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무엇이며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진리란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에 우리는 참인 것 내지는 항상 참인 것이라 얘기할 수 있다. 수많은 철학자들도 제각기 그에 대한 정의, 분석하지만 어느 하나가 꼭 옳다고 만은 얘기하기 어렵다(물론 그 중에 진짜 진리를 말하는 ,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짧은 나의 지식과 보잘 것 없는 노력에 비추어 보면 그러하다). 모두다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부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너가 또는 내가 생각하는 진리가 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리에 대한 몇몇 소제목을 가지고 진리란 무엇이며 그러한 진리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이론과 실천, 참고 문헌의 한 책(1번)에서는 진리의 문제를 두고 이론과 실천이란 대목에 관한 글을 쓴 것을 읽어보았다. 이론의 고찰을 통해서 실천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을 행함으로써 부족한 부분, 잘못된 부분을 보완해 나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의 가설은 실천을 통해서 반드시 객관성, 진리성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은 오늘날 우리 삶의 아주 커다란 믿음이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 과학이 한 단계 나아가 과학철학에까지의 학문발전을 가져옴으로써 과학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충분한 객관적 지표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학에 있어 하나의 가설은 실천을 통해 경험적으로 검증됨으로써 객관성, 진리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속에서의 이론의 재검토, 재반성, 고찰을 함으로써 또 다시 발전하는 것이다.(이론과 실천은 서로 상호보완적 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종극의 객관성, 진리성은 어디 있으며 무엇인가? 또 과학이란 객관성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인간이 가지는 지식, 인식능력은 계속 무한히 발전하고 있다. 과학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절대적 이론이라고 생각했던 사실들이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그것이(절대적 이론이라 생각했던 사실들) 좀더 충실하고, 완전한 이론 내지 정반대의 또 하나의 새로운 이론으로 바뀔 수도 있다(이와 같은 논의는 두 참고문헌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껏 통용되던, 믿어왔던 진리들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가? 물론 절대적일 수 있다.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만 모두 다 그런 것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며, 현시점의 절대적 진리를 영원, 불변한, 고정된 것으로 보면 안 된다고 감히 말해 본다. 그러므로 절대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으며, 지금까지의 진리는 상대적 진리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절대적 진리,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항상 참인 것, 고정, 불변의 참 진리인 것이다. 무엇을 항상 진리라고 볼 것인가? 상대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했다. 절대적 진리의 개념을 한 시점에서 결론, 단정 짓기에는 불안, 불확실한 것이고 그 모든 상대적 진리 개념의 총체속에서 절대적 진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마냥 따르기에는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가장 큰 믿음의 량을 가진 최후의 상대적 진리가 절대적 진리에 가까울 것임에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진실되고, 진리이고, 믿음직한 것으로 생각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인식능력, 지식, 과학의 발전방향이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법이 있는가? 기존의 과학적 사실, 진리가 오히려 옳을 수도 있지 않은가? 다른 잘못된 사실의 진리를 옳은 것으로 착각해서 그것이 옳다고만 생각해왔던 사실이 다시 제자리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ex)어떤 미흡한 과학적 지식 정확성이 높은, 세련됐다고 생각했던 지식 한 단계 이전에 알고 있던 과학적 지식)항상 참인 것, 고정 불변의 참 진리는 있는 것인가? 어느 시대, 조건, 환경을 막론하고 언제나 그것은 그대로인 부동의, 불멸의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진리는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우리가 한 대상을 파악, 인식할 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져보고서 파악한다. 또 다른 철학자들은 선험적, 선천적 사고의 작용, 기능, 구조에 의해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모든 것의 파악을 마음으로 한다고 한다.( 사가 , 사유 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오감은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객관성을 띤다고 보기 어렵고, 그 오감의 신뢰성도 실수 내지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으며, 종교적 개념의 깨달음을 마음을 통해 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오감을 통한 대상의 진리 파악은 대상의 본 진리의 상이라고 본다. 이 상(相)들의 상대적 진리에 해당하는 항상 변하는 것이고, 본 진리 의 개념이 항상 불변의 절대적 진리인 것이다.(※여기서 본진리, 참진리, 진리는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였습니다.)진리의 개념 규정자는 우리 인간이다. 지금의 수 많은 논의들도 인간의 틀안에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 현상에 존재하는 우리가 진리라고 일컫는 것은 과연 신뢰성이 있는가? 진리라고 말할 땐 어떤 객관적, 절대적 개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럼 그 개념의 규정하는 자 내지는 신뢰할 만한, 근거지을 수 있는 곳 또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현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틀밖에 있는 어떤 객관적 지표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차원에서는 신 이라 일컫는 절대자가 있다. 그들이 진리를 말하고, 행함을 현상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깨우치려 하지 않는가? 우리를 진리를 깨닫고 절대자(절대적 존재, 물체,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것)와 같은 위치에 섰을 때 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아도 진리를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만 보이질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현상을 통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상이 실재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진리파악이 불가능하다. 즉 현상이 있어야 진리파악이 가능한 것이다. 현상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좀 더 말하자면 진리파악의 필수적인 것이라 하겠다.결국 진리의 파악은 제3의 입장(인간의 틀에서 벗어난, 예를 들면 절대자와의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거나, 스스로의 어떤 벗어남. 소위 말하는 도 를 텄다는 것)에서 가능하고 또 현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相)들의 존재조건아래 진리파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1. 진리개념 (하이데거)《명제 진리로서의 진리》학문의 위기가 학문의 본질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을 간파한 하이데거는 학문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모든 학문이 인식 의 엄밀함을 이상으로 한다고 볼 때, 그 엄밀함이란 진리 획득을 목표로 하는 인식의 한 양 태로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그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리 이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진리의 근거와 본질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2. 명제 진리로서의 진리진리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두 가지로 특징짓는다. 첫째 진리는 명제 속에 있다. 즉 대상의 의미를 표 상하는 주어와 술어의 결합 속에 진리가 있다. 학문이 진리를 목적으로 하고, 그 진리가 명제 속에 있다면, 학문의 인식은 참인 명제들의 연관에 그 본질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학문적 진리의 본질이 명제 진리인가? 우리는 진리의 본질 에 대한 물음을 통해 학문의 본질에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진리의 본질은 지성의 사물에의 일치에 있다. 즉 명제로 표현되는 지성의 인식은 대상과의 일치를 통해 그 진리가 획득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전통적인 진리관이 파생적이라고 비판 하면서 이러한 명제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전제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먼저 전통적인 진리 개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자기지각력1. 자기 지각이란 무엇인가?다스림의 기초가 바로 자기 감정을 지각할 줄 아는 능력이다. 알아야 다스릴께 아닌가? 소크라테스의 명언인 "너 자신을 알라"도 사실은 EQ의 핵심인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기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인식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아는 것이란 너무나 뻔한 것처럼 생각된다. 도대체 자기가 자신의 감정을 모른다면 누가 아는가?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진정으로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모르고 있거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감정을 제대로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가령 화가나서 "아무개를 녀석을 요절 낼꺼다!"하고 길길이 뛰는 사람보고 주위사람이 "일단 화를 갈아 앉히고 생각해라"고 충고하면 "내가 화가 나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을 본다. 주위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이 화가 나 있음을 아는 데 자신만 분노에 매몰되어 자신의 감정도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 사람은 한참 뒤 분노가 가라앉고 난 뒤 "아까는 정말 화가 나서 미칠 뻔했다"라고 답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 중 많은 것이 언어로 표현될 수도 없는 미묘한 것이 많다.▶ 이러한 자기 인식 능력을 심리학자에 따라서는 자신의 사고 과정을 인식하는 것, 즉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초(超)인지(meta coginition), 자기 감정을 살피고 인식하는 것을 초(超)기분(meta mood)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이 있을 때, 우리의 정신은 감정을 포함한 경험 자체를 관찰하고 검증할 수 있게 된다. 동양 고전에서 "一日三省" 이라고 함은 잘못을 반성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을 살피라는 뜻이다. 즉 의도적으로라도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을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상담이나 심리치료의 최종 목적이 바로 자기 통찰(self insight)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에 도달 "많은 사람들은 자아가 진정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기존의 관념이나 감정에 사로 잡혀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진정한 내적 느낌이 무엇인지, 혹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스스로가 모르고 사는 것이다. 오직 두뇌의 이성적 판단만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머리와 가슴, 즉 사고와 감정의 조화로운 협주이다."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구분되는 인지수단이 있다. 그 하나는 완전히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감각능력이다. 한 예로 우리가 한 잔의 차를 마실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맛과 온도를 느끼고, 그것을 삼킬 때 어떻게 목구멍을 통과하여 흘러 들어가는가를 느낀다. 이러한 것은 감각적 경험으로서, 이 감각적 경험을 통해 사실들을 파악한다. 차를 즐긴지 15분쯤 후에 또 다른 감각적 체험이 가령 땀이 난다든가 하는 것을 느끼면, 그 때는 두뇌가 작용한다. 차를 마셨는데 왜 땀이 날까?라는 추리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이러한 예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감각능력과 두뇌의 이해과정이 별개의 기능이라는 사실과 두뇌의 이해과정은 감각적 인지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감각경험이 정확해야 두뇌의 판단도 슬기롭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일 수 있다. 두뇌에 각인된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여 감각적 경험을 왜곡한다. 관념의 지배에서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에 우리는 정확히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은 바로 관념의 작용을 멈추게 하는 수련방법이다.앞서의 명상연습에서 실제로 십오분 내내 의식적으로 호흡하고 그것을 헤아린 사람이라면, 감각이 관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직접적인 체험이 정확한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감각에 대한 인식력이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감각에 대한 인식이 높다면 감정의 흐름에 대한 인식도 높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래서 동양의 참선수행이나 단전호흡은 자신의 호흡에 대해 인식의 초점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하게 하거나, 화두를 들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분노를 더욱더 크게할 뿐이다. 따라서 2차 3차 분노가 터져 나오게 된다.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을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도 악화된다. 또한 카테콜라민에 의해 혈압은 상승하고 혈관이 좁아져 혈액의 흐름 속도를 빨리하기 때문에 혈관 벽에 상처를 입게 되고 이것이 여러 차례 지속되면 이것이 심장이나 혈관질환이 발생하게 된다. 분노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힘이 생겼지만 동시에 자신도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분노는 인간이 환경에 대처하는 극약 처방이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하는 정서이며 따라서 조절되어야 하는 것이다.분노는 경우에 따라 수시간 동안 지속되기도 하지만 2차 3차 분노가 이어지지 않는 한 대부분의 경우 20분 이후 정상화된다. 카테콜라민의 1회 방출효과가 20분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레라린은 일단 방출되면 몇 시간 동안 긴장과 흥분을 지속시켜 재차 삼차의 분노가 쉽게 촉발될 수 있도록 신체를 준비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난 사람을 대할 때는 일단 그 사람과 20분 이상의 냉각 기간을 가져야 하고 서너 시간 동안 2,3차 분노가 폭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이성이 회복되었을 때 논리적 설득을 해야 한다. 자신이 화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화가 났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냉정을 찾는 일부터 해야 한다. 화가 난 상태에서 저지른 일은 거의 대부분 비합리적인 것으로 자신에게 유리할 게 없다.앞에서 배우자(애인) 말다툼으로 흥분이 고조되었을 때 취할 가장 현명한 방법이 "20분 쯤 휴지기간을 두어 일단 흥분이 다소 가라앉은 뒤 대화를 한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화를 잘 내는 기질: TYPE A 성격러시 아워 때의 교통체증, 불친절한 여점원을 대한 경우, 이유없이 월급이 깍인 경우와 같은 스트레스 상황을 접하고 흥분을 하느냐 않느냐, 그리고 어느 정도로 흥분하느냐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질에 따라 다르다. 분노에 대해 연구해차츰 줄어들게 되고 더불어 그에 대한 신경도 둔감해진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불안을 소화해 내고 불안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도 커지게 된다.심리학자인 멜빈 킨더(Melvyn Kinder) 박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거나 규모가 큰 파티에 초대되어 갈 때면 신경과민성 흥분상태에 빠지는 한 환자의 치료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개발하였다.나는 그에게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는 공간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 다음 그때 그의 마음상태가 어떠한지 상상해 보도록 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얼마나 흥분하게 되는가를 깨달았다. 그 흥분을 의식적으로 느껴보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나의 지시를 받고서 그는 그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조금씩 흥분이 줄어들었다. 덧붙여 그에게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자신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짧은 대화만 나누고 등을 돌려버리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했을 때에도 그의 흥분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었다.불과 몇 달 안 지나 그 환자는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기분이 전보다 훨씬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그는 자신의 수줍음을 외면해 버리지 않고 오히려 과감히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이다.이런 방법을 구체화 시킨 치료법이 단계적 둔감화 요법이라는 불안치료법이다. 이 방법에 대해서는 별도의 공부가 필요하다.④ 감정지향적 극복3-불안을 유발하는 사고를 중단시켜라(사고 중단법)불안감 역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든가, 이러한 상황을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 올라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하는 명가지 기법이 있는 데 그 중 하나가 사고 중단법이다.자신에게 불안을 유발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라. 위험이 올 것이다라든가, 자신이 못난이라는 류의 생각이 불안을 유발한다. 이런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그만"이라고 소리치고 자리이 하고 있는 일을 열정과 즐거움으로 하는 것, 즉 자기동기화야 말로 성공의 열쇠이다. 설사 원하는 만큼 도달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성공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2. 긍정적 사고와 낙관주의의 위력즐거운 상황에서 즐거워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실패, 좌절, 역경의 상황에서도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태도이다. 이것이 낙관주의이다. 낙관성을 가진 사람이야 말로 항상 자신의 일에 즐거움을 가지고 몰입할 수 있다. 토마스 에디슨은 어떤 실험에서 100번 실패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조수에게 101번 째 실험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 때 조수가 "선생님 100번이나 헛일을 하고도 또 다시 실험합니까? 이제 그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라고 했더니 에디슨은 "아니야 어떻게 하면 안되는지 100가지나 알았으니 성공에 가까워진 거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바로 이 희망을 잃지 않는 낙관적 사고가 발명왕 에디슨이 있게 한 원동력이다. 참으로 천재는 1%의 IQ와 99%의 EQ로 만들어진다. 다음에 낙관주의의 위력을 말하는 몇가지 예가 있다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Martin E. P. Seligman) 박사은 미국의 88올림픽 대표팀 수영 선수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먼저 성격테스트로 평소의 성격이 낙관적인가 비관적인가를 조사했다. 다음에 이 선수들의 주 종목 기록을 측정하였다. 선수들이 물에서 나왔을 때 실제 기록보다 좀더 낮추어서 그들에게 알려준 다음, 다음의 기록 시도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아보았다. 낙천적인 선수들의 경우 평소와 다름없이 좋은 기록을 낸 반면에, 비관적인 성격의 선수들은 뚜렷하게 기록이 떨어졌다.다음은 셀리그만 박사가 미국 최대의 생명 보험 회사인 메트로폴리탄 라이프사의 보험 판매 사원들을 상대로한 연구이다. 이 회사의 보험 판매 사원의 3분의 1가량은 대개 입사 3년 이내에 직장을 그만두고 있었다. 보험가입권유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다.
성리학적 인간관과 인본주의1.성리학적 인간관1)성리학적 인간 이해성리학은 천지만물로 불리는 사물의 본질을 '자연'으로 말한다. 자연의 상태는 '스스로 그러한 것'으로서 경험의 세계에 드러나 있는 일상적 모습을 말한다.자연이 존재하는 원리이자 방법인 도를 '일용평상'으로 설명한다. 자연으로서 사물은 물건인 동시에 사건으로 존재하게 된다. 성리학에서 인간의 선한 본성으로 말하는 인 의 에 지는 관계맺음을 욕구하는 단서들에 근거하여 설명된다. 즉 인의예지는 측은, 수오, 사양, 시비라는 네 개의 단서에 근거하여 설명된다.관계속의 맺음:: 성리학에서 삶의 목적: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러움'에 기초하여 욕구를 실현하는 것사후에 삶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경우에도 세속의 기준을 좇아 그들은 죽은 사람을 제사지낼 때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음식을 마련하고 인사를 드리고 마음을 전한다.또한, 성리학은 실천의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관계맺음으로 나타나는 변화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들은 욕구의 충족이 변화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욕구의 충족이 적절함을 얻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한다.①사물의 세계②인간의 세계③인간과 인간의 관계인간의 독자성 ▷ 인륜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것삼강과 오륜삼강 : 인간관계를 본말의 차원에서 파악하여 상하의 질서를 규정하는 것오륜 : 인간관계의 본질에 따른 욕구 실현의 원칙을 규정하는 것오륜 ①부자유친 ②군신유의 ③부부유별 ④장유유서 ⑤붕우유신2)성리학적 인간관의 구조삶의 주체로서 인간성리학적 세계관에서 사람은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생겨난 만물에 속한다.사람은 만물 중에서도 생명을 받고 태어난 생물에 속하며, 생물 중에서도 인명을 받고 태어난 인물에 속한다.::이치로서의 전체와 현상으로서의 개체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통합적 관계에 있게 된다.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성'은 '심'과 '생'으로 구성되어 있다.'사람의 성'은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통체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하늘로부터 성을 부여받고 태어난 수명자의 모습을 갖는다. 따라서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은 이미 규정되어 이다. 사람이 갖는 부분자적 직분 등은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의 도리는 하늘에 의해 주어져 있는 것을 따르는 것에 있다. 이때 사람의 모습은 전체에 의해 모든 것이 규정되어져 있는 수동적 존재이다.삶의 역할로서 직분::성리학적 세게관에서 사람은 천, 생, 인,이라는 통째로부터 천명, 생명, 인명을 받아 그것 을 성분으로 하여 태어난 부분자이다.사람이 부분자적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선하게 되거나, 악하게 되는 구별이 생기는 것은 사사로운 마음, 즉 이욕 때문이다. 부분자가 갖고 있는 욕구의 본질은 천리로서 순선한 것 이다.개인은 그에게 주어진 삶의 주재성에 바탕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부분자적 직분을 깨닫고 수행함으로써 개체의 실현, 즉 입신양명을 실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입신양명은 입지, 입신하여 스스로를 닦고, 입덕, 입공 , 입언하여 스스로를 불후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하늘의 명을 완성하는 입명이다. 이처럼 사람에게 부여된 직분을 완벽하게 수행함으로써 하늘의 경지를 구현하여 자신을 완성하는 것, 이것이 곧 유교적 삶에서 이상으로 여기던 성인이요. 현인의 모습이다.사람이 부분자적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선하게 되거나, 악하게 되는 구별이 생기는 것은 사사로운 마음, 즉 이욕 때문이다. 부분자가 갖고 있는 욕구의 본질은 천리로서 순선한 것이다.삶의 무대로서 세속:: 세속이라는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구체적인 삶의 무대는 '家(가)'라는 통체가 중심이 되 어 있다. 본가 업가 국가 등의 '가'가 세속적 무대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고 개인은 '가'의 소속원으로 존재한다.사람들의 삶이 '가'라는 무대를 통해서 실현되기 때문에 '가'의 파괴는 곧 삶의 파괴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가'의 파괴였다. 맹자가 불효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자식이 없어 대를 잊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가'의 단절과 파괴를 경계한 말이다. 국가에서도 가장 무거운 죄인을 다룰 때에는 죄인의 '가'를 파괴해 버림으로써 영원히 삶의 의미를 상실토록 만들었다.삶의 평가로서 역사:: 유교적 삶은 통체부분자적 세게관과 家(가)중심의 가치체계 속에서 '나'와 '우리'의 실현을 도모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이것은 주체로서 '내'가 갖고 있는 수명자와 주재자의 자격, 역할로서 '나'와 '우리'를 실현하기 위한 부분자적 직분, 무대로서 현세 중심의 세속적 공간과 시간, 평가로서 후손에의한 역사적 심판이 정연한 삶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나'와 '우리'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의 관심은 결국 '가'의 '성공'과 '실패'에 집중되었고, 그들이 도달하고자 했던 최종목표는 '가'의 완성, 즉 '입신양명' 이었다.2.유교적 인본주의와 家(가) 중심의 가치체계1)유교적 가족주의의 성격::유교적 가족주의는 부자, 부부, 형제, 관게를 축으로 친애욕과 성애욕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게를 중심으로 권력욕에 바탕한 권위주의적 질서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은 "친함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계는 "하늘에 근거한 본래적 관계"로 이해 된다.유교적 가족주의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혈친관계를 중심으로 '가'를 구성하고 운 영한다. 이런 관계로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남계혈통이 '가'를 이해하는 일차적 기준 이 된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이 속한 족속이 근본이 되는 '가',즉 본가가 된다.유교적 가족주의에서 부부는 혈친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성애에 기초하여 짝을 지어 '가'를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가'의 중심이 혈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성은 자녀를 생산 하여 혈친 관계로 진입해야만 가족의 정당한 구성원으로서 실질적인 자격을 갖게 된다. 이런 까닭에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녀를 생산하여 혈친 관게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로 인해 여성은 남편의 아내로서 이해되기보다는 주로 자녀의 어머니로서 이해되었다.2)유교적 가족주의 구조'가'라는 구성원으로서의 가장과 가족, 생업으로서의 가업과 가산,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가 례, 종교로서의 가통과 가묘, 역사로서의 가보와 가승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체적이고 완결 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①家(가)의 목표국가를 중심으로 실현되는 문화적 생명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이것은 '선조'와 '나'와 '후손'의 역사적 관계성 속에 존재한다. '나'의 도리는 이것을 잘 갈고 닦아 온전 히 보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이를 통해 역사가 계승되고, 문화가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속에 있는 '내'가 국가의 문화적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충의 직분을 실 천하는 것을 '몸을 일으켜 세우는 도리라 하여 효의 완성으로 보았다.家(가)의 목표는 家(가)에 속해 있는 소속원들에게 역사적 당위로서 주어진다. 家(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家(가)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를 적극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의무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의무는 윤서에 따른 구체적 직분과 직책으로 부과된다. 家(가)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직분과 직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본가에 대한 요와 국가에 대한 충이다. 가족들은 이러한 직분과 직책에 헌신함으로써 가세를 일으키고 가성을 떨치고, 가격을 높여 家(가)를 번성케 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생명을 실현함으로써 家(가)에 속해 있는 '사람의 생명'을 실현한다.
컴퓨터와 인간이 같을 수 있는가 ?컴퓨터와 인간이 같을 수 있는가 ?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컴퓨터와 인간이 같다.' 라는 것의 의미부터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설의 행복한 생각을 보면 데카르트는 기계론자인가? 어떤 면에서 그는 철저한 기계론자이다. 살아있는 동물조차도 복잡한 자동기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동물인 이상 기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에 조그맣게 쓰여진 단서 조항을 눈여겨 보지 않는다면 "인간의 신체는 스스로 스프링을 감는 기계이다. 이것은 영구적인 운동의 살아있는 이미지이다. 영양공급은 열이 일으키는 운동을 유지한다. 음식이 없으면 영혼은 수척해지고 미쳐서 고갈된 채 죽는다."는 라메뜨리의 말에서 데카르트적 울림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데카르트는 "이성"이라는 단서 조항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전적으로 기계가 되는 데서 구제해 내고 있다. 인간의 몸은 전적으로 기계의 규칙을 따르지만 인간은 몸 외에 별도로 영혼을 갖고 있다. 인간을 기계로부터 구분 지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영혼"이라는 말속에 들어있는 형이상학적인 무게에 압도되지 말자. 일상언어에서 "영혼이 없다."는 말을 어떤 경우에 자주 사용하는가? 무엇보다는 일차적으로 쾌락이나 고통과 같은 느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동물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을 죽이는 것은 단지 기계를 부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고통으로 깽깽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그런 반응을 하도록 프로그램 되었을 뿐이다.동물이 기계라면 기계적 방식을 통해 동물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동인형을 제작 할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18세기에 프랑스의 기술자 보캉송이 만들은 오리는 마시고, 먹고, 소화하고, 꽥꽥대며 울고, 헤엄을 칠 수 있었다. 또 그가 만든 플루트주자는 열두 가지 음을 연주하는데 손가락, 입술, 혀를 움직였다. 그가 만든 템버린을 치는 소녀와 만돌린 주자는 머리를 까딱이며 숨을 쉬기도 했다.기계는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고 그래서 항상 우리 인간의 명령에면에, 기계는 특정한 일에 대해 특정한 배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처할 만큼 많은 장치가 한 기계 안에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이것은 존 설John Searle이 "생각하는 기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져온 "중국방의 논변"과 기본적으로 같다.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일련의 한자배열을 다른 한자 배열로 체계적으로 변환하는 규칙 집합을 가진 어떤 방,"중국어방"에 갇혀 있다고 가정하자.문틈으로 들어오는 한자 배열을 가지고 주어진 규칙집을 이용해서 새로운 한자배열을 만들어 문틈으로 내보낸다. 안에 있는 사람이 규칙집을 잘 알고 있어 작업이 능숙하다면 밖에 있는 사람은 방안의 사람이 중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중국어방 어디에도 중국어에 대한 이해는 없다. 여기서 진행되는 것은 기호들의 형태나 "통사론"에 기초하여 기호를 조작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해란 "의미론" 즉 그 기호들이 표상 하거나 의미하는 바를 알 때 이루어 진다.설은 컴퓨터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이 중국어 방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유사하다고 전제했다. 즉 기호를 형태에 기초하여 규칙적으로 지배하고 조작하는 것이다. 중국어 방안에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없듯이 컴퓨터 안에도 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로봇에게 "과일을 가져 오라"고 명령했을 때 그 로봇은 과일을 가져올 것이다. 사람에게 그렇게 시켜도 가져올 것이다. 동일한 결과를 산출한다면 로봇도 그 의미를 이해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그럼에도 왜 로봇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일까?한 사물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사물을 단순한 "반영"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일이 거울에 비쳤을 때 거울은 그 과일을 이해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울은 과일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왜 그런가? 대상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부분 귀납적인 추론을 통해 얻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물론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행동양식 (예를 들어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거나, 졸리면 잠을 잔다.) 의 경우 어느 정도 연역적인 공식을 이끌어 낼 수 있지만, 인간의 다양한 행동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다.(배가 고프다고 해서 모두가 밥을 먹는 것은 아니고, 상황에 따라 매우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이런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야 한다면, 그 공식은 수많은 데이터에 의존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게다가 인간의 사고는 이런 공식만을 따르지는 않는다. 같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행동이 다를 수 있고, 또 같은 결과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 과정이 서로 틀릴 수 있다. 물론 이것들까지 공식화 할 수 있다면 문제 될 게 없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행동을 구현하는데 이렇게 엄청난 데이터가 필요하다면, 인간의 다른 다양한 활동을 표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중국어 방 논증에서 말하는 튜링 기계의 문제점은 사물,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튜링 기계는 오직 문제를 분석하고 그에 맞는 답을 구문론 적으로 내뱉는 것 뿐 이다. 이 역시 인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이에 대하여 '인간도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반박 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인간도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학습에 의해 반사적 으로 답을 내뱉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하지만, 인간의 고차원적인 활동의 대부분은 매우 추상화되어 있으며 이는 이미 알고 있는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즉 그 사실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이 대부분이다.또한 컴퓨터와 인간의 결과가 같을 수 있는지 살펴볼, 예를 들어 야구에서 투수를 모델로 한 기계가 있다고 하자. 매우 정밀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겉보기에는 전혀 구분 할 수 없다고 하자. 따라서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으레 사람이거니 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매우 힘들다. 몇몇 사람들은 인가의 정신적 속성과 같은 것이 고차원적인 물리적 모델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하기도 한다.하지만 그것은 우연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고차원적인 물리적 모델을 만들기도 쉽지않다.'인간과 같은 컴퓨터'.......앞서 말한 문제점을 극복한다면, 이론적으로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화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컴퓨터가 인간과 완벽하게 같아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무용하다고 생각한다. 컴퓨터에게 인간이 수행하는 능력을 똑같이 해내고, 인간의 감정과 같은 반응을 출력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신이 완벽한 존재라고 우리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컴퓨터가 인간과 비슷한 능력을 수행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컴퓨터가 인간과 같아지리라는 발상 자체를 재고해 봤으면 한다. 물론 인공지능이 한없이 발전하여, 많은 SF 영화와 소설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하더라도 컴퓨터는 어디까지나 인간과는 다른 존재일 뿐이다. 같은 세계를 공유해야 하는 라이벌이 될 수도 있고, 동반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 내에서 나누는 종처럼 - 황인종이니, 백인종이니 하는 것처럼 인간과 로봇이 그런 종 개념으로 묶일 수 있는 상황도 가능하다. 그런 상황이 도래했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유연한 사고로 대처하는 것일 뿐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며 독보적이고도 유일한 존재이고자 하기 때문에, 컴퓨터를 절대 인간 과 같은 급으로 끌어올리지는 않을 것 같다.'컴퓨터가 과연 인간과 같아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현재로서는 인공 지능이 인간 수준의 심성 능력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로 논의되고 있는 것 같다. 컴퓨터-인공지능이 표상을 체계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비트로 이루어진 기호를 알고리즘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 지능의 가능성을 기호와 알고리즘의 두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우선 기호에 대해서 살펴보자. 튜링 테스트나 중국 알고리즘 역시 또 에러를 낼 가능성을 존재한다. 점점 향상되는 알고리즘은 존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의 완벽한 알고리즘은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2000년을 사는 우리에게 계산기는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기계이다. 오히려 계산기는 컴퓨터에 비해 단순한 기계로 취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계산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런 기계의 존재는 불가능한 일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또 계산기가 발명된 초기에만 해도 그 많은 양의 계산을 빠른 시간 내에 해낼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계산기로도 못해내는 수준의 계산을 컴퓨터로 해결할 수 있다. 인간의 심성 구조를 알고리즘화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수준의 알고리즘도 수많은 개선 과정을 거친 후에는 인간 수준의 심성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알고리즘이 만들어진다면, 그때 사용되는 기호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호와는 다른 개념의 기호일 수 있다. 지금은 0과 1의 2비트로 이루어진 기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다른 개념의 기호가 등장해서 인간의 심성 구조를 단일하게 표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개인적으로는 인공 지능이 인간 수준의 심성 능력을 수행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컴퓨터가 결코 인간과 같아질 수는 없다. 대신 무한대로 가까워질 뿐이다. 마치 기본 쌍곡선에서 x값이 0에 가까워질수록 y값은 y축에 무한대로 가까워지지만, 결코 y축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컴퓨터에게 어떤 계산을 수행하게 했을 때, 그 계산이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것일 경우, 컴퓨터는 에러를 낸다. 그 버그를 잡으면서 컴퓨터의 알고리즘은 개선된다. 이 과정은 수없이 반복되면서 알고리즘이 향상되는 것이다. 인공지능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인간의 단순한 심성부터 따라하면서. 복잡한 수행에선 에러를 내겠지만, 그 에러를 잡아나가는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면, 인공 어한다.
Ⅴ.「거짓말이다」- 거짓말의 윤리적 의미 -Ⅰ. 서 론1.1. 거짓말의 의미거짓말의 의미나 평가는 한결같지 않다. 우리 속담 속에서 거짓말에 관한 것을 찾아보면, 「거짓말도 잘하면 오히려 논 닷 마지기보다 낫다」, 「거짓말이 외삼촌보다 낫다.」등등은 거짓말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으며, 반면에 「거짓말하고 뺨 맞는 것보다 낫다」등은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1) 다른 나라들의 속담을 보면, 「할 수 없이 하는 거짓말은 해가 없다.」(A mecessary lie is harmless)(영국) 「거짓말을 할 때마다 이빨이 하나씩 빠진다면 이빨이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스웨덴),「거짓말은 때에 따라 방편이다.」(A lie is sometimes expedient)(영국) 등등은 긍정적인데 반하여 「한 입에 두 혀를 갖지마라」(영국), 「거짓말은 파리나 모기처럼 윙윙댄다. 그러나 진실은 태양같이 빛난다.」(무어인),ㅣ 「거짓말은 다리가 짧다.」(A lie has short legs)(영국)등은 부정적이다.2) 그리고 속담 뿐 아니라 문학자와 철학가들의 발언 속에서도 거짓말에 대한 상반된 많은 표현을 찾을 수 있다.3)국어사전 중의 하나에서 거짓과 거짓말에 대한 정의를 보면 : 거짓은 사실과 어긋나게 말하거나 꾸밈 이요, 거짓말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꾸며 하는 말 이라 하여,4) Sissela Bok은 진술의 형식으로 표현된 의도적으로 속이려는 메시지 (an intentionally deceptive message in the form of a statement)5) 라 한다. 위의 두 정의는 「말」혹은 「진술」에만 국한하고 있으나, 우리가 일상 사용하는 거짓「말」은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말 뿐 아니라 문자에 의해서 연기 신호나 모르스부호에 의해서도 표현되며 행위자 제스츄어에 의해서도 표현된다. 「속임의 의도」도 때에 따라서는 분명치 않기도 한다. 따라서 이 소론에서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의미에서 거짓말을 다루려고 한다. (Ima)「일반적 인간 관계」(A) 6가지, 「표현 내용에 대한 인지여부」(B) 5가지, 「선택의 자유」(C) 2가지가 가능하다.A, B, C의 순열은 6×5×2=60이다. 이를 기호화하면Faa-Coo-Ion Gaa-Coo-IonFaa-Coo-Ima Gaa-Coo-ImaFaa-Cos-Ion Gaa-Cos-IonFaa-Cos-Ima Gaa-Cos-ImaFaa-Coh-Ion Gaa-Coh-IonFaa-Coh-Ima Gaa-Coh-ImaFaa-Cs-Ion Gaa-Cs-IonFaa-Cs-Ima Gaa-Cs-ImaFaa-Ch-Ion Gaa-Ch-IonFaa-Ch-Ima Gaa-Ch-ImaFaa-Coo-Ion Gaa-Coo-IonFis-Coo-Ima Gis-Coo-ImaFis-Cos-Ion Gis-Cos-IonFis-Cos-Ima Gis-Cos-ImaFis-Coh-Ion Gis-Coh-IonFis-Coh-Ima Gis-Coh-ImaFis-Cs-Ion Gis-Cs-IonFis-Cs-Ima Gis-Cs-ImaFis-Ch-Ion Gis-Ch-IonFis-Ch-Ima Gis-Ch-ImaFih-Coo-Ion Gih-Coo-IonFih-Coo-Ima Gih-Coo-ImaFih-Cos-Ion Gih-Cos-IonFih-Cos-Ima Gih-Cos-ImaFih-Coh-Ion Gih-Coh-IonFih-Coh-Ima Gih-Coh-ImaFih-Cs-Ion Gih-Cs-IonFih-Cs-Ima Gih-Cs-ImaFih-Ch-Ion Gih-Ch-IonFih-Ch-Ima Gih-Ch-Ima일상적 경험의 범위 내에서 거짓말이 어떤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되는 사례들, 예컨대 환자에 대한 의사의 거짓말, 자식에 대한 부모의 거짓말 등에서 우리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가 「주종적」내지는 예속적임을, 적어도 정신적인 면에서, 알고 있다. 그리고 적군에 잡힌 포로가 기밀을 누설치 않기 위해 하는 거짓말 등에서 인간 관계가 「적대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 관계를 과 과의 조합을 구성한 것이며실행 언어는 발언을 하는 것이 하나의 행위를 하는 것 14)이라고 하여 일상 언어들 (to write, to walk, to eat 등)이 갖고 있는 서술적인 기능이 아니다. to, apologize, to name, to swear"등의 동사는 「I apolohize」할 때 말하는 사람이 「사과하고 있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하는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행 언어는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행 언어는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Strawson은 참에 관해서 이러한 주장을 한다.15)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진술에 관한 또 하나의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진술을 동의하며, 받아들이며, 시인하는 행위를 실행한다는 것이다. 실행설을 거짓말에 적용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거짓말의 진술에 대한 「그 진술이 거짓」이라는 진술이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 진술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거짓말을 판단하는 기준은 거짓말과 참말 내지는 거짓과 참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더구나 가장 정열적인 내면성의 사(私)적 과정속에 굳어진 객관적인 불확실성이 바로 참이다. 16)라는 Kierkegaard의 주관적이며 내면적 참의 주장은 판단의 기준을 더욱 다원화한다고 볼 수 있다.2.3. 거짓말에 대한 도덕적 비난2.3.1. 도덕적 비난의 정당화 이론행위에 대한 도덕적 내용은 대개 도덕적 비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짓말」이라는 행위에 대해서 나온 도덕적 비난을 어느 정도가 적절한가, 아니면 도대체 비난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비난의 상위 개념이라 할 수 있는 벌 에 대한 이론은 두 개의 큰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응보주의와 공리주의가 그것이다. Kant, Hegel, F.H. Bradley, E.F.Carrit등은 응보주의적 입장에 서서, 범죄의 당연한 응보가 벌이다.…… 법률상의처벌은 범법자현일 뿐, 서술적 의미가 약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사랑한다」는 말을 말하는 사람의 전인격적 총체의 표현이라고 오해하여 서로가 가부를 따지고, 너가 나를 속였다 , 너는 거짓말을 했다. 는 등의 다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뒤의 경우는 인간이 인식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류로써 말하는 사람에게는 속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이 속하는 경우이다. 여기서는 거짓말의 말을 좀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하여 행위의 측면까지 포함될 때 거짓말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자연이라든가 인간이 아닌 물체가 될 수 있고, 인간의 지각 능력의 한계 때문에 인간이 속하는 많은 경우를 포함할 수 있다. 즉 잔상의 법칙, 형태 충실 경향(pregnancy theory), 항상성 (constancy theory)등이 지적하는 인간의 거짓된 지각은 인간이 얼마나 많이 속히고 있는가. 그러면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또한 그런 거짓된 지각 위에 인간의 일상적 생활이 영위됨을 확인하게 한다.그리고 「의도-비자발적」인 경우는 자발적이고 고의적은 뜻은 없었으나 외적간제에 의해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도덕적 책임 내지 비난이 훨씬 경감될 수가 있다.2.3.2.3. 거짓말의 목적Aristoteles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과오의 경중을 그 목적에 따라 다음의 여섯 가지로 나누었다.25)(ⅰ) 거짓말 자체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고유의 거짓말쟁이(ⅱ) 도덕적으로 나쁘기 보다는 우쭐하고 공허한, 의도없는 허풍선이(ⅲ) 명성과 젠체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밀고자(ⅳ) 경제적이고 외적 이익에 관심을 갖는 밀고자(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스스로를 왜소화하여 익살스럽게 보이면서 위장하는 허풍장이(ⅵ) 교만과 과장의 두려움으로 말을 통해 스스로 왜소하게 되는 「비꼬는 사람」들로 나누어 거짓말의 목적이 우쭐하고 젠체할려는 허풍선이나 밀고자보다는 스스로를 왜소하게 하려는 「비꼬는 사람」이 더 멋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이상의 여섯 가지 분류만으로는 거짓말의 목적 전부를 포함할 수가 없다의자30) (rulenon-consequentialist)로서 Kant의 거짓말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 그의 「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정언적 명법의 추론을 위한 자연 법칙의 법식인 「네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를 통하여 보편적인 자연 법칙이 되어야 하는 듯이 행위하라」를 적용하기 위해 든 네 개의 예증증의 두 번째에서 행한 거짓말에 관한 비판을 보면 :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빌리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 있다. 그는 그가 빌린 돈을 갚아 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지만 일정한 기일 내 다시 돌려준다고 확약하지 않으면 돈을 빌릴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거짓 약속을 할 것을 결심한다고 하면 31) 이는 위의 「자연법칙의 법식」에 비추어, 「만일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된다면,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의문을 음미해 볼 때 필연적으로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이상의 칸트의 견해는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결과」(consequences)가 고려되어 있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좀 더 세밀히 분석하면 「결과」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주의자들은 거짓말하는 하나의 행위의 결과를 중요시한다면 Kant는 거짓말하는 행위의 보편화의 결과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은 항상 다른 사람을 해친다. 만일 다른 사람이 아니라면 인류 전부를, 모든 정의의 원천을 쓸모 없게 만들므로써 해친다 32)는 Kant의 언급은 「해친다」는 거짓말의 결과를 완전히 무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거짓말의 결과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은 행위의 결과와 행위의 법칙의 결과라는 구분 이외의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의 결과와 「거짓말 내용」의 결과로 나눌 수 있으며, 「동기와 결과」와의 관계, 구체적 결과로서 「이익을 주느냐 해로움을 주느냐」의 문제, 해로움의 정도 등등을 문제삼을 수 있으며, 행위의 결과를 시간적 차원에서 과거 완료, 현재 완료, 미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