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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한 부부 이혼하는 부부
    ●목차1 행복한 결혼이란? ... 112 헤어지는 두 사람은 예측할 수 있다 ... 393 원칙1-애정 지도를 상세히 그려라 ... 674 원칙2-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길러라 ... 875 원칙3-상대방에게서 달아나지 말고 진심으로 대하라 ... 1036 원칙4-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라 ... 1257 부부싸움에는 두 종류가 있다 ... 1478 원칙5-해결 가능한 문제는 두 사람이 해결하라 ... 1639 전형적인 다섯 가지 문제의 해결책 ... 18310 원칙6-둘이서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상황을 극복하라 ... 20511 원칙7-함께 공유할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라 ... 223맺는 말 ... 233추천의 말 ... 241저는 평소에 “사랑과 전쟁”이라는 TV프로그램을 즐겨보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마다 어머니는 결혼도 안한 사람이 벌써부터 결혼에 대한 안 좋은 내용을 보면 좋지 않다면서 다른 채널로 바꾸시곤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벌써부터 결혼에 대한 안 좋은 내용을 보면 “결혼에 대한 낭만”이 없어 질것 같은 마음에 요즘에는 잘 보지 편입니다. 항상 결혼이라는 이미지는 대중매체를 통해 상상만 해 왔습니다. 친구들끼리 만나 결혼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나는 호텔 아니면 안할 거야” “어떤 언니 결혼식 가봤더니 음식이 별로더라” “결혼식 꽃도 중요해. 나는 하얀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꽃을 쓸 거야” 이러한 “결혼식”에 대한 얘기들로만 이루어졌지 “결혼생활”의 현실적인 부분은 언급하지도 않았으며 언급이 있더라도 결혼한 친구들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기가 어려웠습니다.하지만 결혼과 가족 수업을 들으면서 결혼의 현실적인 측면으로 공부를 하면서 구체적으로 “결혼생활” 과정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재정적인 것에서부터 미래의 남편의 구체적인 직업과 성격을 다이어리에 적으며 이런 남자와 어떠한 생활을 영위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며 정립하고 있던 행복했던 순간에 이혼에 대한 책을 읽고 레포트를 써야할 날이 다가왔습니다. 정말 낭만적인 멋진 남자와의 결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그 멋진 남자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의 상상에서 이혼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에서 부정적으로만 느껴지던 이혼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혼이라는 것은 다 남의 일이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왔기 때문에 이혼에 대한 많은 책들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목이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골랐습니다. 행복한 부부 이혼하는 부부라는 책으로 세계12개국 언어로 번역, 화제를 불러일으킨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행동철학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어 결제를 하고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부터 이 책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의 구성은 “7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각 장마다 지은이가 실험하였던 부부를 말과 행동을 예시로 담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행복한 결혼에 대한 개념 정의를 시작으로, 왜 부부들이 헤어지게 되는지, 이별의 조짐이나 신호 그리고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또 행복한 삶을 꿈꾸며 결혼했던 부부들이 이혼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와 과정을 조목조목 꼼꼼하게 짚어가면서 이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게 하기 위한 현실적인 원칙 7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해로 그치지 않고 독자들이 현실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행 팁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책을 구성하고 있습니다.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이혼이라는 것이 둘이 원수지간이 되어서 정말 상반된 사람들의 잘못된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저의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전쟁”에서 나타나는 황당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이혼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행동과 대화에서 이혼이라는 결말로 치닫게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결혼 생활의 붕괴는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좋지 않은 첫마디로 언쟁을 시작하고, 부부가 서로 쉴 새 없이 비난하고, 모욕하고, 자기를 변호하거나 상대방에게서 도피하다보면 결혼생활은 틀림없이 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상습적인 대화가 계속 이루어지다보면 어떤 형태를 띠게 되든 관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결혼 생활을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대화가 무익하다고 느껴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또는 별거를 시작해 외로움에 시달리는 경우입니다. 《행복한 부부 이혼하는 부부》는 16년 동안 수많은 부부들을 관찰하면서 얻어 낸 생생한 자료와 이론이 뒷받침된 알찬 내용에 공감이 갔습니다. 원룸에 3대의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부부의 옷깃에 마이크로폰을 달아 가슴의 심장 박동 수까지 체크하는 연구 결과여서 그런지 더욱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여기서 주장하는 “7가지 원칙”은 이혼하려는 부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가 남자친구를 만났을 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남자친구들을 사겨오면서 싸울 때의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나 행동에 대한 잘못된 점과 그 남자친구들이 저에게 잘못한 점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 책을 미리 읽고 실천해 보고 시도해 보았다면 어쩌면 남자친구와 다른 좋은 방향으로 관계가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상대방에게서 들은 모욕의 말을 해독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결혼한 친구가 지금 1명이 있고 올해 안에 결혼 할 친구가 벌써 2명이 됩니다. 특히 결혼한 친구는 너무 예쁘게 잘 살고 있는데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많이 서로를 배려하고 아껴주는구나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고 그다음으로 드는 생각은 당연히 사랑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겠지만 의리, 우정으로 뭉쳐진 “가족”이구나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 대한 지식으로 항상 감정이나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이럴 때 행복해하고 또는 이럴 땐 기분나빠하는 것을 파악하여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결혼한 친구가 이야기해준 것인데, 자신이 일하고 너무 힘든 날이었는데 슈퍼마켓에서 “간장을 사야 하는데” 하고 말했더니, 남편이 딴청을 피우며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 내가 찾아올게” 하더니 뛰어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 그 당시 때에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는 저로써는 반지선물이 더 멋있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반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결혼생활에서의 로맨스로 나타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마음의 교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문/어학| 2008.07.02| 3페이지| 2,000원| 조회(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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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사람들은 본래 선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이런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사회 속의 수많은 미담과 자유, 평등, 평화의 이념들을 지적하기만 하면 된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꾸는 행복한 삶의 이상 속에서는 모든 인간이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고 서로 협력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교육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 그러한 꿈과 이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수많은 폭력과 잔인성의 기록들을 보여주고 있다. 참혹한 전쟁, 살인과 강탈, 약자에 대한 강자의 부자비한 착취와 억압 등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해 온 비인간적 행위들 앞에서 우리는 결코 순순히 인간의 선함만을 또는 악함만을 주장할 수는 없다.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맹자와 순자의 유명한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맹자는 인간의 선척적인 본성은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기어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위험한 상황을 볼 때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측은지심을 지닌다. 인간은 누구나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 성품을 잘 길러 가기만 하면 성인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순자는 인간의 탐욕과 전쟁에 주목하였다. 사람의 선천적 본성은 악이며 선의요소는 모두 후천적인 작위에 기인한 것이다. 순자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임금의 권위를 내세워 예의로써 교화해야 하며, 법도와 규범을 세우고 형벌을 사용하여 나쁜 행동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맹자와 동시대인이었던 고자와 고자의 스승이었던 묵자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악의 구분이 없다고 하여 맹자나 순자와는 다른 사상을 펼쳤다. 묵자는 인간의 행동이 욕구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며 그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음이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와 같아서 그것이 행동을 할까 하지 말까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묵자는 이 백지와 같은 마음에 모든 이를 평등하게 사랑하는 겸애의 정신을 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 사랑하라는 묵자의 가르침은 인간의 본성이 순수한 무의 상태이며, 그 위에 선을 가르치면 평등과 조화의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인간의 본성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인간이 원래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도 명확히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성격을 믿고 그것을 격려하고 추구해 가지만 파괴적이고 악한 성격의 존재를 무시할 수도 없다. 정신 분석학자들은 인간이 원래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을 동시에 지내고 있으며 삶의 본능에서 유래하는 창조적 본성과 죽음의 본능에서 유래하는 파괴적 본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선하고 창조적인 삶을 추구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인간을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이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본성의 발현을 성악을 주장하는 사람은 본성의 억제와 개선을 촉구한다. 원래의 본성이 어떠하든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을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나 선한 성격을 발휘 할 수 있도록 최선의 여건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인문/어학| 2008.05.22| 1페이지| 1,000원| 조회(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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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감상문] 쇼스타코비치현악 4중주단 내한공연 평가B괜찮아요
    쇼스타코비치현악 4중주단 내한공연비전문가로서 쇼스타코비치란 어려운 주제에 도전했습니다. 특별히 쇼스타코비치를 주제로 한 건 주홍글씨라는 영화를 보며 이은주가 연주하던 음악이 너무 좋아 찾아봤더니 쇼스타코비치라는 음악가의 노래라는 것을 알고 흥미를 갖졌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피아노협주곡을 좋아합니다. 피아노 자체의 화려한 표현력과 덧붙여진 오케스트라와의 조화 속의 화음같은 걸 즐깁니다. 그런 연유로 쇼스타코비치의 2개의 피아노협주곡을 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과 다른 클레식 작곡가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는 유머러스한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상대적이긴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듣다가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듣게 되면 좀 지겹다는 느낌까지 듭니다.또 하나의 특징으로 러시아적인 서정성을 들 수 있습니다. 같은 러시아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나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들어보면, 쇼스타코비치의 곡과 함께 유럽 다른 나라 작곡가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드라마같은 서정적인 선율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러시아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서정적 선율에 뒤이은 장엄한 클라이막스도 쇼스타코비치의 곡들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먼저 제가 본 공연소개를 하자면,완벽한 호흡으로 엮어내는 스트링 콰르텟의 진수이며 세월의 흐름 만큼 깊이 있는 음악이 다가오는 현악4중주단이 연주하는 공연을 보았습니다.1967년 창단이래 35년의 전통성과 그 명성을 유지하며, 러시아의 자존심인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인 영감을 이어받은 앙상블로 대표됩니다.이미 두 차례의 내한공연에서 뛰어난 연주력과 풍부한 감정표현으로 한국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단은 이번 세 번째 내한공연에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 보로딘 등 다양한 레파토리를 선보였습니다.감정을 절제하며 음악의 본질을 훌륭히 표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단의 다가오는 공연에서 더욱더 깊어진 그들의 음악세계를 보여줍니다.쇼스타연주하였습니다. 이 전곡은 미국에서는 산타페 실내악 축제에서 여러 다른 미국 사중주단과 함께 연주되었고, 또한 동경에서 오지 홀의 개관식에서도 연주되었습니다.이들의 음반에는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단이 녹음한 대략 50여 장의 CD와 LP 앨범은 영국의 올림피아社, 러시아의 멜로디아社, 독일의 더치 그라모폰社, 이탈리아의 리콜디社, 미국의 MFSL社, 일본의 도시바 EMI社와 새크램보우社에서 발매되었습니다.안드레이 시슬로프 (제1바이올린)은,1945년 모스코바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이고르 베즈로드니와 수학하였습니다. 그는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단의 창단멤버로서, 여러 곳을 다니며 연주를 하였고 다수의 콩쿨에서 수상하였다. 쉬쉬로프는 러시아의 소설가 미하일 불가코브의 작품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에 관해 다수의 글을 출간한 바 있으며, 여러 곡의 현악 4중주곡을 편곡하였다. 현재 모스크바 음악원 출강하고 있습니다.세르게이 피추긴 (바이올린)는1941년 동 시베리아의 찌타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크와 셈존 스닛코프스키와 수학하였다. 글린카 현악 사중주단의 멤버로서 많은 해외 연주 활동을 가졌으며, 벨기에 리에주 국제 현악 사중주 콩쿨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는 1977년 알렉산더 발라쇼프를 대신하여 쇼스타코비치 현악 사중주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그는 서른 개국 이상에서 연주를 하였고, 세계 곳곳의 음악제에 참가하고 많은 수의 음반을 녹음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부가 주는 상을 받은 적이 있으며, 현재 모스크바 음악원과 이폴리토프 이바노프 음악원에 출강하고 있다.알렉산더 갈코프스키 (비올라)1944년에 태어나 1969년 모스크바 음악원를 졸업한 후 미하일 테리안과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1979년에 쇼스타코비치 사중주단에 합류하여,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게보우, 런던의 위그모어 홀 등의 유명한 공연장에서 연주하였습니다. 현 모스크바 음악원에 출강하고 있습니다.알렉산더 코르차긴 (첼로)모스크바에서 1945년에 태어 볼레슬라보비치는 화학 기사이고, 그의 어머니 소피아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는데, 그들은 음악과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쇼스타코비치는 뛰어난 음감과 기억력을 지닌 천재였다.그는 8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3살 때는 페트로그라드(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니콜라예프(Leonid Nikolayev)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스타인버그(Maximilian Steinberg)로부터 작곡을 배웠으며 유명한 작곡가이자 그 음악원의 학장이었던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그는 1925년 졸업작품으로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그 작품은 호평을 받아 레닌그라드와 베를린, 필라델피아에서 연주되었고, 그로인해 쇼스타코비치는 막 탄생한 소비에트연합의 새로운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소련 정부는 쇼스타코비치가 유용한 정치적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20년 대, 소련문화부는 자본주의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데 열심히였고, 기꺼이 쇼스타코비치에게 콘서트홀과 무대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1930년 대 초부터는 상황이 바뀌어 쇼스타코비치의 아방가르드적인 형식과 눈에 띄는 하모니, 조소적인 스타일은 스탈린 정부로부터 심한 비판받게 되었다.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비록 청중들에게는 인기있는 작곡가였지만, 정부로부터는 그만의 테마를 포기하고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들도록 강요받게 되었다.이후로 그의 삶은 한편으로는 수많은 상을 받고 볼세비키혁명의 위대함을 음악적으로 외국에 알리는 화려한 삶은 사는 반면, 정부로부터 생명을 위협당하는 위선적인 명령을 따라야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가 세계적으로 더욱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정부로부터의 압박은 커져만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겪는 스트레스 또한 커져 갔다. 쇼스타코비치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실질적으로 이미 어린시절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희미해져 있었다. 그는 1917년 학살의 증인이었고, 192향곡 4번은 정치적인 이유로 30년동안 초연을 못하기도 하였다. 교향곡 7번(레닌그라드)은 나치에 항거한 레닌그라드시(市)에 헌상된 작품이다. 교향곡 8번과 10번은 그의 가장 완벽한 교향곡으로 알려져있다.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맥베스부인'은 스탈린의 분노를 샀지만, 오늘날에는 아주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발레곡인 'The Golden Age'와 'Bolt' 또한 재치있는 곡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초기 작품은 말러(G.Mahler)식의 오케스트라 형식를 띠었지만, 후기 작품 중에는 실내악 형식이 많다. 실내악 가운데 주목할만한 것들로는 피아노 5중주, 피아노 3중주 1번, 형악 4중주 8번, 현악 4중주 15번이 있다.쇼스타코비치는 1975년 8월 9일,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루어졌고 뛰어난 작곡가의 죽음에 세계언론은 애도를 표했다. 예술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운으로 이름을 얻은 다른 소련 작곡가들과는 달리,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소련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연주되고 사랑받고 있다. 자기표현을 막는 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피어난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은 청중들의 경외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작품위주로 쇼스타코비치의 생애는 페테르부르크음악원 출신의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11세 때 글랴세르의 음악학교에 들어가 정규의 작곡공부를 시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인 1919년에는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 L.니콜라이에프에게 피아노를, M.시타인베르크와 A.K.글라주노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25년에 졸업하였다. 졸업작품인 《제1교향곡》은 소련뿐 아니라 세계 악단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하였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A.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제2교향곡》(27) 《제3교향곡》(29), 그리고 《피아노·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33) 《피아노전주곡집》, N.V.고골리에 의한 오페지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공적인 활동을 엄하게 비판하는 소리가 서방측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작 능력은 전혀 쇠퇴하지 않았으나 몇 차례의 심장 발작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그것은 '비올라 소나타 op. 147'을 완성한 직후였습니다.1927년이래 정부는 그에게 10월혁명을 기념하는 '교향곡 제2번'의 작곡을 요청했습니다. 그것이 체제파 작곡가로서의 기묘한 인생의 출발이었으며, 그것은 놀라운 봉사와 징계의 되풀이에 의해서 특징지워지게 됩니다. 수년간의 성공 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1936년 1월 26일 프라프다지에 의해서 음악이 아니라 엉터리이다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동명의 러시아의 위대한 고전 작품(1865)에서 착상을 얻은 것이었으며, 그는 '교향곡 제5번'에 의해서 명예를 회복하였고, '피아노 5중주곡(1940)' 과 히틀러의 침공에 대한 레닌그라드의 시민을 찬양한 '교향곡 제7번(1941)'에 의하여 계속해서 스탈린상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나 1948년에 즈다노프 비판에 의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의 정의는 또다시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1945년작 '교향곡 제 9번'에 타격을 주었습니다. '숲의 노래(1949)'에 의해서 다시 인정을 받았으며, 1962년 에프투셴코의 시를 사용한 '교향곡 제 13번'으로 스탈린 지배하의 러시아 사회주의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재난 반유대주의, 억압, 일상의 불안, 출세주의를 공격하였고, 그의 작품은 공연 금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교향곡은 가사의 일부를 수정한 후에 러시아에서도 재상연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보다 자유롭게 작곡할 수 있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의 예술은 러시아인의 영혼을 그 미묘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표현하려고 애썼고, 불안한 건강 상태와 분명히 비관주의적인 성격의 쇼스타코비치는 보통은 극적이고 장엄하지만 가끔 삐걱거리는 해학적 감흥에 몸을 맡기기도 했습니다.초기부터 서양의 전위음악, 특히 쇤베르크, 스트라빈스니다.
    독후감/창작| 2004.12.07| 13페이지| 1,000원| 조회(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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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현대속의 역사
    목숨을 걸고 쓴다-조선시대 기자 이야기-현재 회장이 구속중인 신동아그룹의 '대한생명 사태'가 어제오늘 언론에 다시 등장하고 있지요. 정부의 부실금융기관 지정을 코앞에 두고 현 이사회가 미국 자본을 끌어들여 독자 경영을 하겠다고 전격 결의하자, 금융감독위원회는 예정대로 부실로 지정하고 기존 주식을 모두 소각하는 등 독자 경영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요. 대한생명 경영진의 행위는 회생을 위한 정당한 몸부림으로 보이기보다는, 재벌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책임을 피해가며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갖가지 수단을 부리는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비치고 있지 않습니까.재벌 문제 보도와 관련해 지난해 MBC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회장의 비리에 관한 보도를 하자는 보도국 방침이 정해졌는데 그 직후 해당 재벌측이 '보도할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등 결사적으로 로비를 해 댄 것입니다. '보도한' 내용이 아니라 '보도할' 내용이란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MBC의 담당 데스크는 심지어 방송으로 나갈 기사 내용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재벌측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경악했다고 합니다.MBC는 취재진이 옳다고 판단,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그 뉴스를 단독 보도했습니다. 지금은 그 회장의 혐의가 드러나 구속, 재판 중이니 MBC의 보도는 재벌이 로비할 때 쏟아놓은 변명이나 협박과는 달리 사실임이 판명나고 있습니다. 재벌 등 힘있는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언론사에 전방위 로비, 협박을 서슴지 않고 있는 하나의 예를 말씀드렸습니다. (MBC를 재벌 등이 소유하는 이른바 '민영화'하자는데 저 같은 방송 현업 근무자들이 강력 반대하는 이유도 이런 데 있습니다.)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니 상황은 훨씬 심각한 것이었지요. 정론을 '목숨 걸고 쓴' 조선시대 언론인의 예입니다.연산군 때 기사관(記事官) 김일손은 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당시 막강한 여당이라고 할 수 있는 '집권 훈구파'의 거두 이극돈에 관한 기록을 맡았답니다. 이극돈은 김일손당하는 곳이다. 대개 관직에 바로 서용되는 장원급제자를 제외한 문과급제자들을 능력과 나이를 고려해 이 네 관청, 즉 사관에 배치하고는 실무를 익히게 한 것이다. 이를 분관(分館)이라 한다. 이때 실무를 익히는 자들에게 주어진 명칭은 권지(權知)니, 오늘날 시보(試補) 내지 임시 대기직인 셈이다.이때부터 문과의 신급제자는 삼관(혹은 사관)의 선배에게 신고 절차를 밟아야 했다. 선배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거나 예를 다하지 않을 때는 유가를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신참의 유가는 일반적인 대감 행차와는 달리 선진자(先進者; 선배 관료)를 만나면 말에서 즉시 내려 예를 갖추어야 했다.후배 돈 우려내는 면신례삼관에 골고루 배치된 과거 급제자는 배속된 부서의 고참이나 선생(당해관서 관직 역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인사를 다녀야 한다. 이때 신참은 자신의 신상을 적은 자지(刺紙; 일종의 명함 종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 한 번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한테만 가는 것도 아니니 이는 고역이었다.이때 자지가 두껍고 큰 것이 아니면 안 되는데, 대개 무명 한 필로 자지 석 장을 겨우 바꿀 수 있었으니 그 비용 부담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새내기들의 경제적 부담이 과도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의 신고식은 좀더 합리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도 있다. 요즘은 신고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새내기를 맞이하는 고참이 부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아무튼 조선의 신참들이 감내해야 했던 이러한 행위를 투자(投刺) 혹은 회자(回刺)라 칭하며 이를 통하여 선배 관원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통 투자는 허참이나 면신의 예를 행하는 기간에 같이 했다.선배들은 인사 온 신래들로부터 우려낸 돈으로 면신례와는 상관없는 훗날의 잔치에 대비한다. 복숭아꽃이 필 때면 교서관에서 주관하는 홍도연(紅桃宴), 장미가 피는 초여름에는 예문관에서 열리는 장미연(薔薇宴), 여름에는 성균관에서 취하는 벽송연(碧松宴)이 그것이다. 이런 이름의 잔치는 원래 삼관을 중히 여긴 국왕이 가끔 내려주는 치하고 맞이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아예 면신연(免新宴)은 이 수(數)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또 새로 감찰이 된 자를 신귀(新鬼)라 부르며 희롱하고, 또 몽둥이로 때리는 등 육체적인 가학도 허다했다. 이러한 형식의 면신례가 다른 관직에도 파급되더니, 급기야 그들이 부리는 아전이나 종들도 신참이 들어오면 면신례를 치르게 하는 등 조선사회가 신고식 천지로 변하게 되었다. 또 아직 관직에 들어서지 못한 생원·진사들에게까지 신고식 문화가 파급돼 새로 생원·진사가 된 자에게 침학하는 풍속도 생겼다. 이를 접방례(接房禮)라 했는데, 음식을 차리고 주악(奏樂)을 동원하는 방법이 면신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참을 따지는 방법조선 관료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먼저 관직에 들어선 선진자(先進者)를 만나면 반드시 뜻을 굽혀 예를 갖추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이는 신·구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위계질서를 잡는 관료주의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그러나 같은 해 같은 과에 급제한 동기생들은 동방(同榜) 급제라 하여 매우 돈독한 사이가 된다.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철저히 지키는 유교 사회에서도 동기생끼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친구가 됨은 물론이다. 이 역시 동기생과 선·후배를 따져야 하는, 위계질서가 굳건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 고시파들이 법원이나 검찰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철저히 따지는 분위기와 비슷하다.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건도 있었다. 성종 8년 3월에 문과에 급제한 이세좌는 당연히 유가(遊街) 행차에 나섰다. 급제는 그때 했지만, 그는 이미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으로 있었다. 이세좌의 유가 행차에는 당연히 사간원 나장들이 따라 나섰다. 그런데 앞장서서 벽제(除; 거리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행위)하던 나장들이 길 가던 주부(主簿; 종6품) 최융(崔融) 등 몇 사람이 행차 앞을 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종자들의 머리를 휘어잡고 욕을 보이고 말았다. 이는 이세좌의 당시 관직이 대사간(정3품)이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대사간이란 간쟁을 맡은 사간원의 장관이다. 조 최창대는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면신례란 통과의례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박태한에게 서신으로 “귀신 같은 행동을 이미 면하지 못했고, 조롱하고 장난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남을 따라 같은 행동에 휩쓸린 것이 많았으니, 형과 더불어 거취를 같이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고 적어 보내기도 했다.춘추시대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사냥에서 순위를 재는 일종의 행사)을 하면 자질구레하지만 풍습이기에 공자도 따랐다는 고사가 있는데, 당시 면신례를 보는 사대부들의 눈은 공자의 엽각과 다름없었다. 퇴계의 생각도 이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관례를 무시한 간 큰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흉내낼 수는 없는 것이었고, 또 계속 아웃사이더로 살아간 것도 아니었다.면신례의 사회사적 의미아무튼 조선의 신래들은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나면, 한층 성숙한 조직원이 돼 일체감과 소속감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들만이 가지는 엘리트의식 속에서도 철저하리만큼 동료애를 발휘하는 동료의식이 내재하고, 이기심을 버린 이타심을 바탕으로 국왕과 대신들에게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키워 가는 것이다.따라서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 면신례라는 통과의례는 경제적 침학과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도를 넘을 때 부정적 기능도 나타났지만, 이런 의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기능도 무시할 수 없음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조선시대 선비정신이란 것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엔 부정할 수 없다. 언제 관직을 그만두어도 양반 신분으로 향촌사회에서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 이것이야말로 선비정신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경제적 바탕 위에서 면신례 등을 통한 일체감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그 사회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개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다원화된 정보화사회에서 전통적인 신고식 문화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오늘날은 조직의 질서나 사회통합 같은 가치관보다 개성과 각자의 다양한 재능이 존중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자자손손 지배층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근간이 됐다. 이들은 음서와 공신전을 통해 고려 말 권문세족이 누렸던 것과 같은 특권과 경제적 이득을 독점하는 자기부정의 길을 걸었다.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의 5남 방원이 정국을 주도하는 데 불만을 품은 4남 방간은 칼을 뽑아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형제들끼리 흘린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인 정종 2년(1400) 1월에 동복(同腹)형제들끼리 명분 없는 살육전이 벌어진 것이다. 제2차 왕자의 난은 박포가 주살되고 방간이 토산으로 유배된 다음달 방원이 세제로 책봉됐다가 그해 11월 방원이 즉위하는 것으로 정리됐다.두 번의 난리 끝에 방원이 즉위했으니 공신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즉위 직후인 태종 1년 정월에 책봉된 46명의 좌명공신이 그들이다. 좌명(佐命)은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사람을 도왔다」는 뜻인데 이번에도 막대한 공신전이 지급됐다. 9명의 1등공신 중에 사촌지간인 이저(李佇)와 그 아비 이거이(李居易), 그리고 처남 민무구·무질 형제 등 방원의 인척 4명이 포함돼 있는 것은 제2차 왕자의 난의 성격이 이성계 일가 내의 왕위계승권 다툼이었음을 잘 보여준다.태종은 재위 4년(1404) 11월에 개국·정사·좌명공신 모두를 대청관(大淸觀) 북쪽에 모여 회맹하게 했다. 태종이 회맹시의 서약문에 미리 서압(署押)만 하고 모임에 나오지 않은 것은 이때의 회맹을 바라보는 일반 사대부와 백성들의 곱지 않은 시각을 의식한 제스처인지 모른다.사실 회맹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각은 개국공신들의 회맹 때와는 사뭇 달랐다. 권문세족의 특권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집권한 조선이 겨우 개국 10여년 만에 권문세족 같은 공신층을 형성하게 됐으니 공신 회맹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조선국왕 신(臣;방원)은 개국·정사·좌명공신 등을 삼가 거느리고 감히 황천의 상세와 종묘 사직과 산천의 여러 신령에게 밝게 고합니다… 마땅히 충성과 신의와 성실로 그 마음을 굳게 맺어서 길이 종시(終始)를 보존해야 하는것이다.
    인문/어학| 2004.01.19| 18페이지| 1,000원| 조회(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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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 절두산 답사기 평가B괜찮아요
    내가 절두산 순교성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친구가 ‘죽음과 종교“라는 교양수업을 듣고 나서 당시 교수님께서 순교에 대한 수업을 하시면서 절두산 순교 성지 이야기를 하셨었는데 꼭 한번 가 볼만한 장소라고 얘기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 얘기를 들은 정도로는 도저히 가 볼만한 의욕이 나지 않았었고 ’언젠가 가볼 기회가 있으면..‘ 하는 식으로 미뤄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사 입문‘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고 답사를 갈 기회가 되어 답사를 가게 된 것이다.합정역에서 절두산 천주교 성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주변이 온통 주택가였기에 ‘이런 곳에 정말 성지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렵게 찾은 성지는 매우 깨끗하고 조용했다. 종교가 없는 나에게 ‘천주교 성지’라는 곳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절두산 천주교 성지는 ‘성지’라기 보다는 ‘공원’같은 곳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깨끗하게 정돈된 풀밭과 풀밭 여기저기 설치된 조형물들은 내가 마치 작은 공원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하였고, 성지 뒤쪽으로 보이는 한강은 작은 공원에 여유로움을 더하고 있었다.절두산 성지 입구 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절두산’이라고 새겨진 큰 바윗돌이었다. ‘절두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머리를 자른 산’이라는 뜻이여서 굉장히 끔찍하고 무섭게 느껴졌으나 조용한 성지 앞의 바윗돌 앞에서는 왠지 숙연하게 느껴지게 되었다.그러고 바로 절두산 순교성지에 관한 내용을 담은 돌을 발견하였는데 그 곳에서 절두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역사를 알 수 있었다. 1866년 봄 병인대박해로 처형당한 순교자 가운데 9명의 프랑스 성직자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1866년 9월 25일 프랑스 함대가 군함 2척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의 서울의 문턱인 양화진에 나타났다고 한다. 당시의 전제자였던 흥선 대원군은 ‘쇄국양이’의 결심을 굳혀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한편 이미 양이에 의해 더럽혀진 국토는 그들을 끌어들인 천주교도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더욱 심한 박해를 가하였으며, 전국에 선참후계의 영을 내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자행하였다.특히, 절두산에서는 수 천의 유명, 무명 신자들의 목이 베어져 한강으로 집어던져 졌으며, 목이 잘린 산이라 하여 이후부터 ‘용두’라고 불리던 산이 ‘절두산’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당시의 기록 미비로 현재 30명의 순교자만이 이름을 전하고 있으나 1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순교했다고 한다. 정말로 피로 국토를 씻어내듯이 절두산은 피로 빨갛게 물들었었다고 하며 그 피가 땅속으로 스며들어 한강까지 피가 흘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의 한적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장소였던 것이다.당시의 절두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오르막길을 오르자 한참 공사중인 건물이 하나 나타났고 그 앞에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이라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기념상은 한명의 손을 묶인 순교자가 서 있고 그 뒤에 2개의 사람 얼굴이 있는 것이었는데 그 순교자의 표정은 모든 것을 자신의 종교에 바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뭔가 체념한 것 같으면서도 뭐든지 다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설명에 의하면 석상은 세명 가족의 순교자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다시 몸통 위에 받쳐 놓은 형상으로 옛날 절두산에서 벌어졌던 처절한 순교 광경을 연상시켜 주는 작품이다.그 기념상으로 보면서 예전에 순교를 한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는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순교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는 신념과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마치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의 순교자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으리라.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바로 옆에는 양초들을 모아 놓은 단상이 있었고 그 옆으로 성모 마리아 상이 보였다. 성모 마리아 상은 조금 높은 곳 동굴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두운 동굴 안에 있어서 그런지 하얀 성모상이 더욱 하얗고 더욱 성스럽게 느껴졌다. 그 근처엔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것 같은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양초를 올려 놓은 단상에 많은 양초들이 타고 있었는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절두산을 방문하여 켜고 간 것일 것이다. 양초들의 색은 매우 다양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등등 아기 주먹만큼 작은 양초가 플라스틱 투명한 단상 안에서 타고 있었는데 절두산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무채색 적인, 성스러우면서 조금은 딱딱한 느낌이었다면, 이 양초들은 재미있고 귀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순교지의 마음처럼 강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꿋꿋하게 잘 타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양초 단상 바로 왼쪽으로 공원이 보였다 공원의 한 가운데에는 ‘김대건 신부’의 큰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솔뫼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 이나시오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심 있는 삶을 시작하였다. 그는 1836년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문과 신학을 익히고 1845년 8월 17일 사제로 서품되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는 한국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많은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산교활동을 하였으며 1846년 9월 15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한 면에서 종교적인 면 외에도 김대건 신부님과 수많은 순교자들에 대해 내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순교지에는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정말 신앙을 가지고 찾아 온 듯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위에 이야기한 동굴 속의 성모 마리아 말고, 공원 안에도 성모 마리아 상이 하나 더 있었는데 몇몇 아주머니들께서 성모 마리아의 손에 이마를 대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모슨 기도를 하시는지 그 모습이 너무나 간절해 보였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화를 낼지 모르나 그 모습은 마치 자식을 위해 절에서 기도를 드리는 아주머니들의 모습 조상 님께 기도를 드리는 아주머니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같이 갔던 친구는 ‘우상 숭배’라며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그러한 생각 또한 다른 하나의 종교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둘이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김대건 신부님의 상 옆쪽으로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십자가의 길’ 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예수님의 고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겨내셨다는 내용의 돌 조각판이 석상처럼 쭉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그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처럼 울퉁불퉁하고 불편하여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마 그곳을 지난 많은 천주교 신도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았을 것 같다. 앞에는 한 할아버지께서 돌 조각판들을 하나 하나 읽으시면서 지나가고 계셨는데 그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그 길을 음미하듯이 걸어가고 계셨다.그리고 공원 안쪽으로 더 걸어 들어가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의 절두산을 방문했다는 내용과 함께 요한 바오로2세의 동상이 보였다. 1984년 5월 3일이었으니까 대략 19년 전에 방문을 했다는 것인데 매우 유명한 일이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 어려서 그랬었는지, 천주교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그랬었는지 절두산에 답사를 가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매우 놀랐다. 또한 역시 어디든지 많이 다니게 되면 많이 배운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 또한 할 수 있었다. 요한 바오로2세가 다녀갈 정도였다면 매우 의미있는 장소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요한 바오로2세는 이곳을 찾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이곳에서 아마도 많은 감동을 받았으리라. 당시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김대건 신부님의 성인의 자리에 오르셨다고 한다. 많은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아마도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공원을 마주보고 있는 건물 쪽에는 박물관이 하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피숑 신부님의 1920년대 사진 전시회” 준비로 휴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나는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십자가의 길’ 쪽의 공원으로 가서 한강을 바라보았다. 절두산은 꽤나 높은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한강이 한 눈에 탁 트이게 보이진 않았지만 강바람을 맞으며 서있으니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듯 했다.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두산의 옛이름이 ‘가을두’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강변의 명승지로 그 풍경이 뛰어나서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고 중국 사신들이 오면 빼놓지 않고 다녀갔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강이 보이는 쪽으로 주차장이 있고 고가 다리가 있어서 시원한 느낌을 지금은 느낄 수 없지만 이러한 것들이 없었을 예전에는 너무나 멋진 풍경을 자랑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많은 순교자들이 보면서 죽어갔던 그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으나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마음을 접고, 자전거 도로에서 친구와 사진을 찍으며 절두산 답사를 마무리했다.
    인문/어학| 2004.01.19| 4페이지| 1,000원| 조회(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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