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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비전 : 세계로 열린 허브 아랍에미리트
    한국의 비전:세계로 열린 허브, 아랍에미리트[ 목 차 ]Ⅰ.들어가면서························································································································1Ⅱ.국가소개···························································································································21. 아랍에미리트와 개관2. 아랍에미리트의 역사3. 아랍에미리트의 정치 ? 사회 ? 문화 ? 군사1) 정치 ? 사회2) 문화3) 군사4. 아랍에미리트의 경제Ⅲ. 국가 정치외교·················································································································101. 아랍에미리트의 정치적 관계 이해2. 아랍에미리트의 정책기조1) 개방 ? 균형 외교2) 정치리더쉽 발휘3. 현 아랍에미리트의 정치 ? 외교적 상황1) 안정적 정국운영2) 낮은 사회불안 가능성3) 주변 아라비국 등과 원만한 관계 유지4. 아랍에미리트의 대외외교관계1) 대 GCC관계2) 주변국가와의 관계3) 주요역외국과의 관계4) 대북한 관계Ⅳ. 국가 경제·······················································································································161. 아랍에미리트의 경제성장1) 비석유산업2) 원유 ? 가스3) 물가4) 수출 ? 수입2. 아랍에미리트의 경제현안1) 에미리트간의 경제정책의 차이점2) 두바이의 경제현안3. 향후 아랍에미리트의 경제전망1) 아랍에미리트의 경제전망4. 두바이 경제성장 이해1) 두바이 ? 중동지역의 허브2) 자유와 상상력이 성공요인Ⅴ. 한점권은 유럽국가들, 즉 처음에는 네덜란드 그리고 다음에는 영국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1650년 오만으로부터 포르투갈이 철수하자마자, 네덜란드와 영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19세기 영국인이 도착했을 때 아랍에미리트는 협상해안(Trucial Coast)으로 알려진 지역을 7명의 독립된 에미리트들이 연합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의 걸프 만에 대한 독점적 상업적인 지위는 동부 무역에서 이윤을 분할하려는 유럽의 무역업자(첫 번째는 네덜란드 나중에는 영국에 의하여)들에 의해 도전을 받았다. 동부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하였고, 1650년 그들은 모든 아랍의 해안에서 세력을 잃고 오만으로 퇴각하였다. 그 후 이 지역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의 상업적, 정치적 각축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네덜란드가 우세하였으나, 1766년 영국이 인도에 대한 패권을 강화함으로써 네덜란드 세력은 실질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걸프 만에서 유럽 국가들과 아랍의 해적 행위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매우 왕성하게 전개되었다. 까와씸(Qawasim)이라는 아랍의 해상 부족들이 권한을 휘둘렀고 걸프 만의 모든 아랍 해안에 패권을 장악한 와하비(Wahhabi) 일당에 의한 약탈행위가 자행되었을 때인 19세기 초에는 불법 행위가 고조에 달했다. 영국 국기를 게양한 선박에 대한 해적들의 공격은 결과적으로 1818년 라스 알 카이마의 해적 사령부와 240km에 이르는 해적해안(Pirate Coast)의 항구에 대한 공격을 유도하였다. 1820년 해적행위와 노예무역을 억제하기 위한 일반 평화협정이 영국과 걸프 만 아랍 부족국가들 간에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해적해안과 바레인의 주요 셰이크(Sheikh)들에 의해 서명되었고, 조약의 시행을 위해 영국의 강력한 함대가 라스 알 카이마에 주둔하게 되었다. 1820년 일반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곳에는 단지 5개의 '협상국가'(Trucial State)가 있었다. 1866년 샤르자의 최고 셰이크가 사망하자, 그 영역은 그의 네 아들의 통치권이 부여되고 있다. 그러나 씨족이 다른 사람 간에도 양가의 합의와 결혼 당사자 간의 동의만 있으면 결혼이 가능하다.c. 코란 상에는 1부 4처까지 허용되고 있으나, 지금은 1부 1처제 추세로 변하고 있고, 약혼 합의 시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마하르"라는 결혼지참금 제도는 아직도 관습으로 남아 있다. 이것은 신랑의 보호자가 신부의 보호자에게 지불하여 신부에게 전해지며 현금 또는 현물로 할 수 있다.라. 의료 및 복지a. 1981.7. 사회보장법을 개정하고 불구자, 고령자, 미망인, 고아, 질병으로 노동능력을 상실한 가족 등에게 매월 약간의 보조금을 주는 등 사회 보장범위를 확대하고 있다.b. 의료- 주요도시인 아부다비, 두바이를 비롯한, 각 에미리트에 최신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 및 진료소가 있으나, 정부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관 이외의 서양인들이 운영하는 개인병원 이용 시에는 진료비 및 약품비가 다소 고가이다.마. 사회간접자본a. 각 에미리트가 경쟁적으로 투자를 하여 이 부문이 특히 잘 발달되어 있으며, 특히 항만시설은 과잉상태이다.b. 도로 : 철도는 없으나, 시내도로 및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모든 도로는 포장되어 있다.c. 항만 : 아부다비 다이드항, 두바이 라쉬드항, 샤자의 칼리드항 등 최신 시설을 갖춘 항구가 있으며, 특히 두바이 부근에 아랍에미리트 최대 규모의 제벨알리(자유무역지대) 항만이 있다.c. 공항 : 아부다비, 두바이, 샤자 및 라스 알 카이마등 각 에미리트별로 독자적인 국제공항이 있고, 특히 아부다비는 알아인 지역에 신 공항을 건설하였다.(3) 교육a.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수업료, 교과서, 피복, 식사 등 일체를 무료로 제공한다.b. Al Ain에 UAE 대학을 설립(1977)한 이래, 각 지역에 대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기타 기술전문대, 사관학교 등 전문학교를 통해 고급인력 양성에 노력중이다.3) 군사a. 1971년 7개 Emirate(토후국)가 연방을 구성한 이래, 처음에는 각 에미리트의 독자성이 강하였으나, 걸프전을 계기로 국가안보를에서는 각 에미리트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론 아부다비에 대한 정치적 배려를 감안하여야 올바른 진출의 문호를 열 수 있다.2. 아랍에미리트의 정책기조1) 개방?균형외교아랍에미리트의 외교는 1917년 12월 영국군 철수 이후에도 계속 친영(親英)·친 서방 외교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교류가 없었으나 1984년 중국, 1985년 11월 소련, 1986년 11월 유고슬라비아와 정식 수교 하였다. 기본 외교 정책은 비동맹 중립정책으로 외세로부터 정치,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며, 타국의 국내문제 불간섭 주권독립 존중, 무력에 의한 영토 획득을 금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오만, 카타르, 바레인과 결성한 GCC)(Gulf Cooperation Council: 걸프만안협력회의)의 협력 체제를 강화하고 지역안보를 위하여 협력하고 있다. 또한 아랍권의 단결과 안보 확립, 국교인 이슬람의 이념구현 및 이슬람권의 단결에 주력하고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관해서는 반(反)이라크방침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미국 프랑스군(軍)에게 기지 사용권을 인가)하였다. 걸프전쟁 후 이라크에 대해 UN(United Nations: 국제연합) 결의를 준수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라크 국민을 돕는 인도적 지원을 하고 있다. 이처럼 아랍에미리트의 외교는 197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서방국가와 아랍국가 사이에서 온건하면서 균형된 외교노선을 견지하고 있으며 특정 세력이나 국가에 편향되지 않고 실용적 외교를 펴고 있다.2) 정치 리더쉽 발휘아랍에미리트는 건국당시 토호세력 지도자들이 아부다비 중심의 대통령제에 합의하여 아부다비, 두바이 등의 토호세력 지도자들이 역할을 분담하여 통치하고 있다. 건국 지도자들이 사망한 이후)에도 안정된 통치체제를 유지하여 현재 대통령은 셰이크 칼리파 (HH Sheikh Khalifa), 아부다비), 부통령 겸 수상은 셰이크 막툼(HH Sheokh Maktoum), 두바이)이다.특히 두바이의 눈부신 경제 성장 뒤에는 라시드 전 두바이 국다. 비 석유 산업 성장은 제조업, 부동산, 관광업 그리고 금융이 주도하고 있다. 비록 석유산업의 성장률이 3% 수준이지만 여전히 아랍에미리트 경제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2003년 기준으로 아랍에미리트 수출에서 원유 및 석유제품 수출은 전체 수출액의 30%를 상회하고 있으며 제조업을 비롯한 비 석유산업에 대한 투자 지출 확대는 유가의 고공행진에 의한 원유 수입증대로 가능했던 것이다. 중동지역 다른 산유국의 원유 수출에 따른 수입 증대 역시 아랍에미리트 비 석유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 중에 하나이다.2004~2010년 비 석유산업 성장 지속 예상된다. 아랍에미리트의 비석유산업의 성장은 원유자원 고갈에 대비한 정부의 산업다각화 정책에 의한 것이며 2004년과 2005년 각각 국제금융센터, 두바이 국제 금융시장을 설립한 것 역시 이러한 정책적 기조아래 추진되었던 것이다. IMF에 의하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평균유가를 배럴당 45.8달러로 예상했을 때 아랍에미리트의 2006년도 경제성장률은 5.1%로 유가하락에 의해 2005년도 보다 경제성장률이 낮아진다. 그러나 석유산업 성장률과 비석유산업의 성장률이 2006년에 각각 2.5%, 6.2%로 예상되고 있다는 것은 아랍에미리트의 경제의 석유부문 의존도는 점차 줄어들고 비석유산업의 중요성이 커진다는 것이므로 앞으로 산업다각화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2) 원유 및 가스2005년 1분기에서 3분기까지 평균 하루 아랍에미리트 원유 생산규모는 2004년에 약 3% 증가되었다. 아랍에미리트의 원유생산은 2005년 3분기 기준으로 하루 250만 배럴로 2002년 이후 지속적인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고 2005년 3/4 분기 평균 하루 원유 생산량은 약 250만 배럴로 동년 1/4 분기의 238만 배럴에 비해 약 5% 증가하였다.실제 최근의 아랍에미리트 원유 생산규모는 OPEC내 아랍에미리트 생산 쿼터보다 약 3% 더 많은 상황이다. 최근 OPEC 회원국들이 전체 공식 생산목표 보다 실제 더 많은 원유를 O
    사회과학| 2007.06.20| 31페이지| 3,500원| 조회(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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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역사]대구 10.1사건부터 여수항쟁까지의 민중항쟁사
    Ⅰ. 들어가면서우선 저희 조가 10.1사건에서부터 4.3항쟁, 여순항쟁까지의 방대하게 범위를 잡은 이유를 먼저 설명을 하자면 이 수업을 처음 들으면서 10.1 사건에 관해서도 처음 접하게 되었고, 4.3항쟁과 여순항쟁에 관하여 아는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학번은 최고학번들인데 이번 계기로 인하여 이 발표문 준비를 하면서 저희도 위 사건들에 관하여 소상히 배워보고, 후배들에게도 좀 알려주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 연구서를 준비하였다.연구서 형식상 각 단락마다 결론을 내리면서 작성을 하는 것은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이 연구서의 목표가 점수를 위해서가 아닌 본 수업을 듣는 전 학우님들에게 위의 세 사건들에 관하여 알아 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이기에 조금 특이한 형식의 연구서가 된 점에 관하여는 사과를 드린다.그럼 이제 본론에서 10.1 사건, 4.3 항쟁, 여순항쟁에 관하여 소상히 설명하고자 한다.Ⅱ. 10.1 사건의 발걸음과 그 자국1. 시대적 배경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 식민 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감격에 휩싸여 있었다. 또한 자주적인 민족국가에 대한 희망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격의 순간도 잠시 미군정이 남한을 점령하면서 민중의 새로운 사회 건설의 제반 개혁 요구가 좌절되었다.우선 당연히 처벌받을 줄로 알았던 친일파 등의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처벌받지 아니하고 군정 관리로 임명되었다. 특히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 경찰의 주요 간부로 기용되자 민중들의 원성이 높았다. 게다가 친일 경찰들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고문, 구타 등을 자행하는 등 일제시기의 악행을 계속 저질렀다. 이에 민중들의 분노는 높아져만 갔고 미군정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 또한 부정적으로 바뀌었다.그리고 민중 자치권력이라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의 좌절, 토지개혁의 지연, 미군정에 의한 공장의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모리배들의 발호, 귀국동포들에 대한 무대책 등등은 해방을 맞아이 맞물려 이들에 의해 주도되는 상황이 구조적으로 정착되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 양키 데모크라시로 인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의의와 가치가 왜곡, 훼손되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건국과정에 녹아들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이런 결과를 전적으로 양키 데모크라시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좌우의 극단적 정치세력들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해 가며 목표를 달성하려 해도 이를 규제할 사회세력이 성장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폭력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낱 구호성 이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인권의 관점으로 이 사건을 관찰할 때에도 역시 앞서의 두 이슈와 관련지어 살펴보아야 한다. 이 시기에 행해진 인권 유린은 그 사례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빈번했다. 10.1사건 이전에도 적지 않게 있었지만, 사건 발발 이후 시위가 확대되면서 좌우 양 진영간의 인권유린은 폭력과 테러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반공주의가 득세하여 인권과 자유를 압도할 수 있는 명분을 극우세력이 쥐게 된 것도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국가건설과정에서의 이데올로기 제약과 거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로서 자유민주주의를 가장한 반공주의의 득세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시작된 좌우대립의 맥락에서 쌍방간에 자행된 폭력과 테러에서 비롯된 것이다.10ㆍ1사건을 쌍방향의 폭력 즉, 그 어떤 세력도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좌우대립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라 한다면, 그 후의 상황전개는 일방적으로 한편이 몰리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와중에 극좌세력만이 아닌 중도세력까지도 제도권에서 배제되고, 마침내 극우파와 군정, 그리고 이어서 초대 정권에 의해 탄압 받게 된 사실이다. 이로써 국가건설과정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의 폭은 갈수록 협소해졌고, 동시에 반공주의는 상승, 강화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제일 요건인 인권이 반공주의에 의해 수시로 억눌리는 상황은 그 후 수십 년 간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초기 대구에서 벌대사가 이 사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함을 이야기해 준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정치의 이데올로기적 제약의 근원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면, 그 제약의 극복은 비로소 1980년 광주시민들의 항거로서 가능했던 것이다.현재까지?1946년 대구 10?1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항쟁?보다는 ?폭동?으로 정의되어 왔다. 이것은 1995년에 이 문제로 일어난 ?국사 교과서 파동?으로 인해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대구 10?1 폭동사건?으로 규정된 일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항쟁?의 성격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전개 과정에서의 폭동적인 모습도 있긴 하지만 좌익세력의 선동에 의해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보다는 해방 후 자주적인 민족국가의 수립이 좌절되고 미군정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쌓여간 모순들에 민중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더해지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미군정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민중들의 자주적인 민족국가 수립에 대한 희망은 무시되었다. 그런데다가 미군정은 자신들이 통치를 하는데 편리하단 이유로 친일파 인사들은 청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경찰?사법조직에 재기용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제시대의 악행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고문, 구타 등을 행하여 시민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또 당시에는 각지로 이주했던 동포들이 귀국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하였다. 특히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하였다. 식량문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도시민의 식량 배급을 위해 ?미곡수집령?을 발표하고 쌀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응하지 않는 농가들은 경찰과 관리들이 동원되어 강제적이고 폭력적으로 미곡을 수집하기까지 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민중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946년 5월, 6월에는 자연재해까지 발생하여 교통이 차단되고 시민들의 출입을 제한하면서 식량의 유입도 끊기게 되어 식량사정이 더욱 더 악화되었다. 급기야 식량부족으로들은 고향에 되돌아 왔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실직상태에 놓이게 되었다.해방후 제주도의 경제는 일본과의 정기여객선 뱃길이 끊기고 대일 교역마저 통제를 받게 되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장 먼저 피부에 와 닿는 문제가 생필품의 절대부족 현상이었다. 이렇게 되자 도내 곳곳에서 귀환자도 실어 나르고 물품도 반입하기 위해 20∼50t급의 어선들이 현해탄을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물품반입 행위를 경찰에서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제시대의 전력 때문에 젊은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사오던 '일제 순사들'이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 경찰복을 갈아입고 '밀수품을 단속한다'는 미명아래 활동했다. 그들 가운데는 모리배들과 결탁, 본격적인 염탐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이런 사례들을 적발할 경우 법적으로 처리하기보다는 뒷거래로 자신들의 잇속을 채우는 일이 많았다. 이런 모리행위는 미군정관리와 경찰 고위관부, 나중에는 서청 등 사설단체원까지도 끼어 들어 민심을 잃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일본과 중국대륙 등지에서 귀환한 도민은 이제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행동양식 및 의식을 탈피하고 있었고 제주도민에게 새로운 경험을 전파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일본군에 종군하였던 군인, 군속, 징용노무자들과 중국에서 의용군, 팔로군의 적을 가졌던 인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후에 제주도민의 정치의식을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도 단위 건준 조직을 출범시켰다. 결성식에서는 임원진 선출에 이어 행정권의 이양문제, 치안문제, 당면한 경제문제등이 협의되었으며 일부에 의해서는 "행정부을 접수한 후 실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비록 공직에 몸을 담았던 사람일지라도 건준에 참여시키자"고 제안되었다.건준은 좌우 세력이 총망라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좌우 세력의 갈등관계가 잠재화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인민위원회로 재편되면서 점차 좌우익의 갈등관계기는 경찰과 서청의 행위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며 폭력적인 진압을 반대하고 있었다. 양측은 이 회담에서 동족간의 유혈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태의 평화적 수습에 합의하고 전투행위를 중단했다. 이로써 제주도 전역에서는 일시 평화가 회복되었다. 봉기가 발발한지 25일 만이었다.이 합의는 봉기를 결행한 제주도 민중들과 저항 지도불가 자신들의 최소한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정도로도 무장봉기를 중단하려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동시에 제주도 민중들의 불만을 수습하고 봉기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정도의 요구는 수용해야 된다는 국방경비대의 인식의 반영이기도 했다.4월 3일의 봉기는 여기에서 원만히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군정 경찰은 국방경비대를 계속 좌익으로 의심했고 4월 28일의 합의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군정 경찰은 이 합의를 깨기 위하여 5월 3일 미군과 국방경비대 9연대 병사의 안내로 귀순 중이던 일군의 귀순자들을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결국 4.28합의는 깨졌고, 상대방 때문에 합의가 깨졌다는 쌍방간의 비난성명전에 뒤이어, 이미 귀순한 사람들이 살해되는가 하면 귀순 중이던 유격대와 민중들이 다시 입산하였다. 경찰과 유격대의 충돌로 제주도는 다시 살인과 방화가 재연되었다.충돌이 재연되자 미군정장관 딘은 군정청 고위간부들을 대거 인솔하고 직접 제주도를 방문하여 대책수립에 착수하였다. 5월 5일 제주도 군정청에서 긴급 고위비밀대책회의가 열렸다. 대책회의는 그러나 사태의 원인과 대책을 놓고 군·경 간의 갈등이 폭발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경찰은 사태의 원인을 국제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전에 계획된 폭동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강경진압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경비대는 사태의 원인과 악화의 책임은 경찰의 과잉진압과 기강문란과도 관련이 있으며, 따라서 경찰도 경비대의 관할 아래 두어 사태의 진압은 경비대가 맡아야 하고 진압방법도 무력위압과 귀순선무공작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비밀대책회의가 결렬되자 미군정에서는 곧바로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이었다.
    사회과학| 2006.05.01| 37페이지| 3,000원| 조회(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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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평]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평가A좋아요
    Who Moved My Cheese?를 읽고...이 책의 내용은 스니프와 스커리라는 작은 생쥐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꼬마 인간 햄과 허가 만들어 가는 이야기이다.단순하고 비능률적인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매일 하던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스니프와 스커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새 치즈창고를 찾으러 미로 속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매일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던 헴과 허는 치즈창고에 치즈가 없어졌다는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누가 내 치즈를 옮겼어?'라고 하며, 하루 이틀 동안 창고를 지키고 있다가 세월이 지날수록 치즈가 바닥이 났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어떻게 해야 되냐고 되뇌며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한 마음으로 과거의 즐거웠던 일만 생각하며 주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사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치즈'에 걸고 있던 희망은 현재 자신의 삶, 즉 생활의 보장인 동시에 미래의 안정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스니프와 스커리는 이미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새로운 치즈창고에 도착했다.난생 처음 보는 온갖 종류의 치즈가 그들을 반겼다.허는 깨달았다. 사라진 치즈에 대해 집착하면 할수록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뿐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그는 불안한 마음이지만 친구인 헴과 함께 새 치즈를 찾으러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헴은 아직도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빠져있었다."우리주위의 환경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항상 그대로 이길 원하지. 이번에도 그랬던 것 같아. 그게 삶이 아닐까? 봐, 인생은 변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허는 쇠약해진 친구를 바라보며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헴은 두려움이 분노로 바뀌어 허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미로 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역경을 이겨내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벽에 교훈을 남기며 지나갔다. 아직도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망설이고 있는 헴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교훈이기도 했다.그는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미래에 적응해가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힘이 그를 더욱 빠른 속도로 달리게 했다.마침내 허는 자신의 영혼을 쉴 만한 쉼터를 발견하게 되었다.미로 속을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갑자기 여행이 신속하고 행복하게 끝나버린 것이다.그 쉼터에서는 옛 친구 스니프와 스커리가 허를 반겨주었다.그들의 통통한 모습을 보고 오래 전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문제제기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변화는 어디서건 일어나고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리는데 매일 매일을 게을리 하지 말며, 변화에 대해 두려움을 버리고 보다 신곡하게 대처하라는 것이다. 얇지만 일관된 주제가 있는 이 책을 읽고 이 정도의 시사점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나는 이 책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한다.내가 바라보는 시각은 이 책의 후반부의 토론장면에서 언급된 부분이기도 하다. 세상에 변화가 항상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햄의 행동이 무조건 부끄럽다고 치부해 버리는 사실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오류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변화에 대해 두려워 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추구하자고 하며 또한 독단과 독선을 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책에서는 또 다른 독단과 독선이 존재한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독단과 독선을 버린다는 것, 독단과 독선의 존재를 거부한다는 것은 어느 것도 최악이거나 최선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이것은 전적으로 잘못 됐어' '이것은 전적으로 나빠' 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독단과 독선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읽고나면 햄에 대한 독단이 생겨버린다. 바로 '햄처럼 사는 것이 나빠'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햄처럼 사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일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행동의 방향은 처한 상황에 따라 시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게으르지 않게 매일 매일 일어나서 상황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책에서도 매우 나오듯이 매우 중요하다. 일어나는 문제(현상)에 대해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대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닥쳤다고 해서 그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그 실패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상황을 빨리 찾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에 바로 문제가 있다. 물론 미련이라는 것은 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사회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으며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지루하고 고루하며 다람쥐 쳇바퀴 도는 문제를 다루는 일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문제의 원인이 쉽게 밝혀지지 않거나, 아니면 결국 모르고 넘어 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과정까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독후감/창작| 2003.11.21| 2페이지| 1,000원| 조회(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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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관계] 한중관계 평가A+최고예요
    목 차Ⅰ. 서론Ⅱ. 본론1. 한중관계의 역사적 변천1)전통시대 중국인들의 세계관과 대한관1중국인들의 천하사상2사대주의와 사대외교2)중국의 변천과 대외과의 변화1근대화로의 모색2개방과 실용주의 노선의 등장2. 한중관계1)중국과 한반도의 총체적 관계2)한중 정치적 관계규명3)중국과 북한의 경제교류와 문제점3. 한중수교1)한중수교이전의 전개2)한중수교이후의 전개4. 중국과 한국, 북한의 관계전망Ⅲ. 결론참고문헌I. 서론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이어지면서 이루어지고, 현재는 과거를 거울삼아서 과거를 만들면서 미래로 향해서 간다.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국제정치의 질서관은 오랜 역사에서 문화권의 가치기준에 따른 힘의 차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와 네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진 중국은 풍부한 자원과 엄청난 경제적 잠재력으로 인해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또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1992년에 한국과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 형성되었던 적대적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탈냉전시대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국교정상화에 합의하였다. 그 후, 한국과 중국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인 속도로 교류 협력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그야말로 전면적인 동반자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지리적 근접성과 더불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축적된 문화적 동질성, 그리고 경제구조의 상호보완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은 21세기 동아시아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전략적 공동이익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우리에게 중국이 무엇인가는 질문은 단순한 지리적, 경제적, 실리적 이익의 차원을 넘어 점점 더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하겠다. 물론 개혁개방 이후 무섭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 위협인가 기회인가 라는 문제의식은 우리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부강한 신 중국의 등장은 21세기에 등장하는 새로 중화족과 이민족을 구별하는 민족의식의 바탕 위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확고히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전술한 바와 같이 고대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의 모습은 '동이' 즉, '동방의 미개한 이민족'이었다. '동이'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의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의하면, 그 대상을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동옥저(東沃沮)·읍루(揖婁)·예(濊)·삼한(三韓)·왜(倭) 등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왜를 제외하면 모두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거주하던 종족들임을 알 수 있다.물론 이러한 개념은 한민족(漢民族)의 형성기인 진한(秦漢)시대에 그들이 화하족(華夏簇)을 주축으로 주변종족들을 동화시켜 나가려는 데서부터 형성된 것으로 시대에 따라 그 의미 또한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살펴볼 때 동이족 중에 포함되는 여러 종족 중에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한 한(韓)이나 맥(貊)이 있었던 것이지 동이족 전부 또는 동아시아족 전부가 우리 민족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동이'와 중국과의 관계는 때로 대립과 전쟁의 양상으로 발전된 적도 있었지만 원칙적으로는 화친론의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한대의 '기미론'과 그 후대에 형성된 '조공관계'이다.기미론이란, 천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모든 주변국가들이 일정한 질서 하에 결집되어 안정된 범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관념인데, 이 원리를 문화적 동화정도와 정치적 통치관계에 적용하여 기전(畿甸)·내복(內服)·번병(藩屛) 등으로 분류하였다. 이중 '기전'과 '내복'은 정치적으로 중국 군주의 통치지역에 소속되지만, '번병'은 중국 통치지역에서 벗어난 정치적 독립지역인데 한국의 경우 이 '번병'에 해당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문화가 발달되어 중국의 문화적 수준에 근접되어 있는 '외번(外藩)'으로 평가되었다.2 사대주의와 사대외교전통적 한중관계는 '번병'의 입장에 따라 국가적 자주성과 정치적 독립을 전제로 하지만, 외교·문화적으로는 중국적 질서에의 참여를 전제로서양의 국제관계인 공사·영사 같은 외교제도가 있음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서양인을 아시아의 주변국처럼 오랑캐로 여겨 '양이'(洋夷)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서양인들의 외모를 기이히 여겨 '바다 건너 온 귀신'이란 뜻의 '양귀'(洋鬼)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는데 이처럼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외국인들에 대해 바른 이해를 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그러나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치르고 전쟁의 패배 충격 속에서 굴욕적인 남경조약(1842)을 체결 당한 중국은 계속되는 열강의 침입에 처하여 영토가 할양되고 '양귀'가 '양대인'(洋大人)으로 변화하는 엄청난 충격을 겪게 되자, 진보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서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서양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특히《해국도지(海國圖志)》를 저술하여 중국인들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까지 서양을 이해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위원(魏源)은 "이(夷)를 배우지 않으면 이(夷)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같은 입장에서 서양의 기계문명을 도입하여 중국의 자강을 도모하려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중국 전통의 문화와 제도를 본체(本體)로 하고 서양의 기계문명을 말기(末技)로 이용한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 사상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 주장은 양무운동 이후 신해혁명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근대화를 지향하는 중국에 있어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고 있다.즉 청말의 양무·변법운동이나 해방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사상적 차이점은 모두 서양의 선진적 방법을 이용하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모택동(毛澤東)의 경우 중국의 부강을 위해 서양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점에서는 중체서용론을 수용했지만, 그 대상을 자본주의 국가인 서방진영으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련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는 곧 새로운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중국의 근대화와 경제건설을 위해 적합한 방책을 제공할 것으로 믿었는데, 그것은 레닌주의가 비서구국가들 조자양이 발표한 국제경제대순환론의 이론의 틀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국제경제대순환론은 해안지역의 도시를 개방하고 다음은 중국의 해안지역으로 개방을 확대하고 이것이 성공하면 해안지역의 경제발전을 기러기떼가 날아가는 모습처럼 선을 이루어 중국 내륙으로 이동시키켜서 중국 전체를 경제발전 시킨다는 이론이다.등소평은 경제발전을 위한 자본의 확보와 배분문제에서 테크놀리지(Technology)를 강조하였고 대외교류를 위해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서방 외국과의 과학, 기술협정을 확대시킨 등소평의 개방정책은 소련의 압력에 대한 방어효과와 함께 외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중국에 대한 투자를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당시 당 총서기이던 등소평이 "생산만 증대된다면 우리는 개인기업(자본주의적 경제론을 지칭)으로 환원할 수도 있다. 좋은 고양이는 검은색이냐 흰색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쥐를 잘 잡는 것이 좋은 고양이다."라고 한, 이른바 백묘흑묘론(白描黑描論)을 주창한 것도 바로 이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실용주의 노선을 천명한 것이었다.2002년 2월 장쩌민 총서기는 3개 대표론 을 발표하였다. 3개 대표론이란 중국공산당이 선진적 사회생산력을 대표하고, 선진적 문화를 대표하면,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적 이익을 대표한다 라는 것이다. 여기서 광범위한 인민이란 사영기업주, 자영업자, 관리기술자 등 이른바 신중간층의 입당을 인정한 것으로, 중국공산당이 예전부터 고수해 온 전통적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정당 의 입장에서 폭넓은 국민정당 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이 녹아있는 것이다.2. 한중관계1) 중국과 한반도의 총체적 관계1970년대 말 등소평 체제가 출범하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현대화 추진을 하면서, 중국은 평화적인 국제환경을 가장 중요시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하게 되었다. 중국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며 아시아-태평양 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한반도문제를 조기에 그리고 합리적으로 해여, 북한을 가까하면서 그를 회유하고 또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돌발적이고 위험한 정책이나 행위를 저지시키고자 했단 것이다.이러한 목적으로 중국은 북한에 대한 방문화교를 강화하였다. 중국이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면서 폐쇄적이고 1인 숭배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북한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북한이 위협을 느끼고 소련과 친러 정책을 쓰자 중국 또한 80년대 다시 중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2) 한중 정치적 관계 규명북한이라는 존재 때문에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 또는 개선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돌발적인 사건에 의해 마련되었는데 이는 바로 중국 민항기의 불시착이었다. 승객송환협상 과정에 있었던 일등은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 및 인식변화로 보이며 이는 묵시적으로 그러나 실질적으로 한반도 남쪽에 존재하고 있는 한국의 실체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이 같은 중국의 행위는 한국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중국의 간접적인 의사표시 행위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이처럼 중국이 입장을 바꾸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그 배경이 있다고 할 수 있다.첫째, 중국 자신의 필요에 의해 기본 입장의 변화를 갖게 된 것이다. 즉 대회관계나 대외정책 결정에 있어 탈 이념적이고 실용주의적 입장을 갖게 된 것이다.둘째, 경제적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이 개발도상국 중에 가장 모범적인 보기가 되기 때문이다.셋째, 북한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상대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북한에 대한 운신이 어려웠다. 그중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이 한국과의 관계이다. 소련이 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개혁 개방을 추진하면서 중국과 소련은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물었기에 중국 또한 한국과의 태도 변화가 가능한 것이었다.이러한 요인들이 중국으로 하여금 한국에 대한 태도나 입장을 폭넓게 가질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3) 중국과 북한의 경제교류와 문제점2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사회과학| 2003.11.21| 11페이지| 1,000원| 조회(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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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ppt] 신문에서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조사 ppt
    ..PAGE:1誤報日報장서희더블데이트레즈비언문소리 “키 작은 남자가 좋아요”인기스타 이효리가 목걸이를 어쩌고 저쩌고 했다고 어디에서 얘기를 했다더라. 그런데 알고보니 어쩌고 저쩌고 했다더..알고보니 별내용이 없다더라…2003년 11월 19일(수)1493 MILES유호정 ‘시한부 삶, 남의 일이 아니야왕따고백 ‘효리 당당화법’납치극 엄정화냐 백지영이냐!!..PAGE:2장서희, 현재애인-옛애인 ‘더블’데이트굿데이 10.24기사내용은…> 장서희가 라는 드라마에서 같이 연기했던 ‘김성택’과 에서 현재 연인으로 연기 중인 ‘김남진’과 함께 패션쇼 무대에 서다.헤드라인은…-> 장서희라는 배우의 이중 데이트 행각을부각시켰다...PAGE:3유호정 “시한부 인생 남의 일 아니야”일간스포츠 10.28헤드라인은…-> 유호정이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고 누구라도 생각할 만한 문구이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한 사진은 헤드라인을 더 사실처럼 포장한다.생사람잡네…기사내용은…-> KBS ‘로즈마리’라는 드라마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위암 말기 환자 ‘이정연’으로 출연..PAGE:4▶ 비, 공효진 “우리 그냥 결혼하게 해주세요”(굿데이 10.28)-> 탤런트 공효진과 비의 간절한 바람. 혹시 실제 상황? 아니다. 두 사람이 출연 중인 KBS 2TV 미니시리즈 에서다.▶ 왁스-김영호 ‘사랑하고 싶어’(스포츠서울 10.25)-> 왁스가 ‘터프가이’ 배우 김영호와 입을 맞춘다. ‘윤도현 러브레터’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왁스의 ‘사랑하고 싶어’라는 곡을 듀엣으로 부른다는 기사.▶ 납치극 백지영이냐 엄정화냐(굿데이 10.23)-> 연예인 A양 납치 사건을 소재로 한 극화가 만들어지는데 여주인공으로 백지영과 엄정화가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기사.▶ 헉! 레즈비언 엄정화(일간스포츠 10.22)-> 신인가수 H의 데뷔 앨범 ‘잊었니’ 뮤직비디오에서 레즈비언역으로 등장.이밖에 극중 배역이나 노래의 가사, 직업상 관련된 일 등이 실제 생활에 전이된 사례..PAGE:5충격고백 효리‘절도’일간스포츠 10.14헤드라인은…-> 이효리가 충격고백 ‘절도’를 했다는 자극적인 단어로 이목을 끌며 사진에서의 목걸이가 관련된 목걸이 인것처럼 나타나고 있다.기사내용은…-> 이효리가 어릴 적 어머니의 금목걸이를 가져다팔았다는 내용.모녀간에는 절도죄가 성립될 수 없다...PAGE:6▶ ‘앗! 이영애 감금’(일간스포츠 10. 28)-> 사극드라마 ‘대장금’에 출연중인 이영애가촬영장에서 팬들에 둘러싸여 인파를 뚫지 못한상황을 이영애의 인기와 대비하여 보도한 글.(감금-가두어서 신체의 자유를 속박함.)▶ 신이, 욕 때문에 쪽박 찰 뻔(일간스포츠 10. 28)->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 조연을 맡은 신이의 억양때문에 욕이 너무 리얼하게 되어 ‘삐리리’ 처리를했다는 내용.(쪽박차다- 살림이 결단 나서 거지 신세가 되다.)이밖에 부적절한 단어가 사용된 다른 사례들..PAGE:7왕따고백… 효리 당당화법10.06 스포츠투데이헤드라인은…-> 이효리가 왕따를 당했다는 내용이 핵심으로 내세워져 있고 본문 기사도 이효리가 왕따를 당한 것에 대해서 쓰였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하게 된다.기사내용은…-> 효리가 왕따고백을 했다는 내용이 한 줄있기는 하지만 기사의 핵심은 입담좋은 연예인 6명에 관한 기사이며 6명 모두 동등하게다루어졌다...PAGE:8헤드라인은…-> 문소리가 ‘키 큰 남자를 좋아하는 일반적인 여자들과 달리 키 작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내용이거나 좀 더 주제를 넓혀 이상형에 관한, 배우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회과학| 2003.11.21| 11페이지| 1,000원| 조회(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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