, 서로 다른 욕구도 이해하면서 채워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꼭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단점을 인신공격으로 해결하려는 행동은 피해야 한다고 느꼈다.마지막 장면에서 케이티가 울면서 벤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다시 시작해보자고 하는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부부라는 것... 함께 살면서 서로간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끈이다. 지금부터 괜히 나의 결혼생활이 상상되고, 약간은 걱정된다....^^영화를 보고 많은 것을 얻은 느낌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말씀으로는 두 분은 서로 중매로 만나 몇 번 만나지도 않으시고 결혼하셨다고 한다. 말로만 중매지 사실은 이웃마을에 살면서 학창시절때는 서로 얼굴만 알았다고 하신다. 두 분의 말씀을 들어보면 어쩔땐 정말 어린 아이들이 말하는 것 같이 재미있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시며 친구들 이야기를 하곤 한다. 어쩌면 학창시절때부터 서로 좋아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두분의 성격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점이 많다. 아빠는 약간 폭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너무 극단적일수 있지만 화가 나면 항상 화를 겉으로 표출하신다. 한 마디로 물불 안가리는 성격이라 할까...? 그리고 평상시에는 과묵하신 분이다.반면에 엄마는 처녀때는 부끄럼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랑 같이 살면서 성격이 약간은 변했다고 하신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듯이...아빠보다는 따뜻한 성격을 가졌지만, 엄마도 화를 내시면 무섭다...^^아빠는 엄마보다 질투심이 굉장하다. 수업시간에 질투에 대한 반응을 남자는 화나 분노로 표출하고, 여자는 우울해진다고 배웠는데, 우리 부모님도 여기에 해당된다. 엄마는 아빠께 배제적 질투를 많이 느끼시는 것 같다. 아빠가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시거나 하면 서로 티격태격 하신다.두분의 방어기제형은 치환을 꼽을수 있을 것 같다. 엄마, 아빠가 친가쪽, 외가쪽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괜히 서로에게 잘못을 돌려 갈등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